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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생은 손짓으로부터 下>, lope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6월 21일
  • 24분 분량





* BGM은 반복재생으로 들어주세요.

* 연극 「만약에 생명을 그릴 수 있다면 (もしも命が描けたら)」 의 설정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21.


성화는 오늘도 분주히 움직이는 시곗바늘과 대치한다. 책상 아래 가지런히 놓아둔 다리가 앞뒤로 흔들린다. 언제나 그랬듯 수업에는 성실히 임하다가도, 마지막 교시가 시작되기만 하면 심장이 절로 뛰었다. 항상 보는 자신의 피아노 위. 일정한 속도로 똑딱이기만 하던 메트로놈과는 반대로 온통 엉망인 박자가 귓가에 퍼진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감사합니다!”



문제집 위를 두드리는 손끝이 점차 초조함을 느낄 때즈음. 경쾌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늘 종례는 없으니까 조심해서 가고! 앞문이 열리기 무섭게 가방을 챙기는 손길들이 분주하다. 성화도 별반 다르진 않다. 굳이 차이점을 찾자면, 교실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한층 더 기대감에 찬 얼굴이라는 것 정도. 이유는 간단하다. 드디어 맞이한 하루의 끝은 성화에겐 또 다른 일과의 시작이니까. 매일 새벽 눈을 뜨는 순간부터 하루 중 가장 고대하는 순간. 방과후 텅 빈 학교에서의 시간은 오롯이 홍중과의 소생 활동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간단한 종례가 끝나면 뒷문으로 향하는 물살을 가르고 복도로 나선다. 홍중의 반까지는 정확히 15초. 하교하는 학생들 사이를 잽싸게 가르며 성화는 심장 언저리의 교복을 한 번 쥐었다 놓는다. 언제부턴가 습관이 된 일이다. 시기는 아마도 때이른 봄. 커다란 벚나무가 제 생을 되찾은 순간. 그 날부터 시작된 은은한 박동은 아직까진 함부로 이름을 붙이기에 애매한 감정이지만 결코 부정한 적은 없다.


10초를 넘어서자 성화의 발돋움이 빨라진다. 미끄러지듯 코너를 돌면 홍중의 반 팻말이 보인다. 입가로 미소가 번진다. 성화는 이대로 옷감 아래의 기분 좋은 박자가 계속되길 빌었다. 이윽고 13초, 14초. 마지막 15초. 머릿속 카운트가 끝나면 열린 앞문 너머로 홍중이 보인다. 머지 않아 시선이 부딪힌다.



“하여간 진짜 빨라.”

“당연하지.”

“나 이제 도망 안 간다니까?”



준비를 마친 홍중이 투덜거리며 성화에게 다가온다. 홍중의 뒤로 한껏 열린 창문을 넘어 바람이 불어든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가볍게 들썩인다. 성화는 문득 시선을 멀리해, 보다 넓게 장면을 눈에 담는다. 첫 만남에 비해 훨씬 편해진 얼굴의 홍중. 배경 삼아 창밖을 물들인 완연한 초록. 시끄럽게 뛰는 심장이 또 다른 감정으로 뒤덮인다.


남들은 모를, 잊혀진 생명을 살린지 벌써 삼 개월.

바야흐로 여름이 도래했다.






소생은 손짓으로부터 下

박성화 김홍중





22.


[오늘도 빠지면 다시는 안 볼 줄 알아라.] 오후 5:16


다리가 우뚝 멈춰선다. 성화는 화면에 뜬 문자를 말없이 응시한다. 간결하게 적힌 두 글자 수신인이 영 달갑지 않다. 어차피 성화에게 아쉬울 건 하나 없는데도 매번 반복된다. 병원에 누워 있느라 집에는 오지도 못하면서 이런 건 어떻게 다 알고 있는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빼먹은 개인 레슨들이 차례로 성화의 머리를 스친다. 들떴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이번 선생님은 어느 정도 말이 통해서 괜찮을 줄 알았지만 역시는 역시. 결국엔 몇 번 마주친 적도 없을 고용인의 편이라는 사실을 또 한 번 인정해야만 했다.


멍하니 서 있는 사이에 어두워진 화면에 굳은 입가가 비친다. 순간 속이 울렁거리는 착각이 들어, 성화는 화면 위를 머뭇거리던 엄지를 거둔다. 본분을 잃은 휴대폰을 주머니 속으로 숨긴다. 최악이네. 한동안 모른 척하던 제 현실에 입 한 켠이 씁쓸해진다.



“무슨 일 있어?”

“어? 아냐, 괜찮아.”

“무슨 일 있네.”



별로 괜찮아 보이지도 않고.


그런 이유로, 성화는 홍중이 그림을 그려내는 동안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홍중과 함께하는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다. 매일 홍중의 뒤에 서서 지키는 건 하나 뿐인 성화의 임무. 생명이 돌아오는 순간에 곁들이는 감탄까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홍중은 성화와 함께하는 날이 늘면서 더 이상 주변을 살피란 말 따위는 꺼내지 않았지만, 성화는 꿋꿋하게 홍중의 뒤를 지키길 자처했다. 자신에게 들켰던 것처럼 또 다시 무방비한 상태로 둘 순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성화에겐 모르는 점이 하나 있었다. 잔잔한 공기를 가르는 그 작은 탄성을, 실은 홍중이 제법 만족해 하고 있었다는 것. 물론 티를 내진 않았다. 손 끝에 집중하느라 제대로 보지도 않는 게 뭐가 좋다고, 그림을 그리는 내내 뚫어져라 바라보는 성화의 시선에 늘 적정 이상의 관심이 들어 있었다는 것쯤은 홍중도 잘 알았다. 고로, 웬일인지 평소보다 덜한 오늘의 상태를 눈치 채는 것쯤은 홍중에겐 식은 죽 먹기란 소리다.


지난 달의 느티나무를 끝으로 동이 난 것 대신 새로운 공책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덮힌다. 말소리가 끊긴 뒤뜰에 적막이 내린다.



“너 그런 표정 짓는 거 처음 본다.”

“그래? 미안.”

“뭐래. 잘못한 게 없는데 뭐가 미안해.”

“그냥. 너 보고 있어야 되는데 못 봐서?”

“…방금 한 말 취소. 이제 보니 멀쩡하네.”



파릇하게 자란 꽃들에게 홍중의 손길이 닿는다. 때아닌 이슬을 머금어 촉촉한 잎이 살랑인다. 완전히 생기를 되찾은 모습을 확인한 홍중은 뒷목을 한 번 쓸어내리고선 뒤돌아 성화 앞에 선다. 얼핏 보면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호선을 그린 입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처음처럼 반짝이던 눈이 미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진짜 좀… 낯설기도 하고. 속으로 짧은 감상을 되뇌며 성화의 이마를 걷어낸다. 미지근한 손등이 조심스레 붙는다.



“열은 없는데… 아픈 건 아닌 것 같고.”

“나 진짜 괜찮다니까.”



홍중이 허공에 중얼거리면 성화의 입술 새로 바람이 샌다. 성화가 팔을 들어 이마 위에 닿은 손에 깍지를 끼워 내린다. 야, 뭐 해! 놀라서 커진 음성이 튀어나왔지만 개의치 않는다. 말만 그렇지 원래라면 진작 뺴고도 남았을텐데 잡힌 손도 꼼지락대기만 하고 그대로다.


성화는 얌전히 시선을 내려 맞닿은 체온을 느낀다. 홍중의 손은 차가운 자신과는 정반대의 온도. 손바닥 위에서 벚꽃잎이 오가던 봄날보다 조금 더 높아진 채다. 성화는 이번에도 못 들은 척 잡은 손에 힘을 더한다. 좁은 틈 사이로 미지근하게 섞이는 게 좋았다. 자신을 잠시나마 정상 범위로 끌어 올려주는 안정이 좋아서, 찾아온 구원이라도 되는 양 그런다. 새삼 느낀다. 진짜 이상하지. 너는 날 항상 현실에서 벗어나게끔 만들어. 홍중과 있으면 마음 한 켠에서부터 자꾸만 알 수 없는 용기가 솟아나는 듯했다.


그래서인가. 불현 듯 충동이 일어난다. 성화의 눈이 다시금 반짝임을 되찾는다.

홍중아. 혹시 말인데.






23.


피아노 좋아해?






24.


문이 옆으로 밀린다. 틀에 낀 먼지가 공중으로 피어오른다. 홍중은 풀어낸 자물쇠를 익숙하게 굴리는 성화를 멍하니 지켜보기 바쁘다. 머리 위에는 정갈하게 쓰인 ‘음악실’ 팻말이 붙어있었다. 수업 외에는 딱히 올 일이 없던 곳이다. 미술 특기생 신분이라 더더욱 그랬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성화의 물음에 제때 답하지 못한 게 원인이었을까. 홍중이 답지 않게 맹한 얼굴로 묻는다.



“이렇게 막 들어와도 돼?”

“응. 가끔 와서 연습하라고 허락 받았어.”

“뭐야. 완전 편애.”



뒤늦게 정신을 차리면 성화는 이미 피아노 앞이다. 새까만 뚜껑을 열고 가볍게 건반을 두드리는 모습이 낯설다 생각하면서도 금방 어울린다. 검지로 같은 것만 두드리기를 몇 번. 불퉁한 목소리로 답하자 낮은 웃음이 건반 위로 흩어진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손을 풀기 위해 이어지는 음과 함께 섞여든다. 얼핏 들으면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드디어 발걸음이 떨어진다. 문과 멀어진 홍중은 피아노와 가장 가까운 책상 위에 풀썩 걸터앉는다. 이왕 여기까지 끌려온 거 제대로 듣고 가야지. 이거 나름 공짜 연주회 아냐? 홍중의 턱이 까딱인다.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 팔짱까지 끼면 성화가 눈가를 늘어뜨린다. 긴장 된답시고 울상이다.



“네가 그렇게 보고 있으니까 긴장.”

“내 귀 나름 비싸. 아무거나 안 듣는다?”

“진심 대회보다 떨려.”

“엄살 부린다 또.”



실은 끄떡도 없으면서. 성화가 피아노에 앉아 반평생 넘도록 딴 상장이 수두룩한 건 그를 잘 모르던 홍중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잊을 만하면 돌아오는 뻔뻔함에 헛웃음이 절로 터진다. 하여간 오바는. 눈도 깜빡 안 하고 볼 거니까 틀리기만 해. 눈을 치켜뜨고 말하면 화답하듯 입꼬리가 올라간다. 성화는 곧이어 허리를 세우고 자세를 고친다. 긴장된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살짝 주먹을 쥐었다 펼친다.


유독 길다고 생각하던 손가락이 흑백의 평면 위를 부드럽게 유영한다. 순식간에 피어나는 선율이 음악실을 가득 채운다. 손가락 끝에서는 넘실거리는 파도가 일다가도 따뜻한 산들바람이 불었다. 자칫하면 지루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곡의 양상을 귀에 담으며 홍중은 비로소 체감한다. 성화의 연주는 음악을 모르는 이가 들어도 입이 절로 벌어질 만한 것임에 틀림 없다.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곡을 들으며, 홍중은 꼭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짐짓 거만하게 기울였던 상체를 천천히 세운다. 깜빡이던 눈은 피아노에 집중하는 성화를 바라본다. 음률에 집중하자 덩달아 가슴께가 욱씬거린다. 어쩌면 피아노 앞의 성화는 자신이 알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끝을 알리는 음이 울린다. 집중하느라 어긋났던 호흡을 가다듬으며 긴 숨을 뱉는다. 하얀 건반 위에 올려둔 손이 무릎으로 안착한다. 고개를 틀어 홍중을 살핀다. 어땠어? 들을만 해? 묻는 음성에는 장난기가 섞인 듯하나 그 속에는 떨림이 있다. 고로 홍중은 진심만 담아 끄덕인다. 응. 잘 하네. 괜히 유명한 건 아니구나. 짧지만 확실히 전해지길 바랐고, 다행히도 성화는 개운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린다. 좀 살 것 같다. 고마워.






25.


“어릴 때부터 집착이 심했어. 나 말고 우리 엄마가.”

“지금도?”

“지금은 더 하지.”



성화는 미련 없이 일어났다. 의자가 무거운 소리를 내며 건반 아래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성큼 걸어와 홍중의 옆을 차지했다. 홍중은 괜히 싱숭생숭한 마음에, 낙서가 그려진 칠판 한구석으로 시선을 던진다. 나란히 놓인 다리가 책상 앞에서 엇박으로 흔들린다. 어깨가 아슬하게 부딪히기도 잠시. 뜸을 들이던 성화가 말을 이어간다.


혹시 알고 있으려나? 우리 엄마도 피아노를 치셨거든. 어릴 적에 엄마가 연주해줬던 곡들도 기억해. 나는 아마 그 때부터 피아노가 좋았던 걸지도 모르지. 그러다 내가 열 살 때쯤 사고가 났는데, 꽤 크게 나서 피아노를 관두셨어. 그렇게 한참을 혼자 상심하다가 어느 날 결심한 거야. 못다핀 재능을 나한테서 대신 보기로. 나도 엄마가 다시 웃었으면 했어. 그래서 처음엔 진짜 열심히 했는데, 몸상태가 점점 나빠지면서 집착이 좀 심해졌어. 근데도… 사랑하니까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결국은 못 이겨서 이젠 건반만 봐도 속이 울렁거리지만.



“너 그래도 방금은….”

“그러게. 나도 완주한 건 오랜만이라 사실 아직도 신기해.”

“…….”

“너한텐 실수 없이 들려주고 싶어서 갑자기 정신 차렸나 보지.”



사실 요즘 다시 조금씩 늘고는 있어. 고민 중이지만 다음 달엔 대회도 있고. 성화는 제법 후련한 얼굴로 팔을 뻗는다. 길게 올라가더니 기지개를 켜고 내려온다. 깊숙이 묵혀있던 한숨이 새어나온다. 털어내면 이렇게 편한 걸. 여태껏 누구에게도 시도할 생각이 없던 것을 난생 처음 후회한다.


성화는 온갖 허울들로 자신을 포장하는 일에 능숙했다. 내가 잘 하면 되지. 흠 잡힐 일을 만들지 않으면 돼. 힘이 들면 병상에 누운 엄마를 떠올렸다. 억누르고 사는 게 발 뻗고 편히 자는 것보다 쉬워지는 날이 왔다. 명백한 주객전도였다. 마냥 좋던 스포트라이트가 취조등처럼 느껴지던 때도 있었다. 조명 아래서 혼자 덩그러니 서 있으니 외면하던 상처가 낱낱이 드러나는 기분이었다. 입 안 구석이 콰득 씹혔다. 아무것도 모르는 청중을 앞에 두고 기계 같은 인사를 건냈다. 박수갈채 사이로 웅성이는 소리가 유독 날카롭게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쏟아질 동정이 두려웠다. 그들이 보내는 건 결코 동정 따위의 감정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허나 홍중만큼은 예외였다. 처음 보던 날 직감했고, 한 계절이 흐르면서 확신했다. 언젠가의 녹음 속에서 구원처럼 내민 팔을 잡고, 그 애의 손바닥에 겨우 잡은 벚꽃잎을 쥐어줄 때까지도. 화려하게 꾸며진 박성화는 홍중의 안중에 없었다. 그리고 그 악의 없는 무관심은, 곧 성화가 혼자서 감춰오던 그늘을 스스로 끌어내게끔 만들었다. 더는 숨기지 않아도 될 것 같단 생각이 들게끔 했다.



“네 덕분이야.”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래서 고맙다고.”



칠판에 고정되어 있던 홍중의 고개가 돌아간다. 성화는 여전히 앞을 향하고 있다. 쑥쓰러운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그건 숫하게 본 성화의 웃음 중에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26.


오랜만에 찾은 평화를 깬 건 새로운 문자였다. 어디 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마라. 간결한 문장에 서린 냉담은 이미 몇 년이고 겪어 익숙한 것이었다. 꾸역꾸역 찾아가서 쓴소리 몇 번 들으면 끝날 일이다.


다만 홍중에겐 아니었다. 생각보다 가깝게 앉아 얼떨결에 옆에서 문자를 목격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턱이 떨어질 뻔했다. 기겁한 홍중이 책상을 박차고 일어선다. 나란히 던져둔 가방을 곧바로 챙겨들고선 성화의 등을 떠민다. 얼른 가봐야지. 너 그러다 더 깨져. 아니, 홍중아. 이거 진짜 별 거 아닌데. 운동장을 반쯤 건너와서야 그런 말을 던지자 홍중의 걸음이 느려진다. 의심의 탈을 쓴 걱정을 놓지 못한 채다. …진짜? 응. 진짜.



“그럼 집으로 갈 거야?” “아니. 그래도 병원 가보긴 해야지.”



머리 위로 가로등 불빛이 내린다. 해는 이미 거의 저문 하늘은 어둑하다. 성화의 뒤로 정류장의 환한 불빛이 쏟아진다. 홍중의 집은 걸어서도 충분한 거리니까 오늘은 여기서 갈라져야 했다.


성화가 타야 할 버스는 두 정거장 전. 소식을 알린 기계음이 한산한 주변으로 퍼진다. 성화가 반쯤 몸을 돌린다. 버스 오겠다. 데려다 주고 싶은데 미안. 홍중은 괜찮다는 말 대신 고개를 젓는다. 아래로 조금 처진 성화의 눈썹이 오늘따라 눈에 들어온다. 매번 집으로 향할 때마다 어김없이 보는 표정인데도. 단조로운 도착 알림이 사라지자 짧은 정적이 이어진다. 말을 잇지 않고 빤히 바라만 보는 홍중이 의아해 성화가 갸웃 기울던 차.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더 동그랗게 뜨인다. 성화는 갑자기 펼쳐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제게로 활짝 뻗은 두 팔을 내려다본다. 홍중이 드디어 입을 연다.



“뭐 해. 그러다 버스 온다.”

“이거… 설마 나 안아주려고?”

“알아 들었으면 빨리 오기나 해.”



홍중이 미간을 좁힌다. 성화는 잠시간 얼타다 번뜩 정신을 되찾는다.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아낸다. 아, 진짜… 너를 어떡하면 좋지. 망설임은 없었다. 성큼 거리를 좁히자 정류장의 불빛이 반대로 멀어진다. 한 걸음짜리 보폭을 걸어 홍중을 안는다. 아직은 쌀쌀한 저녁 공기 대신 얇은 하복 셔츠 아래의 온기를 두른다. 어깨 위에 턱을 올리자 홍중이 등을 토닥인다.



“가서 말 잘 해드려.”

“응.”

“괜히 못되게 말하지 말고.”

“나 그 정도로 못된 아들은 아닌데….”

“알아. 그냥 웃으라고 해본 소리야.”



성화는 응징하는 것처럼 홍중에게로 머리를 부빈다. 단정하던 머리칼이 홍중의 목 언저리 위에서 흐트러진다. 키득이는 소리가 대화처럼 오고 간다. 그러다 홍중이 직전 신호에 걸린 버스를 발견한다. 곧 있으면 정류장에 도착할 것이다. 홍중이 등에 올린 손을 떼어내자 성화가 아쉬운 듯 입술을 비죽인다.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으면 이번엔 홍중이 반쯤 돌아선다. 잠시 멈칫하더니 성화를 향해 외친다.


대회도 잘 생각해 봐. 나는 너 연주하는 거 다시 보고 싶으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어딘가 떨리는 음성. 정류장 전광판의 환한 불빛은 다행히 성화가 등을 지고 있어 홍중에게 닿지 않는다. 이제 보니 노을이 진 하늘 뿐만 아니라 어둑해진 밤하늘도 꽤나 숨어들기 좋은 것 같단 생각을 한다. 홍중은 또 한 번 붉어진 귓바퀴를 만지작대며 그림자 속으로 숨긴다. 뒤에 버스 오네. 나도 간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대충 휘젓는다. 머뭇거리지 않고 뒤돌아 반대편으로 멀어진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가로등 불빛 아래를 가로질러 이내 사라진다.


성화는 멍청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버스가 큰 소리를 내며 코앞에 다다르고 나서야 고개를 튼다. 문이 열리고 혹여나 놓칠까 빠르게 올라탄다. 자리를 잡고 앉은 성화가 곧바로 차창을 당기어 연다. 저녁 공기가 밀려 들어와 화끈해진 얼굴을 식힌다. 적당한 속도를 따라 스치는 풍경을 담던 성화가 못다한 답을 던진다. 응. 그럴게. 나긋한 목소리가 밤바람에 흩어진다. 그게 꼭 홍중에게 닿기를 바라며, 성화는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구태여 잡지 않는다.






27.


시간이 바삐 지나갔다. 순탄했냐고 물으면 반은 사실, 반은 거짓. 각자의 일로 빈 틈 없는 나날을 보냈다. 특히 홍중은 지난 이 주가 넘는 시간 동안 뒷산의 동강난 나무들을 살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학교에서 갑자기 나무가 필요하답시고 몰래 베어버린 게 화근이었다. 막상 눈에 띄게 쓰인 곳이 없어 모르던 차에, 곧 다가올 장마 때문에 고양이들을 피신시키려던 홍중이 발견하고 말았다.



“아쉽네. 살리게 했으면 부수는 능력도 같이 주지.”

“홍중아, 네가 참아….”



홍중의 능력은 한 페이지에 한 생명만 가능했기에 더욱 그랬다. 한동안 꺼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공책만 꾸준히 채워졌다. 기껏해야 삼 일에 한 번 찾아가던 산이 아무리 언덕 같다 느껴도 매일 오르려니 마냥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체력이 거덜난 홍중만 뒷목을 잡는 일이 늘었다. 고양이들 없었으면 진짜 이대로 모르고 지나칠 뻔했잖아. 한 페이지 넘길 수록 중얼거림을 더하며 학교를 저주하던 홍중은 성화가 며칠을 어르고 달랜 뒤에야 잠잠해졌다.


성화 역시 외면하던 피아노를 다시금 찾았다. 그 날. 홍중에게서 뜻밖의 위로를 받고 병원으로 향하던 날.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찾아간 병실에서,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성화를 맞이했다.



내일부턴 다시 제대로 수업 들으렴.

…네.

대회는 차질 없게 준비할 거라 믿는다. 신청서는 이미 준비해놨으니까 너는 연습에만 열중해.



아니나 다를까. 오자마자 대회 얘기가 전부였다. 침대로부터 세 발짝 정도 떨어진 성화에게는 시선조차 닿질 않았다. 그저 커다란 창문 너머의 야경만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지만, 성화 역시 익숙하게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점처럼 찍힌 불빛 사이로 야윈 얼굴이 흐릿하게 비췄다. 지난 번에 왔을 때보다 더 좋지 않았다. 병실에 들어오기 전, 반갑게 맞이하는 간호사로부터 상황을 전해들은 바로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이 남은 길이라고 했다. 안타까운 눈으로 토닥이는 걸 뒤로 하고 돌아선 성화의 입 안이 썼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 홍중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성화야. 믿을 건 너 밖에 없단다. 엄마 소원이야.


걸음이 멈췄다. 등 뒤로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성화는 가만히 문에 기대어 수 초 전을 곱씹었다. 병실을 나서기 직전 건내온 말이었다. 엄마 소원이야.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가 잘게 떨리던 걸 떠올렸다. 가슴 한 구석이 욱씬거렸다.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이는 떨림. 아마 더는 가망이 없다는 걸 본인이 제일 잘 알 테니까. 점차 약해져가는 음성은 매번 같은 문장임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갑갑해진 속을 한숨으로 애써 비워내려다 문득, 또 다른 목소리가 덮였다. 나는 너 연주하는 거 다시 보고 싶으니까. 밤공기를 타고 날아들던 문장. 열이 오른 귀를 숨기던 작은 손. 일련의 장면들이 스치자 목전까지 차올랐던 숨이 낮은 웃음으로 치환됐다. 아, 빨리 내일이나 왔으면 좋겠다. 성화는 대충 넣어뒀던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문자 목록을 내려 홍중의 이름을 찾았다. 잘 들어갔어? 나도 이제 집 가려고. 곧이어 병실 앞에 굳은 듯 박혀있던 발걸음을 떼었다. 그 날은 성화가 병원을 오간 이래 가장 짧은 시간을 머물고 떠난 날이 되었다.


그 뒤로는 매일이 한결 가벼웠다. 해낼 수 있을 것 같단 힘이 솟았다. 쉬지 않고 나무를 그려내는 홍중과 방과후 소생 활동을 마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 피아노 앞에 앉기 시작했다. 더는 보기 싫어 숨겨뒀던 악보들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대회 곡은 어느 하굣길에 홍중을 붙잡고 함께 골랐다. 빽빽한 오선지를 보고 기겁하던 걸 몇 번이고 반복한 뒤에야 결정한 것이었다. 한 달 전쯤만 해도 어지러이 보이던 것이 예전처럼 또렷하게 보였다. 팔을 올리기 전, 크게 심호흡을 한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홍중의 목소리가 저절로 재생된다.


암튼 대회 다시 나가는 거 축하해. 너 진짜 내 덕인 줄 알아.


쑥쓰러웠는지 앞을 향해 휙 돌아가는 고개가 퍽 사랑스러웠다는 것도 잊지 않는다. 더불어, 음악실에서의 연주까지. 짧게나마 순간들을 회상하면 마침내 준비를 마친다. 부담감. 죄책감. 혹은 어떤 형태의 사랑. 건반을 한 칸씩 누를 때마다 마음에 쌓여있던 감정들이 하나둘 사라진다. 선율이 끝을 향하면 성화는 늘 소리 없이 답했다. 맞아, 전부 네 덕이야. 성화의 곡은 더 이상 끊기지 않았다.






28.


그러나 세상은 생각과 달리 마냥 자비롭지 않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복은 당장의 눈을 가리는 좋은 수단에 불과하다. 아낌없이 베푸는 것 같아도 보이지 않는 곳에선 항상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곳이 곧 세계이자 자연이며, 또는 생과 사의 영역. 부조리하게 죽어가는 생을 다른 목숨에 의해서만 살릴 수 있다는 것 역시 그런 의미에서다. 너그러우나 철저한 공평과 균형. 그게 바로 세계가 돌아가게끔 하는 법칙이었으며, 홍중이 제 시간을 바쳐 해야만 하는 일이자 업이다.






29.



“홍중아 일어나. 이제 가자.”

“아… 연습 벌써 끝났어?”

“응. 하다 보니까 좀 오래 걸렸네. 미안.”

“됐어. 나도 깜빡 자느라 몰랐는데 뭘.”

“잘 쉬었으면 됐고. 근데 너 여기 이건 뭐야?”

“어?”



성화가 무구히 손가락을 펼친다. 기다란 검지가 홍중의 뒷목에 닿았다. 혹시 타투 새긴 거야? 제대로 보지 않으면 티도 나지 않는 위치였으나, 서랍 아래를 뒤적이느라 고개를 숙인 바람에 훤히 드러난 탓이었다.



“잠시만, 이거 왜….”

“별 거 아니야.”



홍중은 갑작스레 닿은 성화의 손을 뿌리친다. 목을 바짝 들어올린다. 희미하게 새겨진 수의 배열이 다시 셔츠 깃 아래로 자취를 감춘다. 홍중은 주먹을 그러쥐었다. 한동안 잊고 있어서 방심했다. 잘 숨겼어야 했는데. 홍중이 느리게 시선을 든다. 마주한 성화의 눈은 처음 만난 날처럼 크게 뜨여 있었다. 상식 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재차 마주해서였다.


그러는 사이, 타투라면 가만히 고정되어 있어야 할 숫자가 무슨 일인지 모양을 바꾼다. 기존에 적혀있던 것에서 딱 1을 뺀 결과가 새로이 새겨진다. 타이머라도 되는 양 그랬다.



“그게 뭐냐니까.”

“…성화야.”



속이 초 단위로 까맣게 타들어가는 걸 체감한다. 성화는 일 초가 이다지도 길었나 생각한다. 크기를 키웠던 눈은 홍중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빠르게 가라앉는다. 홍중의 존재 자체가 이미 한참은 특별해진 지금에서 더는 말이 안 될 것도 없다 여겼으나, 지금은 말이 다르다. 해서는 안 될, 절대 일어나서도 안 될 가정 하나가 성화의 머릿속에서 피어오른다. 애석하게도 성화는 어설픈 거짓말로 속아 넘어가진 않을 만큼 비상했으며,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빨랐다. 남은 건, 떠오른 가설을 애써 부정하며 사실이 아니기만을 바라는 것 뿐이다.



“그냥… 어쩔 수 없는 거야.”

“홍중아.”

“대가 없이 살릴 순 없다는 거 알잖아.”

“제발….”



그래도 나는 후회 안 해. 홍중이 옅게 웃는다. 그런데도 머릿속이 캄캄하게 물드는 기분. 예상을 빗겨가는 기적은 결국 일어나지 않는다.


성화의 짐작대로 홍중의 목에 나열된 것은 수명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생으로 대신하게 된 앞날이기도 했다. 작게는 몇 시간부터 크게는 몇 주까지. 원래 가진 여생이 길수록 소모되는 시간도 늘어난댔다. 성화는 그제서야 아무렇지 않게 흘렸던 홍중의 습관을 기억해낸다. 흐드러진 벚나무 아래서도, 망가진 꽃밭을 살리고서도,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들을 살리면서도. 그림을 완성하고 나면 반드시 뒷목을 쓸어내리던 홍중의 모습을 되감는다. 닫혀있던 입술 사이로 기어코 탄식이 터진다. 결국은 성화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답이었다.



“성화야.”

“…….”

“미안해.”



아니야. 더 말하지 마. 성화는 황급히 홍중의 손목을 감싸 잡는다. 떨림은 고스란히 올라와 쿵쾅대는 심장으로 전해진다. 홍중이 시선을 내려 잡힌 곳을 응시한다. 눈에 보일 정도로 바들거리는 손이 애처로워, 이으려던 말이 절로 끊긴다. 성화의 눈가에 간신히 맺혀있던 물기가 아래로 추락한다. 고요히 떨어진 눈물로 볼이 젖어드는 건 순식간이다.


홍중은 남은 손에 얼굴을 묻어버린 성화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다. 계절을 따라 점점 무더워지는 오후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도 머리카락이 들썩인다. 붙잡힌 팔목을 타고 슬픔이 고스란히 전이된다. 이럴까봐 그런 건데. 미리 말 못 해줘서 미안해. 네가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했으면 했어. 건내려던 속마음은 차마 삼키질 못하고 아프게 남아 목울대를 찌른다.


홍중아. 우리 누구 살리는 거 그만하자.

네가 못 살면 다 무슨 소용이야.

제발.

그만두자.

홍중아.


절박한 목소리. 떨리는 손.

둘만 남은 교실에는 타는 듯한 노을빛만이 짙게 번진다.






30.


소생은 그날부로 멈췄다. 언젠간 찾아올 거라 예상했던 일이었다.






31.


그렇다고 일상이 틀어진 건 아니었다. 성화는 여전히 종이 치면 홍중의 반으로 달렸고, 홍중은 최대한 느린 속도로 책상을 정리했다. 탈탈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 밑에서 멍하니 앉아 있길 10초. 초여름의 햇살을 받아 싱그럽게 빛나는 관목들을 바라보길 5초. 정확히 도합 15초가 지난 뒤, 언제나처럼 활짝 열린 앞문에서 성화가 나타나면 홍중도 뒤늦게 반을 나섰다. 다를 것 하나 없어 보이는 나날이었다. 가끔 다리를 저는 고양이를 만나도, 홈이 패인 나무를 발견해도 걸음만 느려질 뿐. 잠시 시선을 두다 대화를 이어나가길 반복했다.


일주일이 넘어가자 그마저 무뎌졌다. 척인지 진심인지는 홍중만이 아는 사실이지만, 성화는 굳이 묻지 않았다. 커다란 밴드가 붙어 더는 숫자가 보이지 않는 뒷목으로 짧게 눈길이 스쳤다 떠난다.


박성화 뭐 해. 버스 놓치겠다. 얼른 가자.

응. 갈게.


성화는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몇 걸음 앞서가버린 홍중을 재빨리 따라잡기나 했다. 간혹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사실을 애써 머리에서 지워내는 일상만을 되풀이한다. 길어지는 그림자 위. 이제는 두꺼운 공책이 빠져 가벼워진 가방이 걸음을 따라 흔들린다.






32.


얇은 얼음판 위를 걷는 것만 같은 날이 지나고, 성화의 대회가 다가오면서 음악실에 드나드는 일이 늘었다. 디데이까지는 딱 일주일. 고작 몇 달 쉬었다고 해서 재능이 사라지진 않기에 연습은 수월했다. 연주는 이미 눈 감고도 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했다. 그럼에도 성화는 꾸준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대회를 나갔지만 홍중이 지켜보는 대회는 처음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보러 올 거지?” “나 가도 돼?”

“너 아니면 누가 와.”



당연하단 얼굴을 앞에 두고 홍중이 헛웃음을 내짓는다. 안 갈 수도 있지. 부러 어깨를 으쓱이자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이 부러 울상으로 일그러진다. 안 올 거야? 그 모습이 제법 우스워 홍중은 괜히 딴청을 피운다. 성화가 아예 몸을 튼다. 상체를 좌우로 흔들어가며 홍중의 시야를 방해한다. 진짜 안 올 거냐고. 내 연주 다시 듣고 싶다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피해도 꿋꿋하게 따라붙는다. 결국은 끈질김에 못 이긴 홍중이 두 손을 든다. 장난이라고! 알겠으니까 얼른 연습이나 마저 해. 오늘은 그만할래. 많이 했잖아. 어깨를 으쓱이는 건 성화의 몫이 된다.






33.


“그 분이 어머니야?”

“응? 갑자기?”

“너 폰 뒤에 사진. 어머니 사진인가 싶어서.”

“아. 내가 보여준 적이 없었네.”



일정을 확인하느라 휴대폰을 든 성화를 보던 홍중이 묻는다. 투명 케이스 아래에는 적당한 크기의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매번 손에 가리워 궁금하긴 했지만 묻지 못한 것이었다. 피사체도 성화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뒤에야 확신할 수 있었다. 성화가 휴대폰을 뒤집는다. 환하게 웃고 있는 여인과 지금보다는 조금 더 어린 모습의 성화가 있었다. 누가 봐도 아름다운 모자의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너… 되게 어리게 나왔다.”

“중학생 때 찍었거든. 그래도 지금이 더 낫지 않나?”

“그건 아니고.”

“거짓말.”



잘만 움직이던 다리가 멈춰선다. 또 저런다, 또. 유치하게 구는 성화에 혀부터 찬다. 이제 안 넘어가니까 알아서 꿈 깨라 박성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목청을 높인다. 그리고 큰 보폭으로 세 걸음까지 걸었을 때. 꼬리를 내린 성화가 언제 그랬냐는 듯 슬쩍 옆자리로 돌아온다. 잘만 속던 김홍중 다 어디 갔냐며 속 편한 푸념을 늘어두는 건 덤이다.



“근데 사진 진짜 잘 나오지 않았어?”

“그렇네.”

“엄마 병원 들어가기 전에 하나는 남기고 싶었거든.”

“…….”

“처음엔 액자에 넣어뒀는데, 웃고 있는 게 생각이 안 날까봐 그냥 뒤에 끼워뒀어.”

“잘했네. 매일 보면 좋지.”



퇴원하면 다시 찍으려고 했는데, 뭐. 그거라도 남았으니까. 덤덤하게 뱉는 문장 뒤에 지나온 아픔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홍중은 조용히 끄덕이는 걸로 대신한다.



“우리도 나중에 찍으러 갈까?”

“뭐?”

“그냥. 네가 사진 얘기하니까 간만에 찍고 싶어져서.”

“됐어. 매일 보는데 뭘.”

“두고두고 보는 거랑은 또 다르잖아.”



작은 돌부리가 운동화 끝에서 멀찍이 차인다. 길어진 해를 따라 늘어진 그림자 속으로 튕겨나간다. 홍중은 성화와 나란히 앉아 어색한 미소를 짓는 자신을 상상한다. 나쁘지 않을지도. 그러나 단순히 좋다고 넘기기엔, 방금 차낸 돌부리처럼 크고 작게 걸리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걸 상기한다. 애써 무시하던 것들이 떠오르다 금방 지워낸다. 그 날의 일은 삼켜내고 만다.



“그럼 너 다음 주에 대회 마치고.”

“진짜?”

“이왕 찍을 거면 꾸몄을 때 찍어야지.”


홍중은 아무렇지 않게 속마음을 갈무리한다. 성화가 우는 모습을 두 번은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다행히 성화의 표정은 말이 맺음과 동시에 환해진다. 안도 섞인 숨을 몰래 내쉰다. 근데 일등 해야 찍어줄 거야. 아니면 국물도 없으니까 그렇게 알아. 그 말만 남긴 채 홍중의 발걸음이 예고 없이 빨라진다. 일부러 보폭을 넓혀 걸으면 벙쪄있던 성화도 정신을 붙잡고선 따라잡는다.


투박한 약속이 가슴 한 구석을 간지럽혔다. 당장 내일이 대회였으면 좋겠단 소망도 곁들인다.






34.


기대감에 가득찬 채 시간은 달렸다. 성화는 막판 스퍼트를 내는 데 매진했고, 홍중은 다가오는 시험기간에 대비해 문제집과 씨름하기 바빴다. 입시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도 잊진 않았지만 생물은 더 이상 그리지 않았다.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그렇게 여느 때와 같은 평범한 평일을 보낸 뒤에는 기다리던 토요일이 다가왔다. 눈 깜짝할 새에 다가온 대회날이었다.


성화는 이른 아침부터 눈을 떴다. 컨디션을 위해 일찍 잔 보람이 있었는지 일으키는 몸이 가벼웠다. 대회 시작인 오후까지는 한참 여유로웠으나 미리 준비를 시작했다. 집을 누비며 차례로 준비를 마친 뒤 거울 앞에 서면, 단정하게 수트를 걸친 모습이다. 홍중이도 좋아하려나. 가끔 주말에 뒷산을 살피러 오르던 때를 제외하고는 보인 적 없는 사복 차림이란 생각이 들자 괜시리 새로웠다. 좋아했으면 좋겠다. 머릿속에선 이미 일정을 마치고 홍중과 나란히 서서 사진을 남기는 모습이 재생된다.



[잘 하고 오렴. 믿는다. 우리 아들.] 오전 10:31



화면을 꽉 채운 알림 중에는 짧막한 응원도 도착해 있었다. 성화는 자판을 띄우고 몇 번이나 망설이다 답신을 보낸다. 감사해요. 끝나고 봬요. 더는 부담을 느끼지 않기로 다짐한다. 작게 남은 마음을 훌훌 털어낸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출발할 시간이었다.






35.


시작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홍중과는 북적이는 로비 한가운데서 만났다. 평소와 달리 수트를 입은 성화를 알아보지 못해 한참을 헤매던 걸 가까스로 찾았다. 멈춰선 홍중의 이름을 부르자 돌아보던 얼굴은…. 성화가 입술을 말아물었다. 전화하지 그랬어. 그러기엔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안 들릴까봐 미리 찾으러 온 거거든? 심지어 홍중이 성화보다 먼저 들어와 있었던 걸 안 뒤에는 웃음을 더 참기가 어려웠다.



“자신 있어?”

“그럼.”

“자만은. 혹시 틀리면 내가 눈 시퍼렇게 뜨고 볼 거야.”

“네가 보는데 당연히 열심히 해야지.”

“…뭐래. 그러는 거 보니까 멀쩡하네. ”



등판을 떠미는 손에 힘이 실린다. 대놓고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성화는 헛기침으로 표정을 가다듬는다. 홍중아 그럼 나 저기까지만 데려다 줘. 알았어. 너 얼른 똑바로 서서 가기나 해. 성화가 가리킨 대기실은 고작 십 미터도 안 되는 곳이었다. 길어봤자 30초면 닿을 거리. 그러나 정작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선 건 5분 가량 소요된 후. 홍중은 새삼 성화의 유명세를 실감한다. 높고 낮은 인사가 끊이지 않고 쏟아진다. 정신이 쏙 빠진 홍중을 어느새 제 뒤로 숨긴 성화는 익숙하게 악수를 받아낸다.



“박성화 너 진짜 유명하긴 하구나.”

“원래 이 정도까진 아닌데, 대회는 오랜만이라 그런가 봐.”



성화의 한 쪽 볼이 가볍게 패인다. 그러더니 소파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홍중을 살피길 잠시. 성화는 홍중의 앞으로 불쑥 손을 내민다.



“휴대폰은 왜?”

“네가 맡아줘. 그냥 두고 가기엔 불안하잖아.”



내려오면 바로 찾으러 올게. 반사적으로 펼친 손바닥 위로 휴대폰을 얹힌다. 여태껏 대기실에 잘만 뒀다는 건 홍중이 모르니까. 애꿎은 핑계를 만들어 붙잡기로 한다. 홍중이라면 끝까지 남아 자신의 연주를 볼 거라는 확신이 있었음에도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성화는 손을 완전히 거두기 전 짧게 두드려 시간을 확인한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관객인 홍중은 이만 좌석으로 가야 했다. 문을 열기 전, 홍중은 여전히 자신을 향해 있는 성화에게 내내 곱씹던 진심을 건냈다. 잘 할 거야. 떨지 말고. 성화도 기꺼이 화답한다. 손에 쥔 성화의 휴대폰을 톡톡 두들기던 홍중은 곧 나지막한 문장을 남기고선 훌쩍 사라진다. 긴장 되면… 나중에 사진 어떻게 찍을 건지 생각해두던가.


이윽고 닫힌 문. 대기실 안에는 뒤늦게 달아오른 성화만이 덩그러니 남아 열을 식힌다. 이토록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무대가 당장 끝나길 바라는 건 처음인 걸 깨닫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36.


촘촘한 머리통으로 가득찬 공연장은 웅성이는 소리로 가득하다. 과연 매진이라던 말이 과언은 아닌 듯했다. 홍중은 성화가 건내준 팜플렛을 살핀다. 오늘의 연주자는 총 다섯. 성화는 그 중 네 번째에 있었다. 대회의 핵심 인물들이 포진하는 후반부. 랜덤으로 배정됐다고는 하지만 암암리에 입김이 작용한 순서였다. 더군다나 성화가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춘 건 흔치 않은 터라 당연한 일이었다.


장막이 걷히고 관객석이 어두워진다. 짧은 심사위원 소개를 마친 뒤에는 곧바로 순서가 시작됐다. 머지 않은 무대 위로부터 좌석이 끝나는 곳까지. 쏟아지는 피아노의 울림이 공연장을 가득 메운다. 홍중의 입이 절로 벌어진다. 좁은 음악실에서 듣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웅장하게 압도하는 소리만큼 귓가의 고동도 커진다. 이제 겨우 첫 순서인데도 이 정도면, 박성화는 어떨까. 숨겨왔던 기대감이 점차 부풀어간다. 팜플렛을 쥔 작은 손이 긴장으로 굳는다. 길고도 짧은 연주가 몇 차례 반복된다. 지루하다고 느끼는 것도 찰나에 그친다. 무대에 집중하기도 했지만, 정확히는 순서가 다가올수록 홍중의 입 안이 말라서였다.


새로이 순번을 맞이한 남자가 피아노 앞에 착석한다. 홍중은 그 사이 잔뜩 구겨진 팜플렛을 확인했다. 가물하던 눈이 번뜩 뜨인다. 이제 성화를 보기까지 남은 사람은 고작 한 명. 홍중은 당장 시간을 고칠 수 있다면 앞으로 마구 당기고 싶었다. 제발 얼른 끝나게 해주세요. 홍중의 속은 까맣게 모를 남자는, 그의 소원이 닿은 건진 몰라도 잔뜩 허리를 숙인 채 고요한 시작을 알린다. 앞서 봤던 이들에 비해 눈에 띌 정도로 화려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은 탄성을 자아낸다. 곳곳에서 자세를 고쳐 앉는 이들이 보인다. 그러나 홍중만큼은 꾹 참아낸다. 오늘의 환호는 오롯이 성화를 위한 거니까. 다만 박자를 따라 허벅지 위를 두드리는 것으로 이른 찬사를 대신한다.


클라이막스에 다다른 악장이 고조되기 시작한다. 기복 없이 흐르던 곡조에 웅장함이 더해진다. 주변에서 예상 밖의 선곡이라더니 확실히 다른 분위기가 압도한다. 순식간에 곡의 분위기가 어두워진다. 캄캄하게 꺼진 조명 아래서, 홍중 역시 괜한 긴장감에 목울대가 요동친다.


그때였다.






37.


잠잠하던 성화의 휴대폰이 빛났다.

병원에서 온 전화였다.






38.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뛴다. 방금까지 폭풍처럼 몰아치던 연주가 들리지 않는다. 물 속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진다. 받아야 하나? 이걸 내가 받아도 되는 건가? 화면은 매섭게 번쩍인다. 홍중이 고민에 빠진 사이 잠시 끊어진다. 별 일 아닐 거라 여기고 싶지만, 마음을 놓기도 전에 다시금 걸려오는 전화는 홍중의 간절함을 무심하게 빗겨간다.


결국 엄지가 움직인다. 귓가는 변함없이 먹먹하다.



“…여보세요.”

- 어, 혹시 박성화 군 휴대폰 아닌가요?

“성화 폰 맞아요. 오늘 대회가 있어서 잠시 맡은 거라.”

- 아… 언제쯤 끝날까요? 지금 좀, 많이 급해서…

“무슨… 일이신데요?”

- 어머니께서 위독하세요. 아침까진 괜찮았는데 갑자기…



발밑이 아래로 꺼지는 듯한 착각이 인다.



- 혹시 성화 군 끝나는 대로 바로 오라고 전해줄래요?



네, 그럴게요. 고작 다섯 음절을 내뱉기까지가 힘들다. 숨이 턱 막힌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성화가 나올텐데. 진짜 얼마 안 남았는데. 그러나 건너편의 상황은 성화를 기다릴 만큼의 인내가 남아있지 않은 듯했다. 병실 안에서 통화를 하는 건지, 분주하게 오가는 목소리들과 귀를 찌르는 기계음이 한데 섞여 넘어온다. 홍중은 멍한 정신을 붙잡아 무대 위를 본다. 남자의 턱 끝에서 땀방울이 뚝 떨어진다. 건반 위를 휘젓는 손가락이 어지럽다 느낀다. 그러다 불현 듯, 남자의 모습 위로 성화가 겹친다.


나도 엄마가 다시 웃었으면 했어. 흔들리던 속눈썹을 기억한다. 속마음을 털어놓는 건 처음이라던 멋쩍게 웃던 게 꼭 어제 같단 생각을 한다. 덧붙인다. 나는 성화 네가 행복하면 좋겠어. 너한텐 실수 없이 들려주고 싶어서 갑자기 정신 차렸나 보지. 이때는 돌아보는 얼굴이 어땠더라. 네 덕분이야. 아. 다른 건 몰라도, 옆에서 오래도록 보고 싶은 얼굴이었던 건 확신한다. 네가 못 살면 다 무슨 소용이야. 마지막은 낯설도록 물기 가득하던 얼굴. 그래. 네가 행복했으면 해서. 행복한 네 옆에 있으면 나도 꽤나 행복해서. 그만두자. 홍중아. 이제는 세상 대신 내 미래를 살려서 너랑 같이 있고 싶었는데.


꽉 쥔 주먹 아래. 손끝이 어떠한 결심으로 발갛게 물든다.


홍중이 자리를 떠난다. 무수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통로를 오른다. 들어올 땐 아무렇지도 않던 계단이 벅차서 눈가가 달아오른다. 이윽고 문 앞에 다다른다. 여보세요? 학생? 한 손에는 아직 전화가 연결되어 있다. 입 안을 콰득 깨문다. 벨벳의 손잡이를 힘주어 당긴다. 로비를 채우던 오후의 햇빛이 열린 틈 사이로 쏟아진다. 침범하는 빛에 눈이 따가워서, 홍중은 그대로 맺혀 있던 방울을 흘려보낸다. 후두둑 떨어진 줄기가 볼을 가로지른다. 입을 연다. 성화 곧 시작할 거예요. 홍중은 주먹을 풀어낸다.


너랑 계속 같이 있고 싶어.

그건 이제 못 지킬 것 같아. 미안해.


마구 충돌하던 머릿속의 혼란이 중재된다. 순간 고요가 내린다. 노을이 내리는 교실에서의 일을 지워낸다. 홍중은 모른 척 참고 있던 습관을 일깨운다. 떨리는 손이 뒷목을 감싼다. 며칠 전 확인했던 일수를 떠올린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다행히 누군가를 살릴 여유는 충분했다. 선언과도 같은 문장이 이어진다. 저 성화 친구거든요.


제가 먼저 갈게요.


달리는 등 뒤로 문이 닫힌다.






39.

아프게 눈을 찌르는 빛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40.


우레 같은 박수가 터진다. 성화가 거침없이 무대 중앙을 향해 횡단한다.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가 그의 앞에서 번쩍인다. 몸을 돌려 관객석을 향해 상체를 숙인다. 다시 일으켰을 땐 빠르게 앞자리를 훑는다. 홍중이 자리가 어디더라. 물어보고 올라올 걸. 유독 환한 조명빛에 눈이 시려워 찾기가 어렵다. 홍중을 찾을 때까지 계속 서있을 순 없는 일이라, 성화는 마음을 다잡고 의자를 당긴다. 무대 위에선 보이지 않아도, 스치는 눈길 사이에 한 번은 마주쳤을 거라 믿는다. 팔을 들어 건반 위에 사뿐히 올려둔다. 단 하나 뿐이던 관중을 두고 수도 없이 쳤던 기억을 되살린다. 끝나고 홍중에게로 달려갈 순간을 그리는 걸 마지막으로, 성화는 이내 숨을 들이킨다. 시작음이 공명한다.


연주가 시작된다.

듣는 이의 부재는 알지 못한 채였다.






41.


환호와 격려로 가득찬 대기실은 몇 시간 전보다 더 붐비기 마련이다. 성화는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표출한다. 주변에서 밀려오는 축하에 연달아 꾸벅이면서도 눈은 바삐 움직인다. 손에 감긴 메달이 기분 좋게 흔들린다. 연락을 하려다 테이블 위가 텅 빈 걸 발견하고는 깨닫는다. 아. 나 휴대폰 맡겨놨었지. 언제 오려나.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올 홍중을 기다린다. 벌써부터 생생하게 들려오는 투정에 입꼬리가 깊숙이 패인다. 얼마 안 가 문이 열린다. 기다리던 얼굴은 아니었다.



“아까 누가 맡기고 가셨는데, 좀 전부터 전화가 계속 와서요.”

“이걸요?”

“그, 친구분이라고 하면 아실 거라던데….”



때아닌 의문이 든다. 그럴 리가 없는데. 어디 급한 일이 생겼나? 성화가 갸웃대며 전화를 건내 받는다. 역시나 지겹도록 익숙한 이름. 병원이다. 불길한 예감이 빠르게 등골을 타고 오른다. 통화 버튼을 누른다. 수화기 너머의 소음이 넘어온다. 여보세요? 성화니? 매번 어머니의 상태를 알려주던 그 간호사였다. 그러나 평소처럼 침착한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높은 음성으로 그저 이름을 부른다. 성화야!



- 어머니 상태가 돌아왔어!

“갑자기 그게 무슨….”

- 말 그대로야. 진짜 갑자기 돌아왔어. 수치도 전부 정상이고, 일어서서 걷는 것까지 다 확인했어.

“그게… 가능해요?”

- 다들 안 믿겨서 놀라긴 했는데 진짜야.

“저, 지금 병원으로 바로 갈게요.”

- 그래, 얼른 와. 다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나중에 시간 되면 친구한테도 꼭 와줘서 고맙다고 전해주고!



친구한테도?


별안간 심장이 내려앉는다. 뻗었던 다리에 제동이 걸린다. 성화는 아무리 근처의 사람이라고 해도 함부로 어머니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으며, 혹여 그렇다고 해도 병원에 찾아갈 만큼 가까운 사이는 없었다. 단, 지금껏 기다리는 한 명을 제외하고.


성화는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다급히 휴대폰을 떼어낸다. 통화 목록을 살핀다. 한 시간 전의 기록이 남아있었다. 1분 남짓의 짧은 통화였다. 성화는 곧 오를 무대로 인해 받은 적이 없었고, 애초에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 전화를 받은 건, 필시….


거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막을 새도 없이 대기실을 나선다. 전에 없던 속도로 건물을 빠져나온다. 머리 위에서 작열하는 6월의 해가 속도 모르고 환히 빛난다. 얼굴선을 타고 땀방울이 흐른다. 바잡은 속이 잔뜩 뒤틀린다. 온몸을 휘감는 불안은 떨쳐내려고 해도 끈질기게 붙어온다. 홍중아, 아니지. 네가 갔을 리가 없잖아. 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입술을 짓이긴다. 언젠가의 대화가 떠오른다. 못 살리는 건 없을 걸. 해본 적은 없는데, 아마 사람도 되지 않을까? 천진하던 목소리가 당장 옆에 있는 것처럼 살아난다. 연달아 부정한다. 돌연 찾아온 능력이니 한계가 있기를. 단 한 번도 빌어본 적 없던 홍중의 시도가 부디 실패하기를. 내가 도착한 곳에서 부디, 네가 멀쩡히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겨주기를. 빌고 또 빌었다.






42.


병실 문이 거칠게 열린다. 오가던 대화 소리가 끊기고, 안에 있던 이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차마 갈무리하지 못한 숨이 마구잡이로 흩어진다. 기다렸단 말은 거짓이 아닌지, 침대를 가리고 있던 무리가 단번에 갈라진다. 하얀 가운들 사이. 그림 같이 커다란 창문을 배경으로,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이 감격에 차 성화를 맞이한다.



“성화야.”

“…엄마.”



그토록 바라던 웃는 얼굴. 기약도 없이 평생을 그리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분명 십 년이 넘도록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여태 당신을 위해 피아노를 놓지 않았는데. 어쩐지 온전히 기쁘지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상기된 얼굴로 모자의 상봉을 바라보는 이들 사이로, 홍중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서였다. 오래된 소망을 이루기 무섭게 또 다른 현실이 성화의 앞에 펼쳐진다.



“혹시, 여기 왔던 제 친구 못 보셨어요?”

“친구? 아. 아까 그 학생 말하는 건가?”

“네, 네. 맞아요. 걔 어디로 갔어요? 집으로 간대요?”

“글쎄. 그것까진….”



여기 오자 마자 너희 어머니만 잠시 보더니, 그대로 다시 뛰쳐나갔어. 급하게 왔는지 손에 무슨 종이만 덜렁 들고 있던데. 보니까 그 친구도 처음 봐서 많이 놀란 것 같으니까 성화 네가 잘 달래줘.


복도 가득 발 구르는 소리가 울린다. 뛰면 안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럴 수가 없었다. 층 곳곳을 누비며 홍중을 찾는다. 로비를 내려다 보아도 홍중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다. 열려 있는 병실부터 차례로 살폈지만 그 역시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 층의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정원까지 발을 들였을 때.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공간을 허무하게 살피던 성화의 눈에 난데없이 팔랑이는 물체가 들어온다. 곧장 다가간다. 텅 빈 벤치 뒤에는 흐드러진 메리골드가 피어있었다. 종이를 집어들면 그 속에 그려진 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얼굴. 차마 보기가 힘들어 움츠러들던 때를 지나, 이제는 생기를 되찾고 성화를 향해 웃어줄 수 있는 사람. 성화의 어머니였다.


그만하기로 했잖아. 우리 그러기로 했잖아.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모여 하얀 종이 위로 떨어진다. 분명 머리 위에는 해가 떠있는데 성화에게선 비가 내린다. 다른 사람일 순 없었나. 왜 하필 홍중에게 그런 능력을 주었을까. 애꿎은 하늘에 원망만 던진다. 돌아오는 답은 없다.


그러다 성화의 눈이 깜빡 움직일 때. 투명한 눈물 자국이 난 뒤로, 때마침 그림이 아닌 무언가가 비친다. 잠시 호흡이 멎는다. 마지막이 된 그림을 뒤집는다. 성화의 눈이 언젠가의 날처럼 커진다. 잔뜩 휘날려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든 문장들이 뒷면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홍중이 적어둔 것이었다.





43.


성화야

네가 이걸 발견하게 될 지는 모르지만

혹시 네 이름이 적혀있는 걸 본 누군가가 대신 전해주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적어

너 무대하는 거 진짜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다 띄워놓고 이게 뭐냐고 욕해도 되는데, 그래도 나 너무 미워하지는 마

뛰쳐나온 게 후회 안 된다면 거짓말이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한 거니까

대회는 당연히 잘 마쳤겠지? 무조건 그럴 거니까 걱정은 안 할게

이럴 줄 알았으면 사진도 그냥 그때 찍을 걸 그랬다. 나 오래 기억하라고

농담이고, 너는 나 안 까먹을 거 아는데 네 말대로 두고두고 보는 거랑은 다르니까 그치

같이 못 찍어줘서 미안해

이제 진짜 시간 없다

나랑 지낸 건 딱 1년만 기억하다가 나중에는 그냥 잊어버려

그리고 오래오래 행복해

울지 말고

성화야

사실 나,






44.


편지는 끝났다. 길게 찍힌 반점 뒤는 공백. 홀연히 비어버린 홍중의 존재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성화는 엉망으로 물든 종이를 품 안 가득 안는다. 미처 흐르지 못하고 눈가에 매달린 눈물을 닦아낸다. 울지 말라 전하던 끄트머리의 전언이 한참을 굳어있던 성화를 움직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원망을 쏟아내던 곳으로 고개를 치켜든다. 주위를 가득 둘러싼 정원의 푸른 잎. 그 위로는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 한가운데서 작열하는 태양은 곧 다가올 한여름을 예고하듯 뜨겁게 빛을 내리쬔다.


나한테 네가 없어도 행복할 수 있을까.


불어오는 초여름의 공기가 속눈썹을 흔들고 지나간다. 성화는 그대로 눈을 감는다. 점멸하는 눈꺼풀 아래로 홍중을 그린다. 영영 잊지 못할 얼굴이다.






45.


넓은 홀이 빽빽하게 들어찬다. 새빨간 천을 두른 좌석에 사람들이 때맞춰 자리한다. 지난 번 대회와 같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훨씬 많은 청중으로 채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는 암전된다. 사위가 고요해진다. 묘한 긴장감이 공간 전체를 뒤덮는다. 그렇게 적막이 흐르길 잠깐. 단정한 구둣발이 광활한 무대 위로 오른다. 일정한 보폭. 허나 당당한 걸음이 한 발짝 나아갈 때마다 갈채가 쏟아진다. 다시 마주한 그 날의 그랜드 피아노가 위용을 과시한다. 인사를 건낸 끝에 심호흡을 한다.


홍중이 사라지고 1년이 흘러 돌아온 여름. 성화의 첫 독주회가 막을 올렸다.






46.


“진짜 멋있더라.”

“이러다 타이틀 바꿔다는 건 금방이겠어.”

“성화 군, 다음에는 바르샤바에서 보겠네.”



감사합니다. 과찬이세요. 예의 바른 회답을 건내면 번지르르한 자켓 위로 손길이 오간다. 잘 정돈된 까만 머리카락이 중력을 따라 흔들리다 제자리를 찾는다. 만면에 띄운 미소가 채 가시기 전에, 멀리서부터 들뜬 몸짓으로 다가오는 이를 반긴다. 엄마. 잘 보셨어요? 응, 우리 아들 역시 최고던데? 뒷머리를 쓰다듬는 온기가 따스하다.



“근데 웬 꽃이에요? 이제 안 살 거라면서.”

“내가 산 게 아니고, 누가 대신 전해달래서 가져온 거야.”



성화의 품으로 커다란 꽃다발이 안긴다. 조화롭게 모인 색색의 꽃이 색채를 뽐낸다.



“누군지는 못 봤어요?”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나네? 엄마도 처음 보는 사람이라. 거기 카드에 이름 없어?”



조심스레 큰 꽃잎을 걷어내자 적당한 크기의 카드가 꽂혀 있었다. 화려한 꽃다발과는 정반대의 무채색. 열고 닫는 단조로운 형태의 카드에는 예상과 달리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흔히 파는 것처럼 가벼운 형식상의 멘트조차 적히지 않은 것이다. 뭐지? 진짜 모르는 사람인가? 성화는 겉면을 두어 번 둘러보다 조심스레 펼친다.


그리고 일순간,

둘러싼 공기가 멈춘 듯한 기분이 든다.


열어본 카드의 중앙에는 무채색의 배경에 덧댄 하얀 종이 위로, 철이 지난 벚꽃잎 한 장이 덩그러니 붙어있었다. 끝부분이 조금 바랜 것을 제외하면 당장 오늘 피었다고 해도 믿을 만한 모습이다. 잘 고정된 벚꽃잎 아래로 간결한 구절 또한 남겨져 있었다.





47.


목숨값이야. 돌려줄게.





48.


그 아래 적힌 건, 그 날 젖어가던 종이 모퉁이에 쓰였던 것보다는 단정해진, 그럼에도 익숙한 글씨체. 하루가 멀다 하고 눈에 담아 절대 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49.


“이거 준 사람 어딨어요? 어디서 봤어요?”

“저기 입구에서 이것만 주고, 얘, 성화야!”



인파를 반대로 거스른다.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공연장 앞은 여전히 인산인해다. 성화는 분주히 시야를 넓힌다. 이대로 놓칠 순 없다는 생각에 자꾸만 초조했다. 날이 좋아 쨍한 볕이 성화를 돕는다. 그러다, 멈칫. 움직임이 그친다. 성화가 있는 곳으로부터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 근처를 지켜달란 말에 가만히 서서 수없이 바라봤던 동그란 정수리가 사라졌다 보이기를 반복한다.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거리다. 망설일 시간 따위는 없다. 이미 1년이나 놓쳤으니 이만하면 됐다.


성화는 내딛는 걸음에 박차를 가한다. 성화는 지나간 시간 속에서 복도를 달리던 때를 상기한다. 마음 속으로 카운트를 하나 둘 센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훨씬 짧은 둘 간의 거리. 남은 건 곧이다. 성화가 팔을 뻗는다. 마침내 살랑이는 옷자락을 잡는다. 나는, 이렇게 너를.


나란히 노을에 물든 채 부둥켜 안았던 어깨가 한낮의 태양 아래서 차츰 돌아간다. 이전과 달리 밝게 물든 머리칼이 열기를 실은 바람에 흐트러진다. 폐부 깊숙이 꽃잎이 휘몰아치는 듯한 감각에 성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연다. 발화하기엔 너무 아파서 아끼고 아끼던 이름을 끝끝내 읊조린다.


홍중아.


눈앞의 장면이 느리게 감긴 것처럼 펼쳐진다. 일련의 과정을 모조리 담는다. 그림에서 피어나는 생을 바라볼 때마다 팔랑이던 속눈썹이 깜빡이다 드디어 완전하게 성화를 향하면,



“보고 싶었어.”



맞닿는 시선을 타고 잃어버린 지난 계절들이 속속들이 살아난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동안 잠들었던 만물이 깨어나는 봄을 지나 당도한 여름은 곧 생명의 계절. 벚꽃잎이 날리던 나무에서 돌고 돌아 완연한 녹색으로 거듭난 모습 아래, 눈이 시릴 정도로 화려하던 꽃다발 대신 그리던 품으로 공허를 한가득 채운다. 더는 잃지 않아도 된다. 혹여나 세계가 막아서더라도 꽉 잡은 두 손으로 맞서리라 다짐한다.






50.


크고 작은 손짓으로부터 일어난 소생이 바야흐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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