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은 분실 위험이 있습니다>, 익명 2
- 계간 성홍
- 2022년 9월 23일
- 13분 분량
- 계간 성홍 여름호 <추신은 사랑해>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글입니다.
- 사망 소재, 유혈 소재가 있습니다.
0.
다음 생이란 불확실한 약속은 하지 않을게.
대신, 지금 널 사랑할래.
네가 질려서 다음을 기약하기 싫어질 만큼,
더 이상 뱉어낼 마음이 남아있지 않을 만큼,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현재를 살게.
현재의 너를 생각할게.
현재의 우리만을 생각할게.
그냥 너를 사랑하고 싶다는 얘기야.
1.
“홍중아.”
“엉.”
“나 네 목걸이 좀 빌려주면 안돼?”
한달만에 만난 성화는 뭐가 그렇게 다급한지, 성화는 홍중을 보지도 않았다. 입으론 말을 건네며 눈으로는 사무실을 이리저리 살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던 홍중만 머쓱하게 내밀었던 팔을 거뒀다.
“그건 왜?”
“…필요해서.”
“어디에 필요한데?”
“…….”
“왜 말 못해?”
튀어나간 목소리는 싸늘했다. 뱉는 홍중마저 놀랄 정도로.
당연히 그 소리를 듣자마자 사무실을 배회하던 성화의 시선이 멈췄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애써 갈무리한 성화가 옅게 미소를 띠며 홍중을 바라봤다. 홍중아, 왜 그래? 내가 또 뭐 잘못했어?
한숨이 튀어나왔다. 제가 답답해서 그랬다. 분명 웬만한 일에 느긋하고 서두르지 않는 성화가 저럴 정도면 급한 일이라는 건 알았다. 빨리 도와줘야 하는 게 맞았다. 머리로는 알았다. 그런데 영 내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짜증이 좀 났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저는 거들떠도 안보는 꼴이 거슬렸다.
“…미안, 피곤해서 그래.”
“괜찮은 거 맞지?”
“너는…, 아니다.”
“…….”
“목걸이 찾아줄게. 잠깐만.”
뒤돌고선 담배를 물었다. 성화가 싫어하는 건 아는데, 답답한 마음을 해소할 길이 없었다. 주머니를 뒤적이니 오래전에 어디선가 받았던 라이터가 잡혔다. 꽤 비싼 거였던 거로 기억했는데, 다 쓴 건지 부싯돌만 헛돌았다. 결국 담배를 꺾어버린 홍중이 라이터와 담배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좋아야 하는데 자꾸 화만 났다. 움직임이 점점 거칠어졌다. 초조해 보이는 성화에게 차마 화를 낼 수도 없이 꾹꾹 누르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러다 실수로 책상 끝에 놓인 화분을 쳤다. 그리 높이 있는 건 아니었는데, 떨어지면서 박살이 났다. 일부로 한 거 아니야. 제가 더 놀란 홍중이 입을 열려고 했을 틈이었다.
“그러지 마.”
“…….”
“그냥 나한테 화를 내.”
“…….”
“삭히려고 너 아프게 하지 말고.”
“…….”
“미안해. 홍중아. 내가 잘못했어.”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몸이 돌려졌다. 익숙한 향기와 동시에 따뜻한 온기가 홍중을 감쌌다.
해명을 할 수도 있었지만, 홍중은 침묵을 택했다. 구구절절 설명해도 안 믿을 게 뻔했다. 대신 가만히 허리를 당겨 안고 품에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두어번 등을 토닥이던 성화의 손이 홍중의 등에서 떨어지고 목으로 향했다. 서늘한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목가를 더듬던 성화가 나머지 손을 올렸다. 목 주위에서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러더니 목이 허전해졌다. 방금 그게 목걸이를 풀어 가져간 거란 것을 뒤늦게 깨달은 홍중이 목을 가리며 성화를 노려봤다.
“맨날 목에 걸고 다니면서.”
“너 알고 있었지.”
“아니? 진짜 몰랐어.”
“…….”
“홍중아, 나 이거 빌려 가도 돼?”
여전히 파묻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끌어안던 팔을 풀었다. 줘, 내가 걸어줄게.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박성화는 그 위에 목걸이를 올렸다. 나침판 모양의 보석. 방금 전까지 걸고 있었던 탓인지 목걸이는 따끈따끈했다.
성화가 허리를 살짝 숙였다. 동시에 홍중이 조심스럽게 목덜미로 팔을 뻗어 고리에 체인을 걸었다. 혹시나 잘못 걸었을까 더듬으며 목덜미 부분을 짚었다. 다행히 한 번 만에 깔끔하게 걸린 것 같았다. 반짝이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나침판이 조명을 받아 성화의 목에서 반짝였다.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성화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성화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명백한 회피였다. 홍중의 눈썹이 들썩였다.
“이제 가야겠다. 목걸이 빌려줘서 고마워.”
“너만 빌려 가냐?”
“응?”
“나도 줘.”
“뭘?”
“네 반지. 맨날 끼고 다니는 거.”
“…….”
“목걸이 돌려줄 때 돌려줄게.”
괜히 심술을 부려봤다. 성화에겐 아무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올리자 성화는 미묘한 표정이었다. 홍중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 반응에 뒤늦게 제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는지, 성화가 다급하게 입꼬리를 올렸지만 이미 한참 늦은 후였다. 사무실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다시 차가워졌다.
“알았어.”
“아냐, 홍중아. 그런 거….”
“됐어. 가봐. 바쁘잖아.”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로 성화의 그림자가 졌다. 머뭇거리는 발끝은 두어번 문을 향해 갔다 다시 홍중 쪽으로 돌아섰다. 고민하는 듯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발은 결국 홍중에게 돌아섰다. 천천히 멀어지는 소리에도 홍중은 미동도 없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고개를 든 홍중은 주위를 살폈다. 당연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두 눈으로 확인하자 더 처참한 마음이 됐다.
“홍중아.”
“왜 왔어, 놓고 간 거 있어?”
“가져.”
“뭐?”
“안 돌려줘도 돼. 가져.”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성큼성큼 다가온 성화가 제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빼내곤 홍중의 손을 잡아 들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홍중의 약지에 끼웠다. 사이즈가 큰 탓에 약간 헐렁한 반지는 무리 없이 약지에 자리 잡았다. 그제야 성화가 웃었다.
“너 안 주고 싶었던 거 아니야.”
“…….”
“그냥….”
“…….”
“…….”
“…….”
“사랑해.”
“뭐?”
“나 너 진짜 좋아해. 알지?”
“…….”
나 이제 진짜 갈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화는 문을 열고 나갔다. 닫히는 문 너머로 다급하게 뛰는 소리가 들렸다. 홍중은 멍하니 그 소리를 들었다. 서서히 멀어져가는 군화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후회했다. 아, 나도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리고 그것이 홍중이 기억하는 성화의 마지막이었다.
그 날 박성화는 죽었다.
김홍중의 이름으로.
2.
사람도 죽여줄 수 있어요?
홍중은 졸음에 반쯤 닫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에 먼저 띈 것은 깔끔한 정장. 그리고 손에 들린 거대한 캐리어. 의뢰자였다. 그걸 깨닫자 몰려오던 졸음이 한층 줄어들었다. 책상 위에 엎드리던 몸을 곧추세웠다. 노트북 옆에 굴러다니던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궁서체로 쓰인 흥신소 사장 김홍중. 그게 끝이었다. 새하얀 종이가 아까울 정도로 내용은 단출했다. 그 흔한 연락처조차 적혀있지 않은 성의 없는 명함을 남자는 꼼꼼히 읽었다. 홍중이 자신이 종이를 잘못 건네줬나 착각할 정도로.
“의뢰할 건 하나에요.”
“가족이에요?”
“…….”
“아니면 모르는 사람?”
“…….”
“연인…이면, 좀 곤란한데.”
“아버지요.”
“서류 줘봐요.”
남자가 내민 종이를 바라봤다. 실실 웃던 홍중이 눈에 보인 사진에 일순간 얼굴을 굳혔다. 아까까지 무방비하게 졸던 인간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차가운 낯이었다.
시선이 남자를 향해 올라왔다. 치켜뜬 눈으로 남자를 쭉 훑어내린 서류를 다시 남자에게 내밀었다.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이, 홍중의 입가에는 처음과 같이 헐렁한 웃음이 매달려있었다.
“이유는 말 못 해줘요?”
“꼭 해야 해요?”
“그건 아니고, 그냥 개인적인 호기심. 싫으면 하지 마요.”
전생의 성화는 아버지를 존경스러워하고, 자랑스러워했다. 인생의 롤모델이라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제 아버지의 활약상을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줄줄 늘어놨다. 물론 홍중은 코웃음만 치며 담배를 물었다. 그의 뒷면을 봐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남자가 내민 종이에는 적혀있는 것은 그 인간이었다. 박성현, 박성화의 아버지. 이름을 안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와 모습이 완전히 똑같은 것도 차지했지만, 그는 이번 세상에서도 간부가 됐다. 최연소 경찰청장. 뉴스를 틀어놓으면 공식 석상에서 종종 얼굴을 비췄다. 옛날과 똑같은 행보였다. 정의의 아이콘, 따라붙는 칭호조차도 소름 끼치도록 같았다.
그러니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세상만 조금 달라졌을 뿐, 변한 것은 없는데.
어째서 이 세상의 성화는 그 인간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
“근데 돈은 안 받아요.”
“네?”
“돈 말고 조건.”
“조건은 뭔데요?”
“나랑 데이트 해주기.”
“…….”
“싫으면 말고.”
성화인건 눈을 뜬 순간부터 알아봤다. 아무리 꽁꽁 싸맸어도. 수십번을 그린 얼굴이 눈앞에 있는데 못 알아볼 리가. 그래서 처음에는 드디어 꿈에 찾아와 준 줄 알았다. 몇백년을 살아가는 동안 지독하리만큼 한 번도 꿈속에 나타나 준 적 없는 성화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다시 한번 깨달았다. 홍중이 사랑하는 건 여전히 죽어버린 박성화라는 걸.
그러니 눈앞의 남자에게 호감이 생길 리는 없었다. 다만, 궁금한 것은 많았다. 여러 의미로 과거의 성화와 전혀 다른 행보를 걷고 있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그런 의미에서 내건 조건이었다. 남자는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았지만.
“남자 좋아해요?”
“그런 편이죠?”
“…저 좋아해요?”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쪽이죠.”
“……왜요?”
“…그냥요.”
그래요. 그럼. 생각보다 선선한 반응에 홍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자의 의중을 살피려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당황할 법도 한 상황에서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새카만 눈동자는 피하지 않고 오롯이 홍중을 바라봤다. 부담스러워진 홍중이 먼저 고개를 돌릴 때까지.
그리고 그런 모습에 홍중은 다시 한번 깨닫고 마는 것이었다.
그는 제가 아는 성화가 아니라는 것을.
할말은 다 끝났다. 남자와는 볼일이 없었다. 홍중은 남자의 인사에 웃으며 대충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남자가 나가면서 울린 종소리가 잦아들자마자 책상에 엎드렸다.
기분이 약간 참담한 것 같았다.
cookie 1.
‘모른 척해줄까?’
‘뭐?’
‘넘어가 줄 수 있어.’
‘…필요한 게 뭔데.’
‘나랑 데이트 하자.’
‘…….’
‘한 번만 만나줘.’
‘남자 좋아해?’
‘응.’
‘…나 좋아해?’
‘응’
‘……왜?’
‘그냥, 이유가 굳이 있어야 돼?’
3.
성화가 죽은 날, 홍중은 신기한 능력이 생겼다. 한참 지난 뒤에 알게 됐지만.
성화의 죽음, 그러니까 대외적인 홍중의 죽음으로 홍중의 혁명은 실패했다. 반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정확히는 파벌이 갈라졌다는 말이 옳았다. 혁명을 지속하려는 이들은 다시 뭉쳐서 새로운 반군을 조직했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죽거나 일상으로 돌아갔다.
홍중은 후자였다. 모든 게 지쳤다. 성화가 죽고 나서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밥도 먹지 않았다. 종일 씻는 것을 제외하고는 침대에만 누워서 시간을 낭비했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흘려보냈다.
그렇게 한참을 보내다, 어느 날 못 보던 노트를 발견했다. 아마 성화가 홍중의 집에 놀러 왔을 때 놓고 간 것 같았다. 빨간색 가죽 표면에는 깔끔한 성화의 글씨체로 이름이 적혀있었다.
펼쳐보니 일기장인 것 같았다. 날짜와 날씨, 심정, 그날에 일어났던 일 같은 것들이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침대로 일기장을 들고 갔다. 천천히 그걸 읽었다.
마지막장에는 편지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낼 편지의 내용을 미리 적어본 것 같았다. 다른 장과 달리 연필로 몇번이고 수정되어 난잡한 모양이었다. 내용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집안을 전부 뒤져서 지우개를 꺼내 들었다. 연필 자국을 하나하나 지워나갈 생각이었다. 맨 윗줄, 거의 내용을 지우듯 그어져 있는 연필 자국부터 천천히 지우개로 문질렀다. 얼마나 힘을 줘서 색칠한 건지 쉽지 않았다.
홍중이에게.
그렇게 발견한 편지의 주인. 홍중은 성화가 죽고 처음으로 울었다. 그리고 다음날, 퉁퉁 부은 얼굴로 아는 이들을 찾아 집을 나섰다. 그것이 10년. 성화가 죽은 지 딱 10년 됐던 날이었다.
그리고 겨우 찾은 오랜 친구이자 동료의 집을 찾아간 날, 문을 열어주는 늙은 친구의 얼굴을 발견한 홍중은 깨달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신에게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감정을 없애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좋지, 효율적이고.”
“좋아하는 감정도 같이 사라지는데?”
“…….”
“그래도 좋아?”
“…….”
“너 나 좋아한다며 홍중아. 너 나 좋아하는 게 싫어?”
오래된 영화였다. 명작이라 손꼽히는 이야기라 유행할 때 이미 수십번도 더 본 작품이었다. 당연히 홍중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홍중은 남자의 눈을 피해 슬쩍 하품을 했다.
말을 먼저 걸어온 것은 남자였다. 나이를 확인하니 역시나 그때와 같았다. 동갑이라고 하자 남자는 바로 말을 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첫 데이트로 영화를 보자길래 영화관에서 유행하는 영화를 보자는 건 줄 알았는데, 홍중의 집으로 DVD를 들고 쳐들어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무 좋아하는 영화라서 같이 보고 싶었다고.
영화를 보는 초반에는 내내 조용하더니, 홍중이 지루해하는 걸 알았는지 뒤늦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홍중은 성의껏 대답해줄 생각이었다. 먼저 데이트를 제안한 것도 자신이고, 이 시간을 틈타 자신도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그런 질문만 아니었다면.
“아버지는 왜 죽이고 싶어?”
말을 돌렸다. 남자는 말을 돌린다는 걸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순순히 의도에 따라줬다. 잠깐 고민하는 기색이 얼굴에 스쳤다. 말을 고르는 중인 것 같았다. 홍중은 짐작한 이유를 떠올렸지만…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는 남자에게만은 좋은 아버지였을 테니까.
“…지겨워서.”
“뭐가?”
“가식적인 게.”
“…….”
“정의로운 척, 약자의 편인 척, 불의를 싫어하는 척. 그래 놓고 뒤에선 쓰레기 짓 골라서 하는 꼴 보기가 지겨워서.”
환멸이 난 목소리였다. 홍중은 가만히 소파에 기대 스크린을 바라보는 남자를 바라봤다. 스크린의 푸른빛이 남자의 얼굴 위에서 일렁였다. 남자의 얼굴은 아무 표정도 없었다. 아버지 얘기가 나오면 얼굴부터 밝아지던 과거의 성화와는 딴판이었다.
박성화가 죽었을 때, 김홍중의 죽음이라고 공식 발표를 낸 이는 다름 아닌 성화의 아버지였다.
무미건조한 말투로 사인을 발표하던 덤덤한 얼굴을 홍중은 한참을 뒤늦게 확인했다. 그리고 그의 이후 행보를 쥐잡듯이 뒤졌다. 승진, 승진, 승진. 뉴스 기사에서 그는 늘 웃는 얼굴이었다. 아들이 죽은 지 1년이 채 안 됐을 적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도 단시간에 최연소 간부가 됐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지. 그래서 맡긴 거잖아.”
“…….”
“차마 내 손으로 끝내지를 못해서. 비겁하게 너한테 떠넘긴 거야.”
영화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최종 보스를 죽인 주인공이 유유히 현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손에 리모컨을 든 채로 물었다. 너 재미 없으면 이제 딴 거 볼까?
대답 대신, 홍중은 손을 뻗었다. 성화의 얼굴을 붙잡고 당겼다. 입술이 맞닿았다. 성화는 순순히 입을 벌렸다. 뜨거운 숨이 뒤섞였다. 성화의 차가운 손이 티셔츠를 파고들었다.
몸을 일으킨 성화의 리드를 따라 누운 홍중이 성화를 올려다봤다. 엔딩크레딧이 나오고 있는 스크린에서 나오는 빛 말고 온통 깜깜한 암흑 속이라 성화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새카만 눈동자를 제외하고.
아무렴 상관 없었다. 홍중은 팔을 뻗었다. 양 팔을 성화의 목덜미에 감고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순순히 끌려오는 성화를 확인하고 홍중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4.
- 잠깐 보지.
- 네 가게에서 기다리마.
- 혼자 오렴.
홍중은 창밖을 내다봤다. 어느새 밖은 캄캄한 한밤이 되어 있었다.
옆자리에 누운 성화의 머리를 가볍게 쓸었다. 부들부들한 검은 머리카락에 손끝에 감겼다. 잦은 탈색으로 퍼석해진 제 머리카락과는 영 딴판이었다. 규칙 때문에 늘 깔끔하게 머리를 넘기고 다녔던 성화와도 달랐다.
성화의 시체는 지문과 얼굴이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가 홍중으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하나였다. 혁명에 관련된 계획이면 홍중이 늘 끼고 다녔던 목걸이 때문이었다. 그것은 홍중의 상징이었으니까.
‘가져.’
“안 돌려줘도 돼. 너 가져.’
홍중은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눈앞으로 꺼내 들었다. 줄의 한가운데는 홍중을 상징하던 나침판 대신, 동그란 반지가 걸려있었다. 그대로 주먹을 쥐었다. 강하게 잡아 당기자 목에 얼얼한 고통이 느껴졌고. 무언가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줄이 끊어졌다.
자고 있는 성화의 왼손 약지에 조심스럽게 끼웠다. 수월하게 들어가는 줄 알았던 반지는 마디에 걸려 더 이상 들어가지 못했다. 살짝 힘을 주자 자던 성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는 수 없이 홍중은 손을 거뒀다. 반지는 처음처럼 다시 홍중의 약지로 돌아갔다.
“오랜만이구나.”
“…….”
“몇 년 만이지, 백 년은 더 된 것 같은데.”
“…….”
“그 애가 죽고 한참을 찾았는데. 네가 숨은 건지, 그 애가 숨긴 건지. 영 찾을 수가 없었지.”
흥신소의 문은 깔끔하게 열려있었다. 홍중의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가 종소리에 얼굴을 들었다. 사십 대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끔한 얼굴이었지만 성화와 닮은 구석은 없었다. 그래도 친아버지인데, 신기할 정도로 남 같았다.
“그 애의 반지구나.”
“…….”
“그거 아니?”
“…….”
“그 반지는 내가 그 애에게 준 선물이었어.”
“…….”
“생일을 깜빡해서. 대충 손에 잡히는 걸 넘겨줬는데, 그게 그 반지였다. 그런데도 뛸 듯이 기뻐하며 몸에서 떼어놓질 않더구나. 그런데 죽기 전에 사라져서 잃어버렸나 했더니, 너에게 넘겨줬던 거였구나.”
반지를 머뭇거리며 넘겨주지 않으려 굴었던 것이 그것 때문이었을까.
능력이 생겼다는 걸 알았을 때 가장 처음 홍중이 시도한 것은, 성화를 살리는 일이었다.
그 시간만을 수십, 혹은 수백번 겪었다. 가지 말라며 울고불고하며 매달려도 보고, 논리적으로 설득도 해봤다, 가면 죽겠다고 협박도 했다. 너 말고 내가 죽겠다고 무릎도 꿇어봤다. 물론 전부 실패했다. 성화는 본인이 정한 것에 대해선 완고했다. 아무리 홍중이 울고불고 빌어도 다정하게 끌어안고는 떠났다. 그리고 죽었다.
“사랑해.”
“나도.”
“…….”
“사랑해, 성화야.”
전부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만나러 갔을 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서 최대한 비슷하게 행동했다. 가장 후회하는 것 하나를 꼭 바꾸기 위해서.
사랑한다는 말 하나에 환하게 웃는 성화를 보니, 눈물이 절로 났다. 황급하게 소매로 닦아봤지만,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멈추지를 않았다. 시야가 흐려서 성화가 흐릿했다. 마지막은, 제대로 눈에 담아두고 싶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우느라 바빠서.
그렇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 적어도 사랑한다는 마음은 전했으니까.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쪽지를 받았다.
죽기 직전 남긴 건지. 눈물 자국과 핏자국이 가득한 유서를 받았다. 내용은 오래전에 적어줬던 쪽지와 같았다. 한 줄만 빼고.
사랑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이제 와 남자의 말을 들어보니 이상한 생각이 스멀스멀 드는 것이었다. 만약, 혹시나,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 희생한 건 아닐까.
나보다 저 남자가 걔에겐 더 소중했던 게 아닐까.
“이번 성화는 달라.”
“…….”
“당신이 죽길 바래.”
“그래서, 날 죽이러 온 거니?”
“…….”
“해보렴.”
“…….”
“할 수 있다면.”
순식간이었다 남자의 손이 제 목으로 올곧게 뻗어왔다. 홍중은 몸을 숙였다.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졌다. 그는 경찰청장이고, 홍중은 그저 흥신소 사장이었다. 정면으로 붙으면 어떤 결과가 날지는 뻔했다.
남자가 물건에 다가오지 못하는 틈새를 타 문으로 다가갔다. 힘껏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덜컹, 쇠사슬 소리와 함께 문이 살짝 벌어졌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문은 어느새 잠겨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미리 부탁했지. 문을 잠가 달라고.”
“…….”
“…무모했구나.”
홍중의 뒷덜미가 붙잡혔다.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힌 홍중이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남자의 손이 홍중의 목을 졸랐다. 힘이 점점 들어가면서 남자의 팔에 핏줄이 불거졌다. 홍중의 시야가 어룽거렸다. 숨이 점점 가빠지고 목이 뻐근해졌다. 서서히 시야가 암전되기 시작했다.
“마지막이니까 하나 얘기해주자면.”
“…….”
“네가 말하는 이번 성화 말고, 그 애 말이야.”
“…….”
“그 애도 나를 싫어했단다.”
“…….”
“그러니 걱정 말렴.”
“…….”
“그 애는 널 위해 죽은 게 틀림없을 테니까.”
깜빡, 깜빡, 시야가 빠른 속도로 암전되어 갔다. 목이 꺾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통에 척척해진 눈가에서 한줄기 눈물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마침내 시야가 온통 까매지고, 홍중은 정신을 잃었다.
cookie 2.
“홍중이 잡지 마세요.”
“…….”
“그동안 쌓아둔 거 놓치기 싫으면.”
“이번 한 번 정도는 모른 척해줄 수 있다만.”
“…….”
“나만 눈감는다고 영원히 안 잡힐 수는 없어. 너도 알잖니.”
“시체만 있으면 되는 거죠?”
“…뭘 하려고?”
“제가 죽을게요.”
“네 시체를 가져가면 그들이 믿을까?”
“믿게 만들면 되죠.”
홍중아.
나 네 목걸이 좀 빌려주면 안돼?
5.
눈을 뜨니 사막이었다.
정신이 멍했다. 상황 파악이 되질 않았다. 분명 죽어가고 있었는데.
주위를 둘러봤지만 풀 한 포기, 사람 하나 없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뜨거운 햇빛과 모래뿐이었다.
홍중은 그냥 걷기로 했다. 가장 큰 이유는 얼굴을 강타하는 모래바람이 너무 거셌고, 주위를 감싸는 열기가 너무 뜨거웠기 때문에.
그리고 걷다 보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이 어디든.
“아, 씨발…….”
“…….”
“너 미쳤냐?”
얼마나 걸었을까. 하필 시간이 한낮쯤인 건지, 해가 너무 쨍쨍한 탓에 모래와 땀에 범벅이 됐다. 슬슬 짜증이 오르고 있었던 찰나였다.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 비슷한 것이 들렸다.
홍중은 귀를 기울였다. 여기서 얼마나 멀지 않은 곳 같았다. 소리를 따라 발길을 돌렸다. 위험할 수도 있지만 이대로 목적지도 모르고 배회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모래바람도, 햇빛도 소리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사라졌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봤다. 오른쪽 멀리서 여러 명의 인영이 보였다.
“갈 거면 혼자가.”
“…….”
“김홍중은 안돼.”
다가가다 보니 언성이 제법 높았다. 싸우는 것 같아서 굳이 끼지 않으려 멀리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 순간 제 이름이 튀어나왔다. 홍중이 인영이 보인 쪽을 바라봤다. 대충 봤을 때는 많은 줄 알았는데 있는 건 두 명뿐이었다.
인영은 겹쳐있었다. 한 쪽이 남은 쪽 위에 올라타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았다. 홍중은 그걸 확인한 순간 무시하려는 마음을 고쳐먹고 인영을 향해 달렸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막아서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
인영과의 거리가 두걸음도 안 남았을 때였다. 날카로운 돌 조각이 위에서 목을 조르는 인영에게로 날아갔다. 퍽 소리와 함께 돌조각을 정통으로 맞은 인영이 몸을 일으키며 휘청거렸다. 몸이 홍중을 향해 돌아섰다.
흐릿한 인영이었던 남자가 선명해졌다.
박성화,
박성화가 거기 있었다.
“아, 맞다. 너 유명했댔지.”
“…….”
“김홍중 따까리로.”
“…….”
“그래봤자 C급이지만.”
말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홍중이 뒤늦게 성화를 찾아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발견했다. 벌건 핏물을 줄줄 흘리며 한쪽 눈을 뜨지도 못하는 성화, 그리고 그 위를 날아다니는 수많은 돌조각들.
그것들은 계속해서 뭉치고, 뭉쳐졌다. 서로를 삼키며 거대해져 갔다. 성화의 눈을 스친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그리고 그것들이 사람만 해졌을 때, 동시에 성화를 향해 쏟아졌다. 맹렬한 기세였다. 하나라도 맞았다간 죽을게 분명할 정도의 속도였다.
그리고 박성화는 미동도 없이 돌덩이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재빨리 팔을 뻗었다. 날아오던 돌조각이 제자리에 우뚝 멈췄다. 그 틈에 홍중은 성화에게 황급히 다가갔다. 처음에 맞은 돌 때문에 생긴 상처를 빼고, 추가적인 외상은 없는 것 같았다.
“…김홍중?”
“…….”
“너 왜 여기에….”
쓰러진 성화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뒤통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홍중이 일순 몸을 굳혔다. 똑같았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수많은 자료를 찾아보며 들었고, 기절하기 전까지 들었던 소리를 헷갈릴 리가 없었다.
“홍중아….”
“…….”
“이건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그곳에,
박성화의 반대편에,
박성현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보다 훨씬 앳되고 어려 보이는 모습의 그는 홍중을 확인하고는 금세 표정을 바꿨다. 자신만만하던 표정은 금세 사라지고, 잔뜩 두려워 보이는 모습만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홍중은 그 모습을 본 순간 제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박성화를 박성현으로부터 지키는 것,
그걸 깨닫자 세상이 멈췄다. 박성현도, 박성화도. 선선히 불던 바람도, 흔들리던 풀들마저도. 김홍중을 제외한 온 세상이 마치 조형물처럼 멈춰버렸다.
박성현을 돌무더기 사이에 성화 대신 끼워놨다.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홍중이 아는 세상에서 그는 늘 수많은 이들을 괴롭게 했으니까. 죄 없는 이들마저도 죽였으니까. 아들인 박성화까지도.
그리고 이곳의 박성화까지도.
다시 누워있는 성화에게로 다가갔다. 제가 아는 모습보다 마른 몸을 들었다.
시간을 풀었다. 무언가 으깨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복수할 거야, 씨발, 김홍중 너랑 박성화 둘 다!”
들어주고 싶은 마음도, 시간도 없었다. 머지않은 미래에서 성화를 구조하러 헬기가 오는 것을 봤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됐다. 부들거리는 다리로 성화를 둘러매고 한참을 걸었다.
미래에서 봤던 곳 중, 눈에 잘 띄는 바닥에 성화를 눕혔다. 상처를 살폈다. 꽤 깊게 난 상처인지 눈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렀다. 지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깨끗한 천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하는 수 없이 제가 입은 티셔츠 밑단을 찢었다. 너덜너덜해진 천 조각을 눈가로 가져다 댔다. 조심스럽게 그 위를 누르자 삽시간에 핏물이 번졌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천 조각이 흠뻑 젖어 제구실을 못하게 될 때까지. 그러다 어느 정도 피가 멎는 것 같았을 때. 천 조각을 뗐다.
축축한 천과 함께 손에 끼워진 반지가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곧바로 바닥으로 떨어진 천과 달리, 청아한 소리와 함께 굴러가는 반지를 홍중은 가만히 바라봤다. 한참을 굴러가던 반지는 막 자라나던 풀에 부딪혀 멈췄다.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필요는 없지만 주워갈 생각으로 반지를 향해 막 발을 옮긴 순간이었다.
멀리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걸 보니 미래에서 봤던 성화를 데리러 온 헬기 같았다. 홍중은 마음을 바꿔 몸을 돌렸다. 벗어나야 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이제 지쳤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딛는 순간,
흙바닥이 끈적한 진흙으로 바뀌어 홍중을 삼켰다.
그리고,
“홍중아.”
목소리가 들렸다.
“죽지 마,”
6.
“컥….”
덜컥 정신이 들었다. 순식간에 숨통이 트이면서 마른기침이 튀어나왔다. 목이 부러진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참으려 해도 신음이 새어 나왔다. 목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목이 졸린 탓인지,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을 벌려도 바람새는 소리만 색색 튀어나올 뿐이었다.
“너….”
“…….”
“네가 감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말마의 신음을 내뱉은 남자가 홍중의 옆으로 쓰러졌다. 부릅떠 치켜뜬 눈이 징그러웠다.
시선을 더 내리니 목 아래에 한 줄의 칼자국이 난 것이 보였다. 베인지 꽤 됐는지 목에는 굳어버린 핏자국이 잔뜩 말라붙어있었다.
덜컥 두려움이 앞섰다. 황급히 남자에게서 멀어져 문으로 다가가려는데, 누군가 제 몸 위로 무언가를 덮었다. 누군가 곁에 있었다. 그것을 알아낸 홍중이 몸을 새우처럼 굽혔다. 의지완 상관없이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홍중아, 나야, 성화.”
“너….”
“미안해. 아팠지.”
인기척의 주인은 성화였다. 그런데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덜덜 떨렸다. 홍중보다 더. 과거를 통틀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얼굴이라도 확인하려 홍중은 손으로 얼굴을 덮은 담요를 걷어내려고 했지만 곧바로 제지당했다. 담요 끝을 붙든 손을 붙잡은 성화의 손은 무엇인지 모를 액체에 축축했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홍중은 하는 수 없이 그 손이라도 꽉 마주 잡았다. 늘 서늘하던 손은 유난히 불타듯 뜨거웠다.
“보지 마.”
“……성, 화야.”
“…….”
“손, 풀어.”
잠깐 괜찮나 싶더니,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를 틈타 반대 손으로 끄트머리를 당겼지만 역시 저지당했다. 울고 있으면서 그건 어떻게 보는 건지.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목에 느껴지는 고통에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그러자 언제 막았다는 듯이 담요가 획 젖혀졌다. 성화의 얼굴이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걱정스러운 눈동자가 홍중을 가만히 살폈다. 홍중은 기침도 억누르며 눈을 굴려 성화를 살폈다.
성화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말라붙은 핏물에, 잔 상처들에, 눈물까지.
“홍중아 미안해.”
“뭐가?”
“나 때문에…. 이렇게 다치고.”
“성화, 야.”
“어, 어?”
“쓸데, 없는, 말, 그만하고, 안아, 줘.”
두 팔을 뻗자 눈물을 줄줄 흘리던 성화는 순순히 홍중을 끌어안았다. 한손에는 머리를 반대 손에는 허리를 받치곤 조심조심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놓고는, 책상 옆에 놓여있던 가죽 의자를 들고 와 그 위에 홍중을 앉혔다.
“홍중아.”
“응.”
“말할게 있어.”
“…뭔데?”
별안간 성화가 무릎을 꿇었다. 상처투성이의 손을 홍중의 무릎에 올렸다. 홍중의 왼손을 끌어와 고개를 숙여 이마에 기댔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열기가 손을 타고 홍중에게 넘어왔다.
홍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화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 남은 손으로 떨리는 어깨를 감싸듯 끌어안고 가만히 토닥였다. 오래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성화가 홍중에게 해 줬던 것처럼.
“…처음부터 너 알고 있었어.”
“어?”
“알고 간 거야. 일부러 만나고 싶어서.”
“…뭐?”
“네가 날 미워할 것 같았어. 죽지 말라고, 네가 그렇게 부탁했는데 무시했잖아.”
“…….”
“미안해, 홍중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박성화에게 죽기 전의 기억이 있다.
머리가 멍했다. 홍중은 가만히 제 앞에서 고개를 숙인 머리를 바라만 봤다. 감정이 복받친 성화가 내는 가쁜 숨소리와 흐느낌을 들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만 봤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게 분노인지 슬픔인지 기쁨인지 홍중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화를 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만 있었다. 우는 성화를 바라보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네가 원망해도 괜찮아. 나 그냥 싫어하고 보기 싫다고 해도 돼.”
“성화야.”
“너한테 못 할 짓 한 거 알아, 그러니까….”
“박성화.”
그렇지만 하고 싶은 말은,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뿐이었다.
양 뺨을 붙잡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마주친 성화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무엇을 상상했는지는 몰라도 무표정한 홍중을 바라본 얼굴에 금세 절망이 깃들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성화는 고개를 다시 숙였다.
그리고 홍중은 그 얼굴을 잡은 손을 당겨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죽지 말고.”
“…응.”
“우리 그냥 서로 사랑하자.”
“…….”
“사랑해, 성화야,”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성화는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홍중은 성화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잔뜩 눈물 젖은 얼굴에 띄워진 환한 미소. 홍중은 마주 웃으며 그것을 오래도록 쳐다봤다.
이제야 흐리기만 했던 성화의 마지막 모습을 완전히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0.
성화야,
우리 그냥 사랑을 하자.
다음생도,
그 다음 생도,
현재도, 미래도,
우리 그냥 영원을 살자.
그만큼 널 사랑한다는 소리야.
- 작가의 말
여름에 이어 두 번째 참여한 익명입니다.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하는 소재들을 쓸 수 있어서 즐거웠던 것 같아요.
계간 성홍 편집팀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럼 기회가 된다면 마지막 글로 겨울에 뵙겠습니다.
후회 없이 사랑하는 가을이 되시길 바라며.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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