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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 테마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12월 22일
  • 5분 분량


너는 당신이 나에게 했던 모든 약속을 기억하십니까?



깊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한겨울 두껍게 쌓인 눈, 위에 살포시 올라설 수 있을 것 같지만 하염없이 푹 꺼져버리는. 심해 같은 마음이란, 빠져버린 사람이 한없이 쪼그라드는 것이다. 잠겨 죽을 마음이 한없이 밀려와서 저항 없이 드러눕게 되는, 당신이 주었던 모든 사랑이다. 간극이란 것은 그런 것이다. 멜론 탑 100을 듣는 너와 인디를 듣는 나. 빌리 아일리시와 보위 사이의 거리. BTS와 킨 사이의 시간. 사람을 말려버릴 공감대의 부족. 간극 사이에서 깊이 사랑했다, 나는. 크레이터를 사이에 두고 닿지 못하면서 눈만을 바라보며. 네가 보는 세상을 어렴풋이 마주하면 항상 나는 거기 없다. 아, 밀려와서 잠겨 죽을 마음이여.





내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웠던 것은 혹여나 내가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다면, 하는 터무니 없는 가정이었다. 내가 부모님과 같지 않다는 사실은 초등학교 때 알았다. 나는 터무니 없이 생각이 많았고, 예민했다. 날뛰는 감정과 동거하는 게 힘들었다. 나는 숙주고 감정이 본체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격렬한 사랑을 하고 싶었다. 사랑해서 도피하고, 그 사람과 단둘이 사는 인생. 길바닥 한가운데서 무릎 꿇고 하는 프러포즈. 안정적인 사랑은 지루하지. 어린 날의 멍청함은 드라마의 자극적임을 잊지 못했다. 나도 저런 사랑을 하겠다는 예측에 부모님이 뭐라고 했던가. 꺼글한 재질의 말이다. 목구멍에서 차마 넘어가지 않던, 우리 홍중이는 저런 거랑 안 어울리지.


중학교 때는 부모님 같은 사랑을 하고 싶었다. 가끔 싸우지만 서로를 헐뜯지 않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기반으로 한 단단한 관계. 요란하지 않은 애정 표현.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사랑. 그런 것을 믿었다. 그때 즈음 첫 여자친구가 생겼다. 대부분의 그 시기 아이들이 그렇듯이, 그냥 사귀자고 해서 사귀었다. 애정 표현은 부담스러웠고 아버지가 말했던 사랑은 어려웠다. 이별 통보를 받고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던데. 내 첫사랑은 망했다. 그 생각을 하니까 눈물이 났다. 나 때문에만 울 수 있는 내가 너무 소름 끼쳐서 더 울었다. 이딴 나를 사랑할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은 당연한 수순이다. 사랑받지 못한다면 슬플 것 같다. 아무도 나를 사랑할 수 없으면 어떡하지. 내가 아무도 사랑할 수 없으면 어떡하지. 혼자 고독사하는 엔딩은 생각해본 적 없는데.


고등학교 때 알았다. 같은 학교 남자 선배한테 두근거렸다. 숨 쉬는 게 힘들었다. 물 밑에 존재하는 것처럼. 나는 끊임없이 위로 올라가려고 유영하면서 숨을 참았다. 이러다 잠겨죽겠다 싶었던 순간. 미약하게 뛰던 빠른 박동. 초등학교의 꿈을 이룬 셈이다. 사랑해서 도피해야 할 지경이었다. 자꾸 울었다. 부모님께도 무슨 일인지 말 못했다. 우리 집은 기독교였다. 동성애 치료 캠프도 무서웠고 부모님의 실망도 무서웠다. 사랑받지 못할 것 같다. 붙잡고 있던 사랑조차 놓칠 것 같다. 그 선배가 여자친구가 생긴 날에 처음으로 조퇴를 했다. 몸이 안 좋은 것 같아요. 그 한마디에 선생님도 별말 안 하고 보내주셨다. 나 혼자 병원을 들렀다 노래방을 갔다. 울면서 권진아 노래 열창했다. 퉁퉁 불은 얼굴로 노래방에서 나오니 하교 시간.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 찬물로 얼굴 닦았다. 학원 갔다. 이별 노래에서 나는 이렇게 슬픈데 세상은 똑같다는 말,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이별이 진부하다는 걸 간과했다. 짝사랑의 마침표 절망편.





너는 언제나 턱 끝까지 넘실거리는 사랑을 줬어. 나는 물을 먹어가며 유영했어. 가끔은 편안했는데 가끔은 숨이 꼴딱꼴딱 넘어갔어. 나는 되어 먹지 못한 사람이라 안정감이 힘들었어. 있지, 근데 겨울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물이 얼어버리면 나는 어떤 숨을 쉬어야 하는 거야? 나는 아가미가 없단 말이야.


물론 너에게는 사랑마저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박성화는 어느 날 내 삶은 점거했다. 투룸 관리비가 부담이다, 한마디에 동거인이 생겼다. 그때 나는 사랑이란 회의라며 곡을 찍어냈다. 하루 밤새 곡을 쓰고 자고 일어나서 구리다고 지웠다가 그날 저녁에 비슷한 곡을 또 쓰고. 이대로 살다가는 죽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면제인 군대에 가고 싶지는 않았고, 새로운 일을 도전하기에는 돈도 시간도 정신도 없었다. 일주일에 사흘은 밤을 새웠고 이틀은 울었다. 일주일에 한 병씩 비웠다. 마약을 권하는 문자 창을 한참 띄워두다 정우영에게 얻어맞았다. 눈에 핏발 세워두며 죽고 싶냐 묻는 아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우영과 단둘이 앉아 술 없는 냉동 삼겹살을 씹었다. 할 말이 없어서 투룸이 관리비가 비싸다고 했다. 울지도 웃지도 그저 하염없이 불판이나 보던 정우영이 고개를 들어 말했다. 동거해, 아는 형 소개시켜 줄게. 싫다고 차마할 수 없었던 것은 처음 보는 표정의 정우영이라, 그 '정우영'이 여자친구 전화도 받지 않길래. 알겠으니까 전화나 받으라고 했다. 웅 여봉~ 참 평소와 같았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어 재밌다더니 반만 맞았다. 평생 동거는 인생에 없을 줄 알았다. 삼십이 넘어서도 남자랑 동거하면 부모님이 이상하게 보실 테니까. 부모님에게 게이는 평생 '남'이다. 차마 예쁘고 착한, 그래서 언젠가는 참한 색시를 데려올 막내아들은 게이가 될 수 없었다. 인생 조졌네. 말라비틀어진 삼겹살을 들었다. 내 인생 같다. 베베 꼬인 게 참. 정우영이 전화를 마치고 들어온다. 잡힌 고기를 한입에 먹었다. 불판에서 뗀 지 한참 됐는데도 그랬다. 근데 나 게이인데 남자랑 동거해도 되나? 그건 차마 못 물어봤다. 우영이라면, 그럴 줄 알았다고 할 것 같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미 임계치까지 충격받은 애 뒷목 잡고 넘어갈까 봐 무서워서 못 했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어 참으로 족같다. 박성화는 예쁘다. 키스해보고 싶었다. 입술이 정말 말랑거리게 생겼다. 주머니에서 리베아 립밤이 나왔다. 익숙하게 발랐다. 박성화는 그때 이게 인간 사는 집안 꼬라지인가 고민했다고 했다. 지금이라도 뛰쳐나갈까, 고민했다고. 우영이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해서, 정우영이 자신한테 거짓말을 한 적은 없으니까. 단지 그거 하나 믿고 신발을 벗었다고 했다. 쓰실 방은 이쪽이에요. 새 사람이 온다고 해서 하루 전에 도착한 토퍼 하나만이 덩그런히 박성화를 맞았다. 그날 저녁에 동거 약속을 정했다. 잠은 꼭 각자 방에서 자기. 서로의 소지품 건들지 않기. 늦으면 늦는다고 연락하기. 아프면 꼭 서로 부르기. 아무 말 하지 않고 다른 사람 부르지 않기.


박성화는 새집에 적응하는데 딱 일주일 걸렸다. 나랑 친해지는 데는 한 달 걸렸다. 홍중이 오늘도 안 들어와? 하고 울망이는 토끼. 그런 걸 메일 보냈다. ㅇㅇ. 그럼 토끼가 울었다. 내일은 들어감. 그럼 토끼가 방긋방긋 웃었다. 첫사랑이 너무 오래전이라 그런가, 가슴이 아픈 게 부정맥인 줄만 알았다. 너를 사랑하는 줄 차마 몰랐다. 내가 두려운 이유를 차마 몰랐다. 모든 불행의 이유를 너에게 돌렸던 것이 나의 순애인지 차마 몰랐다. 알았는데 부정하고 싶던 것은 무지와 무엇이 다른가.





너는 내가 안타까웠을지도, 내가 멍청해 보였을지도, 내가 미웠을지도, 나를 차마 미워하지 못했을지도, 매일 나를 저주했을지도, 축복했을지도, 웃었을지도, 울었을지도, 아니면 너도 차마 몰랐을지도. 나는 너를 모르기 때문에.


너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된 모든 프로그램이라, 나는 너를 동경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궁금해하고 사랑하고 도외시하고 사랑하고 분리하고 사랑하고 인정하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너의 단 찰나에 불과해서 나는 결국 너의 찰나가 밖에 될 수 없어도 너를 사랑하고 뒤돌아서 후회하고 다시 사랑을 속삭이고 네게 한 모든 말을 후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인생은 모두 네 것보다 긴 일 초의 모음이라 나는 너에게 한 모든 말이 네게 닿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발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네가 모든 순간 나를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을 알아서 나는 차마 너를 양껏 사랑하기 벅찬 것이다. 불확실성이란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라, 나는 내 편의 탈출구를 만들지 않고는 살 수 없던 것이다. 이제 내가 그 문을 닫으면 나는 완전한 완결된 하여 종결된 나의 결말에 잠겨 숨을 쉬는 것이다. 물고기의 아가미는 선천적 혹은 후천적 혹은 진화의 산물 혹은 피할 수 없는 죽음 혹은 나는 고래라 한참 숨을 참고 물 밑에서 죽어가는 것이다.





박성화에 대한 마음을 정의 내린 건 동거한 지 반년도 넘어서, 겨울. 밀린 마감을 처리하고 두 시에 조심히 문을 열던 박성화의 동창회 날. 집은 제법 꼬락서니를 갖췄다. 박성화는 취미는 청소 특기는 요리인 만능 살림꾼이고, 집주인이 무책임하게 방치하는 집을 쓸고 닦는데 즐거움을 찾고는 했다. 그날은 박성화가 없었다. 홍중아 오늘 동창회 있어서 조금 늦을 것 같오ㅠㅠ 미안... 참 말도 자기같이 했다. 말랑거렸다. 삼십 분 후에 불안정한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 한껏 취한 박성화가 몸도 못 가누고 흐물거렸다.


"애들이 삼차 가자는 거 도망 나왔어... 홍중아 지금 땅이 흔들린다. 나 어지러워."


한없이 쏟아지는 몸을 받아냈다. 네 온몸에서 겨울 냄새가 났다. 코끝이 찡했다.


"홍중이 냄새 좋아..."


내 목덜미에 코를 박고 잠들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들고 앉아 신발을 벗겼다. 질질 끌고 방까지 들어갔다. 보일러를 켜고 침대 위에 던졌다. 양말을 벗기고 코트를 벗겼다. 손과 발만 물티슈로 대충 닦았다. 입술을 한참이고 구경하고 있는데 박성화가 눈을 떴다. 다른 사람 이름을 부르면서 내게 입을 맞췄다. 꿈이지. 그니까 가지 마. 울면서 꽉 안고 놔주지 않았다. 이민지. 박성화의 첫사랑.



심히 쿵쿵거리는 심장은 차마 병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분노도 아니었다. 첫사랑의 템포. 고등학교 그 선배의 미소. 온 몸으로 받아내는 겨울 바다. 그 파도. 습기가 가득한 내음. 폐 속에 가득차는 물기. 쏟아져 나오는 물길과 또 한번 자각한 아가미의 필요성.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부르는 그 사람의 첫사랑. 박성화가 버리지 못하는 편지. 박성화의 잠겨 죽을 다정을 만든 사람. 성화가 쓰는 유일한 편지의 수신인.





내가 가는 길은 멀고, 그 길의 모든 순간에 너를 조금씩 버리고자 노력하고 있어. 갑자기 도망 나와서 미안해.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밤에, 네 품에서 눈을 떴던 어떤 아침에, 내가 처음 본 이름이 어쩔 수 없게 만들었어. 나는 되먹지 못한 사람이라 안정감이 두렵고 성숙하지 못해서 온전히 네 행복을 축하해줄 수가 없기에. 행복했으면 좋겠다. 언젠가 네가 결혼한다면, 신부 이름 옆에 커다란 꽃다발을 두고 갈게. 내 아가미가 생기는 날에. 너의 온 다정이 얼어도 내가 숨을 쉬게 되는 날에. 겨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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