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생은 손짓으로부터 上>, lope
- 계간 성홍
- 2022년 3월 21일
- 17분 분량
* 연극 「만약에 생명을 그릴 수 있다면 (もしも命が描けたら)」 의 설정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1.
소생蘇生.
희미하게 꺼져가는 숨결을 다시 세상으로 끌어올리는 것. 만물은 탄생부터 제각기 정해진 시간을 가지고 태어났다. 순리에 맞추어 순탄하게 살아가는 삶이 이 세계를 이루는 대부분이라지만, 게 중에는 예정보다 이르게 생을 다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다른 목숨에 의해 부조리하게 죽어가는 생은 마찬가지로 다른 목숨에 의해서만 살아날 수 있다. 그게 자연이 지정한 법칙이었으며, 홍중이 제 시간을 바쳐 하는 일이자 업이었다.
2.
돌연 찾아온 기적 혹은 저주. 홍중이 살릴 수 있는 것의 범주는 제한이 없었다. 손가락만 한 크기의 식물부터 네 발 달린 짐승. 그리고 시도한 적은 없지만 어쩌면 사람까지도. 소생의 몇 안 되는 제약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반드시 직접 그림으로 구현할 것. 다행인지 불행인지 홍중은 부모로부터 예술적 자질을 물려받았으며, 그 사실을 알게 된 열여섯의 어느 날에도 진학 준비를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완성을 위해 꽃잎 끝을 손보고 연필을 떼어냈을 때. 색 하나 없던 선이 순식간에 화려하게 물들더니 얼마 안 가 평평하던 화병 속의 꽃은 종이 위로 피어올랐다. 당연하게도 그 길로 홍중은 기절했고, 아침이 되어 일어나도 멀쩡하게 피어있는 꽃을 발견하고서야 현실을 받아들였다.
몇 년이 흐른 지금에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 그야말로 기이한 능력은 알려봤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고, 들켜봤자 미친놈 소리나 들을 게 뻔했다. 고로 홍중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생명을 살렸다. 원래도 능숙하던 자기방어는 더 단단하게 홍중을 감쌌다.
3.
분명 그랬는데.
4.
홍중은 눈앞의 상황을 당장이라도 탈출하고 싶었다. 처음 겪는 상황은 아닌지라 덤덤한 척 표정을 유지했지만, 상대방은 그러기 힘든 모양이었다. 있는 힘껏 눈을 부라린 채 홍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래진 눈은 방금까지 활짝 펼쳐져 있던 공책과 홍중을 번갈아 봤다. 나 완전 머리 굴리는 중이에요, 하고 알리기라도 하는 건지. 대충 봐도 뻔해서 홍중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를 피해 도록 굴리던 시선 언저리에 반듯하게 달린 명찰이 걸렸다. 적힌 이름을 보자 홍중은 탄식했다. 아. 하필이면.
5.
빨간 바탕의 딱딱한 플라스틱 명찰 위에는 박성화, 세 글자가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소생은 손짓으로부터 上
박성화 김홍중
6.
시간은 거슬러 이른 오전.
성화가 어김없이 주변으로 몰려든 이들의 대화 속에서 의미 없는 반응만 던질 때였다. 고양이? 불쑥 끼어든 물음으로 이목이 쏠렸다. 한 귀로 흘려보내던 말들 중 하나가 성화로 하여금 대화에 끼어들게 만들었다.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걸고 잠자코 있던 성화가 반문을 표한 건 학기가 시작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화를 주도하던 창현은 성화가 꼭 제 기를 세워주기라도 한 것처럼 기세등등해져선 아는 체를 시작했다. 번뜩이는 눈빛에 비해 내용은 참담했다. 들려오는 소문의 갈래는 다양했으나 요지는 하나. 교내에서 자꾸만 다친 고양이가 발생한다는 거였다. 지난주는 본관 로비 앞. 어제는 화단 옆에 이어 오늘 또 다친 고양이가 나왔다고 했다. 상처는 꼭 덫에 걸린 것 같단다. 그렇다면 목적은 암암리에 벌어진 깨끗한 교정 유지 활동.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고작 인간을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인다니. 듣고 있던 이들 중 누군가는 혀를 찼고, 누군가는 욕을 뱉었으나 어디에도 연민은 없었다. 성화는 미간을 구겼다. 이마저도 이들에겐 하나의 가십에 지나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해? 참지 못하고 되물어도 성화가 얻는 건 오롯이 감당해야 할 실망뿐. 범인은 아직 잡히지도 않아 며칠째 학교 분위기만 흉흉하댔다. 진짜 이유를 묻고 싶었던 것도 아니지만 역시나. 가벼운 어조에는 일말의 심각성도 느껴지질 않았다. 어찌나 가볍던지. 성화가 잠시 침묵하는 사이, 금방 주제를 바꾸어 연예인의 사생활 따위나 헐뜯고 있었다.
성화 역시 금방 관심을 끊어냈다. 그리고는 소각장 구석에 사는 고양이를 떠올렸다. 근처에 널린 상자와 찢어진 천을 주워다 엮어 어설프게 지어준 종이 집 아래 사는 고양이. 당번으로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뒤로 눈에 띄지 않게 챙기고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가던 걸 지난 이틀 레슨이 연달아 몰려 살피지 못했다는 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무사해야 할 텐데. 잠금 화면을 빼곡히 채운 일정들을 확인하다 결심했다. 하루쯤은 땡땡이쳐도 괜찮지 않을까. 성화는 까맣게 물든 액정 위를 초조한 손길로 두들겼다.
7.
옥상을 밟은 건 해가 다 저물어 갈 즈음이었다. 계단을 밟는 발길이 조급했다. 만사에 여유롭던 성정은 지켜보는 이들이 없으니 더 이상 내보일 필요가 없다. 얼마 안 남았을 때부터는 세 칸씩 뛰어내렸다. 밥도 미리 챙겨뒀고, 물은 알아서 잘 마시는 것 같기에 비만 안 오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너무 안일했나 싶었다. 옆선을 타고 땀방울이 흐르던 건 코너를 돌아 소각장에 들어선 뒤에나 알았다. 대충 훔쳐내고는 마저 달렸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박스 더미를 지나 천막이 있을 구석이 나타나면 재빨리 몸을 틀었다. 공기에는 무게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몰아쉬던 숨이 반대로 되돌아 세게 짓눌러 오는 것만 같았다.
기대 따위는 다 허상이었나. 성화는 마음 한켠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에 말을 잇지 못했다. 오후 시간 내내 고양이를 걱정하며 무사하길 빌었던 건 부질 없었단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가만히 누운 고양이의 꼬리와 다리를 검붉은 얼룩이 뒤덮고 있었다. 눈으로 본 건 소문보다 훨씬 끔찍했다. 아직 작게 들썩이는 몸뚱이를 보며 부정했다. 아직 살아있잖아. 살릴 수 있어. 움직임을 포착하고 곧장 다가가려던 성화에게 뜻밖의 제동이 걸렸다. 예상치 못한 타의에 의해서였다.
성화가 만든 임시 방편의 집은 발길 뜸한 소각장에서도 가장 구석. 그마저도 저처럼 살피기 좋아하는 누군가가 발견할까 싶어 종이 더미를 옮겨 가려둔 곳이었다. 그 말은 즉슨, 성화 외엔 누구도 닿지 않을 거란 뜻이었다.
그런 곳에, 정작 자리를 지켜야 할 고양이 대신 처음 보는 사람 하나가 앉아있었다.
8.
“무슨 짓이야.”
억눌려 나간 음성에 순간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허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새까만 머리통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정작 필요한 대답은 없으면서 바삐 움직이는 손만 넓은 공책 위를 누비고 있었다. 가슴팍에 달린 이름은 김홍중. 정갈한 활자와는 달리 초저녁의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드물게 흔들리는 몸짓을 따라 움직였다.
홍중에 의해 거침없이 그이는 선은 곧 고양이의 형상을 했다. 그걸 발견하자 성화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당장 병원에 데려가도 모자랄 판에 그림을 그린다고? 홍중은 틈틈이 고개를 들어 고양이를 살폈지만 보기만 할 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성화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차마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힘이 잔뜩 들어가 손바닥이 따끔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도 홍중에게서 고양이를 멀리 하는 게 먼저였다.
“거기, 미안한데 가까이 오지 마.”
“뭐?”
“설명하긴 어려워. 근데 일단 걔 살리고 싶으면 지금은 건들지 말라고.”
짧지만 단호한 말투. 성화는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잠시간 귀를 의심했다. 그런 와중에도 홍중의 고개는 단 한 번도 성화를 향하지 않았다.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야, 잠깐. 건들지 말라니까!”
괘씸해서 똑같이 무시하려다 숙이던 상체가 어정쩡하게 멎었다. 보진 않아도 꿋꿋이 말을 받아치던 홍중이 드디어 멈췄다.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연필도 함께였다. 동시에 어딘가 간절해보이는 눈과 마주했다. 간절하다고? 어째서? 상상치 못한 감상에 사고가 멈춘 사이, 치켜뜬 눈썹 아래 뜬 눈이 강한 의지로 또렷했다. 피하지 않고 허공에서 부딪히기를 잠깐. 그새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가 침묵을 끊어냈다. 얼마 안 남았어. 진짜 잠시면 되니까, 부탁이야. 성화로선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늘어졌다.
그러나 성화는 한발짝 물러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주친 눈동자가 거짓으로 보이진 않아서였다.
너무 확고한 진심에는 힘이 있다. 성화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거뒀다. 성화가 굽혔던 허리를 천천히 세우는 걸 확인한 홍중은 다시금 손을 움직였다. 옆면은 이미 연필 자국으로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지만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성화는 거의 완성되어 가는 그림을 눈에 담았다. 순간적으로 치민 화에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페이지 위의 형체는 털 끝까지 완벽히 묘사되어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았다. 복잡한 속으로 입 안을 괴롭히던 성화는 불현듯 하나의 의문점을 떠올렸다. 홍중이 그리는 고양이는 다 죽어가는 진짜 모습과 달리 멀쩡한 모습. 다리를 물들인 얼룩도, 상처가 난 꼬리도 모두 깨끗했다. 대상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데도 묘사는 현실에서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었다. 애초에 정반대로 그릴 거면 이러는 의미가 있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성화는 홍중이 아니라 알 턱이 없었다.
답답함에 미간만 잔뜩 구기고 있던 차였다. 고양이의 숨이 점차 옅어지고, 홍중의 손은 가엾게 파들거리는 꼬리의 끄트머리를 마지막으로 그려냈을 때. 성화는 머지 않아 홍중의 의중을 찾게 됐다.
그것은 성화가 태어난 이래 한 번도 목격한 적 없는 형태의 해답이었다.
9.
조용한 소각장을 채우던 사각거리는 소리가 멎었다. 종이 위의 수많은 선이 완전한 고양이의 형태를 갖추면서 현상은 시작됐다. 엉망으로 번져 있던 상흔이 허공에 생겨난 지우개로 누군가 지워내는 것처럼 차츰 사라졌다. 어지럽게 물들었던 얼룩은 깔끔하게 지워지더니 본래의 분홍색으로 바뀌었다. 피가 엉켜있던 털도 부드럽게 살아났다. 호흡은 규칙적으로 사그라들고, 마침내 가물대던 눈이 생기를 되찾았다. 말도 안 돼. 성화가 지닌 상식으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성화가 본 일련의 장면은 일평생 믿어 온 모든 법칙을 단번에 타파했다. 눈을 의심한다는 건 이럴 때를 위해 있는 말인가. 현실감이라고는 없었다. 어린 시절에나 보던 판타지 영화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여느 아이와 다를 게 없던 성화가 허황이라고 여겼던 것이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상황은 반전되었다. 성화는 낯빛에서 분노를 지워내고 경악만 남겼다.
이게 말이 돼?
10.
그러거나 말거나. 홍중은 누르고 있던 숨을 터트렸다. 긴 안도감이 호흡을 따라 빠져나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해진 다리로 걸어와 발등에 부벼오는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 늦어서 다행이야. 기분 좋은 울림이 응답하듯 돌아왔다. 홍중은 고운 털을 따라 몸통을 두드리다 먼지를 털고 일어섰다. 아무렇게나 던져뒀던 가방을 집어들었다. 발치에서 나른하게 기지개를 펴는 고양이를 확인하고선 미련없이 발을 뗐다.
한참을 넋 놓고 있던 성화가 정신을 차린 건 그쯤. 홍중이 떠나자 익숙한 성화의 신발 위에 발을 올린 고양이 덕이었다. 손바닥에 닿는 온기가 늘 만지던 그대로 포근했다. 여즉 믿긴 힘들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라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잠시만! 다급한 음성이 홍중을 붙잡았다. 그리고 다시, 대치.
“어떻게 한 거야?”
“뭐가.”
“고양이, 어떻게 살린 거냐고.”
“네가 본 게 다야.”
붙잡힌 손목에 머무르던 시선을 옮겼다. 아까는 완전 화난 눈이더니. 평소에는 이런 얼굴이려나. 당장이라도 주먹을 뻗을 것 같던 표정은 다 어디 갔는지, 당혹감으로 물들어 한껏 의아해하고 있었다. 일일이 묻고 싶은 심정은 알지만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예상 외의 전개라면 더더욱. 여태껏 잘 숨겨왔는데 또 들킬 줄은 누군들 알았나.
홍중은 성화에게 잡힌 팔을 비틀어 빼냈다. 호기롭게 잡았던 거에 비해선 쉽게 떨어져나갔다. 이번에는 성화의 시선이 홍중이 빠져나간 제 손에 머물렀다. 마주친 눈은 변함없이 반문하고 있었지만 홍중은 모른 척 넘겼다. 오늘 일은 못 본 걸로 해. 기다리고 있을 부연 설명은 모조리 떼고 전했다. 홍중은 간간이 들었던 성화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공부도 잘 한댔으니까 이 정도면 알아서 이해하겠지. 영문도 모르는 성화를 두고 어깨가 가볍게 들썩였다. 홍중은 흘러내린 가방을 끌어올렸다. 그럼 나 갈게. 늦었는데 너도 이만 가. 짧은 인사만 남기고 잡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성화는 아주 잠깐 꿈을 꿨나 의심했다. 팔뚝을 세게 꼬집었다. 쓸데없이 잘도 아팠다. 허탈함에 웃음이 절로 터졌다. 공중에 붕 떠있는 것만 같은 느낌에 그대로 서있으니 발목 언저리에 닿는 간지러운 촉감이 있다. 몸을 숙여 등허리를 넓게 쓰다듬었다. 이제야 조금 현실로 돌아온 느낌. 그러다가도 문득. 상처 하나 남지 않은 고양이를 살피다 홍중이 떠나간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해가 거의 저물어 가로등 불빛만이 남은 자리. 홍중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11.
성화를 따르는 수식어는 셀 수 없이 많았다. 다섯 살부터 건반을 두드린 희대의 유망주. 천재 피아니스트. 피아노를 위해, 피아노에 의해 탄생한 재능. 천재였던 어머니의 뒤를 이어 태어난 새로운 천재. 장황한 문장들은 성화가 무대에 처음 오르던 순간부터 십 대의 끝에 다다른 지금까지 끊이질 않았다.
온갖 천재 소리는 다 듣고 살아서 그런가. 성화에게는 피아노 외에도 특출난 점이 많았다. 남들은 새학기 자기소개에나 힘들게 짜내는 장점은 죄다 갖고 살았다. 어느 정도 부유한 집. 영특한 머리. 타고난 다정과 겸손. 신의 가득한 외모까지. 참으로 편안한 인생. 그러나 어디든 질투를 좀먹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마냥 고운 시선만 있을 리가 없었다. 나이가 차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우후죽순 소문이 늘어나는 것 역시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더 이상 성화에게도, 그들에게도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홍중이 성화를 알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단지 유명하다는 이유 하나였다. 조금 더 살을 붙이면 피아노 잘 친대. 공부까지 잘 한다더라. 원체 남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 탓에 모조리 걸러 기억에 남은 건 이게 다였다. 반면에 홍중은 남들은 모를 능력을 제외하면 평범했다. 그마저도 혼자만 아는 사실이니 결국은 남들과 다를 바 없다는 소리였다. 특이사항이라고 해봤자 반에 한두 명 있을까 말까 한 미술 특기생 정도. 친구 관계 적당히 원만하고 공부도 평균보다 조금 높은 정도로만 유지했다. 홍중은 지금 자신이 머문 상태가 살아가기엔 제일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튀지 않고 무난히 지내다 졸업하는 게 유일한 목표였다.
12.
그래.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무난하게 흘러가던 일상에 박성화가 끼어들기 전까지는.
13.
“진짜 골 때린다.”
“응? 뭐가?”
한나절 전에 마주하던 눈이 정오의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어제와는 달리 뻔뻔한 낯짝은 앞자리까지 차지하고 앉았다. 괴고 있던 턱이 옆으로 기울었다. 성화에게 지난 저녁에 봤던 물음표가 아직도 남아있었다. 홍중은 차차 기억을 되짚었다. 어제를 끝으로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어야 하는 성화가 지금 제 앞에 떡하니 자리잡게 된 이유를 짐작했다. 혹시 말을 제대로 못 들었나? 그럴 리가. 주변은 사람 하나 다니지 않아 조용했고 홍중은 정확히 발화했다. 그럼 이해를 못했나. 머리 좋다 그래서 알아들었을 거라 믿었는데. 조금 더 확실했어야 했나 싶다가도 가로젓고 부정했다. 기껏해야 아홉 글자인 문장이 뭐가 어렵다고.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박성화는 지금 무작정 들이미는 중이다. 홍중이 지칭하는 대상이 본인인 걸 빤히 알면서 모르쇠로 일관하는 게 영 못마땅했다. 뭘 어쩌자는 건지. 한숨이 절로 터졌다. 귀찮음이 낳은 결과가 생각보다 컸다.
“못 본 걸로 하라고 했잖아.”
“응, 그랬지.”
“근데 왜 여기 와서 이러고 있는데?”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학교 와서 내내 너만 찾았어.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멘트를 던져놓곤 혼자 평온했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성화가 홍중의 앞을 차지하고 앉은 이래 계속되고 있던 것들이다. 술렁이는 소리는 거의 성화와 홍중의 이름이었다. 박성화가 왜 여깄어? 김홍중이랑 아는 사인가? 같이 다니는 거 본 적이 없는데? 듣고 싶지 않아도 절로 들렸다. 여기서 어제 일을 얘기할 수도 없고. 단박에 해결하기엔 듣는 귀가 많았고, 무엇보다 성화 본인이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어보였다. 홍중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와중에도 슬쩍 다가오는 얼굴은 지나치게 무구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러니까. 너무 말도 안 되는 걸 봐서 그럴 수도.”
반박하려던 입이 도로 닫혔다. 홍중은 성화에 대한 말들을 흘려들은 걸 후회했다. 미리 어떤 앤지 알았으면 이렇게까지 골치 아프진 않았을텐데. 머리 좋다는 건 허튼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게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지금은 후자에 가까웠다.
14.
들키는 경우가 흔하진 않지만 아예 없던 일도 아니었다. 홍중이 겪은 바로는 두 가지로 나뉘었다. 첫째. 어떻게 말릴 새도 없이 자신이 본 걸 마구 떠들어대다 미친놈 취급 받는 경우. 실제로 열에 아홉은 여기에 속했지만, 백 중의 백은 그들을 무시했다. 버럭대며 자기가 봤다고 삿대질하는 이들을 뒤로 하고 홍중이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 너무 잘 그려서 그런가보다. 다 네 그림이 질투나서 그래. 형식과 동정이 함께 담긴 위로를 따라 끄덕이면 끝나는, 아주 간편한 경우였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 비밀을 담보로 바라는 게 있을 경우. 홍중은 골몰하다 도달한 결론에 저도 모르게 심각해졌다. 어딘가 결심이 서린 표정까지. 홍중의 입이 한참을 달싹이다 열렸다. 원하는 게 뭔데. 찔리는 쪽이 먼저 건내야 하는 건 언제쯤 적응이 되려나. 대놓고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성화가 매끄럽게 웃었다. 홍중은 체념을 담아 의자로 몸을 기댔다. 가만히 지켜보던 성화는 홍중이 멀어진 만큼 몸을 당겼다. 변한 거라곤 성화의 자세가 조금 더 불편해졌단 것뿐인 상태로 홍중에게 속삭였다.
“너랑 같이 다녀도 돼?”
“뭐라고?”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어떻게 한 거냐고도 안 물어볼게.”
소각장에서 했던… 아무튼. 그거 나도 돕게 해줘. 등을 꼿꼿이 세우던 긴장이 맥없이 풀렸다. 아마 거울을 본다면 전에 없던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뻔했지만, 홍중에겐 사소한 요소까지 신경 쓸 겨를이 남아있지 않았다.성화는 여전히 반짝거리는 동공을 하고선 홍중을 담았다. 기껏해야 금전이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상상도 못한 방향이었다. 빤히 보고 있는데도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우선은 회피할 필요가 있다.
“필요 없어. 그리고 어제는 잠깐 필요해서 한 것 뿐이고 원래는….”
“거짓말. 공책 엄청 두껍던데.”
아뿔싸. 낭패였다. 멍하니 서있길래 간과했더니. 성화는 상체를 조금 더 기울였다. 고양이 말고도 많잖아. 다 네가 그렸던 거 아니야? 정곡을 찔렸다. 당장 서랍 안에 넣어둔 공책 귀퉁이가 손 끝에 걸렸다. 이 안에 든 건 홍중만이 기억하는 생명의 흔적들. 습관처럼 엄지를 뻗어 만지작거렸다.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성화가 시선을 조금 내려 제가 앉은 자리에선 보이지 않는 책상 아래를 응시했다. 당황하는 바람에 방심한 홍중을 놓치지 않고 성화가 덧붙였다. 응? 안 돼? 더 가까워질 거리도 없는데 한 음절 뱉을 때마다 다가오는 통에 난감했다.
내가 널 어떻게 믿어. 명백한 불신이었다. 더 저물어가던 하늘 아래서 들은 말을 그대로 성화에게 돌려줬다. 한층 더 크게 뜨이는 눈. 보통 이렇게까지 하면 믿어주던데. 그치만 진심이야. 약속할게. 거리는 더 이상 좁혀지지 않지만 성화는 여기서 물러설 생각도 없었다.
일단은 생각해볼 테니까 나중에 얘기해. 오가는 말 없이 버티다 결국 홍중이 반쯤 경계를 내렸다.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주위의 소란이 커진 탓이었다. 아직 남은 반감은 확신이 아닌 모호한 답으로 대신했다. 제대로 말렸다 생각했지만 어쩔 도리는 없었다. 들릴 듯 말 듯한 수긍에도 성화는 만족스러웠다.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물리자 짜맞춘 듯 종소리가 울렸다. 홍중에겐 1시간 같던 10분이 끝났음을 알렸다. 곧바로 눈매가 뾰족하게 솟았다. 말만 안 했지 누가 봐도 당장 꺼지라는 뜻이었다. 협박이나 다름 없음에도 성화는 이상하게 자꾸만 웃음이 새는 걸 멈추기 어려웠다.
성화는 자리를 막 뜨려던 몸을 틀어 홍중을 내려다봤다. 홍중이 재차 어색하게 굳었다. 안 가고 뭐 해. 빨리 가. 쳐다도 보지 않고 휘적이면 갑작스레 다가오는 상체가 있었다. 심란한 홍중의 속은 알기나 하는지.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은근했다. 알겠다고 한 거지? 하마터면 끄덕일 뻔했다. 가까스로 참아낸 홍중은 수직이 아닌 고갯짓으로 뒷문을 가리켰다. 이젠 정말 여차하면 선생님이 들이닥칠 시간. 성화는 할 말은 마쳤답시고 순순히 물러났다. 나중에 보자 홍중아. 똑같은 색의 명찰을 훑더니 언제 여유로웠냐는 듯 손을 흔들며 뛰쳐나갔다.
성화가 사라지자마자 득달같이 붙어오는 눈길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앞문이 열렸다. 덕분에 아쉬움만 남기고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홍중은 파들거리는 입으로 그들을 향해 웃어보였다. 제대로 읽히지도 않는 활자들이 엉킨 생각들과 함께 마구 섞였다. 나중에 보자. 잔재하는 음성에 괜시리 고개를 저어 털어냈다. 홍중은 부디 이 수업이 영영 끝나지 않길 기도했다.
15.
우려와는 달리 성화는 정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지루한 오후에 줄줄이 이어진 수업을 겨우 이겨내고 달려온 것치곤 퍽 허무했다. 성화가 한 거라고는 홍중이 몰래 도망갈 새라 부리나케 뒷문 사수하기. 아니나 다를까. 마주치기 전에 진작부터 튈 각 재던 홍중은 교실에서 한 발짝도 못 뗀 채 허망한 얼굴로 성화를 맞이했다.
“홍중아, 어디 가?”
“집에 가지 어딜 가.”
“오늘은 그거 안 해?”
“제발 조용히 말해. 여기 아직 교실이거든?”
하교를 위해 흩어지던 관심이 다시금 둘에게로 쏠렸다. 필요한 주어가 생략된 문장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성화야. 응? 너 진짜 사람 곤란하게 하는데 뭐 있다. 그것도 잠시였다. 홍중은 한 번 겪어봤다고 금방 평정을 되찾았다. 맞닥뜨린 현실을 받아들이느라 오후를 통째로 날리고 얻은 산물이었다. 그리고 잊었는진 모르겠는데, 나 아직 도와달라고 말한 적은 없어. 당황은 이제 성화의 몫. 홍중은 그 틈을 타 문틀에 기댄 성화의 옆으로 유유히 비켜 나갔다. 두 번의 실수는 없었다. 이번에도 놓칠까 성화는 곧장 홍중을 따라잡았다. 어제도 그렇고. 홍중의 걸음은 유달리 빠르다 생각하며 속도를 맞췄다.
16.
집으로 간다더니. 성화는 뒤늦게 사방을 살폈다. 시끌벅적한 학교를 벗어나 어느덧 시야의 대부분은 초록으로 가득했다. 소각장 옆 샛길로 빠지면 나오는 곳. 학교 뒷산으로 오르는 길목이었다. 유난스럽게 따라오던 것에 비해 잠자코 따라오던 성화가 문득 스치는 생각에 홍중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홍중아. 혹시 나 여기 묻으려는 건 아니지? 홍중이 우뚝 섰다. 돌아보는 눈초리가 매서웠다. 진짜 묻히고 싶은 거 아니면 조용히 해라. 성화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너무해. 자꾸 조용히만 하래.
높이가 낮아 언덕에 가까운 뒷산은 생각외로 길이 잘 트여있었다. 제대로 된 등산로는 없어도 반복해서 드나든 흔적이 있었다. 홍중은 제법 익숙하게 산을 올랐다. 성화의 지분이 대다수던 대화는 언제부턴가 숨이 차 내쉬는 소리만 가득했다. 앞서 걷던 홍중은 멀어지다가도 반쯤 뒤를 돌아 성화에게 돌부리의 위치를 미리 일러주기도 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팔랑이는 홍중의 옷자락만 보고 걷길 십여 분. 슬슬 다리가 아파오던 성화가 어디까지 가는 거냐 홍중을 붙잡으려던 즈음이었다. 성큼성큼 내딛던 발이 점차 느려지더니 어느 지점에서 그쳤다. 둘러맸던 가방을 앞으로 당겨 뒤적였다. 간신히 숨을 고르던 성화가 홍중의 뒤에 서서 어깨 너머를 살폈다.
그리고 터지는 감탄사.
“다 네가 살린 거야?”
홍중의 앞에는 크고 작은 상자를 합쳐 만든 형태의 작은 집이 있었다. 성화가 소각장 한 구석에 만들었던 것보다 훨씬 튼튼한 모양새. 지붕이라고 둘러놓은 천만큼은 성화의 것과 비슷했다. 그 아래서 대여섯 마리의 고양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에 성화의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이 많은 애들이 전부…. 성화가 작게 중얼거렸다. 홍중은 흙바닥도 마다 않고 주저앉았다.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털을 만지다 살살 쓸어내렸다.
“전부 학교에서 다친 애들이야. 누가 그랬는진 나도 모르고.”
머리색을 닮아 짙은 색의 동공 속에 성화가 고스란히 담겼다. 나무 사이를 떠돌던 바람이 둘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동시에, 머리를 채우던 생각이 모조리 삭제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찰나의 순간. 성화는 타이밍을 알았다. 덩달아 눈치도 빨랐다. 구태여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내내 짐작하던 가정이 수면 위로 둥실 떠올랐다. 성화는 지금이 곧 기다렸던 순간임을 자신했다. 끈질기게 쫓아와도 아무 말이 없던 것.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자꾸만 뒤를 돌아 살피던 것. 이내 맞닿은 눈동자 속에 담긴 뜻을 읽어냈다. 성화는 더 지체하지 않았다.
“너랑 계속 같이 있고 싶어.”
그러면 안 될까? 저도 모르게 흘러나간 말에 고장이라도 난 것 같았다.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무르진 않았다. 얼굴 가득 오르는 열이 여실히 느껴졌다.
홍중은 성화로부터 내려앉는 음절들을 묵묵히 받아냈다. 어딘가 이상하긴 했지만 결코 가볍게 꺼낸 말이 아니라는 건 금방 알았다. 성화의 언어가 선선한 공기를 타고 맴돌았다. 전해진 떨림이 속눈썹에 닿았다. 5초 남짓의 짧은 간극에서 홍중은, 어쩌면 떨고 있는 건 성화가 아니라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네가 봤던 거. 온전히 믿을 수 있겠어?”
“그럼.”
“내가 무섭진 않아?”
“그랬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홍중은 답지 않게 망설였다.
“성화야.”
“응, 홍중아.”
“아무한테도 말 안 하겠다고 약속했지.”
약속, 꼭 지켜. 지금부턴 무르기 없어. 패배 없는 탐색전이 끝을 맺었다. 홍중은 성화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바짝 올라갔던 눈매가 전과 달리 유해졌다. 성화에게 내세우던 불안감은 허물어도 될 것 같다고 판단했다. 홍중은 능력이 생겨난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를 믿고 싶단 생각을 했다.
슬슬 팔이 아파왔다. 성화를 향해 뻗은 팔은 허공에 멈춰 잡아줄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달랑 흔들기까지 했다. 야, 성화야 뭐 해. 나 팔 떨어지겠다. 벙찐 채로 굳어 있다 그제서야 초점을 되찾은 성화가 홍중을 덥썩 잡아챘다. 아래로 처지기 전에 조심스레 감싸쥐었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 잡은 온기. 그러나 담긴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나 그런 거 완전 잘 해. 늦었지만 거짓 없이 단단한 다짐도 더했다.
감긴 손에 힘을 주어 당기면 작은 기합과 함께 홍중이 일어났다. 여기저기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또 올게. 가려는 걸 아는지 발목 근처에서 버둥대는 고양이를 향해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건내면 화답하듯 울며 물러섰다. 나무 사이사이로 노을빛이 내렸다. 이제는 정말 집으로 갈 시간이었다. 홍중은 아쉬워 손을 흔들다 돌아섰다. 올랐던 길을 거꾸로 밟았다. 몇 보 걷다 따르는 인기척이 없자 돌아섰다. 뭐 해. 안 갈 거야? 여기 해 지면 못 내려와. 농담 섞인 말만 남겨두고 훌쩍 멀어졌다.
성화는 생각했다. 평생 질리도록 누군가의 뒷모습만 보고 살았지만 오늘처럼 외롭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아니. 외롭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이건……. 흙길 위에 남은 홍중의 발자국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러다 다시 까맣고 동그란 뒤통수. 벌써 저만치 멀어져 숲을 울리는 호통을 귀에 담았다. 박성화 빨리 오라고! 이제는 이름도 잘만 부르고. 성화는 간지럽게 번지는 미소를 참을 수가 없어서, 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는 대신 그대로 끌어올렸다.
지금 갈게. 같이 가.
홍중이 지나간 자리 옆으로 나란한 자국이 찍혔다. 내딛는 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17.
성화의 제의를 허락한 것이 무색하게, 홍중은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소각장에서의 일 이후로는 다친 고양이도 더 나오지 않았기에 더욱이 공책을 여는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성화는 변함없이 홍중을 찾았다. 종이 치면 홍중의 앞자리는 자연스레 비워졌고,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달려온 성화가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물론 익숙해지기까진 꽤나 오래 걸렸다. 전적으로 홍중의 부담이 컸다. 같이 있겠다고 한 건 맞는데, 그게 매 시간마다 붙어있자는 소리는 아니었다고. 일주일을 내리 참다 작정하고 자리에 없어보기도 했지만 어찌나 발이 빠르던지. 온갖 핑계를 대고 반을 나서는 족족 성화와 마주치는 바람에 결국은 백기를 드는 건 홍중이었다.
그렇게 조용한 듯 요란하게 지나가길 며칠이 지나고 마침내. 종이 치기 직전 자리를 뜨던 성화를 홍중이 먼저 붙잡았다. 성화는 벅차오르는 마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환해진 얼굴에 괜시리 민망해진 홍중만 애꿎은 헛기침으로 말문을 텄다.
“혹시 끝나고 바빠?”
“아니. 완전 한가해.”
양심이 콕 찔리는 건 홍중이 모르게 숨겼다. 홍중과 있느라 잠시 잊고 있던 방과 후의 일정들이 차례로 스쳤지만 애써 외면했다. 겨우 하루 건너뛴다고 녹이 슬진 않으니까.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꾸중은 기억 저 편에 잠시 묻어둔 채 스스로와 타협했다.
18,
홍중이 성화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체육관 뒤편의 공터였다. 작년부터 확장 공사를 한답시고 오래된 나무를 죄다 잘라내더니, 무슨 일인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아 듬성하게 남은 밑동만 방치된 상태였다. 높은 건물에 가리워 그늘이 드는 곳이라 얼핏 보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곳곳에 남겨진 공사의 흔적들을 살피던 홍중은 잔뜩 헤진 출입금지 테이프를 걷어냈다. 아래로 들어서자 성화 역시 몸을 숙였다.
두껍고 단단한 나무였다는 건 한 눈에 봐도 티가 났다. 성화와 홍중이 나란히 밟고 올라서도 공간이 남을 만큼 커다란 둘레. 자르기만 하고 정리조차 잊은 건지 주변은 온통 자잘한 가지부터 갈려나간 톱밥으로 엉망이었다. 발 아래서 톡, 하고 가지가 꺾이자 성화가 낮게 읊조렸다. 너무하다.
“인간은 진짜 이기적이구나.”
“그렇지. 받기만 하고 베풀 줄을 모르니까.”
홍중은 가장 큰 등걸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익숙한 손길로 지퍼를 열었다. 성화는 한 걸음 떨어져 홍중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오는 길에 나눈 대화를 상기했다. 나는 이제 뭐 하면 돼? 들뜬 목소리에 잠시 고민하다 답을 건냈다. 근처에 누가 오는지만 봐 줘. 가까이 올 것 같으면 막아주고.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던 것을 이제야 곱씹었다. 홍중의 말이 맞다. 아무리 돕겠다고 했어도 소생은 온전히 홍중만이 할 수 있는 일. 성화는 결국 제가 아는 홍중의 비밀이 홍중에게는 곧 약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고선 문득 부끄러워졌다. 그러다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다. 그 때. 고요하고 우거진 녹음 아래서. 홍중은 뭘 믿고 팔을 건낸 건지. 어차피 물어도 말해줄 리는 없기에 꺼내지도 못하고 물음을 삼켜낸 목구멍이 괜시리 따끔거렸다.
19.
성화가 난데없는 상념에 빠진 와중에도 연필은 움직였다. 홍중은 끝단만 남은 나무의 거센 재질을 눈에 담았다. 흑색의 선이 거침없이 그였다. 개별적인 것 같아 보여도 두어 번 더 그이면 어엿한 형체가 된다. 땅속 깊이 파묻혀 있을 뿌리부터 지금은 다 끊긴 작은 가지까지. 이윽고 늘어지는 상념을 떨쳐낸 성화가 다시금 홍중에게 집중했다. 색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직선인데도 성화는 그 속에서 태동하는 기운을 감지했다. 얼마 안 가 몰아치는 기시감에 고개를 들어 마주한 광경은 언젠가처럼 감탄을 자아냈다.
먼지만 날리던 삭막한 배경은 사각거리는 소리를 바탕 삼아 서서히 자라나는 진갈색의 기둥으로 채워지더니 눈 깜짝할 새에 성화의 키를 뛰어넘었다. 느리게 올라가다 끝에 다다라서는 빠른 속도로 줄기를 뻗고 가지를 내었다. 성화는 이 순간이 꼭 하나의 연주 같다고 생각했다. 홍중의 지휘 아래 길고도 짧았던 악장의 끝에 이윽고 피어나는 건,
“벚나무였네.”
때이른 벚꽃. 바싹 마른 밑동이 있던 자리에는 온전한 모습을 한 벚나무가 자랐다. 피어난 봄을 어찌 알고 기분 좋게 불어온 바람에 화답하듯 벚꽃잎이 흐드러지게 휘날렸다. 홍중은 뒷목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공책을 덮었다. 벚꽃이 원래 언제 피더라. 조막만한 머리가 계산으로 바삐 움직였다. 벚나무인 것까진 예상하지 못해서 난감했지만 이내 가벼이 넘기고 만다.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게 자연이니까.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라 아마 나무가 있는 것도 모를 것이다. 옆으로 다가온 성화가 나란히 붙으면 약속이라도 한 듯 시선이 마주쳤다. 성화는 흩날리던 벚꽃에서 홍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예쁘다. 이번에도 주어가 숭덩 잘린 문장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부러 단어를 삼켰다는 것.
이 시간대의 학교는 늘 주황빛으로 물든다.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갔을 즈음엔 붉은색에 가깝다. 홍중은 시간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목을 물들인 열기는 들키기 전에 숨길 구석이 필요했고, 다행히 오늘은 날이 좋았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어두워져 하늘빛에 묻히는 것도 못 할 뻔했다.
“너는, 주변이나 잘 보랬더니 왜 안 보고 있어.”
“아무도 안 오던데.”
“나도 그렇게 마음 놓고 있다가 들킨 거잖아.”
성화의 볼 한 쪽이 움푹 패였다. 맞네, 미안. 다음부터는 제대로 볼게. 한 걸음 이르게 찾아온 완연한 봄. 성화의 머리 위로 꽃잎은 계속해서 비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화끈거리던 열기는 가슴께로 내려간 건지 자꾸만 간지러운 탓에 홍중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제 모습을 찾은 벚나무는 그저 고고하게 아름다움을 펼친 채였다.
“홍중아, 그거 알아?”
“또 뭘.”
떨어지는 벚꽃 잡으면 소원 이뤄지는 거. 묻는 말투에는 웃음기가 서려있었다. 홍중은 부러 투덜거렸다. 거짓말 치지 마. 처음 듣는데? 아냐. 진짜라니까. 정말 잡기라도 하겠다는 양 주먹을 쥐었다 피던 성화가 갑자기 벚나무 아래로 뛰어들었다. 가방이 요란하게 들썩이는데도 꽃잎 하나 잡겠다고 팔을 크게 휘둘렀다. 겨우 빗겨난 시야에 또 다시 성화가 침범했다. 헛웃음이 삐져나왔다. 쟤 진짜 바보 아냐? 피하던 것도 잊고 팔짱 끼고 관망하면 몇 걸음 앞에서 까닥이는 손이 있었다.
“우리 내기하자. 먼저 잡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야, 왜 매번 네 맘대로…!”
늘 하던 대로 무시하기엔 성화의 눈빛이 꼭 별처럼 빛이 나서. 도발하듯 움직이는 손가락이 어쩐지 얄미워서. 그리고 흐드러진 분홍을 배경으로 서있는 걔의 모습이 너무….
홍중은 긴 숨을 들이키다 도로 내쉬었다.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 이거지. 주먹을 그러쥐고 팔을 붕붕 돌렸다. 번뜩이는 눈이 정확히 성화를 노려보다 젖힌 목을 따라 꽃잎을 쫓았다.
20.
결과는 당연히 실패였다. 오랜만에 나름 승부욕이 올라 열심히 뛰었지만 실속이 없었다. 꽃잎은 손을 뻗는 족족 손가락 틈새로 전부 빠져나가기 바빴다. 초속이 고작 오 센티미터라면서 그거 다 잘못된 사실 아니냐는 원망도 곁들였다. 이제는 방전되어 남은 체력도 없었다. 홍중은 결국 두 손 들어 손사래를 쳤다. 눈을 질끈 감아 무릎을 짚었다.
바닥에 깔린 블록만 보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시야에 하얀 손등이 불쑥 끼어들었다. 뭐냐고 묻기도 전에 뒤집힌 손 안에는 벚꽃잎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혹여나 날아갈까 엄지로 살짝 누른 채였다. 어? 놀라서 숙였던 몸을 일으키자 성화는 언질도 없이 무릎 위에 있던 홍중의 손 하나를 들어올렸다. 상황을 파악하느라 눈만 깜빡이다 보면 꽃잎은 어느새 홍중에게로 옮겨져 있었다.
“내가 이겼다.”
“근데 이걸 왜 나를 줘?”
“생각해 보니까 지금은 소원이 없어서.”
성화가 어깨를 으쓱였다. 혹여나 넘기는 사이에 놓칠 새라 똑같이 홍중의 엄지를 들어 고정까지 시키면서였다.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성화의 손은 꽤 차가운 편이었다. 스치는 족족 낮은 온도에 퍼뜩 정신을 차린 게 벌써 여러 번. 생긴 것만 보면 따뜻할 것 같았는데 이마저도 의외였다. 홍중은 가만히 엄지 아래에 끼워진 꽃잎을 매만졌다. 부들거리는 감촉이 살갗을 타고 간지럽게 번졌다. 반복하다 보면 손바닥에 미미하게 남아있던 성화의 냉기가 조금씩 사라졌다.
오묘하게 이어지던 적막은 성화가 먼저 깼다. 장난 섞인 말투였다. 나는 또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홍중이 너는…. 싱숭생숭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죽는다 진짜. 겨우 이걸로 사람을 놀려먹어? 희번뜩 뜨인 눈이 늘 보던 홍중이었다. 키득이던 성화는 홍중을 피해 진작에 멀어져 걷고 있었다.
잔뜩 부풀었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괜시리 짜증이 솟았다. 짜증의 원인은 저만치 작아져서는 표정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리는 또 쓸데없이 길어선.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팔이 얄밉기 짝이 없었다. 박성화 거기 딱 서라! 홍중은 지지 않고 성화의 뒤를 쫓았다.
꽉 쥔 주먹 사이를 여전히 간지럽히는 벚꽃잎을 놓칠 새라 손가락을 고쳐 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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