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신은 사랑해>, 익명2
- 계간 성홍
- 2022년 6월 21일
- 13분 분량
- 사망, 부상 소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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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지거리가 꾹 다물린 입속에서 녹아간다.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친 순간, 홍중은 직감했다. 무언가 잘못됐다. 그대로 자리를 일어섰다. 귀에 꽂은 인이어를 거칠게 잡아뺐다. 인이어가 빠짐과 동시에 귓구멍에 뜨거운 피가 주륵 흐르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팀원들의 경악한 눈빛이 얼굴에 따라붙는다. 개중 눈치 빠른 부팀장의 눈짓에 주변 팀원들이 홍중의 팔을 붙들었다. 운이 나빴다. 주변에 서 있는 놈들이 전부 저보다 한 뼘 이상 큰 센티넬들이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몸이 그대로 바닥에 짓눌렸다. 몸부림을 쳐봤지만 역부족이었다. 놔, 나 가야돼. 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바락바락 악을 썼다. 입을 열 때마다 입 안에서 버석한 모래들이 쉴 새 없이 들어왔다.
“야, 일단 진정하고….”
“놔.”
“알겠으니까. 일단, 연락부터 기다려.”
“놓으라고. 가봐야 해.”
“안돼. 일단 연락 기다리는 게 우선이야.”
“…….”
“원칙이잖아.”
1팀에 무전 쳐봐. 한박자 늦게 명령이 떨어진다. 황급히 무전기를 집어 든 통신병이 곧바로 1팀으로 무전을 걸기 시작했다. 일단 놔줘, 나가지 않게만 잘 보고. 그 말에 슬금슬금 홍중을 짓누르던 힘이 약해진다. 몸이 자유로워진 홍중은 그제야 입 안에 들어온 모래를 뱉었다. 한 움큼의 모래 덩어리가 침과 뒤섞여 주르륵 바닥으로 떨어진다. 입 안에 상처가 난 건지 핏물도 섞여 있었다.
[…1, 팀, …함정, 박성화…, 본부, ……, 지원.]
무전으로 넘어오는 말들이 드문드문 끊겼다. 뒤늦게 상황을 짐작한 눈빛들이 불안함을 가득 담고 서로를 살핀다. 괜찮을 거야, 동요하지 마. 덤덤한 목소리를 가장해도 떨림은 전부 숨겨지지 않는다. 팀원들의 눈빛에서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몇몇 시선이 홍중을 향한다. 마치 도와달라는 듯이, 하지만 홍중으로서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무리에서 벗어나 비척비척 구석으로 걸어갔다. 모래를 머금고 있던 입안이 텁텁했다. 물병을 꺼내 들었지만 그 속은 이미 동난 상태였다. 입안을 헹구기를 포기하고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내가 뭐라고 했으면 좋겠어?”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 울린다. 오래된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소리를 듣지 않으려 절로 귀에 손이 올라갔다. 귀를 막은 손바닥 위로 따뜻하고 끈적한 핏물이 흘렀다.
때마침 무전기가 울렸다. 다들 희망에 가득 찬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얼굴을 들어 올릴 때, 홍중 혼자만 고개를 땅으로 파묻을 듯이 깊이 숙였다.
미미하게 느껴지던 파장이 폭발 이후로 전부 끊겼다. 박성화의 기운이 더 느껴지질 않았다.
[…1팀, 실종자 박성화 팀장 제외 전부 복귀하겠습니다.]
탄식 소리와 함께 여러 사람의 눈길이 홍중에게 닿았다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애써 표정을 갈무리한 홍중이 일어섰다. 복귀합시다. 우리도. 그 말에 눈치빠르게 제 짐을 들어 올리는 부팀장을 시작으로 다들 일사불란하게 짐을 챙기려 흩어졌다.
그제야 홍중은 고개를 숙였다. 뺨으로 손을 올렸다. 뱉어도 뱉어도 입안에서 꺼끌거리는 모래는 사라지지 않고 입안에 난 생채기 위를 굴러다녔다. 아릿하게도.
▶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잠에서 일어났다. 처음에 알람인 줄 알고 주위를 더듬거렸지만, 손에 잡힌 휴대폰에는 아무 알림도 없었다.
소리의 근원지는 현관문이었다. 비밀번호를 연속해서 틀린 건지 도어락이 시끄럽게 울렸다. 현관으로 다가가자 인기척이 느껴졌다. 취객이 흔한 동네는 아니라 의외긴 했지만, 정신 차리면 가겠거니 싶어 문밖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 신경쓰기엔 지쳐있었다는 게 맞았다.
도어락의 건전지를 빼냈다, 다시 끼웠다. 띠리릭, 명쾌한 알림음과 동시에 도어락이 잠잠해졌다. 그러자 삐릭, 문밖에서 다시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홍중이 인상을 찌푸렸다. 넘어가 주는 것도 선이 있었다. 운이 나쁘게도 상대는 그런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문이 열릴 때까지 시도할 모양이었다. 방도가 없었다. 좋은 말로 쫓아내든지. 아니면 경찰을 부르던지. 후자까지 가지 않길 바라며 홍중이 문을 열었다. 저기요. 덜컥 열린 문에 상대가 흠칫 발을 물렸다.
“김홍중?”
“…?”
현관문 앞에 서 있는 것은 박성화였다. 순간 말을 잃은 홍중이 멍하니 입만 뻐끔거렸다. 헛것을 보고 있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손을 들어 제 뺨을 내리쳤다. 짝 소리와 함께 박성화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너 무슨 짓이야? 반대 손을 들어 올리자 다급하게 만류한다.
꿈이 아니었다. 눈앞에 서 있는 건 진짜 박성화가 맞았다. 덥석 손을 붙잡았다. 익숙한 기온의 손이 시원했다. 홍중이 눈을 들어 올려 박성화를 마주했다. 입을 열었다.
“너…, 살아 있었어?”
“네가 왜…, 여기 있어?”
목소리가 뒤엉켜 누구도 서로에게 닿지 못했다. 어색하게 헛기침을 내뱉은 홍중이 손짓을 까닥거린다. 먼저 말해. 박성화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홍중을 피해서 굴러간다. 네가 왜 여기 있냐고…. 당혹스러움을 숨기지도 목소리로 그렇게 묻는다. 이상하게도.
“내 집이니까.”
홍중이 무심히 대꾸한다. 뭘 그런 걸 묻느냐는 태도에 더 당황한 건 박성화였다. 시선을 둘 곳을 못 찾고 눈알이 이리저리로 구른다. 완벽히 난감한 모습. 그리곤 되묻는다. …너네 집이라고?
슬슬 짜증이 오르기 시작한 홍중이 감정을 억누르며 목소리를 낮춘다. 세 달 만에 돌아온 것에 대한 안도감은 잠시, 결국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니. 참아왔던 졸음이 몰려왔다. 수면 부족 탓에 머리가 파업을 선언하고 있었다. 세 달의 이야기는 자고 일어나서 멀쩡한 정신으로 이야기하고 싶은데 박성화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되려 말꼬리를 잡고 자꾸 늘어졌다. 두통이 올라왔다. 홍중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대답한다. 대충 납득하고 넘어가길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그러니까, 너랑 내가 같이 사는 집이잖아. 여기.”
“너랑 내가?”
박성화가 눈썹을 찡그린다. 이해돼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홍중을 내려다본다.
“무슨 소리야. 내가 너랑 왜 살아. A군은 어쩌고.”
“A군?”
낯익은 이름이지만 절대 둘 사이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이름. 임시 페어를 맺은 후로 금기어와 다름없던 이름의 등장에 잠이 확 달아난다. 홍중의 시선이 뒤늦게 성화를 훑었다. 새카만 머리카락, 전보다 훨씬 마른 몸에 얼굴에 선연히 드러나는 날티. 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반지 목걸이. 귀에 꽂힌 이어폰 젠더가 꽂혀있는 새하얀 아이팟 클래식….
수마에 반쯤 잠식된 탓에 놓쳤다. 박성화의 모습이 실종됐던 세 달 전 모습보다 확연하게 앳되어 있었다. 거짓말이지? 현관 옆 신발장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집어 든 홍중이 입을 열었다. 성화야,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한 성화의 시선이 제게로 다시 돌아옴을 확인하고 동시에 질문을 던졌다.
“…올해가 몇년도지?”
성화가 피식 웃는다. 홍중이 장난을 치고 있다고 멋대로 짐작 내린 모양이었다.
“2017년이잖아.”
툭, 홍중이 들고 있던 휴대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A군이 죽은 건 사고였다.
흔한 일이었다. 임무로 파견 나갔다가 죽어 돌아오는 센티넬의 수는 파견자의 절반에 웃돌았다.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다만 안일했을 뿐이다. 죽는 센티넬들의 등급이 대부분 B 이하라는 사실에. 생각지도 않았을 뿐이다. A군의 등급은 S였으니까. 김홍중은 생각조차 안 했다. 되려 옆에 가만히 서 있는 짝도 없는 C급 센티넬 박성화나 힘껏 걱정했다. 죽지 말라고. A군도 거들었다. 위험할 것 같으면 나서지 말고 사리라고. 한 치 앞도 모르는 바보들이 따로 없었다.
“나 때문이야.”
“…….”
“나 때문에, 그 애가 죽은 거야.”
박성화는 상처투성이였다. 한쪽 눈 위를 끈적한 피가 잔뜩 덮고 있었다. 박성화씨. 치료받으셔야 돼요. 제게로 다가오는 의료진들의 손을 뿌리치고 김홍중을 붙잡았다. 붙잡힌 어깨 위로 닿는 손바닥 온도가 지나치게 뜨끈뜨끈했다. 홍중은 멍하니 박성화를 올려다봤다. 피를 머금어 벌건 물길이 박성화의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무슨.”
“내가 죽인 거야. 홍중아.”
“뭐?”
“그러니까, 죽지 마.”
“…….”
“차라리 나를 원망해. 날 죽이고 싶어 해.”
내 죽음을 기도하면서 살아. 잔인한 말이었다.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퍽, 어깨에 닿은 손을 뿌리쳤다. 박성화의 손이 힘없이 밀려났다. 표정이 마구잡이로 일그러졌다. 고개를 치켜들고 눈을 마주쳤다. 핏물로 범벅이 된 얼굴에 쏘아붙이듯 입을 열었다.
“그래.”
“…….”
“꼭 그래줄게.”
“…….”
“그러니까 치료나 받아.”
그러자마자 박성화가 웃었다. 피 때문에 눈의 절반도 못 뜨는 주제에 입꼬리가 귀에 닿을 정도로 환하게. 박성화씨, 치료받으셔야 돼요. 의료팀이 다시 한번 채근하려 박성화에게 다가왔다. 네, 죄송해요. 어디로 가면 돼요? 걔는 그제야 발을 옮겼다. 온통 새하얀 옷을 입은 의료팀의 안내를 따라 느릿하게 발을 옮겼다. 뚝, 뚝, 가는 길을 따라 핏물이 흘러 흔적이 남았다. 홍중은 그 핏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깨로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셔츠 위로 벌건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홍중은 그 자국 위로 손을 올렸다. 오래오래 쓰다듬었다. 그렇게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온통 박성화의 흔적 사이에서.
죽어버린 A군 따위는 생각조차 못 하고.
▶▶
“아마, 박 팀장님 능력 때문일 것 같네요.”
“아마요?”
“본인이 없으니까요. 확인할 수도 없죠.”
“…생사 확인도 안된 거에요? 아직도?”
“네, 흔적도 없어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쯤에서 사망 처리 됐을 텐데, 박팀장님 능력이 아시다시피. 거기에 걸어보는 거죠. 일단.”
“…….”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인 의미에요. 저 친구가 여기로 불려왔다는 건. 박 팀장님도 어느 시간 속에 살아있다는 증거잖아요.”
담당자가 파일철을 덮었다. 맨 앞장에 달랑거리는 분홍빛 머리에 홍중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입술을 꾹 짓씹은 홍중이 검사실 안에 수많은 줄을 붙이고 앉아있는 성화를 바라봤다. 반항의 기색조차 없이 얌전했다.
문득 기척을 느꼈는지, 성화가 홍중을 향해 몸을 돌렸다. 투명한 유리 벽 너머로 시선이 올곧게 쏟아졌다. 보일 리가 없는데. 괜히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돌려보내요?”
“알아서 돌아갈 거예요.”
“어떻게요.”
“박 팀장님이 원하는 게 있었나 봐요. 무리해서 과도하게 시간을 돌린 것 같은데, 그래서 시간이 꼬인 거예요.”
“…….”
“박 팀장님이 제시간으로 돌아오시면, 자연스럽게 풀릴 거예요. 그럼 그때 돌아갈 수 있겠죠. 저 친구도.”
스무 살이던가요? 그럼 아무것도 모르겠네. 김 팀장님이 잘 도와주세요. 파트너잖아요. 담당자가 파일철을 홍중에게로 넘겼다. 파일 위에 기밀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관계자 외 열람 금지. 경고 문구 스티커가 다닥다닥 붙은 파일을 얼떨결에 받아 들은 홍중이 가방에 집어넣었다. 슬쩍 주위를 살피며. 다행히도 감시카메라에 불이 들어와 있지 않았다.
“왜 기밀이에요?”
“…모르셨어요?”
“…….”
“…모르셨구나.’
“…뭔데요?”
“박 팀장님.”
실험 받으셨잖아요. 센티넬 능력 증폭 실험. 때마침 검사를 모두 마친 건지 성화의 몸에 연결됐던 수많은 전선이 떼어진다. 검사 때문에 새하얀 환자복을 입은 성화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문을 향해 걸어왔다. 동시에 컴퓨터로 정보가 넘어왔다. 담당자가 컴퓨터에 뜬 검사 결과를 살핀다. 홍중이 가방에 넣어뒀던 파일을 꺼내 든다. 제일 앞장을 펼친다. 분홍빛 머리 아래로 끼워져있는 안대를 바라본다. 다시 고개를 올린다. 새카만 머리를 한 성화의 두 눈을 바라본다. 완벽히 같은 색의 눈동자에 다시 시선을 내린다. 결과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검사 결과 : 센티넬 (C)]
『박성화 센티넬 (S)
1998년 4월 3일 출생.』
◀◀◀
박성화가 폭주했다.
고작 C급이라기엔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물론 수치상으로. 실제론 별로 티가 나지 않았다. 시간은 고요한 능력이었으니까.
새파랗게 변한 박성화의 눈이 닿는 곳마다 시간이 뒤틀렸다. 센티넬들은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그 주위에 세워진 안내판이나 보도블록 같은 설치물이 급속하게 노화되고 돌아오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가이드 온 사람 있어?”
“내가 갈게.”
박성화를 피한지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던 날이었다. 계절은 벌써 여름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다. 과도한 능력 사용 때문인지, 더위 때문인지. 박성화의 몸에서 땀이 뚝뚝 흘렀다.
센터는 규모를 S급이라고 결정 내렸다. 폭주의 원인을 급속한 능력 상승이라고 봤다. C급인 박성화의 원래 가이드로는 감당 가능한 수치를 넘어섰다고 판단했다. 있다면 S급, 적어도 A급의 가이드가 필요했다. 물론 늘 인력난인 가이드 중 등급이 높은 프리 가이드는 없었다. 한 명을 제외하고.
“김홍중?”
다급하게 달려온 홍중은 잠옷 차림이었다. 슬리퍼조차 짝짝이였다. 막 현장에 도착한 홍중의 시선이 박성화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바라보는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파장은 둥근 원 모양으로 박성화를 감싸고 있었다. 언뜻 보면 보호하는 모양새였다. 실상은 파괴하고 있는 거였지만.
“…너.”
“나밖에 없잖아.”
“…….”
“얼마나 버틸 수 있어?”
“…2분. 괜찮겠어?”
어, 해. 대치하고 있는 센티넬이 머뭇거리며 내뱉은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을 확인한 센티넬이 슬금슬금 박성화에게 다가갔다. 홍중은 조심히 그 뒤를 따랐다. 박성화가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슬슬 몸이 한계인지 피와 땀으로 범벅인 얼굴이 지쳐 보였다.
“지금이야!”
목소리와 동시에 박성화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홍중은 재빨리 달렸다. 둥글게 박성화를 보호하던 파장은 아예 사라지진 않았지만, 많이 약해져있었다. 곧바로 박성화에게 직진하다 발목이 파장에 삼켜졌다. 삼켜진 발목에 흉터가 떠올랐다. 황급히 발을 빼내곤 다시 달렸다. 박성화는 눈을 감고 있었다. 곱게 닫힌 눈꺼풀은 미동조차 없었다. 잠을 자는 모양새였다.
“박성화.”
“…….”
“들려?”
돌아오는 응답이 없었다. 몸을 끌어안았다. 더위 때문에 몸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손목을 붙잡았다. 가이딩 수치가 느리게 차오르고 있었다.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깨어났을 때쯤까진 안정권을 찾을 것 같았다.
문제는 날씨였다. 폭주한 장소가 그늘 하나 없는 평지였다. 홍중조차도 잠깐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로 뜨거운 날씨였다. 땀이고 피고 쭉쭉 빼낸 박성화의 상태는 더 심각할게 분명했다. 홍중이 다시 뒤를 돌았다. 멍하니 자길 바라보는 센티넬들에게 소리쳤다. 물! 던져! 어느새 대부분 자리를 뜨고 남아있는 건 박성화의 파트너와 동료 센티넬 몇뿐이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센티넬 하나가 생수통을 던졌다.
“야, 입 열어.”
“…….”
“너 폭주고 뭐고 수분부족으로 죽어.”
“…….”
“박성화.”
홍중은 받은 생수를 열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입가로 가져갔다. 반응은 없었다. 물이 느껴지면 받아 먹을까 싶어 살짝 기울여도 봤지만 물은 목표하는 입을 지나 턱을 타고 뚝뚝 흐르기만 했다.
방도가 없었다. 물을 가득 머금은 홍중이 그대로 성화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마주 댔다. 슬그니 혀로 입을 벌렸다. 손쉽게 벌어진 입술에 물을 흘려 넣었다. 턱을 타고 흐르는 물은 여전히 있었지만, 전과 달리 적은 양이었다. 대부분 물이 박성화의 목구멍 너머로 흘러 들어갔다.
뒤에서 센티넬들이 철수하는 소리가 들렸다. 박성화의 손목을 흘깃 바라봤다. 가이딩 수치는 어느새 안정궤도에 들어서 있었다. 그랬지만 홍중은 다시 물을 머금었다. 박성화를 바라보다. 슬그머니 다시 입을 맞췄다. 느릿하게 물을 넘기려 했다.
“홍중아.”
따끔한 뒤통수에 눈을 뜨니 순식간에 자세가 뒤바뀌어 있었다. 박성화의 눈동자는 다시 빛을 잃은 새카만 색이었다. 색이 다른 두 눈동자를 바라보던 홍중이 눈을 깜빡였다. 미처 삼키지 못한 물이 여전히 입안을 채우고 있어서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사랑해.”
미소를 지은 박성화의 얼굴이 서서히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홍중의 입술을 머금은 말랑한 입술이 서서히 입안을 파고들었다. 홍중의 목젖이 느리게 움직였다. 머금던 물을 다 삼켜내고는 눈을 감았다. 두 팔을 가만히 성화에 목에 감았다.
▶▶▶
“A군은?”
내내 그 소리였다. 센터에 끌려갈 때까지만 해도 얌전하던 게 전부 연기였는지, 집으로 오는 내내 성화는 A군을 찾았다.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그렇지만 참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의 성화니까. 아직 알 필요가 없으니까.
그 비극을.
“A군이랑 싸웠어?”
그러나 그것도 한계였다. 내내 말을 무시하고 앞서가던 홍중이 발을 멈췄다. 성화를 향해 고개를 획 돌렸다. 성화가 다급히 멈추어 섰다.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조금만 뒤늦었다면 그대로 얼굴이 맞닿을 뻔했다. 황급히 발을 물린 성화의 귀가 벌게졌다.
“걘 왜 자꾸 찾아.”
“네 파트너잖아.”
“이젠 아니야.”
“왜?”
“죽었으니까.”
성화의 입이 다물렸다. 얼굴에 당혹스러움을 숨기지도 못했다. 너무 뜻밖의 소리였다. 의문은 풀리지 않았지만. 더 묻지 못했다.
왜냐하면 홍중의 얼굴이 꼭.
“미안.”
“…….”
“몰랐어.”
“왜 죽었는지 알아?”
“…아니.”
“너 때문에.”
“…….”
“니가 죽였대.”
“…….”
“니가, 나한테 그랬어.”
…울 것만 같았는데. 전부 착각이었던 게 분명했다. 홍중은 웃고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웃음. 지금의 성화가 가장 사랑하는 모습이었다. 성화는 손을 들었다. 일렁이던 시야가 까맣게 암전된다.
손바닥이 축축해진다. 그것이 눈물이라는 걸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구나.”
“…….”
“내가 잘못했네.”
“…그게 아니라.”
“미안해.”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야.”
“좋아해.”
알고 있었지? 너도. 제가 내뱉은 건가 싶을 정도로 덤덤한 말투에 되레 놀란 건 성화 본인이었다. 놀라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제 의지대로 되질 않았다. 몸이 가위에라도 눌린 듯이 꼼짝하지 못했다. 입조차도 달싹일 수 없었다. 결국 아무 대처도 못 하고 놀란 표정의 홍중을 마주 봤다. 그러다가 덜컥,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눈앞이 깜빡, 깜빡. 점멸하며 서서히 눈이 감겼다. 그건 NG지. 무중력에라도 빠진 듯 멍멍하던 귓가에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멀리서 제 이름을 애타게 외치는 목소리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기절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과 동시에 성화는 의식을 잃었다.
◁◁
“홍중이를 데려갈 거야.”
담뱃재가 바람에 흩날렸다. 채 다 꺼지지 못한 불씨를 품은 담배가 바닥에 떨구어진다. 그 위를 흙먼지를 뒤집어쓴 군화가 짓누른다. 느릿하고 확실하게 불씨를 죽인다.
“…어딜?”
“어디겠어.”
검지가 성화가 등지고 선 반군의 막사를 향해 뻗어진다. 노골적인 의미표시였다. 뻗은 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커플링을 성화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잠시 고민한다. 홍중이라면, 가겠다고 할까? 아니면….
“왜?”
“왕처럼 떠받들어준대.”
“가이드도?”
글쎄, 아마 수가 적으니 공공재 아닐까. 성화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보이지도 않는지 A군은 제멋대로 떠들었다. 주된 화제는 자신이 홍중을 얼마나 사랑하지 않는지. 난 괜찮아. 어차피 별로 사랑하지도 않았고, 임무 때문에 맺어진 거잖아. 주절주절 쓰레기 같은 별명을 잘도 내뱉었다. 물론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들어봤자 시간낭비인 내용일 뿐이었으니.
“홍중이가 따라 갈거라고 생각해?”
“글쎄.”
“…….”
“근데 아마 들어줄 거야 걘.”
왜냐면 날 사랑하거든. 당당하게 내뱉은 말에 성화는 부정도 못 했다.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내내, A군이 끝내 성화를 지나쳐 막사에 돌아갈 때까지.
그날 밤, 전화를 걸었다. 몰래 챙겨온 휴대폰을 들고 살금살금 초소를 빠져나왔다. 신호도 잘 잡히지 않는 허허벌판을 한참 동안 뱅뱅 돌았다.
“아, 씨발…….”
“…….”
“너 미쳤냐?”
A군이 휘청이며 돌바닥에 넘어졌다. 몸이 뒤로 넘어가며 커다란 소리가 났다. 곧 주변에 있던 이들이 몰려올 게 분명했다. 성화는 날렵하게 그 위로 올라탔다. 목을 졸랐다. 끄윽, A군의 목에 핏줄이 섰다. 새빨갛게 변한 눈동자가 성화를 노려봤다.
- 왜?
“갈 거면 혼자가.”
- 반군? 갈 생각 없어.
“김홍중은 안돼.”
- A군은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 말도 안 되는 상상이야.
퍽, 무언가 제 눈가를 강타했다. 핏물에 자연스럽게 한 눈이 감겼다. 고통에 목을 죈 손이 느슨해졌다. 그 틈을 타 A군이 멀어지는 게 흐릿한 반대쪽 눈으로 보였다. 성화는 손을 뻗었다. 계획이 틀어질 건 예상했지만 이렇게는 안 됐다. 저렇게 보낼 수는….
“아, 맞다. 너 유명했댔지.”
“…….”
“김홍중 따까리로.”
“…….”
“그래봤자 C급이지만.”
돌조각들이 둥실둥실 하늘을 날았다. 성화는 제 주변을 둘러싼 돌조각을 무심하게 바라봤다. 바쁘게 계산해봤자 A군을 죽일 방법 따윈 없었다. 목을 놓친 순간부터 성화의 계획은 완벽하게 틀어진 거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전부 놓을 각오로 시도한 일이었다. 목숨조차도. 그러니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아쉬울 뿐이었다. A군을 죽이지 못한걸.
걱정될 뿐이었다. 김홍중이.
“박성화!”
살아남은 건 순전히 운이었다. 눈을 떠보니 헬기 위였다. 걱정스러운 동료들의 눈길을 받으며 일어난 성화가 주변을 살폈다. A군이 보이지 않았다. 가장 친했던 동료 하나가 슬쩍 귓가에서 속삭였다. A군은 실종됐어. 홍중이 커플링이랑 너만 남아있더라고.
“습격이라도 받은 거야?”
내내 침묵을 유지했다. A군은 아마 제가 원하던 반군으로 떠난 것 같았다. 홀로. 두 손을 얼굴에 파묻었다. 다행인 일이었다. 남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 때문이야.”
성화는 얼떨떨한 표정의 홍중의 어깨를 붙잡았다. 안 그럼 손을 덜덜 떨고 있는 것을 들킬 것만 같았다.
“차라리 나를 원망해. 날 죽이고 싶어 해.”
그럼 실은 홍중의 미움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들킬 것만 같았다.
◁◁◁
“성화야 나 센터 가기 싫어.”
“…….”
“A군도 싫어. 마음에 안 들어.”
“…….”
“성화야 나 가지 말까?”
“내가 뭐라고 해줬으면 좋겠어?”
“가지 말라고 해줘.”
“…….”
“내 옆에 있으라고 해줘.”
오래된 후회를 떠올린다. 서로의 세상의 둘밖에 없었던 기억을, 사랑을 우정이라 착각하던 미숙한 시절의 기억을.
홍중은 성화의 품에 안겨있다. 얇은 잠옷이 금세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성화는 조심스럽게 그 작은 등을 끌어안는다.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토닥였다. 홍중은 얌전했다. 늘 그랬던 것과 달리. 왜 함부로 만지냐며 왁왁대지도. 그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지도 않았다.
“성화야. 나 보내지 마.”
“…….”
“후회 안 할 수 있어?”
“뭘?”
“나 이렇게 보내는 거. 후회 안할 수 있냐고.”
성화의 능력은 시간이었다. 물론 C급이라 거창하게 과거를 바꾸거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고작 할 수 있는 능력은 최대로 사용했을 때의 능력은 5분 뒤 미래 보기, 10분 전으로 시간 돌리기 정도. C급도 과분했다. 그러니 일반인의 삶을 살았을 수도 있었다. 한가지의 능력이 없었다면.
그리고 성화는 그 능력을 스스로 드러냈다.
오직 센터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제 할 마음이 생겼어?”
“어.”
“그래. 약속은 지켜야 돼. 알지?”
“…알아. 꼭 지켜줄게.”
“잘 부탁해.”
능력 증폭 실험. 참여한 건 맞았다. 능력이 증폭된 것도 맞았다. 다만 유일한 성공자라고 불리기엔 애매했다. 성화와 여타 참가자들은 결이 달랐다. 약물 주입과 한계까지 뽑아내는 능력으로 증폭을 시도하는 다른 참가자들과는 다르게 성화는 그저 받았을 뿐이다.
‘그 능력’으로.
어떤 시간 선의 성화에게.
김홍중을 만나지 못하고 죽어버린 어떤 시간 선의 성화에게.
하나의 약속을 하고.
“박성화.”
“…….”
“들려?”
그날은 실종됐던 A군의 기척이 처음으로 센터에 알려졌던 날이었다. 산등성이에 있는 센터 근처에서. 일부러 누군가 보란 듯이 남겨놓은 흔적이었다. 딱히 누구를 노린 것은 아니고, 그저 센터를 지나가는 누구든 발견하라고 놓은 것일 게 분명한 흔적이었다.
우연히 그걸 처음 발견한 게 성화였을 뿐이었다.
또, A군이 여전히 홍중을 노린다는 보장도 없었다. 아마 그때 홀로 떠난 것을 봐서는 포기했을 가능성이 컸다.
“홍중아.”
그런데도, 두려웠다.
A군을 향한 홍중이의 마음을, A군을 향한 홍중이의 사랑을.
저는 다시는 받지 못할 그 사랑이 두려웠다.
기민하게 알아채지 못해 최초의 우리의 세계를 부서트리고 말았던,
이제는 다른 이를 향한 그 사랑이 이번엔 완벽히 우리를 갈라놓을 것 같아서.
홍중아,
A군을 아직 사랑해?
A군에게 갈 거야?
A군에게로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사랑해.”
내뱉고 싶던 수많은 말들이 있었다. 수많은 감정이 있었다.
다만 할 수 없었을 뿐이다.
한발 뒤늦은 대답을 들려주는 것 빼고는.
그러니까, 너는 홍중이를 지켜줘.
내가 약속을 지키러 간 동안.
그럼 내가 네 후회는 없던 일로 만들어줄게.
너만은, 후회하지 않도록 해줄게.
▶▶▶▶▷▷▷▷
“오랜만이야.”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A군이었다. 죽은 게 아니란 건 알았지만 이렇게 바로 마주할 줄은 몰랐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얼굴을 살폈다. 왕처럼 대해준다더니 생각처럼 되질 않았던 모양인지 낯빛이 영 좋질 않았다.
“홍중아.”
김홍중은 성화를 등지고 돌아보지 않았다. 이름도 불러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되려 관심을 보인 건 A군 쪽이었다. 홍중의 위로 불쑥 얼굴이 튀어나왔다가, 성화를 확인하고는 샐쭉 웃었다.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박성화네.”
“…….”
“오랜만이다. 너도.”
“…….”
“보고 싶었어.”
박성화! 뒤통수에 무언가 부딪혔다. 손을 뒤로 뻗었다. 떨어진 조각을 주워들었다. 갈색 조각에는 흙가루가 묻어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름 모를 풀꽃이 흙더미 사이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제 머리 위로 날아온 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홍중이 키우던 화분이었다.
“눈이 멀쩡하네?”
“…….”
“그러고 보니까 좀 어려 보이기도 하고.”
노란 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려고 했지만, A군이 빨랐다. 어느새 다가온 손에 얼굴을 붙잡혔다. 뺨을 붙잡은 두 손이 억셌다. 오는 길에 또 누구를 다치게 했는지 손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보였다. 역겨웠다. 제 뺨을 잡은 손을 강하게 뿌리치려는데 먼저 뻗어진 손이 있었다. 한쪽 손톱에만 칠해진 검은 네일. 또 한 번 선수를 놓친 성화가 시선을 올렸다.
“왜 왔어?”
“너희한테 주고 싶은 게 있어서.”
“…….”
“받은 게 워낙 거창해서 말이야. 어떻게 보답할까 고민을 좀 해봤는데.”
“…….”
“그래도 옛정이 있으니까.”
“…….”
“홍중이 너한테 선택권을 줄게.”
네가 죽을래, 쟤를 죽일까? 뜨끈한 피가 뒤늦게 목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홍중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일어선다. 성화는 황급히 홍중에게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여전히 한발 늦었다. 어느새 일어선 홍중은 A군과 성화의 사이를 가로막는다. 성화를 보호하는 모양새였다.
“왠지 그럴 것 같긴 했지만.”
“…….”
“직접 보니까 기분이 또 다르네.”
“박성화는 내버려둬. 어차피 네가 아는 걔 아니야.”
“눈물겨운 사랑이네. 그때처럼 말이야.”
“…….”
“열받게. ”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집의 현관문 쪽이었다. 실실 웃으며 손을 흔드는 A군 뒤로 수많은 물건이 떠오른다. 노트북, 티비, 냉장고, 사진첩, 액자…. 수많은 것들이 홍중의 주위를 빙글빙글 돈다. 서서히 범위가 좁혀진다. 성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정확히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몰랐다. 기억 속의 박성화를 흉내 낸다. 대충 손에 집히는 것을 사이에 들고 기도하듯이 양손을 맞물린다. 눈을 감았다. 익숙한 기억을 회상한다.
이곳의 오기전 기억을 계속해서 되새긴다.
“나 이렇게 보내는 거, 후회 안 할 수 있냐고.”
후회할 것 같아. 나도, 너도. 성화는 계속해서 빌었다. 귓가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홍중이 아니길 빌었다. 할 수 있는 것이 비는 것밖에 없었다. 이름 모를 신에게도, 미래의 성화에게도, 제 홍중에게도. 눈물이 흘렀다. 핏물을 삼킨 그것은 계속해서 흘렀다. 턱으로, 뺨으로.
동시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가, 이제.”
“…….”
“가서 네 홍중이를 지켜. 부르잖아.”
“홍중아.”
“난 괜찮아.”
“…….”
“그러니까, 가. 이제 후회하지 말고.”
“미안.”
“이번에 돌아가면, 솔직하게 말해. 숨기지 말고 전부.”
“그럴게.”
“…….”
“잘 있어.”
그리고 봤다. 이 시간의 박성화를.
다른 시간의 김홍중과 함께 있는 박성화를.
그리고 불렀다. 온 힘을 다해서.
도와달라고, 김홍중을 구해달라고.
▶▷▶▷▶▷▶▷▶▷
비명이 들렸다. 홍중은 슬며시 감았던 눈을 떴다. 제 주변을 감싸던 물건들은 전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앞을 가로막은 장롱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한 남자가 A군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제일 먼저 시선이 닿은 곳은 머리였다. 색이 거의 빠진 옅은 분홍빛 머리카락에 홍중이 숨을 멈췄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직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속삭이듯이.
“성화야.”
작은 목소리였는데도 남자가 들은 건지, 부름에 몸을 돌렸다. 선명한 검은빛 동공 옆으로 희미한 잿빛 동공이 보였다. 홍중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박성화가 맞았다. 제가 아는, 현재의 성화가 맞았다.
성화는 놀란 눈치였다. 홍중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의식을 잃은 A군의 목을 붙잡던 손을 놓고는 황급히 홍중에게로 다가왔다. 고개를 숙인 홍중의 뺨을 붙잡았다. 눈물로 척척한 뺨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그리곤 홍중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홍중아, 왜 울어.”
“…….”
“늦어서 미안해.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는데.”
“…….”
“…나 걱정했어?”
다정한 말투에 눈가가 다시 시큰거렸다. 울음을 참으려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주먹 쥔 손에 힘을 실어 어깨를 밀쳤다. 제법 아팠는지 성화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렇지만 밀어내진 않았다. 가만히 버티고 묵묵히 서 있었다. 전부 감내하겠다는 듯이.
“성화야.”
“응.”
“난 네가….”
“…….”
“죽지 말라고 해줬으면 좋겠어.”
“…….”
“내 옆에 있어 달라고 해줬으면 좋겠어.”
“…….”
“…날 사랑해달라고 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뭐라고 했으면 좋겠어?”
내내 꼭꼭 숨겨놓았던 마음이 뒤늦게 고개를 든다. 한참 전에 내뱉지 못했던 진짜 대답을 꺼낸 홍중이 성화를 바라본다. 여전히 물기가 가득한 눈동자가 올곧이 성화를 비춘다. 성화는 제 주머니에 담긴 것을 꺼내 든다.
열아홉과 스물의 사이, 길고 긴 길을 돌아오기 직전의 성화가 제 시간으로 돌아가기 전, 저를 애타게 부르며 손에 쥐었던 것을 홍중에 손 위로 올린다. 화분이 깨진탓에 뿌리내린 곳을 잃고 시들어가는 샛노란 색의 이름 모를 풀꽃 한 송이.
성화가 그 위를 제 손으로 덮는다. 부드러운 기운이 꽃과 홍중의 손을 감쌌다. 꽃의 시간이 돌아간다. 활짝 만개한 꽃에서 봉우리로, 봉우리에서, 새싹으로, 그러다 이내.
작은 씨앗이 홍중의 손바닥 위로 떨어진다.
“홍중아, 죽지 마.”
“…….”
“죽지 말고 내 옆에 있어 줘.”
“…….”
“내 옆에서 날 사랑해줘.”
여기부터 원점인 거야. 성화가 속삭이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홍중이 입을 맞췄다. 끝나지 못한 남은 말들이 홍중의 입안으로 녹아들었다. 제 목에 둘린 팔에 웃음을 흘린 성화가 홍중을 끌어안는다. 홍중이 쥐고 있던 씨앗이 흙으로 너저분한 바닥 위로 굴러간다.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깨진 화분 조각 사이에 놓인 메모지 위에 적힌 글씨 위로 햇살이 비춘다.
5년을 돌고서 기어코 출발점에 나란히 서게 된 두 사람을 축복하듯이.
- 작가의 말
계간 성홍 여름에 참여하게 되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처음 구상해둔 이야기와는 초반빼고 전혀 달라진 이야기라 어색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더위 조심하시고 항상 행복하세요 :)
추신.
예상하셨겠지만 기호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 홍중이의 시점 현재.
◀ 홍중이의 시점 과거.
▷ 성화의 시점 현재
◁ 성화의 시점 과거
개수가 많을 수록 더 과거입니다. 현재는 그만큼 다시 시간이 되돌아왔다는 의미고요.
같은 개수는 똑같은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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