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감의 온도, 봄>, 크티
- 계간 성홍
- 2022년 3월 21일
- 9분 분량
초침이 움직인다.
어떠한 시간에 사로잡혀있어도 늘 그랬듯 시간은 흐르고 계절 역시 바뀐다. 눈이 오다 곧 세상이 멈춘 듯 그치고 그 차가움은 꽃잎의 조각들로 흩어지다 빗줄기로 모조리 씻겨 내려간다. 계절도, 사람도 전부 그 흐름을 벗어날 수 없다. 영원한 줄 알았던, 영원하고 싶던 인연과 청춘 역시 흘러간다. 뜨거움에 질식할 것만 같은 열감기를 겪다가도 다시금 원래의 체온을 되찾고, 어쩌면 손끝이 시릴 만큼 낮아지기도 한다.
너로 인해 시작된 봄에서 네가 없이 살아가야 하는, 앞으로의 수많은 봄.
남들은 전부 다 그 흐름을 인정하고 함께 떠나가는데, 그 미적지근한 온기에서 나는 여전히 같은 곳에 서 있다. 잠시 눈을 돌리다가도 참 미련하게 똑같은 곳에서 발걸음을 굳힌다.
하늘은 푸르다. 갑갑함에 올려보면, 애석하게도 푸른 빛을 내비친다. 그 색감 아래 나는 속절없이 눈이 멀어 간다. 어째 참으로 찬란한 게 너를 닮은 거 같아서.
나는 그 푸른 빛을, 그리고 그 빛을 닮은, 나를 온전히 담아내던 너의 눈을 여전히 동경한다.
시침이 움직인다.
부디 현실을 즉시 하라고 세상이 다그친다. 그런데 나는 또 애써 부정한 채 어리숙했던 그 시절을 돌려본다. 잃고 싶지 않다. 나는 아직 열아홉이고, 너 역시 열아홉 그대로다. 그대로 여야만 한다.
나는 여전히,
오늘도 너를 기다리다, 너를 그리다. 그렇게 담아내다.
체온, 봄
W. 크티
3월의 첫날. 봄이 훌쩍 다가왔다. 잔잔히 남아있는 서늘함과 나른한 햇빛이 애매하게 공존하는 시기. 외투를 벗고 적당한 두께인 긴 팔 옷을 꺼내입기 좋은 날씨들의 향연이다. 그리고 봄의 의미를 알리는 또 하나의 주제. 바로 옷장에 고이 모셔두다 다시금 꺼내입는 교복과 새 학기의 시작이다.
동복과 새 학기를 동시에 마주하는 전날, 홍중은 매우 분주했다.
"엄마아 나 넥타이 어디 있지?"
"옷장 잘 살펴봐! 그러게 잘 두라고 했지!"
"아 분명 여기 놔뒀는데!"
우당탕 온 집안에 요란한 소음이 가득했다. 다들 홍중을 향해 시끄럽다고 다그치다가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고개만 젓고 말았다. 쟤는 누굴 닮아 저렇게 덤벙댈까. 당신이지 뭐. 됐으니까 두부 좀 꺼내와요. 부모님은 난리도 아닌 홍중을 보며 시시콜콜한 장난을 쳤다. 누군가는 자신의 방에서 내일의 새로움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또 누군가는 부엌에서 오늘을 위한 마지막 한 끼를 준비하며 저 나름대로의 분주함을 표했다.
"여보, 두부 떨어진 거 같은데?"
"어메? 벌써 다 먹었나?"
"아들, 나가서 두부 좀 사 와야겠다!"
"아 바쁜데 왜애!"
"잠깐이면 되잖아- 밤산책한다 생각하고 좀 다녀와."
"이씨, 아 알겠어 다녀올게요!"
홍중은 방에서 몰래 볼멘소리나 내다 벙벙한 맨투맨에 얼굴을 끼워 넣었다. 투정을 부린 것 치곤 순순히 따르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남은 돈 쓰지 말고 잘 가져와! 네엡!
-
지익지익. 발밑에서 질질 끌리는 삼선슬리퍼가 일정한 소음을 냈다. 집에서 마트까지는 가까웠다. 걸어서 오 분이면 도착이었다. 아빠가 말한 두부와 몰래 하나 더 집은 먹고 싶던 요구르트를 들고 내심 뿌듯하게 밖으로 나갔다. 요구르트는 엄마한테 들킬까 봐 가는 길에 빨대를 꽂아 빠르게 입에 물었다. 시큼달달한게 언제 먹어도 참 기분이 좋았다.
바람도 선선한데 그렇게 춥지는 않은 게 진짜 봄이 오긴 왔다 싶었다. 그렇게 정신없고 급급했던 하루였는데 고작 오 분을 밖에 나왔다고 괜스레 들뜨는 느낌이었다. 멍하게 이런 생각이나 하다 보면 어느새 집이 코앞에 보였다.
냐옹-
"……어?"
냐오오-
그렇게 별일 없이 집에 거의 도착할 때 즈음,
냐옹-
발목 부근에서 느껴지는 따뜻하고 말랑한 촉감, 그리고 갓 태어난듯한 얇은 소리. 반사적으로 고개를 푹 숙이자 그 자리엔 갈색 무늬를 가진 예쁜 새끼고양이가 존재했다. 고양이? 여기 고양이가 있었나. 근데 새끼는 만지면 안 된다고 했는데. 야 너 엄마는 어디 갔어. 얼른 엄마한테 가.
라고 말은 했지만, 눈길은 하염없이 새끼고양이의 몸짓을 쫓기 바빴다. 더군다나 어찌나 사람을 좋아하는지. 쓰다듬어 달라고 이미 홍중의 발목에 한참을 부비적거린 덕에 사람 냄새까지 폴폴 풍기게 되었다. 곤란한데…… 야 너 어쩌려고 그래. 난 이제 모른다? 먀먀. 우씨……. 난감한 홍중의 속도 모르는지 고양이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눈도 꾸욱 감고 아예 홍중의 손에 자기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제 자포자기한 홍중은 한숨이나 포옥 쉬고 조심스럽게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따끈따끈하고 포슬한 촉감. 털이 보드라운 게 어쩔 수 없이 기분이 몽글해지긴 했다. 덕분에 팔목에 걸려있는 검은 비닐봉투도 잊은 지 오래였다. 밥은 먹었나 얘. 배고파? 물은, 물은 마셨어? 근데 애기는 뭘 먹어야 하지. 쓰다듬는 손길은 멈추지 않은 채 생각의 꼬리를 한참을 물었다.
"밥은 이미 먹었어요."
"……네?"
꽤나 길게 늘어질 줄 알았던 꼬리였는데, 그 꼬리는 예상보다 빠르게 잘려 나갔다. 갑작스레 들린 낯선 목소리에 의하여. 홍중은 잠시 당황하다 목소리의 근원이 있는 곳으로 눈을 치켜떴다. 그 시야에 잡힌 건 처음 보는 젊은 남자였다. 아마도 제 또래인 것처럼 보이는. 멍하니 자신의 옆에 자릴 잡고 무릎을 꿇는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의 손에는 종이 접시가, 또 다른 한 손에는 생수가 든 페트병이 있었다. 아마도 밥을 먹었다던 이 고양이에게 물을 주러 온 눈치였고, 밥을 준 장본인 역시 이 남자일 것으로 추정됐다. 홍중은 익숙한 폼으로 적당량의 물을 따라 건네는 남자에 말없이 눈만 꿈뻑거릴 뿐이었다.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작은 고양이를 만지는 남자는, 이 작은 동네에서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검은 볼캡을 푹 눌러쓰고 있어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이 움직임이 바뀔 때마다 힐끔힐끔 인상이 보이곤 했다. 날카롭지만 그렇다고 사나운 인상은 아닌 눈매를 가진 남자였다. 홍중은 저도 모르는 새에 고양이가 아닌 그 남자에게로 시선을 고정하여 관찰하기 바빴다. 이미 이 남자가 제 옆자리를 꿰찬 뒤로, 고양이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네, 네?"
"계속 쳐다보길래."
"아, 아니…… 주, 주인인가 해서요."
"주인은 아니고, 그냥 몇 번 밥 준 게 다예요."
"아 그러시구나……."
그럼 주인이겠냐 밖에서 밥 사다 주는데. 이 멍청한 놈아. 속으로 몇 번을 한탄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방심한 사이에 불현듯 들어온 질문에 생각도 할 틈 없이 막 내뱉은 말에 후회를 곱씹었다. 방금 되게 이상하게 봤으면 어떡하지.
지이이잉-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스스로를 혼내고 있을 때 즈음이었다. 왼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의 화면이 밝게 켜지더니 떨리는 진동이 홍중을 재촉했다. 뭐야. 화면을 뒤집어 확인해봤다. 그러자 무관심했던 정신이 단숨에 번뜩였다.
"미친, 망했다."
발신자는 엄마였다. 그제서야 까맣게 잊고 있던 무언가가 번뜩 떠올랐다. 제 손목에 힘없이 걸려있는 검은 비닐봉투. 아 맞다. 두부! 시간을 확인하니 이미 삼십 분은 지나있었다. 고양이니, 주인이니. 그런 거에 걱정할 게 아니었다. 그런 자잘한 것에 고민할 틈도 없이 바로 앞에 더 한 일이 있었다. 대충 봐도 앞으로 펼쳐질 잔소리가 귓가에 훤히 웅웅거렸다. 벌써 이마가 지끈거리는 게 이미 된통 깨진 기분이었다. 옆에서 모르는 그 남자가 저를 궁금한 눈으로 쳐다봐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여, 여보세요?"
'얘 콩부터 갈아 만들어? 두부 사 오는 게 뭐 이리 오래 걸려? 어디 딴 길로 샜어?'
"아 그런 거 아니야! 알았어. 지금 들어가!"
'얼른 들어와 저녁 다 차렸어!'
빠르게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기."
반사적인 행동인 듯했다. 갑자기 자리를 뜨려는 홍중을 눈치챈 건지 남자는 무의식에 홍중의 손목을 붙잡았다. 제 행동에 스스로도 놀란 건지 잡아놓고는 바로 놓아버렸지만. 그에 홍중도 다리에 힘이 풀릴 뻔한 걸 겨우 숨겨냈다.
"네……?“
"아, 그…… 츄르는, 잘 안 먹더라고요. 물도 너무 찬 거 말고 미지근한 걸 좋아하고."
"그게…… 무슨,"
"이름은 치즈예요."
"……."
"그, 그럼, 들어가세요."
"아, 네…… 그쪽도요."
횡설수설. 무슨 말을 나눈 지도 모르는 채, 이상한 인사를 끝냈다. 서로 고개를 짧게 끄덕, 하곤 홍중은 도망치는 사람마냥 자리에서 뛰쳐나와 급한 티를 내며 집으로 달려갔다. 남자는 아직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고양이와 함께했다. 멋도 없는 삼선 슬리퍼의 마찰음이 떠나간 자리부터 저 멀리까지, 더 거세게 퍼졌다.
그런데, 아마 죽을 때까지 모를 거다. 푹 숙여 내리깐 시야에 미쳐 잡히지 않은, 서로의 귓가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는 걸.
-
언제 해도 실감이 안 나는 날이다. 그놈의 새 학기가 올해도 어김없이 정말 찾아왔다. 새 학기의 시작은 어제보다 요란했다. 고작 하루가 더 지났다고 금세 후덥지근해진 기온과 시끄러운 반 아이들의 목소리는 목덜미의 감각을 뜨겁게 당겼다. 두꺼운 마이가 아니라 가디건이 훨씬 잘 어울리는 날씨였다. 그 열기 속에 홍중은 홀로 여유롭고 싶었다. 누군가와 특별히 어울리기보단, 늘 그랬듯 창가의 제일 뒤쪽 자신의 자리에서 고요히 흩어지는 구름의 조각이나 감상하며 줍기 바빴다. 오전의 햇빛과 뜨뜻미지근한 공기 속, 간간히 숨통을 트여주는 바람은 아무리 어지러운 틈이라도 사람을 나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팔에 기대어 눌린 얼굴에 조금씩 졸음 기가 섞였다. 잔디에 누워있는 고양이처럼 평화롭게 눈이 감겨왔다.
몽롱함을 얼마 가지 못해 완전히 깨졌다. 조회 시간을 알리는 아홉 시의 타종이 스피커로 요란스레 울렸다. 아깐 졸린 고양이처럼 얌전했던 정신이 이번엔 뭔가 맘에 들지 않는 것에 삐친 고양이처럼 예민해졌다. 괜히 눈썹이 한 번 꿈틀거렸다. 이번 조회가 지나면 이젠 정말 새 학년 새 학기의 시작이라 홍중은 왠지 모르게 도로 잠들 수가 없었다. 그래도 착실한 본성은 어디 가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군소리 없이 일어나 허리나 쭈욱 펴봤다.
부스스해진 정신을 부여잡고 있으면, 언제나처럼 당연하게 출석부를 손에 잡고 들어오는 담임선생님을 응시했다. 그러다,
"……."
그 시선은 여전히 담임선생님이 아닌, 어딘가로 돌아갔다. 미닫이문 밖에서 불안한 듯 흔들거리는 인영에게로. 뭔가 낯선 듯 익숙한 느낌에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인데. 홍중이 조용히 눈만 도륵 굴리고 있을 때 다른 아이들은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선생님과 떠들 거리기 바빠 보였다. 잘 지냈냐-. 네엡. 뭐 별일 없어 보이니 다행이고, 오늘은 새로운 소식이 있어서. 뭔데여어. 우리 반에 새로운 친구가 함께하게 되었다는 거? 오호-. 담임은 꽤 젊은 나이에 뽐낼 수 있는 재치를 보여주었다. 솔직히 그냥 전학생 왔다는 걸 예쁘게 돌려 표현한 거지만. 담임의 한 마디의 한결같이 시선을 고정했던 홍중을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 역시 홍중과 같은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눈치껏 저에게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움찔, 한 번 잘게 떤 어깨가 유리 너머 적나라하게 보였다. 상당히 바보 같네. 바보를 보며 같은 바보인 홍중이 남몰래 피식 웃었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괜히 무언의 친숙함이 들었다. 뭐지. 왜 이렇게 익숙한 거지.
"들어와서 인사하면 돼."
담임이 문밖으로 외치자 오래된 미닫이가 덜컹, 한 번 움직임을 보이더니 이내 드르륵. 아주 살짝, 소심히도 벌어진 틈으로 얇지만 그렇다고 덩치가 작진 않은 남학생이 들어왔다. 이 상황이 몹시 부끄러운지 수줍게 물든 귓바퀴와 목덜미를 보여주며.
아 세상에. 다들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바쁠 때, 홍중은 홀로 눈만 커진 채 멍청한 탄식을 내뱉었다. 익숙하다 생각한 느낌은 틀린 게 아니었다. 분명 그 사람이 맞았다. 어제 집 앞에서 본 그 남자. 이미 고양이의 밥을 줬다 했던, 그 검은 볼캡 남자. 그 남자가 지금 저랑 같은 교복에 같은 색 명찰을 차고 다시금 제 눈앞에 나타났다. 우연이 아닌, 인연도 이렇게 신기한 인연이 없었다.
"편하게 말 놓고 소개해."
"안녕. 어…… 진주에서 온 박성화고. 잘 부탁해요."
풉. 누군가에게 들리진 않을 정도지만, 또렷한 웃음이 사이다를 열듯 터져버렸다. 맹한 표정으로 성화라는 어제의 그 사람을 바라보다 한순간에 정돈도 못 한 반응을 흘려버렸다. 아니 반말을 할 거면 제대로 하든가, 뭔 존대랑 섞고 있냐.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모습을 하나하나 볼 수 있었다. 앉아있느라 체감할 수 없던 제법 큰 키에, 가려져 있던 걸 들추니 한눈에 봐도 확 튀는 외모, 그들을 중화하듯 동그란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치즈라는 그 고양이같이 끝이 뾰족한 눈과 오똑한 코. 얼굴값 못하게 은근히 바보 같은 면도 보이고, 어색한 미소마저 꽤 웃긴 놈. 그리고,
"성화는 저기 맨 끝 홍중이 옆자리에 앉으면 되겠다."
"아, 네."
홀수인 반 인원 탓에 텅 비어있던 나의 옆에 자리 잡은 새로운 짝. 이것이 구면인 전학생 박성화를 향한 홍중의 첫인상 감상평이었다. 홍중은 자신만큼 바보인 우리 전학생이 생각보다 맘에 들어 보였다. 머릿속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 동안, 자신에게 다가오는 굳은 성화를 바라보며 홍중은 웃음기를 잃지 않았다.
"안녕, 전학생."
"어, 안녕. 잘 부탁……어?"
학교에서 지루함만을 느꼈던 홍중에게, 이번 학기는 꽤나 흥미로울 예정인 듯 보였다.
-
뭘 한 건지 모르겠다. 짝씩이나 된 주제에 반가운 건 둘째 치고 은근하게 흐르는 어색한 기류와 이제 좀 말이나 틀까 해서 입을 열려 하면 시작되는 수업의 나열에 정신없이 시간을 써버렸다. 눈 몇 번 깜빡하니 어느덧 모든 학생이 가방을 메고 하나둘 교문을 빠져나갔다. 아쉬움이 가득한 홍중 역시 그 모든 학생 중 하나였다. 마지막 교시 즈음, 용기 내서 성화에게 같이 하교를 할까 물었지만, 자긴 할 일이 있다며 먼저 급하게 발을 옮겨버렸다. 서운해할 일도 아닌데 괜스레 씁쓸해져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디다스 운동화 앞코로 돌멩이를 걷어차며 화풀이를 해도 기분은 도통 나아지지 않았다. 우씨, 기껏 물어봤는데 사람 민망하게.
"……어?"
집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은 마치 데자뷰 같았다. 시계가 어제로 머문 것처럼. 매우 흡사한 상황이었다. 마치 양반은 못 되는 서민같이, 떠올리니 곧이곧대로 등장해주셨다.
이 좁은 길에 있는 건 딱 셋. 나와 박성화, 그리고 고양이.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후줄근한 차림이 아니라는 것과 이번엔 그 애가 먼저 고양이, 아니 치즈라는 아이와 함께였다는 것. 꾹 다문 입술 안쪽을 잘근 씹으며 상황 파악을 했다. 그러니까, 먼저 급하게 갈 정도로 해야 하는 일이 쟤 밥 주는 거였어? 파악을 끝내니 황당함에 허, 하고 바람 빠지는 탄식이 나왔다.
"어이 냥집사."
"아 깜짝이야……!"
한곳에 정신이 팔려있는 성화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깨에 손 올리니 귀신이라도 본 것마냥 화들짝 놀란 게, 주인 몰래 간식을 먹다 걸린 토끼 같았다.
"혼자 뭐 해. 먼저 간다던 게 여기였어?"
"아, 그……."
"또 치즈 물 주려고? 미지근한 거?"
"응, 어쩌다 보니……."
"이름도 지어줬으면서 뭘 어쩌다야."
"그건 그냥, 왠지 자주 마주쳐서 그런 거지 뭐."
"어련하시겠어."
질린다는 표정을 지은 홍중은 그런 표정과 달리 자연스럽게 성화의 옆자리에 붙어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그때와 같이 행동했다. 치즈에서 머물던 시선을 옮겨 성화를 관찰했다. 어제와 분명 같은 장면인데 너무나도 색다르게 느껴졌다. 사람이 이렇게도 다를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다정한 건 똑같은데 미묘하게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건 츄리닝이 아니라 교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거고, 어두움 아래 가로등 불빛으로 그늘졌던 것과 달리 오늘은 햇빛에 얼굴이 또렷하게 보여 그런 거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넘겨버렸지만.
관찰은 빠르게 마쳤다. 또 저를 쳐다보는 걸 인지할까 봐 얼마 지나지 않아 시선을 돌렸다. 혹시라도 이상한 애로 생각하면, 그것만큼 곤란한 경우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치즈에게 밥을 주는 내내, 성화는 조용했다. 홍중은 지나치게 정적만 가득한 이 그림에 손에 땀이 찼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고 싶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침묵만 유지할 순 없었기에.
"……넌 얘가 그렇게 좋아?"
"응, 근데 얘가 아니라 다른 애랑 마주쳤어도 밥은 줬을 거야."
"무슨 말이야?"
"고양이는 고양이잖아."
"너 되게 재밌는 애다."
"……어?"
"아니야 그냥 한소리야. 난 이제 간다. 숙제해야 해."
어딘가 이상한 시답잖은 대화를 하는 내내 둘은 치즈만 바라보고 있었고, 치즈의 밥그릇은 점차 바닥을 보였다. 야금야금 밥을 먹는 동안 시간은 꽤 많이 흘러있었다. 슬슬 집에 가야 하는 시간. 헤어짐을 건네면서도 홍중은 소심하게 가방끈을 쥔 손을 쥐락펴락해댔다. 이것저것 얘기를 나눠놓고도, 무언가 할 말이 남은 것처럼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야."
"응……?"
"그…… 내일은 치즈 밥 주러 같이 오자. 성화야."
"……."
"잘 들어가라!"
"……어, 그래."
숨을 한 번 들이키고 겨우 툭 내뱉었다. 그제서야 마음이 가벼워졌다. 뒤를 돌 때 미련의 무게도 남아있지 않았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리고 어제처럼, 아직 떠나지 않아 같은 자리에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성화의 입꼬리도, 홍중의 인영이 멀어지는 사이 슬며시 올라가 있었다.
"……너도 잘 들어가. 홍중아."
잘 가. 내일 또 봐.
왜 느끼는 건지도 모를 아쉬움에 들리지 않을 인사도 함께 읊조려봤다.
새 학기의 첫날이 점차 저물어갔다. 길어진 해에 하늘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하교한 지가 한참을 지나서도 옷을 갈아입지 못해 교복 차림인 둘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집에 들어가서도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만 봐도 꺄르르 웃는다는 애들처럼 별일도 없었는데 기분이 들떠있었다.
십 대의 마무리. 고작 일 년을 남기고 만나게 된 새로운 인연.
처음으로 혼자가 아닌 둘로 시작하는 새 학기와 봄. 이 계절은 홍중, 그리고 성화의 학창시절 마지막이 될 열아홉의 끝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밀크티, 줄여서 크티입니다.
후기를 쓰고 있는 현재 시각은 오전 5시 22분이네요. 여러분은 포근한 꿈을 꾸고 계실까요. 부디 그러길 바랍니다.
만약 이 후기를 읽어주시고 계시다면, 아마 이번 제 계간 작품도 읽어주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에 쫓기며 부족한 퀄리티로 제출한 작품이기에 아쉬운 점이 굉장히 많은 글인데, 그럼에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한 가지 여담으로,
읽으시면서 느끼셨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문단하고 끝으로 가면 갈수록 내용의 분위기가 정말 다르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으셨을 겁니다. 미리 조금 언급하자면, 그 문단은 <체감>이라는 주제로 이 시리즈를 이어가는 점에서 스포일러로 작용될 수 있는 문단이랍니다. 나름의 재미 요소로 넣어봤는데 어째 흥미롭게 읽혔을까요. 부디 그랬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청게(꺄악)라는 주제를 제 취향 중 일 번으로 생각할 만큼 정말 사랑하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써볼 수 있게 되어 굉장히 기쁜 마음이 듭니다.
그런 의미로 이렇게 사계절 동안 계간이라는 좋은 기회를 주신 총대님, 그리고 함께 힘써주시는 편집팀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또한 매우 부족한 이 글을 쓸 때 많은 도움을 준 저의 트위터 친구들, 현실(?) 친구들에게도 감사 인사드립니다.
막상 후기를 쓰니 감사 인사만 드리고 끝내는 기분이라 머쓱하네요. 하하.
후기를 조금 횡설수설하게 끝내는 감이 있지만......
아무튼 함께 성홍하는 우리 가족 여러분, 항상 감사드리고, 모쪼록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래오래 봅시다!
성홍, 성홍러 최고!
아 마지막으로,
박성화 김홍중 얼른 청첩장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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