<푸딩과 호박주스>, 세이코
- 계간 성홍
- 2022년 9월 23일
- 5분 분량
오랜만에 돌아온 호그와트성의 공기는 여전히 싸늘했다.
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회포를 푸는 틈을 비집고 홍중이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쳐갔다. 두리번거리는 모양새가 누가 봐도 누군가를 애타게 찾아다니는 그것이었다. 잠시 멈춰선 홍중이 제 목을 옥죄는 푸른빛 넥타이를 손으로 잡고 느슨하게 풀어냈다. 초조해질 때마다 저도 모르게 나오는 홍중의 버릇이었다.
한참을 걷고 또 걷던 홍중의 발걸음이 후플푸프 기숙사 입구 근처에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갑자기 제 손목을 홱 잡아채는 손길에 몸이 젖혀지나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누군가의 품에 쿵 하고 부딪히는 것이 느껴졌다. 충격에 머리를 도리도리 털며 고개를 들었더니, 그토록 찾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미안한지 눈썹을 잔뜩 늘어뜨리고서.
“미안. 너무 세게 잡아당겼나보다.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너 래번클로 학생회장 됐다며. 축하해.”
그릇에 반쯤 고개를 처박고 푸딩을 해치우는 데 여념이 없던 홍중이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 어, 어어. 고마워. 어버버대는 홍중의 입가에 묻은 푸딩 자국을 보고 성화가 속으로 조용히 키득대며 손에 든 샌드위치를 한 입 와앙 베어 물었다.
“소문이 참 빠르네. 언제 거기까지 났대.”
“척하면 척이지. 래번클로 헤드보이 하면 김홍중 말고 또 누가 있어.”
“그러는 너도 후플푸프 헤드보이면서.”
“어, 알고 있으면서 지금껏 모르는 척 했겠다?”
“그러게. 소문이란 게 빠르더라. 그리고 네 가슴팍에 달린 게 하도 자기주장이 강해서 말이지.”
아, 이거. 성화가 제 왼쪽 가슴팍으로 시선을 던졌다. 로브 위에 달린, ‘HEAD BOY’라고 적힌 조그마한 노란색 배지. 그리고 푸딩을 바닥까지 박박 긁어먹고 있는 홍중의 가슴팍에 달린 파란 배지에도 자연스레 시선을 두었다. 7학년 중에서도 우수한 학업 성취와 뛰어난 명성, 근면 성실한 행실을 가진 학생만이 그 후보가 될 수 있다는 각 기숙사의 학생회장, 혹은 헤드보이·걸은 뭇 기숙사생이 우러러보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각종 특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었고. 예를 들어 5층에 있는 반장 욕실을 쓸 수 있다든지.
“우리가 어떻게 학생회장까지 된 거냐 진심. 호그와트의 10대 미스터리 아니냐.”
푸딩을 다 긁어 먹고 잔디밭 위에 대충 벌러덩 드러누운 홍중의 말에 대략 동의한다는 의미로 성화가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같은 한국계라는 이유로 기숙사가 달랐음에도 입학 당시부터 급격히 친해진 성화와 홍중은 ‘조용한 말썽쟁이 듀오’로 유명하다면 유명했다. 성화의 남다른 행동력과 홍중의 재빠른 잔머리로 학교 구석구석을 헤집어 놓는데, 정말 교묘하게도 교수들이나 수위의 감시 사각지대에서만 일어난 일이라 감점을 번번이 피해갔기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어쨌든 그것도 저학년 때까지의 이야기였고, 고학년 때부터는 대외적으로 행실 방정한 학생들을 연기하기 시작했던 것이 이번 학생회장 지명의 원인이 아닌가, 둘은 제멋대로 넘겨짚고 있었다.
“야, 기억 나냐? 3학년 때였나, 우리 기숙사 옆에 주방에서 호박주스 잔뜩 털어가지고 왔던 거. 그때 너네 반장한테 딱 걸렸는데 봐달라고 싹싹 빌면서 호박주스 조금 나눠주는 걸로 퉁쳤잖아.”
“당연히 기억나지. 암튼 우리 반장이 빡빡한 걸로 유명하긴 했어. 아, 갑자기 호박주스 마시고 싶다.”
“그래서 이 형님이 준비했지.”
하면서 성화가 주머니에서 꺼내든 것은 영롱한 주황빛을 뽐내고 있는 두 병의 호박주스. 홍중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는가 싶더니 이내 환한 미소로 번져갔다. 자연스럽게 주스병을 가져가려던 홍중의 손길을 성화가 어렵지 않게 슥 피하자 홍중이 헛손질한 꼴이 되었다. 주세요, 해야지. 성화는 꼭 이렇게 장난조로 제가 형 노릇하는 것을 즐기곤 했다. 그러면 홍중은 또 기가 차하면서도 고분고분 따르고 마는 것이었다. 주떼여. 시키지도 않았는데 잘도 혀짧은 소리까지 해댔다. 참 잘했어요. 머리를 헤집다시피 쓰다듬어주고는 성화가 홍중 몫의 주스를 건넸다. 꿀꺽꿀꺽, 한 번에 반이나 비우고는 홍중이 카아, 하는 소리를 냈다. 이거거든.
“그렇게 맛있어?”
“어, 엄청. 누구누구가 가져다 줘서 그런가 더더욱.”
성화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제 몫의 호박주스를 한 모금 머금었다. 수업이 끝난 후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9월 초의 서늘한 바람을 타고 저만치서 들려왔다. 어디선가 격투 연습이라도 하는지 간헐적으로 환호 소리가 섞여 들려오기도 했다. 둘이 있는 곳은 그런 소음과는 다소 격리된, 이를테면 둘만의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너 N.E.W.T 시험 볼 거야? 내년이잖아.”
다음 모금을 들이켜려던 홍중이 일순 멈칫했다. 도로 호박주스 병을 내려놓은 홍중이 공중에 시선을 둔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O.W.L 시험과는 달리 N.E.W.T 시험은 딱히 필수는 아니었다. 마법부에 지망할 생각이 없다면 시험을 안 보면 그만이었다. 확실히 호그와트 학생 대다수가 마법부에 들어가는 편이긴 하지만, 시험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는 선배들도 적지 않다고 들었고. 그렇지만.
“너는 어떡할 건데.”
물음을 물음으로 받은 형국이긴 했다. 그럼에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 물음을 물음으로 되돌려 받게 된 성화가 뒤로 비스듬히 반쯤 눕더니 허공을 응시한 채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무언가에 집중할 때의 버릇이었다.
“난 아마 볼 거 같긴 해.”
잠시 후에 내놓은 대답. 홍중이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인지, 납득인지, 아니면 동조인지 알 수 없는 반응. 성화가 그런 홍중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은 호박주스를 단번에 들이킨 홍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에 붙은 흙과 잔디를 툭툭 털었다. 우리 도서관 가자. 첫날부터 숙제를 잔뜩 내주시지 뭐야.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앞서서 걷는 홍중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성화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탈탈 털었다. 남은 호박주스 병을 대충 주머니에 찔러 넣고 서둘러 홍중의 뒤를 따랐다.
“야, 김홍중. 일어나. 곧 저녁 시간이야.”
어느덧 책을 베개 삼아 곤히 잠들어 버린 홍중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인들 홍중은 미동도 없었다. 예정대로 숙제를 열심히 하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N.E.W.T 관련 책을 잔뜩 빌려다가 이것저것 읽어보는가 싶더니 정신 차리고 보니 저렇게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몇 번 어깨를 흔들자 이내 홍중이 눈을 떴다. 하품을 크게 하더니 기지개를 쭈욱 켜고는 성화에게 지금 몇 시야, 묻는다. 7시 반 거의 다 됐어. 이제 연회장 가자. 저녁 시간이야. 제 몫의 책과 숙제거리들을 챙기고는 다시 한 번 기지개를 요란하게 켜고서 홍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화도 그 뒤를 잠자코 따랐다.
도서관을 나와 움직이는 계단과 복도를 지나는 길에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곧 저녁시간이었고 저녁시간에는 필연적으로 연회장에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인즉슨 온갖 학생들을 좋든 싫든 다 만나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이 홍중, 헤드 보이 됐다며. 축하해. 성화, 내일 퀴디치 연습 잊어버리면 안 돼! 같은 말을 둘은 적당히 대꾸하며 지나쳤다.
둘의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주변의 이야기에 의하면 둘에게서는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카리스마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아직 임기 둘째 날인데도 학생회장으로서의 신임은 두터운 편이었다. 그 까다롭기로 유명한 래번클로 기숙사의 암호 해독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던가, 그다지 괄목할만한 성적을 내지 못하던 후플푸프 퀴디치 팀을 단번에 다크호스로 이끄는 등 활약상도 엄청났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둘에게 어떤 단단한 벽이 느껴진다고도 했다. 둘에게 어느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지 못하게 만드는, 그러한 벽이. 그리고 그 벽은 아마도 둘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친밀성 때문일 거라고도. 분명 생긴 것은 판이하게 다른데도, 마치 쌍둥이인양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다고도.
“아직도 N.E.W.T 때문에 고민해?”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들어온 성화의 물음. 홍중은 딱히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냥 좀 알아보려고. 미리 알아둬서 나쁠 건 없잖아. 성화가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지. 그 말 이후로 둘 사이에선 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어느덧 연회장 근처였다.
“야, 우리 크리스마스 때 같이 있을래?”
닭다리를 뜯어먹는 데 여념이 없던 성화가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 너는 무슨 크리스마스 얘기를 9월부터 미리 하고 있냐는 표정이었다. 성화의 의중을 읽었는지 홍중이 조금 머쓱해진 눈치로 스푼을 마저 들어 수프를 한 입 더 떠먹었다. 아니 근데.
“겨울 방학 때 본가 안 간다고 미리 알리려면 지금 정해야 한다니까. 안 그럼 가족들이 서운해 할지도 모르잖아.”
“그거야 그런데, 굳이 겨울 방학 때 집에 안 가겠다는 이유가 뭐냐구.”
“그건...”
홍중이 답지 않게 잠시 뜸을 들였다. 대부분의 경우 직설적으로 시원하게 얘기하는 편인 홍중이 이렇게까지 우물쭈물 하는 건 잘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홍중이 뭐라고 웅얼대는 소리가 났지만, 성화가 미처 알아듣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
“우리, 한 번도 크리스마스 때 같이 있었던 적 없었다구...”
성화가 눈을 끔벅였다. 난 또. 주먹을 입가에 대고 짐짓 헛기침인 양 웃음을 터뜨렸다. 시선을 스윽 위쪽으로 돌리니 한껏 부루퉁해져 있는 홍중의 얼굴이 보였다. 어금니를 앙 물고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보지만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걸 어쩌지 못하고 결국 푸슷 웃고 말았다.
“아, 웃지 말라고. 나 진짜 진지해.”
“아니, 아는데. 난 그런 뜻이 아니고, 아핫.”
뜯던 닭다리까지 내려놓고 터진 웃음보를 어쩌지 못하는 성화의 모습을 보고 잔뜩 토라진 홍중이 애먼 수프만 깨작거렸다. 그래, 그렇게 하자. 이내 떨어진 성화의 수락을 깨달은 것도 반 박자 늦은 일.
“ㅇ, 왜?”
“왜긴, 네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니까.”
“고작 그거 하나 때문에?”
“고작이라니. 그래서 같이 있고 싶은 거야, 아닌 거야. 그것만 말해.”
“아, 당연히 같이 있고 싶지. 말해서 뭐해.”
“그럼 됐어. 내일 집에다가 편지 보내서 얘기 할게. 너도 그렇게 해.”
홍중의 얼굴에 이내 다시 화색이 돌았다. 붕붕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열심히 수프를 뜨는 위로 반짝반짝 연회장의 조명이 빛나고 있었다. 곧 찾아올 계절의 변화를 예고하며.
- 작가의 말
가을과 겨울의 성홍을 생각하니 문득 언젠가 호그와트 교복을 입었던 둘의 모습이 떠오르더라구요. 그래서 해포 세계관 덕후답게 둘을 호그와트 성에 가두어 보았습니다. 댄스 동아리 부장이었던데다 한 그룹의 캡틴인 둘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마 헤드보이(기숙사 학생회장)인 것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둘에게 감히 헤드보이 설정을 주었고요.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성화는 후플푸프, 홍중이는 래번클로입니다. 둘에게 정말 찰떡인 기숙사라고 생각해요.
글 쓴 시간보다 고증에 들인 시간이 더 긴 것 같습니다. 그래도 구글링으로 안 되는 건 없더라고요. ‘호그와트 학생들은 보통 무엇을 먹나요?’, ‘호그와트 학생들은 쉬는 시간에 무엇을 하나요?’ 같은 질문에 성실하게 답해주신 해덕 여러분께 치얼스. 그래도 틀린 부분이 있다면 부디 애교로 넘어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팬픽에 어느 정도의 선동과 날조는 필수 요소잖아요(?)
아, 참고로 홍중이가 먹고 있던 푸딩은 아마 우리가 아는 그 커스터드 푸딩은 아닐 거예요. 찾아보니 영국식 푸딩은 많이... 다르더라구요. 하지만 역시 팬픽에 선동과 날조는(이하생략)
읽어주신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관계자 분들께도 정말 큰 신세를 졌습니다. 별 일 없다면 겨울호에서도 뵙겠습니다.
풍성한 가을 보내시길 바라며, 세이코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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