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사랑, 벚꽃>, 6v6
- 계간 성홍
- 2022년 3월 21일
- 13분 분량
벚꽃이 피고, 새싹이 트고,
새로운 설렘이 시작되는,
그 계절의 이름은 봄.
하지만 홍중에게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가오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대학교 2학년인 홍중은 1학년 겨울방학부터 시작한 카페 알바를 아직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사장님이 너무 친절하시다. 2월 말에 이제 곧 개강이니 더 이상 못 나오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더니, 홍중이만큼은 잡아야 한다며 공강 때에 어떻게든 시간을 맞춰서 알바 스케줄을 조절해주신 사장님 덕분에 INFP인 홍중은 거절도 하지 못하고 계속 알바를 해야 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돈. 돈이다. 주변 카페들과 비교해서 차이 나는 시급 때문인 것이 사실 가장 큰 이유였다.
특히 요즘, 홍중은 시급이 센 이유를 톡톡히 느끼고 있다. 홍중이 알바를 하는 카페는 봄이 되면 벚꽃이 만개하는 벚나무 길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그 때문에 홍중은 아직 벚꽃이 피지 않았음에도, 봄이 되자 숨도 못 쉬고 계속 음료수를 뽑아내야 했다. 하지만 통장에 찍히는 돈을 보고 저절로 마음이 유해지고, 다시금 열심히 삶을 살아야겠다 다짐하는 홍중이다.
그래도 조금의 억울함은 있었다. 학교 가고, 알바하고, 또 학교 가고, 알바하고... 이런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홍중은 봄을 실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들 즐기는 봄을 자신만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홍중은 조금 아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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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중은 여느 때와 같이 카페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홍중이 알바를 하는 카페는 물론 벚꽃 명소 바로 옆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부 인테리어도 꽤 예쁘게 되어있었기 때문에 커플들이 데이트하러 자주 들르는 곳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많은 커플이 오고 갔다.
딸랑-
카페 입구 문에 달린 종이 울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있던 홍중은 주문을 받으려 앞을 바라봤다.
와.
홍중은 들어온 커플 중 남자의 얼굴을 보며 감탄했다. 물론 속으로만 말했다. 어쩜 저렇게 내 취향이지? 이 말은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주문을 받으면서도 계속 포스기와 얼굴을 번갈아 가며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러다가 홍중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뜨거운 아메리카노로 잘못 누를 뻔했다.
'아아메 딸기 스무디 치즈케이크... 아아메랑 잘 어울리게 생겼네'
홍중은 이런 생각을 하며 포스기를 띡띡 누르고 앞에 카드 넣어주세요. 한마디 했다.
"어. 손님 한도초과 되셨어요."
홍중은 무슨 일인가 하고 포스기를 다시 한번 보다가 그 자리에서 냅다 고함을 지를 뻔했다.
"헐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카드 한 번만 다시 넣어주세요 죄송합니다ㅠㅠ"
17,000원을 1,700,017,000원으로 찍어버렸던 거다.
홍중은 정말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 문자 다 갔겠지? 한도 초과 1,700,017,000원 승인 거절...
당장 포스기를 잡고 머리를 박아버리고 싶었으나 간신히 정신을 잡고 다시 결제를 완료한 다음 후다닥 뒤돌아서 음료수를 만들면서 반쯤 울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 다음 타임 알바가 가게에 들어와서 홍중은 스태프 룸으로 호다닥 들어가 앞치마를 훌렁 벗어 던져버리고 끄아앙 소리를 내며 작은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리 여친이 있었다지만... 그래도 완식 그 자체였는데... 진짜 큰일 났다......'
나 완전 바보 같아 보였겠지? 그러게 괜히 얼굴에 정신이 팔려서는... 그냥 주문받고 나서 앉아있을 때 실컷 볼걸... 아닌가? 그러면 또 기분 나빴으려나?
후회를 잔뜩 머금은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홍중은 자신의 볼을 챱 소리가 나게 한번 때렸다.
아마 INFP인 홍중은 이날 밤 침대에 누워서 또 이불을 팡팡 차며 울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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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알바가 아무리 바빠도 홍중의 본분은 대학생이다.
홍중은 이번 학기 수강 신청에 완전히 성공했다. 물론 금공강은 실패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트윈타워를 세워버린 1학년 1학기와 시계를 잘못 봐서 5시간 우주공강이 두번씩이나 생겨버린 1학년 2학기와는 달리, 이번엔 신청하려고 했던 모든 강의를 어느정도 예정된 시간표에 맞게 깔끔히 사수했다. 오늘은 그 강의 중 성...뭐시기냐? 아무튼, 꿀교양 하나 들으러 간다.
성의 이해 어쩌구 교양은 교수님이 학점 후하게 주기로도 유명하고, 무엇보다 데이트 팀플때문에 항상 인기가 많다. 팀플을 빌미로 한 공짜 소개팅의 장, 뭐 그런 거였다. 홍중은 이성과 사귀는 쪽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어차피 진짜로 사귈 사이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저 최대한 편하게 학점 잘 받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데이트 팀플 조가 나오는 날이다.
"...
서건민, 유지희.
박성화, 김홍중.
이번 학기도 남자가 더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남남 커플이 몇 팀 있어요."
아. 박성화? 이건 누가 들어도 남자 이름이다. 홍중이 전혀 예상치도 못한 시나리오였다. 홍중은 입학하고 쭉 학교를 돌아봤을 때, 교내 남자 중에는 전혀 잘생긴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아주 빨리 깨닫게 되어버렸다. 대학교 가면 남친 생긴다면서요... 잘생긴 사람이 이렇게 한 명도 없을 수가 있어?
홍중은 오히려 여자랑 한 조가 되는 게 더 나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더 나쁜 쪽으로 가버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앞쪽을 한번 훑듯이 바라봤는데,
미친.
홍중은 깜짝 놀라서 조그마한 손으로 입을 턱 막아버렸다.
그때, 카페 왔던 그... 그 남자.
걔가 대체 왜 저기 있어??
봄, 사랑, 벚꽃
written by. 6v6
홍중은 아직도 상황 파악이 덜 됐다.
그래서 쟤가... 내가 포스 잘못 찍었던 걔... 그런데 내가 2주 가까이 될 동안 얼굴을 몰라봤다고? 저렇게 잘생긴 얼굴을? 아니, 그보다 쟤는 여친도 있으면서 굳이 데이트 팀플있는 이 강의를 왜?
홍중은 강의가 다 끝나갈 때까지 곰곰이 생각했지만, 도무지 이해 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는 앞으로 주변을 더 샅샅이 뒤져보고 둘러보리라 다짐했다.
그 주 주말,
홍중과 성화는 주말에. 둘이서. 사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홍중은 집에서 나가기 전까지 정말 수백 번은 더 고민했다. 그냥 아프다고 할까? 나가지 말까? 진짜 가기 싫은데 그래도 과제니까 해야지...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건...
그래도 홍중은 책임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겨우겨우 집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홍중은 정말 어색해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같이 데이트 코스를 짜야 하는데 성화가 저번 일을 기억할까 봐 조마조마해서 머리에서 사고라는 게 도통 되질 않았다. 게다가 성화는 홍중의 생각보다 훨씬 더 잘생겼다. 얼핏 봤을 때도 잘생겼네,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물론 좋은 뜻으로.) 머리가 복잡해진 홍중은 아아 그란데 사이즈를 과장 조금 보태서 원샷해버렸다. 복잡해진 머릿속이 차라리 얼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들이부었다.
해야 하는 데이트는 총 3번이고, 데이트를 모두 한 뒤에 보고서를 써서 제출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데이트 장소는 당연하게도 팀원끼리 직접 짜야 했다.
조용히 앉아서 연신 아메리카노만 쪽쪽 빨고 있는 홍중과 달리, 성화는 매우 적극적으로 여러 코스를 제시했다. 어떻게 저렇게 잘 알지, 라고 생각하던 홍중은 아 맞다 여친 있었지. 라고 깨달음과 동시에 우울해졌다. 잘생긴 애들은 다 게이 아니면 여친 있다던데, 아쉽게도 성화는 여친이 있는 쪽이었다.
어찌 됐든 성화의 적극적 의견 100%, 홍중의 어엉. 0.1% 도합 100.1%로 데이트 코스가 완성되었다.
누가 봐도 커플들이 갈 것 같은 그런 장소들로만 잘 골랐다.
홍중은 얼레벌레 첫 만남 치고는 결과가 나쁘지 않게 나왔다고 생각했다. (물론 코스는 성화가 다 짰지만)
또, 다행히도 데이트 코스를 다 짜는 동안 성화가 아무 말도 없던 걸 보니, 저번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도했다.
다행히 오늘은 두 발 쭉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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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만난 이후 며칠 만에 성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여전히 살짝 어색한 분위기였다. 대화를 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중간중간 얘기가 끊기면서 침묵이 감돌 때 홍중은 당장이라도 뒤돌아서 집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도 성화 얼굴을 한번 다시 보니까 그러기엔 아쉬운 얼굴이었다. 그래서 눈 한번 질끈 감고 견뎠다.
첫 데이트 장소는 분위기 좋기로 유명한 식당이었다. 때문에 식당 안에는 커플들이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남자 둘이 들어가니까 괜히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홍중은 속으로 집에 가고 싶다... 계속 생각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삐걱삐걱대는 홍중과는 달리 성화는 매우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홍중은 앉은 채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식당을 구경했다. 내부 인테리어가 꽤 맘에 들었는지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앞자리의 성화와 눈이 마주치곤 머쓱한 표정을 짓고 다시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렇게 3분가량 둘 다 아무 말도 없다가, 먼저 얘기를 꺼낸 건 성화였다.
"홍중아 넌 전공이 뭐야?"
"어, 나 실음과. 너는?"
"난 건축과야."
아 그래서 여태까지 한 번도 못 봤구나. 공대 건물과 예대 건물은 거리가 꽤 있는 편이고 딱히 이번 같은 경우가 아니면 강의가 겹칠 일도 없으니 성화를 몰랐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번 강의를 들을 동안 성화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건 아직도 미스터리였지만.
다행스럽게도 한번 대화가 트이니 그 뒤로는 거침없이 술술 풀렸다. 전공학과가 어디냐는 질문으로 시작한 대화는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로 이어지며 취미가 무엇인지, MBTI가 뭔지, 이런 초면이지만 할 얘기 없어서 하는 질문뿐만 아니라, 친구끼리 할만한 얘기들도 오고 갔다. 홍중은 성화와 대화를 하면서, 성화는 냉미남같이 생긴 외모와는 다르게 굉장히 다정하고 (보통 성화처럼 잘생긴 남자들은 대체로 싸가지가 없었다) (당연하지만 홍중의 경험담이다), 성격이 말랑말랑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무표정과 웃을 때 표정이 영 딴판이라 그것도 맘에 들었다. 그리고 또 MBTI가 ENFJ라는것과... 뭐, 아무튼 그날엔 성화에 대해서 꽤 많은 걸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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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다음날, 홍중은 또 카페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웬일인지 모처럼 손님 수가 적어 잠깐 숨 돌릴 틈이 났다. 그리고 그 틈에서 성화의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왜 하필 성화 생각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성화의 첫인상은, 그러니까 얼굴만 봤을 때, 굉장히 시크한 성격일 줄 알았다. 그런데 처음 만나고 대화를 해보니까 또 배려심 많고 착해서 조용할 줄 알았는데, 또 조금 편해지니까 장난기 있는 모습도 보였다. 성화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알아갈 만한 가치가 있었다. 첫 데이트 때는 식당이랑 카페에서 고작 몇 시간 보낸 게 다였지만 그 몇 시간에도 성화의 여러 모습을 알게 됐다. 그러면 두 번째 데이트 때는 어떨까. 어떤 모습들을 알게 되려나. 그 뒤에는 또 어떤 모습이 있을까.
홍중은 이런 생각을 하며 짧은 시간을 보내다 곧 가게 문에 달린 종이 울려 포스기 앞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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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데이트는 인사동에서였다. 처음에 만나서 장소를 정할 때는 그냥 식당을 가기로 했었다. 그런데 첫 데이트에서 취미 얘기가 나왔을 때 홍중이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성화가 그러면 전시 같은 것도 좋겠네! 하고는 인사동에 가자고 계획을 바꿨다. 홍중은 진짜 데이트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인사동까지 가려고 한담, 이런 생각을 했지만 결국 거절하지는 않았다.
두 번째 데이트는 첫 데이트와는 사뭇 달랐다. 그래도 조금 친해졌는지, 둘은 장난도 한 두 번씩 치고 쉴 틈 없이 얘기를 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소품샵에서 홍중이 맘에 들어 한 팔찌도 둘이 같이 사고, 늘어지는 꿀타래를 보며 신기하다고 방방 뛰는 성화를 보며 홍중은 웃기도 했다.
그렇게 둘은 바깥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전시를 보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둘은 동시에 와, 하며 탄성을 질렀다. 몽환적인 분위기와 화려한 색채, 그리고 그 조화가 이뤄내는 아름다움은 가히 놀라웠다. 그렇게 둘은 감탄을 하며 전시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주변 모든 것을 눈에 하나씩 하나씩 담았다. 그 배경에 녹아든 서로의 모습도 함께 말이다.
홍중은 계속 홀린 듯이 전시를 둘러보다가 아차, 하고 카메라를 꺼냈다. 꺼낸 카메라는 홍중이 제일 좋아하는 카메라 중 하나인 필름카메라였다. 예쁜 전시를 담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가져온 필름카메라는 그날의 분위기까지 함께 담아내기에 아주 적합했다.
"성화야 여기 한번 봐."
홍중은 뷰파인더에 눈을 대며 성화에게 말했다. 성화는 뒤를 돌아봤고, 그 찰나의 순간에 뷰파인더에 담긴 성화를, 홍중은 빠르게 사진으로 담아냈다.
역시 얼굴이 되니까 사진 분위기가 다르네. 홍중은 눈에 대었던 카메라를 내리고 웃으며 성화에게 말했다. 그런 홍중을 본 성화도 입꼬리를 올리며 같이 웃었다.
그 후로도 둘은 한참 전시를 감상하고, 또 카메라로 서로를 찍어주었다. 오늘 필름 카메라를 처음 보게 된 성화는, 처음에 홍중이 설명해줄 때 쩔쩔매는 듯 하더니 곧 적응하고는 홍중의 사진도 척척 찍어주었다. 일반 카메라와는 다른 필름 카메라의 감성에 반해 나도 한번 사볼까, 하는 성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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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식당으로 들어와 앉았다. 홍중이 카메라의 필름을 감으며 내일 현상소 가서 맡겨야겠다, 라고 말했다. 성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머리 위에 물음표가 뿅 하고 뜰 것 같은 표정으로 현상소가 뭐야? 하고 홍중에게 물었다. 홍중은 동그라미가 된 성화를 보며 웃음을 빵 터뜨렸다.
"너 지금 되게 동그라미 같은 거 알아?"
성화도 동그라미 같은 게 뭔데, 하면서 같이 웃었다. 그런 게 있어, 너 지금 되게 동글동글하다구. 홍중은 이런 말을 하며 성화의 또 다른 모습 하나를 발견했다는 사실에 왠지 뿌듯했다. 동그라미 성화. 동글동글.
그렇게 한바탕 웃고 난 후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성화의 여자친구 얘기도 나왔다. 성화의 여자친구 이름은 지현, 성지현이었다. 이름에 맞게 얼굴도 아주 예쁘다. 이건 홍중이 성화를 처음 만난 날에 알았던 사실이다. 저 커플은 둘 다 예쁘고 잘생겼네, 이렇게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 홍중은 잘생김에 조금 더 눈이 갔을 뿐이다. 성화는 홍중에게 여자친구인 지현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해줬다.
그런데 지현의 얘기를 하는 성화의 눈빛이, 여태까지 보던 성화와는 달랐다. 친절한 성화도, 장난기 많은 성화도, 동그라미 성화도 아니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설렘으로 가득한... 그건 사랑이었다.
홍중은 두 눈을 반짝이며 지현의 얘기를 하는 성화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조금 묘했다. 데이트, 그것도 과제인 데이트를 고작 두 번 했다고 성화와 사귄다고 착각이라도 한 걸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홍중은 성화와 아무 사이도 아니기에, 지현에게 빛나는 성화의 눈빛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현에게 사랑에 빠진 성화, 이건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성화의 모습이었는데. 어째 오늘은 좋았던 기분이 한껏 가라앉은 채 성화와 헤어졌다. 성화는 식당을 나와 달라진 홍중의 표정을 보고 음식이 맛이 없었나? 하는 걱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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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정말 오랜만에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었다. 강의도, 알바도 없었다. 정말 24시간 전부 홍중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그런데 막상 정말 아무것도 안 하려니 홍중은 심심해졌다.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하다가, 일어나서 곡 작업이나 해볼까 하며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딱히 작업도 잘 풀리질 않았다. 그렇게 홍중은 머리를 싸매다가 띠링-, 하고 연달아 울리는 휴대폰 알림 소리에 옆 테이블에 올려놓은 휴대폰을 낚아채고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홍중아.
홍중아 시간 돼?
시간 되면 나랑 술 안 먹을래?
여기 ㅁㅁ포차.
어딘지 알지? 오려면 와. 안 와도 돼.」
뭐야 얘 지금 나랑 술 먹자고 하는 거야? 데이트하는 날도 아닌데... 그냥? 홍중은 생각했다.그런데 원래 친구 사이는 아무 때나 불러서 같이 술 먹고 하는 거... 그거 맞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 즉흥적인 약속을 좋아하지 않는 홍중은 10분 정도 고민을 하다가, 결국 할 것도 없는데 나가지 뭐. 하고 외투를 챙겨 집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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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중이 포차에 도착했을 때 성화는 이미 반쯤 취해있었다. 술에 취한 듯 보이는 성화는 나른해져 있고 볼에는 약간 붉은 기운이 돌았다. 저번에 술 잘 못 한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 말이 진짜였는지 성화는 삶은 시래기처럼 플라스틱 의자에 널려있었다. 테이블에는 이미 반병 이상이 비워진 소주와 따지도 않은 나머지 한 병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야. 성화야, 너 술 잘 못 마신다며.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무리하게 술을 마셔?"
"홍중아...
나 지현이랑 헤어졌어.
근데, 뭐... 진짜 아무 느낌이 없더라. ...나 좀 이상하지?
그래서 그냥... 술이라도 한 번 먹어봤는데 머리만 아프다."
홍중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둘이 헤어지는 거, 그거 내가 바라던 거 아니었나? 그렇지만 생각할 때와 직접 겪었을 때는 달랐다. 홍중의 마음은 순식간에 복잡해져 버렸다. 헤어졌다고? 그럼 이제 나도 기회가? 하는 그저 어린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니... 그런데 저번에 여친 얘기할 때는 그렇게 눈을 반짝거리면서 얘기하더니, 그렇게 좋아하던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나서도 아무 감정이 없다면... 나랑은 정말 아무 사이 아니겠네. 이런 생각도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뒤에 든 생각의 비중이 더 컸다.
홍중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생각만큼 잘 안 되었다. 홍중도 술에 약한지라, 성화를 집에 데려다주고 자신도 집에 무사히 도착하려면 드라마처럼 복잡한 생각을 잊어보려 소주를 입에 털어 넣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홍중은 한숨을 한번 푹 쉬었다. 그냥 나오지 말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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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는,
사실 여자친구인 지현을 딱히 사랑하지 않았다. 싫지 않은데, 좋긴 좋은데. 과연 그것이 사랑이라고 부를만한 감정인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지현은 예쁘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서 예쁜 것으로 유명하다. 공대 여신, 이런 유치한 별명도 가지고 있을 만큼 유명했다.
그런데 그런 지현이, 성화에게 고백을 했다. 성화는 거절을 잘 못 하는 성격이기도 했고, 거절하면 주변 사람들이 성화를 어떤 눈초리로 바라볼지도 알았고 (네가 뭔데 지현이 고백을 거절해? 하는 눈빛이 벌써 그려졌다), 그리고 그다지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별다른 고민 없이 흔쾌히 지현의 고백을 받아주었다.
그렇게 성화와 지현은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여느 대학교 CC처럼 캠퍼스를 같이 걷기도 했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화는 지현과 사귀는 기간동안에 어떠한 설렘도 느끼지 못했다. 솔직히 고백을 받아줬을때 사귀다보면 좋아지겠지, 하는 생각에 승낙한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그래도 차마 헤어지자는 말은 못하겠던 성화는 계속 지현과의 관계를 이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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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같이 데이트를 하러 둘은 한 카페를 찾았다. 성화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포스기 앞에 서 있는 알바생과 눈이 마주쳤다. 알바생은 남자였지만, 예쁘게 생겼었다. 이목구비가 작은 얼굴에 비해 큼직하게 자리잡혀있는데, 그 조화가 화려했다. 빨갛게 물들인 머리는 화려한 이목구비와 잘 어울렸다.
성화는 그런 알바생을 잠시 보다가 늘 마시는 딸기 스무디를 시켰다. 지현은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겠다고 했고, 거기에 치즈케이크 한 조각 정도를 더 시켰다.
그런데 아까부터 알바생이 몰래몰래 성화를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성화는 그런 알바생이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더 귀여워 보였다. 힐끔힐끔 보면 눈을 굴리는 게 안 보일 거라고 생각하나. 워낙 큰 눈은 가려지질 않아 성화를 쳐다보는 시선이 다 느껴졌다.
"어. 손님 한도초과 되셨어요."
성화는 그럴 리가 없는데? 생각하며 메세지를 확인하려 폰을 꺼내들었다.
"헐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카드 한 번만 다시 넣어주세요 죄송합니다ㅠㅠ"
「[Web 발신]
[ㅇㅇ카드] 한도 초과
3/7 13:38 카페ㅁㅁ
1,700,017,000원 승인 거절」
성화는 알바생이 그 말을 하는 동시에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웃음을 지었다. 아, 생각보다 훨씬 귀엽네. 포스기 앞에서 쩔쩔매며 이번엔 당황해서 큰 눈을 도르륵 굴리는 알바생이 너무 귀여웠다. 성화와 지현은 가까스로 결제를 마치고 진동벨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성화야 너 오늘 내가 본 중에 제일 활짝 웃은 것 같아. 너 웃으니까 진짜 잘생겼다."
지현이 성화에게 말했다. 성화는 그 말을 들으며 내가 그동안 그렇게 안 웃었나? 라고 생각했지만, 곧 그 알바생의 모습이 다시 떠올라 얼굴에 미소를 거둘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알바생은 어디로 갔는지, 그 뒤로는 보이질 않았다. 음료를 받으러 갈 때도, 빈 컵을 도로 가져다 놓을 때도 그 알바생은 없었다. 카운터쪽을 계속 바라보던 성화는 아쉬운 마음으로 카페를 나섰다. 다음에도 또 와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그 뒤에도 자꾸 다른 카페를 가자고 하는 지현 때문에 다시 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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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화는 우연히도 성(sex)을 성(castle)으로 잘못 본 바람에 수강 신청을 해버린 교양강의에서 그 알바생을 발견했다. 우리 학교 학생이었구나, 하고 그 뒤로 몇 번 얼굴 보나 싶었는데... 데이트 팀플때 같은 조가 됐다. 성화는 김홍중이라는 이름을 듣고 강의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뒤편을 봤는데, 자신과 눈이 마주치고 당황한 듯한, 그때 그 알바생이 홍중이란 걸 직감으로 알아챘다.
그 후로 성화는 들뜬 마음을 도통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사실 계속 말을 걸어보고 싶었는데 홍중이 매번 강의가 끝나자마자 문밖으로 빠르게 걸어 나가 홀연히 사라지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은 홍중과의 첫 번째 (단둘이서) 만남까지 이어졌다.
어라. 그런데 홍중과 만나기만을 고대해왔던 성화와는 다르게 홍중은 굉장히 어색해 보였다. 그렇지, 하루에도 손님이 몇십 명씩이나 올 텐데... 나를 기억 못 하겠구나... 홍중이 자신을 알아볼 줄 알았던 성화는 침울해졌다. 그리고 그때의 얘기를 꺼내봤자 괜히 분위기만 더 싸해질 것 같아 그냥 홍중과 친해져야겠다고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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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는 홍중과 두 번 정도 데이트를 하며 홍중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졌다. 첫 번째 데이트는 지현과 왔었던 장소임에도 홍중과 오니까 무언가 색달랐고, 두 번째로 인사동에 갔을 때는 정말로 최근에 밖에서 놀았던 중에 제일 신나고 행복했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고, 웃는 홍중을 보면서 성화는 영문 모를 기분이 들었다.
홍중을 볼 때는... 무언가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홍중에게 지현의 얘기를 할 때도, 대충 뭉뚱그려 얘기하며 홍중의 얼굴이나 실컷 살폈다. 홍중의 코가 굉장히 오똑하고, 화려한 눈과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빨갛게 염색한 머리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딸기를 닮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성화는 이 감정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고, 그렇게 혼란 속에서 지현에게 이별 통보를 들었다. 성화는 요 며칠 홍중과 데이트를 하며 자연스럽게 지현과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게 됐다. 데이트 팀플을 영 맘에 들어 하지 않았던 지현은 결국 자신만 성화를 좋아한다는 것 같다고, 이젠 너무 지쳤다며 이별을 통보했다. 하지만 그 이별은 성화에게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대신 어이없게도, 이별을 통보받은 그 순간에 성화는 홍중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 홍중과는 만약 이렇게 헤어진다면, 아무 의미 없지 않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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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중은 혼란스러웠다. 성화가 지현과의 관계를 저렇게 생각한다면, 자신과 성화와의 관계는... 과연, 과제가 끝나도 계속 이어질 관계일까. 성화는 술에 취한 상태로 홍중에게 자꾸만 무어라 얘기를 했다. 하지만 푹 삶은 시래기가 된 성화는 혀도 시래기가 됐는지 발음이 좋질 못했고 홍중은 그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홍중은 어서 성화를 집에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포차는 다행히 성화의 집 주변에 위치했고, 또 다행히도 성화는 걷지 못할 정도로는 취하지 않았다. (그 시래기같은 상태로 어떻게든 걷긴 걸었다) 그렇게 비틀거리며 걷는 성화에 홍중은 팔짱을 껴 성화의 집까지 같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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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0분 정도를 걸었을까, 둘은 성화의 집 앞에 도착했다. 성화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한참을 서 있었다. 홍중도 그런 성화 앞에 같이 한참을 서 있었다. 밤공기가 겨울보다 꽤 따뜻해졌다. 그래도 아침과는 달리 서늘했다. 가로등은 빛나지만, 밤은 딱 적당히 어두웠다.
"나 너랑 헤어지기 싫어."
성화가 숙였던 고개를 들며 말했다. 홍중은 그런 성화를 그저 바라봤다.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들어갈게. 정적을 깬 성화는 그 말을 뒤로 홍중을 등지고 자신의 집 공동 현관 안쪽으로 들어갔다.
홍중은 이제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할지 아예 모르겠다. 자신의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가며 그냥 더 있고 싶다는 거였나, 나랑은 헤어지기 싫다는 말이었나. 아니면... 아니면 무슨 뜻인가. 계속 생각해보았다.
성화가 홍중에게 헤어지기 싫다고 말했을 때, 그때의 성화는 쓸쓸하고 슬픈,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마치 실연당한 사람마냥. 아 물론 실연당한 건 맞다. 그렇지만 타이밍과 분위기가, 지현과 관계있어 보이진 않았다. 이것도 홍중이 처음 보는 성화의 모습이었지만 홍중은 그 모습이 무얼 뜻하는지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은 꼭 성화가 저를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앞에 했던 생각과 모순되어서. 둘 중 무엇이 맞고 틀린 지, 아니면 둘 다 맞는 건지, 둘 다 아닐지, 홍중은 알 수 없었다.
홍중은 집에 돌아가 침대에 누워 잠이 들 때까지 그 한마디만 계속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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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데이트 날.
성화와 홍중은 벚나무로 가득한 곳에서 마지막 데이트를 했다. 4월 초중반에 절정으로 다다른 벚꽃이 만들어낸 풍경은 정말이지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곳곳에 보이는 분홍빛과 가끔 보이는 초록색, 적당히 부는 바람과 그에 맞춰 흩날리는 벚꽃 향기의 조화. 그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성화는 그날 포차에서의 일을 전혀 기억 못 하는 듯, 오히려 평소보다 더 신난 모습이었다. 바람이 불면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겠다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성화는 마치 토끼 같았다.
홍중은 그날 일을 저만 기억하는 게 왠지 억울했지만, 활짝 웃으며 폴짝거리는 성화를 보면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먼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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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 벚꽃을 보러 오는 길에 홍중은 성화에게 저번에 필름카메라로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었다. 홍중이 찍은 성화는 정말로 예뻤다. 성화는 그 사진을 한참 들여다봤다. 홍중이는 나를 이렇게 바라보는구나.
예쁘게 찍힌 성화와 달리 성화가 찍은 홍중의 사진은 대부분 초점이 나가 있었다. 성화는 속상한지 입꼬리가 추욱 쳐졌다. 홍중은 그런 성화를 보고 인화 사진을 한참 뒤적이다 짜잔- 하고 한 장을 뽑아 성화의 얼굴 앞에 쑥 내밀었다.
"어때, 이건 잘 나왔지?"
사진 속에서 홍중은 활짝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홍중을 찍은 건 성화였다. 홍중이 찍은 것만큼 잘 찍은 것은 아니지만 대충 초점은 맞아 홍중의 얼굴이 어느 정도는 보였다.
"이거 나 줘."
성화는 사진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홍중을 바라봤다. 어? 그래. 홍중은 흔쾌히 사진을 건네줬다. 성화는 사진을 건네받은 후에도 한참 들여다봤다. 얼굴엔 옅은 미소를 띤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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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중은 오늘도 필름카메라를 들고 왔다. 그것도 두 개나. 저번에 가져와 보니까 성화가 재밌어하던 것도 생각났고, 필름카메라를 산 이후에 카메라로 꽃은 찍어본 적이 없어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있었다.
성화에게는 일회용 필름카메라를 건네주자 저번처럼 신나서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댔다.
홍중도 주변 사진을 찍으며 성화를 천천히 따라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주변엔 커플이 많았다. 사진을 찍는 커플, 손을 잡고 걷는 커플, 같이 웃고 있는 커플... 모두 다른 행동을 하고 있었지만, 사랑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와 눈빛에서 보이는 순수한 애정은 모두 같았다.
그런 커플들을 보며 천천히 걷던 홍중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홍중을 보던 성화는 홍중에게 잠깐 벚나무 옆에 서보라고 말하고,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홍중아 너 머리 분홍색 돼서 그런지 벚꽃 같아."
성화는 웃으며 말했다. 홍중은 괜히 물 빠진 머리를 손으로 툭툭 털며 웃었다. 쟤는 저런 쑥스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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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걷다 보니 제일 큰 벚나무가 보였다. 그쪽에 있는 벚나무 중 제일 오래된 나무라고 했다. 연식에 걸맞게 매우 큰 크기에 절로 웅장함이 느껴졌다. 홍중은 고개를 들고 벚나무를 잠시 감상했다. 크고 많은 가지에 달린 벚꽃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다 보니 봄 향기가 훅 끼치는 듯했다. 홍중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조금 더 빠르게 뛰었다.
역시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홍중은 처음에는 벚나무만 열심히 찍다가, 옆에서 벚꽃을 구경하던 성화에게 눈길이 가 카메라를 살짝 틀어 초점을 성화에게로 옮겼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그리 세지는 않았지만, 벚꽃이 흩날리게 하기는, 봄 향기를 널리 퍼지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덕분에 벚꽃이 이리저리 날리며 절경을 만들어냈다. 그 순간에, 성화는 카메라를 든 홍중을 바라봤다. 그 모든 장면이, 홍중이 들고 있는 카메라의 뷰파인더에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담겼다. 홍중의 가슴이 아까보다 더 빠르게 뛰었다. 아름다운 장면, 그 속에 담긴 성화. 언제 다시 봐도 행복할 만한 그러한 장면.
찰칵-
홍중은 셔터를 누르고도 뷰파인더에 담긴 성화를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며, 그제야 깨달았다.
성화와 데이트를 하면 왜 묘한 감정이 느껴졌는지. 왜 매일 성화의 다른 모습을 찾고 싶었는지. 전시를 볼 때 왜 유독 한 사람만 보였는지. 오늘 벚꽃을 보러오며 왜 설렜는지. 왜? 그것은 비단 데이트라는 이름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히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자신만 알고 싶지 않았다.
너의 눈빛이 나에게로 빛났으면, 내가 사랑하는 만큼 너도 날 사랑해줬으면.
"나 너 사랑하는 거 맞나봐."
홍중은 눈가에 들고 있던 카메라를 내리고 성화의 눈을 보며 말했다.
성화의 표정이 살짝 굳은 듯하더니, 이내 풀어지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걸 지금 알았어?"
그랬다. 홍중은 성화가 자신의 봄이라는걸, 드디어 그 봄을 만났다는걸. 그때 알았다.
때맞춰 불어오는 봄바람이 봄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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