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꽃과 네 이름의 소리는 같고>, 티글로리
- 계간 성홍
- 2022년 3월 21일
- 9분 분량
굿판이 벌어졌다.
30년은 족히 넘은 벚나무 앞이었다. 벚꽃잎이 아무나 잡아먹을 것처럼 마구잡이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늘 그 잎을 싫어했다. 그럼에도 너나 할 것 없이 벚나무 앞에 모여들었다. 이 굿판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북과 장구소리 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사람들의 귀를 찔렀다. 서서히 방울 흔드는 소리가 그 중심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인파의 한 가운데서 파란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가 고민도 없이 뛰기 시작했다. 남자가 흔드는 방울 소리가 누군가의 비명처럼 울렸다. 뭐가 됐든, 뭐든 다 쫓아내는 그런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절로 사람들이 귀를 막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서늘함이 돌았다. 남자는 그 중심에서 신들린 사람처럼 방울을 흔들며 제자리에서 뛰고 또 뛰었다. 곱게 감긴 눈은 다시 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개간 사업으로 싹 밀어버린 부지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이 살던 보육원이 있던 자리였다. 30명 남짓 아이들이 그 곳에서 밥을 먹었고, 잠을 자고, 자랐다. 그리고 절반 이상이 재처럼 사라졌다. 아이들을 집어삼킨 건 화마였다. 모두가 곤히 잠든 어느 가을 밤, 보육원에 불길이 일었다. 화를 예상한 듯 아이들을 도와줄 어른들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탈출한 몇 명의 아이들만 겨우 살아남았다. 당연한 수순처럼 살아남은 아이들은 마을을 떠났다. 그 누구도 살아남은 아이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마을에 남겨진 화재의 여파였다.
보육원이 있었던 마을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때 죽은 아이들이 다 벚나무에 붙어갔다고. 보육원 운동장에 있던 유일하게 우뚝 솟아있던 나무였다. 육체는 불 속에서 재가 됐지만, 영혼은 억울해 거기에 붙어갔다고. 그래서일까. 그 벚나무의 꽃잎들은 유독 붉었다. 봄마다 피눈물같은 벚꽃잎을 뚝뚝 떨어트렸다. 내려앉는 꽃잎 때문에 마을의 농작물들이 기를 펴지 못했다. 그 누구도 나무 아래에서 봄을 만끽하지 않았다. 나무는 마을의 불행 같았고, 꽃잎이 흩날리는 봄은 저주의 기간이었다. 재앙같은 나무는 아무리 베어도, 불에 태워도 풀리지 않는 저주처럼 굳건했다.
그런 마을에 희망 한 줄기가 스며들었다. 보육원 부지에 개간사업이 시행되기로 결정이 됐다. 하지만 지지부진했다. 끈질기게 버티는 그 망할 벚나무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온갖 무당을 불러 뒤늦게 혼을 달랬다. 몇 개의 혼이 붙어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달랬다. 번번이 실패했다. 누구는 굿을 하던 도중 줄행랑치며 도망갔고, 누구는 돈 몇 천 받고 잘 달랬다하더니 그대로였고, 누구는 애초에 굿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마을 이장이 수소문 끝에 아주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냈다.
새치 몇 가닥을 훈장처럼 달고 있는 여자였다. 자신을 찾아온 이장을 온화한 미소로 반겼지만, 눈에 화가 가득했다. 지들이 불 질러 놓고선, 이제 와서 달래달라네. 턱턱 내뱉는 말들에 다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이장이 무당의 눈치를 살폈다. 무서우면서도 동시에 제대로 찾아왔단 생각이 들어 이기적인 안도감을 느꼈다. 야야 홍중이 들어와봐라. 무당의 부름에 한복 곱게 입은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야가 인쟈 반오십인디 이래 봐도 내보다 신빨이 좋아. 이장이 앉은 자리에서 홍중을 올려다봤다. 홍중은 그 자리에 선 채로 이장에게 눈길 한 번 안주고 오직 자신의 신 엄마를 바라봤다. 점마 저런 표정도 다 짓네. 무당은 홍중의 굳은 표정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새끼덜 다 델꼬가 굿 한번 해줘라. 홍중은 일자로 닫은 입을 벌리지도 않은 채 요지부동이었다. 항명이었다. 가기 싫나? 인자 갈 때 됐다아이가. 무당이 퉁명하게 말하곤, 홍중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잠시간 그런 무당을 응시하던 홍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방을 나가버렸다. 쿵쾅이며 멀어지는 걸음소리가 문 너머로 고스란히 들려왔다. 못난 놈. 무당이 혀를 찼다. 쟈가 가서 굿 할끼다. 거기 귀신은 내도 못 내쫓아. 쟈가 가야돼, 쟈가. 무당이 확신에 찬 얼굴로 웃어보였다. 이장의 간담이 괜히 서늘해졌다.
김홍중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벚나무에 붙어 있는 아이들, 아니 그 아이가 누군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애초에 그 벚나무에 붙어있는 혼은 하나였다. 그리고 저주도 존재하지 않았다. 걔는, 박성화 걔는.. 그럴 성정을 가진 애가 아니니까. 누구를 저주하고 증오하고 탓하고. 그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는 애니까.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나. 영겁같은 시간이 결국 단숨에 흘렀구나. 더 늦기 전에 가야할 때였다.
보육원에 불이 난지 6년 만에, 홍중은 그곳으로 향했다.
19살 고등학생에서, 시퍼런 칼날 위에도 잘만 서는 무당으로.
벚나무 앞에서 잘만 뛰던 김홍중의 눈이 확 뜨였다. 부릅 뜨여진 눈이 보지 말아야 할 것이라도 본 눈빛이었다. 억지로 불어넣어지는 무언가에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홍중의 가슴께가 불규칙하게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홍중이 들고 있던 방울을 결국 내팽개치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한순간에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일순간 모든 눈이 홍중에게로 쏠렸다. 빙의라도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홍중이 데려온 양중들도 연주를 멈춘 채 홍중을 바라봤다. 이제 혼의 말을 전하겠지. 원래대로라면 그런 수순을 밟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김홍중이 그대로 고꾸라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
오래 묵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주인을 잘 안다. 밤마다 이불 속에서 끊임없이 들었던 목소리니까. 내 죄책감이 그렇게 너를 계속 잡고 있었던 걸까. 근데.. 난 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 소리의 주인이 너라고 생각했을까. 그제야 홍중은 깨닫는다. 그 주인은 자신이라는 것을. 화염 속에서 결국 너를 두고 나왔을 때, 불타는 보육원을 보며 내질렀던 자신의 울부짖음이라는 것을. 니가 아닌, 내가 나에게 내지르는 비명. 죽는 순간까지 잊지 말라는 경고. 홍중은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단 한순간도 박성화를 잊은 적이 없었다.
홍중의 눈을 덮고 있던 긴 속눈썹이 고개를 들었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며 맑은 하늘을 바라봤다. 앞머리를 흩날리는 바람에서 익숙한 풀내가 났다. 그러면 직감적으로 느꼈다. 여전히 그 벚나무 앞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굿을 도와주는 아이들의 바라지도,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애초에 소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은 세상처럼 고요했다. 멸망한 세계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홍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채였다. 손에 쥐고 있던 방울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제 손을 멍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들면, 저 멀리 벚나무 밑에 쪼그려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교복차림의 19살 박성화.
차림새와 어울리지 않게, 입에 담배를 물고 있는 성화가 홍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화의 눈이 애살스럽게 휘었다. 아아.. 홍중은 터져 나오는 탄식을 막지 않았다.
보육원 원장의 눈을 피해 종종 벚나무 아래에서 나란히 담배를 입에 물었다. 먼저 담배를 시작한 것을 홍중이었다. 끊어라 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성화는 홍중에게 담배를 배웠다. 밤마다 몰래 빠져 나와 달이나 보면서 담배를 태웠다. 언젠 홍중의 눈처럼 휘어진 초승달, 언젠 성화의 광대처럼 둥근 보름달이 떠있었다. 먼저 담배 끊은 사람 소원 들어주기. 홍중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던 성화가 말했다. 지랄.. 홍중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반면 불도 붙이지 않은 필터나 잘근 씹고 있는 성화의 얼굴이 진지했다. 그 얼굴에 홍중은 바라는 거 있냐며 물었다. 너 대학 가라고. 내가 짜장면 배달이라도 해서 등록금 벌어줄게. 너 다닐 학교 앞에서 방 구하고 같이 살자. 그게 내 소원. 미래를 꿈꾸는 성화의 말에 홍중의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물려있던 담배 끝이 아랫입술에 내려앉으며 담뱃재가 홍중의 마음처럼 툭, 떨어졌다. 김홍중 쫄기는. 천천히 끊을게, 천천히. 박성화는 픽 웃곤 자신이 물고 있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내가 담배 못 끊어서 대학 안 갔어?”
어느새 자신의 발치 앞까지 다가온 홍중에게 물었다. 담배 끊었어야했는데. 근데 홍중이도 못 끊었더라. 홍중은 그저 가만히, 가만히 성화를 바라봤다. 그러면 박성화는 눈을 맞춰왔다. 기억 속 그대로였다. 제 꿈속에 가둬 놓은 그 모습이었다. 박성화는 여전히 19살 소년이었다. 김홍중이 자라는 동안, 자라지 못한 박성화는 마지막으로 본 그 모습, 그대로였다. 박성화의 시간은 그때 멈춰버렸으니까. 김홍중은 박성화와 벌어진 세월의 간극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 간극을 채우고 있는 것은 죄책감, 죄책감이겠지. 함께 자라지 못한 것에 대한. 결국, 김홍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왜 아무런 말이 없어, 홍중아. 나 여깄는데. 밤마다 들었던 그 다정한 목소리로, 박성화가 물었다.
“...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홍중아.”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고, 박성화.”
그러면 말없이 앉으라는 듯이 제 옆자리나 툭툭 치는 박성화였다. 홍중은 잠시 주저하다 그 옆에 성화처럼 쪼그려 앉았다. 꿋꿋하게 앞만 바라봤다. 집요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성화의 시선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성화는 그런 홍중의 옆모습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손을 들어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연스럽게 내려온 손이 홍중의 발간 볼을 스쳤다. 익숙한 차가움. 원체 손이 차갑던 애였으니까. 그 온도에 마음이 시렸다. 홍중은 이 온도를 느꼈던 기억을 되짚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사이 종종 들끓던 제 이불 속으로 들어와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던 그 손의 온도, 가장 뜨거운 손과 가장 차가운 손이 맞닿았던 그때의 온도를.
“홍중이 그대로 자랐네. 많이 컸다.”
“...”
“난 아직도 교복 입는데.”
“...”
“그래서 나 안 보고 그냥 보내버리려고 그랬냐?”
성화가 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에도 홍중의 굳은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런 거 아니야. 그 말을 하지 못한 채 홍중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사실 무서웠다. 화마 속에서의 그 모습 그대로 일까 봐. 그럼 이렇게 두 발로 버티며 살아온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그런 김홍중의 두려움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홍중은 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쌓인 설움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몇 번이고 아랫입술을 물며 참았다.
“홍중아, 고개 들어서 나 좀 봐주면 안 돼?”
“...”
“네 탓 아닌 거. 이제 좀 받아들이면 안 될까?”
김홍중은 무자비한 화마 그 자체였다. 이유도 모른 채 그렇게 태어났다. 늘 불이 덮쳤다. 부모도, 부모를 잃고 처음 갔던 보육원도, 졸업식도 가지 못한 초등학교도. 늘 살아남는 건 홍중 혼자였다. 박성화와 함께 지내고 있던 마지막 보육원도 그랬다. 결국, 홍중의 화가 보육원을 덮쳤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몇 명의 동생들과 살아남았다. 그럼에도 김홍중은 타오르는 보육원 앞에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 안에 여전히 다른 동생들이, 그리고 박성화가 남아있어서. 화마를 잡기엔 김홍중이 흘리는 눈물은 턱없이 부족했고, 모든 게 잘만 타버렸다.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근데 그게 어떻게 내 탓이 아닌데.
김홍중의 화를 눌러주는 유일한 방법은 신을 모시는 거였다. 네 팔자가 세다 세. 주변이 다 불바다네. 그거 풀어주는 방법 내가 아는데. 같이 갈겨? 마을을 떠나 갈 곳 없이 떠돌던 홍중과 동생들을 거둔 것은 지금의 신 엄마였다. 홍중의 화에 재가 된 사람은 박성화가 마지막이었다. 처음 신을 받든 날, 홍중은 신 엄마를 붙들고 울었다. 너무 늦은 거 아니냐고 묻는 말에 그녀는 그저 홍중이 입고 있는 퍼런 두루마기를 정성스레 손으로 쓸고 또 쓸며 말했다. 그거 다 니 탓 아이다. 그거 다 갚을 수 있다. 다 달래주면 된다. 그게 니가 평생 할 일이다. 그 날 이후 매일 제를 올렸다. 신 엄마를 따라 전국 팔도를 다니며 귀신 들린 사람에게 굿을 했다. 그렇게 원혼을 달랬다. 신의 이름을 빌려, 재가 되어 사라진 사람들에게 참회했다. 혼자 살아남은 것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홍중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흘린 눈물에 얼굴이 엉망이었다. 성화가 다정하게 홍중의 볼을 쓰다듬었다. 금세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바람이 일렁였다. 벚나무의 꽃잎이 바람에 휘날리며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니가 우니까 벚나무도 운다, 울어.”
“...”
“친구 가는데 그렇게 계속 울 거야?”
툭 하면 쓰다듬던 게. 내 안의 화를 못 이겨 끙끙 앓던 나를 제 몸으로 안아 식히던 게. 나대신 불구덩이에 들어 가버렸던 게. 그렇게 될 걸 알면서도 재가 되기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던 게. 오지도 않는 나를 계속 이렇게 기다리던 게. 그런 게. 그게 무슨 친군데. 바보 같은 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텅 비어있다고 생각했던 마음에서 몰래 겹겹이 쌓아둔 설움이, 죄책감이, 그리움이 쏟아져 나왔다.
“... 미안해.”
혼자 살아남아서. 그런 주제에 찾아오지 않아서. 진작 오려고 했는데. 늘 오고 싶었는데. 언제나 니가 보고 싶었는데. 내 죄책감에 발이 묶여서, 너를 계속 여기에 내버려뒀어. 날 기다리고 있는 거 알면서도. 내가 유일한 네 구원인 걸 알면서도. 너무 무서워서. 내가 너무도 나약해서. 그래서. 결국.
“... 너무, 늦어버려서 미안해.”
“안 늦었어. 적당한 때야. 이제 벚꽃이 질 때잖아.”
그러니까 울지마. 무수히 많은 벚꽃잎이 함박눈처럼 내렸다. 하나 둘 씩, 두 사람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괜찮아. 홍중아, 괜찮아. 이제 정말 다 괜찮아질 거야. 그 말이 신호탄이 되어 홍중의 어깨가 더 서럽게 흔들렸다.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질 수 없었다. 평생을 이렇게 짊어지고 살 마음이었다. 어떻게 내가 감히. 늘 그런 마음이었다.
“괜찮아, 홍중아. 그래도 돼. 괜찮아.”
“...”
“다 잊고 살아. 그렇게 살아가.”
그 말에 모든 게 터져 나왔다. 수문 열린 댐처럼 모든 게 쏟아져 나왔다. 홍중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신 엄마를 만나기 전까지 매일 지옥 불같은 신병을 앓았다. 툭 하면 뜨거운 몸을 견디지 못해 앓아누웠다. 그것을 밤마다 달래주던 것이 박성화였다. 그런데 나는? 니가 그 뜨거운 불 속에서 사라져갔을 때 나는. 나는 그저 그 화마를 잡지도 못하는 눈물이나 뚝뚝 떨구던 게. 그 누구보다 그 뜨거움의 고통을 아는 내가 어떻게 다 잊고 살아가는데. 이제야 널 달래러 온 내가, 제대로 달래지도 못한 너를 보내고 어떻게 다 잊고 살아가는데. 김홍중은 이대로 박성화를 보내고, 절대 괜찮아질 수가 없다.
“... 내가 어떻게 그렇게 살아.”
“홍중아.”
“너 보내고 어떻게 살아, 내가.”
“김홍중.”
시작하지 말았어야할 굿판이었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아직 보낼 준비가 되질 않았는데. 이제 겨우 박성화의 모습을 볼 용기가 생겼던 거였다. 보낼 용기가 아니었다. 눈물이 뚝뚝 흘렀다. 박성화는 두 손을 들어 몇 번이고 용암처럼 흘러내리는 김홍중의 눈물을 닦고 또 닦아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 언젠가처럼. 홍중을 유일하게 진화시키는 것은 박성화였다.
“가지마..”
제 화를 누르는 박성화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
“홍중아.”
“가지마. 가지마, 성화야. 제발.. 내가 잘못 생각했어. 가지마.”
“... 내가 가야 니가 이 불 속에서 벗어나잖아.”
“...”
“이제 불길 속에서 그만 살아도 돼.”
“박성화.”
“내가 다 가져갈게.”
박성화가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가벼운 바람이 불었다. 무수히 많은 벚꽃잎들이 떨어졌다. 홍중을 달래듯, 홍중의 머리카락에, 어깨에, 성화의 손을 쥐고 있는 홍중의 손에 벚꽃잎들이 내려앉았다. 모든 것을 감싸 안았다.
“그러니까.”
“...”
“내가 듣고 싶은 말로 작별인사 해줘.”
눈물로 축축한 홍중의 볼에 꽃잎 하나가 가볍게 안착했다.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것처럼. 홍중이 흘리던 눈물을 꽃잎이 가려주었다.
내가 그만 울었으면 좋겠구나. 결국, 체념한 홍중이 성화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눈물대신 꽃잎이나 흘리면서 웃었다.
홍중이 작게 입을 우므렸다. 한 사람만이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좋아해. 작별인사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홍중은 오래도록 품어왔던 마음을 꺼냈다.
결국, 사랑이었다고. 홍중이 뒤늦은 고백을 작별인사로 건넸다. 성화가 봄처럼 웃었다.
“나도. 나도 늘 같은 마음이었어.”
박성화가 홍중의 볼에 매달려있는 꽃잎에 입을 맞대었다. 볼에 닿는 따뜻한 감촉에 홍중의 눈이 감겼다. 모든 게 사라질 거란 걸 잘 알기에. 다시는 뜨고 싶지 않을 눈을 감았다.
“잘 살아. 이게 내 소원.”
나 이제 담배 필 일 없거든. 소원 꼭 들어주기. 그리고 오래도록 침묵이 흘렀다.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만이 떠나간 자리를 채웠다. 차마 눈을 뜨지 못한 채, 무덤처럼 몸을 웅크렸다.
잘 가. 잘 가, 박성화. 오랜 이별의 끝을 고했다.
*
굿판이 끝났다.
홍중이 감은 눈을 천천히 뜨며 일어났다. 괜찮으세요? 걱정스런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홍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옇게 질렸지만 말끔한 얼굴이었다. 제 자리에 우뚝 선 홍중은 단단한 얼굴로 벚나무를 바라봤다. 풍성한 꽃잎이 이제는 배웅을 위해서 흘러가야할 때였다.
“다 태우세요.”
“네?” “잘 흩날려서 갈 거예요.”
홍중의 말대로 잘만 탔다. 그렇게 몇 번이고 불태웠지만 단 한 번도 타지 않았던 그 벚나무가 활활 잘도 타올랐다.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홍중은 그 누구보다 가장 앞선 자리에서 불길을 바라봤다. 벚나무에 달려있던 꽃잎들이 모두 흩날리기 시작했다. 어떤 목적지를 향해 떠나가기 시작했다. 홍중은 가만히 그 벚꽃잎들이 향하는 곳을 바라봤다. 날리는 벚꽃잎 하나가 홍중의 버석한 얼굴에 달라붙었다. 얼굴을 가볍게 쓸자, 손끝에 꽃잎이 묻어났다. 홍중이 한참이나 그 벚꽃잎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후, 따뜻한 입김으로 날려 보냈다. 이윽고 눈보라처럼 날리는 꽃잎들과 함께 훨훨 자유로이 날아갔다.
이 꽃잎들이 도달하는 곳이 니가 지금 걷는 그 길의 끝이길.
- 작가의 말
여백이 많은 글이네요. 부디 성홍을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채워주시길..
곧 만개할 봄의 꽃잎보다 성홍러들이 더 많아지길 바라며
성홍과 함께 따뜻한 봄날 맞으시길 바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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