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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구합니다>, R0ZETA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6월 21일
  • 10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2년 6월 23일


에... 안녕하세요? 저는 김홍중이고요. 직업은 사람을 구하는 그런 일해요. 그게 뭐냐고요? 그냥 말 그대로 사람을 구합니다. 소방관이나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길가에 흔하게 있는 히어로 117 정도 됩니다. 히어로는 일을 어떻게 하냐고요? 어... 에어팟을 끼고 길거리에 돌아다니면 무전이 날아옵니다. 어디로요? 에어팟으로요. 아무튼 무전이 날아오는데, 그냥 대충 대답하고 그 구역으로 가면 됩니다. 그리고 히어로가 하는 일은 별로 없어요. 그냥 무전 받고 빌런 잡고 사람들 구하고... 끝이랄까.


- A-19. 여기는 A-19. 빌런 한 명과 대치 중. 광역 능력 히어로 지원 바람. 응답 바랍니다.


이렇게 무전이 오고 뭐... 찾는 조건이 맞으면 가면 됩니다. 안 맞으면 무시해도 돼요. 차피 가 봤자 짐만 되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는데 제가 그 광역 능력 히어로네요. A-19 구역이면 멀지도 않으니 제가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 히어로 H, 지원 가겠습니다. 물 또는 대지 능력 히어로 근처에 있으시면 대기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대충 응답 때리고 나면 발로 뛰어야 하는데 귀찮으니 택시를 타고 가죠. 다른 놈들은 다리에 부스터 달고 다니던데... 저는 그런 거 쪽팔려서 잘 안 해요. 무겁기도 하고. 아무튼 택시 타고 가는데 운이 안 좋으면 택시 기사가 빌런일 때가 있습니다. 멋모르고 사건 현장으로 가는 손님을 인질로 잡으려고 하죠. (하하, 넌 이제 붙잡혔다! 죽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 네네, 지금처럼요. 이놈의 빌런들은 제 목에 걸린 히어로증은 보이지도 않나 봅니다. 히어로 치고 평범하단 소리는 못 듣고 사는데 그게 빌런들한테는 소문이 안 전해는 걸까요. 무지한 빌런 때문에 오늘도 차 한 대가 폐차장으로 가겠군요. 제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 문어... 문어야, 이거? 아무튼 문어인지 주꾸미인지 모를 빌런을 대충... 진짜 그냥 대충 통구이로 만들고 택시에서 내렸습니다. 특별히 통구이 비용은 안 받을게요. 택시비랑 쌤쌤 쳐.


“길을 트지 않으면 이 인간들은 죽는다!“


따끈하게 익은 택시에서 내리면 흔한 악당 멘트를 치고 있는 빌런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번엔 오징어네요. 이래서 다리 많은 놈들은 안 돼. 포도맛 풍선껌을 씹으며 껄렁하게 오징어만 쳐다보고 있음 대기하고 있던 히어로들이 저한테 각자의 무기를 겨눕니다. 예에, 빌런으로 오해하고요. 빌런이나 히어로나 눈깔을 다 파버려야 돼. 목에 걸고 있는 히어로증을 딸랑딸랑 흔들면 그제야 말을 붙여옵니다.


“H?"

“예. 제가 H인데요. 저거 그냥 지져버리면 되는 거죠.”

“아니, 안 돼요. 인질이 있잖아요. 인질 확보 후에 공격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뭐래. 그러다 인질 다 뒤지겠네. 비켜 봐요. 시말서는 안 쓰게 해 드릴 테니까 방해하지 마세요.”


이럴 때 보면 히어로는 진짜 멍청한 것 같습니다. 지시가 없으면 우선 순위도 못 따지는 놈들이 뭔 히어로래. 히어로 학교 졸업 과정을 더 빡세게 해야 한다니깐. 걸리적거리는 히어로를 옆으로 다 치우고 깨끗해진 시야로 빌런에게 붙잡힌 인질을 확인합니다. 보자, 인질은 총... 3 명이네요. 다리에 야무지게도 끼워 놨... 뭐야? 쟤네가 왜 저기에 잡혀있어. 아까 무전으로 대기하라고 했던 물이랑 대지 능력 히어로가 왜 오징어 다리에 칭칭 감겨있는지 아시는 분이 계시면 빠른 답변 부탁드립니다. 내공은 없고요. 원한다면 제 히어로증이라도 드립니다.


“홍ㅈ... 아니, H! 구해 주세요!”


예에, 저는 히어로명 H고요. 사람을 구합니다. 가끔은 같은 히어로도요.






사람을 구합니다.

w. zeta





“송민기, 강여상 너네 왜 거기 있냐. 세 단어로 설명해.”

“아, 형! 히어로명으로 불러 주세요!“

“송민기. 급발진. 현재!”


야! 그걸 말하면 어떡하냐! 어쩌긴 뭘 어째. 저 오징어 새끼 버터구이로 지져 먹고 너도 지져야지. 송민기 쟤는 같은 바다 생물이면서 오징어도 제압 못 해? 범고래라며. 오징어 하나도 못 잡냐고. 딱, 딱. 풍선껌을 소리나게 씹다가 이마를 한 대 빡 때렸다. 걍 여상이만 오라고 할 걸. 손가락 끝에 쥐꼬리만한 불을 붙이고 손가락을 붕붕 돌렸다. 일단 작게 한 대. 손끝을 오징어 정수리에 초점을 맞추고 불을 날릴려고 하면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 인질! 우리 말고 인질!”

“민간인 인질이 있어요. 일단 인질부터 풀어주고!"

“너네 입 다물어. 초점 빗나간다.”


풀어주긴 뭘 풀어 줘. 알아서 잘 빠져나가겠구만. 손가락 끝에 붙은 불씨를 잘 조준해 허공 딱밤을 날렸다. 빠른 속도로 날아간 불씨가 빌런의 이마에 안착하고 이내 불씨는 빠른 속도로 몸집을 키워갔다. 건조한 날씨 덕분인지 평소보다 배로 빠르게 커져가는 걸 보며 불멍하기 딱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 그러기엔 불이 조금 큰가? 꽤 고통스러운지 이리저리 몸부림을 치는 오징어를 보다 단물 빠진 껌을 뱉고 새 껌을 입에 우겨넣었다. 아무래도 고통스럽겠지. 오징어니까. 해양생물은 종족 특성상 불에 약하다. 체온이 인간보다 낮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뜨거우면 데미지를 입는 게 저, 오징어란 말이지. 때 아닌 해양 생물 관찰 및 분석을 하고 있으면 탄 오징어 다리에서 해방된 여상과 민기가 우는 소리를 내며 뛰어왔다.


“혀어엉 ㅠ 죽는 줄 알았.... 아! 맞다. 인질!”

“걔 안 구해도 돼. 빨리 비켜라. 남은 오징어 통구이 만들게.”

“아니, 형은 히어로란 사람이 민간인을 위험에 처하게 해요?"

“뭐라는 거야. 누가 민간인인데.”


너네랑 같이 잡혀있던 걔? 걔도 히어로야. 바보들아. 내 말이 끝나자마자 까만 오징어 다리가 들썩거리더니 그 아래에서 까만 머리의 남자가 튀어나왔다. 것 봐. 안 죽었잖아. 어색한 웃음을 짓는 남자와 벙찐 둘, 그러니까 바보 총 세 명. 그 세 명이 앞을 전혀 피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아 귀찮지만... 친히 발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나중에 송민기 타고 집 가야지. 여상이한테는 밥 얻어먹어야지. 잰걸음으로 오징어 앞에 가니 꽤 맛있는 냄새가 났다. 갑오징어인가? 냄새가 좋네. 별로 안쓰럽지 않게 몸부림 치는 오징어를 아까 문어처럼 대충 통구이로 만들고 뒤에 있는 송민기 어깨를 붙잡았다.


"민기야, 가자."

"형... 저 또 타고 가시게요?"

"엉. 살려준 보답."


눈물도 안 나오면서 우는 시늉을 하는 송민기의 등에 그냥 냅다 매달리면 민기가 한숨을 쉬고 자연스럽게 다리를 잡아왔다. 범고래는 이게 좋아. 안전하게 송민기 등에 업혀 집에 갈 준비를 하면 여상이 수줍에 손을 뻗어왔다. 민기야 나도.... 아, 두 명은 안 돼! 동물화 하던가. 등에 가만히 업혀서 딱딱한 시멘트가 물렁물렁한 바다로 바뀌는 걸 보고 있으면 민기가 한숨을 푹 쉬고 동물화를 시작했다.


"야, 나는 내려놓고 해야지!'

"알아서 내려가요...."


씨발. 시멘트를 바다로 바꿔놓고 알아서 내려가라 막 이러네. 흐물거리는 송민기를 잡고 안절부절 못 하고 있으면 여상이 헤헷 웃으며 민기가 만든 바다를 흙으로 덮었다. 형, 이걸로 살려준 거에 대한 보답했어요. 아, 밥 뜯어먹을랬는데.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여상이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민기의 등에서 내려와 젖은 옷을 툭툭 털어냈다. 뼈가 꺾이는 소리와 그 소리에 걸맞게 다이나믹한 동물화 장면은 그닥 보고 싶지 않아서 등을 돌리면, 뒤에서 까만 머리를 털고 있는 걔가 보였다. 탈탈 털면 털 수록 머리카락에 쌓인 까만 재가 우수수 떨어졌다. 아, 까만 머리가 아니라 재 때문에 머리가 까만 거였구나. 거뭇하게 보이는 분홍빛 머리를 신기하게 보고 있으면 불쑥 고개를 든 분홍 머리와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 말하려는지 입만 달싹이며 주춤거리는 분홍 머리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애먼 송민기가 지느러미로 나를 툭툭 쳤다. 형 가요. 벌써 범고래, 아니 그러니까 송민기 등에 타고 기다리는 여상이의 목소리에 몸을 완전히 돌렸다. 할 말이 있음 빨리 했어야지. 누군가 나에게 할 말이 있단 사실보단 빠른 퇴근이 중요한 현대 사회의 히어로는 갑니다. 아, 바쁘다. 바빠. 히어로 사회.


"어, 어.... 저기요!"

"예에. 저기는 갑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대충 화답을 해 주고 민기의 등에 올라타면 송민기는... 아니 범고래는? 아무튼 시멘트를 물로 덮으며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아, 좋다. 범고래는 역시 좋다니까. 시몬스 뺨 치는 이 안정감. 택시를 치타 말고 범고래가 해야 하는 거 아냐? 온 동네를 물바다로 만들어서 안 되려나. 신기해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온 몸으로 받으며 기지개를 쭉 폈다. 오늘은 이만 퇴근하니까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일은 꿀 같은 휴무니까 귀찮은 일이 안 생겼으면 좋겠고. 그냥 매일 안 귀찮게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네.



"안녕하세요. 그... 저기 님."

"..."

"어제 구해주신 히어로입니다."


귀찮은 일 생기지 말라고. 눈꼽도 못 뗀 휴일 아침부터 귀찮은 일 꺼지라고. 푹 눌러쓴 후드에 무릎이 잔뜩 늘어난 트레이닝 차림은 보이지도 않은지 안녕하세요?어제구해준똥입니다 같은 말투로 자신을 소개한 분홍 머리를 두고 가던 편의점을 다시 찾아갔다. 네가 히어로고 나발이고 나는 오늘 맥주나 빨면서 밀린 영화 보다가 잘 거랍니다. 눈도 안 마주치고, 대꾸도 안 하고 휙 지나쳤는데 자존심도 없는지 그 분홍 머리는 다시 내 발길을 붙잡았다.


"저 좀 도와주세요. 저도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요."

"02-1557-0404"

"네?"

"히어로 능력 센터 번호요. 거기에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하세요."


저는 그냥 월급 받으면서 일하는 일개 직원이라, 남 도울 처지는 안 되거든요. 물론 직업이 히어로라 남을 돕기는 하는데... 그게 같은 히어로한테도 적용되는 건 아니거든요? 아무튼 전 갑니다. 민첩한 히어로 생활하시길. 한때 꿈이 래퍼였던 실력을 살려 분홍 머리에게 빠르게 번호를 읊어주고 몸을 휙 돌렸다. 한 번 더 잡으면 같은 히어로고 뭐고 불로 지져버릴 거야. 징계? 끽 해 봤자 근신일 텐데 오히려 좋아. 기왕이면 죽을 때까지 근신이었음 좋겠다.


"H 님...... 저, 진짜 간절해요."

"... 갑자기 왜 저를 잡고 우시는 건데요."


훌쩍. 훌쩍훌쩍훌쩍. 훌쩍. 아, 알겠어요. 손목을 쥔 손을 떼지도 않고 눈물을 뚝뚝 떨구는 분홍 머리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날렵한 얼굴이 동그란 찐빵이 될 때까지 울고 있는 분홍 머리를 달랠 자신은 없어서 잡힌 손목 그대로 끌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입에 쭈쭈바라도 물려주면 안 울겠지. 귀찮음에서 비롯된 굉장히 편협한 판단이었지만, 가끔은 편협한 생각이 잘 먹을 때가 있다. 지금처럼. 탱크보이 하나 입에 물려주니 조용해진 분홍 머리를 두고 갈까... 하다가 또 찾아와 눈물을 떨굴 것 같단 생각에 작업실로 분홍 머리를 끌고 갔다. 집에 데려가는 건 좀 에바고. 물론 그래봤자 작업실 위층이 집이지만.


"그래서, 뭘 어떻게 도와달라고요?"

"저도 사람을 구하고 싶어요. 현장에 나가면 매번 다른 히어로분들께 도움만 받고...."

"능력은 있어요? 있으니까 히어로가 됐겠지만서도."

"네에... 엡. 비행이요."

"비행? 꿀이네요. 그걸로 민간인들 대피 도울 수도 있고 히어로들 이동도 도울 수 있는데.“


근데 이제... 아니, 그게요.... 답답한 걸 싫어하는 홍중의 성격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끝을 늘린 채로 뒷말을 삼킨 분홍 머리에 홍중이 소파에 누워있던 몸을 세워 탁상을 일정하게 두드렸다. 딱딱. 나는 지금. 탁탁. 짜증이 나니까. 딱 딱 딱 딱. 빨리 말해. 손톱과 책상이 부딪히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분홍 머리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쟤 왜 저래. 그냥 보낼까. 진심 휴무에 이러는 거 개피곤한데.


"저기요. 말 안 할 거면 그냥 가...."

"...... 티밖에 못 날아요."

"네?"

"50 센티밖에 못 난다고요!"


... 아, 씨발 저것도 히어로 능력이라고. 분홍 머리가 두눈 꽉 감고 내지른 말에 골이 띵- 하게 울렸다. 아... 진심, 차라리 휴무 반납하고 일하고 싶다.



"형, 옆엔 누구예요? 친구?"

"에이, 홍중이 형이 친구가 어딨냐. 오다가 구출한 민간인이겠지."

"너 죽는다, 진짜."


팀 없이 활동하던 히어로 H, 팀원 한 명이 생겼습니다. 근데 이제 그 팀원이 도움이 되지는 않는. 능력이 뭔지 알게 된 날, 홍중은 빠르게 손절 치고 히능향센(히어로 능력 향상 센터. 주로 능력 센터라고 하나, 홍중은 꼭 히능향센이라고 부른다.)에 보내려고 했는데 또 찐빵처럼 울먹이는 분홍 머리 탓에 먹다 만 탱크보이를 다시 입에 물려줘야만 했다. 그리고는... 그냥 다들 생각하시는 것처럼 이렇게 됐습니다. 평생 이 잠자리보다 낮게 날아다니는 짐짝을 데리고 다닐 수는 없어서 딱 한 달. 한 달만 팀원으로 지내기로 했었다. 물론, 홍중은 그 약속을 하자마자 후회했지만.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박성화입니다. 인사가 늦었지만... 저번에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저번에? 저희가 언제...."

"어, 아! 그 문어에 같이 잡혔던!"


그랬던 네가 왜 여기 있어? 하는 눈빛을 숨기지 못한 민기에 분홍 머리... 아니지, 성화는 그저 하하 웃으며 숨어지지도 않으면서 홍중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성화가 홍중의 등 뒤로 숨자 얼른 이유를 설명하라는 듯한 네 개의 눈동자에 홍중은 한숨을 푹 쉬고 풍선껌을 입에 물었다.


"잠자리 하나 임시보호 하게 됐다."

"네?"

"혹시 제가 그 잠자리인가요?"

"아니, 형 그게 무슨 말인...."


얼빠진 민기와 여상일 두고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면 따라붙는 발소린 없지만 뭔가 따라오고 있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박성화 내려와라. 능력은 자꾸 써야만 향상된다면서요. 그건 그런데, 그게 날 따라올 때 쓰란 말은 아니거든. 네가 유령이야 뭐야. 그냥 걸어. 홍중의 말에 대답 없이 땅에 발을 붙인 성화는 혹시라도 놓칠까 싶어 땅에 발이 닿자마자 홍중의 뒤에 따라붙었다. 뒤에서 왁왁거리며 소리 지르는 민기의 목소리도 따라붙었으나 들리지 않은 척했다. 저거 분명 자기들도 같이 팀 하자는 말이다. 절대 안 되지. 귀찮은 건 딱 질색인데.




원치 않게 분홍 머리 박성화와 다니면서 알게 된 것들은 참 많았다. 첫 번째는 이름이 분홍 머리가 아니라 박성화라는 것. 당연한 거지만 이미 분홍 머리라는 호칭에 익숙해졌던 홍중은 이름 부르는 걸 꽤나 어려워했다. 분... 성화야. 홍중이 이름을 못 부르는 덕에 얼떨결에 분성화가 되고, 분홍성화가 되어도 성화는 군말 없이 박성화요- 하고 정정해줄 뿐이었다. 그게 홍중의 미안함을 자극시켰고 며칠의 실수 끝에 성화야- 하고 부드럽게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집안일의 달인이라는 것. 히어로 일 특성상 밤 늦게까지 일하고 아침 일찍 출동하는 경우가 잦아 홍중의 작업실에서 성화가 자고 가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재워준 값이라며 텅텅 빈 냉장고를 채워서 아침을 차려주고, 자신의 옷을 세탁해야겠다며 쌓인 빨래도 돌려주고. 호출 전까지 어떻게든 더 누워있으려는 홍중의 의지와는 다르게 성화는 호출 전까지 어떻게든 돼지우리 같은 작업실을 더 치우기 바빴다. 소파에 홍중이 늘어져있고 성화가 청소기를 돌리는 광경이 익숙해질 때쯤 홍중은 우스갯소리로 '성화야, 우리 같이 살까.' 하곤 했다. 정말 우스갯소리고, 정말 장난으로 한 말이었다. 성화도 그렇게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 성화야 너 먼저 센터에 가 있어. 나 히어로증 두고 왔다."

"괜찮아. 내 거 챙기면서 같이 챙겼어."


세 번째는 사람이 쓸모없이 다정하는 것. 필요 이상으로 박성화는 다정했다. 꼼꼼한 성격이 다정함에도 물들어있는 건지 김홍중을 꼼꼼하게 그리고 다정하게 챙겼다. 김홍중과 박성화가 팀을 이룬 후부터는 홍중이 수시로 두고 오던 히어로증은 성화의 히어로증과 함께 목에 걸리게 되었다. 이것들 말고도 김홍중은 박성화와 함께 다니면서 아주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말이다. 예를 들어... 박성화는 분홍 머리가 잘 어울린다는 것과 홍중이 잠들기 전에 꼭 찾아와 굿나잇 인사를 몰래 건네는 것... 이런 아주 사소한 것들도 김홍중은 다 알게 되었다. 김홍중이 알게 되지 못한 성화의 사소한 것들은 없었다. 그렇게 김홍중이 박성화를 알아가는 동안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더이상 알아가기만 하는 것은 안 된다고 하는 것처럼.



"야, 성화야. 우리가 같이 다닌 지 얼마나 됐지."

"어... 이제 곧 한달이지."

"한달동안 우리 몇 명의 빌런을 잡았지."


대략 43명 정도. 어느날처럼 소파에 늘어진 홍중은 당연하게 청소기를 돌리던 성화의 앞을 다리로 턱 막았다. 성화야 우리 대화 좀 하자. 앞을 막고 일방적으로 질문을 쏟아내던 홍중의 모습을 보다 말이 금방 끝나지 않을 것을 예감한 성화가 홍중의 맞은 편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나 이거 하고 빨래도 돌려야 하는데.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대화부터 해. 웅. 얌전히 다리를 모으고 소파에 앉은 성화는 주위를 둘러보다 물티슈 한 장을 꺼내들었다. 탁자 닦으면서 들어도 되지? 뽀닥뽀닥. 먼지 한 톨도 없는 (것으로 추정되는) 탁자를 힘 줘서 닦는 성화를 보다 홍중이 한숨을 푹 쉬었다. 지금 내가 이런 애한테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그 잡은 빌런 중에서 네가 잡은 빌런은?"

"... 없는데. 혹시 나 혼내려고 부른 거야?"

"딱히 혼내는 건 아니고. 그럼 네가 구한 사람은?"


진짜 혼내는 건 아닌데. 홍중이 자신을 혼내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성화는 말 없이 물티슈를 고이 접어두고 양손을 슬그머니 무릎 위에 올렸다. 구한 사람도... 없지. 개미 기어가는 소리가 더 클 정도로 작게 대답한 성화는 입도 앙 다물고 가만히 앉아있는 홍중의 눈치를 봤다. 아니, 진짜 혼내는 거 아니라니까. 잔뜩 움츠러든 성화를 보다 홍중이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내가 얘기하려는 건 이런 방향이 아니라고. 길게 한숨을 푹 쉰 홍중이 몸을 일으켜 허벅지에 턱을 괴고 성화를 빤히 쳐다봤다. 뭐라고 말해야 네가 오해를 안 할까.


"성화야."

"...... 응? 아니, 나 진짜 능력도 계속 쓰면서 단련하고 있구.... 센터도 다니면서 코스튬 무기도 제작하려고 하고 있고...."

"우리 그냥 같이 살까."

"내가 더 잘ㅎ, 어? 뭐라고?"


우리, 같이, 살까. 우리 곧 약속한 기간 끝나잖아. 그래서 내가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나는 너 없으면 불편할 것 같아. 너 없으면 누가 내 히어로증 챙겨주고, 네가 없으면 나 계속 빌런으로 오해 받는데 누가 대신 해명해 줘. 성화야 넌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고 했잖아. 히어로는 사람들을 구하니까. 근데 히어로는 사람을 구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그 사람이 같은 히어로여도 되는 거잖아. 여러 사람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이기만 해도. 성화야 나는 너 없으면 못 살아. 네가 나를 살려줬으면 좋겠어. 나 몸값 비싸. 한 달동안 네 뒷꽁무니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태우고 태우면서 너 살려줬는데, 나 살리기 싫으면 그 값 치루는 거라고 생각해. 평생을 걸쳐서 내 몸값 갚아. 근데 안 싫었으면 좋겠다. 난 싫은 사람 작업실에 재워주고, 옆에 데리고 그러진 않거든. 나는 네가 좋아. 처음부터 그랬을 수도 있어. 네가 우는 게 그저 귀찮다고만 생각하고 넘긴 그 순간부터. 네가 잘 자라고 몇 번이고 몇 밤이고 챙겨준 날엔 확신했고.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고, 불편한 부탁일 수도 있는 거 아는데... 단 한 명뿐인 사람이 되어 줘.


"나에게, 나만의 히어로가 되어 줘, 성화야."






ᓚᘏᗢ


"여~ H&M!"

"이 더운 날에 통구이 되고 싶어서 죽겠지?"

"아뇨. 죄송합니다."


박성화와 김홍중, 이름하여 H&M. 생각보다 팀으로 잘 다니는 홍중과 성화를 보고 여상이 지은 팀 이름이었다. 뜻은 아주 단순하게 히어로와 민간인. 히어로 팀인데 매번 현장에서 성화를 구하러 다니는 홍중을 보고 저 정도면 히어로랑 그냥 민간인 아냐? 하는 민기의 물음에 감명을 받았단다. 물론 홍중은 그 팀 이름을 듣자마자 불같이 화를 냈었지만, 평소에도 불같이 화내는터라 통하진 않았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여상과 민기가 목숨 걸고 H&M이라고 부른 덕에 둘은 야금야금 팀 H&M으로 이름이 알려지는 중이었다. 정말 야금야금 알려져서 아직 아는 사람은 센터장과 민기, 여상밖에 없지만. 그렇지만 곧 온 동네 사람이, 온 세상 사람이 알게 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오늘은 히어로 팀 H&M이 공식 팀으로 활동하는 첫날이니까.



예, 저는 팀 H&M에 소속된 히어로 H고요. 사람을 구합니다. 가끔은 같은 히어로도요. 그리고 정말 가끔은 사랑도 구합니다.








-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R0ZETA입니다! 봄호에 이어 여름호에도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네요. 봄호엔 정신이 없어 따로 후기를 보내지 못했는데, 여름호엔 이렇게 후기를 남길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에요. 명필을 써내려가는 분들 사이에서 누추한 글을 올려도 되나... 싶은 마음이 크지만 욕심을 한 번... 이 아니라 두 번이나 내어봤습니다. ㅎㅏㅎㅏ...♡


지난 봄호의 이야기는 꺼내긴 늦었구, 이번 여름호의 얘기를 조금만 꺼내볼게요. <사람을 구합니다>는 언젠가 한 번 써보고 싶은 히어로물이었어요. 하찮은 능력을 가진 히어로가 강한 능력의 히어로를 자신의 삶으로 물들여 구해낸다는 건 꽤나 재밌는 일이잖아요. 한 편에 다 담아내고 싶어 꽉꽉 채워넣다 보니 생략된 부분이 많아 주제의 재미가 잘 느껴졌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은 글이지만 최선을 다해 적었으니 나쁘지만은 않게 봐 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저번 봄호를 이어 여름호도 얼렁뚱땅 말썽쟁이처럼 엔딩을 냈지만... 그래도 재밌게 읽어주시길 바랄게요.


요새 날이 많이 더워졌어요. 올해는 여름이 늦게 오는 만큼 많이 짖궂은 더위가 따를 것 같네요. 쉽고 가볍게 읽기 좋게 최대한 글을 풀어냈으니, 읽는 동안 이번 여름의 더위를 잠시라도 잊으실 수 있길 바라요.


아직 미흡하고 부족한 제 <사람을 구합니다>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횡설수설하는 이 후기를 읽어주신 것도요. 성홍러분들도 히어로처럼 사람을 구하진 못 해도, 사랑만큼은 구하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앞으로도 늘 사랑하고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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