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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롱 데세(Ballon d'essai)>, 태은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12월 22일
  • 17분 분량


"쟤 배우야? 사람들 난리 났네."


바지춤에 넣어 입은 셔츠 밑단을 보지 않고 손끝으로만 정돈한 뒤에 허리춤에 손을 짚고 비뚜름하게 서는 자세는 습관에 가까웠다. 홍중이 테이블마다 휘황한 화훼 장식이 오른 원형 테이블 서너 개 너머로 보이는 장면을 가리키기 위해 옆에 앉은 최 기자에게 턱짓을 해 보였다. 쟤. 최 기자가 입가에서 잔을 떼고 턱을 추켜서 시선을 멀찍이로 던졌다.

아침 비행기로 인천에 도착했다. 한국 언론사에서 기자 노릇을 하는 손위의 이종사촌 최 기자의 경고를 듣고 외투를 챙겼는데도 충분치 못했을 만큼 추웠다. 홍중은 중학교를 마치고 바로 미국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재학 중에도 내로라하는 언론의 인턴을 지속하다가 졸업과 거의 동시에 미국 내 발행 부수를 기준으로 삼으면 매년 한 자리 순위에 머무르는 신문사에 자리를 꿰차고 기사의 부제 아래에 'By Hongjoong Kim'을 적어 넣은 지도 벌써 몇 년 째였다. 가족 단위의 이민이었으니 한국에 주기적으로 방문할 필요성도 찾지 못했으나 홍중과도 아는 형으로서 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최 기자 친구의 결혼식 일정에 맞추어 넉넉한 휴가를 마련하면서 여행을 겸하기로 결심한 결과였다.

곧이어 홍중이 재킷을 벗으면서 격식을 차리기 위해 가슴팍에 접어 꽂아 두었던 행커치프가 빠지지 않도록 부러 거두어서 주머니에 찔러 넣기까지 하느라 꽤 부산스러운 손길이 뒤따랐다.


"얼굴 대박이지. 근데 배우일 필요가 없는 놈이라서."


너는 또 혼자 뭐 하냐. 홀로 바쁜 홍중을 슬쩍 웃는 낯으로 보다가 약간 낮은 어깨에 장난스레 팔꿈치를 걸친 최 기자가 홍중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 왜 그래. 불유쾌한 표정으로 반대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홍중은 회장 옆에서 스파클링 와인용으로 맵시가 잘 빠진 잔을 들고 가벼이 묵례만 거듭하는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마선이 시원하게 드러나도록 넘긴 머리 아래로 드러나는 눈썹뼈와 콧대가 높고 굵직한 것이, 멋들어진 인상이었다. 누군가를 닮았는데. 그런 궁리를 하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있다가 뒤늦게 최 기자의 문장을 포착한 홍중이 어느새 멀어진 얼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필요가? 그게 뭔 소리야."

"이 집안이 비장의 카드로 숨겨 놨던 둘째 아들인데,"


아하. 홍중이 다소 판에 박힌 반응을 보이며 눈썹을 들었다 놓았다. 그러니까, 재벌 3세. 최 기자는 홍중의 반응을 뻔히 알아차렸다는 기색으로 웃었다.


"얼굴이 저러니까 자꾸 연예부에서 띄운다니까. 보도 자료 뜨자마자 우리도 난리였어."


얼굴이 저러니까. 홍중은 필요도 없이 비뚜름한 표정을 올렸다. 얼굴 잘나서 좋겠다. 얼굴까지 말짱하면 그야말로 다 가진 놈이었다. 홍중은 기자로서 갖가지 인간상을 겪어 보면서 세운 기준을 통해 사람을 손쉽게 골라 들였다. 저런 부류는 적당한 거리에서 필요한 만큼의 관계만 맺는 게 편리했다. 무릇 유용한 인연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었다.

홍중 자신의 모토를 인지하고도 사람들에 둘러싸여 차근히 인사를 하고 있는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홍중도 아주 모르지는 않는 존재였다. 얼마 전 차남의 계열사 입사와 함께 처음 노출된 것이지, 기자 몇만을 프레스로 들인 송년 파티의 주최 측인 AT그룹의 3세들에 대한 정보는 사실 지금껏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러니 홍중 역시 3세 중 하나가 계열사에 신입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홍중이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기억 중에는 없었다. 성화를 알게 될 경로를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홍중은 어디선가 이미 눈길을 사로잡힌 경험을 데자부처럼 체감하고 있었다.


"요새 바이오 키우잖아. 그만한 주력 계열사에 넣은 정도면 장남 제치고 경영 승계 못 박은 거지. 어, 잠깐만."


최 기자가 줄줄이 말을 잇다 말고 홍중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뒤쪽으로 인사를 하길래 홍중도 몸을 돌려서 사람을 맞이했다. 박 전무였다. 그렇다면 저 도련님의 삼촌. 머리를 굴려 금방 가족 관계를 정리한 홍중 역시 입꼬리만 올려 웃으면서 허리를 수그렸다. 박 전무가 최 기자를 특별히 초대할 만큼 절친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젊어지셔서 어떡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영약을 찾으셨으면 저한테도 좀 나눠 주셨어야죠……. 최 기자의 능청스러운 말에 홍중이 입꼬리를 눌러 내리는 인내의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뒤통수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홍중을 엄습했다.


"최 기자님이세요? 삼촌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어, 성화 왔냐. 여기가 최 기자. 말도 많고 시끄러운데 믿을 만은 해."

"아이, 전무님."


곁이 시끄러워도 홍중은 발치를 내려다보는 채 인상만 찡그리고 서 있었다. 성화. 그러면 박성화. 기시감이 드는 이름이라 가볍게 곱씹어 보는 중이었던 까닭이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지만 홍중과 가장 가까이 위치한 성화는 홍중을 돌아보지 않고 홍중 곁의 최 기자에게만 인사를 하고 있어서 홍중은 마음 놓고 성화를 뜯어보았다. 서글서글한 듯 웃어도 인상이 만만해 보일 수 없는 눈매였다. 간파하기 어려운 것들은 홍중의 기준에서 두 번째로 위험했다.


"안녕하세요. 입사 축하드립니다. 전무님이 자랑스러워하세요."

"뭐…… 낙하산이니까요."


성화가 눈을 둥그렇게 떠 웃어 보이면서도 적나라하게 배치한 단어로 인해 분위기가 잠시 굳었다. 최 기자가 애써 그 얼음장 같은 공기를 무시하면서 명함을 내밀었지만 성화는 여전히 빙긋이 웃어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거절의 신호로 받아들인 최 기자가 가벼이 입맛을 다시면서 조용히 손을 거두려던 차에 성화가 완전히 멀어지기 직전의 명함 끄트머리를 잡아들였다. 잘 갖고 있을게요. 그런 한 마디까지 덧붙이니 홍중이 다 진땀을 냈다. 완급 조절이 타고났다. 능숙한 게 재수도 없고.

홍중이 불퉁하게 슬쩍 눈썹을 들었다 놓았다. 박성화는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존재이기를 자처하고 있었다. 목적은……. 홍중이 머리를 굴리려다 말고 일순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부터 확인하고 무의식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성화가 홍중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무릎 뒤 오금에 힘이 들어갔다.


"저도 아는 기자 하나 만들어 놔야 하는데 이쪽은?"


이쪽. 성화가 홍중의 소개를 바란다는 뜻으로 가벼운 고갯짓을 통해 홍중을 가리켰다. 홍중은 자문해야 했다. 단순히 최 기자의 동행인이라는 사실만으로 홍중이 언단에 종사함을 성화가 지레짐작한 것일지, 혹은.


"아, 그쪽은 한국엘 간만에 들어온 거라서요. 홍중아."


참석 인원을 전부 보고받았을지. 또는. 홀로는 답을 낼 수 없는 질문에 습관처럼 안쪽으로 말아 씹으려던 입술에서 힘을 풀었다. 성화는 그 순간 부드럽고 도톰하게 풀어지는 입술의 목격자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김홍중이라고 합니다. 저희 지사가 한국에는 없어서 아쉽네요."


성화는 대답 없이 그러느냐고 확인해 묻듯 눈썹을 추켜세우고 홍중을 바라보는 꼴이었다. 형언하지 못할 모양새로 미묘하게 웃음기가 남은 인상이 마치 홍중의 입 발린 말을 책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단지 착각일까.


"그러게요, 많이 아쉽네요. 하나 들여올까요? 홍중 씨랑 가까운 데 있으면 좋을 텐데."


뭐라는 거야. 과장스러운 말이 명백히 홍중의 발언을 놀리고 있었다. 역시 재수가 없다. 홍중이 찰나에 콧잔등을 가벼이 찡그렸지만 작위적인 웃음으로 무마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서로 반대 손을 맞잡아 악수하고 멀어진 손은 홍중의 것보다 찼다.

전무님. 여기저기서 바삐 불리는 박 전무는 홍중의 쪽에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성화를 가리키더니 결국 성화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홍중에게는 차라리 달가운 일이었다. 별다른 버릇도 없는데 자꾸만 들여다보게 되는 잘난 얼굴이 고까웠다.

그러면서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손이 어느새 식어 있어서 살갗이 땅기도록 솜털이 올랐다. 이내 홍중은 최 기자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 휴대 전화를 잡아 든 쪽의 팔목을 살짝 건드렸다.


"형, 나 여기 좀 돌아보고 올게. 답답해서."

"그래라. 근데 너 미아 되면 이모한테 죄송스러우니까 적당히 돌아다녀."


비죽거리는 홍중의 표정을 만족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종종 있어서 홍중은 곤란했다. 하여튼 형도.


"그럼 뭐, 놀이공원처럼 방송 내는 거지."

"김홍중 어린이를 찾습니다? 어쭈. 그새 너스레가 늘었어, 김홍중."


으레 시간과 적응이 보장하는 변화가 존재했다. 홍중은 시간이 지나고도 변치 않는 것이 있으리라고 더는 기대하지 않았다. 홍중만 해도 많은 것을 버리고 새로이 몸에 익혔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우선하는 교과 외 활동을 선택하기 위해 10학년까지 속해 있던 밴드부를 그만둔 이래로 홍중은 손끝으로 박자를 타지 않았다. 차라리 그렇게 변화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데에 더 능숙해졌다. 테이블 위에 오른 손가락으로 의미 없는 다각형을 그리면서 코드를 애써 잊어갔다.

웃어넘기느라 최 기자의 어깨를 헐거운 주먹으로 짧게 치고서 손을 거둔 홍중이 구둣발을 뗐다. 느긋이 걸으며 건물을 구석구석 쑤석이고 다니는 동안 연회 홀과 널찍한 야외 공간을 전부 대여한 송년 파티에 최 기자의 인맥으로 초대받은 것이 누군가에게는 생각 이상의 횡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우스웠다. 과시와 질시. 실상 가진 것을 빼앗지도 뺏기지도 않고 누군가를 밑바닥까지 떨어뜨리기에 딱 좋은 공간. 그룹 측에서 인원의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서울 외곽에 구한 소규모 연회 홀은 규모와는 별개로 그것을 목적으로 마련된 건물이었다. 홍중이 유리로 된 측문을 막 열고 나왔을 때였다.


"조심."


조심? 무슨 조심. 상황을 판별하지 못하면서 홍중은 어떤 의미에서 바닥까지 굴러떨어진 기분까지 치달아서 정말로 가슴 한복판의 심장을 잃어버렸는지를 의심해야 했다. 홍중을 끌어당긴 갑작스러운 손길에 하도 놀라서 입술조차 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이제 보니 비명은 반사적인 반응 중 하나가 아니었다. 그조차 사치인 순간이 분명 존재했다.

이미 열 시가 넘은 시점에서 밤은 어두웠고, 게다가 홍중은 그림자 속에 갇혀 있었다. 야외의 조명을 등지고 홍중을 온전히 가릴 수 있는 사람. 건물의 구조상 문 옆으로 움푹 팬 틈에 둘이서 몸을 숨겨 두고 있는 꼴이 되어 있었다.

공간이 좁아서 마주 선 이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홍중은 괜스레 긴장이 바짝 올라서 침을 삼키면서도 울대가 요동하지 않기를 어딘가에 빌어야 했다. 꼴사나웠다. 목소리를 내기 위해 가까스로 마른 목구멍을 텄다. 홍중이 불러야 할 것은 그사이 이미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 박성화 씨?"

"잘 지냈어요?"


성화가 물었다. 잘 지냈느냐고. 그 질문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홍중은 하마터면 그렇노라고 무던하게 넘기고 말 뻔했다. 아까 만나고 지금 본 거 아닌가. 얘도 어디서 살다 와서 한국말을 이따위로 하는 건가. 그렇다면 홍중이야말로 이민자로서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적당한 답을 내어 주기로 했다. 찰나만을 함께 경험할 사람에게 입안의 혀처럼 굴어 주는 데에는 신물이 날 만큼 익숙했다.


"잘 지냈죠, 뭐. 얼마나 됐다고요. 근데 갑자기 왜……"

"보고 싶었어서."

"아, 네에……."


홍중의 의심은 금세 확신이 되었다. 아무래도 교포였다. 교포들은 표현에 적합한 시제를 혼동하는 경향이 간혹가다 있긴 했다. 비록 박성화는 앞서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고의 합리성을 재단할 새도 없이 홍중은 거듭 되새겼다. 홍중은 이 순간 성화를 반드시 납득해야 했으므로. 똑똑하기로 정평이 난 차남이 홍중에게만 비정상적으로 군다는 의심을 하게 될 것 같아서 홍중은 자신을 달래야 했다. 내가 뭐라고, 그리고 이 미친 도련님이 뭐라고 이렇게나 신경을 쓰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홍중이 넌지시 바깥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성화가 낱낱이 홍중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을 붙였다.


"교포 같은 거 아니에요. 약도 안 하고."

"아니, 약 한다고까진 생각 안 했……"


일순간 치받은 억울함으로 인해 말을 뱉다 말고 아랫입술을 끌어다 깨물었다. 졸지에 성화가 교포라는 얄팍한 결론을 내렸다는 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아서 홍중이 섣불리 이어질 말을 기워 붙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가장 위험한 게 나타났다. 영영 모를 법한 걸 기꺼이 알려 주는 인간들. 그것은 말하자면 고요한 거래의 신호였다. 홍중을 멋대로 공간 속에 끌어들이겠다는 모종의 종용.


"뭐 해요, 지금?"

"내 말은 듣지도 않을 거면서."


불평이 섞여 마땅한 말씨조차 여유롭게 읊조린 성화가 홍중의 손 하나를 잡아당기면서 자연히 놀란 홍중이 잡힌 손을 도로 당겨 보았지만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는 성화의 인상답지 않게 단단하게 버텨서 홍중이 물러서기가 가능치 않았다.

그 손에 휴대폰이 쥐어졌다. 정작 손아귀를 채운 홍중이 믿을 수가 없어서 멀거니 그것을 내려다보아야 했다. 이거 내 거 아닌데. 당연한 판단이었다. 홍중은 자신의 휴대폰은 반대 손에 들고 있었으니까.


"나랑 휴대폰 바꿔 써요. 홍중 씨 거가 맘에 드네."

"네?"


그 순간 반대쪽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가져가면서 성화가 말했다. 그러니 그마저 놓쳤다는 진술이 이어져 마땅했다. 홍중은 공항에서 한국 통신사의 유심을 갈아 끼운 지 하루도 미처 지나지 않은 휴대폰을 성화에게 속수무책으로 내놓고 멍해졌다.


"진짜 계속 그렇게 물어볼 거예요? 귀엽게 보이려고 그러는 거면 약간 성공하긴 했는데."


성화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도대체 알아차릴 수가 없었으므로 분명 다시 채근해 물어야 했는데 성화가 멋대로 뱉은 말에 걸려서 되묻지를 못했다. 귀엽게 보이려고. 그따위 이유일 리가 없었다. 성화가 그런 홍중을 알아차린 모양새로 입술을 맞물고 웃음을 눌러 참았다.


"연락할게요."


뭘 해? 뭘 하냐고? 애써 건들지 않아서 켜지지도 않은 화면을 내려다보면서 멀거니 있다가 성화를 놓쳤다. 문을 밀어 사라지는 꼴을 곧이곧대로 보고도 붙잡지 못했다. 성화의 발이 빠른 건지 홍중이 모르는 구석으로 빠진 것인지 정신을 차리고 코앞의 계단을 층계참까지 올라 봐도 성화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일인지 그 풍파 속을 쓸려 다닌 홍중조차 누군가를 이해시킬 만한 설명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인 터라 홍중은 머리를 쓸어 넘기려다 말고 마른세수를 했다. 호텔 욕실 거울 앞에서 급히 매만지고 온 머리라서 건들지 못했다. 손에 마른땀이 배는 느낌이었다.


"너 인마 전화는 왜 안 받아? 이 나이에 진짜 미아 된 줄 알았잖아."

"형, 받을 상황이…… 돌겠다, 진짜."


설상가상 최 기자가 홍중을 찾아 끌고 가는 바람에 성화를 더 찾을 수도 없었다. 홍중은 팔이 잡힌 채로 최 기자에게 빠르게 내뱉었다. 놔 봐. 나 휴대폰 찾아야 돼. 고단함에 소리를 쥐어짜느라 평소보다 또렷해진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최 기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도리어 건성으로 홍중을 듣는 최 기자 때문에 홍중은 머리를 싸매고 싶었다. 철 지난 개그 프로그램도 이렇게 대책 없이 진행될 것 같지는 않았다.

너 벌써 치매 걱정 해야 되냐? 거기 있잖아. 형은 무슨 말을 그렇게…… 이거 내 거 아니야. 그럼 그게 내 거냐. 이제 좀 가자. 아니 박성화가 휴대폰 가져갔다니까. 뭐 누가? 그래 박성화가. 어어 박성화가 그랬어…… 가자 너 취했다. 우리 지금 망원까지 가야 돼. 아 술도 안 마셨는데 뭘 취해. 나 휴대폰이 없다니까? 그래 내가 미친 거지…….




홍중은 눈을 부러 세게 끔벅이며 일어났다. 기기묘묘한 기억이 어룽거리는 꼴을 보니 꿈을 잘못 꾼 모양이다. 차근히 숨을 들였다 내쉰 후 스트레칭용으로 양팔을 위로 뻗치는 과정에서 허리가 바짝 땅겼다. 앓는 소리는 긴장의 정점이 아니라 외려 몸이 풀어질 때 밀려 나오곤 했다.

어제 한국 시간에 맞춰서 기상 알림을 설정해 놨는데 왜 안 울렸지. 바보같이 까먹었나 보다. 까먹었을 리가 없지만. 홍중은 필사적으로 일련의 생각을 하면서도 등줄기가 서늘했다. 설마, 제발. 설마. 페이스 아이디 잠금 해제를 위해 홍중은 눈을 비벼 뜨고 휴대 전화를 들어 올렸다. 최 기자와 파티를 벗어나 예비 새신랑이 합석한 자리에서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들이붓다시피 해서 끝내 호텔 방에 짐짝처럼 내버려진 기억이 스멀스멀 났다. 몰라 그냥, 마셔. 자고 일어나면 어떻게든 돼 있겠지. 지금 생각해 보면 스트레스성 폭음이었다. 머리가 무거워서인지 눈을 곧이 떠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실 휴대 전화를 확인할 마음이 쉽게 들지 않는 까닭은 따로 있었다. 홍중이 애초에 먹지 못하는 닭발을 눈앞에 두고 고사를 지내던 상황 이전에 벌어졌던 일은 그 고단한 술자리를 겪고도 잊히지를 않았다. 홍중은 그 몇 분만이 꿈이기를 빌고자 할 뿐이었다.


"…… 다시 자면 되겠지."


홍중을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주체는 휴대 전화이자 박성화였다. 홍중은 옆에 놓인 빈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무미한 신음을 흘리다가 휴대폰을 침대에 내던졌다.

동시에 전화가 울리던 순간이었다. 홍중 자신의 번호였으니, 다시 말해 전화를 건 상대가 박성화라는 의미였다. 내가 지 휴대폰 집어 던진 거 알고 전화했나. 할 수 있는 것은 성화의 전화를 받는 일이 전부였기에 다른 선택지를 결여한 채 마지막 방편으로 최대한 험악하게 목소리를 다듬어 내기를 택했다.


"여보세요."


웃음을 참는 모양인지 반대편에서 잠시 머뭇거린 순간이 그저 괘씸해서 홍중은 보이지 않게 주먹을 쥐었다.


- 일어났네요. 시차 적응 못 해서 자고 있을 줄 알았더니 목소리가 너무 멀쩡하네.

"휴대폰 내놔요."


이불을 신경질적으로 걷은 홍중이 간밤에 없는 정신으로도 비닐을 제거해 놓은 호텔 실내 슬리퍼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상태에서 가슴팍이 무릎에 닿도록 등을 수그리고 바닥을 살피다가 보인 살집 없는 맨발이 영 볼품없어서 홍중은 전화기를 들지 않은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찬기에 오그라든 발끝을 보면서 어쩐지 울고 싶을 만큼 서러웠다. 어제부터 왜 박성화 앞에서 제정신을 찾지를 못하는지.

마침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머리가 대체재를 찾기 시작했다. 피씨용으로 설치된 메신저라도 쓰려면 랩탑이 필요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에 대강 대꾸를 붙이면서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은 맥북을 찾아 맨발로 걸음을 옮기는 중에도 호텔 러그의 불유쾌한 촉감이 경고 알림처럼 감각을 건드렸다.


- 서운하게 인사도 안 해 주고. 잘 잤냐고 물어봐 줘요.

"옥체 강녕하셨습니까? 휴대폰 돌려줘요. 할 일 많아요."


이제는 웃음을 내리누를 노력도 없이 낮게 웃는 소리가 듣기에 좋아서 곱절로 짜증이 났다.


- 차 보냈으니까 나 보러 와요.

"내가 거길 왜 가요?"

- 내가 김홍중 씨 휴대폰을 인질로 잡아 놨으니까.


성화에게 숙소는 어떻게 알고 차를 갖다 놓고 있냐고 쏘아붙이려다가 이만큼 멍청한 질문도 없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쟨 지금 내 휴대폰 잠금도 풀어서 전화한 거잖아. 박성화가 못 할 건 없었다.

메신저를 사용하기 위해 맥북을 열고도 손이 가는 대로 뉴스부터 훑었다. 매일 익숙하게 체크하는 온라인 뉴스 취합 사이트를 벗어나서 한국 포털을 열어 본 것은 순전히 호기심이었다. 첫 화면부터 성화의 이름이 떠 있어서 기가 찼다. 이제 홍중이 성화를 비꼴 차례였다. 적어도 홍중은 그렇게 생각했다.


[AT 차남 박성화, 프라이빗 파티에서 핑크빛 밀회 ‘알아가는 중’]


"이야, 어제 바쁘셨네요. 누구랑 핑크빛 밀회를 또 하셨……"

"아, 그거 읽고 있구나."


홍중은 줌이 당겨진 휴대폰 카메라로 찍힌 데다가 조도도 낮아서 약간은 흐릿한 사진을 보며 빈정거리던 말을 멎었다. 부제 아래에 박힌 사진 속에 있는 인영은 구석에 박혀 있는 박성화와……


AT그룹 회장의 차남 박성화 씨가 열애설에 휩싸였다.

사생활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박성화 씨의 첫 열애설에 이목이 집중됐다. 박성화 씨가 그룹 송년 프라이빗 파티에서 미국 Z 포스트에서 기자로 재직 중이라고 알려진 인물과 밀회를 즐기는 장면이 포착됐다. 은밀한 구석을 찾아 다른 일행 없이 단둘만의 데이트를 즐기는 두 사람은 꽤 가까워 보인다. 측근의 제보에 따르면 박성화 씨는 몇 년 전 미국에서 김 씨를 만났지만 이후 인연을 지속하지 못하다가 최근 다시 만남을 시작하며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알아가는 중이다.

한편 박성화 씨는 최근 형제들 중 가장 먼저 계열사에 입사하면서 3세 경영 수업의 포문을 열었다.


…… 홍중이었다. 간밤에 성화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팔을 당겨서 갇히다시피 자리했던 그 공간에서 사진이 찍혔다. 알아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어디야. 어느 놈이야. 터치 패드 위에서 중지와 약지의 손끝을 굴려 스크롤을 내리자 기사 하단의 기자 이름과 인터넷 신문사 이름이 떴다. 홍중은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휴대 전화를 안중에 두지도 못하고 정신이 팔린 채 최 기자 쪽으로 알아봐야겠다고 메신저를 켠 참이었다.


- 차 도착했다네요. 내려가야겠다.


타이밍 한번 좋다. 어제부터 홍중의 속을 끓이는 완벽한 타이밍의 연속이었다. 홍중은 심호흡을 하고 소리 나게 랩탑 커버를 덮었다. 내 성질을 건드렸겠다.


"그래요, 어디 얘기 좀 해 보시자고요."




사람을 시켜 홍중의 휴대폰 잠금을 풀어 놓고도 다른 건 궁금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홍중이라서 궁금할 수 있었으나, 홍중이 성화에게 보여 주고 싶은 만큼만을 들여다보아도 충분해서 그저 휴대폰을 곁에 두고만 있었다.

벨 소리에 자연스럽게 돌아간 시야를 채우는 것은 최 기자의 이름이었다. 성화는 깊지 않은 고민 끝에 손가락을 움직여 수신 버튼을 눌렀다. 이 정도는 나중에 홍중에게 혼나도 감당 가능하겠지. 그렇지만 받자마자 쏟아지는 거친 목소리 때문에 순간적으로 귀에서 전화기를 멀찍이 내어 두는 상황은 예상에 없긴 했다.


- 야, 김홍중 너 뭐야. 어젠 박성화 아무것도 모른다더니.

"그렇게 부르면 홍중이 안 삐져요? 가족은 또 다른가."


성화는 그 어느 날의 홍중을 생각하느라 웃음이 났다. 남의 이름을 곱게 불러야 하지 않느냐고 을러 놓던 얼굴을 여전히 단박에 상상할 수 있었다. 남아 있어서, 잊히지 않아서 언제든 성화는 홍중의 상을 빚어낼 수 있었다.


- 네?

"나는 이름 예쁘게 부르라고 한 소리 들은 적도 있는데."

- 김홍중 씨 휴대폰 아니에요? 누구십니까?

"김홍중 씨 거 맞는데요. 아무것도 모른대요?"


한편 최 기자는 건너편에서 장난스럽게 돌아오던 말씨로부터 웃음기가 거두어지자마자 눈을 질끈 감고 안경을 브릿지부터 잡아 벗어서 책상 위에 내려 두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일이야. 최 기자의 질문을 받아 넌지시 둘러 답하는 이가 박성화임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없었다. 최 기자 딴에는 눈치채지 못할 눈치가 아니었고, 성화 쪽으로는 이름 석 자를 말하지 않는다고 모를 수 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제야 홍중이 술기운에 불콰한 얼굴로도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가운데서 반 이상을 차지했던 이름이 생각났다. 박성화가. 그래, 그 박성화가 말이야. 개또라이야, 그냥…….


- …… 안녕하십니까. 홍중이 거기 있습니까?

"홍중이보다 눈치가 빠르시네요. 이제 올 때 됐어요."


말과 동시에 성화가 널찍한 오피스텔의 문이 위치한 방향을 넌지시 건너다보느라 고개가 기울어졌다. 간단한 계산상으로 아마 지금쯤,


"야, 박성화 씨."


귀신 같네. 마침 홍중이 초인종을 놔두고 문을 부술 듯이 주먹으로 두드리는 탓에 성화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명백히 성화를 흩뜨리려는 의도가 보여서 그랬다. 홍중이 성화를 망치겠다면 그 상흔 그대로 망쳐지는 게 성화가 원하는 바임을 홍중만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바꿔드릴까요. 제가 동생 분 화나게 하긴 했는데."

- 아니요. 나중에 따로 연락하겠습니다. 들어가세요.

"네."


성화는 미련 없이 전화를 끊고 현관문을 열었다. 손잡이를 잡아 돌리기 직전에 켜지지 않은 휴대전화 화면에 비친 머리칼을 정돈할 만큼 성화는 마음이 우습도록 빠듯하게 차올랐다. 이유는 하나였다.


"저기요."


홍중은 여전히 기분이 나쁠 때 칠팔 년 전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사실이 못 견디게 좋아서 성화는 웃음을 참지도 않았다.


"응, 나도 보고 싶었어."


홍중이 고장 난 듯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를 배틀어 올렸다.




***




"그래서 그 측근이 누군데요?"


'측근'이 대개 명백하게 특정한 주변 인물을 칭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홍중이 누구보다 잘 알면서 마구잡이로 물었다. 그러니 실상 이것을 포인트로 삼는 것이 가당치 않음을 알면서도. 성화가 먼저 빈 컵을 내어 주고 이어 냉장고를 열어 물병을 꺼내다 말고 홍중을 돌아보았다.


"친구 많이 없어요. 홍중 씨도 없잖아요."

"누가 없…… 그 말이 아니잖아요. 누가 댁이랑 무슨 감정을 어째요?"


성화가 눈을 둥그렇게 떠 보이고 뭔가 생각하는 듯이 눈동자를 굴리는 동안 홍중도 그 검은자를 따라 쫓았다. 의도하지 않고도 벌어지는 일이었다.


"뭐…… 희망 사항일 수 있죠."


기껏 한다는 말이. 꼭 홍중을 도발하고자 마음먹은 태의 말씨가 이어져서 홍중은 입을 다물고 느릿하게 심호흡을 하면서 뜨거운 명치께를 달랬다.


"내 희망 사항이겠어요? 별로 안 사귀고 싶거든요. 난 신데렐라 되기도 싫고."

"신데렐라? 내가 왕자 같아요? 남주 재질 그런 건가?"

"아니……"


남주 재질. 솔직히 생각해 보지 않은 표현은 아니었기에 외려 원통했다. 자의식 과잉 미친놈인가 고민하다가도 저 정도 가졌으면 과잉은 아니라는 눈물 나게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고 말았다. 모든 사고를 미뤄 두고도 홍중이 황당함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자마자 눈을 감아 웃는 얼굴이 이제 냉장고 부근을 벗어나서 눈앞에 있었다.


"재벌집 막내아들 꼬셨다고 남들이 내 욕을 할 거라고요."

"근데 신데렐라가 왜 홍중 씨 욕이에요? 그거 왕자가 신데렐라한테 눈 돌아서 유리 구두 들고 다닌 얘기 아닌가?"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 가만히 좀 있어 봐요."

"응, 가만히 있을게."


성화가 붙들 꼬리를 내어 준 꼴이 뻔했으니 뱉고 아차 했다. 지금 가만히 있을 건 박성화가 아닌데. 이 상황의 설명을 해야 할 건 박성화고, 그 설명이 필요한 건 나인데. 홧김에 뱉은 말을 잡고 늘어지는 성화 때문에 홍중이 인상을 찡그리는 얼굴로 말문이 막혀서 성화만 쳐다보고 있었다.


"왜 봐? 가만히 있잖아요. 가만히."


어느 놈들한테 배웠는지 킹받네. 이거 한국에서 요새 쓰는 말 맞나…….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눈을 크게 떠 보이고 있는 재벌가 도련님을 보며 홍중은 울컥 치미는 모든 소리를 억눌렀다.


"가만히……"


홍중이 눈을 내리감고 두어 차례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쩐지 심기를 달래 주듯이 건네야 할 말이 명백했다.


"…… 안 있어도 돼요."

"알았어요. 홍중 씨 말 잘 들어야지."


왜 신이 났는지 도대체, 홍중은 성화를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얘 앞에서는 왜 이렇게 정신이 없냐. 벌써 지쳐서 식탁 위에 엎어졌더니 이마에 닿는 대리석 식탁의 냉기가 쩌릿했는데, 그마저 성화가 운을 떼자마자 억울해서 고개를 쳐들어야 했다.


"그래서, 진짜로 기사는 김홍중 씨가 낸 거 아니에요? 나는 선 자리 다 물 건너갔는데."

"아니랬죠. 그래서 끊길 선 자리면 박성화 씨 문제잖아요."


뱉어 붙이고서도 지나치게 무례하게 말했는지 괜스레 눈치가 보여서 쳐다봤더니 속상한 기색도 아닌 것이 입꼬리만 내리고 버틴 얼굴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얄궂었을 텐데 두 배로 얄미워졌다.


"표정이 왜 저래. 아, 그리고 그 미국 얘긴 뭐예요?"


몇 년 전 미국에서 김 씨를 만났지만 이후 인연을 지속하지 못하다가. 성화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아 홍중을 마주 보았다. 지그시 넘어오는 눈길에 홍중은 꼭 의자에서 미끄러질 것 같은 기분에 휘둘려서 엉덩이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때랑 말하는 건 똑같은데 진짜 기억 안 나?"

"뭐가요."

"나 아직도 너 먹여 살릴 수 있어."


홍중이 저도 모르게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어딘가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서늘했다.


"반말을……"

"우리 집 잘 사니까."


아, 설마. 성화가 물을 꺼내 주지 않아서 빈 컵뿐인 식탁 위를 마구잡이로 돌아다니던 홍중의 시선이 앞에 앉은 이에게로 튀어 올랐다.


"박성화?"


그 시절과 다를 것도 없이, 성화는 홍중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홍중은 잡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았고, 성화는 그게 무서웠다. 그때까지 어떠한 관계를 영위하면서 집어먹었던 적 없는 겁을 홍중만 떠올리면 거푸 삼켰다. 홍중은 성화를 반드시 유약하게 만들었다.


너 여기서 평생 살아?


성화가 대뜸 물은 것은 홍중이 이마를 덮은 머리칼 하나 건들지 않고 아시안답게 고루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버몬트의 보딩 스쿨을 다니던 때였다. 홍중은 실제로 성화의 저의를 알아차리지 못해서 눈만 가만히 깜박이기를 반복하다가 한참 만에 입을 뗐다.


그게 뭔 소리야.

여기서 같이 살까. 나 너 먹여 살릴 수 있는데. 우리 집 잘 살아.


치기의 정점이었다. 이런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집안 배경이라 함은 언제나 성화를 옭아매는 방해물 이상이 아니었다. 그러한 지위의 것을 자진해서 내보인 적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전무할 듯싶었다. 그렇지만 그 짧은 시간에 홍중의 옷자락을 잡을 수 있다면 턱없는 말이라도 괜찮았다.

홍중이 그러는 성화를 빤히 쳐다보았다. 말하는 사람을 곧장 바라보는 성화의 버릇이 벌써 옮아 왔을지도 모른다. 홍중을 무엇으로 보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아서 기분이 온전히 유쾌하지는 않았어도 어째 성화는 다소 진담인 것 같아서 괜히 가슴팍이 울컥였다. 우스워도 밉지 않아서 문제였다.


야. 돈 자랑은 다른 데 가서 해라.

알았어.

표정이 왜 저래. 빨리 오기나 해.


성화가 능청스러운 울상을 지어 보인 몇 년 전의 그날에 홍중은 분명 성화를 보며 웃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표정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야, 너 그러면 그……."

"너무 오래 까먹고 있었던 거 아니냐. 나는 맨날 생각했는데."


뭘 맨날 생각했는지. 홍중은 그걸 묻지 않고도 성화가 까닭을 모르고 울 듯이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




주먹질을 한 손이 아팠다. 그렇다고 다른 손으로 살갗이 까진 상처를 감싸 두고 싶지도 않았다. 성화가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제대로 발을 붙이기를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집안 측에서 마련한 어학연수는 초장부터 단번에 풀지 못할 모양의 매듭으로 꼬여 버리고 말았다.


야.


기대앉은 나무 아래에는 성화뿐이었으니 성화를 부른 것이 명백했다. 툭 불거진 말씨에 짜증이 뻗쳐서 성화가 고개를 반만 들고 눈을 치떠서 사람을 보았다. 눈꼬리를 손끝으로 눌러 눈을 가늘게 찢어 보이면서 웃고 가는 무리를 넘기지 못하고 반쯤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 한판 뒤집어엎은 사건으로부터 두 시간째였다. 비서에 이어 부친이 직접 걸어 온 전화도 몇 번을 거절했는지 셀 여력이 없었다. 그때는 성화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부정의에 부지런히 화를 내던 나이였다.


한국인 망신 좀 시키지 마. 너 한국인이라며?


말투와는 다르게 웃는 얼굴의 홍중은 옆에 앉아서 성화와 똑같이 무릎을 세워 앉았다. 성화는 홍중을 흘긋 보다가 무릎을 내려서 다리를 곧이 뻗고 앉았다. 앞으로 홍중을 거스르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 성화는 이렇게라도 객기가 필요했다. 그날은 홍중이 자잘한 웃음을 부스러뜨렸다.


어디 다쳤어?

뭔 상관이야. 가라.


불퉁하게 날을 세운 성화의 응대를 확인하자마자 홍중이 소리 내어 웃는 통에 성화가 고개를 홱 돌려서 웃음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성화는 무시당한 기분에서 행한 일이었고, 홍중은 원하는 바를 성취했다. 그 얼굴을 보고 싶었다.


뭔 상관이냐면 나는 여기 한인 학생회 회장이고……


감투를 말하는 얼굴이 묘하게 민망해 보이는 게 귀여웠다. 성화가 홍중의 쪽을 돌아보자마자 입술 옆으로 터진 상처가 보였는지 가뜩이나 큼직한 눈이 더 크게 트였다.


…… 잘했다고 칭찬해 주려고. 걔넨 뭐 신고해도 계속 그러니까 잘 팼어. 그리고 안 졌잖아.

잘 팬 게 뭐냐…….


안 진 게 중요한가. 말마따나 한국인들 이미지 다 깎아먹었는데. 그런 수틀린 생각이나 들면서도 성화의 역성을 들어 주기 위해 살가운 말씨를 꾸리는 홍중은 분명 친절했다. 싫지 않았다. 좋은 것 같기도 했다. 처음 보는 상대에게 으레 세우곤 하는 말씨가 누그러지는 모양새가 성화 자신에게도 느껴져서 이제 민망했다.

맞지는 말지……. 슬쩍 턱을 잡아 돌리는 손에 성화는 목을 버티지 못했다. 입가에 생긴 피딱지를 보며 질색하는 얼굴을 곁눈으로도 계속 쳐다보았다.

그날은 누군가에게 반하는 일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깨달은 날이었다.




***




성화의 집에서 휴대폰을 돌려받고 곧장 호텔로 가서 머리를 처박은 채로 몇 시간을 잤는지 헤아릴 새도 없었다. 홍중이 양심껏 약속을 잡아 놨더니 최 기자가 방송국 지하 카페에 마주 앉은 홍중을 쳐다보지도 않는 상태로 오 분가량의 시간을 흘려보낸 터라 홍중은 말 한 마디 꺼내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따지자면 홍중 역시 피해자라고 목이 터지도록 성토하고 싶었지만 최 기자의 싸늘한 낯은 그런 불평이 씨알도 먹히지 않을 표정이었다. 눈만 굴리는 홍중을 보며 결국 먼저 한결 물러선 최 기자가 한숨과 함께 말머리를 텄다.


"박성화 인터뷰 떴더라."

"박성화? 무슨 소리야."

"그걸 내가 물어봐야 되지 않냐? 배우 아니냐고 물어본 게 팔불출 멘트였던 건 꿈에도 몰랐다. 닭살 돋아."


의도하지 않은 홍중의 자충수였다. 기껏 기분이 좀 풀렸나 싶더니 다시금 불만스럽게 가늘어진 눈이 홍중을 향해 있었다. 인터뷰가 무슨 소리인지는 정말로 모르는 소리라 다분히 억울했지만 일단 최 기자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땐 진짜 몰랐어……. 알았어, 말 못 해서 미안해. 나도 정신없었어. 아무튼 그래서 박성화 인터뷰가 무슨 소리냐고."

"너 모르는 얘기야?"

"모른다고. 그건 진짜 몰라."


어깨를 슬쩍 으쓱여 보인 최 기자가 거침없이 포털 사이트의 모바일 화면 한중간에서 기사 하나를 눌러 켜고서 휴대 전화를 내밀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제 남의 휴대 전화에는 치를 떨게 되었어도 읽을 것은 읽어야 했다. 분명 타이틀에 단독 인터뷰라고 큼직한 폰트로 적혀 있는 줄을 스쳤는데 최 기자가 건네주면서 액정이 잘못 밀렸는지 글이 조금 넘어가 있었다.


"처음부터……"


미간을 좁힌 채 씹을 것도 없이 앞니를 자근자근 맞부딪느라 턱에 심줄을 세우던 홍중이 얼마간 말을 잇지 못하다가 중얼거렸다.


"얘 뭐래?"




***




"처음부터 제가 홍중이를 좋아했어요. 그러니까 그런 거죠,"


성화는 차근히 단어를 골랐다. 홍중을 다시 잡아 흔들 수 있을지를 알고 싶었던 순간의 기분으로. 그것을 반드시 확인해야 했던 그 순간 속에서.


"발롱 데세 같은 거요."

"그 발롱 데세요? 지금 그럼 처음 열애설 기사를 AT 쪽에서 터뜨렸다고 말씀하시는……"


성화가 부정하지 않고 허리를 세워 앉아서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저희 집안은 하나도 상관없고, 제가요. 일부러 냈어요. 홍중이도 지금 처음 듣는 얘기예요. 제가 홍중이한테 예쁨받고 싶어서 말한 적 없거든요."


아무리 셈해 봐도 리스크가 과도했다. 이미 핵심 계열사의 전략 부서에 발령받은 시점에서 성화가 여론의 시선을 끌어서 좋을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성화는 열애설을 택했다. 당연한 물음이 성화의 뒤를 따랐다.


"그룹을 대표할 것으로 모두가 예상하신 시점에서 조심스럽지는 않으셨나요? 왜 그러신 건가요?"


왜. 지당한 물음이었고 동시에 성화는 그만큼 답이 명백한 질문도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성화를 둘러싼 누구도 성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인터뷰어도, 카메라를 다룰 줄 안다는 이유로 인터뷰 사진을 찍으러 불려 다니는 신입 기자도, 빛이 밝을수록 짙어지는 조명 뒤의 그림자에 숨어든 구경꾼 중 그 누구도.

그 점을 성화 역시 이해했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허황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도 홍중을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성화를 제외하고.


"홍중이를 놓치는 것보다 더 바보 같은 일은 없으니까요."


어머, 영화 같네요……. 연예 프로그램 진행에 특화된 인터뷰어가 과장스럽게 감탄했다. 오랜 틈을 두지도 않고 성화는 쐐기를 박듯 부드러이 웃어 보였다.


"살면서 사랑하기 때문에 해야만 하는 일이 하나씩 생기잖아요. 저한테는 이 일이었어요."

"네에, 그랬군요……."


쉽사리 다음 질문이 이어지지 않아서 성화는 딴청을 할 수 있었다. 얼굴을 정면으로 비춘 조명이 훤해서 눈이 시렸다. 성화는 또 한 번 홍중과 올려다보던 해를 떠올렸다. 눈을 감고 선 홍중의 이마 위에서 손바닥을 내어 주던 같은 하늘 아래를 상기했다.




[영화보다 더한 재벌 3세의 순애보, 대한민국을 울리다]


순애보. 울긴 또 누가 울었고. 홍중은 헤드라인으로 뽑힌 문장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설설 저으며 스크롤을 내렸다. 이렇게나 단순 무식 유치찬란한 제목을 뽑는 것도 아마 능력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인터뷰 사진이라고 실린 성화의 보정 없는 낯에 자꾸만 손이 걸려서 글을 대강 훑어넘기는 맥이나마 거듭해서 끊겼다. 길지도 않은 인터뷰에 사진이 네 장이나 실려 있었는데, 홍중은 번번이 멈추어서 얼굴 구경을 했다. 낫긴 실물이 더 나았다.

그러한 생각의 근거를 얻기 위해 슬쩍 성화를 돌아보았더니 주인공은 정작 무감한 얼굴로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홍중은 그에게만 독점적으로 허락한 성화를 안아 오는 방법을 익히 알고 있었다. 어쩌면 홍중의 방식에 성화가 새로이 길들고 말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홍중아 사랑해…… 얼씨구. 박성화도 안 우는데 대한민국이 퍽도 울었어? 이런 게 먹히네."


그제야 근처에 서 있던 성화가 휴대폰으로부터 눈을 떼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시원을 찾자면 홍중이 성화를 마주할 때 웃음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방식은 달라도 같은 결과로서 홍중 역시 성화를 웃게 만드는 취미를 들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성화가 데스크탑 앞에 앉은 홍중의 곁으로 다가와 몸을 낮춰 앉은 상태에서 책상 모서리에 이마를 가볍게 기대고 홍중을 올려다보았다.


"요샌 로맨틱한 게 대세야. 낭만이잖아."

"내 사진이 너무 바보 같아. 너가 그때 갑자기 놀란 척하라고 해서 이렇게 나왔잖아."

"응, 그렇긴 하다."


홍중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미 성화의 입매가 파여서 한쪽 뺨이 더 깊숙이 밀려 있었다. 야. 홍중이 부르는 소리 그대로 성화가 고개를 가벼이 까딱였다.


"너 다시 말해 봐. 다시 말해 보라고."

"마지막으로 할 말? 사랑해."

"그거 말고."


홍중이 아프지 않게 이마를 미는 손에 고개를 젖히면서도 성화는 물러나지 않았다. 홍중의 손에는 뒤로 넘어갈 일이 없었다.


"그거 말고 뭔 말 했는지 까먹었는데."

"진짜 뻔뻔하시네요. 회사 미래가 밝다."


그새 무릎을 세우고 일어난 성화가 홍중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가만 어루만졌다. 살집이 많이 붙지 않은 어깨가 거슬리는 촉감으로 남는 것은 필시 애정의 다른 형태였다.


"사랑해. 인터뷰 읽었잖아. 너 놓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다고."

"그러니까 뻔뻔하다고. 언제 놓쳐 보기나 한 것처럼."


성화가 인터뷰에서 뭐라고 말했더라. 시니어 때 만났다가 성화가 귀국하면서 헤어져서 소식도 몰랐다고 말했던가. 다시 말해, 홍중이 성화와 그렇게 입을 맞추자고 머리를 맞댔던가. 무소용한 거짓은 머릿속에 제대로 남지도 못했다. 홍중에게는 누군가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만큼 당연한 사랑이었다. 다른 이유에 앞서, 홍중이 박성화를 그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지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홍중은 학교에 다닐 때부터 이미 암암리에 시작해서 여태 이어온 연애의 햇수를 세어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아. 휴가는 제대로 냈어? 아빠가 내일 저녁에 너 데리고 오래."

"아까 회장님이랑 연락한 거야? 이러려고 한 짓인데도 무섭네."

"뭐가 무서워. 내가 있는데."

"너 때문에 그래. 너 진짜 말 잘해야 돼. 이상한 소리 하면 안 돼, 어? 내가 니 얼굴 보고 만난다는 건 농담이었잖아. 그걸 왜 우리 엄마 앞에서 말해."

"내가 어머님한테 다 이른 거야."


홍중이 성화의 장난스러운 말투를 견디지 못하고 웃음을 내뜨렸다. 이 대국민 사기극의 전말을 창명하자면 재벌집 막내아들 꼬시기와 별다르지도 않을 터였다. 성화는 홍중에게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지위의 사랑을 안겨 주고자 했다.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사랑, 결코 틀어지기가 불가능한 사랑을. 이제 여론은 온전히 성화의 편이었다. 홍중을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성화의 집안에서도 없었다. 열기구를 띄운 성화는 아주 마뜩했다.

그러므로 더는 진실과 거짓의 구분이 무용했다. 명백한 사실 하나만이 중요했다. 박성화는 김홍중을 사랑하고, 김홍중은 박성화를 사랑한다. 아마 누군가의 생각보다 더 오래도록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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