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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합니다 下>, f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12월 22일
  • 9분 분량


해 뜨기도 전에 찾아와서 문 두드릴 기세로 꼭 갚겠다 다짐해놓고선 결국 그러지 못 했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너무 바빴다. 백화점의 축제라는 연말인데다 크리스마스라는 절정이 코앞까지 다가와서 며칠 째 연장 근무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물류가 들어와서 개점 직전까지 지하실에서 잔기침해가며 정리했고, 개점하면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쏟아지는 고객들 응대하느라 밥 먹을 시간도 부족했고, 폐점하면 내일을 준비하느라 막차 시간에 겨우 맞춰서 퇴근했다. 틈나는대로 운동을 한다는 여상도 나가떨어질 만큼 정신 없는 하루의 연속이었다. 앞서 이틀 동안엔 기를 써서 수선집에 가야겠다고 생각이라도 했는데 그 상태로 일주일이 지났더니 새카맣게 잊어버렸다.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물류 기사가 갑자기 따로 줄 게 있다며 조수석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냈다. 매니저가 전해주라고 하던데요. 한마디 툭 던지고 기사는 트럭과 함께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봉투 안에는 산타 모자와 크리스마스 장식이 들어 있었다. 따로 설명을 듣지 않아도 용도가 보였다. 종일 허리를 굽혔다 폈다,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는데 모자는 되려 걸리적거릴 게 뻔했다. 이거 인권 유린 아닌가. 하지만 안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불시에 찾아와 고객인 척 매장 주변을 돌면서 본사 지침을 따랐는지 몰래 지켜볼 테니까.




가장 바쁜 시간대가 지나갔으니 한두 시간 정도는 여유로울 것 같았다. 넋이 나가서 구석에 서 있는 여상을 잡아당겼다. 재고 가져오는 김에 좀 쉬다 와. 형은요? 형은 괜찮아요? 너 오면 그때 다녀오지 뭐. 그래도 어떻게 형만 두고 가냐며 안 가려고 버티는 애를 꾸역꾸역 등 떠밀어서 보냈다. 지난주 주말 내내 혼자 근무 세운 게 마음에 걸린 것도 있었다. 여상을 보내고 바닥을 내려다보니 완전히 초토화였다. 포장하면서 나온 쓰레기와 과자 부스러기들이 뒹굴었다. 전쟁통이 따로 없네. 손에 잡히는대로 정리를 시작했다. 허리를 숙이자마자 모자 꽁무니가 흘러내렸다. 바쁠 땐 못 느꼈는데 이제야 걸리적대는 게 느껴졌다. 홧김에 모자를 벗어서 바닥에 내팽개치는 상상까지 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 하고 작게 투덜거렸다. 그놈의 크리스마스가 뭐라고 거추장스럽게 모자를 뒤집어 쓰냐고. 지들은 편안하게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니까 내 입장은 조금도 고려를 안 하고……


—안녕하세요.

—아, 깜짝아.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언제 온 거지. 곧장 비즈니스 미소를 장착하고 뒤를 돌았다.


—어서 오세요…… 어?

—진짜 여기서 일하시네요. 우와, 모자 귀엽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의 등장이었다. 벙쪄서 그대로 멈춰버린 나와 달리 그는 아무렇지 않게 진열대를 훑어보았다.


—뭐가 맛있어요? 그때 이것저것 추천해줬던 것 같은데.


그의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요 며칠 자려고 누우면 뭔가를 잊어버린 기분이 들어서 찝찝했는데 그게 무엇인가 했더니만.


‘아직까지 그런 손님은 없었어요. 떼어먹었다 해도 별 신경 안 써요.’

‘그런 손님이 제가 처음이 될 수도 있죠.’

‘본인을 너무 의심하시는 거 아니에요? 가게 주인이 상관 안 한다는데도’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거니까요.’


이럴거면 말이나 말 걸.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래도 세일즈맨이라는 본분을 지켜야하므로 물 밀 듯 들어오는 부끄러움을 꾹 참았다.


—랑그드샤나 샤브레를 기본으로 많이 선택하시고요… 선물하실 거면 제니 쿠키 많이들 찾으세요. 케이스가 예쁘거든요.

—타르트 쿠키도 있네. 이것도 맛있어요?

—네. 딸기 좋아하시면 한번 드셔보세요. 적당히 달아서 간식으로도 좋아요.


같이 과자를 골라주는 척하면서 슬쩍 그의 얼굴을 보았다. 렌즈가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안경이 흘러내려서 썼다기보다 얹었다고 표현하는 게 알맞았다. 안경테가 얇은 것을 보아 외출용인 듯했다.


—랑그드샤랑 타르트 쿠키, 종류별로 다섯개씩 담아주세요.

—선물 포장 해 드릴까요?

—포장비가 추가 되나요?

—원래 추가되는데… 고객님은 따로 안 받을게요.

—설마 그걸로 수선비 퉁치려고 하시는 건 아니죠?


하하, 눈치도 빠르셔라. 나는 어색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가 큭큭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농담이에요. 이걸로 퉁치죠.

—죄송해요. 너무 바빠서 갈 시간이 없었어요.

—그럴 것 같았어요.

—진짜 떼어먹는 줄 알고 찾아오신 거예요?

—처음엔 그랬는데 막상 얼굴 보니까…

—……

—역시나 그렇네요. 찾아오길 잘했어요.


그러면서 그는 장난스럽게 샐쭉 웃었다. 첫인상과는 다르게 살짝 짓궂은 면이 있는 듯했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유연하게 넘어가서 다행이었다. 그가 고른 과자들을 상자에 담았다. 포장대가 뒤에 있어서 자리를 옮겼더니 뽈뽈 따라와서는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쳐다보시면 좀 부담스러운데요.

—꼼꼼하게 안 해도 돼요. 선물할 거 아니니까.

—그래두요.


안 볼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무릎을 굽혀 진열대 위로 눈만 쏙 내놓았다.


—이렇게 하면 좀 덜 할까요.

—……

—알았어요. 안 쳐다볼게요…


이제 좀 가만히 있나 싶었는데 포장지를 꺼내기가 무섭게 그가 말을 걸었다.


—그날 우영이가 잘 데려다줬어요?

—네… 아, 그 분한테도 보답을 해야 하는데. 이참에 더 챙겨드릴 테니까 같이 드세요.


그가 흠칫 놀라며 몸을 돌렸다.


—걔는 쿠키 안 좋아해요.

—그럼 뭐 좋아하세요? 쿠키 말고도 다른 거 많아요. 고객님 것도 같이…

—성화요, 성화.

—네?

—고객님은 너무 딱딱하잖아요. 통성명까지 해놓구…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인데 그는 꼭 우리가 때때로 보는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대꾸하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그가 진정 서운하다는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우영의 몫까지 생각해 추가로 담은 과자는 결국 그의 몫이 되었다. 그의 요청이었다. 우영인 자기가 평소에도 잘 챙겨주니까 지금 눈 앞에 있는 자기 것만 챙겨달란다. 알겠다고 했는데도 계속 자기 거 맞냐고 물어보길래 쏘아보았다. 한 번만 더 그러면 영업 방해로 보안원 부를 거예요. 그는 한껏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영업 방해는 너무했다.

—포장 다 됐어요.

—네에.


이제 가는가 싶었는데 안 가고 우뚝 서 있다. 더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갑자기 코트 주머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더니 안경을 벗고 진열장을 받침대 삼아 무언가를 열심히 적었다. 상체를 바짝 숙인 탓에 날카로운 코끝이 종이에 닿기 직전이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끌차에 재고를 싣고 나오는 여상이 보였다. 어쩐지 여상이 오기 전에 이 상황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저만치서 여상과 눈이 마주쳤다. 손을 흔들면서 다가오는 여상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때 갑자기 내 시야에 그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너무 가까웠다. 눈동자 색깔이 보일 정도였다. 그도 놀란 눈치였다. 삐그덕대며 뒤로 물러나더니 머쓱하게 이마를 긁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모, 모자가 정말, 정말 귀엽네요. 잘 어울리고.

─네… 고마워요.

—이거, 제 전화번호예요.


명함에서 본 것과 다른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두고 그는 도망치듯 떠났다. 뒤이어 온 여상이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아냐, 과자 선물은 처음이라고 구성 추천해달라길래. 천연덕스럽게 나오는 거짓말에 놀라서 말을 하다 말았는데 여상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럼 이것도 그 손님 물건인가?

—…응?


그가 머물렀던 자리에 펜과 안경이 그대로 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뒤늦게 쫓아갔으나 이미 그는 사라진 뒤였다.






한파가 시작되면서 창문 틈으로 새는 냉기가 심해졌다. 장롱 구석에 박힌 짙은 갈색 커튼을 꺼냈다. 이삿날에 인부에게 부탁해서 달았다가 먼지가 너무 많이 생겨서 도로 떼어낸 뒤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뿌연 먼지가 엉겨붙어 있었다. 이걸 지금 세탁기에 돌리면 완전히 마를 때까지 일주일은 걸리겠지. 일기예보에선 다음주까지 한파 예상된다고 했는데. 불현듯 집 앞에 세탁소가 생각났다. 바로 옷을 챙겨입고 집을 나섰다. 문을 닫자마자 집 안에서 전화벨이 울리는 걸 들었지만 받지 않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차 바퀴가 헛돌았던 골목길은 사람들이 뿌린 연탄재와 흙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걸 보고 아차 싶었다. 계단에 뭐라도 뿌려둘 걸. 그가 왔다 갔던 날도 빙판길 때문에 동네가 난리였었다. 미끄러지듯 내려가는 차들과 기어가다시피 몸을 낮추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는 사람들 사이로 그보다 훨씬 느리고 신중하게 다음 걸음을 내딛는 그를 상상했다. 한 손은 담장을 짚고 다른 한 손엔 가방을 들고 가느라 흘러내리는 안경을 고쳐쓰기 어려웠겠지. 그를 외면한 것이 후회되었다. 더 생각하면 당장 그에게 달려가고 싶어질까 봐 서둘러 내려갔다.


세탁소에 들렀다가 가는 길에 연탄재를 발견했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냉큼 두 개를 주워서 올라갔다. 발로 밟아서 잘게 부수고 빗자루로 쓸어서 계단에 뿌렸다. 그는 다시 올까. 아니면 그 길로 절연을 다짐했을까. 어떤 선택을 했든 내가 그에게 못난 짓을 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정리하고 들어가려던 참에 안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나에게 전화를 할 사람은 몇 안됐다. 그 중에 누가 이 시간에 전화를 했을까. 예상 인물이 추려지고 전화벨은 더 힘차게 울었다.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여보세요? 홍중이 형 전화 맞나요?


추려진 인물에 포함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맞아요. 오랜만이네요.

─지금 통화 괜찮아요?

─괜찮아요. 말해요.


평소와 다르게 우영은 말을 쏟아내지 않았다. 뜸들이며 주저하기를 몇 번. 기다리는 나마저 속이 타들어갈 때 쯤, 우영이 어렵게 입을 뗐다.


─성화 형 일인데요……


이어지는 우영의 말들이 심장을 쥐고 뒤흔들었다. 메모하는데 손이 덜덜 떨렸다. 지금 가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급하게 짐을 챙겨서 다시 집을 나섰다. 우영과 통화했던 몇 분 사이에 바깥엔 눈이 내렸다. 눈발이 굵었다. 계단에 뿌려진 연탄재 위로 빠르게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때 외상만 안 했으면 지금 이렇게 곤란한 일도 생기지 않았을 텐데. 틈틈이 가게에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고 그의 휴대폰도 묵묵부답이었다. 휴대폰을 장식으로 두나! 초조한데 딱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시도하는 것뿐이라 발만 동동 굴렀다. 음성메시지를 여러 통 남기고 나가려고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이 진동했다.


[안경은 내일 가지러 갈게요.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성화]


가게에 도착했나? 어떻게 갔지? 행동 반경이 좁은 것 같았는데 길눈이 밝은가. 분명 부재중이 쌓여 있는 걸 봤을 텐데 굳이 전화를 되걸지 않은 이유가 있겠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안부를 확인했으니 마음이 좀 놓였다. 하지만 안경 없이 못 사는 사람에게 안경을 가지러 오게 할 수는 없으니...


[퇴근하고 가게에 들릴게요. 대신 성화씨 퇴근도 좀 늦어질지도ㅎㅎ -홍중]


나름 고심해서 적은 답장이었다. 이름 안 불러줬다고 입 삐죽 내민 게 갑자기 생각나서. 별 것도 아닌 일에 신경 쓰게 만들고 참 이상한 사람이야. 매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휴대폰이 또 진동했다. 거 장사 안 하고 휴대폰만 보나.


[핫초코랑 같이 기다리고 있을게요! -성화]

[(다음엔 성화씨 말고 성화였으면 좋겠당...) -성화]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운이 좋았다. 큰 행운은 아니고, 사소하지만 꼭 필요한 순간에 찾아온 행운이었다. 타야 하는 버스가 기다림 없이 바로 왔다. 심지어 빈 자리까지 있더라니까. 빈 자리를 발견하자마자 잽싸게 달려가서 다이빙하듯 앉았다. 뒤이어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버스 안은 금방 온기로 가득 찼다. 노곤노곤하니 눈이 스르륵 감겼다...가 부릅 떴다. 와, 방금 잠들 뻔했다.


충분히 일찍 도착할 수 있었음에도 한 시간이나 늦은 이유를 들은 그는 되려 미안해 했다. 물건을 놓고 간 사람이 가는 게 맞는 건데 상대방이 온다고 하니까 냉큼 기다리겠다고 받아든 자기 탓이라고. 그러고는 다 식은 핫초코를 버리고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그래도 잘 찾아왔네요? 종점에서 이 동네 오는 길은 처음이잖아요.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엄청 물어봤어요. 부끄러워서 도로 집에 갈 뻔했네.


탁, 소리가 나면서 커피포트 불빛이 꺼졌다. 뜨거운 물을 따르는데 수증기가 확 올라오면서 그의 안경이 뿌얘졌다. 커피포트를 든 그의 손이 흔들린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는 컵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 화들짝 놀란 그가 몸을 뒤로 뺐다. 컵도 같이 흔들리면서 흘러 넘친 뜨거운 물이 내 손등을 덮쳤다.


─아!


그는 커피포트와 컵을 내려놓고 내 손등을 살펴보았다. 언제 안경을 벗었는지 맨눈이었다. 미간을 세게 찌푸리고 눈을 바짝 가져다대었다.


─에이, 그정도는 아니에요.

─놀랐잖아요.


묘하게 날이 서 있는 말투였다. 순전히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행동이라서 설명하면 그가 불편해 할 것 같았다.


─이유는 대충 아는데 이정도는 문제 없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미안해요.

─사과할 일이 아니니까 미안해 할 필요도 없구요.


순식간에 얼어붙은 분위기에 둘 다 침묵했다. 그는 냉동실에서 꽝꽝 얼린 생수병에 손수건을 감싸서 내 손등에 얹었다. 너무 투박하게 대했나 싶었는지 그가 한껏 누그러진 어투로, 어떡해요... 중얼거렸다.


─뭐가요?

─물집 생길 것 같은데 어떡해요...

─그정도로 깊진 않아요. 괜찮아요.


매장에 두고 갔던 안경을 쓰고 뒤를 돌아 꼼지락거리더니, 마시멜로우 하나를 꺼내서 내밀었다.


─핫초코는 안되니까 이거라도.

─이 조그만 공간에 별 게 다 있네.

─여기서 잘 안 나가니까 웬만한 건 다 갖다 놨죠.

─안경 쓰면 멀리는 힘들어도 동네는 돌아다닐 수 있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돋보기라 오래 쓰면 어지러워요. 그리고 잠깐만 자리 비워도 전화 엄청 와서... 그냥 안 나가고 말아요. 어차피 월요일마다 쉬니까 볼 일 있으면 그때 처리하면 돼요.

─월요일...


입 안에 퍼지는 마시멜로우의 단맛 때문인지 그걸 먹느라 남는 손이 없어 대신 얼린 생수병을 잡아주고 있는 그의 손이 보여서 그랬는지. 평소와 다르게 충동적으로 나오고 싶어졌다.


─저도 월요일에 쉬는데.

─......

─괜찮으면... 그때 만날래요?


나는 그가 당황해 할 줄 알았는데,


—콜. 저는 좋아요.


선뜻 그러겠다고 했다.






우영의 부탁을 받고 부리나케 간 곳은 시내에 위치한 대학병원이었다. 로비에 들어가자 나를 먼저 발견한 우영이 손을 흔들었다. 형, 여기요!


—갑작스럽게 부탁한 건데 와줘서 고마워요. 근데 정말 괜찮아요? 근무 시간이랑 안 겹쳐요?

—얼마 전에 그만 뒀어요.

—아...

—성화 씨는 나 오는 거 알아요?

—당연히 알죠.

—뭐라 안 해요?

—엄청 뭐라 그랬어요. 애궂은 사람 데려다가 고생 시킨다고.


로비에서 우영과 헤어지고 7층으로 올라갔다. 병실 문 옆에 붙은 환자 이름들 속에서 그의 이름을 찾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점심시간이 막 지난 후라서 대부분 낮잠을 청하거나 산책을 나가서 자리를 비웠다. 그는 창가였다. 상을 올려놓고 블록을 조립하고 있었다. 꽤나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집중을 깨는 게 미안할 정도라서 부르기를 머뭇거렸다. 한 박자 늦게 인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약간의 반가움도 보인 것 같은데... 그건 너무 내 바람인가.


그는 하던 것을 그만두고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런데 모양새가 어째 이상하다. 안경 콧대가 검은 절연 테이프로 둘둘 감싸져 있다.


—안경은 왜 그래요?

—아, 이거 넘어질 때 같이 떨어뜨려가지구...


그제야 다친 다리가 보였다. 무릎 바로 아래까지 석고 붕대를 감았다. 그가 몸을 깊숙이 숙여 침대 밑으로 팔을 쭉 뻗었다. 그 모습이 위태로워 보여서 가방을 아무렇게 던져두고 보호자 침대를 꺼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저한테 말해요. 무리하게 움직이지 말고.

—깁스가 좀 무식하게 돼서 그렇지 보기보다 괜찮아요. 식판도 제가 갖다 놓는데요 뭐.


상 위에 어지럽게 놓인 블록을 정리하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까 전화로 그가 다친 이유를 듣고 매순간에 눈물을 참느라 애를 쓰는 중이었다. 한걸음에 달려간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원인이 내가 아니었어도 달려갔겠지만.






우리는 그 다음에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지키지 못했다. 그는 지켰으나 내가 그러지 못했다.


전날 퇴근하고 집에 도착해서 가방을 내려놓기가 바쁘게 전화벨이 울렸다. 늦은 시간에 전화라니.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에 예민했으므로 한 소리 할 요량으로 받았다.


—이보세요, 아무리 급한 일이어도 이 시간에 전화를...

—잘만 살아 있네.


그래, 나에게 전화를 걸 사람은 몇 없었지. 학창시절 친구들은 술김에도 연락하지 않았고, 그는 전화가 하고 싶으면 그래도 되냐고 문자를 보내니까. 이렇게 거두절미하고 용건부터 들이밀고 보는 건 가족 뿐이었다.


—...왜 전화하셨어요.

—영영 오지 않을 생각이냐?

—새삼스럽게 왜 그러세요. 한두 해 그런 것도 아니고.

—내려와라. 할 말 있어.

—그냥 지금 말씀하세요. 무슨 얘기든 제 시간 쓰고 싶지 않아요.


뒤이어 듣는 사람 귀청 떨어져라 악 쓰는 소리가 이어졌다. 한참 욕을 하면서 케케 묵은 세월까지 들먹이다가 불현듯 목적이 생각났는지 주제를 바꿨다.


결론은 병시중을 들어달라는 거였다. 그래, 몇 년을 없는 사람처럼 알고 살다가 별안간 내 생각나서 전화하진 않았겠지. 위아래로 줄줄이 있는 내 형제들은 사정이 딱해서 맡길 수 없단다. 난 뭐 벌어놓은 게 많느냐고 따졌더니 그동안 가족을 등진 대가를 치루라는,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렸다. 더는 듣고 싶지도 들을 가치도 없었다. 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한 번 더 전화벨이 울렸다. 받지 않았다. 몇 분 뒤에 또 울렸다. 전화선을 뽑아버렸다.




완전히 잊고 살았다. 잊어야만 했고 그럴 각오로 스물도 안된 나이에 야반도주하듯 집을 나왔다. 내 자리가 만들어졌다고 생각될 때쯤엔 대학 정문 앞에 서성거리던 과거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게까지 버둥거리며 살고 싶었던 이유도.


그러다가 사랑마저 잊어버렸다. 구전 동화처럼 옮겨가는 입이 많을수록 더더욱 허상이 되는 상상의 산물이 되었다. 철썩같이 그런 것이라 믿었다기보다 나와는 너무나 먼 이야기라서 와닿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만난 건 꿈이 아닐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내가 착각한 거라고 매몰차게 대했으면 기대도 안 했을 텐데.


[무슨 일 있어요? 괜찮아지면 전화주세요. 기다릴게요. 저 기다리는 거 엄청 잘하니까 괜한 걱정은 말고... -성화]


왜 당신은 나를 구하려고 하는지.

구원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는 그날에 대해 묻지 않았다. 물어보고 싶은 걸 참고 있다는 티도 내지 않았다. 그냥 내게 그럴만 한 사정이 있었겠거니 넘어간 모양이었다. 오히려 내 입이 더 근질거렸다. 다친 다리를 보니 더 그랬다. 사과를 깎아주려고 과도를 잡았는데 평소에 뭘 해 먹는 일이 없다보니 자세가 어설펐다. 위험해보였는지 그가 “저 사과 껍질 길게 잘 깎는데 한 번 볼래요?” 자연스럽게 내 손에서 사과와 과도를 가져갔다.


—전부터 느낀 건데, 성화 씨는 말을 참 예쁘게 하는 것 같아요.

—제가요?

—방금도 그렇잖아요. 보통 사람이면 그렇게 깎는 거 아니라고 핀잔줬을 걸요.

—저 진짜 사과 껍질 길게 잘 깎아요. 기술가정 시간 때 그걸로 가산점 얻었는데.

—지금도.


진짠데... 중얼거리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몄다. 부드럽게 껍질을 깎는 손을 따라 내 시선이 움직였다. 끝에 가까워질수록 시선은 사과가 아닌 그의 손으로 옮겨갔다. 그새 생채기가 늘었다. 팔에서 혈관을 못 찾았는지 주삿바늘이 손등에 꽂혀 있었는데 마른 게 두드러져 보였다. 잡으면 바스라질 것 같았다. 그쯤 그는 알맹이를 먹기 좋게 자르고 있었다.


—그날 말도 없이 안 나가서 미안해요.


그가 하던 것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낼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처음부터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고 그게 면죄부가 될 순 없으니까 전부 설명은 못 하지만... 안 나간 건 제 의지였어요. 성화 씨 얼굴 보면 나도 모르게 다 말할 것 같았거든요.

—괜찮아요. 원래 일이란 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잖아요. 다 이해해요. 그러니까 그 일에 깊게 마음 쓰지 마세요. 진짜 미안해 할 사람은 홍중 씨가 아니라 저예요.

—성화 씨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요.

—우영이를 못 막았잖아요. 사실상 그게 가장 큰 잘못이에요.

—우영 씨 덕분에 다시 만났잖아요. 그걸로 퉁치죠.


백화점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의 말투를 흉내내며 말했다. 그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소리내어 웃었다. 이 모습이 보고 싶어서 몇날을 지샜는지 모른다. 가위로 싹둑 잘라낸 것 같은 지난날이 무색하게 우리는 어제도 만난 사람들처럼 잘 웃고 잘 말했다.


—저 하나 더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요?

—죽은 왜 준 거예요?

—혹시나 아파서 못 나왔을까 봐요.


아무래도 나는 셈 없는 다정함 앞에서 오래 행복하고 싶었다.

성화도 나의 기대 앞에 오래 기다려주고 싶은 마음이기를.


—어, 눈 온다.

—첫눈이네요.

—이거 다 먹고 잠깐 산책 갈까요?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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