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콕콕>, 랙커
- 계간 성홍
- 2022년 3월 21일
- 9분 분량
새학년 새학기라고 해봤자 졸전 코 앞에 둔 4학년에게 설렘 따위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물론 그것은 어느덧 벚꽃이 만개할 작정으로 꽃망울을 한껏 부풀린 시기가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홍중은 어깨에 걸친 큼직한 원단 가방을 고쳐매고 교내를 도는 셔틀버스를 기다린다. 한 손으로 뒷주머니에 꽂혀있던 핸드폰을 힘겹게 꺼내 일정을 체크했다. 새벽시장 돌아서 겨우 구해온 독특한 패턴의 원단이 교수의 컨펌을 통과하지 못하면 내일도 새벽시장 행일 것이었다. 몰려오는 피곤함에 손바닥으로 열감이 오른 눈가를 꾹꾹 눌러댔다. 캠퍼스 부지가 유독 가파른 탓에 지구력과 체력을 고루고루 땅바닥에 파묻어버린지 오래인 미대생 김홍중은 감히 언덕 꼭대기에 자리잡은 미대 건물까지 걸어올라갈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 생각보다 늦어지는 셔틀버스에 슬슬 신경질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괜히 땅바닥을 툭툭 걷어차며 자잘한 돌멩이들이 통통 튀어 멀어지는 모습을 노려보던 홍중은 제 앞에 멈춰선 하늘색 스쿠터에 고개를 들었다.
"형, 타세요. 저 미대 건물 가야돼요."
"너 미대 아니잖아."
"이번에 넣은 교양수업 하나 미대에서 한다니까. 제가 저번에 한 말 안 들었죠?"
"들었거든."
"그래요. 암튼 빨리 타요. 곧 수업 아니에요?"
그래. 셔틀버스는 오다가 사고라도 난 건지 오분 간격으로 오던 게 십오분이 넘어 이십분 가까이 오질 않고 있었고, 성화의 말대로 곧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었다. 더 나은 선택지가 없어보인다는 결론을 내고서야 홍중은 성화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박성화 덩치에 안 맞게 꽤나 깜찍한 사이즈의 스쿠터는 일단 올라타면 운전하는 걔 등짝에 바짝 붙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썩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걔한테서 나는 뽀송뽀송한 비누향까지 너무 잘 맡아져서 곤란했다. 그렇다고 부피가 커다란 원단 가방을 앞으로 낑겨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홍중은 체념하고 성화의 허리춤을 대충 부여잡았다. 그마저도 등짝이며 어깨며 짐이 가득한 탓인지 출발하자마자 몸이 뒤로 쏠리는 탓에 놀라 본능적으로 허리를 끌어안을 수 밖에 없긴 했지만. 아무튼. 마른 것 같으면서도 뼈대는 굵어 꽤나 넓은 등판에 설렌 것은 절대 아니었다. 절대로.
성화 덕분에 지각을 면한 홍중은 다행히 그 다음 날에도 피곤한 몸뚱이를 이끌고 새벽원단시장에 갈 일은 생기지 않았다. 이 정도면 김홍중 전용자리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닌 미대 건물 구석 벤치에 길게 드러누운 그는 불 붙인 담배를 물고선 재를 털어버릴 생각도 않고 눈만 내리감았다. 교수 컨펌 받았으니 며칠간 샘플 만드는 데에 집중해야할 것이었다. 그리고 예견된 야작에 실시간으로 피곤함이 배가 되는 기분이 든 홍중은 이젠 아예 두 손마저 가지런히 모아 배 위에 올려놓고선 가만히 누워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꽤 따스해진 햇살이 내려앉은 눈꺼풀 위를 뜨끈하게 데우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얼굴에 재 떨어지겠다."
위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입에 물려있던 담배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천천히 눈을 뜨면 벤치 앞에 볼품없는 포즈로 쭈그려 앉은 채 제 입에 물려있던 담배를 손에 쥐고 있는 성화의 얼굴이 보인다.
"... 내놔."
"적당히 좀 피세요. 꼴초형님."
"졸전 할 일 없는 놈은 닥쳐."
"내가 담뱃재도 털어줬는데 야박하네."
"넌 수업 없니?"
"끝나고 나온거거든요. 다 알면서 괜히 물어봐."
컨펌은 받았어요? 태연하게 물어보며 홍중의 입에 물려있던 담배를 그대로 제 입술 사이에 끼워문다. 나른하기도 하고 몸을 일으키기 귀찮기도 해서 드러누운 채, 반쯤 풀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홍중의 눈이 두 배는 커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야, 그걸 왜 니가...!"
"어우, 형 센 것도 피네... 쿨럭, 기침 겁나 나와."
"아니 그러니까 내가 피던 걸 왜, 이리 내놔."
"싫은드요."
박성화는 담배 꼬나물어 다 안 벌어지는 입술을 하고선 답한다. 귓바퀴에 화다닥 열이 오르는 기분에 홍중은 피어싱을 만지작거리는 척하며 제 한쪽 귀를 감쌌다. 모르는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입고 있던 셔츠의 가슴주머니에 넣어둔 담배곽을 꺼내 새 담배를 꺼내려하자, 성화는 그마저도 제 손으로 감싸 쥐더니 홍중의 손에 있던 것을 그대로 제 주머니로 가져간다. 순식간에 갖고 있던 모든 담배를 빼앗긴 홍중이 얼이 빠진 얼굴을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선 성화를 쳐다보았다. 거의 다 타 얼마 남지 않은 담배를 (정확히는 홍중이 실컷 물고있느라 필터가 축축해졌을 그것을) 한모금 깊게 빨아들이고선 담뱃불을 지져끄는 모습까지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저 갈게요- 하는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담배 내놔."
"오늘만 좀 참아봐요. 안 그럼 이거 한 갑 오늘 안에 다 필거잖아. 진짜 몸 상한다니까요?"
니가 뭔데. 못 참고 날선 목소리가 툭 튀어나가도 성화는 개의치 않는다. 암튼 이건 압수- 그러고선.
홍중의 쭉 뻗어 빼쪽한 코 끝을 검지손가락으로 톡톡.
갈게요. 딱 두 번 두드리고선 사라진다.
늘 그랬듯이.
그리고 홍중은 늘 그랬듯이 또 그 손길에 다잡은 마음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고선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또, 졌다. 박성화에게.
*****
마당발로 소문난 정우영은 홍중이 3학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들어간 사진동아리에서 만난 미디어과 녀석이었다. 상냥하게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편인 홍중에게 패디과 사람들 너무 멋있다며 쉴새없이 말을 붙이더니 기어코 김홍중의 인간관계 바운더리를 뚫고 들어왔다. 일단 만났다하면 홍중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정신없이 말을 붙이는 것과는 다르게 연락은 홍중이 딱 귀찮아하지 않을 정도로만 하며 꽤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하게 된 녀석은 어느 날 갑자기 체교과 (대체 체교과는 어떻게 알고 있는건지) 박성화를 제게 소개시켜주었다. 둘이 정반대인데 어쩐지 잘 맞을 것 같다면서. 그 말에 홍중은 의구심을 품었다. 정반대인데 잘 맞을 수가 있나.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데? 아무튼 그냥 어쩐지 그럴 것 같다며 반쯤은 우영의 우격다짐으로 만난 성화는 실기 과제에 쩔어 어느덧 눈에 피곤함을 덕지덕지 붙이고 사는 저와는 다르게 반짝이는 눈을 가진 애였다. 새카만 눈동자 탓인지 더욱 반짝여 보이는 눈. 그런 눈을 하고서는 홍중에게 잘도 형이라 부르며 사근사근하게 굴곤 했다. 어색하고 낯을 가리느라 틱틱거리는 저임에도 불구하고.
정반대. 취향도, 식탐도, 성격도, 생각도. 원래 같았으면 이렇게나 정반대인 사람을 앞에 두고서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홍중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말이 특강이라도 되는 양 한껏 귀 기울여 듣는 성화에게는 유독 마음이 갔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데도 걔는 그저 저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것을 좋아하는 홍중을 신기해할 뿐,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미간을 찌푸리는 일이 없었다. 우영처럼 먼저 치대지는 않지만, 선을 지키면서도 제 바운더리 안에 들어와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걸 그냥 모른 체 하기엔 홍중은 생각보다 정이 많았다. 그리고 그 정이 무서운 것이란 것을 뒤늦게 깨달았지.
마음 가기 시작하더니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건 순식간이라. 일주일 정도 심각하게 혼자서 고민하던 홍중은 성화를 향한 제 마음의 종류가 무엇인지, 꽤나 싱겁게 결정내렸다. 그래. 이건 쉽게 접어질 마음이 아니구나. 그래, 결국 그렇게 됐구나. 그냥 그렇게 될 일이었구나. 일주일 동안 고통스러워하며 이게 뭘까 고민하던 것과는 다르게 부정하던 모든 것을 인정하는 순간, 수긍은 쉬웠다. 마음은 절대 쉽지 않았지만. 동그랗게 뜬 눈을 볼 때마다 떨리고 설레는 마음을 모르는 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천성이 다정한 녀석이 저에게 베푸는 친절과 관심에 속절없이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홍중은 먼저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왜냐고? 겁이 나니까. 잃기 싫으니까. 살면서 누군가를 그저 옆에라도 두고 싶은 마음이 어떤 건지 깨닫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담배 그거 그냥 편의점 들릴 때 새로 한 갑 사면 되는 걸 오늘만 좀 참아보라는 걔 말에 다리 달달 떨면서도 꾹 참았다. 원단을 들고 마네킹에 드레이핑을 하면서도 담배 생각이 간절했으나, 홍중은 마음 한 켠에서 몽글몽글 비집고 들어오는 성화의 얼굴에 편의점에 들어가서도 한참을 갈등하다 결국 포기하고 막대사탕 한움큼만 사들고 나왔더란다. 방금 전까지 라임 맛이 가득하던 입 안에 딸기 맛 막대사탕이 들어찼다. 뻐근한 어깨를 휘휘 돌리다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까까지만 해도 밝던 밖이 어느 새 어둑어둑해진 것이 보인다. 저녁도 거른 채 작업하던 것을 멈추고 작업실을 나서기로 한다. 밀려오는 피로감에 겨우 반쯤 뜬 눈을 하고서 미대 건물을 빠져나왔다. 후문 쪽에 위치한 제 자취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뒤쪽에서부터 들려오는 스쿠터 배기음이 어느 순간부터 앞질러갈 생각은 않고 몇 분째 뒤에서 저를 따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어 홍중은 급하게 고개를 휙 돌렸다.
"악!"
"야... 너... 진짜이씨... 죽고 싶냐고오..."
"아까 불렀는데 대답 안 하길래 일부러 무시한 줄 알았더니."
"내가 언제 널 무시했다고! 그것보다 진짜 개놀랬잖아... 죽고 싶어? 어?"
"아 미안해요. 나는 내가 따라가는 거 형이 알고 있는 줄 알았지."
눈에 익은 하늘색 스쿠터를 바닥에 눕혀놓은 채로 혼자 쫄아서 주저앉아버린 홍중에게 후다닥 뛰어온 꼴이 좀 웃겼다. 그 짧은 새에 납치라도 당하는 거 아닌가 하고 오만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친 저도 웃기긴 했지만. 보도블럭 위에 털퍽 주저앉아버린 애나 그 앞에 쭈그려 앉아서 여기저기 살펴보는 애나 아무튼 남자 둘이 아무도 없는 길바닥에서 그러고 있는 꼴은 좀 꼴사나웠다. 습관적으로 담배를 넣어두곤 하던 셔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담배곽 대신 막대사탕이 손에 잡히는 것을 확인한 홍중은 떨리는 손을 하고서 막대사탕을 꺼내들었다.
"담배 진짜 안 샀어요?"
"니가 그것도 못 참냐며."
"아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 하루만 좀 참아보라고 했지."
"그게 그거지."
"줘봐요. 까줄게. 딸기 맛이네."
껍질이 잘 까지지 않아 낑낑대는 홍중을 보던 성화는 그 손에 들려있던 막대사탕을 가져와 대신 까주었다. 껍질이 벗겨진 막대사탕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뻗은 손이 무색하게 성화는 살짝 벌어진 홍중의 입 앞에 막대사탕을 갖다댄다. 입술 새로 달달한 향이 느껴졌다. 허공에서 멈춰있던 손을 들어 막대 부분을 잡으려고 하자, 박성화는 그 손을 잡아내려버린다. 뭐 어쩌고 싶은건데. 홍중은 성화의 눈을 마주보았다. 속을 알 수가 없는 눈. 그런 눈을 하고선 가만 쳐다보고 있는 걔의 시선을 결국 버티지 못하고 홍중은 제 입 앞에 대어진 막대사탕을 와압 물었다. 그제야 다시 반짝이는 눈동자를 한 걔는 여지껏 맨바닥에 주저앉아있는 홍중의 양 손을 잡아 일으켜세운다.
"형."
"왜."
"담배 좀 줄여요."
"... 그래서 오늘 하루종일 사탕 물고 다녔거든? 당뇨 올 것 같아."
"형."
"왜 또."
"제 말 왜 잘 들어줘요?"
"뭐?"
"형 나 되게 귀찮아 하면서 내 말은 잘 들어주더라."
손바닥 까졌다. 약 바르러 가요. 성화는 홍중의 대답을 듣지 않았다. 저만치 눕혀둔 스쿠터를 제대로 세워놓고선 홍중을 끌고와 뒷좌석에 앉히면서도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놀라 넘어지면서 떨어트린 홍중의 가방까지 챙겨온 성화는 출발할 생각은 않고 홍중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얘 진짜 오늘 왜 이러지. 홍중은 그나마 하나 켜져있는 가로등마저 썩 밝지 않은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다 들키고 말았을테니. 저를 쳐다보는 눈길을 애써 무시하며 입 안에 들어찬 막대사탕을 도록도록 굴린다. 제 말을 왜 잘 들어주냐는 걔의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어서 더욱 열심히 걔의 눈을 피해서 시선을 돌렸다. 왜 잘 듣긴. 좋아하니까 그렇지. 그렇게 답할 수가 없어서, 홍중은 자꾸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성화는 씨익 웃더니 홍중의 코 끝을 또, 두 번. 톡톡. 두드리고서야 스쿠터에 올라탔다. 스쿠터가 출발하고, 홍중은 답지 않게 성화의 등에 온 몸을 기대었다. 너도 좀 당해봐라 하는 마음으로. 등에 얼굴을 기대고 있으니 딸기 향 사이로 비누향이 났다.
제 자취방으로 갈 생각이었던 홍중은, 집에 구급상자는 커녕 밴드하나 없다는 사실을 들키는 탓에 그대로 성화의 자취방까지 끌려오고 말았다. 처음 와보는 건 아니었지만, 올 때마다 어색하다. 여기저기 옷가지며 짐들이 널브러진 제 집과는 다르게 현관부터 깔끔하게 정돈된 성화의 자취방은 제 주인처럼 뽀송한 냄새까지 나곤 했다. 손바닥이 까진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약 바르러 가자는 말을 듣자마자 따끔거리기 시작하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소파에 홍중을 앉혀둔 성화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더니 작은 구급상자를 꺼내왔다.
"집에 구급상자 있는 애 처음 봐."
"형만 이런 거 안 키우는 거예요."
"아니거든."
"손 줘봐요."
"별로 안 아픈데."
"손으로 작업하는 사람이 상처가 났으면 바로 치료를 해야죠."
"... 따가워."
"좀만 참아요."
밝은 곳에서 보니 꽤나 많이 까져있는 손바닥에 성화는 제가 다친 것마냥 인상을 찌푸리더니 집중해서 소독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얜 다른 애들한테도 이렇게 굴겠지. 조금 침울해지려는 기분에 얼마 남지 않은 막대사탕을 와드득 깨물었다. 녹아서 작아진 사탕은 입 안에서 쉽게 부서진다. 계속 냅둬서 마음이 작아지면, 그것도 이렇게 쉽게 부서지지 않을까. 아직은... 깨물어서 없애버리기엔 마음이 너무 크니까. 남아있는 막대를 물고 있으면 어느새 약까지 다 발라 신중하게 밴드를 붙이고 있는 성화의 머리꼭지가 보인다.
다 됐다- 하고 고개를 들어 웃어보이는 얼굴에 홍중은 제 마음이 작아지기는 커녕, 더 커지는 것을 느끼고 만다. 울컥하는 기분에 입술을 일자로 앙 다물자 성화는 홍중의 입술 사이에 껴있는 막대를 빼가더니 또 코 끝을 톡톡, 건드린다.
"너 그것 좀 하지마."
"어떤 거요?"
"코 톡톡 치는 거 그것 좀 하지 말라고."
"어... 기분 나빴어요? 미안해요. 나는 그냥 형 귀여워서..."
"너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니면서 그러지 좀 마."
"... 근데 아무 사이도 아닌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친한 형 동생인데. 왜 그렇게 말해요?"
"친한 형 동생... 야, 그냥 친한 형 동생 사이는 손바닥 까졌다고 집에 데려와서 치료 안 해줘. 자빠졌냐고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왜 갑자기 심술부려요?"
"니가, 니가 아무한테나 다 다정하게 구니까, 자꾸... 나 집에 갈래."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향하면 잡지는 않고 졸졸 쫓아온다. 짜증나. 하마터면 자꾸 착각한다고, 헷갈린다고 말해버릴 뻔했다. 걔 손에 들려있는 제 가방을 뺏어들고 신발을 구겨신기 시작하는데 뒤에서 한 마디를 뱉는다.
"근데 나 아무한테나 다정한 적 없어요."
"따라오지 마."
쿵쾅대며 걔의 자취방에서 나와 제 자취방으로 향하는 내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가라앉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무한테나 다정한 적 없다니. 거짓말. 누구한테나 다 잘 웃어주고 상냥하게 대하면서. 난 그냥 그 중에 한 명일 뿐이면서. 집에 도착해 매트리스 위로 다이빙한다.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않고 한참 누워있던 홍중은 양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얼굴에 닿는 밴드의 감촉에 기어코 찔끔 새어나오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
"어우. 무슨 좀비가 따로 없네. 형, 잠은 자요?"
"시비걸거면 꺼져."
"신경 끌 수 있는 비주얼이 아닌데... 거울은 봤어요?"
"닥쳐 좀... 줄 것만 빨리 주고 가..."
"이거 저번에 부탁했던 필름 인화한거요."
"감사."
"근데, 형 혹시 성화 형이랑 싸웠어요?"
"... 아니."
"싸웠네. 왜 싸웠대? 틱틱거려도 잘 지내더니."
"안 싸웠다고."
"네네, 안 싸웠다 칩시다. 근데 성화 형이 엄청 찾아요. 연락은 좀 받으시지. 나도 귀찮거든요."
"... 너한테 연락해?"
"그 형이 형이랑 연락 안 되면 연락할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요. 나밖에 없지."
"아 몰라. 너 가, 이제."
어차피 빨리 가봐야한다며 금방 사라진 우영의 말을 곱씹던 홍중은 때맞춰 귀신같이 울리는 전화벨의 주인공이 성화인 것을 확인하고선 화면만 노려본다. 한참 그러고 있던 홍중은 결국 벨소리가 끊기기 직전에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밥 먹었어요?
"... 아니."
-밥은 먹으면서 작업을 해야죠. 샌드위치 사갈게요.
"오지마."
-싫어요.
"오지말라고."
-네네, 한 십분 뒤 도착해요.
나이는 쟤가 더 어린데, 생각은 제가 더 어린 것이 틀림 없었다. 그렇게 심술을 부리고 가버렸는데도 먼저 연락해 화해의 사인을 보내는 것은 박성화다. 이런 점마저 좋으면서 또 싫었다. 초등학생처럼 좋아하는 애한테 못되게 구는 저에 비해, 성화는 그런 저도 형이랍시고 챙긴다. 십분 후면 도착한다고 했으니, 홍중은 제 전용자리로 점찍어둔 벤치로 향했다.
봄이 점점 다가오는 것이 실감될 정도로 눈에 띄게 날씨가 따뜻해진다 싶더니, 벤치가 있는 자리에 있는 커다란 벚나무가 꽃을 피웠다. 조금 일찍 폈네. 벤치에 걸터앉아 파란 하늘과 활짝 핀 벚꽃을 구경하던 홍중은 시야에 들어오는 길쭉한 손에 치켜들고 있던 고개를 내린다. 톡톡. 이것 좀 하지 말라니까. 코 끝을 두어번 건드리는 손길에 콧잔등을 찡긋거리면 예쁘게도 웃어보이는 성화의 얼굴이 보인다.
"샌드위치부터 먹어요. 다 먹고 나서 얘기 좀 하고."
"... 잘 먹을게."
"네에."
나란히 벤치에 앉아 벚나무를 바라보며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꽁해진 사이 풀겠다고 늘 먼저 다가오는 성화에게 더 이상 못 되게 굴 성정이 못 되었다. 얌전히 손에 쥔 샌드위치를 먹고 있으면 목 막히지 말라고 음료를 쥐어주는 성화가 있다. 다정이 사람이 되면 박성화가 아닐까. 대충 먹을만큼 먹고 뚱한 표정으로 앞만 보고 있으면 냅킨을 꺼내더니 제 턱을 살짝 쥐고 입가를 털어준다. 얘의 다정은 지독하게 달아서... 그만 맛보고 싶은데도 자꾸 중독되는 건가봐.
"그래서. 기분은 좀 어때요."
"별로야."
"내가 샌드위치까지 사왔는데?"
"... 별로야."
"형."
"왜."
"초딩이에요?"
"... 그런가봐. 너 좋아하는데 자꾸 틱틱거리는 거 보면."
"... 와. 이렇게 인정한다고?"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빨개진 귀끝까지 가려지진 않았을 것이다. 뒷통수에 닿은 큰 손이 퍼석해진 머리칼을 살살 쓸었다.
"그러니까 그냥 친한 형 동생 하고 싶으면 포기해. 난 글렀으니까."
"형은 안 좋은 버릇이 있어요."
"뭐. 말 안 예쁘게 하는 거?"
"아뇨. 제 말은 듣지도 않고 혼자 지레짐작하는 거요."
"안 들어도 뻔하니까 그런거지."
"아니거든요.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면서."
무슨 생각하는데. 무릎에 파묻었던 고개를 성화가 앉은 쪽으로 살짝 돌렸다. 다정한 애. 다정한 얼굴. 검지 손가락을 뻗어오길래 당연히 코 끝을 건드릴 줄 알았는데 손 끝이 닿은 곳은 입술이었다. 콕, 하고 살짝 건드린 채로 성화가 말을 이었다.
"이 답답이 형이 어떻게 하면 나랑 그냥 친한 형 동생 말고 다른 걸 해줄라나... 그런 생각?"
"... 그냥 친한 형 동생 말고 다른 거 뭐."
"다른 거 뭐 있을 것 같은데요?"
"나는... 너랑 안 보고 살기 싫어."
"그래서 시작도 안 해보려고 한 거예요? 완전 겁쟁이네."
"맞아. 나 겁쟁이야. 근데 그 정도로 너랑 떨어지기 싫어. 차라리 시작을 하기 싫을만큼."
"음... 근데 누가 그랬어요. 친구 사이에도 결국 끝은 있다고. 그럴거면 차라리 이것저것 해보고 싶었던 거 다 해볼 수 있는 사이가 더 낫지 않나."
그것도 무서우면 저 좀 더 기다릴게요. 제가 기다리는 거 하나는 좀 잘 하거든요. 홍중의 입술을 살살 쓸어보던 손은 다시 코 끝을 톡톡 건드리고선 떨어진다. 저 애의 뒤로 활짝 핀 벚꽃마저 한 번 믿어보는 게 어떻겠냐 말하는 것만 같아서 홍중은 킥킥, 웃음을 터트린다. 제 마음의 끝이 절벽으로 향하고 있던 게 아니라는 걸 깨닫자 살짝 울컥한 탓에 찔끔 새어나온 눈물 한 방울을 가리려는 웃음이기도 했다. 살짝 떨어져있던 몸을 훅 가까이 붙인 성화는 홍중의 입술에 제 입술을 살짝 맞댄다. 금세 떨어진 걔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한 번 쭉 피곤 홍중을 두고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끝나면 연락해요. 오늘도 기다릴게요."
그러나 홍중의 옆에 성화의 마음을 두고 간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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