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면조와 버터비어>, 세이코
- 계간 성홍
- 2022년 12월 22일
- 5분 분량
떠들썩하던 호그와트성에도 어느덧 적막이 찾아들었다.
겨울이 되어 짧은 방학을 맞은 학생들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하나 둘씩 학교를 떠나자, 여기가 그 요란법석하던 학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온통 고요한 공기만이 남았다. 그리고 드물게 학교를 떠나지 않은 몇몇 학생들도.
그 속에는 성화와 홍중도 있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여느 때처럼 집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발단은 지난 가을 연회장에서의 어느 대화였다. 홍중이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같이 있지 않겠냐는 제안을 성화에게 해온 것이었다. 단 한 번도 크리스마스 때 함께 있어본 적이 없다는 이유에 성화도 반쯤 선선히 그러마고 수락했고, 서로의 본가에 부엉이를 보내 이번 겨울 방학에는 학교에서 머물러도 된다는 허락을 얻어낸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7년이나 학교를 다녔는데 단 한 번도 겨울 방학 때 학교에 있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도 좀 이상한 듯싶긴 했다. 다른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겨울 방학 때는 맛있는 음식도 잔뜩 주고 나름 재미가 있다고 하던데. 어쨌거나 이번이 드디어 그 이야기를 제대로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인 셈이었다. 성화도 홍중도 나름 기대하고 있었다. 뭔들 기대가 안 되겠느냐마는.
겨울방학이라고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눈 내리는 연회장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때때로 서로의 기숙사 휴게실을 찾아가 책을 읽거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마법 체스를 두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본가에는 N.E.W.T 시험 준비로 이번에는 학교에서 조용히 공부하며 보내겠다는 말을 전해놨기에 몇 번인가 책을 펴보기도 했다. 문제는 정말로 펴보기만 했다는 거지만.
떠들썩하고 바쁘게 흘러만 가던 호그와트의 매일이 이렇게까지 고요하고 느릿해도 되나 싶어 초반에는 잘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이내 익숙해지니 오히려 방학이 끝나고 다들 돌아와서 다시 정신이 없어지면 조금 서운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적막에 휩싸인 호그와트에는 그만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졸업하기 직전에야 경험해보게 된 것이 다소 아쉬워질 정도로.
그렇게 착실히 하루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올해는 눈 안 오려나.”
툭 던진 홍중의 말에 약초학 책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성화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책에다가 깃펜을 갈무리 해놓고는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게. 오면 좋겠는데. 그런 말을 하자 홍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눈은커녕 바람 한 점 안 부는 흐린 날씨.
“사실 눈이 이미 오고 있긴 해. 연회장에.”
“그건 가짜 눈이잖아. 만지면 따뜻하고. 난 만졌을 때 축축하고 차가운 진짜 눈이 보고 싶다구.”
“그건 그렇지 또. 나도 굳이 따지자면 진짜 눈이 좋아.”
그러고는 또 각자의 책에 집중하는가 싶더니, 홍중이 얼마 안 가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날짜는 벌써 24일. 하루만 더 있으면 크리스마스였다. 가족들과 떨어져서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 그리고 성화와 함께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 이것이 함께 보내는 마지막 크리스마스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부디 그렇지는 않기를 내심 바라며 홍중은 애써 책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있으면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그 전까지 조금이라도 오늘 정해놓은 진도를 끝내놔야 했다.
“오늘 나눠준 에그노그 되게 맛있더라, 그치.”
연회장을 빠져나오며 성화가 퍽이나 만족스러운 듯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확실히,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라며 나눠준 에그노그는 정말로 맛이 괜찮았지. 홍중도 말없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숙사 통금 시간 전까지는 아직 여유가 조금 있었다. 오늘은 뭘 할까 하다가 후플푸프 기숙사 휴게실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익숙하게 체스판을 꺼내들었다. 오늘은 뭘 걸고 해볼까나. 왠지 들떠 보이는 성화를 보며 홍중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좀 살살 봐줘가면서 해. 어차피 맨날 네가 이기잖아.”
“승부의 세계란 원래 좀 잔혹한 맛도 있고 그런 거라고, 뭘 모르네.”
“잔혹한 맛 좋아하네 진짜...”
성화는 거침없이 밀고 들어가는 불도저 같은 승부사 타입이었다. 불물 안 가리고 모든 수단을 써서 이겨야만 성이 풀리는 편이었다. 반면 홍중은 먼 미래의 수까지 고민하다가 당장의 수를 놓치는 경향이 있는 편이었다. 그런 전략이 간혹 유효하게 먹혀서 성화의 허점을 찌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보통은 성화의 공격적인 플레이 스타일을 이겨내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런 점에서도 서로의 성격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것을 보며 주변에서는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그리고 그런 거의 정반대 성향의 둘이 정말 둘도 없는 사이라는 것도.
오늘도 어김없이 성화가 3점을 먼저 따내고는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홍중은 건너편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온 몸을 시무룩하게 축 늘어뜨린 채였다. 자, 한 대 맞으셔야죠. 울상이 된 홍중이 그럼에도 순순히 이마를 드러냈다. 성화가 손가락에 숨을 한 번 후 불어넣었다. 하나 둘, 딱. 경쾌하기까지 한 소리에 휴게실에 있던 학생 일동이 무심코 돌아봤을 정도였다. 이마를 관통하는 통증에 홍중은 제 머리를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기 바빴다. 미안, 많이 아팠나. 이번에 힘 조절 좀 실패하긴 했는데. 내심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성화를 별안간 장난스레 흘겨보며 홍중이 한 마디 날린다. 나 너랑 다시는 체스 안 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홍중을 보며 성화가 낄낄 웃더니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래번클로 기숙사 입구까지는 바래다주고 올 심산이었다.
일단 통금 시간이라 눕긴 했는데 오늘따라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이상하다. 굳이 따지자면 어릴 때 산타 할아버지를 마냥 기다리던 때의 기분과 비슷하달까. 하지만 지금은 산타 할아버지가 있다는 걸 딱히 믿지 않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이런 기분이 든다고? 이럴 때 홍중이는, 성화는 어떻게 잠에 들려고 할까. 이럴 때면 같은 기숙사가 아닌 것이 내심 아쉽기만 했다. 그래도 현실에 없는 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 한참을 뒤척이고 또 뒤척이다 어찌저찌 잠에 들긴 들었던 것 같다. 꿈도 없는 새까만 잠의 세계로.
마침내 맞이한 25일.
고대하고 고대하던 크리스마스 아침.
기숙사에 들이치는 햇살에 눈 비비며 몸을 일으킨 성화가 창밖을 살펴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눈. 눈이다. 창밖 풍경을 온통 새하얗게 물들인 눈. 성화의 얼굴에 경탄에 찬 웃음이 번져갔다.
한달음에 옷을 갈아입고 기숙사를 나섰다. 향하는 곳은 오직 하나. 부지런히 래번클로 기숙사가 있는 탑 쪽을 향해 걸어가다 그마저도 마음이 급해 이내 뛰기 시작한다. 얼른 만나서 이 기쁜 소식을 누구보다 먼저 전해주고 싶은데. 그나저나 래번클로 기숙사 비밀번호 풀기 꽤 까다로운데 어떻게 들어가서 이 잠꾸러기를 데리고 나오지, 하는 순간 복도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맞닥뜨리고는 뚝 멈춰서버린다. 어?
“와, 너 진짜 일찍 일어났네? 대단하다. 나도 나름 일찍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하면서 헤실헤실 해맑게 웃고 있는 홍중의 얼굴을 보자 성화는 그만 그 자리에 뚝 멈춰선 채로 벙쪄버리고 말았다. 거기에 쐐기를 박는 홍중의 한 마디.
“메리 크리스마스. 이 말을 드디어 해보네.”
풀썩.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성화와 홍중이 눈더미 위에 나란히 쓰러졌다.
그 이후 손을 맞잡고서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 일단 눈사람부터 만들기 시작한 둘은 그 이후 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를 즐기다 결국 격렬한 눈싸움을 시작하고 말았다. 한참을 주거니 받거나 하다가 끝이 보이지 않는 대접전 끝에 휴전을 선언하고는 잠시 지친 몸을 뉘이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한동안 가쁜 숨소리와 둘이 내뱉는 연기 같은 하얀 숨결만이 차가운 공기 속을 둥둥 떠다녔다. 등이 조금 시렸지만 지금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숨소리가 조금 잦아들기 시작해 누군가가 먼저 입을 떼려던 순간, 민망하게도 나란히 둘의 뱃속에서 고동 소리가 요란하게 적막을 깼다. 동시에 눈이 마주친 성화와 홍중이 머쓱하게 웃었다. 밥이나 먹으러 갈까. 성화의 말에 홍중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화가 먼저 벌떡 일어나 홍중에게 손을 내밀었다. 성화의 손을 잡고 일어난 홍중이 온 몸에 붙은 눈송이를 털어내자 성화도 제 몸에 붙은 것들을 툭툭 털어냈다. 성화가 손을 척, 내밀자 홍중이 자연스레 그것을 잡았다. 맞잡은 손을 붕붕 흔들며 연회장으로 향했다. 오늘 메뉴 뭐 나올 거 같아? 듣기로는 칠면조랑 크랜베리 소스랑 구운 감자랑, 뭐 그런 게 나온대. 오, 맛있겠다. 나 오늘 진짜 한 마리 다 먹을 수 있을 듯. 진짜? 내가 다 먹는지 꼭 지켜본다. 그런 말들을 주고 받다보니 어느덧 연회장 근처였다.
만족스럽게 배를 두들기며 성화가 연회장을 나섰다. 오늘 진짜 맛있었다, 그치. 홍중은 곁에서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후식으로 호박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평소 입이 다소 짧아 성화에게 한 소리 듣기 일쑤이던 홍중이었지만, 격한 활동 후여서였는지 혹은 날이 날이어서인지는 모르겠어도 오늘은 군말 없이 싹싹 긁어먹어서 성화를 내심 뿌듯하게 했다.
이제 뭐하지. 여전히 해가 중천이었다. 모처럼 눈도 왔는데 성이나 기숙사 안에만 있기는 조금 아깝다는 생각에 둘은 나가서 조금 걷기로 결정했다. 최대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을 골라 다니며 자신들의 발자국을 새기는 것도 재미가 꽤나 쏠쏠했다. 그렇게 걷고 또 걷다보니 또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을 시간이었다. 아쉽지만 슬슬 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한겨울은 왜 유독 밤이 이렇게도 빨리 찾아오는지.
저녁 만찬을 마무리하고 간단한 건배와 함께 버터비어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중이었다. 성화가 갑자기 짐짓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홍중에서 스윽 내밀었다. 딱 봐도 그리 커보이지는 않는 꾸러미. 홍중이 눈치를 보자 성화가 슬쩍 미소를 띄운다. 일단 열어봐.
포장을 되는대로 뜯고 상자를 열어 또 그 안에 있는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 든 것은 목걸이였다. 금색 체인에 검은색 장식이 달린. 좀 더 자세히 보니 장식에는 메리골드가 금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홍중의 탄생화.
“너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했어?”
“어때, 마음에 들어?”
“당연히 마음에 들지. 근데 어떡해? 난 이럴 줄 모르고 선물 준비 못 했는데.”
“너랑 나랑 오늘 함께 있는 자체가 선물이잖아.”
“어쭈, 또 이런다.”
킥킥대다가 홍중이 눈길로 한참동안 목걸이를 쓰다듬었다. 예쁘다. 언제 처음으로 걸고 나갈까 고민하고 있는 홍중의 귓가에 성화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사랑해.”
작가의 말
가을호에서 살짝 힌트를 드렸던 바와 같이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는 성화와 홍중이를 그려보고자 했습니다. 저의 시간 계산 미스로 많이 미숙한 글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요... (울먹)
부족한 글이지만, 겨울 풍경 속 성화와 홍중이를 보며 조금이라도 따스함을 느끼셨다면 좋겠습니다. 가을과 겨울을 성홍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따스한 겨울 보내시길 바라며, 세이코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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