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합니다 上>, f
- 계간 성홍
- 2022년 9월 23일
- 8분 분량
이불을 뒤집어쓰고 수화기 앞에 앉은 지 벌써 한 시간 째. 그 옆에 놓인 보온 가방 안엔 아직 식지 않은 야채죽이 들어 있다.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 두통과 잔기침에 휘청거리다가 일단 자고 일어나서 다시 생각해볼까 싶었지만, 이곳까지 걸음한 그의 수고를 알기에 쉬이 그럴 수도 없었다. 분명 혼자 왔을 텐데. 단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어 속이 바짝 타들어갔을 터였다.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는 계단부터 유달리 가파른 이 동네의 경사 길과 무릎께밖에 오지 않는 난간 때문에 한 걸음이 위태로웠던 옥탑 가는 계단까지. 모든 경로가 생존의 기로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겐 일도 아닌 것들이 그에게는 일평생 덜어낼 수 없는 짐이었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상태였지만 오직 그의 수고만을 생각하며 뚜껑을 열었다. 보온 가방에 담겨서 시간이 꽤 지체되었음에도 온기가 그대로였다. 한 숟갈 떠서 먹으려는데 눈물이 났다. 눈두덩이를 찢을 기세로 닦아내도, 한숨을 크게 쉬어도, 터져야만 멈출 수 있는 슬픔은 통제가 불가능했다.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고 한참을 울었다.
*
뒷정리를 하다가 셔츠 옆구리가 일자로 주욱 찢어졌다. 실밥 터지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서 뒤에서 유리 진열장을 닦던 여상이 돌아볼 정도였다. 나도 놀라서 그 자세 그대로 멀뚱하게 서 있었다. 포장대 모서리에 걸린 셔츠를 조심스럽게 뺐더니 더 가관이었다. 단벌로 여러 명이 오랫동안 번갈아가며 입은 탓에 충분히 헤진 옷이었다. 그러니 찢어지는 속도와 결과도, 빠르고 처참했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셔츠를 벗었다. 다행히 안에 받쳐 입은 반소매는 멀쩡했다. 다친 곳도 없었다. 다만 내일 출근이 심히 걱정됐다. 여상아, 지금 몇 시야? 아홉 시요. 이 시간까지 하는 수선집은 없겠지? 아마 그러지 않을까요. 마저 뒷정리를 하면서 출퇴근길에 보았던 수선집과 세탁소의 위치를 떠올렸다.
웬만한 가게들은 문을 닫았거나 닫기 직전이었다. 초조한 마음에 걸음이 빨라졌다. 중간에 불이 켜져 있는 세탁소를 발견하고 뛰어갔으나 보조등이었고 아무도 없었다. 다른 가게는 다 문을 닫은 뒤였다. 급한대로 직접 손 볼까 싶었지만 찢어진 범위가 너무 커서 괜히 손댔다간 더 상할 것 같았다. 남은 하루를 길거리에 쏟더라도 찾아야 했다. 어느 새 내가 사는 동네를 지나 처음 보는 동네까지 넘어왔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옷을 고칠 생각 뿐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붙잡고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시간이 시간인지라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온종일 서서 일하느라 퉁퉁 부은 다리는 감각이 없고, 등에서 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더 이상 가면 돌아가는 길이 너무 길어진다는 생각에 뒤를 돌았을 때,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간판을 발견했다.
성화수선
너는 포기를 모르는 놈이라 못 해도 중박은 칠 거다. 왜 그 순간에 갑자기 고등학교 담임 선생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창문을 노크하자 주인 남자가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셔츠를 보여주며, 수선 돼요? 라고 묻자 남자는 창문을 열었다. 기껏해야 나보다 두세 살 많을 것 같았다. 아니면 그만큼 어리거나. 콧등에 얹어진 안경은 렌즈가 두꺼웠다. 그래서 흘러내린 건가. 돋보기 같기도 하고. 남자는 내 손에서 셔츠를 가져갔다. 안경을 치켜올리고 옷을 보는 폼이 꼭 노인들이 돋보기 쓰고 작은 글자를 읽는 모습과 유사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안경을 벗었다.
─고칠 수는 있는데 옷이 너무 해져서 오래 못 입겠어요.
─괜찮아요. 내일 아침까지 되나요? 좀 급해서요.
─……
─어떻게, 안될까요.
─안에서 잠깐 기다리세요. 금방 해 드릴게요.
남자는 창문을 닫고 출입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구석에 앉았다. 가게가 작아서 눈만 굴려도 다 보였다. 작업대는 기역자 모양이었는데, 창문 아래 쪽에 있는 건 큰 다리미판이었고 그 옆으로 재봉틀과 수선에 필요한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벽에 걸린 나무 진열대엔 색색깔의 재봉실들이 들어 있고, 내 머리맡엔 수선이 끝난 옷들이 주인만의 방식으로 개어져 있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먼지도 없었다. 여간 깔끔함이 아니었다. 정리정돈을 어려워하는 나에게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노련하게 재봉틀 페달을 밟는 발을 보면서 문득, 남자도 나처럼 일찍이 생계 전선에 뛰어든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주변에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가끔 안부 전화를 주고 받는 친구들은 전부 대학에 진학했다. 휴무날 밀린 집안일을 하고 말소리가 그리워서 전화를 해보면, 제때 받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 다들 바쁘겠지. 전화한 사실도 잊을 만큼 나중에서야 전화가 왔다. ‘시험 기간이라서 바빴어.’, ‘학생회 일 때문에 정신이 없다, 야.’, ‘술 퍼 마시느라 눈 뜰 새가 있어야지!’. 그때마다 대충 웃고 넘겼지만 어쩐지 입 안이 썼다. 모두가 교복을 입었던 시절엔 나도 대학 진학을 준비했었으니까. 밑으로 딸린 형제가 많아 네 공부 뒷바라지는 못 해준다던 단호한 얼굴을 마주한 다음날은 원서 접수날이었다. 구석에서 자는 척 누워 있다가 식구들이 깊게 잠들었다고 확신이 들었을 때 미리 챙긴 짐 가방을 들고 도망치듯 떠났다. 발자국마저 남기기 싫어서 손에 운동화를 들고 맨발로 대문을 나갔다. 그 운동화는 지금도 신고 있다. 캠퍼스를 밟아야 했던 운동화는 정문 앞에서 서성이길 수십 번, 끝내 그 안으로 들어가진 못 하고 그 대신 백화점의 대리석 바닥을 누볐다.
재봉틀 소리가 멈췄다. 남자는 박음질이 제대로 됐는지 확인하고 내게 셔츠를 건넸다. 바로 그 자리에서 셔츠를 입었다. 깔끔하게 제 모양을 찾았다. 다시 셔츠를 벗었다. 수선비를 지불하려고 지갑을 열었는데 웬 걸, 안이 텅 비었다. 당황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 지갑을 뒤적거렸다. 그때 남자가 불쑥 내 앞으로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이름이랑 전화번호 적고 가세요. 수선비는 내일 받아도 되니까.
─아……
─가끔 있는 일이에요. 괜찮으니까 이름이랑 전화번호만 쓰고 얼른 들어가세요. 너무 늦었어요.
얼떨떨하게 종이와 펜을 받아들었다.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으려다 그 밑에 백화점 이름과 매장명까지 적었다. 수선비를 떼어먹으려고 일부러 쇼를 벌인 게 아니라는 확신을 주고 싶었다. 손바닥만한 종이가 글자로 빼곡했다. 남자에게 종이와 펜을 돌려주었다. 남자는 종이를 눈 앞에 바짝 가져다대고 읽었다.
─직장은 안 쓰셔도 되는데.
─사람 일은 모르잖아요. 혹시나 제가 내일 안 오거나 전화를 안 받으면……
나름 진지한 이유였는데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안경을 벗었다. 줄곧 돋보기 같은 안경에 눌렸던 맨 얼굴이 드러났다. 예민하게만 보였던 얼굴이 이제 보니 한없이 유했다. 날렵한데 둥글고, 예민한데 순했다. 상반된 분위기가 동시에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직까지 그런 손님은 없었어요. 떼어먹었다 해도 별 신경 안 써요.
─그런 손님이 제가 처음이 될 수도 있죠.
─본인을 너무 의심하시는 거 아니에요? 가게 주인이 상관 안 한다는데도.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거니까요……
못 말린다는 듯 남자는 실웃음을 띄었다. 내일도 이 시간까지 열려 있으니까 퇴근하고 천천히 오세요. 꾸미지 않은 다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쑥스러운 인사를 남기고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발이 닿는대로 걷다가 이상함을 느끼고 멈췄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상가들과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자정이 다가오는 늦은 밤. 낯선 동네에서 길을 잃었다.
*
울다 지쳐서 까무룩 잠든 모양이었다. 눈을 떠보니 사위가 어두웠다. 일어나서 등부터 켰다. 불편한 자세로 잤더니 어깨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곳이 쿡쿡 쑤셨다. 내일은 출근해야 되는데. 느닷없이 찾아온 감기 몸살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이틀 병가를 냈다. 나아진 구석이 없어도 제일 바쁜 주말에 여상 혼자서 개점 준비부터 마감했을 테니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야 했다. 이부자리를 대충 정리하다가 수화기 옆에 놓인 죽 그릇을 봤다. 그 사이 완전히 식었다. 날이 추워서 상하진 않았다. 죽 속에 파묻힌 숟가락을 빼고 뚜껑을 닫아 냉장고에 넣었다. 보온 가방은 접어서 쇼핑백을 모아놓은 상자에 넣었다. 그러다가 또 문득, 저렇게 정리하는 방법을 알려준 그를 떠올리는 것이다. 그를 만나고 늘 어수선했던 집 안이 하나씩 정돈되었다. 마른 빨래를 개는 방법, 수저를 삶아야 하는 때와 항상 보관 기간을 몰라서 곰팡이 필 때까지 방치했던 반찬들의 보관 기한 같은 것들. 자기 일만 알아서 다른 건 거들떠도 안 본다는 구박을 받고 자란 나에게, 배우면 된다고, 처음부터 알고 사는 사람은 없다고, 다독여주던 애틋한 손길이 집 안 곳곳에 조용히 자리했다.
미리 사둔 약을 다 먹어서 약국에 갔다. 몸살 약 주세요, 센 걸로요. 노령의 약사는 느리고 정확한 동작으로 바로 마시는 약과 알약을 올려놓았다. 이건 뜨거운 물에 데워서 먹고, 알약은 1회 2정. 약값을 내려고 지갑을 열었는데, 어째서인지 든 게 없다. 매일 들고 다니는 가방 안주머니에 쑤셔넣은 잔돈이 그제야 생각났다.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떴다. 얼굴의 열기가 홧홧 올랐다. 지갑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돈을 놓고 와서 잠깐 집에 갔다 올게요, 발을 돌렸다. 그러자 약사가 불러 세웠다.
─이 근처에 사는 거면 내일 줘요. 빨리 낫는 게 우선이지.
─아니에요. 금방 다시 올게요.
─저 산동네에 사는 거 아니요?
─맞아요.
─그 몸으로 괜히 힘 빼지 말고 그냥 내일 줘요. 괜찮으니까.
자주 있는 일인 듯 평온한 얼굴로 약을 가리키는 약사에게서 자연스럽게 그가 겹쳐 보였다. 큰 변화 없는 지루한 일상에 균열을 낸 첫만남. 살다보면 겪는 별 일인 줄 알았던 게, 꽃망울이 맺히고 나서야 깨달았다. 금이 간 게 아니라 꽃넝쿨이 자란 거였구나. 꽃망울에 얼굴을 바싹 붙여서 보는 것도 모르고. 다 자라면 어떤 꽃일까, 이름을 무어라 붙여줘야 하나, 딴생각을 했다.
*
아무도 없는 길바닥을 헤매다 들어간 곳은, 그 수선집이었다.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멋쩍은 얼굴로 창문을 두드기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안경을 벗어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나를 유심히 보다가 토끼눈을 뜨고 문을 열어주었다. 안 갔어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저어… 이 동네는 처음이라서요.
─……
─여기가… 어디죠?
사정을 들은 남자가 갑자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영아. 형인데 너 지금 어디야? …안 바쁘면 차 갖고 나와줄래? 늦게 오신 손님이 있는데 이 동네는 처음이래. 네가 좀 데려다 드렸으면 하는데. …그게, 사정이 있어서 택시를 못 타. 어어, 그래. 얼른 와 줘. 그래, 고맙다. 설마 나 때문에 이 늦은 시간에 식구를 불렀나 싶어서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가는 길만 알려주면 돼요.
─저도 그 동네 가는 길 모르거든요. 얘가 길눈이 밝아서 어디든 잘 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초면에 이렇게 많은 실례를 끼쳐서 어떡해요.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죠. 당장 내일 출근인데 셔츠가 손 쓸 새 없이 찢어진 것처럼.
남자는 개구진 표정을 지으며 가방 밖으로 삐져나온 셔츠를 가리켰다. 덕분에 긴장된 마음이 조금 풀린 것 같았다. 아까 쓴 것과 다른 안경을 쓴 남자가 뒷문 쪽에 자리한 미니 냉장고를 열었다. 매실차 두 병을 꺼내 그 중 한 병을 내게 건넸다. 목 마르실 것 같아서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매실차를 받아 뚜껑을 열었다. 잠잠코 마시다가, 아까 물어보고 싶었던 말을 넌지시 꺼냈다.
─이 일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열일곱인가 열여덟인가. 아주 어릴 때부터 어머니 옆에서 바느질을 배웠어요. 아니지, 배웠다기보다 훔쳐본 거죠. 어머니는 가르쳐주기 싫어하셨으니까.
─왜요? 바늘이 위험해서?
─아뇨. 어차피 집에 널린 게 바늘이고 실이니까 만지는 건 그러려니 했는데, 깊게 배우면 업이 되니까 안 가르쳐주셨어요. 그래서 나중엔 바늘에 실 꿰는 모습도 안 보여주셨죠.
─그래도 지금 하는 거 보면 좋아하시겠어요.
─어머니는 제가 수선집 차린 거 모르세요. 알면 한밤중에도 기차 타고 오실 것 같아서 말씀 안 드렸어요. 근데 손을 보면 티가 나잖아요. 이게 어디에 찔렸고 뭐 때문에 다친 건지. 들킬까 봐 본가 안 내려간 지도 꽤 됐어요. 뭐 먹고 사냐고 물어보시면 친구 따라서 자재 나른다, 공장 다닌다… 이런 저런 거짓말 둘러대고.
그러면서 양 손을 펼쳐서 내게 보여주는데, 말마따나 여기저기 굳은살과 크고 작은 흉터들로 가득했다. 남들보다 고생했을 게 훤해서, 아프겠다… 나지막하게 말했더니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영광의 상처죠. 저한테는 이게 나이테고 증거고 이력서인데.
─눈치 채셨을지도 모르겠는데. 제가 시력이 엄청 나쁘거든요. 아주아주 나빠요.
─그럼 아까 썼던 안경이 진짜 돋보기예요?
─맞아요. 일할 때만 써요. 오래 쓰면 눈이 피곤하고 어지럽거든요. 그래서 평소엔 안 쓰거나 이걸 쓰고요.
남자는 지금 쓰고 있는 안경을 가리켰다. 나에게도 비슷한 안경이 있었다.
─학교 입학 전부터 책을 코 앞에 두고 보니까 어머니가 병원에 데려갔어요. 아니나다를까 의사가 유전이라고 진단하니까 그 자리에서 우셨죠.
─아, 어머니도 눈이 안 좋으시구나.
─네. 타고난 솜씨가 있어서 바느질로 저를 키우신 거예요. 근데 하나 뿐인 아들은 그렇게 안 살았으면 해서 바느질 못하게 말린 거죠. 일부러 동네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형 데려와서 앉혀놓고 몰래 과외까지 시켜주셨는데. 결국엔 다 거스르고 이걸로 먹고 사네요. 그래도 저는 좋더라구요. 어릴 때부터 만드는 걸 좋아해서 그런가. 내 손으로 고칠 수 있다는 게 증명되니까 고생 좀 하더라도 재밌어요.
─그게 보여요.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사람 같아요.
─아까 백화점에서 일한다고 적어주셨죠?
─아, 네. 수입과자점에서 일해요.
─헐, 맛있겠다. 저 먹는 거 진짜 좋아하는데. 어떤 과자 있어요?
─뭐… 미국 과자도 있고, 일본 과자도 있고… 최근엔 영국 과자도 들어왔어요. 한 번 먹어봤는데 아주 부드러워요. 영국 사람들이 차를 자주 마신다면서요. 그래서인지 먹으면 차가 마시고 싶어져요.
─거기서 일하는 건 어때요?
─그냥 그럭저럭……
─언제 한번 가봐야겠다. 저 셔츠 입고 일하시는 거잖아요. 맞죠?
─네. 덕분에 한시름 덜었어요. 감사해요.
─그래도 운이 좋으세요. 처음 오는 동네에서 숨겨진 달인을 찾으시고.
동시에 눈이 마주쳐서 둘 다 푸스스 웃었다. 이미 꼭두새벽으로 넘어간 시간. 창문 너머로 검은색 승용차가 들어오는 걸 본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따라서 일어났다. 그가 앞장 서서 승용차 쪽으로 다가갔다.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자 그에게 ‘영이’라고 불렸던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저 분이야?
─어. 잘 모셔다 드려.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하신다니까.
─모르는 동네인데 어떻게 왔대?
─문 열린 집 찾다가 여기까지 왔나 봐. 엄청 급해보였어.
─나 참… 들어가 있어. 저 사람 데려다주고 다시 올게.
─그래.
뒤에서 쭈뼛대며 서 있으니 남자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타라고 손짓했다. 차에 타서 안전벨트를 멨다.
─정말 감사해요. 내일 꼭 수선비 드릴게요.
─무리해서 오진 마시구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저는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있으니까요. 여유 있을 때 오세요.
─네, 그럴게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홍중 씨.
갑자기 이름이 불려서 당황한 나머지 네? 되물었는데 차가 출발해버려서 그대로 헤어졌다. 종이에 적어준 이름을 보고 부른 건 줄 알았지만 정말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이었다. 벨트를 부여잡고 눈을 껌뻑이고 있으니 옆에서 운전하던 ‘영이’ 말하기를, 외상하셨구나?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빨간불에 잠깐 정차한 사이 그가 글로브 박스를 열어 명함 한 장을 줬다.
─형 가게 명함이에요. 길 모르시면 거기로 전화하세요.
─아… 감사합니다.
─만약에 형이 마중 나가겠다고 하면, 그러지 말고 우영이한테 부탁해달라고 하면 돼요.
─우영이…가 누군데요?
─저요.
─아… 같이 일하시는 거예요?
─그건 아닌데 형이 가게 비울 일 생기면 제가 무조건 나가거든요. 부담 갖지 마시고 그냥 저한테 넘기라고 하세요. 그럼 형도 알겠다고 할 거예요.
─여러모로 두 분이서 신경 써주시니까 부끄럽네요. 그냥 길 잃은 손님일 뿐인데.
─음, 아닐 걸요.
─…네?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대며 우영이 말을 고르는 사이,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차가 다시 움직였다.
─제가 느낀 게 맞다면 그럴 거예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무슨 뜻이지. 그저 길 잃은 늦은 밤 손님이 아니라면. 옷 찢어먹고 길 잃고 집 못 갈 뻔한 백화점 직원으로 기억하려나. 의중을 뜯어보기엔 찰나 같은 만남이었으므로. 더는 생각하지 않고 의자에 등을 편히 기대었다. 나름 가을로 접어들었다고 그새 땀이 식어 찬기가 느껴졌다.
-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f(에프)입니다.
지난 봄호에 참여할 때 마감날 못 지켜고 부랴부랴 써냈는데,
버릇 남 못 준다구... 가을호도 그렇게 됐네요.
기다려주신 주최자님께 백번 천번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분량 조절이 안된 것도 있고 쓰다보니 겨울로 이어지면 좋겠다 싶어서
난생 처음 상하편 나눠진 단편을 쓰게 되었습니다.
고로 겨울호까지 가겠다고 선언한 셈이죠! (어떡하려고)
지구가 많이 아픈지 별안간 온도가 뚝 떨어져서 춥네요.
계간 읽으면서 눈물 짓기 딱 좋은 계절입니다.
읽어주셔서 미리 감사 인사를 드리며, 저는 겨울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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