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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be)연애>, 이레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12월 22일
  • 6분 분량




걔랑은 언제부터였더라. 어떻게 친해졌던 거였지. 누군가 나에게 걔와 함께한 모든 처음을 다시 떠올리라고 한다면, 나는 한참을 겨우 생각해야 입을 뗄 수 있을 것이다. 걔와 수많은 처음을 함께 했고, 기억나지 않는 어릴 적부터 서로가 당연한 존재였으니까. 옆집으로 시작해 같은 반, 짝꿍을 거쳐 25살이 된 지금까지. 몇 년 지기라는 수식어도 불필요한 사이. 둘 사이를 묻는 아무개가 있다면 걔는 항상 나를 형, 가족 따위로 서술했다. 사실은 형도 가족도 아닌 사이에. 김홍중은 나에게만 각별하면서도 나에게만 긋는 선 또한 분명했다.



난 김홍중이 하는 사랑을 언제나 지켜봤다. 그리고 걔가 하는 사랑이 친절하고, 다정하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았다. 친구로서의 김홍중이 어떤 사람인지를 너무 잘 알아서 보이는 차이였다. 걔는 언제나 자기가 하는 사랑에 최선을 다 했고, 언제나 순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그 사랑을 받는 놈들은 그 사랑을 족족 내치기만 했다. 걔가 전 애인이라는 놈에게 온갖 생채기가 나서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한밤중에 내 자취방을 두드렸을 때도 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김홍중이 아무 말 듣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내가 제일 잘 알았기 때문에. 걔랑 길을 지나다 김홍중의 애인이라는 놈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뻔히 봤을 때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김홍중이 가타부타 말 얹는 것을 싫어할 거니까. 혼자 해결하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이제 와서 솔직히 내 생각을 말하자면, 난 그냥 그 자리에서 그 새끼들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상상을 했다. 김홍중이 사랑에 상처를 받으면 회복하는 시간은 더뎠지만, 연애를 그만두는 일은 이제껏 없었다. 그리고 난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 나 이제 연애 안 해. "


" ...... 뭘 안 해? "


" 연애. 이것도 이제 할 만큼 하니까 질린다? 사랑도 병이야. "




3년 전 박성화 짝사랑 인생 1n 년차. 최대 난관 봉착의 순간이었다.




3년 전에 김홍중이 비연애를 선언했다. 원체 낯선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자신만의 영역에서 가장 온전함을 느끼고 안정감을 느끼는 홍중을 잘 알았지만 이렇게 굳건하게 비연애를 선언한 홍중은 또 처음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신념을 버리지 않았고, 그렇게 박성화의 짝사랑도 현재진행형이었다. 하지만 성화는 홍중을 알아도 너무 잘 알았다. 말은 비연애를 선언했으면서 홍중이 3년 째 외로움을 타고 있다는 사실을. 외로움에게 홍중이 치명상을 입을 때마다, 이겨내려 혼자만의 동굴인 작업실에 틀어박힌 홍중을 매번 끄집어내는 것도 박성화였다. 홍중이 웬만한 방면에서는 똑 부러지는 성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정반대을 가지고 있었던 걸 누구보다 성화가 잘 알았으니까.




“ 내가 애야? 혼자 있고 싶다고. ”


“ 홍아. 나 친구 없어서 밥을 못 먹었어. ”


“ ...... 장난하냐? ”


“ 진담인데, 나 친구 너밖에 없잖아. 밥 먹자. ”




홍중은 성화에게 소리도 질러봤다. 성화 앞에서 눈물도 쏟아봤다. 그리고 상처 주는 말도 했던 것 같다. 나 좀 가만히 두라고...... 혼자 있는다고. 그만 와.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그만 좀 해. 그런 얘기를 수도 없이 들어도, 성화는 그만 할 수가 없었다. 홍중을 혼자 둘 수가 없었다. 첫 번째, 제일 근본적 이유. 박성화는 스스로를 김홍중이 없으면 불온전한 존재라 느꼈다. 두 번째,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이유. 홍중은 스스로 느끼는 감정들을 작업물로 풀어냈다. 외로움을 느끼면 고스란히 그 감정이 느껴지는 음악들을, 애정을 느끼면 들으면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음악들을. 비연애를 선언한 뒤로 홍중의 노래들에는 밝은 분위기가 좀체 나타나지 않았고 그 노래들을 찍어내느라 며칠 밤을 새고 끼니까지 거르고 작업실에 틀어박히는 홍중을 걱정하는 건 성화의 본능이었다. 홍중이 성화를 밀어낼 때마다 감정이 악에 받친 홍중을 안아달래는 것도 오롯이 성화의 몫이었고. 홍중은 성화가 자신을 안고 토닥일 때마다 그 품에서 진정을 하고 안정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한다. 또 박성화에게 괜한 성질을 부렸다, 또 잘못도 없는 박성화한테......




결국 김홍중의 마음만 다시 차디차게 시려워진다.




김홍중을 이렇게까지 감싸안아주고 챙겨주는 것은 언제나 박성화다. 타인이 보기에도 김홍중은 박성화 없으면 한 달 내에 분명 무슨 탈이라도 날 위인이었다. 김홍중 본인도 잘 알았다. 김홍중도 스스로를 박성화가 없으면 불온전한 존재라고 생각했으니.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 시간을 넘도록 성화는 한결같이 홍중의 옆에 존재했다. 익숙하지 않다고 하면 분명한 거짓 그 자체다. 다른 사람에게 서로를 애인이라 소개해도 믿을 만큼 서로의 옆이 절실한 사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중은 성화와의 관계에 매번 친구라는 정의를 내려 선을 긋는다. 이미 박성화의 마음은 잘 알고 있었다. 사랑이 없다면 감히 하지도 못 할 짓들을 박성화는 매번 하고 있었으니까. 김홍중은 박성화랑 끝이 나는 관계를 가지기 싫었다. 이대로도 충분하잖아. 사랑하면 끝이 날 사이가 되는데 우리가 왜 그런 사이가 돼야 해. 성화는 눈시울이 붉어져 그 말을 하는 홍중을 안아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응, 그럴 필요 없지. 알겠으니까 그만 울자 홍아. 응? 홍중아...... 홍중의 어깨를 쓸어내리는 성화의 손끝이 미미하게 떨리는 건, 서로 모르는 척 넘겼다.



김홍중이 비연애를 선언한 뒤로 박성화랑 김홍중은 계속 이런 관계다. 사무치게 외로운 김홍중 곁에 항상 존재하는 박성화. 사무치게 외로움에도 사랑을 피하고,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가장해 받는 사랑을 애써 모른 척하는 김홍중. 날이 점점 차가워지고, 연말의 분위기에 사람들이 들뜨는 게 보이는 이번 겨울을 지나 해가 넘어가면 이대로의 관계가 4년을 맞이한다. 이번 주 주말이 크리스마스 주간이라던데, 박성화 바쁘려나. 성화가 연말을 맞아 팀에서 가장 바쁠 시기다. 그러고 보니 핸드폰에 쌓인 연락은 한가득이었지만 직접 얼굴을 본 건 꽤 지났다. 시간이 많이 늦지만 않으면 퇴근길에 항상 홍중의 작업실에 들렀다 가는 것이 성화의 루틴이었는데도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꽉 틀어막힌 작업실의 환기구 같은 존재가 일시정지 상태다.



홍중의 작업실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은 한 손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시즌 송이 남발하는 요즘에는 홍중의 작업이 밀릴 일도 없어 그마저도 성화가 전부인데, 성화조차 얼굴을 비추지 않으니 허전함을 느끼는 건 당연지사였다. 문자 알림음이 띠롱, 띠롱 울린다. 보나마나 박성화겠지만...... 이따 답장하면 되겠지, 싶은 마음으로 일부러 연락을 확인하지 않았다. 산책이라도 할 겸 작업실에서 나와 왼쪽으로 조금 걸으면 나오는 작은 카페에서 핫초코를 한 잔 사 들고 한적한 공원으로 향한다. 손도, 귀도, 코도 시렵지만 핫초코를 위안 삼아 곧 얼어버릴 것만 같은 공기를 한 숨 크게 들이쉬고 타박타박. 트랙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 공원 중앙에 크게 설치된 트리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성화 저런 거 좋아하는데......




무의식적으로 드는 생각들. 같이 챙겨나온 카메라로 트리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서야 발걸음을 다시 돌린다. 공원을 빠져나와 조금 번화가로 나오면 하나 둘 보이는 사람들. 들뜬 사람들의 얼굴들을 보며 덩달아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끼는 홍중이 다시 작업실로 향하는 길에 발걸음을 꽃집 앞에서 뚝, 멈춘다. 메리골드. 언젠가 성화가 자신의 탄생화라며 보여준 꽃. 꽃말이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라고 제 탄생화가 제일 좋다고 말하며 웃는 박성화의 표정이 아직도 선명히 떠오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왼손에는 다 마셔버린 핫초코 컵 대신 작은 메리골드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나 지금 어쩌자고...... 이걸 산 거지? 멍하게 꽃다발만 쳐다보다 작업실 문고리를 여니까 보이는 박성화. ...... 박성화?




“ 김홍중. 너 왜 전화를...... ”


“ 너 왜 여깄어? ”


“ 집으로 가려는데 전화 안 받길래 왔지. 어디 갔다 왔길래 손이 다 얼었어...... 이건 또 뭐고. ”




잔뜩 언 귀부터 볼을 감싸 녹이는 큰 손. 자연스럽게 손길을 내려 잔뜩 언 홍중의 손을 감싸는 성화의 손. 일련의 모든 행위가 자연스럽다. 여즉 한 손은 홍중의 볼을 감싸고 있는 성화와 눈을 맞추다 눈을 피하고 꽃다발을 넘긴다.




“ …… 선물. ”


“ 응? ”

“ 네 거라고, 이거. 내 탄생화 메리골드인지 뭔지 그거. 그냥 공원 갔다가, 내가 사려던 게 아니고 그냥 눈에 보이길래 지나가다가 네 생각 나길래...... 트리도 봤는데. 사진 찍은 거 볼래? 있어 봐. ”


“ 홍아. ”


“ 그렇게 부르지 마. 진짜 그냥 지나가다가 산 거라구...... 너 울어? ”




횡설수설하던 홍중이 꽃다발을 성화의 품으로 넘기고 다시 눈을 맞추려 하는데, 성화의 눈시울이 발갛게 달아올라있다. 맞잡은 손에서 성화의 떨림이 느껴진다. 성화가 홍중을 안아온다. 오늘도 역시나 안기는 건 저지만, 오늘따라 성화를 안아주는 기분이었다. 성화가 제발 한 번만 안아달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소리도 못 내고 눈물을 흘리는 성화 품에 안겨있던 홍중은 성화의 허리춤에 팔을 감는다. 한참을 등을 쓸어주고 나서야 말을 건다.




“ 내가 울린 거지 지금. ”


“ 진짜 내 생각 나서......산 거야? 내가 네 탄생화라서 이 꽃 좋아하는 거 기억하고 있던 거지. ”


“ ......아니라고. ”


“ 홍중이 거짓말 진짜 못 해...... ”


“ 이제 다 울었으면 떨어져라? ”


“ 홍아 나 아직 슬퍼...... 더 안아줘야 돼. ”


“ ...... 내가 미안해. ”


“ ...... 미안해 말고 사랑해라고 해 주면 안 돼? ”


“ ...... ”


“ 나 많이...... 기다렸는데 홍중아. ”



사실 알았다. 성화와 홍중은 이미 접점 없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우정으로 가장한 사랑. 박성화 하나 잃기 싫어서 비연애까지 선언한 홍중이 친구라는 선을 지우고 처음 성화에게 네 생각이 났다며 사 왔다는 꽃이 성화가 좋아한다는 꽃이었다는 것. 그 사실 하나가 성화의 마음을 벅차다 못 해 서럽게 만들었다.



“ 끝이 날 관계가 싫어. 나는 너...... 잃어버리기 싫다고. ”


“ 내가 너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




성화의 목소리가 그 어떤 때보다 확신에 차 있다.



“ 나는 너 없으면 안 돼. 너도 나 없으면 마찬가지잖아, 홍아. 나는 너한테 끝이라는 걸 낼 생각이 없어. 그러니까 우리 이제...... 사랑하자. 응? ”


홍중은 대답 대신 성화의 목에 팔을 감는다. 첫 입맞춤.



김홍중의 비연애가 be 연애가 되는 순간. 1n 년째의 성화의 짝사랑 아니, 외사랑이 끝나는 순간. 성화와 홍중. 드디어 둘이 아닌 하나로서의 첫 겨울이 시작됐다.




메리 크리스마스!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이레입니다! 계간 성홍…… 봄 호에 참여하고 꼭 한 번 더 참여하고 싶었는데 너무 너무 바빠서 겨울의 끝자락에 겨우 막차를 탔네요 ㅎ.ㅎ…… 다시 한 번 성홍러로서 많은 성홍러분들이 보실 수 있는 계간에 한 번 더 참여 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행복한 성홍과 함께 저도 한 명의 성홍러로서 겨울 호를 열심히 즐기겠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며 고생하신 편집진에게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구 싶고, 글 읽어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𝙰𝙻𝙻 𝙸 𝚆𝙰𝙽𝚃 𝙵𝙾𝚁 𝙲𝙷𝚁𝙸𝚂𝚃𝙼𝙰𝚂 𝙸𝚂 𝚈𝙾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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