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내 아를 낳아도!>, R0ZETA
- 계간 성홍
- 2022년 3월 21일
- 9분 분량
"마, 내 아를 낳아도!"
손이 덜덜덜. 다리를 벌벌벌. 무드 없게 건넨 꽃다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 뭐고. 꽃다발 크게 해 달라곤 했는데 뭔 금덩이를 넣어놨나. 왜 이렇게 무거워. 긴장감 때문인지 자꾸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팔에 팔자에도 없는 근육을 써 겨우겨우 직각으로 유지했다. 내일 근육통 쩔겠다. 원래 미인을 얻으려면, 아니지? 미남을 얻으려면 이 정도 수고는 해야 한다고. 암, 그렇고 말고. 한 번에 확답을 얻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한국인의 힘, 뱃심으로 밤새 생각했던 고백 멘트를 뱉어냈다. 멋있게! 거칠게! 자신있게!
"성화야, 너 약 빨았냐."
거리에 쩌렁쩌렁 울린 거친 고백 후에 따라오는 말은 고백보다 더 거칠었다. 그러니까, 그게... 나의 아기를 낳아달라는 게 고백인데.... 누가 그걸 모르냐. 내가 왜 니 애를 낳냐고. 내가 낳을 수는 없으니까? 미친놈아 뒤질래? 나는 뭐 낳을 수 있냐? 홍중아, 아니, 나는 너 좋아한다니까. 어쩌라고. 거칠거칠, 사포처럼 내 마음을 긁은 김홍중은 어째 자기가 더 상처 받았다는 표정으로 등을 휙 돌렸다.
"홍중아아, 김홍중!"
"너 따라오면 죽는다. 걍 연락하지 마."
쿵쿵. 쿵! 발을 크게 굴려 들으라는 듯이 소리를 낸 김홍중은 이내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빠져나갔다. 토요일 점심, 한참 사람이 많은 시간대에 웅성거리는 사람들과 허망하게 꽃다발을 든 박성화만 휑한 거리를 채웠다. 이 꽃 다발 10만원 주고 했는데. 김홍중이 들으면 기겁할 말이었다. 차라리 그 돈으로 밥이나 사 먹으라고 하겠지.
"근데, 홍중아 나는 니가 밥보다 더 좋다니까."
산 지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시들어버린 꽃다발을 품에 안고 박성화는 남모르게 눈물 두 방울을 흘렸다. (물론 거리에 사람이 많아서 남모르게는 아니고, 다들 봤는데 안타까워서 모른 척했다.) 금덩이 같던 꽃다발이 가벼워지고 박성화의 발걸음은 무거워지고. 무슨 법칙이라도 있는지, 하나가 가벼워지면 하나는 무거워졌다. 이게, 뭐더라. 머피의 법칙? 아, 아닌데.... 무거운 발걸음처럼 무거워진 머릿속은 까만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로서, 박성화의 아홉 번째의 고백이 차였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데... 김홍중이란 나무는 백 번은 찍어야 넘어갈 것 같아. 아, 역시 옛말은 맞는 게 하나도 없어. 성화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 듯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떼어 골목으로 몸을 옮겼다.
그러니까, 박성화가 김홍중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짧게 요약하자면~ 쿨해, 근데 그게 너무 섹시해 이 정도? 둘의 첫만남은 한 쪽이 술에 지배 당한 채 뒷골목에서 이루어졌다. 당연히 지배 당한 쪽은 성화였다.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김홍중의 모습에 박성화는 평소에는 안 할 대범한, 술에 잔뜩 취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을 몸소 실천했다. 술에 취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다리를 엑스자로 겨우 교차해 김홍중 앞에 걸음한 박성화는 냅다 김홍중 입에 물려진 담배를 바닥으로 던졌다. 뾰족하게 날 선 눈으로 박성화를 올려다보던 김홍중은 바람 타고 날아오는 술 냄새에 아씹, 잘못 걸렸네- 하며 먼지 하나 묻은 게 없는 자켓을 탈탈 털고 몸을 큰 도로 쪽으로 틀었다. 몸을 틀자마자 당겨지는 팔에 고개를 돌리면 벌건 얼굴의 박성화가 소심하게 두 손가락으로 옷 끝자락을 잡고 있었다.
"어디 가요?"
"집에요."
"담배 피지 마요. 몸에 안 좋잖아."
"예. 님은 저한테 말 걸지 마요. 기분 안 좋으니까."
그때도 사포처럼 거칠었던 김홍중은 잡힌 옷자락을 빠르게 빼내고 앞으로 발을 뻗었다. 다리를 뻗기만 하고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진 못했지만 말이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김홍중의 옷 끝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박성화에 헛걸음만 하던 김홍중이 한숨을 푹 쉬고 뒤를 돌았다.
"좀 놔. 뭐 하자는 건데."
"저 이제 말 걸어도 돼요?"
"아니, 안 돼. 대답만 해. 뭐 하냐, 너."
"그... 가실 것 같아서 잡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왜 잡냐고, 나를."
느릿느릿. 혀를 술에다 담구어 절여도 이렇게 느리진 않겠다. 김홍중의 말이 짧은 건 개의치 않는다는 듯 입을 오물거리던 박성화는 자신보다 시야가 낮은 김홍중을 한 번 흘깃 쳐다봤다. 뭘 봐, 씹. 용기내서 쳐다봤지만 돌아오는 차가운 반응에 박성화는 다시 바닥으로 눈을 깔고 옷자락을 잡은 손에 힘을 더 줬다. 몇 분을 그렇게 실랑이, 정확히는 그냥 김홍중이 노려보고 박성화가 눈 피하는 그런 요상한 행동을 반복하다 김홍중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할 말? 짧게 끊어진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 두 눈을 밝히며 고개를 끄덕이는 박성화에 김홍중은 대충 손을 휘휘 저었다. 귀찮으니 빨리 말하고 꺼지라는 뜻을 담은 손짓에 박성화는 원래도 붉은 두 볼을 더 붉게 밝히며, 공중을 가르는 김홍중의 손을 덥썩 잡곤 다물려있던 입을 열었다.
"저랑 친구해 주세요!"
엉망이었던 첫만남을 생각하던 김홍중은 촌스러운 고백 멘트를 갈겼던 박성화를 곱씹으며 폰을 집어들었다. 차단해야지, 씨발. 처음 만났을 때도, 틈만 나면 고백하던 때에도 어디서 들은 건지 거지같은 멘트를 치는 박성화를 용납할 수 없었다. 아니, 용납할 수 없어야 했다. 어디서부터 일이 꼬였지? 박성화가 첫 고백하던 날부터? 아냐, 그냥 처음부터 꼬였겠지. 술 취한 놈이 모텔 운운 안 하고 친구 어쩌고 하는 게 웃겨서 번호를 줬던 게 문제였다. 그, 뭐냐 생긴 것도 친구하기엔 나쁘지 않았고. 그래서 준 번호가 상황을 이 지경으로 몰고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진한 외모지상주의가 몸에 박혀있던 김홍중한테 박성화 정도 되는 얼굴이면 번호야 그냥 줄 수 있는 거였다. 친구? 남자 친구 되는 것도 가능한 거였고. 그 다음날 술 취해서 꼬장 부렸다고 죄송하다고 온 연락과 기프티콘만 봐도... 뇌가 덜 형성된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걸리는 건 더 없었고. 수틀리면 그냥 키링남으로 달고 다녀도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근데 지금 그 키링남이 몇 달 째 끊이지 않는 말썽을 부리는 탓에 김홍중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 이걸 아직 안 지웠네."
박성화를 차단하려 연락처에 들어갔다가 손이 미끄러져(진짜다. 진짜 미끄러져서 잘못 눌렀다.) 눌러버린 문자함에는 박성화의 첫 고백이 남아있었다. 술을 잘 먹지도 못 하면서 또 술에 잔뜩 취해서는 외계어를 문자로 한 바가지 보냈는데, 그걸 대충 해석해 보니 사귀자는 말이었다.
-ㅎ흐엉주아 느ㅏ랑 사긲가?
[사귀자고?]
-댕.
돌아인가.... 댕. 이지랄이네. 어이없고 허무한 첫 고백이었다. 이래 놓고 그 다음날 기억 못 한 건 더 최악이고. 그 이후에도 몇 번을 더 고백한 박성화를 김홍중은 끊임없이 찼다. 당연한 게 무수히 많은 고백들 중에 정상적인 고백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만우절에 전화로 고백을 하질 않나, 어디서 배운 건지 차 트렁크에 꽃과 풍선을 가득 실어와선 냅다 고백송을 갈기기도 했다. 그래도 트렁크 그건 나름 이벤트라고 기분은 좋았는데 한참 노래 부르는 중에 쏘카 직원이 차 픽업하러 와서 분위기 다 깨지고 남은 흥미도 다 깨졌었다. 그래, 무면허 박성화가 차를 어디서 구했나 했다. 얼떨떨한 그 직원 표정만 생각하면 아직도 밤에 자다가 이불을 차, 내가.
"신이 공평한 건 알겠는데, 꼭 이렇게 공평해야 하나."
그 얼굴에, 그 피지컬에... 다 좋은데 빼앗아 가려면 좀 지식 같은 거나 빼앗아 가지. 하필 가져가도 연애... 능력치를 가져가냐. 고백송이랍시고 노래 부르는 거 보니까 노래 잘 부르던데. 그냥 음치였으면 좋았을 걸. 한숨을 푹 쉰 홍중은 들고 있던 폰을 다시 내렸다. 차단은 나중에 하자. 차단했다고 노란 꽃 한 송이 들고 집 앞까지 오면 어떡해. 차단했다고 내가 자주 가는 길목에서 나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해. 진짜 그러면 어떡하냐. 손에 작은 꽃 한 송이 들고 좋아한다고 하면, 나는 뭐라고 하지. 너 진짜 미쳤냐? 아니면....
"아, 형 진짜 그랬단 말이에요?"
"응... 진짜로. 나는 그러면 받아줄 것 같아서."
"형, 잠깐만. 술도 못 하면서 뭘 자꾸 마시려고 해요. 콜라나 마셔요."
종호야아아... 형이 그렇게 별로냐? 아뇨. 형 멘트가 별론 거죠. 안주도 없이 소주로 목을 적시려는 성화를 종호가 제지했다. 그리곤 묵묵하게 소주병을 테이블 아래로 치워버린 뒤, 성화의 소주잔에 담긴 소주를 불판 위에 부었다. 형, 휴지 좀요. 휴지로 불판을 벅벅 닦은 종호는 달구어진 불판에 고기덩어리를 척척 올렸다. 우리 종호, 언제 이렇게 커서 형 구워주고... 고맙다. 에이, 형 저는 원래 컸어요. 분위기가 얼어있진 않았지만 퀘퀘한 기분에 장난스럽게 말을 던지면 눈치 빠른 종호가 웃음끼 가득한 말투로 성화의 기분을 풀었다.
"종호야 진짜 그냥 내가 싫은 거 아닐까."
"형, 문제는 마음이 아니라니까요."
"아니, 마음 말고 뭐가 또 있다고...."
"하아... 요새 누가 고백을 그런 식으로 하냐구요. 진중하고 솔직하게 해야지. 길거리에서 자기 덩치만한 꽃다발 주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형, 설마 무릎도 꿇은 거 아니죠? 꿇었는데... 물론 오늘 말고. 다섯 번째 고백이었나? 그때 반지 주면서 꿇었던 것 같은데. 동글동글한 눈을 홍중이처럼 치켜 뜬 종호의 시선에 이미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은 고이 접어뒀다. 백퍼센트 이건 입 밖으로 내뱉으면 욕 먹는다. 그게 그렇게 별론가. 아무말도 안 했지만 정말 싫다는 표정을 짓는 종호에 뼈가 두어 개 으스러진듯한 느낌이 들었다. 괜히 뻐근한 어깨 부근을 뚜둑 소리나게 풀었다. 그렇게 별론가 보네. 술 말린다.... 어느새 종호 앞에 자리한 소주잔을 가져올 자신은 없어 쌩 콜라로 목을 적셨다. 콜라가 쓰다, 써.
"형이 몇 번 고백했다고 했죠?"
"이번이 아홉 번째. 다음이 열 번째."
"그럼 딱 다음 고백까지만 하고 안 받아주면 포기해요. "
병나발... 아니, 캔나발을 불던 성화의 빈 잔에 콜라를 따라준 종호는 무심하게 성화를 위로했다. 형, 형 진짜 괜찮은 사람이에요. 그 형이 몰라서 그렇지. 그 말에 성화는 애매한 웃음만 흘렸다. 홍중이는 모르는 거 없는데- 하는 생각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또 경멸 섞인 눈초리는 받고 싶지 않아서. 앞 접시에 쌓이는 고기를 먹다보니 두 살이나 어린 동생한테 위로를 받는 신세가 꽤 초라하게 느껴졌다. 홍중이랑 처음 만났을 때도 종호와 술을 마신 뒤 바람을 쐬러 나갔을 때였고, 두 번째 고백을 했을 때도 종호랑 술 마시다가 전화로 했고.... 어쨌든 성화가 홍중이에게 불도저처럼 고백하는 걸 아는 사람은 종호밖에 없었다. 그래서 성화는 차인 뒤에 꼭 종호를 불러냈다. 그때마다 종호는 그만하는 게 어떠냐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게 쉽진 않더라고.
"형, 진짜 궁금했던 건데요. 대체 그 형 어디가 좋아서 포기도 못하고 그러는 거예요?"
뜬금없이 날아온 종호의 물음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홍중이의 어디가 좋냐고? 음... 전부 다? 이런 애매한 답이 아닌 확실한 답을 원하는지 눈에 힘을 부릅 준 종호가 고기 집게로 불판을 툭툭 쳤다.
"형, 우리가 본 세월이 얼만데 좀 솔직해져 봐요."
"얼마 안 봤잖아.... 3년?"
"그게 중요해요, 지금?"
화제를 돌릴 심산으로 던진 말이 화제를 돌리긴 커녕 오히려 더 불씨를 지폈다. 말 나온 김에 다 얘기합시다. 형 3년이면 서당개도 풍월을 읊는다는데, 이 정돈 말해줄 수 있잖아요. 그건 그런데.... 진짜 별 거 없는 이유라서. 물론 요약하지 않고 말하자면 이유야 많았다. 다 얘기하려면 그냥 김홍중 자체를 하루종일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지. 박성화가 김홍중을 좋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겉과 속이 다른, 하지만 어쩌면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항상 손가락에 끼고 있는 후원 반지나, 늘 새끼 손가락에 바르는 검은 네일, 신발에 새겨진 노란 리본 같은 것들이 김홍중을 둘렀다. 박성화는 그게 좋았다. 겉은 가벼워 보일지라도 속은 무거운 사람이라는 게. 그렇지만 한껏 치장한 겉도, 무던히 내버려둔 속도 멋있었다. 박성화 눈에는 그게 너무 멋있었다. 김홍중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멋있는 사람이었다.
"멋있어. 보면... 그냥, 멋있어."
"그게 끝이에요?"
"응, 별 거 없지."
"그렇네요. 그럼 왜 자꾸 장난스럽게 고백하는 거예요."
형 그럴 성격 아니잖아요, 돌 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널 사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종호를 보다 그냥 앞접시에 쌓인 고기나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무턱대고 고백하고, 장난스럽게 말하고... 그럴 성격이 아닌 건 제 자신이 더 잘 알았다. 한평생을 신중하게 살았으며 종호 말마따나 돌 다리도 두드려 보고 늘 건넜으니까. 근데 김홍중 앞에서는 그게 잘 안 됐다. 걔만 보면 자꾸 애가 타서. 내가 너무 좋아해서. 동등한 관계는 아니지만 어떻게든 관계라는 것에 엮이고 싶어서. 그래서 어느 순간 걔 가방 고리에 달린 검은 고양이 키링처럼 가볍게 걸리고 싶었다. 쉬운 사람. 그래서 곁에 두기 가벼운 사람. 그게 박성화의 목표이자 바람이었다.
"... 곁에라도 있으려고. 가볍게 만나는 친구 정도라도 좋으니까."
"형이 지금 하는 건 친구 사이 아닌 거 알죠. 얼핏 보면 갑을 관계야. 을은 당연히 형."
"응, 알아. 내가 원해서 옆에 붙어있는 건데 내가 을이지. 그냥... 나 좋으라고 하는 말이야. 우리가 친구라는 건."
"형 진짜 바보 같다. 근데 그 형이 형 안 좋아하는 건 맞긴 해요?"
나 같으면 친구랍시고 그렇게 백날천날 고백하면 싫어서 차단할 것 같은데. 안 그래요? 오래 구워서 질겨진 고기를 간신히 씹어넘긴 종호는 몸을 소파에 쭉 기댔다. 형이 말하는 그 형... 그러니까 홍중? 그 사람 성격을 보면 아닌 건 칼같이 끊어내는 것 같은데 왜 계속 받아주고 있겠어요. 자기 몸만한 꽃다발을 사람 많은 길거리에서 주면서 고백하는데. 그건 우유부단한 사람도 연 끊어낼 듯. 불판의 열기가 식어갈 때쯤 종호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형, 다 먹었죠? 이제 그만 일어나요. 형 오늘 꽃다발 산다고 돈 엄청 깨졌을 테니까 밥은 제가 살게요."
"아냐, 종호야. 내가 나오라고 했는데... 그리고 내가 형인데."
"됐어요. 그 돈으로 장미 한 송이나 사요."
밥 사 준 값 안 받겠다는 거 아니에요. 값 대신에 진지하게 고백이나 하고 와요. 그걸로 퉁. 저 이제 사랑 얘긴 즐겁게 듣고 싶거든요. 테이블에 놓인 주문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종호는 성화의 어깰 두어번 두드리곤 자리를 빠르게 떴다. 여태 했던 고백이 온전한 진심이 아니었던 게 티가 났나 하는 생각과 종호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홍중이도 느꼈겠지. 지금까지 했던 고백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 물론... 아예 진심이 없다곤 할 수는 없지만. 눈치도 빠르고 홍중인 머리도 좋으니까 다 알고 있었을 텐데 진짜 왜 거부를 안 했을까. 내가 좋아서 또는 재밌어서? 그렇게 흐지부지 고백을 하고 차인 다음날에 홍중이에게 연락을 하면 늦어도 꼭 답은 돌아왔었다. 어제의 그 고백이 꿈에서 일어난 일인 것처럼 아무 일 없는 듯이. 어떤 이유로 홍중이가 날 받아주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젠 정말로 온 마음을 다 해야겠지. 그게 결말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홍중아, 잠깐 만날까? 나 너네 집 앞이야.]
박성화다. 불 꺼진 거실 중앙에서 핸드폰 화면이 밝게 빛났다. 12시가 넘어가는 늦은 시간에 온 전화도 아닌 문자 한 통. 소파에 엎어져있던 홍중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이 시간에 누가 미리 언질도 없이 집에 찾아와. 진짜 예의 없어, 박성화. 궁시렁거리며 뱉는 말과는 다르게 몸은 빠르게 움직였다. 잘 보일 필요도 없고, 딱히 특별한 사이도 아니고. 그러니까 목이 늘어난 잠옷 차림으로 나가도 되는데.... 괜히 옷깃을 만지작거리던 홍중은 현관을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옷장을 뒤적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목 늘어난 잠옷 차림은 좀.... 여러 옷을 뒤적거리다 결국 늘 입던 후드 집업을 집어들고 새로 산 캔버스를 꺾어 신은 채 밖으로 미적미적 몸을 옮겼다. 막상 나오고나니 허둥지둥 나올 준비를 했다는 것을 숨기려는 듯 발걸음이 늦어졌다. 그냥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자는 척할까. 나오라고 한다고 너무 냉큼 나왔나. 이런 저런 생각으로 발걸음을 멈춘 채로 가만히 있으면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찾아왔다.
"홍중아, 늦은 시간에 연락해서 미안. 그...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어."
인사도 없이 말을 튼 박성화는 제 말이 끝나자마자 손에 들려있던 노란 장미 한 송이를 건넸다. 길 한복판에서 꽃다발을 건넸던 때처럼 손을 떨지도, 요란한 반지 케이스를 들고 무릎을 꿇지도 않은 채 조용하게 꽃 한 송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노란 장미. 분홍색도, 빨간색도 아닌 노란 장미. 그게 박성화다웠다. 특이하고 남들이랑 다르고. 그리고 애매한 게. 이쯤 되니 박성화의 속을 알고 싶어졌다. 꽃에 둔 시선을 위로 올려 박성화를 쳐다보면 평소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애매하고 복잡한 눈빛. 정적이 앉은 둘만의 공간을 김홍중이 먼저 깼다.
"성화야, 노란 장미가 무슨 꽃말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아?"
김홍중이 먼저 정적을 깼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한 번 긴 정적이 내려앉았다. 생각했던 질문이 아니었던 것인지, 할 말이 꼬여서 그런 건지 입만 달싹이던 박성화는 결국 입을 앙 다물었다. 입만 다물면 다야. 하여튼... 개짜증 나, 박성화. 홍중의 가슴께까지 올라왔던 꽃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정적은 길어졌다. 살짝씩 성화의 손이 떨리는 걸 본 홍중은 긴 한숨을 내쉬고 다시 한 번 정적을 깼다.
"변치 않는 우정."
"... 아."
"그리고 영원한 사랑."
성화야, 네가 나한테 그 꽃을 준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이야? 네가 처음 나한테 했던 말, 그러니까 친구하자는 그 말을 이제서야 지키겠다는 거야? 아님 여태 했던 그 고백들이 다 진심이었다는 거야. 확실하게 해 주라. 묵음 처리된 것 없이 다 쏟아낸 뒤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이번에도 장난이고, 우정이라고 하면.... 모든 게 장난이었음 좋겠다는 마음이 들 것 같아서. 이번만큼은 진심이길 바라고 있는 마음도 장난이길 바라고 있어서. 이상하게 박성화의 시선을 마주하기가 어려워졌다. 정말로 다 장난일까 봐.
"좋아해."
"... 거짓말 말고."
"농담 아냐. 진심으로 좋아해, 홍중아."
지금까지 했던 고백 중에서 진심이 아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장난스럽긴 했지만... 너를 내가 너무 좋아해서 그랬어. 미안해. 네가 너무 좋은데, 진심을 다 쏟아내면 네가 도망갈까 봐. 네 곁에도 내가 머물 수 없을까 봐. 겁이 나서 그랬어. 너한테 난 항상 쉬운 사람으로 있고 싶었어. 부르면 언제든 나가고, 가벼워서 곁에 둬도 무게감이 없는 사람. 그래서 내 고백이 부담되지 않을 관계를 만들고 싶었어. 친구라는 모순 안에 말이야.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되겠더라고. 나를 좋아해주지 않아도 돼. 나를 사랑한다 하지 않아도 나는 괜찮아. 그런데 홍중아, 내 아홉 번째 고백을 받으면서도 나를 밀어내지 않은 이유만은 알려 줘.
"넌 날 어떻게 생각해?"
"... 그게 궁금하면 우리 내일 다시 만나."
그 고기 냄새 밴 코트 말고 예쁜 옷 입고 내일 다시 만나자. 종종 가던 카페 말고 새로 생긴 카페도 가고, 매번 먹던 떡볶이 말고 포크에 파스타 돌돌 말아먹고. 밤엔 술 기운도 없으면서 얼굴 잔뜩 붉어진 채 산책하자. 손등만 부딪히지 말고, 손 잡고 갈까.
성화야, 내일만큼은 우리 친구 사이로 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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