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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끝엔 사랑을 씌워 주세요>, 두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6월 21일
  • 9분 분량

피부에 닿아 오는 공기가 꿉꿉했다. 밖에서는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에 창이 조금 흔들리는 게 보였다. 박성화의 집은 하천 근처에 있었다. 베란다로 물이 흘러가는 게 훤히 보였다. 장마철만 되면 물이 산책로 경계까지 불어나서 장마철만 되면 통행금지 표지판으로 입구가 막혔다.


박성화는 방금 막 다 된 빨래를 건조기에 넣었다. 건조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박성화는 창밖을 봤다. 황토색을 띠는 물이 위태롭게 흘러가다가 산책로까지 흘러넘쳤다. 이번 장마가 유독 지독했다. 며칠을 내리 쏟아 내렸다. 이 끈질긴 장마는 다음날 끝날 것이다. 조금씩 잦아드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들면, 박성화는 다시 장마의 시작에서 눈을 뜰 것이다. 박성화는 장마에 갇혀 있다.




/




처음 장마에 갇혔을 때, 그러니까 박성화가 자꾸만 같은 시간을 맴돌기 시작한 날은 평범했다. 기상캐스터가 장마철의 시작을 알렸을 때, 박성화는 저 멀리 묻혀 있던 건조기 코드를 끄집어내서 플러그에 꽂아 두고, 미뤘던 에어컨 필터 청소를 마치고, 뜨거운 가스레인지 앞에서 땀 뻘뻘 흘려 밥 만들어 먹었다. 짝 찾아 울어대는 매미 소리와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 모든 게 평소와 다를 것 없었다. 박성화는 소파에 누워 SNS 뒤적거리다가 눈을 감았다.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끼며 점점 의식이 흐려졌다.


박성화는 진동 소리에 눈을 떴다. 전화. 김홍중한테 온 전화였다. 김홍중이 먼저 전화를 걸어오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박성화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홍중아?

성화야, 지금 나올 수 있어?


박성화는 지갑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응, 했다. 휴대폰 너머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김홍중은 우는 것 들키기를 죽기보다 싫어했고, 박성화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어디야? 지금 갈게. 박성화는 바로 집을 나왔다. 하늘은 잿빛 구름에 묻혀 흐리기만 했다.


김홍중이 또 이별을 맞은 날이었다. 김홍중은 겉보기와 다르게 순애적인 구석이 있어서 누구랑 헤어지기라도 하면 일주일은 내내 후폭풍으로 고생했다. 김홍중이 헤어지면, 이기적인 말이지만 제게도 희망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김홍중이 힘들어하는 걸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박성화는 김홍중이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 감정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박성화의 헌신이었다.



김홍중의 연인들은 김홍중을 몰랐다. 그들이 김홍중을 사랑했던 것엔 틀림이 없겠지만, 사랑을 위해 무얼 하려 들지 않았다. 김홍중이 감정을 표현하려 어떻게 구는지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놓고 모든 죄를 김홍중한테 씌웠다. 순수한 애정으로 사랑했던 김홍중을 죄인 틀에 가뒀다. 네가 날 사랑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그래도 박성화는 그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김홍중이 사랑했던 걸 박성화가 미워할 순 없었다.



김홍중은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옆에 소주병엔 소주 절반 정도 남아 있었다. 박성화는 김홍중의 몸을 약하게 흔들었다. 홍중아, 자?


안 자.

몸은 괜찮아?

안 좋을 게 뭐 있어.


헤어진 게 뭐 대수라고... 김홍중은 코를 훌쩍였다. 그러고는 옆 의자 톡톡 두드렸다. 박성화는 김홍중 옆에 앉았다. 김홍중이 평소와 달랐다. 적어도 힘들어 보이진 않았다. 이번엔 좀 순하게 지나가려나 보다 싶었다.


이번엔 괜찮아 보이네.

좀 슬프긴 해.

그래두. 덜 힘들어 보여서.

당연하지. 내가 찼는데.


응? 박성화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시나리오는 예상하지 못했다. 대체 왜? 박성화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김홍중을 쳐다봤다. 김홍중이 작게 킥킥 웃었다.


왜 그렇게 놀라.

아니 그냥...

내가 항상 차일 줄 알았어?

그건 아닌데...

깨달은 게 하나 있었어.


지금까지 내가 한 건 사랑이 아니었다는 거. 내뱉어야 사랑인 거잖아. 걔넨 날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고, 자기들 이상적인 방식에 맞추라고 요구하기 바빴지. 걔네가 나한테 마음이 있는 것까진 부정 못 하겠어. 그래도 마음은 마음일 뿐이잖아. 그건 내 것이 될 수 없고, 닿을 수도 없는 거지. 받지 못하는 사랑도 어떻게 사랑이라고 할 수가 있겠어. 그걸 알고 나니까 갑자기 다 신물이 나는 거야. 아깐 비참하기만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후련해.


그때 박성화는 김홍중한테 묻고 싶었다. 내가 하는 건 사랑이 맞냐고. 지금의 김홍중은 하나도 예측할 수 없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이 예측 불가능성이 박성화를 불안하게 했다. 더 이상 김홍중이 제가 아는 김홍중이 아니라는 불안감. 제 모든 감정이 부정당할 것 같은 불안감. 김홍중은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박성화도 따라 일어났다.


박성화는 김홍중을 사랑한다. 김홍중과 같이 있고 싶고, 몸을 만지며 애정을 나누고 싶다. 하지만 그런 행위들은 불확실하다. 헤어지고 나면 아픈 일, 부끄러운 과거로만 남을 것들. 박성화는 불확실한 것을 싫어했다. 예상할 수 없는 게 얼마나 위험할지 알 수가 없으니까. 사서 불확실한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친구라는 확실성에서 굳이 언제 흩어질지 모를 관계로 나아가는 것을 박성화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박성화가 지금까지도 김홍중과 친구인 이유였다. 김홍중이 이성보다 동성에 호감을 느낀단 걸 밝혔을 때도, 첫 이별로 힘들어하는 김홍중 옆을 묵묵하게 지키면서도 친구의 영역에 머물렀던 이유였다. 이건 모순적이지만, 박성화가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김홍중은 이게 사랑이 아니랬다. 묵혀두고 자기 혼자만 가져가는 건 사랑이 아니라고. 난 널 사랑하고 싶지만, 너랑 멀어지기도 싫은데. 너랑 항상 같이 있고 싶은데. 그런데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난 뭘 해야 하지? 내가 널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그날 박성화는 김홍중을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와서 바로 침대에 누웠다. 참을 수 없는 피로를 느꼈다. 제 몸에 맞춰 매트리스가 푹 꺼지는 걸 느끼면서 잠이 들었다. 곧 물방울이 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



처음 박성화가 시간 속에 갇힌 걸 깨달았을 땐 그랬다. 내일이면 그친다던 장맛비가 그치질 않았고, 기껏 사 온 반찬이 냉장고에 없었고, 진작 왔던 택배가 다시 문 앞에 놓여 있었다. TV에서는 시간 이동을 소재로 한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박성화는 황급히 제 휴대폰을 확인했다. 이미 지나 온 시간을 박성화는 다시 살고 있었다.


그땐 어땠더라. 그때 박성화는 제게 일어난 일이 그저 기나긴 꿈이길 바라면서 보냈고, 두 번째 장마가 시작됐을 때 비로소 인정했다.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든 걸 인지하고 난 후로는 꽤 순조로웠다. 언제까지 지속될진 몰라도, 당장의 휴식은 박성화가 환영할 일이었다. 그간 바빠서 미뤘던 드라마를 정주행하고, 후배에게 추천받아 충동구매를 해놓고 한 번도 펼치지 못한 책을 읽었다. 비가 격하게 내리는지라 나갈 수는 없었다. 괜히 나갔다가 무슨 봉변을 볼지 모르니까. 그렇다고 마냥 놀지만도 않았다. 내일 당장이라도 박성화가 원래 있어야 할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였다. 놀 땐 놀고 일할 땐 일하고.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박성화는 그렇게 두 번째 장마를 보냈다.


세 번째 장마까지도 박성화는 그럭저럭 잘 지냈다. 그렇게 짧게 끝나지 않을 것은 예상했던 일이었다. 습기가 찬 방에 제습기 틀어놓고서, 창문을 다 닫아도 새어 들어오는 빗소리를 들으며 멍때렸다. 건조기 돌아가는 거 구경하다가 알림 하나 없는 휴대폰 만지작거리고, 노트북 켜서 원상 복귀된 일을 처음부터 시작했다. 그러면서 박성화는 생각했다. 영원히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네 번째 장마. 박성화는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꼼짝없이 굵은 빗줄기 속에 갇혀 있는 게 서서히 박성화를 옥죄어 오기 시작했다. 집이라도 벗어나 보려 나섰지만, 소용은 없었다. 그 뇌우를 뚫고서 어딜 갈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결국 박성화는 현관문을 다시 닫아야 했다.


그때부터 박성화는 제 주위에 있는 것들의 상실을 느꼈다. 휴대폰은 그 며칠 동안 한 번도 알림 오는 일이 없더니, 확인해보니 먹통이 되어 있었다. 연락이 오지도 않고 가지도 못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고립. 완전한 고립이었다. 박성화는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



/



보고 싶다...


박성화는 혼잣말을 읊조렸다. 며칠이 지났는지 정확히 알진 못했지만,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럼에도 박성화는 아직 장마에 있었다. 그날 김홍중은 잘 들어갔는지, 잠은 편하게 들었는지. 갑자기 새벽에 뒤늦은 후폭풍으로 고생하고 있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는데도 알 길이 없었다. 김홍중에게 연락할 수도, 찾아갈 수도 없었다. 박성화가 아는 건 내일도 역시 장맛비는 내릴 거라는 것뿐이었다.


몇 번째 장마인지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비구름이 태양을 완전히 가로막아 사방이 어둡기만 했다. 시간 감각을 잊기 터무니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시간도, 날짜도 정확하게 세지 못하고 종종 까먹곤 했다. 현실에서 멀어지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하고 박성화는 생각했다. 중간중간 루프를 벗어나려 노력했지만 다 헛수고였다. 공상 과학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인지라, 초현실적인 이 상황에 적용할 수 없었고, 밤을 새우거나, 날짜가 바뀌는 시간에 집밖에 나와 있어도 늘 똑같았다. 자정이 되면 달력은 다시 장마 시작일을 가리켰다.


박성화는 이 상황에 무기력을 느꼈다. 어쩌면 내가 원래 있어야 할 곳은 여기인 것 아닐까 하는 헛된 생각도 들었다. 그럴 때 박성화는 과거를 찬찬히 헤아려 보곤 했다. 적어도 지금의 박성화에게 미래를, 너무나도 빤히 보이는 미래를 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처음 기억이 시작될 때부터 천천히 거슬러 올라갔다. 놀이터에서 대차게 넘어져서 코피 흘렸던 일, 소풍 가서 친구가 남긴 도시락 대신 먹었다가 뺏어 먹은 걸로 오해받아 혼난 일, 첫 중간고사 성적표 받고 충격받은 일, 마지막 지망에 쓴 고등학교에 배정되고 친구한테 위로받은 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여기까지 생각하고 박성화는 작게 웃었다.


그때 박성화는 김홍중을 처음 만났다. 처음 와 보는 곳인지라 길 못 찾아 헤매던 박성화가 김홍중 발견하고 불쌍한 눈으로 길 물어봤었다. 별말 않고 데려다 드릴게요, 하기에 착한 사람인 줄 알고 보니 저랑 같은 신입생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박성화는 학교까지 따라 들어오는 김홍중 보고 여기까진 안 오셔도 돼요, 했고 김홍중은 저도 여기 학생인데요, 했다. 박성화는 아... 하고 얼빠진 반응을 했다. 괜히 쪽팔려서 말 더 안 걸었다. 귀에 열이 오른 걸 봐선 귀가 빨개졌을 것이었다. 박성화는 김홍중 힐끔 봤다. 이 모양이 웃긴 건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창피해 미치겠는 와중에도 박성화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웃는 거 진짜 예쁘다.


김홍중이랑은 반까지 같이 들어왔다. 적어도 1학년 층에선 흩어질 줄 알았는데, 졸졸 따라오더니 같이 반에 들어간다. 길 잃고 좀 도와달라고 붙잡은 사람이 같은 반이었던,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김홍중이랑은 금방 친해졌다. 미리 안면을 튼 것도 있었고, 자리 배치도 가까워서 그랬다. 김홍중은 생긴 대로 입이 짧아서 박성화한테 음식 잘 나눠줬다. 어쩌다 한 번 급식으로 나온 빵도 반 나눠서 주고, 작은 음료수 어떻게든 하나 더 얻어와서 박성화 챙겨줬다. 그러면서 박성화한테 그랬다. 넌 많이 먹어야 예뻐. 다른 애들이 야유하기 바쁠 때 박성화는 그 말이 너무 좋아서 더 열심히 먹었다. 볼 빵빵하게 음식 넣는 박성화 보고 김홍중은 햄스터 닮았다며 깔깔 웃었다.


박성화는 김홍중이랑 있으면 너무 행복했다. 김홍중은 그 나이대 애답지 않은 어른스러움이 있어서 부담스럽지 않고 편했고, 그러다가 한 번씩 애 같은 모습 보여줄 때, 그게 정말 귀여웠다. 계속 같이 있고 싶었다. 그때부터 박성화는 손놓았던 공부를 시작했다. 김홍중이랑 같은 대학 가려고. 머리 좋은 김홍중이랑 친구 계속 하려고. 공부 하나도 안 하던 머리 오기로 코피 터져가면서 공부했다. 그래 봤자 드라마틱하게 성적이 오르진 않아서 같은 대학은 결국 가지 못했다. 그래도 여전히 박성화는 김홍중의 친구였다.


대학생 때 김홍중은 처음 연애했다. 즐겁게 사랑 얘기 늘어놓는 김홍중에 박성화는 애써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분명 좋은 일은 맞는데 씁쓸했다. 친구의 행복을 빌어 주지 않는 것에 자괴감을 느꼈다. 제 박함과 이기심을 탓하기도 하고, 괜한 친구의 질투로 취급해 보기도 했지만 그건 답이 아니었다. 박성화는 그제야 마음 한켠에서 이리저리 회피하던 답을 골랐다. 박성화는 김홍중을 사랑하는 게 맞았다.


박성화는 자신이 김홍중의 우선순위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내 섭섭했고, 아주 가끔은 김홍중이 연애 같은 걸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지만, 여전히 박성화는 김홍중의 행복을 빌어야 하는 소중한 친구였다. 다른 사람, 심지어는 연인까지도 넘볼 수 없는 자리. 박성화는 그 자리를 꿰찼다. 성화는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야 했다.


박성화는 또 떠올렸다. 같이 여행 갔던 일, 숙소 침대 두 개에 각자 누워서 잠들려다가 혼자 김홍중 옆에서 자고 싶다고 생각하고 부끄러워서 이불 뒤집어쓴 일, 같이 밥 먹으려는데 애인 전화에 갈까 말까 고민하는 김홍중한테 가지 말라고 괜히 심술부린 일, 거기에 김홍중은 알았어, 하며 다시 의자에 앉았던 것도 다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런 순간들을 수놓고 싶었다. 하나하나 회고하면서 웃을 수 있게. 박성화는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장마를, 똑같은 구간을 맴돌기만 하는 시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여기에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혼자 견디고, 삼키고, 감당해 봤자 그건 박성화만의 몫일 뿐이니까. 그건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테다. 박성화는 나가기로 했다. 제 흰 운동화가 흙탕물에 얼룩져도, 강한 바람에 우산이 뒤집혀도, 옷이 빗물에 축축하게 젖어 들어도 아무래도 괜찮았다. 박성화는 지금 당장 김홍중을 보고 싶었다.



박성화는 우산을 집어 들었다. 어떤 바람에도 끄떡없을 튼튼한 우산. 거기에 흰 운동화 신고 집을 나왔다. 문을 열자마자 바람에 실려 온 물방울이 피부에 닿았다. 바람결이 머리카락을 헤집고 지나가 엉망이 되었다. 그래도 박성화는 괜찮았다. 박성화는 그저 걸어갔다.


나온 곳 끝엔 김홍중이 있었다. 김홍중? 박성화는 멈칫했다. 홍중이가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제가 미쳐서 환상을 보는 거 아닌가 하고 의심할 때, 김홍중이 박성화를 향해 뛰어왔다. 운동화로 물 찰팍찰팍 튀기면서. 비로 흐려진 김홍중의 형체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제야 박성화는 착각이 아니란 걸 알았다.


홍중아.

너 왜 연락 안 받았어?

...

너랑 그때 헤어지고 나서 잘 들어갔냐고 카톡 보내도 답장도 없고 읽지도 않고. 처음엔 그냥 자는구나 싶어서 놔뒀는데 칼같이 답장하던 애가 날이 지나도록 답장도 안 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다들 모르겠다고 하기만 하고. 난 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 비도 이렇게 많이 오는데 어디서 뭘 하는지를 알 수가 없고.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너 이사했잖아. 호수도 몰라서 뭘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진짜 걱정했는데. 김홍중은 깊게 한숨 푹 쉬고서 우산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박성화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감정이 북받쳐서 그랬다. 갑작스러운 눈물에 당황하는 김홍중을 박성화는 그냥 안았다. 훌쩍이는 소리가 김홍중의 귀에 곧바로 들렸다.


보고 싶었어 홍중아...

우리 며칠 전에도 봤잖아.


박성화는 별말 않았다. 박성화가 겪은 일은 허무맹랑한 일이고, 김홍중이 그걸 믿을 일도 만무했으니까. 대신 박성화는 다른 말을 하기로 했다. 이 순간마저도 다시 없던 일이 될 거라면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넘고 싶었다. 조금, 어쩌면 많이 불확실하더라도 친구의 경계선을 넘어 보고 싶었다. 등 뒤에선 김홍중의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홍중아, 놀라지 말고 들어. 내가 널 좋아해. 너랑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아. 그 순간에 갇히고 싶을 만큼. 네가 행복하면 나도 좋아서. 그래서 네 애인도 미워할 수가 없었어. 네가 사랑하는 걸 어떻게 내가 미워할 수가 있겠어. 네가 걔네랑 헤어지면 나도 너무 슬펐어. 나라면 그럴 일 없을 텐데. 나라면 더 잘해줄 수 있는데. 걔네보단 내가 더 나을 텐데. 의미 없이 질투도 하고. 그런 주제에 계속 너랑 같이 있고 싶다고 다 꾹꾹 참았어. 괜히 고백했다가 헤어지면 너랑 죽도 밥도 안 되는 거니까.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네가 그랬잖아.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고. 전해지지 않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난 널 사랑하는 게 맞는데. 사랑해서 그랬는데. 근데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지? 홍중아, 널 사랑하고 싶어. 더 욕심부리면 너랑 같이. 오늘 생각한 사랑 다 말해 주고 보여 주고 싶어. 당장 그다음 날에 틀어져서 헤어지더라도 지금 내 순정을 다 주고 싶어.


그러니까, 내 감정이 부정당하고 싶진 않아. 너한테도 닿았으면 좋겠어. 나 혼자만의 마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박성화는 코를 또 훌쩍였다. 김홍중은 대답이 없었다. 눈물 못 그치는 박성화 등짝을 살살 두드리고만 있었다. 후련한 거랑 별개로 불길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싫다고 나 안 보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최악의 전개를 상상하고 박성화는 또 울적해졌다. 끄응 소리를 내며 김홍중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때 김홍중이 말했다.


너 되게 바보 같다.

응...?

누가 그렇게 울면서 바보같이 고백해.

...

누가 너 찬대? 뭐가 그렇게 슬퍼서 질질 짜고 그래.


그럼 받아주는 거야? 박성화가 고개를 번쩍 들고 김홍중을 봤다. 한참을 울어서 박성화의 눈자위가 붉어진 거 보고 김홍중은 또 웃었다. 웃지만 말구... 박성화가 웅얼거렸다.


안 받아 줄 거야

... 왜?

난 바보같은 놈이랑은 안 사귀어.


박성화가 눈썹 축 늘어뜨렸다. 김홍중은 또 캬캬 웃었다. 너 지금도 되게 바보 같애.

오늘 말고, 내일 멋지게 고백해. 내일은 장마도 끝난다며. 딱이네. 바보같이 질질 짜지도 말고 웃어. 알겠지? ...응, 알았어. 박성화는 운동화 앞코로 땅을 툭툭 쳤다. 양말과 운동화가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래도 불쾌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을 일이었다. 그제야 박성화는 웃었다. 그런 박성화 보고 김홍중도 따라 웃었다.


비 엄청 많이 온다. 옷 다 젖었어.

집에서 씻고 갈래?

엉. 밥도 먹을래.

그래. 맛있는 거 해 줄게.

자고 가도 돼?

당연하지.



박성화가 앞서 걸었고, 김홍중이 따라 발을 맞췄다. 오늘 집 주소 보내 놔. 응, 알았어. 비밀번호도 알려주고. 응.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먼저 말해. 걱정하게 하지 말고. 응, 당연하지. 박성화는 고개 끄덕이면서 저의 집 문을 열었다. 그곳은 박성화가 알던 곳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내일은 비가 그칠 테다. 먹구름에 가려진 햇빛을 보면서, 박성화는 비로소 사랑을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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