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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의 마법>, 월랑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6월 21일
  • 11분 분량





♬BENEE - Beach Boy










너를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생각해본다. 희끄무레한 기억을 거꾸로 더듬어 올라가면 어느 순간부터 팍 사라진다. 그 왜 있잖아, 수학 익힘책에 허구한 날 달력 찢어놔서 빡치게 만드는 놈들. 그래, 그런 놈들한테 당한 달력마냥 기억은 북 찢겨 끊어져 있다. 그럼 방향을 바꿔 처음부터 차례로 기억을 훑어본다. 박성화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14년 3월, 그러니까 고등학교 입학식이었다. 중학교 3학년 겨울, 뺑뺑이의 저주로 나는 저 멀리 10지망에 작성했던 관심도 없는 고등학교에 배정받았고, 그 사실을 들은 친구들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심지어 한 놈은 울었었다. 지는 1지망 붙어놓고. 하긴, 누구도 이런 비극은 예상하지 못했던 거지. 우리 홍중이 불쌍해서 어떡해 으허어어 하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하여튼 하등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것들.




'여기 우리 중학교 애들 개많음. 우리 홍중이 외로워서 어떡해 ㅠㅠ'




어 그래 좋겠다 씨발. 적막과 약간의 소음이 더해진 교실 속 인생에 도움 안되는 놈들과의 카톡이 이어졌다. 첫날부터 뭐가 그리 피곤했는지 엎어져 자는 애들부터, 같은 중학교에서 온건지 벌써부터 무리 지어 떠드는 운 좋은 애들까지 교실은 다채로웠다. 외로웠던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것뿐. 고등학교는 왜 입학날부터 수업을 하는 걸까. 이따 밥은 누구랑 먹지. 흐린 하늘을 괜히 노려보니 이젠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 없는데. 하하 별게 다 꼬이네 제기랄. 진한 갈색으로 젖어가는 운동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순간




"저기…!"




모르는 애 하나가 나를 불렀다.


"너 A중에서 왔지?'


"...어 맞는데.'


"야 대박이다 여기 배정받은 A중 너랑 나 딱 둘밖에 없는거 알아? 누가 중간에서 제비 빼돌리고 그런거 아냐?"




서글서글한 표정의 그 애는 박성화였다. 중학교 때 노는 무리가 달라 이름만 알고 있던. 아 그럼 얘를 알게 된 건 2014년 훨씬 이전인가.




"...제비를 어떻게 빼돌려.'


"에이 말이 그렇다는거지! 진짜 너 있어서 다행이다. 나 혼자 집 가야 하는 줄 알고 너무 외로웠잖아…."


'너 그런 것 치고는 다른 애들이랑 무리 지어서 겁나 잘 놀던데.'


(물론 이건 속으로 말했다.)


"아무튼, 이따 집 같이 가자. A중 나온거면 1단지 살지? 3번버스 타고 가면 되겠다!"


"어? 어 뭐…. 그래…."




휘몰아치듯 쏟아지는 말에 얼떨결에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나 2단지 사는데…. 아니, 것보다 원래 모르는 사람이랑 친해지려면.. 인사 좀 하고.. 호구조사도 좀 하고.. 단계를 좀 밟아야되는거 아닌가.. 어느 날 내 삶으로 불쑥 뛰어 들어와 박힌 박성화는 그렇게 내 삶의 일부가 되어갔다.










※Warning※










첫눈에 내가 박성화한테 바로 반한 건 아니다. 그 녀석과는 달리 나는 낯을 많이 가리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었고, 그런 내게 친해지는 과정을 과감히 건너뛴 걔는 되려 이상한 애였다. 그래 이상했다. 분명 존나 이상한 앤데 더 이상하게도 걔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이 몰려들었다. XX 염색체고 XY 염색체고 가리지 않고. 날벌레가 들끓는 전등 불빛마냥 박성화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대체 왜일까.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인간과 왜 이렇게 못 친해져서 안달이지. 매점 뒤 벤치에서 늘어지게 빠삐코를 빨다가 이 자식을 분석해보기로 마음먹었고, 6월 초입까지 분석한 박성화는 대략 이런 인간이었다.


“홍중아, 안 더워? 건물로 들어가있지. 앉아서 뭐하고 있었어?”


응, 니 생각. 박성화는 어떤 인간인가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





분석1. 박성화는 착하다.




"야 박성화 미안한데 나 오늘 주번 한 번만 바꿔주라…. 오늘 집에 좀 빨리가야해서..."


"어어 그래.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성화야 혹시 국어책 빌린거 내일 가져다주면 안될까? 집에 놓고 왔네."


"어어 그래. 괜찮아."




"나 아이스크림 사주라 성화야!"


"그럴까? 밥 먹고 매점 가자."




박성화는 착했다. 좋게 말해서 착한거고, 가끔 보면 좀 호구같았다. 쟤는 거절하는 방법을 모르나? 본인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발 벗고 나서고, 가끔 누군가 아슬아슬하게 선을 타는 장난을 쳐도 그저 헤실헤실 방긋방긋. 타고난 피지컬이 있어서 그렇지 체구까지 작았으면 제대로 호구잡히기 좋은 만만한 애였다. 저러다 이상한 사람 만나서 털려봐야 정신을 차리지. 쯧쯧.




"홍중아 피크닉 사 왔는데 먹을래?"


"너 다 먹어…."


"왜? 어디 아파?"


"피크닉 하나 안 먹는다고 아픈거 아니거든…. 그냥 별로 안땡기니까 너 먹어…."




괜한 한심함에 책상에 늘어지면 앞자리에 앉은 박성화는 내 이마에 손을 짚는다. 제가 아픈 양 울망한 눈을 하고.




"열은 없는데... 조퇴할래? 쌤한테 말해줄까?"


"그냥 안땡기는거라니까…."


"아님 더워서 그래? 하긴, 날씨 완전 여름이긴 하다. 그치."


"아니 나 멀쩡하다고…."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놈. 다정하면 뭐해. 커다란 손은 거두어졌지만, 여전히 촉촉한 눈은 그대로 나를 응시한다. 눈이 커다래서 그런가. 눈에 담고 있는 감정이 지나치게 크게 느껴진다. '우리 홍중이 아프면 안 돼-" 하는 목소리와 내 등을 가볍게 톡톡, 두드리는 손길이 따뜻하고 나른하다. 5교시라 그래. 응 식곤증 그거. 그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거야. 원래 박성화 착하잖아. 다 잘해주고. 그러니까 애들이 좋아하지. 응 그래서 그래. 괜히 얘를 바라보는게 부담스러워 옆으로 돌려 걔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냅다 책상에 고개를 박았다. 쌤 오셨다. 쉬는시간에 올게- 소란한 소음 사이로 박성화가 의자를 끌고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기분이 묘했다. 아니 왜 묘해지는거야. 그냥 애가 호구같이 헤실거려서 그렇다니까. 정신차려 김홍중. 고개를 벌떡 들어 괜히 양 볼을 찹찹 때렸다. 애써 낯선 감정을 갈무리하려 노력했다.






분석2. 박성화는 잘생겼다.




이건 팩트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과 올라간 입매는 객관적인 동성의 눈으로 봐도 잘생기긴 했다. 키도 제법 큰 편이고 비율도 좋아 동급생, 선배로도 모자라 옆 학교 누나들도 얘를 구경하러 왔다. 잘생기면 어딜가나 주목을 받는구나. 그래 그렇겠지. 물론 저새끼만 주목받으면 참 좋은데,




"그…. 너가 홍중이 맞지..?"


"...? 너 나 알아?"


"성화가 너 자주 말하길래...!"


"..? 나를...?"


"이..이거 성화한테좀 전해주라! 고마워!"




허구한 날 나를 찾아대는 박성화 때문에 나까지 주목을 받는게 문제지. 이딴 멘트와 함께 편지나 초콜릿 따위를 나한테 전하고 튀는 여자애들이 하도 많아서 이젠 그러려니 하지만, 아니 조용히 학교 좀 다니자고 제발. 괜히 툴툴거리면서 이번엔 뭘 받았나 구경했다. 와 생초콜릿. 이거 내 최애 브랜드 신상... 평소 먹어보고 싶었던 디저트에 홀려 한참을 복도에 서서 바라보고 있으면, 이 모든 상황의 원흉이 저만치서 나를 보며 반갑게 달려왔다.




"홍중아아- 어딨었어-"




맹한 목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열이 받는다.




"야 너 내이름 팔고 다니냐?"


"응? 무슨 말이야?"


"됐다…. 이거. 7반 장은빈이 전해달래."


"어 이거 홍중이가 좋아하는 브랜드 아니야? 같이 먹을까?"


"너 먹으라고 준 건데 내가 왜 먹어. 너 다 먹어."


"먹고싶어했잖아. 같이 먹자."


"됐네요 박성화씨."




대충 편지랑 초콜릿을 쥐여주고 내 자리로 돌아와 5교시 준비를 한다. 교과서와 연습장을 펼치고 괜히 멍을 때려본다. 기분이 묘했다. 또. 또 이래 또. 그러니까 이건... 이 기분은... 그래 질투야 질투. 괜히 인기 많은 사람한테 느끼는, 존나 쫌생이같고 찌질한 질투. 난 고백받아본 적 없잖아. 패배감느끼는건가. 하여튼 김홍중, 어른 되려면 한참 멀었다니까. 대충 감정을 결정지어놓고나면, 그 노력이 무색하게 다시 박성화는 내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고개를 들고 올라왔다. 고백. 고백이라... 쟤 이번이 벌써 몇 번째 고백이지. 자기가 안 먹는다 해서 내가 대신 받아 까먹은 초콜릿을 합산하면, 아마 다니는 치과 선생님께서 기함하실 것이다. 단순히 착하고 잘생긴거만으로 인기가 많다기엔,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착하다, 잘생겼다... 착하고 잘생긴 남자... 뭐 유니콘이긴 하네... 나사가 빠진 사람마냥 빈 연습장에 낙서를 한다. 착하다... 잘생겼다... 착한 박성화... 잘생긴 박성화.....잘..생긴...박....성화..




"홍중아 왜 먼저갔어-"


"깜짝이야이씨. 인기척 좀 내 제발-"


"이거 뭐야?"




아 좆됐다. 잽싸게 연습장을 채간 박성화의 손을 저지하지 못했고,




"홍중아"




내 내면의 소리가 이 새끼한테 그대로 전달됐다.




"나 잘생겼어?"




씨발 씨발 개쪽팔려. 불타오르는 얼굴에 거칠게 박성화의 손에서 연습장을 뺏었다. 얼굴 새빨갛겠지. 아 오늘 이불킥 예약이다. 내 쪽팔림은 아는지 모르는지, 앞자리의 빈 의자에 앉아 꽃받침까지 해가면서 박성화는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입꼬리까지 귀엽게 말아 올리면서. 뾰족하게 올라간 입매에 갑자기 생각이 느려졌다. 그 장은빈인가 하는 애도 이 웃음에 넘어간걸까. 애교살이 톡 튀어나온 눈웃음이 입매와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응? 홍중아 나 잘생겼냐니까-"




아니시발지금내가무슨생각을. 정신 안 차리지 김홍중. 아니 따지고 보면 다 이새끼때문에 그러는거 아닌가. 괜스레 열이 받았다. 밖에서도 이렇게 셀셀 웃고다닐걸 생각하니 왜인지 짜증이 났다. 이새끼 지 잘생긴거 알면서 이러는거 맞지 지금. 재수없어.




"그래 니 존나 잘생겼어. 고백을 밥 먹듯 받는 새끼가 왜 여태 여친이 없냐? 고백한 애들이 다 별로였어? 복에 겨웠네 시발... 얼굴 그렇게 쓸 거면 나 줘..."




감정이 자꾸 박성화한테 말리는 것 같아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원래 투덜거려도 애교스럽게 다 넘어가던 애니까.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도 조금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박성화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하기만 했다. 입꼬리는 분명 아직 올라가 있긴 한데, 이렇다 할 반응이 없으니 당황스러웠다. 말이 좀 심했나. 괜한 변명을 얹어보려 입을 여는 순간, 타이밍 맞게 수업 종이 쳤다. 박성화는 조용히 연습장을 내 자리에 놓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마음 한구석이 켕겼다. 괜한 애한테 짜증 부린 꼴이 되어버렸네. 바보 김홍중. 1절만 할걸.








...Unexpected...








쉬는 시간, 괜히 불편한 마음에 박성화의 자리를 돌아보면 박성화가 안 보였다. 그새 밖을 나갔다고? 어디 갔지? 사과하려고 했는데. 에이씨 괜히 그런 말을 해가지고...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잖아. 얼굴 낭비 제대로 하는 건데... 지금 그게 중요하냐 김홍중.... 내면의 자아들의 싸움을 진정시키곤 박성화를 찾아다녔다. 내가 교실에 있던, 운동장에 있던, 심지어 화장실에 있을 때도 소름 돋게 '홍중아아' 하면서 달려오던 그 맹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딜간거야. 헛헛한 기분만 느끼고 교실로 돌아가려 발걸음을 옮기던 순간, 아래층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소름끼치도록 둔탁한 '철썩-'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뭐지? 싸한 느낌에 몸이 굳었고,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야 아래층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복도에 개미 떼마냥 학생들이 몰려있었고, 그 중심에는,




"...박성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피가 빠르게 식는 기분이었다. 쟤 왜 저기 있어?




"너 뭐하는 새끼냐고."


"...제가 그런 거 아니라고요"




멀리서 보이는 명찰이 파란색이다. 그럼 2학년이라는 얘긴데. 드물게 자기보다 키도 덩치도 큰 선배 앞에 박성화는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앉아있었다. 멀리서 봐도 보이는 터진 입술과 눈가의 멍이 보는 사람도 고통을 느끼게 했다. 선생님, 학년부장 선생님부터 불러야겠다는 생각에 2학년 교무실의 위치를 애써 기억해내려던 순간,




"근데 이 새끼가 자꾸 꼬박꼬박 말대답을,"




덩치 큰 선배가 널브러져 앉아있는 박성화의 멱살을 쥔 채 애를 일으켰다. 또, 또 맞을 것 같아. 어떡해, 어떡하지. 머릿속이 새하얘지기 시작했다. 도무지 정상적인 사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계단 난간만을 쥔 채 안절부절못하던 나를 움직이게 한건, 다시 한번 손을 들어올리려는 선배의 모습이었다.




"그 손 안 멈춰 이 개새끼야!!!!!!!!!!"




어떻게 뛰쳐나갔는지도 솔직히 기억이 안 났다. 박성화를 저기서 꺼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뒤덮었고, 달리기 계주는커녕 상위권조차 들어본 적 없는 내가 단숨에 계단을 내려가 수많은 아이들이 몰려있는 복도 한복판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순간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돌려졌다. 수십 명의 시선이 내리꽂히는 그 짧은 찰나를 뚫고 무리로 뛰어 들어가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해 박성화의 멱살을 잡은 채 행동을 멈춘 그 새끼(개빡치니까 선배 말고 그냥 그 새끼라고 부르겠다.)와 멱살을 잡힌 채 살짝 끌어올려진 박성화가 있었다. 순식간에 그 새끼의 손에서 박성화를 낚아챘다. 왜 사람이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하잖아. 그런게 아니었을까? 1학년 2반 남자 악력 하위권 랭킹을 자랑하던 내 손이 어떻게 그 새끼의 악력을 뚫고 박성화를 꺼내왔는지도 잘 모르겠다. 정신을 놓고 있었던건지 그 새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 박성화는 몸을 휘청였고, 그 커다란 몸뚱어리가 내 품에 안겨 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같이 넘어질 것 같이 휘청이는 내 몸을 겨우 세우고 있으면, 품을 통해 전해져오는 체온이 뜨거웠다. 순간 숨이 헉- 하고 막혔다. 박성화가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이 온몸으로 전해져왔거든. 그냥, 문득 그 순간은 위기에 처한 박성화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성화와 같이 어서 이 상황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행히 보건실은 같은 층 근처에 있었고, 내 몸집마저 가리는 커다란 박성화를 끙끙거리며 보건실로 부축했다.




"성화야, 너 걸을 수 있겠어? 일단 보건실부터 가자."




정신이 조금 돌아온 듯, 박성화는 내게 기대던 몸을 일으켜 걸어보려 노력했지만, 그마저도 무시한 채 나는 박성화를 거의 질질 끌고 가기 바빴다. 얼른 보건실에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던 것 같다. 낑낑거리며 보건실 문을 열면, 우리를 발견한 보건 선생님의 표정이 사색이 되어갔다.




"어머나! 괜찮니??? 얼굴이 왜 그래?"


"쌤 연고랑 얼음찜질팩 같은 거 있어요?"


"일단, 여기 앉아봐라. 도와줄 수 있겠니?"




나 진짜 어떻게 박성화 옮겼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질질 박성화를 마저 끌어다 의자에 앉혀놓고 있으면, 보건 선생님은 분주히 연고와 얼음주머니를 꺼내오셨다. 긴장이 풀리자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더위가 몰려왔고 온몸에 들어갔던 힘이 쭉 빠지기 시작했다. 옆 의자에 털퍼덕 앉아 선생님께서 연고를 발라주는 박성화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래 쟤도 놀랐겠지. 멀쩡히 잘 있다가 얻어맞았으니. 성격상 박성화가 먼저 시비를 걸거나 잘못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새끼는 대체 뭐지. 저 잘생긴 얼굴에 저렇게 흠집을 내놔? 학교에 박성화 좋아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중에 분명 선배도 있을 텐데, 그 새끼 좆될듯. 학폭위 열리려나? 당연히 열리겠지 씨발 지금 애가 얼굴이 저 모양인데, 아주 그런 새끼는 퇴학을 시켜야 해. 이런저런 잡념에 잠겨있는 사이, 박성화는 얼음주머니를 받아 눈가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사이에 다른 학생이 들어오자 선생님께서는 그 학생을 보러 가셨고, 나는 조용히 의자를 끌어다 박성화 앞에 앉았다. 인기척이 느껴지자 박성화는 느릿하게 감은 눈을 떴다.




"괜찮아?"


"..."


"...이걸 질문이라고 하고 있다. 괜찮을리가 없는데. 많이 아프지."


"약 발라서, 괜찮을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 지친 모습을 하고 있었으면서 괜찮긴 개뿔이. 애써 괜찮은 척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마음 착한 네가 아무 이유 없이 다친게 열 받아서 또다시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너는 선배가 그렇게 때리면 소리라도 질러야지. 뭘 또 다 맞고 있어. 내가 너 못 찾았으면 어떡했으려고 그래."


"..."


"그렇게 멀뚱하게 쳐다보지 말고. 하여간 아주 말랑말랑해요 박성화씨."




괜히 틱틱거리며 박성화를 밉지 않게 흘겨보았지만, 그 표정을 오래 지을 수는 없었다. 얼음주머니에 눌리지 않은 다른 한쪽 눈이 나를 깊이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은은하게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 왜, 왜 그렇게 보는데. 그 한쪽의 눈에 담긴 감정의 깊이를 잴 수 없었다. 어딘가 허탈해 보이기도, 어딘가 애틋해 보이기도 한, 그런 짙은 색채의 눈빛. 늘 동그랗게 뜨고 다니던 눈과 달리 나른하게 반쯤 풀린 힘없는 눈빛이 모순적이게도 나를 더 강하게 옭아매는 느낌이었다. 그 한 쪽짜리 시선이 마치 내 모든 것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성화야. 쿵 쿵, 심장이 제 존재감을 드러내며 빠르게 뛰고 있었다. 다시금 얼굴로 열이 몰렸다. 아까의 그 강한 눈빛에 나의 이런 상황을 들킬까봐 괜스레 겁이 나기도 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눈을 피하게 됐다. 성화야 그만.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지 마. 그런 미소로 나를 바라보면 나는,




"뭐가 잘났다고 웃어 바보야."


"고마워 홍중아."


"..어, 어?"


"고맙다고. 나 구해줘서."




푸슬푸슬, 박성화가 더 크게 미소짓는다. 얼굴 묵사발되고 좋단다. 멍청이.


괜히 더 더워지는 공기에 손부채질만 연신 해댔다. 여름이다. 진짜 여름이긴 하네.










♥Heart♥










6교시가 시작되고 시간이 조금 지나 우리는 교실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무단결과되면 어쩌냐며 한사코 나를 보내려는 박성화였지만, 아픈 애를 두고 혼자 교실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뭐 정 뭐라 하면 얘 돌보느라 그랬다고 하지 뭐.) 조용한 교실 뒷문으로 들어서자 모든 애들의 시선이 다시금 집중되었다. 아까 복도에 있던 무리보다 적은 인원인데도 꽂히는 시선이 머쓱했다. 성화를 얼른 자리로 보내고 6교시 수업을 끝내고 나면 담임선생님이 박성화를 교무실로 불렀다. 아까 싸운 것 때문에 그런거겠지.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걱정되었는지 자꾸 손톱을 뜯게 되었다. 아 성화가 이거 하지 말랬는데. 손 다친다고. 너는 이 와중에도 박성화 생각을 하고 있니. 평소 같았으면 '정신차려 김홍중-' 하면서 얼굴을 찹찹 때렸겠지만, 왠지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자꾸 향하는 곳으로 생각이 흐르게 그냥 두었다. 나를 꿰뚫을 것처럼 바라보던 성화의 눈빛이 생각났다. 왜 그랬을까. 걔는 날 왜 그렇게 쳐다봤을까. 평소 밝고 헤실거리는 모습만 보다가 그렇게 나른한 모습을 보니 왠지 낯설었다. 그래도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하루종일 학교에서 붙어다닌지가 몇 개월짼데 마치 남을 보는 듯한 모습에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박성화는 생김새도, 하는 짓도 말랑말랑하고 순해서 종종 토끼같다고 생각했는데, 잠깐 스치듯 본 그 애의 눈빛은 확실히 토끼랑은 달랐다. 토끼보다는 오히려 늑대같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 묘하게 눈매가 날카로워 보였던 건 착각이었을까. 신기한 건, 그 눈빛이 마냥 무섭지만은 않았다는거다. 무겁고 진한데, 애틋했어. 다정하고, 따뜻했어. 가슴 한복판을 다 헤집어놓을 것 같다가도, 막상 가슴 속을 파고들면 놀란 마음을 가득 안아줄 것 같은 온도였다. 바보 성화. 토끼 성화. 늑대 성화. 따뜻한 성화. 박성화 박성화 박성화. 익숙하고도 낯선 이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너덜거릴 때까지 곱씹다 이내 참을 수 없이 밀려드는 다정한 감각들에 저항하지 않고 깊게 잠수했다. 박성화, 도대체 너는,










!Attack!



♬Emotional Oranges - Sundays









나 면담 좀 길어질 것 같아. 오늘은 먼저가 홍중아. 이따 연락할게 미안해. 17:38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던졌다. 뭔 할 말이 그렇게 많아서 애를 이렇게 오래 붙잡아둔담. 그 개같은 새끼 퇴학시키고 박성화 병원비 물어주면 끝나는 것을. 멍청이같은 학교 덕분에 혼자 하교한 것도 모자라 이 시간까지도 박성화 연락이 없다. 해도 넘어가 슬슬 붉은 빛을 갈무리하고 있는데, 설마 아직까지 학교에 잡아두진 않았을거고... 항상 먼저 연락하는 박성화의 연락이 잠잠하자 조금 걱정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항상 성화가 먼저 연락했네. 어딘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먼저 휴대폰을 들었다.




21:00 박성화


21:00 어디야?


나 지금 집! 21:00


21:03 뭐야 집 도착했어?


21:03 왜 연락 안했어


21:04 집이면 1단지 공원으로 나와


21:04 아이스크림 ㄱ


미안해ㅠㅠ 21:04


웅 나갈게!! 21:04


(이모티콘) 21:04 1




아니 집이었으면서 왜 연락을 안한거야. 조금 투덜거리다 이내 휴대폰을 챙겨 들고 집 밖을 나왔다. 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벤치를 바라보면 익숙한 크기의 인영이 보였다. 다정하고 낯선 나의 친구. 친구. 친구라는 단어가 괜스레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벤치로 달려가 박성화 옆에 앉으면 괜히 마음이 풀어져 애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퍽 쳤다.




"연락한다며 바보야. 왜 연락 안했어."


"기다렸어? 미안해."




기다렸나. 나 박성화 연락 기다리고 있었네. 마음이 또 이상해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이거 먹어 홍중아. 너 좋아하는 요맘떼 사왔지롱"


"엥 너가 샀어? 얼마 나왔어? 돈 줄게."


"됐어. 우리 사이에 뭐 얼마나 한다고."




우리사이. 그러게. 우리는 무슨 사이일까 성화야. 이상하게 얘가 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에 콕 들어와 박혔다. 혼란스러웠다. 분명 같은 박성화인데, 왜 이렇게 나는 니가 갑자기 어려워졌을까.




"...면담.. 어떻게 됐는지 물어봐도 되냐."


"못 물어볼 건 또 뭐야. 잘 됐어. 걱정하지마."


"그럼 다행이긴한데... 아니 그 새끼는 갑자기 왜 그랬대?"




박성화가 피해 보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어둑한 빛에 비춰진 상처가 나를 다시금 빡치게 만들었다. 콘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문 박성화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 너 저번에 나한테 생초콜릿 줬던 애 기억나?"


"어. 걔는 갑자기 왜?"


"그 형이 걔 남친이었대. 근데 걔가 나한테 고백을 한거지. 정리도 안하고."


"뭐야 양다리야? 미쳤네. 아니 그럼 그 새끼는 지 여친 간수도 잘 못해놓고 너한테 그런거야? 시발 지가 덜떨어져놓고 왜 남한테 지랄?"


"아니 진정해봐 홍중아,"


"진정 안 하게 생겼어? 별 같잖은 년놈들때문에 너만 다쳤잖아."


"그래서 그 형 정학당했어."




음, 정학. 이성이 빠른 속도로 되돌아왔다. 나쁘지 않은 처벌이군. 그래도 며칠 지나면 학교 나온다는거잖아.




"퇴학은 시켰어야 한다고 봄 나는."


"어쨌든 나는 아무 일 없잖아. 그럼 된 거지."


"아무 일 없기는. 너 얼굴을 봐. 얼굴이 재산인 애가 이게 뭐야 진짜 속상하게."




속상한 마음을 잔뜩 담아 박성화를 바라봤다. 흩날리는 바람에 살랑이는 성화의 머리카락이 예뻤다. 아 또야. 또 다정한 눈빛. 늑대같은 다정한 눈빛. 사르륵 청량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현실과의 괴리를 느끼게 했다. 달콤하게 접히는 너의 눈웃음. 매끄럽게 올라가는 입술.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어오는 따뜻한 손길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시원한 여름밤, 저녁과 밤의 경계에 걸린 하늘, 편안한 사람의 낯선 느낌. 기대고 싶어. 안기고 싶어. 너랑 더 닿고 싶어.




아, 이건 여름밤의 마법이 분명하다.




"홍중이가 나 잘생겼다고 해줘서 좋아."


"...장난치냐? 너 잘생겼다는 말 그냥 숨 쉬고 사냐는 말이랑 똑같잖아."


"그런가. 근데 홍중이가 해주면 더 좋아."


"바보."


"응 나 바보."


"그거 알아? 너 토끼 같아 박성화."


"토끼? 나 귀여워?"


"아니, 존나 순해 빠져서. 그래가지고 앞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래."




자꾸만 나를 나른하게 푸는 박성화에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착해 빠져서 엄한 사람 설레게 만들고. 너 이거 반칙이야 박성화. 알아?




"그럼 홍중이가 지켜주면 되지."


".....!"


"아까처럼. 홍중이가 계속 내 옆에서 나 지켜주면 되잖아."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머리를 쓰다듬던 너의 따뜻한 손이 머리에서 내려와 내 손으로 얽혀 들어왔다. 커다랗고 뜨거운 온기가 손을 꽉 움켜쥐었다. 단단하게 낀 깍지에 너의 팔은 자연스럽게 내 팔로 감겼고, 붉어진 얼굴을 진정시킬 틈도 없이 상처가 잔뜩 난 너의 얼굴이 내 어깨에 기대왔다. 안돼. 제발. 온몸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가까워. 너무 가까워.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심하게 뛰었다. 이 진동이 박성화에게 가 닿을까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훅 끼쳐오는 다정한 너의 향기. 여름밤과 박성화의 모든 것들이 한 데 섞여 나를 몽롱하게 취하게 했다. 제발. 박성화, 성화야, 제발,




"이런 이야기 맘 편히 나눌 수 있는 사람, 너 밖에 없는거 알아?"


"..."


"그래서 홍중이 너랑 오랫동안 보고 싶어."


"..."


"난 니가 정말 좋거든..."




그래. 기억났다. 나는 이 순간,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걸 인정했다. 너의 나른한 목소리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졌어. 내가 졌어 성화야. 위태롭던 마음은 여름밤의 마법에 홀려 완전히 녹아버리고 말았다. 아니, 이건 어쩌면 박성화의 마법일지도 몰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 너를 물들이는, 치밀하고도 다정한 너의 방식일지도 몰라. 왜인지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성화야.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너의 좋아한다는 말을 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해. 너의 따스함에 아무런 저항 없이 잠겨버린 나는, 멋대로 너의 말을 해석해 미친 듯이 반응하는 내 심장은 어떻게 하라고. 온몸이 다 녹을 것 같이 다정한 너를 탓해야 해, 아니면 너를 버릇없이 마음대로 사랑해버린 나를 탓해야 해. 이 견딜 수 없는 설렘을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여름밤의 바람이 불어온다. 잔뜩 민감해진 나의 심장을 타고 후덥지근하고 청량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아왔다. 여전히 내 몸은, 내 심장은 이 끝을 알 수 없는 다정함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성화야, 박성화. 나는, 나는...








-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여름밤의 마법> 이라는 글로 계간성홍에 참여하게 된 월랑이라고 합니다.

미숙한 글솜씨이지만, 모쪼록 재미있게 즐겨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좋은 자리 마련해주신 계간성홍 운영진분들과 좋은 작품 만들어주신 다른 참여진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성홍이들과 함께 시원하고 기분 좋은 여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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