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꿈을 꾸면서 잠이 들래>, 솜솜일락
- 계간 성홍
- 2022년 6월 21일
- 11분 분량
옷에 닿은 부위는 땀에 젖어 끈적하게 달라붙고, 바깥에 드러난 맨살엔 자외선이 내리쬐었다. 찝찝하고 무거운 공기가 그 위에 다시 한번 달라붙는 여름이었다. 솔직히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만나러 집까지 찾아온 사람을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하지 않은가.
“3학년 1반. 나 1번이었고, 너 13번이었잖아.”
“그렇게 말해도 잘….”
“우리 같이 여행도 했었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다. 10살짜리 초등학생이 무슨 여행. 가봤자 동네 놀이터겠지, 어딜 갔겠어.
“디지몬 세계.”
“……뭐?”
“내 디지몬이 사라졌어. 같이 찾아줘.”
남자는 뻔뻔하게 나를 올려다봤고,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뭉쳐 놓은 솜처럼 떠다니고 있는 대낮이었다. 요새 미친 사람은 꽃을 꽂고 다니는 게 아니라 머리를 탈색하고 다니는구나. 비도 안 오는 벌건 대낮에. 문을 닫아버리려던 난 문에 몸을 끼워 넣고 버티는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종교 없어요! 아무것도 안 믿는다고!”
“너 진짜 이렇게 나올래? 우리가 몇 년 만에 만나는 건데!”
“와, 이 사람 진짜 못 쓰겠네. 그렇게 사람 추억 이용하면서 사기 치면 안 돼요. 건실하게 살아야지.”
“건실? 너 내 순결 뺏어가 놓고 잘도 그런 말 한다?”
맥이 풀렸다. 그사이 남자는 내 팔 아래를 쏙 빠져나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거기다 나의 얼을 쏙 빼놓는 데에도 성공했다. 남자는 입술을 고집스럽게 다물고 나와 대치하고 섰다. 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남자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순결을 뺏어가? 헛소리다. 신종 사기 수법이다. 그러나 꾹 다문 입술 옆으로 튀어나온 볼살이 어딘가 낯익었다. 쟤가 누구지, 더듬던 찰나 남자가 말했다.
“나 김홍중이라고.”
“김홍중?”
“그래.”
어린 시절 내 멱살을 야무지게 움켜쥐던, 키도 자라고 골격도 커졌지만 고집스러운 입술이나 쪼그만 주먹은 그 시절 그대로인 그 애가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어색하게 마주 앉았다. 그 애는 대충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집안엔 별 관심이 없는 듯 나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본론만 얘기하고 빨리 가고 싶다는 표정이나 지으면서. 그러나 할 말이 많은 그 얼굴은 한참이나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다.
“넌 그대로다.”
그러더니 툭 내뱉은 말에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 애의 말에 비웃음의 의도는 없어 보였다. 순진한 감탄. 그리고 어딘가 그리움이 묻어 있는 말투에 괜스레 나도 그 애의 얼굴을 빤히 보게 되었다.
“할 말만 하고 빨리 나가.”
“내가 너 찾아온 이유는 하나야. 내 디지몬이 사라졌어. 혼자서 찾아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왔어.”
나는 갑갑함에 미간을 문질렀다. 지금 15년 만에 만난 동창이라는 놈이랑 우리 집에서 마주 앉아, 이 더운 대낮에 한다는 얘기가.
“이거 몰카야? 아니면 동창회 초대 이런 거야?”
그 애는 잠시 침묵했다.
“우리 스물다섯이야. 열 살 먹은 꼬맹이가 아니라고. 무슨 디지몬 타령이야? 동심 찾고 싶으면 집에서 애니메이션이나 돌려 봐.”
“너 다 잊어버렸구나.”
그 애가 입을 꽉 다물었다. 아래턱이 도드라질 정도로 이를 꽉. 실망이 가득한 눈이 나를 노려봤는데 그 안에 언뜻 안타까움이 비칠 정도였다.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미치겠네. 너 어디 아파?”
“네가 잊어버려 놓고 나한테 말 함부로 하지 마.”
“그럼 지금 네 말이 사실이라고? 디지몬 세계니, 여행이니 이런 게?”
“그래.”
그 애는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3학년 여름방학 때 우리 둘이 놀다가 내가 빗물 웅덩이에 빠졌고, 네가 구해주겠다고 잡아주다가 같이 떨어졌잖아. 디지몬 세계라고 했고, 거기서 우릴 기다리고 있던 디지몬도 만났어. 같이 여행하다가 산에 살던 개 같은 디지몬도 같이 무찌르고.”
그 애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찔해져 왔다.
“미치겠네, 진짜.”
“전철 타고 여기로 돌아오는 길에 네가 나한테 뽀뽀했잖아!”
“야! 작작 안 해?”
“너나 작작 해!”
그 애가 벌떡 일어나더니 두 손으로 내 멱살을 야무지게 움켜잡았다. 어버버, 하며 반쯤 딸려 일어났다.
“고작 열 살짜리가 분위기 탔다고 먼저 입술 들이밀어 놓고 인제 와서 발뺌이야?”
“뭔 개소리야? 그리고 뽀뽀한 게 사실이래도 그게 어떻게 순결이랑 이어지냐? 너 성인 맞아?”
그 애가 멱살을 놓고 내게 달려들었다. 그리곤 우악스럽게 바지 밑단을 잡아챘다. 경악하며 밀어내는 손길에도 악착같이 밑단을 붙잡고 늘어지더니 기어코 무릎 위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곤 드러난 상처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 상처! 내가 피 닦아줬던 거 기억 안 나?”
“뭐?”
“내가 내 소매로 닦아줬었다고.”
순간 머릿속에 어떤 기억이 스쳤다. 연두색 옷 소매에 묻은 핏자국, 따끔거리던 무릎의 통증. 무릎을 물끄러미 보다가 나를 올려다보는 두 눈. 그 애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기억이 조각조각 이어졌다. 그때도 이렇게 눈을 피하지 않는 그 아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나는.
“너 기억났지?”
“……비켜.”
그 애를 밀어내며 바짓단을 내렸다. 조금도 추억하지 않고, 기억하지도 못한 일들이었다. 그런데 왜? 그 애의 눈을 보는 순간 파도처럼 기억이 밀려 들어왔다. 맞다. 저 애의 말이 모두 맞다. 그때 나는 내 무릎 상처를 소매로 닦아주는 그 아이의 눈을 바라보다가 무작정 입술로 돌진했다. 뽀뽀라고 하기에도 무색할 만큼 갖다 박고 곧바로 떨어져 나온 입술 박치기였다.
매일 보는 상처였음에도 이 상처가 왜 생겼었는지, 그 상처와 관련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찰나 그 애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제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거짓말 아니야.”
“…….”
정말 절실해서 찾아온 거야. 도와줘.”
그 애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키패드가 띄워져 있었다. 나는 머뭇거리다 핸드폰을 받아 내 번호를 찍어주었다. 그 애가 전화를 걸어 제 번호를 내 핸드폰에 남기고 현관으로 향했다.
“도와준다는 의미로 알게. 다음 주말에 만나.”
그리고 미련 없이 현관을 나섰다. 나는 어정쩡하게 앉은 채로 돌아서는 뒷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그 애가 돌아가고 난 다음에야 꿉꿉한 집안 바닥이 다시 발바닥에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물 한 잔 주지 않고 돌려보냈다.
“에어컨 좀 틀어줄걸….”
뒤늦은 후회가 습기처럼 내게 달라붙었다.
본가 창고 어딘가에 있을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찾아달라고 부탁을 드리기도, 그렇다고 고작 그거 하나 찾아보자고 방문하기도 어려웠다. 부모님의 얼굴을 뵀던 게 벌써 몇 해 전이었던가. 겸사겸사 연락을 드려볼까, 고민하던 나는 최근 통화목록에 뜨는 그 애의 번호를 보고 그냥 뒤로 가기를 눌렀다. 그리고 메신저로 들어가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해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함께 나왔으니 아마 그 애를 알 수도 있을 터였다. 대충 이야기를 생략하고 김홍중을 아느냐고만 물어보자 금세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뭐냐? 나 빼고 동창회 하냐? 근데 요즘도 그런 걸 하나?’
“아니, 우연히 만났어. 기억 안 나?”
‘모르겠는데. 앨범 찾아봐.’
“나 그거 본가에 있어. 너 있으면 한 번만 찾아봐 주라.”
‘한 번 볼게. 근데 이름이 좀 낯익긴 하다. 나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보면 좀 알려줘.”
통화가 끊기기 무섭게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그 애였다.
- 여의도역에 있던 햄버거 가게는 내가 가봤어. 가게 없어졌더라.
뜬금없는 문자였다. 무슨 소리인가 하다가 디지몬을 찾아달라던 그 말이 떠올랐다. 혼자 찾아다니고 있는 건가. 메시지에 뭐라 답을 할까 고민하는 사이에 알람이 울렸다. 미팅 관련 알람이었다.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서둘러 남은 밥을 차곡차곡 입안에 넣었다. 가게를 나오기 무섭게 다시 땡볕에 노출됐다. 명함을 잊지 않고 챙겼는지 지갑을 확인하고 미리 위치를 확인해두었던 거래처 건물로 향했다. 로비에서 보안이 나를 막아섰다. 익숙한 일이었다. 명함을 건네고 미리 약속이 있었다고 얘기하면 무전이 오간다. 그동안 나는 로비의 시원한 공기를 만끽했다.
“오 과장님 오늘 외근이라고 하시는데요.”
그리고 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핸드폰에 저장해두었던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 분명 오늘 오후 3시 미팅이 맞았다. 오 과장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깜빡했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나는 웃으며 다시 약속을 잡았다. 그동안 보안은 한쪽 팔을 뻗어 나를 막아선 채로 굳건히 서 있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그와 인사하고 바로 건물을 나왔다.
다시 땡볕이다. 쨍한 햇무리를 올려다보고 있는 사이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 놀이터도 없어졌네.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문자는 끝없이 이어졌다. 내가 답장을 하지 않아도 온종일 이어졌다. 나는 딱 한 번 답했다.
소나기가 오는 날이었다. 오 과장과의 두 번째 미팅이 어그러진 날. 그의 회사 로비에서 다시 한번 퇴짜를 맞은 날. 오 과장을 만나지도 못하고, 회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하릴없이 바깥을 거닐다 집으로 돌아온 날. 햇볕에 그을려 따끔따끔한 피부를 이불에 비비며 한참 동안 잠 못 이루고 누워있던 날이었다. 그 애는 공원을 돌아보고 있다고 했다. 시간은 밤 11시였다. 나는 고민하다 그 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끊기자 대답 대신 세찬 빗소리가 들렸다.
“들어가.”
‘…….’
“비 오잖아. 늦었고. 오늘은 그만 들어가라고.”
‘여기 기억나?’
나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빗줄기가 부딪치는 창문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 애와 같은 곳에 있는 것 같았다. 난 기억을 더듬었다. 집 근처에 있던 공원은 딱 하나였다. 부모님과도 자주 가던 곳.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어느 풍경은 기억이 났다.
“잔디밭 넓고, 중앙에 나무 큰 거 하나 있고.”
‘맞아.’
그 애가 작게 웃었다.
‘여기에도 없어. 안 보이네.’
지친 목소리였다. 다시 수화기 사이엔 빗소리만 들렸다.
“비 오잖아. 비가 와서 그래. 비 오면 나가기 싫고, 아무도 만나기 싫어지잖아.”
나는 낮게 중얼거리며 잠이 들 듯 눈을 감았다.
“그래서 그래. 그러니까 돌아가.”
‘알았어.’
그 애는 전화를 끊기 전에 덧붙였다.
‘잘 자.’
그리고 바로 전화가 끊겼다. 나는 눈을 감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공원 잔디밭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앉아 그 애와 비를 맞는 꿈을 꾸었다.
금요일이 되어서야 오 과장과의 약속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상사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싫다는 거 어렵게 잡은 거야. 접대 잘 해드려. 계약서 잘 챙기고.”
미팅은 어느새 접대가 되어 있었다. 격식을 차리기 위해 반소매 셔츠를 벗고 늘 쟁여둔 와이셔츠를 입었다. 그 위에 재킷을 입고 넥타이를 똑바로 고쳐 맸다. 느슨하게 풀려 있던 넥타이를 조금 더 졸라맸다. 목이 조이는 듯 했다.
회사를 나서며 버릇처럼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 애에게선 아무런 문자도 와 있지 않았다. 또 어딘가를 헤매면서 디지몬을 찾고 있으려나. 내일이면 나도 함께해야 할 일이었다. 오늘 술을 많이 마실 텐데, 내일 괜찮으려나. 잠시 고민하다 그 고민에 갑자기 확 짜증이 치밀었다. 그런 어이없는 일에 신경을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핸드폰을 무음으로 돌려버렸다.
소문 그대로였다. 오 과장은 술집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하게 4번 룸으로 향하더니 여자들을 들이라며 행패를 부렸다. 비싼 양주와 과일 안주들이 깔리고, 그와 동시에 여성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환멸이 났다. 내 옆에 앉은 여성이 나에게 과일 안주를 건넸고, 나는 그것을 정중히 거절하며 노래에 심취한 오 과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노래가 잠시 끊긴 사이에 피티 자료를 들이미는 내게 오 과장은 흥을 깬다며 잔을 휘둘렀다. 술이 담겨 있지 않아 몇 방울이 얼굴과 와이셔츠에 튄 정도였다. 나는 계약서에 묻은 얼룩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그에게 다시 종이를 내밀었다.
“약속드렸던 사항들 수정하여 가져온 계약서니 한 번 훑어보셔야죠.”
얼굴에 튄 술이 뺨을 타고 흘렀다. 오 과장이 손을 뻗어 술 방울이 맺힌 내 뺨을 두드렸다.
“야, 이 집요한 새끼야. 네 상사한테 제대로 전해. 네 덕분에 계약하는 거라고. 새끼가 아주 징글징글하게 찾아오더라. 넌 성공할 거야.”
“감사합니다.”
“너처럼 배알이 없어야 살아남아. 모기 같은 새끼.”
난 계약서에 사인하는 그를 보며 웃었다. 오 과정은 계약서를 던지듯 내게 건네고 다시 노래와 술에 심취했다. 사인이 끝난 계약서를 서류 봉투 안에 넣고 포도알 하나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포도알 대신 내 혀를 짓씹었다.
미로처럼 얽힌 술집을 빠져나왔다. 서류 봉투를 손에 꼭 쥔 채로 밖으로 나오자 저마다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가득했다. 왜들 저렇게 비틀대는 걸까. 나는 뭐가 이렇게 무거워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걸까. 저 사람들은 또 뭐가 무거워서 휘청거리는 걸까. 나는 가방에 서류 봉투를 넣으며 그제야 조용히 잠자고 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무음이던 핸드폰엔 메시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 나 살던 아파트 철거됐대.
- 재개발 들어갔대.
- 공원도 내년 여름이면 없어질 거래.
- 아무 데도 안 보여.
- 보고 싶어.
쌓여 있는 메시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 그 애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야, 미친. 나 김홍중 누군지 알아냈어. 걔 공시 패스해서 공무원 됐던 애잖아. 근데 알아보니까 6개월 만에 잘렸다던데. 그 이후로 정신을 놨네, 어쨌네 소문 돌았었나 봐.’
“무슨 소리야? 헛소문 아니야? 공무원이 무슨 6개월 만에 잘려?”
‘말도 마라. 김홍중 게이란다. 구청에 소문 쫙 퍼져서 사람들한테 왕따 당했는데 어쩌다 바깥에까지 알려져서 민원 들어오고 난리도 아니었대.’
“……끊어.”
시야가 비틀거렸다. 몸이 무언가에, 누군가에게 무겁게 짓눌리고 있었다. 세상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시야가 완전히 뒤집혔다. 시야가 한 번 뒤집히고 나니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애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전화를 받았다.
“너 이제 그만해. 내일 나랑 같이 돌아볼 거니까 이제 와.”
‘어딜.’
“보고 싶다며. 나한테 오라고.”
날 짓누르고 있는 이 무게를 어쩌면 너도 똑같이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그 무게를 버티다 못해 비틀대던 네가 반쯤 돌아버린 건 아닐까. 그럼 똑같이 반쯤 돌아버린 우리가 만나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다시 또 나를 휘청이게 만든다. 그래서 네가 나를 찾아온 걸까.
그 애는 맥주가 잔뜩 들어있어 축 늘어진 봉지를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늘어진 어깨를 간신히 끌어 올려 내게 봉투를 건넸다. 그리고 현관에서 주섬주섬 신발을 벗는 사이에 나는 거실 테이블에 맥주를 올려두었다. 간단한 마른안주도 같이 있었다. 순간 생각했다. 이걸 살 돈은 있을까, 얘가. 얘는 내가 뭐가 좋다고 이런 걸 바리바리 사들고 왔을까.
“나 안 이상해?”
“뭐가?”
그 애는 첫 번째 맥주를 까며 물었다. 그리고 첫 모금을 삼키기도 전에 잔을 내려두었다.
“처음에 너 기억 안 난다고 했다가, 다음엔 네 문자 다 씹다가, 지금은 이렇게 집에 오라고 하는 거.”
그 애는 그저 다 알겠다는 듯이 한 번 웃더니 맥주를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그래. 물어나 보자. 왜 오라고 했어?”
“네가 왜 그렇게 디지몬에 목을 매는지 궁금해졌어. 다 옛날 일이잖아.”
그 애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너 나랑 공감대 형성하고 싶었잖아. 우리 둘만 아는 얘기 나랑 하고 싶었잖아. 그게 너한테 디지몬이면 나한텐 이런 얘기야. 왜 지난 일에 목을 매고 있는지.”
왜 미쳐버렸는지. 뭐가 널 그렇게 어린 시절에 목 매게 하는지.
“미안하다. 네 얘기 풋풋해. 예뻐. 근데 그런 얘기 하면서 감상에 젖어 있기엔 지금 내가 너무, 너무 찌들었어.”
나이를 먹을수록 세월에, 사람에, 여름 땡볕에 마른안주처럼 바짝바짝 말라간다. 그런데 갑자기 네가 나타났잖아. 나만 훌쩍 못난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은 이 텁텁한 계절에, 누구보다 풋풋한 눈을 하고 나타났잖아.
“사실 난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네가 말한 햄버거 가게도, 놀이터도, 사라져버렸다던 너희 집도, 다 잘 기억이 안 나. 어차피 다 없어졌잖아.”
그 애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제 뺨을 문지르며 가만히 방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냥 없어진 게 아니라서 그래.”
“…….”
“내가 잃어버린 거라서. 그래서 그래. 그리워서.”
알 것 같다. 어디로 가면 저 애가 찾는 디지몬을 만날 수 있을지. 다 변해버린 그 애의 세상 속에서 딱 한 군데 변하지 않은 곳을 알고 있다.
“내일 우리 같이 가자. 아직 없어지지 않은 곳.”
나를 바라보던 그 애의 눈이 조금씩 크게 뜨였다. 난 그 눈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우선은 좀 자자.”
처음 봤던 날이 못내 걸려 침대에 눕힌 뒤 에어컨을 틀어주었다. 그런데 추운 걸 영 못 견디는지 그 애는 이불을 돌돌 말고 몸을 웅크렸다. 에어컨을 끄는 대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슬슬 가라앉기 시작하는 술기운 대신 올라오는 어떠한 감정을 느끼며, 먼저 누운 그 애의 곁에 앉아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풀 벌레 우는 소리가 났다. 여름밤에 이런 소리가 나던가. 오토바이 소리에 치여 늘 닫고 살던 문이었다. 선선하게 바람이 불어오며 방을 여름의 공기로 채웠다. 이렇게 시원했던가. 바람에 그 애의 머리칼이 살랑거렸다.
넌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밤바람에 살랑이는 그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며 나도 눈을 감았다.
며칠 전과 같은 꿈을 꾸었다. 공원 잔디밭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앉아 그 애와 비를 맞는 꿈.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가 15년 전, 열 살 모습 그대로였다는 것.
다음 날 그 애를 데리고 낮은 언덕을 올랐다. 나도 길을 헤맸다. 익숙했던 건물들이 모조리 헐린 동네에 들어서니 얼핏 기억나던 골목길도 제 모습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 애는 주변을 둘러보며 느린 걸음을 나를 따라왔다. 그리고 노란 선이 가득한 도로에 들어서자 그제야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여긴 왜 올 생각을 못 했어?”
그 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 제 키만큼 낮아진 교문을 넘어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철봉과 정글짐, 그리고 계단 위 학교 건물들을 바라보며 걸었다. 운동장은 금세 끝이 났다. 한때는 이곳을 한없이 달렸던 때도 있었다. 고작 어른의 보폭 몇 걸음으로 끝날 이 작은 운동장을 잰걸음으로 하염없이 달리던 때가 있었다.
내가 운동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는 사이, 그 애는 시소와 정글짐, 철봉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칠이 벗겨진 철봉과 구름사다리, 시소 등을 만져보며 천천히 주위를 돌았다. 구름사다리 앞에 선 그 애를 보자 어젯밤부터 흐릿하게 기억나던 것들이 부분부분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거기 바닥에 그렸지? 우리 디지몬.”
“응. 구름사다리 넘어가면,”
“디지몬 세계가 나오고.”
그 애가 처음으로 웃었다.
여기 있었다. 네가 찾던, 내가 잊고 있던 디지몬 세계.
지켜보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우리는 숨이 찰 만큼 뛰어놀았다. 운동장을 달리고, 정글짐을 오르고, 수돗가에서 서로를 향해 물을 뿌렸다. 물에 흠뻑 젖은 채로 근처 문방구로 들어가니 선풍기를 쐬며 졸고 있던 주인이 우리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우리는 멋쩍게 웃으며 쭈쭈바를 하나씩 골라잡고 문구점을 나왔다. 살짝 녹아버린 쭈쭈바 꼭지를 따지 못하는 그 애를 대신해 이로 물어뜯자 소다맛 아이스크림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그 애는 웃으며 내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서로의 쭈쭈바 꼭지를 대신 먹고 쓰레기통에 버린 뒤 다시 학교로 향했다. 어린이 보호구역으로 걸으며 쭈쭈바를 입에 물었다. 젖은 머리칼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뒤에서 느릿느릿 걸어오던 네가 손을 뻗었다. 나는 쭈쭈바를 입에 물고 네 손을 잡아주었다. 아이스크림을 잡고 있었음에도 네 손은 따뜻했다.
더 걸을 힘이 없어 시소에 가 앉았다. 네가 앉은 맞은 편에 앉자 네가 쑥 올라갔다. 다리가 허공에 붕 뜨자 어딘가 분한 표정에 웃음이 터졌다.
“있잖아. 내 디지몬은 이름이 뭐였어?”
네가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고 운동장 너머를 응시했다. 그리고 한참을 우물거리고 나서야 대답했다.
“사실 나도 잘 기억 안 나.”
쓸쓸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네가 바라보는 텅 빈 운동장의 한가운데 서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는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나의 디지몬. 운동장 어딘가에 나뭇가지로 그려졌다 흙먼지와 함께 지워진 나의 친구. 정글짐 귀퉁이에서 나를 기다리다 조용히 계절 너머로 사라졌을 나의 어린 시절.
피딱지가 앉은 무릎을 열심히 움직여 달리던 놀이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던 그네, 개미가 오르고 매미가 붙어 우는 나무와 그 아래 항상 내리깔리던 그늘. 바람이 불면 땀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시원하게 스며들던 추억들이 빛바래져 가는 여름에 네가 나타났다. 그저 끈적하고 습하기만 한 계절에 바람처럼 불어와 스며든 나의 친구, 나의 추억, 나의 여름.
“집으로 오는 전철에서 내가 너한테 뽀뽀했다고 했지?”
“그래, 이 변태야.”
나는 시소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일어나자 네 쪽으로 확 기울어진 시소가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놀람과 황당함이 섞인 눈이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가는 나를 향했다. 나는 너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마 이렇게 나란히 앉아있었겠지.”
그리고 쭈쭈바를 물고 있느라 차갑게 언 입술을 가만 바라보았다.
“근데 우린 이제 10살짜리 애가 아니잖아. 어른은 뽀뽀 안 해.”
나는 네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언 입술을 물었다. 응하듯 네가 조금 틈을 벌리면 그 사이로 소다향이 퍼지다 틈 없이 입술이 맞물렸다. 네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내게 조금 더 다가오고, 나는 기꺼이 너를 머금으며 성큼 더 다가갔다. 얼었던 입술이 말랑해졌을 때쯤에 천천히 멀어졌다. 대신 이마를 꼭 붙인 채였다. 넌 속눈썹을 보이며 시선을 내리깔고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기도하는 듯, 떠나보내듯 그렇게 잠시 있었다. 나는 어딘가에 작별을 고하는 너를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너는 눈동자를 올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다음엔 뭘 하는데?”
“여행은 끝이 났으니까, 그럼 이제 연애를 해볼까.”
학교를 두른 담장엔 장미가 피어 있었고, 나무 그늘이 내려앉은 자리엔 유월의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한 바람이 옷 틈새를 스며들고 부드럽게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햇무리가 빛나고 녹음이 푸르른 계절이었다. 내가 잊고 있던, 네가 다시 빛내고 숨결을 불어 넣어준 여름이었다.
우리는 새롭게 깐 이불 위에 고슬고슬한 옷을 입고 누웠다. 시원한 밤바람이 부는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로 매미 소리와 풀 벌레 우는 소리를 들었다. 잠옷을 갈아입고 온 홍중이를 가까이 끌어당겨 팔베개해주면 가만히 기대어 왔다. 지긋이 바라보다 뺨에 장난치듯 입을 맞췄다. 부스스 웃으며 눈을 감는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자세를 고쳐 잡아 눕고 이불을 끌어 올려주었다. 편안히 감은 눈꺼풀 위 속눈썹을 매만지며 물었다.
“어떤 꿈을 꾸고 싶어?”
홍중이가 눈을 감은 채 몸을 반쯤 돌려 나를 끌어안았다. 가슴께 가까이 댄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네 꿈.”
짙은 여름의 풀 내음이 풍겨왔다. 너를 가득 끌어안고 나도 눈을 감았다.
“그래. 그럼 내가 너를 찾아갈게.”
여름의 한 가운데에서 네가 나를 찾아와 주었던 것처럼.
- 작가의 말
제게 여름은 어린 시절이 많이 생각나는 계절이라 이런 소재를 잡게 되었네요.
읽는 동안만이라도 모두가 선택받은 아이였던 그때로 잠시 돌아갈 수 있는 글이 되었으면 합니다.
설레이는 여름 속에서 성홍 꿈꾸며 잠이 드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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