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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의 피터팬>, 두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9월 23일
  • 12분 분량

*좀비 아포칼립스

*사망 소재

*인체 실험과 동물 실험에 대한 간략한 묘사가 있습니다.





김홍중의 마을에는 지박령 같은 남자가 하나 있었다. 마을의 경계를 짓는 언덕 위 벤치에 앉아서 구름의 움직임을 보고,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굴뚝으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는 자였다. 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겪었던 옛날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누구는 그를 좀비 사태 음모론을 믿는 광신도라고 했고, 누구는 재능 있는 이야기꾼이라고 했다. 그의 이야기는 먼 옛날의 일이었다. 시체가 사람을 죽이는, 황폐한 피의 땅을 말했다. 그는 가끔 좀비 이야기와는 먼 말도 하곤 했는데,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어 머리를 긁적이다가 좀비를 죽이는 영웅 얘기나 해 주라며 그의 팔을 흔들었다. 그럼 그는 미소를 짓더니 어제 했던 이야기를 조금 바꾸어 다시 해 주는 것이었다.


그를 챙기는 것은 김홍중의 몫이었다. 챙겨 주라는 소리를 했지만 실제로는 그가 언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므로 감시하라는 게 이유였다. 모두가 하기 꺼리는 일은 천애 고아인 김홍중이 도맡아 했다. 그 남자는 몇 년 전 마을에서 버림받아 먼 곳을 떠난 노인의 말로는 그랬다. 밧줄로 목을 메어도 죽지 않고 평온했으며, 살점이 뜯겨 나가도 금방 새살이 돋는다. 우리가 발악을 해도 그를 이길 수 없으니, 그는 신이나 다름이 없다고 했다. 어른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다가가길 꺼렸지만 김홍중은 다르게 생각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인간을 사랑했다. 설사 인간이 그를 죽일지라도 그는 저항 하나 하지 않을 것이다.


김홍중은 그에게 갓 추수한 쌀로 만든 주먹밥을 가져다줬고, 그는 그런 김홍중을 늘 반갑게 맞았다. 그를 옆에서 보면서 알게 된 것은, 그는 미각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불로불사의 몸이 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 귀한 소금을 한 바가지 넣은 주먹밥도 세 입에 다 먹고 나서야 소금 넣었어? 하고 물었다. 맛이 짜서가 아니라, 으득으득 씹히는 것이 있어서 알았댄다. 김홍중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면 그는 재밌는 장난이네, 하고 말았다. 그는 김홍중이 가져다주는 주먹밥을 항상 고마워했다. 속이 들지 않은 퍽퍽한 밥뿐이라도 그는 맛있게 먹었다. 한 알 한 알 씹다가, 으스러진 밥알마저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나면 박성화는 입맛을 다시다가 김홍중에게 오늘은 무슨 얘기 해 줄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좀비를 무기로 으깨는 얘기나 하던 그는 김홍중에겐 다른 결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낭만으로 가득한 이야기.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 환상 같은 이야기. 김홍중은 이런 이야기를 좋아했다. 김홍중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늙지 않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피터 팬의 이야기를 하는 그는 정말 자신의 이야기를 뱉는 것처럼 말해서, 김홍중은 멋대로 그를 모델로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피터 팬을 상상하게 됐다. 늙지 않는 그와 그 옆의 아이들. 김홍중은 이 동화에 영원히 들어가지 않을 제3자 독자 정도가 되겠고. 김홍중이 이야기가 좋다고 말할 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웃고만 있었다. 어떻게 아냐고 물으면 그냥 그럴 것 같았다고 둘러대기만 했다. 김홍중은 늙지 않는 노인은 이런 것도 아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가 김홍중을 잘 아는 건 이뿐만은 아니었다. 머리카락의 색소를 빼고 화려한 색으로 머리카락을 채우는(그는 이것을 염색이라고 했다) 약이라던지, 생전 처음 듣는 음악을 흥얼거리더니 김홍중이 관심을 갖자 네가 좋아할 줄 알았다며 웃는 얼굴은 불편함과 편안함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벤치는 언덕 끝에 있어서 평평한 마을이 다 내려다 보였다. 김홍중은 아무 생각 없이 쌀 포대를 이고 어기적 걷는 아저씨를 봤고, 그는 하늘을 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김홍중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붉은 단풍잎 하나를 건넸다.


"자."

"뭐?"

"옛날엔 그런 게 있었어. 벚꽃 잎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얘기. 근데 여긴 벚꽃 나무가 없으니까 단풍잎으로."

"이걸 왜 나한테 주는데."

"보답이야."

"무슨 보답."

"그러게."


그는 김홍중의 눈을 봤다. 김홍중은 그 눈에서 쓸쓸함을 느꼈다. 애틋함과 외로움. 그리고 기쁨까지도. 김홍중은 결국 그의 손에서 단풍을 받아 들었다. 그깟 단풍 따위 버려도 상관없었지만 가슴에 꼭 품고 돌아왔다. 단풍에서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날 밤 김홍중은 꿈을 꿨다. 연분홍 동그란 잎들이 바람에 마구 휘날리는 장면. 김홍중은 벚꽃 나무를 것을 본 적이 없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그토록 바랐던 벚꽃 나무였다는 것을.


/


h2437은 최초로 생물 병기 실험에 성공한 인간 육체였다. 다만 그가 캡슐에서 눈을 떠 나온 게 실패작들이 인간을 모조리 잡아먹고 난 후였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었다. 시체들은 가짜 인간인 h2437에게 관심이 없었고, 그는 외롭게 떠돌았다. 인간에게도 버림받고, 인간이 아닌 것들에게도 버림받았다.


h2437은 사람을 찾아 떠났다. 다 떨어진 라이터와 건전지가 나간 손전등이 남긴 흔적을 따라갔다. 인간의 모습을 한 가짜와 그에게 무관심한 시체들의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h2437이 더 멀리 더 아래로 향했을 때, 갓 죽은 실패작을 찾았다. 이미 한 번 죽은 육신이 다시 죽는다는 건 모순적이면서도 설명할 수 있는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h2437은 뼈가 뒤틀린 그것을 잠시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걸었다. 사람을 찾아야 했다. 생물 병기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있는 거니까. 그 임무를 착실히 수행해야 했다. 그리고 곧 무너질 듯한 허름한 집에서 만났다. h2437이 지켜야 할, 척박한 땅에 남은 생존자를.


생물 병기는 흠이 없어야 한다. 미각과 같은 불필요한 감각은 제거하고, 재생 능력과 같은 것은 대폭 강화했다. 아마도 그것이 비현실적이면서 욕심만 살아있는 시체를 만든 원인이었을 것이다. 감각을 제거했지만 그 욕구는 제거하지 못해 사람을 물어뜯는 괴물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h2437은 최고의 성공작이 아닐 수 없었다. h2437은 어렸을 때 먹은 컵에 담긴 떡볶이의 맛을 생각했다. 까마득한 옛날 일이었다. h2437은 손에 든 색이 퍼렇게 변한 통조림을 내려놓았다. 그 역겨울 맛도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성공작조차 인간의 사랑을 향한 욕구라는 건 제거할 수 없었나 보다. h2437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제 앞에 있는 금발 머리 남자를 위해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리가 없으니.


그는 자신을 김홍중이라고 소개했다. 기숙사에 살았는데, 좀비를 피해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했는데 그게 이곳이었다고 했다. 김홍중은 의심의 눈초리로 h2437을 보면서도 라면 한 그릇 건네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h2437은 그 라면의 뜨거움도, 맛도, 향도 느낄 수 없었지만 그냥 먹었다. 김홍중은 옆에서 너 되게 맛있게 먹네. 했다. h2437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을 정말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서, 그 말 들은 적 있는 것 같아. 하고 대답했다. h2437은 김홍중과 많은 날을 보냈다. 오늘만 재워주는 거야. 하는 김홍중은 매일 생물 병기를 옆에 뒀다. 네가 길 잃고 헤맬까 봐, 다쳐서 쓰러질까 봐 등 다양한 핑계를 댔지만 다 소용없는 말이었다. 김홍중은 h2437이 생물 병기라는 것을 알았고, 다치지도 죽지도 않을 것이고, 고작 길을 잃는 것은 그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도 알았다. h2437은 김홍중의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없어서 왜 그러냐고 물었고, 그가 날밤을 새며 고민하게 한 행동을 김홍중은 쉽게 정의했다. 글쎄, 내가 너 좋아하나 보지. 그때 h2437은 처음으로 심장이 뛴다는 느낌을 알았다. h2437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니 김홍중은 너 어디 아파? 하고 물었다. 아플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김홍중은 h2437을 걱정했다. h2437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아니, 나도 널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하고 대답했다. 김홍중은 허, 하고 웃더니 h2437의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렸다.


김홍중은 h2437의 이름을 늘 신경 썼다. h는 뭐냐고 물었고, h2437은 그건 나도 몰라. h2437은 내가 몇 번째 실험체인지... 그거 말하는 걸 거야. 하고 대답했다. 김홍중은 얼굴을 찌푸렸다.


"실험체가 2437명이나 있었어?"

"응. 쥐나 다른 동물들로 했으니까. 인간은 내가 처음이었어. 숙주도 쥐였을 거야."

"인류애 없어진다..."


원구원들은 뭐 하고 있는데. 아마 다 죽었을걸. 연구소에 자료들 다 그대로 있더라. 지들 살려고 만들어 놓고 지들이 가장 먼저 뒤지네. 김홍중은 혀를 한 번 쯧 차며 초코바를 반으로 똑 잘라 h2437에게 건넸다. h2437은 그걸 받아 입에 넣었다. 쫀득한 캐러멜의 식감이 혀를 감쌌지만 역시 단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이에 달라붙는 초콜릿이나 혀로 쓸어 보았다.


"너 이름 지어라."

"갑자기?"

"넌 이제 실험체가 아니니까. 내... 음... 아무튼 그거니까."

"내가 뭔데?"

"몰라서 물어?"

"응."

"애인... 아 됐어. 그냥 정해."


김홍중은 어디서 발견한 건지 모를 작명 책을 펼쳐 하나하나 짚었다. 이건 어때? 별로야. 이건? 싫어. 이거는. 촌스러워. 넌 좋은 게 뭐냐? 글쎄. 홍중이 같은 이름 갖고 싶어. 그건 또 뭐야. 그럼 김홍중 2세 하든가. 그건 싫어. 책을 곰곰이 살피던 h2437는 눈을 반짝였다. 이걸로 할래.


"화성?"

"응."

"좀 많이 구린데."

"그래도 하고 싶어."

"그럼 성화로 해. 거꾸로 바꿔서."

"좋아."


그래 박성화야. 김홍중이 입 다물고 작게 웃었고, 성화도 따라 웃었다.


"박은 뭐야?"

"그냥 아무거나 붙인 거. 김 씨는 형제 같아서 싫어."

"그렇구나. 그래 그럼."


비로소 박성화의 삶이 시작되었다. h2437은 그날로 죽었다.


김홍중은 박성화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캡슐 안에 살던 박성화의 공백을 채워주려고 생존하기 바쁜 세상에서 두꺼운 책을 읽었으며, 그 내용을 잠들기 전에 박성화에게 말해 주었다. 제 취향이 아닌 이야기를 할 때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툭툭 뱉듯 했고,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쾌활하게 말해 주고는 했다. 박성화는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인물이 사는 이야기보다도, 김홍중의 생기 있는 목소리가 좋았다. 그래서 박성화는 잠에 들기 전 시간이 좋았고, 어둑한 밤이 되기만 기다렸다. 평범한 인간인 김홍중이 느꼈을 공포는 공감하지 못한 채, 애써 두려움을 잊으려는 목소리는 눈치채지 못한 채.


김홍중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피터 팬과 어린 왕자였다. 박성화가 기억하는 건 피터 팬뿐이었다. 어린 왕자를 이야기해 준 날에는 하필 비가 세차게 내려서, 빗소리에 김홍중의 목소리가 묻혔다. 그땐 표면에 부딪쳐 나는 빗소리와 어렴풋이 들리는 김홍중의 목소리가 좋아서 잠자코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박성화는 조금 후회하는 것이었다. 그날 좀 더 귀 기울여 들었더라면, 아니면 차라리 나중에 한 번 더 얘기해 달라고 했더라면. 그랬다면 걔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시간을 타고 기억 속에서 사라지진 않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김홍중과 다르게 박성화는 할 얘기가 없었다. 김홍중이 할 말을 잊어 입을 꾹 닫아 정적이 생길 때면 박성화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 입술을 벙긋대다가 달리 떠오르지 않아 다시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대신 방금까지 말하던 주제와는 상관없는 이상한 질문이나 했다. 주로 피터 팬에 대한 얘기였는데, 피터 팬은 무슨 옷을 입었어? 후크 선장은 어떻게 생겼어? 와 같은 맥이 없는 질문이었다. 그럼 김홍중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고 불평하면서도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초록색 옷이었을 거야. 후크 선장은 쓰레기 같이 생겼을걸. 안 봐도 뻔하지. 하고. 박성화는 그렇구나.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 그러면 웬디는 어떻게 됐어? 하고 물었다.


"늙어서 죽었겠지?"

"그럼 왜 네버랜드에 살기로 하지 않은 걸까? 사람들은 죽는 걸 두려워하잖아."

"어린 애한테 죽음은 너무 먼 얘기 아니야?"

"하지만 사람은 언젠가 죽어."

"글쎄. 영원히 안 늙는 게 그렇게 좋게 느껴진 건 아닌가 보지. 아니면 죽는 게 무섭지 않았거나."

"음..."

"내가 웬디는 아니어서 모르겠는데, 내가 볼 땐 웬디는 죽는 걸 무서워하진 않을 것 같아."

"..."

"그리고 죽음이 있는 게 그렇게 나쁜 건 또 아니거든."


박성화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김홍중은 그 얼굴을 보고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네 얼굴 지금 되게 웃겨. 하더니 호탕하게 웃고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평생 모를걸. 넌 안 죽잖아."

"그럴 것 같아. 아직도 이해를 못 했어."

"엉. 그냥 모른 채로 살아도 돼. 그냥 내 옆에만 있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 없겠지만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 게 무서워질 것 같거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냥 알았다고 해."

"알았어."

"그래. 잘 자."


/


김홍중은 언덕을 올랐다. 올해는 풍년이 들어 김홍중이 먹을 수 있는 밥도 늘었다. 더불어 그에게 주는 밥 뭉치도. 김홍중은 그가 앉은 벤치 옆에 주먹밥이 담긴 그릇을 얹었고, 그는 고개를 돌렸다.


"먹어."

"고마워. 잘 먹을게."

"맛도 안 느끼면서."

"주는 게 고마운 거지."

"먹기나 해."


그는 주먹밥을 한 입 크게 물었다. 볼에 한가득 차도록 넣고는 오물오물 씹었다. 김홍중은 그 모습을 관찰하다가 말했다.


"나 벚꽃 나무 봤어."

"응?“

"꿈에 나왔어.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나뭇잎이 다 분홍색인 이상한 나무 아니야?"

"맞긴 한데, 그건 나뭇잎이 아니고 꽃잎이야."

"그게 그거지."

"보니까 어땠어?"

"귀찮을 것 같던데. 바람 조금만 불어도 다 떨어지더라. 내가 낙엽 쓰느라 얼마나 고생하는데. 그것도 있으면 나 과로로 죽어."

"그게 낭만인 거야."

"뭐가 낭만인데."

"단풍잎 떨어지는 거랑 같은 느낌이야."

"둘 다 귀찮기만 한데."


그는 김홍중의 말에 말없이 씨익 웃더니 갑자기 단풍잎 하나를 건넸다. 구멍 하나 없이 말끔한 걸 보니 다 똑같아 보이는 잎 사이에서 고심해 모양이 예쁘게 떨어진 단풍을 고르는 것 같았다. 김홍중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흘긋 보다가 결국 받았다. 이런 걸 왜 자꾸 주는 거냐며 퉁명스레 말하면서도 혹시 으스러질까 조심히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도 꿈 꾸는 거 아니야? 네가 단풍잎 줄 때마다 꿈 꿔."

"꾸면 되지. 꾸고 나한테도 얘기해 줘."

"별 꿈도 아니긴 한데... 알았어. 그게 뭐가 좋다고 들으려 해?"

"그냥 네가 하는 얘기면 다 좋아."


네가 하는 얘기면 다.


/


김홍중이 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갑자기 폴짝 뛰었다. 묵묵히 옆을 걷던 박성화가 깜짝 놀라 옆을 봤다. 왜 그래?


"선물이야."

"이게 뭔데?"

"벚꽃 잎."

"갑자기?"

"벚꽃 잎을 떨어지기 전에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미신이 있어."

"그냥 떨어지는 거 주우면 안 돼?"

"안 되지 바보야. 누가 밟은 거 주워서 뭐 하게."

"나도 잡을래."

"잡든가."


마침 바람이 불었고, 박성화는 김홍중처럼 폴짝 뛰며 팔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박성화의 마음 같지 않게 벚꽃 잎은 교묘히 박성화 손을 피해 갔다. 김홍중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다섯 번 정도 실패했을 때 즈음 박성화는 팔을 축 내렸다.


"안 잡을래."

"먹튀 하냐?"

"내가 나중에 잡아 줄게."

"퍽이나 잡을 수 있겠다. 이제 벚꽃 거의 다 떨어졌는데"

"잡을 수 있어. 올해 못 잡으면 내년에 잡아 주면 되지."


김홍중은 박성화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김홍중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래, 그러면 되지. 했다. 박성화는 김홍중과 눈을 맞추려 했고, 김홍중은 은근히 눈을 피해 갔다. 박성화는 모르는 척 눈을 돌렸지만, 눈치챘다. 김홍중에게 죽음은 일종의 희망이라는 것을. 그것을 박성화는 외면했다.


/


김홍중은 마을 내 떠돌이 역할이었고, 마땅히 집이랄 게 없어 매일 자는 곳이 달랐다. 어느 날은 이씨 아주머니네 창고, 어느 날은 소씨 아저씨네 평상 위에서. 자기 전까지 마을을 돌다가 적당히 보이는 곳에서 잠을 청했는데, 그 날은 어쩐지 졸리지 않은 날이었다. 마을에 이상한 사람이 밤만 되면 난동을 피운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던지라 마을을 순찰하다가 잘 심산이었다. 김홍중은 터덜터덜 걷다가 멈칫했다. 저 멀리 아이들의 인영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른들 몰래 놀 심산으로 버려진 창고에 모이려는 것이었다. 김홍중의 머리에 무언가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김홍중은 옆에 널부러진 나무 토막을 들었다. 버려진 창고는 마을 사람들도 가지 않는 곳이고, 인적이 드물기 때문에 숨기엔 제격이다. 이를테면, 새벽마다 난동을 피우는 미치광이 같은 사람이 숨기에. 김홍중은 숨이 차는 것도 모르고 뛰었다. 곧바로 창고 문을 열고 커다란 그림자를 향해 머리 한 대를 때렸다. 나무 토막이 파편을 튀기며 부서졌다. 그 미치광이는 머리를 부여잡다가 칼을 휘둘렀다. 요즘 시대에 이런 미치광이는 많았다. 작은 마을 단위로 퍼져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적응하는 바람에 완전히 소외되어 버린 사람들. 소외돼서 미쳐버린 건지, 미쳐서 소외된 건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울고 있었고, 김홍중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쩌지. 어떡해야 하지. 김홍중이 망설이는 사이 미치광이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달려왔다. 눈 앞에 보이는 광기 어린 눈동자에 김홍중은 질끈 눈을 감았다. 모든 일을 각오한 게 무색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김홍중은 그제서야 눈을 떴다.


"괜찮아?"

"어..."

"놀랐지. 애들 우는 소리가 들려서 와 봤어."

"그게 거기까지 들려?"

"난 인간이 아니잖아."


눈에 보이는 건 제압당한 사람, 그리고 그걸 제압하고 있는 그였다. 그는 손쉽게 미치광이에게서 무기를 빼앗고, 두 손 두 발 못 쓰게 압력을 가했다.


"어떻게 할까?"

"몰라 나도..."

"죽이긴 싫어."

"나도 죽이긴 싫어. 그냥 어른들한테 맡길까?"

"그래. 여기 묶어 놓을까?"

"안 아프게 묶어."

"알았어."


그는 창고에서 먼지 쌓인 동앗줄을 찾아 미치광이를 묶었다. 미치광이는 그새 쓰러져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김홍중은 저거 죽은 거 아니지? 하고 물었고, 그는 응, 심장 소리 들려. 하고 대답했다. 그가 작업을 다 마치고 창고를 나갔고, 김홍중도 따라 나왔다.


"벤치에만 앉아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

"지박령인 줄 알았어. 벤치에서 일어나면 죽는 줄."

"앞으로도 일어나 있을까?"

"됐어. 찾기 힘들어."

"알았어."


그는 바닥을 보며 천천히 걸었고, 김홍중도 그 속도에 맞춰 걸었다. 앉아만 있던 그가 멀쩡히 서 있는 걸 보는 게 낯설었다. 보통 사람이랑 다른 게 없어 보였다. 조금 센 바람이 불자 김홍중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그가 입을 뗐다.


"그래도"

"응?"

"아무리 급해도 그런 데는 혼자 가진 마."

"아."

"위험하잖아. 죽을 수도 있어."

"나도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거야. 그냥 애들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 있어서 그랬어. 멍청했던 거 알아."

"그래."

"걱정 안 해도 돼."

"알았어.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그때 무서웠어?"


저 사람이 널 죽일 수도 있고, 칼에 찔리는 건 아플 텐데. 그래도 안 무서웠어? 그는 김홍중을 빤히 봤다. 그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김홍중은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무섭진 않았어."

"..."

"억울하기야 하겠지. 근데 무섭진 않아."

"그래. 그렇구나."


넌 정말 변한 게 없네. 그가 작게 속삭이듯 낸 말은 귀뚜라미의 울음소리에 묻혔다. 김홍중이 되물었으나 아무것도 아니라고만 했다.


/


한바탕 먹구름이 비를 쏟아내고 나면 가을이 찾아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한없이 높아 보이는 계절. 박성화는 가을과 관련된 기억을 되짚어 보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주사 바늘이 무서워 저 멀리 숨었다가 들켜 혼난 기억, 몰래 실험 쥐 하나를 밖으로 보내려다 들통나 몇 주를 독방에 갇혀 보내야 했던 기억. 좋은 기억일 리가 없었다. 대신 박성화는 가을을 김홍중의 기억으로 채우기로 했다. 김홍중은 추석 때 송편을 많이 먹었다가 체하는 바람에 응급실에 갔던 것, 참새가 방앗간 앞에서 쌀을 주워 먹는 모습을 멍하니 관찰했던 것, 단풍 더미에 몸을 던졌던 것을 얘기해 주었다.


"너랑 단풍 놀이 가고 싶다. 이 날씨가 나들이 가기 딱 좋거든."

"단풍은 떨어지기 전에 잡으면 뭐 없어?"

"없지 않나? 그냥 자기 만족이지."

"벚꽃 잎보다는 단풍이 더 크잖아."

"그럼 그거라도 주든가. 의미는 만들면 장땡이지."

"사실 아까 잡아 보려고 했는데 계속 실패했어. 아직 멀었나 봐."

"뭐야 진짜."


김홍중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 웃음을 보며 박성화는 바랐다. 제가 단풍, 아니면 벚꽃 잎을 잡을 수 있을 때까지 김홍중이 죽지 않길. 내가 내 사랑을 이룬 것처럼, 김홍중도 김홍중의 사랑을 이룰 수 있길.


어느 날은 성당을 지나고 있었다. 넓은 길과 양 옆으로 뻗은 숲이 예뻐 한때 아는 사람들만 아는 단풍 명소라고 했다. 김홍중의 발은 들뜬 듯 가벼웠고, 박성화도 따라 활기차게 걸었다. 그 기쁨도 오래 가진 않았다. 단풍길의 목적지인 성당을 둘러싼 퍼런 것들 때문이었다. 김홍중은 당황해 뒷걸음질쳤고, 박성화도 나아갈 수 없었다. 김홍중은 좀비 때문이었다면, 박성화는 조금 달랐다. 저 멀리, 벽돌 사이로 어렴풋이 울음소리가 들려서. 다 썩어 문드러진 성대가 아닌 갓 태어난 맑은 울음소리. 박성화는 김홍중을 불렀다. 홍중아.


"저 안에 사람이 있어."

"뭐?"

"어린 애들인 것 같아."

"..."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들어가야지."

"정말로?"


죽을 수도 있는데. 말을 뱉으려던 박성화는 굳건한 김홍중의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 김홍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박성화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슬렁거리는 좀비를 뒤로 하고 성당으로 힘겹게 들어섰다. 바닥 아래로 울음 소리가 들렸다. 지하실이 있구나. 박성화는 재빨리 바닥을 훑었다. 어색한 무늬의 바닥을 확인하고, 그곳을 더듬어 문을 열었다. 계단이 나왔다. 박성화는 재빨리 들어가 안을 확인했다. 몇 평은 될까 한 좁은 공간에 작은 아이 세 명이 모여 훌쩍이고 있었다. 소리가 새어 나가 좀비가 건물 안으로 점점 모이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박성화는 아이 세 명을 팔로 들어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나오기까진 했으나, 출입구 쪽으론 발 디딜 틈 없이 좀비가 모이는 걸 보고 박성화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김홍중이 유인을 하고 있겠지만, 이래선 끝도 없을 것이다. 박성화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빨리 애들을 밖으로, 안전한 곳에 두고 김홍중을 구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전속력으로 성당을 뛰쳐나왔다. 박성화가 수풀 안쪽에 아이들을 옮기자마자 성당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 냄새를 맡고 몰려든 동물 좀비들이 기어코 창문을 깨뜨린 것이었다. 박성화는 더 빨리 성당으로 들어갔다. 제발, 제발. 박성화가 악을 지르며 좀비들의 시선을 끌려 했지만 그들은 박성화를 외면했다. 인간이 아닌 것은 그들의 먹잇감이 아니니까. 박성화는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는 좀비 떼를 비집고 들어갔다. 얼굴에서 물방울이 흐르는데, 이게 땀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박성화는 그저 제발, 제발 하고 중얼거리면서 좀비를 밀치고 나아갈 뿐이었다. 그때 박성화의 귀에 작게 목소리가 들렸다. 좀비 소리에 뒤엉켜 흐렸지만, 그건 분명히 김홍중의 목소리였다.


성화야, 그냥 나 버리고 가. 애들은 끝까지 살 수 있게 도와주고. 무섭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으니까 괜찮아.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나 좀비 되고 나면 나 좀 불에 태워 줘. 누구 죽이는 것도 싫고, 그냥 재가 될래. 그게 마음 편할 것 같다. 맞다. 하나 더 부탁해도 돼?


내가 만약에. 아주 만약에 다시 태어나면 그땐 꼭 나한테 보답해 줘야 돼. 벚꽃 잎이든 단풍잎이든 좋으니까. 아니다. 단풍잎으로 줘. 벚꽃 잡을 때까진 못 기다리겠다. 너무 고마웠고 꼭 찾아갈게.


잘 있어 성화야.


응, 잘 가 홍중아.


박성화가 성당을 나왔을 때, 아이들은 없었다. 저 멀리 도망간 모양이었다. 박성화는 길 너머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어 천천히 떨어지는 단풍잎 하나를 잡았다. 이 단풍잎이 사랑을 이루어 준다면. 박성화는 김홍중이 구한 어린 생명들을 사랑하기로 했다. 그들이 저 멀리 위험하지 않는 세상으로 가 행복하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해 떠도는 망자가 되지 않기를 빌었다.


성당은 고요했다. 좀비들은 또 어기적기적 걸어 나와 목적 없이 거닐었다. 박성화는 다시 성당에 들어갔다. 혹시 김홍중을 구별하지 못하면 어쩌지, 했던 고민이 무색하게도 김홍중은 그대로 있었다. 그저 김홍중으로 있었다. 박성화는 김홍중의 손을 잡았다. 박성화는 김홍중을 이끌었고, 김홍중은 힘없이 따라 나갔다. 저 멀리 언덕을 오르고 올랐다. 의식 없는 김홍중은 이상하게도 가만히 있었다. 제 끝을 알고 있다는 듯. 박성화가 그를 눕혀도 가만히 있었다. 넌 정말 다 준비한 거구나. 이 죽음 마저도. 박성화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몸 위에 낙엽을 올렸다. 그리고 라이터를 켜 불을 붙였다. 불은 금방 활활 타올랐다. 낙엽이 한 잎 두 잎 재가 되었고, 김홍중의 육체도 재가 될 테다. 박성화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연기가 피어올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로 올라갔다. 박성화는 저 연기가 더 높이 오르길 바랐다.


/


김홍중이 언덕을 올랐을 때, 그는 웬일로 앉아 있지 않고 벤치 옆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 하고 김홍중은 그를 불렀다.


"왔구나."

"웬일로 안 앉아 있네."

"이런 날도 있어야지."

"웃기네."


그를 향해 걷던 김홍중의 발에 무언가 걸렸다. 발 끝에는 작은 표지판이 있었다.


"이건 뭐야?"

"애들이 다 같이 만들어 주고 갔어."

"뭐길래."

"거기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 무덤이거든."

"뭐?"


김홍중은 빠르게 제가 밟고 있는 땅에서 발을 뗐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 풋 웃었다.


"무덤이랄 것도 없어. 제사나... 그런 거 하려고 묻은 것도 아니고."

"그래도 사람이 묻힌 곳인데."

"진짜 괜찮아. 어차피 지금은 흔적도 다 사라졌을 거야. 좀비였거든."

"아..."

"묻어 달라는 얘기는 안 했는데. 그런 전설이 있다고 하더라고. 착한 사람이 절벽에서 죽었더니 그 절벽에 꽃이 핀 전설. 그래서 혹시 묻으면 뭐가 자라지 않을까 하고."

"벚꽃 나무 같은 거?"

"벚꽃 나무였으면 좋았겠다. 근데 아무것도 안 자랐어. 당연한 얘기지. 전설이니까."

"이런 말 해도 되나?"

"응?"

"이 사람... 어... 묻힌 분은 꽃 대신 축복을 내린 걸 거야."

"..."

"이 사람 없었으면 난 널 못 만났잖아. 이 사람한테 내가 축복받았다고."

"..."

"널 만난 게 나한테는 가장 행복한 일이었거든. 안 그래 보일 수도 있고... 처음엔 너 이상한 놈인 줄로만 알긴 했는데. 그냥 그렇다고."

"홍중아."

"엉?"

"너 되게 웃긴 얘기 하네."


그는 단풍잎 한 움큼 주워 김홍중의 머리 위로 흩뿌렸다. 단풍잎으로 가려진 시야 사이사이 그의 얼굴이 보였다. 환하게 웃고 있는, 행복한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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