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스카이 나이트>, 랙커
- 계간 성홍
- 2022년 6월 21일
- 10분 분량
*한국어/영어
그 날은 꿈에 커다란 혹등고래 한 마리가 나와서 밤하늘을 날아다녔다.
홍중은 닿지 않을 걸 알면서도 새까맣기도 하고, 또 은은한 보랏빛을 띄기도 하는 밤하늘을 향해, 반짝이는 혹등고래를 향해 팔을 뻗었다. 고래는 화답이라도 하듯 몸을 비틀어 팔지느러미를 제 쪽으로 내밀었으나, 아무리 팔을 길게 뻗어도 그 지느러미에 손이 닿지 않았다. 하염없이, 그 커다란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며 밤하늘을 유영하는 고래를 바라보다가, 잠에서 깼다.
7:30 AM
눈을 뜨면 낡아서 얼룩진 벽지 위로 붙여둔 흐릿한 야광별들이 보인다. 홍중은 으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5분만 더- 하는 마음으로 옆으로 돌아누웠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울리는 알람 소리에 결국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벙커침대 위에 앉아 잠시간 또 멍하니 있다가, 팔을 뻗어 침대 바로 옆에 붙어있는 창문의 블라인드를 치면 이른 아침에도 쨍한 햇빛이 방 안으로 가득 쏟아졌다. 얇은 담요를 한쪽으로 치우고 천천히 사다리를 내려온다. 딱히 허기가 지지 않아서 아침식사를 거르려다가, 바쁘게 일하다보면 금세 배가 고파지는 것을 떠올리곤 시리얼 박스와 보울을 챙겨들고 작은 식탁에 앉았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붓고 시리얼을 부은 채로 핸드폰을 확인한다. 늘 그렇듯 딱 세 통의 메세지가 도착해있다. '오늘은 한 시까지 출근해줘', '오전 9시 반 Lot 5 South 주차장 근처 물품보관함 41번, 비밀번호 0403', '오전 10시 30분까지 Scoops 앞 빨간색 벤치, 파란색 LA 다저스 캡모자'. 메세지 세 개를 차근차근 확인하고, 홍중은 눅눅해진 시리얼을 대충 입에 밀어넣다가, 이내 그마저도 대충 마무리하고 싱크 안에 시리얼 보울을 집어넣었다.
더운 날씨의 휴양지에선 새카만 무채색의 옷이 더 눈에 띄는 편이었다. 이른 아침에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해변을 따라 조깅을 하는 여유로운 사람들이 많은 동네이다. 옷장에서 흰 반팔티와 보라색에 가까운 군청색 하와이안 셔츠를 찾아 걸친다. 크로스백을 어깨에 메고, 가방 속 숨겨진 공간이 티나지 않도록 막아주는 지퍼가 문제 없이 잘 잠기는지 확인한다.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면 홍중은 그제서야 줄 이어폰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섰다. 오래 신어 밑창이 닳은 컨버스 하이의 풀린 신발끈을 대강 묶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즐겨듣는 노래가 귓가에 흘러들어오면, 그제서야 제가 살고 있는 곳의 화창한 날씨와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썩 유쾌하지 못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열쇠로 문을 단단히 걸어잠그고 손에 들고 있던 캡모자를 머리 위로 뒤집어쓴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9:32 AM
[Lot 5 South-Parking Lot]
바닷바람에 칠이 살짝 벗겨진 간판이 보이고, 홍중은 익숙하게 우측으로 방향을 튼다. 저만치 보이는 작은 벽돌 건물 옆에 붙어있는 물품보관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41번을 선택한 후, 0403 비밀번호 네 자리를 입력하면 41번 보관함의 문이 퉁 튕기며 열린다. 옛날에야 누가 저를 볼새라 주변을 살피기에 바빴지만, 이젠 그런 행동이 더 눈에 띄는 것이라는 행동이라는 걸 알았다. 너무 서두르지도 않고, 너무 느릿하지도 않게 걸음을 옮겨 41번 보관함 앞에 선다. 뒤로 메고 있던 크로스백을 앞으로 끌어온 뒤, 마치 가방 속에 복잡하게 들어있던 물건들을 잠시 정리하는 것처럼 자잘한 잡동사니들을 꺼내 보관함에 잠시 올려둔 다음, 보관함 안에 들어있던 작은 크라프트 봉투를 챙겨 들었다. 가방 안 가장 깊숙한, 남들은 찾아내기 어려운 숨겨진 공간에 봉투를 넣은 후 지퍼를 닫고, 나머지 물건들을 다시 가방 안에 차곡차곡 넣었다. 혹시 바닥에 떨어트린 물건이 있지는 않은가 한 번 더 살핀 후 보관함 문을 닫고 물건을 챙기는 동안 잠시 빼두었던 왼쪽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았다. 크로스백을 제대로 멘 후, 걸음을 옮긴다.
9:56 AM
[Cora's Coffee Shoppe]
약속 시간인 10시 반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은 터라, 홍중은 자주 가던 카페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침 식사를 해결하는 직장인들과 관광객들이 반쯤 섞여있는 모습이 보인다. 카운터 앞에 서서 분주해보이는 직원들을 익숙하게 기다렸다. 홍중의 존재를 눈치챈 레이나가 다가와 주문을 받는다. 주문을 위해 입을 달싹이면, 자주 오는 홍중을 알고 있는 레이나가 먼저 선수를 치곤 했다.
"자몽에이드 한 잔, 맞죠?"
"네, 맞아요."
"오늘은 머핀은 괜찮구요?"
"초코 머핀만 남아있나요?"
"아뇨, 플레인도 남았어요. 그걸로 드려요?"
"네, 부탁할게요."
웃는 얼굴로 주문을 받아주는 레이나에게 꼬깃한 현금을 내밀고 한쪽으로 자리를 옮겨 음료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재생되고 있는 노래를 바꾸기 위해 화면 스크롤을 열심히 내렸다. 듣고 싶었던 노래를 찾아내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걸고 있으려면, 곧 "에이치, 주문한 자몽에이드와 머핀 나왔어요-"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머핀이 담긴 봉투와 일회용 컵에 담긴 에이드를 받아들고 레이나에게 살짝 목례를 하며 인사를 건네고 가게에서 나왔다. 흘러나오는 노래와 날씨의 조화가 가히 예술이었다.
10:15 AM
[Scoops Ice Cream & Treats]
천천히 걸어 스쿱스 앞 벤치 테이블이 늘어선 곳으로 향했다. 벌써부터 쨍쨍한 햇빛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손에 쥐고 있는 에이드 컵 표면에 맺힌 물기를 연신 손으로 훔쳐내었다. 차가운 음료를 쥐고 있던 시원한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음료를 몇 모금 더 마신 후, 홍중은 파라솔이 쳐져있는 테이블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30분까지 여유롭게 기다리면 될 것이었다. 핸드폰의 잠금을 풀고 10분짜리 플레이리스트를 들어가 재생했다. 머핀을 꺼내 에이드와 함께 먹기 시작했다.
10:32 AM
문제다.
30분에 딱 맞춰 빨간 벤치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어야할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여태껏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매번 물건을 수거하러 오는 이는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늘 엄수였다. 단 2분도, 아니 1분도 늦은 적이 없다. 이건 필히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쪽에서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보다는, 당장 물건을 누군가에게 넘기지 못하고 제가 갖고 다녀야한다는 점이 더 걱정이었다. 갖고 다니다 강도라도 당하면? 경찰이라도 만나면? 다른 경쟁자라도 만나면? 아직 벌어지지 않은 시나리오들이 머릿 속에서 줄줄 이어지고, 홍중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핸드폰 잠금을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연락해야하나. 하지만 별 거 아닌 일로 연락을 했다간 위험 부담이 커진다. 아니, 근데 별 거 아닌 일이 맞는 거냐고.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패닉. 이어지는 상상들에 점점 패닉에 빠지기 시작했다. 홍중은 부러 호흡을 가다듬으며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그 어디에도 파란색 LA 다저스 볼캡이 보이질 않았다.
못 참고 손끝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와중에 1분이 흘러 시간은 10시 33분. 3분 정도는... 괜찮지 않나. 35분까지 기다려볼까. 손끝에 일어난 거스러미를 앞니로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벤치에 앉은 채로 다리를 달달 떨어댔다. 진작에 다 마셔버린 음료를 들었다 내려놨다 하는 사이 34분이 되었다. 와. 그냥 튈까. 튀어야하나. 그러나 제 집에 물건을 들고 돌아갈 순 없다. 어떤 위협을 받게 될지 몰랐다. 물건 전달에 있어서 시간엄수는 기본 중 기본이었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은 문제가 생겨도 단단히 생겼을거라는 소리인데, 그렇다고 해서 냅다 물건을 들고 집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가운데에 낀 홍중만 제대로 좆된 듯 했다.
"저기."
"예,예?!"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애타게 찾던 파란색 다저스 볼캡을 쓴 남자가 보였다. 홍중의 잔뜩 굳은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시계를 보자 시간은 35분. 그래, 5분 정도는 늦을 수도 있지. 가방을 열고 깊숙이 숨겨둔 물건을 꺼내 제 앞에 서서 뭔가 말을 걸려고 하던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면 남자는 물건을 받아서 빠르게 확인을 하고, 가방에 넣고, 해야... 하는데...
"... 이게 뭔가요?"
"... 사, 사람을 착각했나봅니다."
"예?"
"실례했습니다..."
"저기, 잠시만요!"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을 하고서 크라프트 봉투에 들어있는 물건을 순식간에 다시 채가는 홍중의 뒷통수에 다급하게 말을 건다. 와, 좆됐다. 어떡하지. 이거 들고 집에 가야하나. 미행이라도 붙었으면? 제 신상이 털리고 목숨까지 털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일단 여기 계속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는데, 남자가 계속 뒤를 쫓아온다.
"아니, 저기요."
"사람 잘못 봤다니까요."
"그게 아니구요."
"그게 아니면 뭔데요."
"제 취향이셔서 그런데 번호 좀... 달라는 거였는데요."
빠르게 움직이던 발걸음이 멈추었다. 벙쪄서 다시 뒤를 돌아 남자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멀쩡하게 생겼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잘생겼는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남자의 어깨 너머로 누가봐도 수상하게 생긴 남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홍중은 사방으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고서는, 동그란 눈에 상냥한 입매를 한 남자의 손목을 잡아쥐고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영문 모르고 홍중에게 손목을 잡힌 채로 밍기적거리던 남자는 둘 바로 앞에 있던 부바검프 레스토랑 표지판에 총알이 박히는 것을 발견하곤, 홍중의 손을 고쳐잡았다. 그리고 둘은 정신없이 달렸다. 따가운 햇살 아래, 소음기 달린 총에서 발사된 총알들이 여기저기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10:47 AM
[Downtown Santa Monica]
미친듯이 달려서 쇼핑몰에 도착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쇼핑몰에는 늘 그렇듯 사람이 많았고, 둘이 몸을 피하기에는 충분했다. 인파 속에 몸을 숨기고서도 혹시나 싶어서, 홍중은 남자의 손을 붙잡은 채로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 네."
"저기서 모자 하나씩 사서 써요. 옷도 바꿔입구요."
"... 쇼핑몰에서 나가면 각자 따로 가요."
"싫어요."
"총알 박히는 소리 못 들었어요...?"
"제 취향이라고 했잖아요. 그 쪽."
"아니 그렇다고 총 맞을 위기에 처했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막 도와주고 그래도 돼요?"
"검정색으로 하나씩 사서 쓰면 되겠다. 다저스 팬이에요?"
저기요, 홍중이 당황스러운 말투로 말을 걸어도 남자는 개의치 않고 검정색 볼캡을 두개 꺼내들고 곧장 계산대로 향한다. 뭐하는 인간이야, 대체. 딱봐도 위험한 일에 휘말렸다는 걸 모르나. 그렇게 멍청해보이진 않는데. 남자는 계산을 마친 볼캡을 가져와서는 홍중의 머리 위로 푹 눌러씌웠다. 그러곤 어느샌가부터 사라진 파란색 다저스 볼캡 대신 홍중의 것과 똑같은 모자를 제 머리 위에 쓴다.
"아까 쓰고 있던 모자는 어디갔어요?"
"뛰면서 벗어던졌어요."
"아. 잘하셨네요. 이제 각자 알아서 갈 길 갑시다."
"티셔츠 미디움이면 돼요?"
"라지, 아니, 저기요."
"헉, 이거 입으면 이쁠 것 같아요."
"지금 놀러온 거 아니잖아요."
"그쵸, 놀러온 건 아닌데 이거 얼른 갈아입고 나오세요. 계산은 제가 할게요."
그러면서 남자는 홍중을 탈의실 안으로 쭉 밀어넣었다. 얼레벌레 탈의실 안으로 들어와버린 홍중은 어쨌든 지금 입고 있는 옷을 입고 쇼핑몰을 벗어나봤자 그들의 눈에 띄기 쉽상이라는 생각에 궁시렁거리며 남자가 쥐어준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예쁘다."
"... 저기요."
"이거 계산할게요. 택 떼주시겠어요?"
"아니, 제가 계산할게요."
"헉."
"예?"
"이미 제 카드 줬어요."
"아, 진짜."
적당히 무난한 프린팅이 박혀있는 흰색 반팔티를 입고 나오자, 남자도 언제 갈아입었는지 아까와는 다른 티셔츠를 입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계산까지 제멋대로 해버리는 남자를 대체 어떻게 따돌려야 좋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하나 하고 잠시 멍을 때리는 순간 남자는 홍중의 손을 잡고 자리를 옮긴다.
"따라온 것 같아요."
"어디요?"
"두리번거리면 눈에 띄니까 고개 돌리지 말고 이쪽으로 와요."
총에 소음기가 달려있었지 아마. 가까이 접근하는 것에 성공한다면 소리없이 총 맞고 쓰러질 수도 있었다. 홍중은 남자의 손을 마주잡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우리는 지금 엘에이에 관광온 게이 커플이다... 쇼핑몰에 쇼핑하러온 게이 커플이다... 세뇌 아닌 세뇌를 하며 남자와 함께 너무 느리지도 않고 너무 빠르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차분하게 움직였다.
"근데, 이름이 뭐예요?"
"이제 궁금해진 거예요?"
"급할 때 저기요- 하고 부를 순 없잖아요."
"성화요. 박성화. 성화 팍."
"성화...? 한국인이에요?"
"... 그쪽도?"
"네. 김홍중이에요."
"헐. 이름도 귀엽네요."
"진짜 왜 그래요 대체?"
"홍중씨 제 취향이라서. 집은 어디에요?"
"근처이긴 한데... 오늘은 안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하긴. 미행붙은 것 같으니까... 그럼 제가 아는 사람한테 가요."
"... 믿을 수 있는 거예요?"
"아까 그거 약이죠."
"... 저도 잘은 몰라요."
"그럼 더더욱 제 지인한테 갑시다. 그 물건 계속 들고 다니는 게 더 곤란하잖아요. 처리를 하던지 해야할 거 아니에요."
"...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데요."
베가스요. 성화는 차분하게 답하며 홍중을 데리고 움직인다. 여기 건너편 공용주차장에 제 차 있어요. 베가스까지 다섯 시간은 걸릴텐데요. 가야죠, 뭐. 여기 계속 있다가 배에 총 맞는 것보단 나을걸요. ... 차로 가요.
12:47 PM
[Ontario Freeway-nearby Coyote Canyon]
미행들을 따돌리고 성화의 차를 찾아 한 시간 정도 달렸다. 프리웨이를 타고 쉴 새 없이 달리는 와중에 둘은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았다. 초면인 성화에게 무어라 푸념을 늘어놓을 수가 없기도 했지만, 홍중은 당장 베가스에서 돌아오면 뭘 어떻게 먹고 살아야하나- 하는 걱정을 하느라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성화는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인지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심각해보이는 홍중을 위해 침묵을 유지하는 중인 듯 했다.
"홍중씨."
"... 네?"
"저 앞에 맥도날드 있다는데 들렀다가 갈래요?"
"... 어..."
"별로 뭐 식욕이 생길 상황이 아니란 건 알겠는데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운전해야해서요. 튀김 냄새 맡으면 배고파질지도 모르고요. 어때요?"
"그래요."
홍중의 대답을 듣고서 성화는 손을 뻗어 라디오를 켰다. 캄캄한 앞일을 생각하느라 노래도 틀지 않은 채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답도 없는 제 상황과 달리 구름 한 점 없이 쨍한 날씨가 야속했다. 차는 프리웨이를 달리다, 익숙한 로고가 보이는 곳으로 들어섰다.
"뭐 먹을래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그럼 앉아있어요. 주문하고 올게요."
범죄자가 된 기분이 이런 건가. 아니, 따지고 보면 저는 범죄자가 맞을 것이었다. 뭔지 모른다고는 했으나 가운데에서 물건을 배달해주는 일을 했으니. 물건이 약인지, 아니면 또 다른 불법적인 물건인지는 알지 못했다. 모르는 편이 조금이라도 안전하기 때문에 물건의 정체에 대해 물은 적도, 궁금해한 적도 없다.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될 거란 것도 모르지 않았는데. 막상 현실로 닥치니 막막하기 짝이 없다. 성화는 어느샌가 햄버거가 담긴 트레이를 들고 와서는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앞에 놓인 밀크셰이크를 한 입 쫍 빨아들였다. 달착지근한 것이 입에 들어오니 걱정으로 바닥을 뚫고 들어갈 기세였던 기분이 그나마 조금 나아졌다. 앞을 보니 마주앉은 성화는 햄버거를 말 그대로 잡아먹는 중이었다.
"베가스에서 뭐하던 사람이에요?"
"와, 저한테 질문도 하시네요."
"이제 그만할까봐요."
"아이, 미안해요. 베가스에서... 음... 그냥 카드 좀 섞었어요."
"포커 딜러예요?"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치는 건 또 뭐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홍중은 더 묻지 않고 그냥 감자튀김을 집어 입에 밀어넣기만 했다. 카지노에서 일하니 뒷세계 일에 빠삭할 법도 하다 싶고. 그러니까 약... 을 잘 아는 지인에게 가자고 하는 거겠지. 이제서야 햄버거 포장을 열고 먹을 준비를 하는데 앞에 앉은 성화는 진작에 햄버거 하나를 다 끝내고 사이드로 시킨 너겟을 입에 밀어넣고 있다. 크게 입 벌리고 너겟을 집어넣는 타이밍에 눈이 마주친 게 웃겨서 참지 못하고 픽 웃자 뭐가 좋다고 저도 피실피실 웃기 시작한다.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17:43 PM
[Las Vegas Freeway-nearby Jean]
허허벌판, 사막같은 풍경을 보며 몇 시간이나 달렸을까, 성화의 핸드폰으로 켜둔 네비게이션 어플에서 곧 라스 베가스에 도착한다는 안내멘트가 흘러나왔다. 자도 된다며 좌석 시트 젖히는 법까지 알려주었지만, 홍중은 극구 사양하고 뜬 눈으로 내내 옆자리를 지켰다. 카 오디오에 연결해 제 핸드폰으로 이 노래 저 노래를 틀어가며 쉬지 않고 디제이 노릇을 했더니 썩 지루하지는 않았다. 맥도날드 옆에 있던 자판기에서 뽑아온 과자덕분에 입이 심심할 새가 없었으나, 동시에 입 안이 짜고 달고 난리도 아니었다. 저 멀리 라스 베가스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표지판이 보이고, 홍중은 팔을 쭉 뻗어 이리저리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가 운전석에 앉은 성화의 어깨에 손이 툭 닿았다.
"이제 저 좀 편해졌어요?"
"... 그건 아닌데요."
"스킨십이 좀 자연스러워진 것 같았는데."
"아니, 어깨에 손 좀 닿은 게 뭔 스킨십이에요."
"그럼 어떤 게 스킨십인데요?"
"손을 잡던가, 어깨를 끌어안던가, 포옹을 하던가. 뭐 그 정도는 돼야 그래도 스킨십이죠."
"음~ 키스도 하고?"
마지막 말을 하며 제 쪽을 슬쩍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 얼굴이 자극적이었다. 못본 척 삐걱거리며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을 열어둔 탓에 바깥의 소음이 시끄러워 잘 들리진 않았으나,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얼떨결에, 그것도 좋지도 않은 일로 엮인 사이인데 뭐가 저렇게 좋아. 속도 편하다.
"얼마나 더 가야해요?"
"앞으로... 한 삼십분?"
"해 질 때쯤 도착하겠네요."
"아."
"에?"
"일몰 보고 갈까요? 일몰 명소 아는데."
"갑자기요?"
"왠지 도착하기 전까지 홍중씨 꼬시기 성공해야할 것만 같아서요."
일몰 보면 꼬시는 거 성공해요? 모르죠.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죠. 원래 로맨틱한 환경에서 성공할 확률이 더 높아지잖아요. 높아지는 거지 확실한 거 아니잖아요. 홍중씨. 네. 원나잇 해본 적 없어요? 갑, 갑자기 그게 왜 나와요! 홍중은 당황한 탓에 삑사리까지 내가며 목청을 높였다. 아니, 아무래도 처음 본 사람한테 마음 생기는 스타일은 영 아닌가 싶어서요. 그런 말 잘도 뱉어놓고서는 멀건 얼굴이다. 얄미워져서 홍중은 성화의 팔뚝을 챱- 때렸다.
"원나잇은 안 해봤구나."
"아, 진짜!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저희 오늘이 처음 본 사이잖아요."
"..."
"그래도 기왕이면 좀 오래 보는 사이 됐으면 좋겠어요. 원나잇같은 걸로 끝나는 사이 말고."
"... 어쩌라고, 진짜..."
"일몰 보러 가자고요."
"맘대로 해요."
18:03 PM
[Seven Magic Mountains]
일몰 명소라며 성화가 데려간 곳에는 황량한 사막 위에 색색의 바위들이 탑처럼 쌓여있었다. 근처에 차를 세우고 내리면 저희처럼 석양을 구경하기 위해 라스 베가스로 가는 길목에서 잠시 멈춘 관광객들이 몇몇 있었다.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해져있는 바위들이 황량한 사막 위에 우두커니 서있는 게 이질적이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하나의 풍경처럼 잘 어우러져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엘에이에 꽤 오래 머물렀으면서도 라스 베가스에는 가볼 엄두도 못내던 홍중은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사막 위로 붉은 빛이 물들어있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벌리고 구경을 하던 홍중의 곁으로 성화가 다가와서 턱을 조심히 닫아준다. 합, 하고 입을 다물면 또 뭐가 좋다고 웃는 얼굴. 성화는 주차해둔 차로 걸어가 보닛 위에 슬쩍 걸터앉았다. 그 모습을 보다가, 또 뒤를 돌아 바위탑이 세워진 풍경을 보다가, 도리질을 몇 번 하다가, 홍중은 성화의 곁으로 향했다.
"어때요, 명소 맞죠."
"그러네요. 멋져요. 그냥 바위인데."
"오늘 하루 완전 정신없었는데 좀 씻겨나갔으려나?"
"... 조금요. 아직도 앞일 생각하면 막막해요."
"그건 제가 도와줄 수 있는데. 물론 제 도움이 싫을 수도 있지만."
"... 일단... 성화씨 지인한테 간 다음에 생각할래요."
다시 끊긴 대화에 멍하니 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차분히 바라보고 있으니 뭐 어떻게든 되겠지- 따위의 낙천적인 생각으로 이어졌다. 성화는 그런 홍중을 방해하지 않고 옆에 나란히 앉아 풍경을 바라보았다.
... 잠시만요. 평화를 방해한 것은 성화의 핸드폰 벨소리였다. 받아보라며 고개를 작게 까딱이면 성화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보스! 대체 어디십니까!
"... 네바다."
-베가스 가시는 중입니까?
"그래 임마."
보스... 들을 생각은 없었으나 수화기 너머의 상대방의 목청이 워낙 컸던 탓에 홍중은 그 두 단어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성화는 그런 홍중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통화 내용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자리를 옮겨 통화를 이어나갔다. 그쪽을 힐끔 바라보면 여지껏 보이던 여유만만한 태도와는 상반된 모습이 보였다. 자꾸만 홍중의 눈치를 보며 통화를 이어나가는 모습. 총 맞을 뻔하고도 차분했던 게 다 이유가 있었구만. 웃기게도 성화가 무시무시해보이거나, 갑자기 꼴보기 싫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퍼즐 조각 맞춰진 기분. 그래서 제 자신이 좀 웃겼다. 딱봐도 불법인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니 실은 이 타지에서 혼자 살아가기 시작한 후부터 늘 굳이 남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잔뜩 경계하며 살아오던 제가, 저 남자의 정체를 대충 눈치채고서도 고작 이런 반응이라니. 뭐 당장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갈 수도 없는 곳이긴 하지만, 아무튼 웃겼다. 그리고 별 거 없는 제 눈치 봐가며 쭈글거리는 저 남자의 모습도 좀 웃겼다. 아니 좀 많이 웃겼다. 반평생을 그래왔듯이 표정을 숨기려다가, 이 순간에는 솔직해지고 싶어서, 홍중은 그냥 웃었다. 웃기니까 웃는거지.
"... 미안해요."
"통화 그렇게 길게 하지도 않았는데요, 뭐."
"어... 그것만 얘기한 건 아닌데."
"딱히 상관없어요. 이미 이렇게 된 거."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완전 뒷세계 보스 뭐 그런 거 아니에요. 저 그냥, 그냥... 작게 도박장 하나 하는 건데... 그래도 역시... 보스는 좀 그렇죠...?"
변명 아닌 변명을 하더니 점점 주눅이 드는 게 좀 처량해 보이기도 하고. 근데 웃겼다. 그래서 홍중은 또 웃었다. 이번엔 소리도 내서. 푸핫-! 한 번 터진 웃음은 쉽사리 멈추질 않았다. 오늘 하루가 꼭 꿈같았다. 오히려 전날 꾼 꿈이 더 현실적일지도 몰라. 계속 웃어대는 홍중을 보던 성화는 굳어있던 표정을 슬금슬금 풀더니 베싯 웃어보인다. 히히. 꼭 장난끼 많은 어린 애가 웃듯이 웃었다.
"하하... 하... 아... 너무 웃어서 배아파..."
"뭐가 그렇게 웃겨요."
"그냥요. 다. 다 웃겨요."
"저도 웃겨요?"
"네. 보스 당신이 제일 웃겨요."
"아, 진짜..."
"처음 만난 사람이랑 이러고 있는 것도 웃긴데, 그 사람이 카지노 보스인 것도 웃기잖아요. 근데 그 보스는 내 눈치 엄청 보고. 영화라고 해도 안 믿겠다."
"처음 본 사람이랑 원나잇은 안 한다고 했죠?"
"왜 또 원나잇 얘기가 나와요-!"
"그럼 혹시 키스는 괜찮나 해서요."
"에?"
한참 웃느라 눈꼬리에 살짝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데 폭탄 발언이 떨어진다. 다음 순간 홍중의 시야에 가득 들어찬 것은 황량한 네바다 사막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형형색색의 돌기둥이 아니라, 풍경과 어우러지게 꽤나 잘난 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제 몸 어디에도 손은 대지 않고서, 얼굴만 기울여 입을 맞추는 모습. 가볍게 맞닿은 입술은, 그러나 그 의미만큼은 가볍지 않았다. 나른해보이는 눈빛 속에 숨겨진 초조함을 모르지 않아서, 홍중은 팔을 들어 성화의 목덜미를 붙잡고 제 쪽으로 당겼다. 묵직한 감정이 제 쪽으로 훌쩍 넘어왔으나, 싫지만은 않았다. 벌어진 입술 새로 오고가는 숨결은 따뜻하고, 달큰하다. 홍중은 감았던 눈을 슬쩍 떠 어느덧 거의 다 져서 어두워진 하늘을 보았다.
저 밤하늘 어딘가에서, 꿈에 나왔던 그 고래가 유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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