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 (봄)>, 꽃
- 계간 성홍
- 2022년 3월 21일
- 11분 분량
성화는 아버지가 틀어둔 뉴스 앵커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우렁찬 목소리에 마당에서 자고 있던 또리가 고개를 들었다. 또리에게 손 한 번 흔들어주고 대문을 힘차게 열었다.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리는 초록 철문은 군데군데 녹이 쓸었지만 제 역할을 착실히 해내고 있었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면 바람 때문이라고 빽 소리 치고 담벼락에 기대둔 자전거에 올라탔다. 한쪽 어깨에만 걸친 가방을 도로 고쳐 맨 성화는 페달을 밟았다. 벚꽃이 봄바람을 타고 날아들었다. 아직 생일이 되지 않았는데 벚꽃이 피었다. 요즘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평소보다 20분은 일찍 도착한 성화는 고철 덩어리 자전거들 사이에 자신의 자전거를 쑤셔 넣었다. 이런 곳에 둬야 누가 훔쳐가지 않는다며 성화의 자전거(a.k.a. 붕붕이) 전용 자리가 되었다. 애초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시골 학교라 아무 데나 둬도 신경 쓰지 않음에도 성화는 자신의 붕붕이를 소중하게 여겼다. 나중에 뒷자리에 애인도 태울 거라며 친구 한 명 태워본 적 없는 붕붕이를 뒤로한 채 교실보다 선도부실로 먼저 들어갔다. 맨들맨들해진 나무 테이블 구석에 가방을 던져둔 성화는 형광 노랑색의 조끼를 입고 벌점 판을 챙겨들었다. 간지 나는 걸로 바꾸자는 성화의 말은 언제나 그렇듯이 퇴짜 맞았고, 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조끼가 긴 역사를 함께하고 있었다. 가방에서 검정색 삼선 슬리퍼를 꺼내 갈아 신고 교문 앞에 섰다. 성화가 학교에 등교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이었다.
전교생 107명, 3학년 54명, 2학년 31명, 1학년 22명. 극단적으로 줄어가는 학생 수만 봐도 머지않아 학교가 문을 닫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학교의 선생님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기 위한 준비를 계속 했고, 학교 일에는 무관심했다. 하나 둘 씩 막 나가기 시작한 학생들을 휘어잡은 게 성화였다. 거의 없어진 선도부 부장 자리를 잡으면서 무사히 졸업이라도 하자는 사명감을 발휘했다. 어디서 나온 지 모를 마음이라고 했으나 성화의 아버지가 이장의 자리에서 마을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성화의 성정이 어디서 온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성화가 선도부 일을 시작한 초반에야 할 일이 많았지만 지금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교복을 입고, 제 시간에 교문을 통과하자. 두 가지만 잘 지킨다면 성화를 통과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대충 입어도 좋으니 걸치고라도 오라는 성화의 말에 학생들은 장롱 구석에 처박힌 교복을 팔에 끼우고라도 왔다. 후드티에 마이만 대충 입은 채 아슬아슬한 세이프를 외치며 교문 앞에 드리프트로 멈춰선 친구의 등짝을 찰지게 때리는 것으로 성화의 선도부의 일은 끝이 났다. 이만 들어가 보라는 학주쌤의 말에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선도부실에 버려둔 가방을 챙겨 교실로 튀어 들어갔다.
일주일에 5일은 같은 루틴이었다. 학교를 가는 것과 동시에 시작되는 성화의 하루는 선도부, 교실, 비어버린 동아리실, 집이라는 일정한 구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시내를 나가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 재미있지 매번 똑같은 친구들과 똑같은 곳에 가는 건 한 달도 안 되어 흥미를 잃었다. 무료하다, 무료해. 학교에서 돌아와 대자로 엎어진 성화가 중얼거리면 어머니의 잔소리가 날아들까 몰래 자리를 떴다. 그래도 학교에서는 조금이라도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성화가 학교에 점점 오래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이유였다.
시끌벅적한 교실에 성화가 들어가자 성화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성화는 어딜 가나 중심이 되는 사람이었다. 가방을 자리에 걸어두며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맨 뒷자리, 다른 애들한테 방해받지 않으려고 일부러 사정사정해서 잡은 혼자 앉는 자리 옆에 떡하니 새로운 책상이 자리를 잡았다. 이상하다. 성화는 새로 생긴 자리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사용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책상 구석에 붙은 스티커를 보아하니 1학년 교실에서 가져온 것 같은데. 어리둥절한 성화를 보던 H는 박수를 짝짝 치며 그 소식 들었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물음표를 잔뜩 띄운 성화가 무슨 일이냐 묻자 씨익 웃은 H는 딱 세 글자를 뱉었다. 전학생. 중학교 고등학교 6년 동안 전학생의 지읒도 들어보지 못했던 성화는 H가 한 말이 사실인지 한참을 생각했다. 당장 내년에 폐교하겠다 말해도 시원치 않을 이 학교에 전학생이? 담임 온다는 부반장의 목소리가 교실에 울렸다. 그것도 우리 반이래. H는 도망치듯 말을 내뱉고 자리로 돌아갔다.
타이밍 좋게 교실 앞문이 열리고 담임의 뒤를 따라 들어온 단정한 소년은 교실을 훑어봤다. 교실에 앉아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죄다 전학생에게 박히는 것은 당연했다. 담임이 칠판에 이름을 적는 것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전학생은 모두의 시선이 조금은 부담스러운지 교실 벽면을 둘러보는 것 같았다. 전학생의 시선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성화가 보기에 교실의 분위기를 천천히 읽고 있는 듯 했다. 3월이 다 지나가는 시기에 전학생이라니. 그것이 이 학교에 전학생이라니. 담임은 학생들에게 인사하라며 전학생에게 눈짓했다. 전학생은 칠판에 적힌 이름에 한 번, 다시 교실로 한 번 시선을 던지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홍중이야. 잘 지내보자.”
사투리가 한 톨도 섞이지 않아 단정한 목소리였다. 처음 교실로 들어올 때처럼 매끈했다. 어쩐지 목소리가 조금 높은 것 같기도 하고. 성화는 책상에 턱을 괴고 전학생, 그러니까 홍중을 빤히 바라봤다. 서울에서 왔다는 담임의 말에 반은 금방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으레 시골이라 함은 서울에 대한 동경이 있기 마련이다. 버스에 기차 타면 금방 갈 수 있는 곳인데도 말이다. 성화는 그 시골 사람과는 조금 달랐다. 하늘을 날고 강을 건너야 갈 수 있는 곳도 아니고, 어차피 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성화는 괜히 겁먹지 않았다. 홍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금세 시끄러워지는 교실에 담임은 출석부로 교탁을 내리쳤다. 어디서 왔는지 일부러 말하지 않은 건데 담임은 그걸 쏙 이야기 했다. 절대 눈에 띄지 않겠다는 다짐은 교실로 들어선 지 5분 만에 산산조각 났다. 담임은 이 주변 지리에 아직 익숙하지 않을 테니 잘 이끌어주라는 말을 학생들에게 외치고 홍중을 맨 뒷자리로 안내했다. 홍중은 학생들을 뚫고 맨 뒤로 다가왔다. 성화는 엎어진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작은 것 같았다. 서울 애들은 다 이렇게 작은가. 이 동네에서도 큰 편에 속하는 성화는 책상에서 홍중을 올려다봤다. 홍중은 백팩을 책상 옆에 걸어둔 다음 얌전히 책상에 앉았다. 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넥타이까지 완전히 맨 정석 교복은 오랜만이었다. 선도부 완장을 찬 성화도 교복을 다 입고 다니지는 않았으니까.
나름의 반장이라는 직함을 단 성화는 홍중에게 환하게 웃으며 손인사를 건넸다. 안녕? 멀리서 왔네. 박성화라고 해. 반장이야. 홍중은 성화에게 시선을 한 번 던지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 주변에 조금씩 몰려드는 학생들이 부담스러워 보이는 듯 했다. 책상 옆에 서서 홍중에게 말을 걸던 학생들이 점점 늘어 좁아터진 두 자리의 책상에 열 명이나 모여들었다. 바글바글한 목소리는 겹쳐졌고, 홍중은 하나의 질문에 집중하지 못했다. 어디서 왔어? 아 서울에서 왔다고 했지? 근데 왜 왔어? 어디 살아? 여기로는 왜 온 거야? 하나에 답을 하면 열 개의 질문으로 돌아왔다. 서초구에서 왔어. (서초구가 뭐야? 몰라.) 서초구가 뭐야? 지역 이름인가? 태석리처럼? 그냥 말로 해도 기억하기 어려울 텐데, 홍중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되묻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결국 성화는 곧 수업 시작이라는 것을 핑계로 애들을 몽땅 돌려보냈다.
겨우 홍중과 단 둘이 있게 된 성화는 그제야 천천히 말을 꺼냈다. 학교 구경 안 할래? 수업 끝나고, 저기 토끼 사육장부터 구경하자. 홍중은 성화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그 모습이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했다. 어린 애도 아니고 앞머리는 일자로 잘라서 바가지 머리에 가까우면서. 야자 없어?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박또박 발음하는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야자? 그게 뭐야, 먹는 건가. 일부러 말도 안 되는 개그도 좀 쳤다. 귀엽다니. 시커먼 애들이랑 계속 같이 다녀서 취향이 이상해진 게 틀림없었다. 성화는 사람 좋게 웃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여기 해가 빨리 져서 야자 없어. 홍중은 해가 빨리 진다는 사실부터 이해하지 못한 듯 했다. 성화는 진짜라며 어깨를 으쓱였고, 뒤이어 문학 선생의 등장에 칠판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홍중은 제법 공부를 하는 학생인 듯 수업에 집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정작 옆에 앉은 성화는 수업에 하나도 집중하지 않았다. 원래도 수업시간 방해하지 않고 엎드려 자는 게 성화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갑자기 생겨버린 옆자리 홍중 군에게 흥미를 두었다. 서울에서 시골에 전학 온 도련님?! 온종일 드라마만 보고 자란 게 화근이었나 싶을 정도로 성화는 홍중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일일연속극에 나올 법한 유치한 주제들이었다. 직계아들에게 기업을 물려주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도피 생활? 불치병을 낫기 위해 요양생활? 신분 세탁을 위해 시골로 도망 온 서사? 성화가 무엇을 생각하든 다 홍중과 어울렸다. 남의 얼굴을 이렇게 빤히 쳐다봐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스칠 때쯤 성화의 앞으로 홍중의 쪽지가 도착했다. [그만 좀 쳐다 봐.] 생긴 것처럼 앙칼진 매력도 있는 듯 했다. 성화는 홍중의 의견 따위 묻지 않고 자신이 홍중을 지켜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서울 도련님 시골 살이 험난하니까!
보충수업도 없는 시골학교는 오후 4시만 되면 모든 학생들을 내보냈다. 해가 하늘에 콕 박혀 있는 시간에 학교를 벗어나는 게 처음인 홍중은 교문 앞을 서성거렸다. 교무실에 다녀왔더니 사라진 홍중을 찾기 위해 교실과 토기 사육장, 자전거 주차장, 학교 텃밭까지 샅샅이 뒤진 성화는 교문 앞 동그란 뒤통수를 보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매고 있던 가방이 팔을 타고 흘러 내려갈 정도로 홍중에게 뛰어간 성화는 놀라게 해줄 심산으로 홍중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하지만 홍중은 성화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조금도 놀란 얼굴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반응 탓에 어색해진 건 성화였다. 음…, 아, 내가 학교 구경 시켜준다고 했는데 사라져서 찾으러 다녔거든. 홍중은 오히려 사라진 건 네 쪽이 아니었냐고 심통 난 모습이었다. 헉, 좀 귀엽다. 성화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감탄사를 흘렸다. 덤으로 홍중의 눈썹이 위로 치켜떠졌고, 정강이도 같이 차였다. 너 진짜 죽을래? 평소―라고 해봤자 본지 겨우 8시간이었지만― 목소리보다 훨씬 격앙된 목소리였다. 성화는 맞은 정강이를 손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아니,… 그러면 전화번호라도 주지. 문자라도 하게. 성화의 말에 홍중은 우물쭈물 거리다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무슨 중요한 비밀을 품은 사람마냥, 그 정곡을 찔러서 답을 해야 할지 말지에 대해 엄청나게 고민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성화는 영화와 드라마를 섭렵한 게 여기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며 속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홍중은 한참 뒤에야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나 휴대폰 없어. 헐. 성화는 짧은 한 마디만 입 밖으로 꺼냈다. 정말로 전 세계를 위험하게 만들 사건 속 주인공이 신분을 숨기고 시골 학교에 잠입해 고등학생으로 살아가는 그런 이야기가 펼쳐지는 거 아니야? 성화는 어쩐지 더 길어진 상상을 직접 말했다가는 정강이를 까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휴대폰은 그렇다 치고, 도대체 학교에는 어떻게 왔어? 성화는 새 자전거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던 자전거 주차장을 떠올렸다. 아무리 서울 도련님이라고 해도 자전거 타는 법 정도는 배웠을 테고, 집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사람이 사는 곳까지 걸어가려면 어림잡아 1시간은 족히 걸렸다. 홍중은 가방 어깨끈을 양손으로 잡은 채로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차로 왔지. 홍중의 말이 끝나기 좋게 저 멀리서 검은 세단 하나가 천천히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성화와 홍중이 선 곳에 부드럽게 멈춰선 차의 운전석 창문이 내려갔다. 검은 정장이라도 입은 무서운 아저씨가 있을까 잔뜩 쫄았던 성화는 의외로 평범한 아버지 같은 사람이 등장하자 긴장을 풀었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사람은 성화를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우리 아빠야. 아버…님?
홍중의 말이 사실인지 이 동네 어른들을 꽉 잡고 있던 성화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허리까지 숙여 인사하는 성화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인 홍중의 아버지는 홍중의 반 친구냐 물었다. 차 뒷문을 열어 가방을 던져 넣던 홍중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성화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홍중이랑 같은 반 짝꿍이고 제가 반장이거든요. 홍중이 중간에 끼어들 틈 없이 빠른 속도로 말을 뱉었다. 하하, 그러니? 홍중은 성화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홍중은 뒷자석에 자리를 잡아 앉고서 창문을 열어 뚱한 목소리로 성화에게 말을 건넸다. 학교 구경은 내일 시켜줘. 성화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창문은 올라갔고, 홍중이 아버지의 인사와 함께 차는 저 멀리로 출발했다. 덩그러니 남겨진 성화는 홍중이 정말로 도망친 기업의 직계 손자인가 아닌가에 대한 궁금증을 풀지 못한 채 학교에 던져둔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학교에서 유일하게 재미 붙일 만한 사람의 등장이었다.
대부분 학생들의 생각은 똑같은지, 좁은 학교 안에서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홍중이 전학 온지 일주일 만에 1학년까지 홍중을 구경하러 올 정도였다. 홍중은 날이 갈수록 오히려 높아져만 가는 관심의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더불어 홍중이 해명하지 않아서―정확하게는 이런 소문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해서― 몸을 키워나가는 소문의 정체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 모이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대기업 회장 손자, 불치병 환자, 어둠의 세계를 휘어잡던 킬러…….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들뿐이었다. 만약 홍중의 옆자리가 성화가 아니었다면, 성화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몰려드는 학생들을 쳐내주지 않았다면, 홍중은 전학 일주일 만에 다른 학교로 떠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성화라고 홍중에 대한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홍중은 일주일동안 학교에서 정말 ‘공부’만 했다.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에는 정리를 하고, 체육 시간에는 열심히 공을 차고, 점심시간에는 밥을 먹고 엎드려 낮잠을 잤다. 옆에 함께하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성화뿐인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걸 문제라고 할 수 있나 싶었으나 성화가 옆에 있어서인지, 아니면 홍중이 은근히 벽을 만들어서인지 홍중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성화는 이게 다 입 다물고 있으면 무서워 보이는 홍중의 표정 탓이라 생각했다. 덧붙여 소문을 해결하지 않는 자세까지.
결국 옆에서 들이미는 친구들의 반협박에 못 이겨 성화가 홍중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너 정말로 대기업 회장님 손자야? 너무 직접적이고 구려. 너 혹시 소문 들었어? 네가 불치병에 걸려서 요양하러온 환자라는 거? 이건 나라도 어이없어서 쓰러지겠다. 너 진짜로 사람 죽여 봤어? 이건 누구 아이디어야? 성화는 친구들이 써온 대사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코멘트를 달았다. 그리고 전부 마음에 안 든다며 빠꾸시켰고, 성화는 자기가 알아서 해온다며 혼자 교실 문을 벗어나려는 홍중을 붙잡았다.
“학교 구경하자.”
“…지금?”
“일주일동안 못 했잖아.”
홍중은 잠시 당황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성화에게서 휴대폰을 빌려갔다. 열한자리 번호를 꾹꾹 누른 홍중은 오늘 좀 늦는다며 한 시간쯤 뒤에 데리러 와 달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성화는 단박에 이 번호가 홍중이 아버지의 전화임을 알 수 있었다. 교실 청소를 하는 척 성화와 홍중의 모든 행동에 귀를 기울이던 친구들은 저 전화가 과연 어디로 연결되었던 것일까에 대한 눈빛 토론이 한창이었다. 성화는 친구들을 뒤로 하고 1층부터 천천히 안내했다.
학교의 건물은 어느 학교나 다 똑같았다. 일주일동안 생활한 홍중도 어느 정도 지리를 파악하고 있었고, 겨우 백 명 남짓 남은 학교라 사용하지 않는 교실이 더 많았기에 내부에 대한 설명은 10분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성화는 시골 학교라면 건물 밖이 더 재미있는 법이라고 홍중을 이끌었다. 다 쓰러져가는 자전거 주차장과 상추와 고추가 몇 개 심어진 학교 텃밭 구경까지 시켜준 성화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홍중을 이끌었다. 성화의 손에는 아까 텃밭에서 자란 상추 세 장이 들려 있었다. 여기는 토끼 사육장인데, 원래 옆에 닭도 키웠대. 근데 아침마다 너무 시끄러우니까 다 잡아 먹었다나 뭐라나. 당당히 앞장서는 성화의 뒤를 따라 걷던 홍중은 쫑알거리는 성화의 설명에 그렇구나, 한 마디로 답을 끝냈다. 조금 더 물어보면 해줄 말이 많은데. 성화는 홍중이 묻지 않아 멋쩍어진 입을 꾸욱 다물었다.
텃밭을 오른쪽으로 끼고 쭉 이동하자 보이는 허름한 사육장에는 토끼 세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토깽이들아 오빠 왔당! 성화는 토끼만 보면 헤실 웃으며 발음이 풀렸다. 큰 몸을 구겨 작은 토끼들 앞에 쪼그려 앉으며 홍중이 볼 사리를 만들었다. 얼른 이리 와. 얘네 진짜 귀여워. 홍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성화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하얀색과 갈색, 그리고 반반 섞인 토끼들은 성화의 손길이 익숙한 듯 성화가 내민 상추들을 싸우지도 않고 갉아먹기 시작했다. 원래는 더 많았는데 학교가 돌보지 않는 동안 도망간 건지 얘네밖에 남아있지 않았다는 성화의 말에 홍중은 아깝다고 중얼거렸다. 귀여운데. 토끼들이 상추 먹는 모습을 빤히 보는 홍중의 입술이 길게 나왔다. 집중을 하면 입술이 삐져나오는 게 제법 귀여웠다. 결국 성화는 홍중을 구경하다 토끼들에게 주고 있던 상추를 놓쳤다. 홍중은 떨어진 상추를 주워 다시 토끼들에게 주었다. 토끼 사육장 안을 청소해주는 사람이 없어 자신과 친구들이 순번을 정해 해준다는 말을 덧붙인 성화는 붉어진 귀를 어색하게 긁었다. 공부할 때는 이정도로 반짝이지 않았으면서 토끼들에게 집중할 때 반짝이는 홍중의 눈이 뭐가 그렇게 예뻐 보이는 지 모를 일이었다.
너 닮았네. 오물거리는 토끼 입을 빤히 보던 홍중이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삑사리 난 목소리로 되묻는 건 성화였고. 아무것도 모르고 주는 거 받아먹는 게 너 닮았다고. 홍중이 쐐기를 박았다. 성화는 홍중이 왜 토끼를 보면서 자신을 닮았다고 했는지 이해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홍중이 친절하게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지만 성화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약 180의 남성에게 토끼를 닮았다는 말은 잘 안 하지 않나? 오직 성화의 귓가에는 홍중의 ‘너 닮았네’가 반복되었고, 그 말은 곧 ‘너는 토끼처럼 귀엽다’로 인식되었다. 아니, 아까 토끼보고 귀엽다고 했잖아. 그럼 나는? 상상에 날개를 단 것뿐만이 아니라 아주 비행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고 있었다. 홍중은 성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툭 한 마디 내뱉었다. 학교에서 내 소문 막 이상한 거 네가 했냐? 아까의 달달한―오직 성화의 생각이다.―말과는 달리 이번에 나온 말은 제법 뼈가 있었다. 성화가 애초에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이기도 했다. 홍중을 둘러싼 소문의 진위여부를 파악할 것. 성화는 화들짝 놀라 손사래까지 치며 아니라고 해명했다. 홍중은 성화의 답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가로로 길게 떴다. 정말? 단 두 글자가 성화에게 이토록 크게 다가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니, 정말로. 있잖아? 누구든지 서울에서 전학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 소문이 생겨날 걸…. 그리고 이 동네에 전학생 6년만이야. 중학교 때부터 못 보다가 이번에 보는 거라고. 게다가! 거기에 대한 답을 하나도 주지 않으니 우리는 궁금해 할 수밖에 없잖아.”
“그럼 직접 물어보지, 소문은 왜 만드는 건데?”
성화는 홍중보다 홍중이 아버지에게 먼저 닿은 홍중에 대한 소문 탓에 가족과 다 함께 먹는 저녁 자리에서 얼마나 웃음거리가 되었는지에 대해 30분 동안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성화는 홍중의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잽싸게 물었다. 그럼 소문은 다 가짜야? 홍중은 성화의 질문에 대해 한동안 말이 없었다. 왜? 성화는 물음표를 잔뜩 띄운 채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라면 아닌 거지. 설마, 진짠가? 성화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어머, 진짠가 봐. 이내 추측한 사실처럼 번졌다. 홍중은 성화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둬 토끼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픈 건 내가 아니고 누나. 누나 요양 차 1년 쉬러 왔어. 대기업 회장 손자는 무슨. 그랬으면 여기가 아니라 외국으로 갔겠지. 킬러는 네가 생각해도 어이없지? 홍중은 성화가 상상했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반박했다. 홍중의 이야기 한 번 성화의 고개 끄덕임 열 번. 성화는 홍중의 말이 성경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홍중은 성화의 행동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 내 말을 너무 잘 믿는 거 아니야? 성화는 허허 웃기만 했다.
홍중은 작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나중에 집으로 놀러 와. 아빠가 너 엄청 보고 싶어 하더라. 성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문 앞에서 홍중을 부르는 경적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아직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간, 홍중은 바닥에 내려놓은 가방을 들춰 메고 옷에 묻은 흙을 털었다. 아무튼, 나중에 시간 날 때 미리 말 해. 홍중은 미련 없이 뒤 돌아 교문으로 향했다. 토끼 사육장 앞에 홀로 남아 버린 성화는 상추를 더 달라며 성화의 손가락을 코로 찌르는 토끼들과 떠난 홍중의 뒤통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홍중을 향해 달려갔다.
나! 오늘 시간 되는데! 성화의 우렁찬 목소리가 홍중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오늘은 안 돼! 홍중이 성화에게서 도망가는 것처럼 외쳤고, 성화는 홍중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 그런 게 어디 있어. 오늘 시간 된다니까? 오늘 가게 해줘. 성화는 말꼬리를 길게 늘려 애교까지 추가했다. 친구들이 본다면 저런 미친놈이 어디서 성화를 잡아먹고 성화 행세도 똑바로 못한다고 빗자루로 때렸을 테지만, 지금은 앞에 홍중밖에 없으니 이런 짓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홍중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지만 싫은 기색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홍중은 차 뒷문을 열어 성화에게 고개짓 했다.
뭐해, 안 타고.
헐.
성화가 차에 올라타자 바람에 날린 벚꽃들이 우수수 차 안으로 들어왔다. 홍중은 벚꽃과 함께 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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