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적당한 어느 날>, 익명 1
- 계간 성홍
- 2022년 9월 23일
- 21분 분량
얼음에 굴린 시럽은 그렇게 특별한 맛이 아니었다. 고작 이게 자신의 약 구 분 가량의 노동의 대가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까지 서서 기다리고, 이쩜오 달러나 지불한 이유가 있었다. 그냥, 다들 먹길래. 다들 하고 있길래. 다들 메이플 태피 손에 들고 거리를 걷는 게 퀘벡의 전통이나 된다는 듯, 한 손에 메이플 태피, 또는 태피를 먹고 난 나무 막대를 들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입에 닿는 맛은 그냥 메이플 시럽과 뭐가 다른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문득 이게 메이플 시럽을 눈 위에 굴린 거니까 그냥 메이플 시럽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별 생각을 다 한다며 생각의 고리를 끊어낸다. 아무래도 혼자 하는 여행은 좀 외롭다. 이런 사소한 감상 하나 나눌 사람이 없어서. 예쁘게 물이 든 나무들과 반짝이는 강, 탁 트인 전경과 거리의 악사들. 귀에 익은 멜로디에 허밍을 얹어 나지막이 노래를 따라부른다. 풍경 사진은 이미 갤러리를 가득 채운다. 그러니까 문제는 인물 사진인데...
Excuse me. Can you take a picture?
Sure! Smile~
Thank you!
Good. Enjoy!
짧은 대화를 뒤로 하고 그들이 남기고 간 사진들은 인스타에 올리기에는 어딘가 좀 별로였다. 굳이 여기를 이렇게 자른다고? 퀘벡 맞아? 아니, 풍경이 하나도 안 나왔는데. 자신이 찍어 준 사진으로 당장 휴대폰 배경 바꾸는 것도 봤는데 정작 자신은 갤러리에 쓸만한 사진이 없다. 하긴, 지금 인스타 올려 봐야 볼 사람도 없겠다. 혼자 여행이라는 건 정말 힘든 일이구나.
한창 인기를 달렸던 드라마에 나온 주인공처럼 예쁘게 코트까지 챙겨 입었는데. 퀘벡까지 와서 건질 사진이 하나도 없다는 건 좀 아쉬운 일이었다. 어디 한국인 안 지나가나.
"재미없어."
퀘벡까지 와서 할 말은 아니었다.
"진짜 재미없다."
진짜 퀘벡까지 와서 할 말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벌써 지루함이 찾아온 것은 퀘벡에서의 일정을 길게 잡은 탓이다. 절대 퀘벡이 별로인 건 아닌데. 그냥 친구랑 지냈던 몬트리올에서 시간 더 쓸걸. 혼자 하는 여행이 뭐가 즐거울 것 같아서 사흘이나 있겠다고 한 건지 모르겠다. 너 진짜 후회한다, 하루면 다 둘러본다니까? 친구의 말은 사실이었다. 퀘벡에 도착한 지 겨우 이틀이 된 날의 아침, 홍중은 이르게도 자신이 재미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만다. 아직 퀘벡에서의 서른 시간이 더 남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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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몬트리올에서 퀘벡으로 오는 비아레일을 탈 때만 해도 행복했다. 세 시간 반 동안 도깨비 플레이리스트 만들어서 들을 때까지만 해도 행복했다. 크러쉬부터 에일리까지. 가슴 속에 작은 노래방 하나 열어 열심히 노래 부르다가도 창밖에 지나가는 푸르게 탁 트인 강, 붉은 산, 금빛 풀들로 채운 바다의 풍경들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시작부터 사진 많이 찍으면 안 되는데. 퀘벡에서 분명히 사진 많이 찍을 것 같은데. 결국 퀘벡에 도착하기도 전, 홍중은 아이클라우드 저장 공간 2테라 구매하기도 했다. 물론, 성급한 결정이었다.
팔레역의 사진도 찰칵, 숙소까지 걷는 십오 분의 시간 동안 아기자기한 퀘벡 거리의 사진도 찰칵. 간판마저 예쁜 곳에서 걸음을 멈춘 홍중은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오타와로 돌아간다면 짬을 내 불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예약한 숙소, 도미토리는 나쁘지 않았다. 철제로 된 이층 침대가 세 개 놓여있는 방. 그냥 잠만 자고 나오기에 딱 적당한... 무엇보다 같이 쓰는 사람들이 문제겠지만. 제발 좋은 사람이 오게 해 주세요. 빈 침대를 보고 홍중은 기도 올렸다.
아침 일찍 부지런히 퀘벡에 온 탓에 일찍 시작한 첫날이었다. 부지런한 한국인 정신은 일 년이 지나도 캐나다에 적응하지 못했다. 어쩌면 들떠서 그런 걸까. 올드 퀘벡을 알리는 성벽이 보이자 자꾸만 마음이 방방 떴다.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 보자. 발걸음이 너무나도 가벼웠다. 그래서... 다 보고 말았다. 이틀 치 일정을, 하루 만에, 모두.
스타벅스에서 퀘벡 적힌 카드를 만들고, 따뜻한 라떼 한 잔 투 고 해서 들고나와 여기저기 걸으며 풍경 사진 찍고, 미리 연습한 불어로 감사 인사 전하고, 모르는 외국인에게 사진 좀 부탁하고, 사진 좀 찍어 주고. 막상 갤러리 속 자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너무 대충 찍었는데? 한국인 없나... 아쉬움에 자꾸 갤러리 속 사진으로 눈이 간다. 좋은 풍경은 눈에 담자, 마음을 애써 달래도 이 풍경 속에 자신이 담긴 사진 하나 없다는 건 솔직히 아쉬운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퀘벡 스타일로 주문한 마리스 팝콘 냠냠 먹으며 계속 걷던 홍중이 어느 순간 같은 곳을 뱅뱅 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라, 여기 아까 왔던 곳인데?
그러니까, 정말로 다 보고 말았다. 트레조르 거리, 쁘띠 샹플랭, 부티크 드 노엘, 노트르담 성당, 프레스코 벽화, 트루니 분수, 테라스 뒤프랭까지 전부. 하루 만에. 테라스 뒤프랭에서 감성에 젖어 매직 아워 챙겨 본 건 좋았다. 타임 랩스로 찍은 해 질 녘은 낭만 그 자체였으니까. 퀘벡 좋아. 여기서 살래.... 이후 한국인들 다 가는 맛집이라던 미친 돼지에서 웨이팅 걸고 기다린 것도 좋았다. 아까 사진 부탁하려고 할 때는 없던 한국인들이 다들 여기에 모인 것 같긴 했지만. 메이플 폭립 먹고 진짜 맛있다! 좀 달긴 하지만. 그래도 맛있네! 양이 적긴 하지만. 그리고 밤이 내린 쁘띠 샹플랭의 풍경 구석구석을 카메라에 담은 후에 느지막이 숙소로 도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비어있는 이층침대들. 다른 사람들은 좀 늦으려나. 그렇다면 먼저 씻고 잠들어야지. 잇츠 뷰리풀 라잎...~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샤워하던 문득 홍중은 떠올렸다. 어라, 내일 뭐 하지.
머리 위에 수건 하나 얹고 퀘벡 갈 곳, 먹을 곳, 급하게 네이버에 검색하던 홍중이 다 갔던 곳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진짜 갈 곳 없나? 구글에서 Q, U, E... 영어로 해도 비슷했다. 관광지는 다 비슷하구나. 그러다 잘 시간을 놓쳤다. 모르겠다, 내일 정하자. 휴대폰을 내려놓은 홍중은 금방이라도 눈꺼풀이 닫힐 듯 깜빡였다. 아침 일찍 기차 타고, 열심히 돌아다닌 홍중이 수마에 빠져들기는 어렵지 않았다. 베개에 닿는 덜 말라 축축한 뒤통수를 의식할 겨를도 없이. 그러다가 번뜩 눈이 떠진 이유는 뻔했다. 홍중보다 늦게 들어온 사람들은 외국인이었고, 요란했고, 소란스러웠다. 심지어 무리였다. 그들의 수다는 이어졌고 영어 듣기 평가하는 기분에 도저히 잠이 올래야 오지 않았다. 드디어 불이 꺼지고, 조용할 줄만 알았던 방에 벼락같은 코골이가 시작됐다. 그리고 이층 침대에서는 위층이 더 조심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래층에서 뒤척인 움직임이 위층에서는 무슨 지진 마냥 흔들렸다. 싸구려 철제 침대라서 그런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코 고는 소리의 불협화음이 홍중의 성질을 살살 긁었다. 결국 홍중은 의도치 않게 퀘벡에서의 일출마저 챙겨 보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일정. 어제 갔던 스타벅스에서 헤이즐넛 시럽 두 펌프 넣은 스팀 밀크랑 베이글 하나 주문해서 테라스 뒤플랭에서 아침 챙겨 먹기. 그리고... 그곳에서 하염없이 앉아있기. 어제 너무 신나서 돌아다닌 몸이, 숙면을 이루지 못해 피로를 풀지 못해서일까. 이제야 피곤하다고 소리 지르는 것 같았다. 멋을 챙기고 피로를 얻었다. 그래서 그냥 강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반짝이는 윤슬과 흘러가는 구름을 지켜봤다. 한참 앉아 풍경만 보다가 다들 한 손에 메이플 태피 들고 지나가길래 따라 사서 사탕마냥 입에 물었다. 달달한 맛은 좋았지만 그게 다였다. 입에선 늘어진 테이프마냥 재~미~없~어~ 반복되기만 했다.
"재미없다."
내일은 뭐 하지. 그냥 기차 시간 당길까. 그냥 빨리 오타와에 돌아가서 여독이나 풀까. 나무 스틱 입에 물고서 발끝만 까딱였다.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간다. 그냥 다음에 동료들이랑 같이 올걸. 괜히 혼자 감상에 젖어서. 어쩐지 도깨비도 은탁이랑 같이 온 이유가 있었다. 도깨비도 분명 혼자 다녔으면 심심했을걸. 그렇게 하염없이 생각의 꼬리만 잡고 있을 때, Excuse me. 나한테 하는 말인가? 아니겠지. 저기요. 그제야 고개를 잡아끄는 한국말이었다.
"도깨비...."
"네?"
"아, 아니에요."
"아.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코트를 입어서 그런 건 아닌데, 상대의 얼굴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도깨비라는 말이 나왔다. 아니, 얼굴 뭐야. 오랜만에 본 잘생긴 한국인이라 마음이 좀 후해졌나. 절대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될 생각이었다. 무심코 꼬리를 잡는 생각이 길어지느라 문득 상대가 한 말을 놓치고 말았다. 다시 물으려 죄송한데요, 말을 띄우자 상대는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절대 저 이상한 사람 아니라, 사진을 찍었는데 너무 잘 나와서 보내 드리고 싶어서요."
아, 홍중이 물고 있던 나무 막대를 내려 놓고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육하나삼, 사이팔... 순순히 번호를 부른 홍중은 순순히 자신의 이름을 댔다. 에드워드 킴이요. 일 년 동안 쓴 이름이라 그런지 본명보다 가명이 먼저 툭 튀어나왔다. Yes, Eddie... 남자가 자신의 번호를 저장하던 것을 본 홍중이 무심코 말을 한다.
"근데 그냥 에어드랍으로 보내 주셔도 되는데."
"으음... 하하. 몰랐네요."
⠀ ⠀⠀⠀ ⠀AirDrop
⠀ ⠀ Mars. P 님이 사진을
⠀ ⠀ 공유하려고 합니다
⠀⠀⠀ 거절 ⠀ ⠀ ⠀ 수락
띠디디.. 휴대폰이 짧은 알림음을 내더니 미리보기 사진을 띄운다. 어차피 에어드랍으로 보낼 거면서. 의심의 눈초리는 길어지지 않았다. 수락 누른 홍중은 이내 휴대폰 화면 가득 뜬 자신의 사진을 들여다봤다. 우와, 와, 내가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나? 이렇게 보니까 자신이 문득 퀘벡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어쩌면 캐나다에서 찍은 사진 중에 가장 잘 나온 것 같기도 하고.
"말 안 하고 찍어서 정말 죄송해요."
"아, 아니, 괜찮아요. 사진 너무 잘 찍어 주셨네요. 혼자 와서 이런 사진은 기대도 안 했어서."
"아, 다행이다. 혼자 오셨구나...."
자꾸만 죄송하다는 남자에게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자신이 찍어 준 사람들이 왜 바로 배경 화면을 바꿨는지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퀘벡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고, 자신이 있는 테라스 뒤프랭은 재미없는 말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정말이지 카메라에 담긴 모든 개체들이 하나같이 조화롭게 개성적이었다. 말이 되나? 말도 안 되는데. 자꾸만 화면 속으로 시선을 뺏겼다. 이 그림 같은 풍경에 익숙하게 녹아있는 퀘벡 이틀 차의 자신까지도.
"고마워요, 그러니까 죄송하다는 말 안 하셔도 돼요."
"그래도... 죄송한데 커피 한 잔 사 드려도 될까요?"
"아뇨, 커피는 이미 마셔서요."
홍중은 자신의 옆에 놓여있던 빈 커피잔을 살짝 흔들었다. 누가 봐도 아쉬워하는 표정의 남자는 스타벅스 다녀오셨어요? 캐나다는 팀 홀튼이 유명하대요. 아이스드 캡... 자꾸만 홍중에게 말을 붙였다. 아뇨, 괜찮아요. 그러면 여기 유명한 젤라또... 홍중은 궁금증이 생겼다.
"혼자 오셨어요?"
"아뇨, 친구들이랑 왔어요."
"그런데 왜 저한테 커피를...."
"어, 그러니까.... 심심해 보여서요?"
제 친구들이 저쪽, 어라, 어디 갔지? 잠시만요... 전화 좀 할게요, Alex! Where are you...! 낯선 남자가 전화 너머로 자신의 친구들과 뭐라 열심히 대화하던 것을 보던 홍중은 뭐가 됐든 좋았다. 오히려 정확히 보긴 했네. 아까까지만 해도 재미없다고 노래 부르던 기억이 지워졌다. 어쩐지 좀 재미있어질 것 같은데. 갑자기 표정이 바뀌는 남자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솔직히 얼굴만 봐도... 붉어지더니 잔뜩 동그래진 눈. 전화 너머로 뭐가 자꾸 절대 아닌지 No, No way, But, No, Are you kidding? 뭐라 열심히 반박하던 남자는 어딘가 당황한 얼굴로 전화를 내렸다.
"저랑 좋은 시간 보내래요?"
"네? 아니, 어, 어... 들으셨구나...."
"뭐... 이상한 사람 아니죠?"
"네, 절대로, 아, 여기, 잠시만요."
지갑 열심히 뒤져 보라색 학생증을 내미는 것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서울 어디에서는 클럽에서 학생증 보여 준다더니 퀘벡에서까지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그것도 미국 대학 다니는 사람이. 솔직히 좀 어이없기도 했고 할 말도 없어지긴 했다. 음, 공부 잘하시나 보네요? 네...? 사진은 좀 못 나온 것 같고. 네?! 남자의 손에 학생증 다시 올려 준 홍중은 학생증에 적힌 이름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박성화? 성화 씨?"
"어, 제 이름 정확하게 읽은 사람 처음이에요."
"그야 전 한국인이니까요."
"에디가 아니라요?"
"에드워드도 맞구요."
"아, 그러면 이민? 유학?"
"혹시 플러팅이 처음이에요?"
네? 네에? 당황한 성화가 말을 버벅이며 뭐라 변명을 하려는 것 같지만 딱히 귀담아듣진 않았다. 농담이에요. 그냥 웃으며 홍중은 성화의 말을 끊어냈다. 통성명하다가 날 다 지나가겠네. 그냥 잘생겼는데 귀여우니까 봐준다. 홍중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의 쓰레기를 챙겼다. 이렇게 좋은 풍경과 분위기에 한몫하는 노래, 그리고 잘생긴 미남을 두고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부탁 하나만 들어 주세요. 네, 말만 하세요. 쓰레기 버려 드릴까요? 아니요, 오늘 저랑 같이 다니는 대신 제 사진 좀 찍어 주세요. 혼자 와서 남긴 사진이 별로 없는데, 성화 씨가 사진을 너무 잘 찍으셔서. 아, 저야 영광이죠. 그렇게 갑작스런 동행이 생긴 이유였다.
"성화 씨는 퀘벡에 언제 오셨어요? 오늘?"
"아아, 어제 와서 짐만 풀고 오늘이 처음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수다 떨 시간 없겠다. 빨리 가요."
홍중은 손에 들고 있던 쓰레기를 버리고서 벙찐 성화에게 손짓을 한다. 안 와요? 어, 네, 가요! 지금 가는 곳이 생드니 테라스에요. 좀 걷긴 해야 하지만... 체력 좋아요? 네네, 저, 아이스하키 잘해요. 오, 그럼 캐나다 사람들한테 인기 많겠다. 에디도 아이스하키 좋아해요? 음, 별로 안 좋아해요. 네? 잠시 자리에 멈춰 선 성화를 돌아본 홍중이 성화의 손을 잡고 이끈다. 그래도 운동하는 사람 나쁘진 않아요. 그거면 괜찮죠? 그제서야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순순히 발걸음을 옮기는 성화였다.
"여기가 생드니 테라스에요. 유명한 이름은 도깨비 언덕. 도깨비 봤어요? 드라마."
"어... 저 안 봤어요."
"그거 재미있는데. 나중에 시간 나면 봐요. 넷플릭스에 있을 건데."
"네, 꼭 볼게요."
"전 그거 보고 꼭 퀘벡 오고 싶다는 생각했거든요."
생드니 테라스에서 한 눈에 보이는 샤또 프롱트낙 호텔의 전경, 푸른 언덕과 세인트 로렌스 강까지. 어제 봤던 풍경이지만 홍중은 절로 예쁘다는 소리가 나왔다. 어쩔 수 없었다. 성화가 자신도 모르게 와, 예쁘다. 감탄사를 뱉었기 때문이다. 그쵸, 예쁘죠? 성화의 말에 동조한 홍중은 무심코 역시 여행은 둘이 하는 게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화의 뒤에서 풍경을 구경하는 그 모습을 보던 홍중은 카메라를 들었다. 그러니까, 휴대폰 카메라가 아닌 필름 카메라를. 뷰 파인더 너머 성화의 실루엣이 절경이었다. 탁, 조용하던 언덕에 필름 감기는 소리가 들렸다. 응? 고개를 돌린 성화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했다. 사진 찍어 줄게요. 성화 씨, 잠깐 여기 좀 보세요. 휴대폰을 꺼내 든 홍중은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하는 성화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다. 아, 인물 사진 잘 찍고 싶어지는 욕구가 드는 건 처음이었는데. 괜히 한 컷 한 컷에 공을 들이게 되었다.
"이따가 저녁에 다 모아서 보내도 될까요?"
"네, 그럼요."
저녁까지 같이. 자신의 제안에 사르르 웃는 성화의 표정이 예뻤다. 자신도 모르게, 찰칵.
카메라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은지 여러 자세를 잡던 성화였다. 홍중의 열정 탓에 하나만 더, 가로로 하나만 더요. 그렇게 찍다 보니 성화의 사진이 한가득이었다.
"그럼 저도 이제 에디 사진 찍게 해 주면 안 돼요?"
성화만큼 자연스러운 포즈는 아니었지만 나름 뒤도 돌아보고 사진 자세를 잡다가도 민망함에 얼굴을 가리게 되었다. 그만 찍으면 안 돼요? 아무리 만류해도 하나만 더, 딱 하나만 더. 자꾸 여길 보세요, 저길 보세요, 앉아 보세요, 일어서 보세요, 요구가 많은 사진작가였다. 사진 찍히는 사람은 난데 왜 사진작가가 앉았다, 쪼그렸다가, 위에서 찍고, 휴대폰을 가로로 들었다가 세로로 들며 더 요란하게 굴었다. 아, 진짜 언제까지 찍을 거에요? 결국엔 웃음이 터진 홍중이 샤또 프롱트낙 호텔을 뒤로하고 쪼그려 앉았다. 아, 진짜 너무 웃겨. 성화는 눈물 달랑 매달고 웃음 짓는 홍중을 마지막으로 사진에 담았다.
"진짜 모델이 좋아서 그런가? 사진 찍는 걸 멈출 수가 없던데요? 완전 명작 걸작 마스터피스."
어느새 홍중에게 성큼 다가온 성화가 손을 내민다. 손을 잡고 자리에서 잇챠, 일어난 홍중은 공치사 날리던 성화의 입을 막으며 그만하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한껏 오른 입꼬리가 내려올 기미가 보이진 않았지만. 시원한 바람이 둘 사이를 흐르고서 사라진다. 홍중의 코트 끝에 묻은 잔디 몇 가닥을 톡톡 털어 준 성화는 다시 홍중의 손을 잡았다.
"내가 아니라 여기가 예뻐서 그래요. 아, 여기 밤에 봐도 예뻐요. 그... 무슨 분수였는데? 거기도 예쁘고."
"그럼 그 분수는 밤에 보러 가요."
"그래도 돼요? 나 믿는 거야?"
"그럼요. 야경까지 잘 부탁해요, 가이드님."
"어이없어. 그럼 우리 이제 밥 먹으러 갈까요?"
메뉴는 성화가 먹고 싶다고 한 푸틴이었다. 테이블에 앉아 푸틴 둘, 버거 하나, 음료 두 개 시키고서 정적이 뜨면 무슨 말을 하나, 홍중이 말을 고르기도 전에 성화가 꺼냈다. 캐나다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이 푸틴이래요. 그래서 꼭 먹어 보고 싶었거든요. 어쩐지 메뉴판을 보면서도 큰 고민을 하지 않더라. 그리고서 문득 자신이 캐나다로 워킹 홀리데이 왔던 날 가장 처음으로 먹었던 음식이 푸틴임을 떠올리고서 홍중이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한국 사람들은 진짜 먹는 거에 진심인 거 알아요?"
"혹시 그거... 저 많이 먹는다고 놀리는 건가요?"
"아니, 나도 처음 캐나다 왔을 때 처음으로 먹은 음식이 푸틴이라서요."
그냥 그때 생각이 났다. 커다란 캐리어 하나 들고 캐나다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가족들에게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보냈었던 푸틴 사진. 떠올렸을 때 가장 설레고 떨렸던 추억이라 그런지 마음 한쪽이 몽글해지는 기분. 그리고 홍중은 성화와 마주 앉아있는 이 순간 역시 모쪼록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은 잘 먹는 사람 좋아한다니까요."
아, 해요. 빨리. 나 팔 떨어져. 머뭇대며 홍중이 내민 프라이를 받아 먹은 성화의 입술이 톡 튀어나와 있었다. 자, 콜라도 마시고. 오물오물. 웃을 때나 말할 때나 입매가 시원하다고 느꼈는데 막상 음식을 먹을 때는 입술을 한껏 모아 얌전히 씹어 먹는 모습이 약간 의외랄까. 귀엽달까. 목을 축인 홍중이 얼음만 남은 레모네이드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자신의 몫의 음식을 비운 홍중은 다시 포크를 들고 음식을 먹는 성화를 본격적으로 구경하기 시작했다.
"에디, 그렇게 쳐다 보면 좀 부끄러운데요."
어쩐지 성화의 얼굴이 좀 붉어진 것도 같았다. 아, 미안해요. 그렇다고 밥 먹는 사람 앞에서 휴대폰을 볼 수도 없고. 괜히 시선을 돌리며 식당 인테리어가 어쩌고, 창밖으로 보며 캐나다 날씨가 저쩌고. 눈길이 닿는 곳마다 칭찬을 내리던 홍중이 자신을 빤히 보던 성화와 결국 눈이 마주쳤다. 그냥 편하게 보세요. 괜찮아요. 그러니까 성화가 웃는 소리를 글자로 표현하자면 흐흫? 정도가 될 것 같은데. 성화를 따라 얼굴이 붉어진 홍중이었다. 가볍고 간지러운 웃음소리였다.
다 비운 성화의 접시를 확인한 홍중은 성화가 콜라를 마저 마시는 동안 익숙하게 카드 챙겨 영수증과 함께 캐셔에게 내밀었다. 아, 제가 내려고 했는데. 성화의 카드가 뒤늦게 홍중의 시선에 잡혔다. 식대 포함한 가이드 투어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저녁은 제가 사게 해 주세요. 그러니까 홍중은 이쯤에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저녁까지 같이 있어 주는 거 맞죠?"
"있잖아요, 에디... 왜 자꾸 저 꼬셔요?"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과 성화의 시무룩한 표정은 솔직히 예상 밖이긴 했다. 그러니까 너무 이런 낯선 상황에서 자신의 모든 행동의 의미는 신이 나서, 였다. 심심했는데 잘 된 건가? 잘생긴 사람이랑, 편하게 한국어로 대화하고, 사진도 잘 찍어 주고.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반응이 재미있는 사람을 놀리려는 의도, 단순한 여행 동행의 의미가 아니라....
"누구 플러팅 기다렸다가 기차 떠날 것 같아서요."
성화가 마음에 들어서. 정작 당사자는 홍중의 대답에 네? 고장 난 로봇처럼 뚝딱이고 있었지만. 귀엽게도 자신의 말 한 마디에 동작을 멈추고 가만히 눈치를 보는 게... 짜증 나. 귀여워. 그러니까 온통 어색하고 성화의 플러팅은 아무리 봐도 처음인 것 같았다. 온몸으로 나 지금 처음이에요, 분위기를 뿜으면서도 어떻게 자신에게 말 걸 용기가 생긴 건지 의아하기도 했다. 아무리 이곳이 캐나다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국인인데. 무심코 든 생각, 얘가 나한테 반한 게 아니라면? 혹시 이 전부가... 플러팅이 아니었다면? 그냥 한국인의 정이라면? 아, 그건 좀 낭팬데.
둘 사이의 정적을 깨는 건 캐셔였다. 홍중은 카드와 영수증을 돌려 받고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방을 챙겨 급하게 가게를 나서자 그 뒤를 쫓아 성화가 홍중의 앞을 가로막는다.
"에디, 갑자기 왜 그래요?"
"제가 혼자 오해했다면 미안해요. 그러니까 전, 그게, 그러니까...."
"제가 에디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어요."
갑작스러운 홍중의 행동에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한 모양이다. 붉어진 목, 귀 끝,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홍중의 코트 소매를 붙잡는 성화였다. 횡설수설, 다시 이야기를 늘어놓을 줄 알았는데 성화는 단호한 말로 홍중의 걱정을 일축 시켰다.
"그 말을 제가 해도 된다면요."
하아, 홍중은 긴 탄식을 뱉어냈다. 정정하겠다. 성화의 플러팅은 처음일지 모르겠지만 사람을 꼬시는 방법은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코트 소매를 잡은 성화의 손을 떼어낸 홍중은 그 손을 가만히 내려 보다가 에잇. 짝 소리 나게 내리치고는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제법 힘껏 내리쳤다고 생각했지만 성화는 별말 없이 아까 그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 지금 쪽팔리니까 보지 마세요.
그냥 앞만 보고 쭉 걸으세요.
보지 말라니까요.
아, 얼굴 좀 보지 마세요.
아, 야!
쫌!
성화는 홍중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붉어진 홍중의 고개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자꾸 마주치는 성화의 시선에 손바닥의 열감이 더욱 짙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차마 털어낼 수도 없고. 그저 잡은 손에 힘을 더 주고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들뜬 성화의 얼굴을 보고도 못 본 척, 고집스럽게 앞만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자꾸만 귀여운 소리를 내며 웃는 성화의 고집스러운 시선을 피해 도착한 곳은 부띠끄 드 노엘이었다. 가게에 들어서자 마자 우와, 감탄을 뱉은 성화의 손을 놓고서 편하게 구경하라며 가게 안쪽으로 더 밀어 넣었다. 어제 다 구경했다고 따로 더 구경할 건 없었지만, 성화의 동그란 눈동자에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불빛들이 담긴 것은 아무래도 보기 좋았다. 안 그래도 반짝이는데.
살짝 벌어진 성화의 입이 닫힐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곳곳을 구경하며 예뻐, 귀엽다, 찬사를 뱉어낸다. 거기에 대고 니가 더... 그런 말을 하진 못했지만 묵묵히 성화를 카메라에 담아냈다. 그러다 홍중이 무심코 어제 샀던 천사 오너먼트를 발견했다. 음, 으음... 홍중은 망설이지 않고 똑같은 천사 오너먼트를 집어 들었다. 일층, 이층, 계단을 오르며 구경하는 성화의 뒤를 쫓으며 사진을 담던 홍중이 자신을 뒤돌아본 성화가 눈을 잔뜩 찌푸리며 웃는 것을 보았다.
"이제 나 봐 주는 거예요?"
"뒷모습만 찍었으니까 아직 안 본 건데요?"
"그럼 난 에디 봐도 되는 거 맞죠?"
"아직 안 돼요."
"그럼 난 에디 사진 어떻게 찍어요. 봐주세요, 에디 사진 찍고 싶어요."
이잉, 성화의 말의 뒤를 잇는 정체 모를 애교에 홍중이 할 말을 잃는다. 뭐야? 짜증 나, 귀여워. 진짜 뭐야. 홍중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옆에 있던 아기들을 위한 귀여운 루돌프 인형보다 더한 귀여움이었다. 이게 맞나, 이게 성인 남성이 맞나? 왜 귀여워? 나 왜 자꾸 봐줘? 귀여우면 답도 없다던데.
"그래요, 그래. 마음대로 하세요."
"아싸."
"대신 하나만 확인할게요. 성화 씨 몇 살?"
"스물다섯이요."
홍중은 입을 다물었다. 답이 없는 거였네. 동갑인 남자애가 귀여워 보이면 그냥 말 다 끝난 거지. 홍중은 고개를 끄덕이며 성화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마저 구경 안 해요? 다 구경했으면 나가게. 성화가 마저 구경을 하는 동안 홍중은 오너먼트를 결제했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성화가 홍중의 사진을 몇 장 찍더니 힣, 웃어낸다. 오너먼트가 깨질 새라 곧장 가방 안으로 집어 넣은 홍중이 걸음을 옮기자 먼저 성화가 문을 붙잡고 홍중에게 길을 열었다. 고마워요.
"그럼, 에디는 몇 살이에요? 나랑 몇 살 차이 안 날 것 같은데."
"동갑인데요."
"그럼, 말 놓으면 안 돼요?"
"네, 안 돼요."
"왜요? 에디랑 친구 하고 싶어요."
얼마 걷지 않아 도착한 트레조르 거리였다. 좁은 길 사이에 두고 여러 그림들과 관광객들이 홍중의 곁을 스쳐 지나가자 성화가 홍중의 어깨를 감싸 안았고, 가까이 붙었다. 그림에는 취미가 없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나이에 꽂힌 건지 작품들을 구경하기는 커녕 자꾸만 홍중의 곁에서 친구, 친구. 노래를 불렀다. 기어코 80년대 유행가 오, 영원한 친구... 까지 나오고 나서야 어휴, 지겨워. 그래, 친구 하자. 홍중이 먼저 말을 텄다.
그렇게 친구가 된 둘이 기억에 남지 않는 트레조르 거리를 뒤로 하고 몽모랑시 공원에 도착했다. 자, 선물. 그러니까, 일단은 친구가 된 너에게 주는 거야. 떨어진 단풍을 주워 성화에게 건네자 휴대폰 케이스를 벗겨 휴대폰 그 뒤에 단풍잎을 넣어 놓는다. 선물이니까 소중히 여겨야지. 그리고선 성화 역시 자리에 쪼그려 앉아 예쁜 단풍을 찾겠다며 바닥을 살폈다. 그런 성화의 모습을 찍던 홍중이 드디어 마음에 드는 단풍을 찾았는지 몸을 살짝 돌려 단풍을 자신에게 쭉 내미는 귀여운 모습까지 카메라에 담겼다.
"찍고 있었어?"
"응, 귀엽다."
"멋있진 않고?
"예뻐."
"뭐든 좋아. 너한테 듣는 칭찬이잖아."
성화의 손에서 단풍을 건네받은 홍중이 이런 단풍, 홍중의 다이어리 안에서 몇 장이나 더 말라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쩐지 더 소중한 기분이었다. 예쁜 거 골라 줬으니까 더 그렇겠지. 자신에게 내민 두 손을 붙잡아 성화를 일으켜 세우고서는 성화에게서 받은 단풍을 한 손에 들고 카메라를 켰다. 성화야, 치즈. 아, 잠시만, 잠시만. 급하게 휴대폰 뒤에서 다시 단풍을 꺼낸 성화가 무릎을 살짝 숙여 홍중의 앵글 안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어색한 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나왔네. 성화에게 사진을 보여 주고서는 성화를 따라 단풍잎을 휴대폰 케이스 안에 넣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말을 트고, 함께 사진에 담긴 이후, 둘의 여행이 어딘가 조금 더 편해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길을 따라가다 만난 목 부러지는 계단에서는 시집 갈게요, 아저씨한테. 사랑해요. 명대사 따라잡기 한 번 보여 줬다가 드라마 안 보고 오해만 쌓인 잔뜩 얼굴이 붉어진 성화가 발을 헛딛어 진짜 뭐 부러질 뻔한 상황이 있었고, 놀란 가슴 달래러 들린 마리스 팝콘 가게에서 어제 먹은 퀘벡 스타일의 팝콘 봉지를 사과의 의미로 성화의 품에 안겨 주었다. 어제의 외국인들이 찍어 준 구도가 엉망이라 불평했던 프레스코 벽화 앞에서는 자신이 인생 사진 남겨 주겠다는 말과 옷 구겨가며 바닥에 눕는 성화를 말리느라 꽤 진땀 빼기도 했다.
노드르담 성당에서는 십자가를 보고 기도하고서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았다. 자신의 앞에서 구경하는 성화의 뒷모습을 보다가 어차피 신께서 들어 주시지 않을 이 기도는 차라리 성화의 뒷모습에 대고 비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언제나 정답인 사랑으로, 그렇게 만나지길.
우산이 걸려있는 엄브렐라 엘리 아래에서 메리 포핀스 마냥 손을 쭉 뻗었다가 너 그러다 날아간다던 성화의 장난에도 그럼 니가 붙잡아 주면 되겠네. 팔을 벌리면 조심스럽게 자신에게 안겨 허리를 붙잡는 손을 웃어 넘긴다. 그렇게 거리 밑에서 안겨 있으면 휘파람을 불며 지나가는 외국인들이 있었다. 홍중은 보기 좋다는 말에 고맙다며 넘기는 성화를 만류하긴 커녕 우리 둘 사진 좀 찍어 달라며 휴대폰을 건넨다.
건물 사이의 좁은 계단을 지나 도깨비에 나온 빨간 문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왜 여기서...? 모르는 눈치인 성화에게는 일단 사진 먼저 찍으라며 문 앞에 세웠다. 영문 모르면서도 능숙히 자세 잡는 성화에게 너 진짜 도깨비 같아. 그럼 돌아오는 성화의 대답은 한결같이, 그거 칭찬 맞지? 좋아.
한 것이라고는 돌아다니며 사진 찍기가 고작이었지만 시간은 흘렀고 무심코 시계를 확인하던 홍중이 성화를 이끌고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왜? 왜? 우리 빨리 가야 해. 그런 와중에도 놓칠 수 없이 푸니쿨라에 올라 다시 테라스 뒤프랭으로 돌아간 홍중은 아까 성화와 처음 만났던 벤치에 도착했다. 일단 성화를 앉히고 그 옆에 나란히 앉은 홍중이 어스름히 붉은 빛을 내며 반짝이는 세인트 로렌스 강을 가리켰다.
"매직 아워. 어제 이거 혼자 보는데 너무 아쉽더라고. 너무 예쁜데 감상 나눌 사람 없으니까."
노을이 내리는 강가에 반짝이는 윤슬과 그 옆에 반짝이는 애. 홍중은 어제 느낀 감상보다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들을 사람 있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확실히 어제랑은 느낌이 달랐다.
"고마워, 나랑 같이 구경 다녀 줘서."
홍중의 시선은 세인트 로렌스 강에서 벗어나질 않았는데 자꾸만 성화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시선을 돌려 반짝이던 강물에서 성화의 얼굴을 바라보자 하, 한숨을 쉰 성화가 얼굴을 가리더니 고개를 움직여 강 쪽에서 손을 치운다. 애써 홍중의 시선을 피하던 성화가 홍중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있잖아, 지금 너한테 키스하고 싶어."
"그런 건 묻지 말고 해도 되는데."
"그냥... 처음 만난 사이에 이래도 되나 싶어서."
"분위기에 취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
홍중의 허락 끝에 둘의 입술이 가까워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분위기에 취한 건 아니야. 그냥, 네가 너무 좋아서."
홍중의 입술을 닦아 준 성화는 가만히 홍중을 바라보다 홍중의 말에 반박했다. 그러니까, 충동적이었던 건 아니야. 아까 여기 앉아있는 널 본 순간부터 난 이러고 싶었던 것 같아. 홍중의 입술 위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노을의 붉은 빛이 홍중의 얼굴로 옮겨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박성화 짜증 나. 너무 좋아서. 홍중의 팔이 다시 성화의 목을 감싸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눈치 볼 일은 없었다. 다들 그런 곳이고, 다들 그럴 수 밖에 없는 분위기니까. 자신처럼 상대의 목을 감고 입을 맞추는 것이 흔한 곳이었다. 그 상대의 성별이 어떻든.
둘의 입술이 떨어지고서, 자꾸만 웃음이 새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는데. 어느새 해가 넘어간 곳에서 더 머무를 시간이 없었다. 이제 곧, 성화와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으니까.
"솔직히 저녁이고 뭐고 너랑 키스 더 하고 싶어."
"미쳤나 봐. 안 되겠다, 여기 유명한 토끼 고기 레스토랑이 있대."
"그게 왜?"
"너 토끼 닮았거든. 내가 확 잡아먹으려고."
성화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듯이 울상을 짓는다. 에디, 나 진짜 힘든데....
결국 정한 메뉴는 성화가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가려고 했던 크레페 레스토랑이었다. 지도를 켜서 가게의 위치를 확인한 성화에게 마침 잘 됐다며 자신이 말했던 예쁜 분수가 여기 근처에 있다며 지도에 핀을 찍었다. 올드 퀘벡을 벗어나 오히려 홍중의 숙소와 가까운 곳. 홍중은 성화와 저녁을 먹고 마지막으로 분수를 구경한 뒤 헤어지면 되겠다는 일정을 세운다.
성화가 말한 크레페 레스토랑까지는 거리가 좀 멀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늘어지는 발걸음에는 적합한 거리였다. 올드 퀘벡의 성벽을 벗어나 도착한 가게에는 여행객보다는 퀘벡 주민의 비율이 더 높은 것 같았다. 불어로 적힌 메뉴판이나,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적힌 영어가 메뉴를 설명해 주었지만.
"에디, 여기 지역 특산품인 과실주가 유명하거든."
"그래? 너만 괜찮으면, 궁금하긴 한데."
"내가 근데 술이 진짜 약해서."
"맛만 보자. 나도 술은 약해."
그렇게 과실주 두 잔, 홍중과 성화의 저녁으로 먹을 크레페 두 개. 좁은 테이블에 비해 크레페의 접시가 제법 커서 겨우 두 개의 메뉴임에도 불구하고 샐러드 접시가 위태로웠다. 웨이트리스가 건넨 과실주를 받아든 성화가 홍중에게 다른 잔을 내밀었다. 짠, 우리 둘을 위하여. 무슨 구호가 그래?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홍중이 웃는 사이 먼저 입가로 잔을 가져다 댄 성화가 목젖이 한번 크게 움직이고서는 와, 작은 감탄사와 함께 입을 가린다. 진짜 맛있다, 달달하고. 짧은 평과 함께. 홍중의 평도 성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짜 맛있는데?
크레페도 맛이 좋았다. 의식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소음들 속에서 유일하게 닿는 성화와의 대화가 편하게 들렸고 고작 과실주 반 잔에 얼굴이 붉어진 둘의 기분이 한 없이 둥둥 뜨는 기분이었다. 별거 없는 대화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잔잔한 재즈가 흐르는 곳에서 둘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진짜 중요한 내용은, 아무래도 포근하고 가벼운 분위기가 감당하기 힘드니까.
성화와 친구들이 찾은 크레페 레스토랑은 보물과도 같았다. 네이버에 검색해도 후기가 몇 개 나오지 않는 진짜 현지인 맛집을 찾아낸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나랑 성화만 아는, 유명하지 않은 맛집. 유쾌한 농담을 건네는 웨이트리스나 좋은 여행을 하라며 엄지를 치켜올리는 캐셔나 모두 만족스러운 레스토랑이었다. 기어코 저녁을 결제한 성화의 뿌듯한 얼굴까지도.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폰테인 데 투어니라는 이름의 분수였다. 어둠이 내린 곳에서 가로등 불빛으로 서로의 손을 붙잡고 나란히 분수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서로 사진을 찍어 주기도 하고,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하고. 성화는 이곳의 야경이 예쁘다던 홍중의 말을 기억하고서 에디의 말을 듣고 밤에 이곳에 오길 잘 했다며 웃었다. 남을 칭찬하는 것이 익숙한 모양인지, 아직 남의 칭찬을 듣는 것이 부끄러운 홍중의 가슴만 떨릴 뿐이었다.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 운동을 계속하였다."
의아해 하던 성화에게 홍중은 설명했다. 도깨비 드라마 속 대사라며. 그게 뭐야, 웃음 짓던 성화를 마지막으로 찍은 홍중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서 자신에게 다가온 성화의 손을 맞잡았다.
"이제 헤어져야지. 난 숙소가 이쪽이랑 가깝거든."
"아쉬워. 숙소까지 데려다주면 안 될까?"
"헤어짐에는 아쉬움이 남아야지. 그래야 자꾸 뒤돌아보게 되고, 다시 찾게 되니까."
"너도 아쉬워?"
"여러 가지로 아쉬워. 나 샤또 프롱트낙 호텔에서 묵어 보고 싶었거든."
성화의 아쉬움 가득한 표정이 어딘가 들뜬 표정으로 변했다. 어, 그게, 그러니까. 뭐라 말을 고르려던 성화에게 웃어 보이며 예약 마감이더라, 다들 단풍 구경 하러 퀘벡에 왔나 봐. 설명을 하고서 마침 자신과 성화 역시 단풍 구경을 하러 퀘벡에 온 사실을 떠올린다. 그러고 보니 성화의 숙소는 어디일까. 자신의 도미토리가 숙소가 많은 곳 중 하나인데 성화의 숙소도 그 근처라면 조금 더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있잖아, 너만 괜찮으면 같이 잘래?"
"응?"
"나 샤또 프롱트낙 호텔에 묵어. 홀수로 와서 방 같이 쓰는 친구도 없고."
"어?"
"여행 와서 혼자 방 쓰니까 좀 외롭더라. 너만 괜찮으면 같이 방 쓰고 싶어."
"아니, 성화야."
"나랑 같이... 방 쓰지 않을래?"
하여튼, 중요할 때 훅 들어오는 건 성화의 몫이었다. 아까 식당 앞의 골목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솔직히 같이 자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아무리 성화가 묵는 숙소지만 내가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곳이라도. 그리고 아무리 첫눈에 반한 사이라지만, 서로 좋아하는 것도 말이 되지만, 그래도 같이 잠을 자는 건....
"침대 몇 개야?"
"하나. 대신 커, 퀸사이즈야. 둘이 충분히 누워 잘 수 있어. 나 진짜 얌전히 자거든."
그러니까. 침대도 하나인 방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랑 어떻게 자냐고. 어떻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홍중은 한 손에 캐리어를 돌돌 굴리며 성화의 옆에서 걷고 있었다. 한사코 자신이 짐을 들겠다는 성화의 말에 군대 갔다 온 사람이 이 정도는 들 줄 안다며 한사코 캐리어를 넘겨 주지 않았다. 자신도 군대는 다녀왔지만... 어쩌고. 그래도 성화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남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래도 되나, 진짜 이래도 되나. 홍중을 번뇌하게 만드는 고민은 길어지지 않았다. 호텔 로비에 들어선 홍중이 결국 감탄사를 뱉었다. 우와, 진짜 성화랑 같이 자기로 한 건 잘한 선택이야.... 진짜 쩐다. 로비에서부터 구경거리가 많았다. 그러고 보니 왜 호텔을 구경할 생각 안 했지. 성화 덕분에 놓칠 뻔했던 곳까지 구경하게 되었다.
"어라, 이거 우체통. 도깨비에서 봤는데."
"쓸래? 아, 그럼 아까 기념품 샵에서 엽서 살걸."
"나 어제 몇 장 샀어. 거기에 쓰면 되겠다."
성화의 안내에 따라 방으로 들어간 홍중은 짐이 풀려져 있는 성화의 흔적을 찾았다. 방을 좀, 깨끗하게 쓰네. 이미 옷걸이에 걸린 다른 옷들이나 한쪽 구석에 고이 접혀있는 캐리어나. 홍중은 자신이 짐을 푸는 동안 먼저 씻으라며 성화를 화장실 안쪽으로 보냈다. 이상하게 부끄럽다. 진짜, 부끄럽다.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괜히 붉어진 얼굴이었다. 벗은 코드와 옷가지들을 옷걸이에 걸어 성화의 옷 옆에 나란히 걸어 두었다. 짐을 많이 풀면 아침에 힘드니까... 어제 샀던 엽서 두 장과 잠옷, 세안 도구 등을 꺼내 놓고서 성화가 나오길 기다리다가, 모르겠다. 먼저 엽서를 썼다.
장미향을 내며 나온 성화는 홍중의 어깨를 껴안았다. 화들짝 놀라 몸을 파드닥 떨어낸 홍중의 간 작은 심장에 사과했지만. 덕분에 성화의 머리에서 떨어진 몇 방울의 물이 엽서 위로 튀었다. 닦을 새도 없이 번져 버린 잉크에 성화의 사과가 이어진다.
"됐어, 괜찮아. 어차피 너한테 쓴 편지야."
"진짜?"
"응, 뒤에 주소 좀 적어 주라. 너도 엽서 쓸래? 나한테 안 써도 돼."
"아니야, 나도 너한테 쓸래. 씻고 와. 안 읽을게."
성화가 자신이 쓴 엽서 뒤에 주소를 적는 것을 확인하고는 캐리어 안쪽에 엽서를 숨겼다. 읽지 마, 절대. 부끄러워. 퀘벡의 풍경이 담긴 엽서에 짧지만 긴 진심을 담았다. 자신이 없을 때 읽으면 괜찮겠지만, 몰라. 감성에 젖은 편지는 혼자 보는 거니까. 옷가지를 챙겨 화장실로 들어선 홍중은 성화에게서 나던 장미 향의 이유를 알았다. 이 호텔 어메니티구나.
성화가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엽서를 쓰는 성화의 뒤로 다가가 어깨를 끌어안았다. 다행히 성화의 엽서에 쓰인 내용에는 물방울이 닿지 않았지만. 타이밍이 좋았다며 엽서를 뒤집어 홍중에게 주소를 부탁한 성화였다. 주소를 적어 다시 건네려다가, 내용을 보겠다며 엽서를 들고 휙 몸을 틀었다. 아, 안 돼, 나 부끄러운데? 에디, 잠깐만!
짧은 몸싸움의 끝은 침대에 눕혀지는 것이었다. 가만히 성화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홍중이 짙어진 눈을 가렸다. 뜨끈한 열감이 홍중의 손바닥을 타고 넘어와 괜히 홍중의 귀 끝까지 붉어지게 만들었다.
"우리 이럴 시간 없어. 사진... 봐야지."
"아... 그래. 그래야지."
그제서야 홍중의 위에서 몸을 일으킨 성화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자신과 홍중의 휴대폰을 들고서 돌아왔다. 나란히 침대에 눕자 아까 성화가 했던 말이 사실이구나, 떠올린다. 둘이 누워도 남는 공간. 차마 그 사이를 좁힐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나 아직 네 번호를 몰라."
갤러리 가득한 성화의 사진을 걸어 에어 드랍으로 보내려던 참에 홍중은 자신이 성화의 번호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치사하네, 혼자만 내 번호 알고. 너 완전 선수야. 숙맥인 줄 알았더니. 아, 잠시만, 진짜. 그런 의도는 없었어. 해명하며 다급한 목소리의 성화가 순순히 자신의 번호를 불렀다. 새롭게 저장된 휴대폰 속 연락처, 박성화. 서로의 사진을 나눠 가진 둘이 갤러리 속 자신의 모습을 구경하던 중, 어라, 하고 선 성화가 둘의 간격을 좁히고서 홍중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엄브렐라 앨리에서 낯선 외국인이 찍어 준 둘의 사진. 사진 속 우리는 제법 익숙하고 다정해 보였다.
"이거, 진짜 잘 나온 거 같아."
"그치, 나도 아까 보는데 감탄했어. 너무 잘 찍어 주셔서."
"신기하지, 이곳에서는 우리가 커플로 보인다는 게. 한국에서는 그냥 친구였을 텐데."
"한국이었으면 친구도 아니야. 네가 내 번호 딸 일도 없었을 테니까."
"다행이다. 우리가 캐나다에서 만나서."
그러게, 진짜 다행이었다. 드라마 속 커플은 아니었지만, 기적처럼 둘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캐나다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쉽게 마음을 나누고 나란히 누워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진짜 한국이었다면 우린 친구도 아니었을 텐데. 그래도 우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친구라는 타이틀은 가졌으니까.
"있잖아, 에디. 내일은 뭐 해? 난 친구들이랑 올레앙 섬 가려고 했는데 혹시 같이 갈 수 있을까?"
"성화야, 나 내일이면 돌아가. 내일 한 시 기차야."
성화의 큰 눈이 잔뜩 동그래지며 뭐? 진짜? 홍중에게 되물었다. 휴대폰 어플을 켜 기차 시간을 확인한 홍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잖아, 미룰 수는 없는 거지?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아쉽게 되었다며 입술을 내밀었다. 그 입술에 살포시 입술을 올렸다 떼어낸 홍중이 성화의 볼을 콕 찔렀다.
"사실 오늘도 일정 없었는데 너 가이드 해 준다고 시간 잘 간 거 있지. 고마워, 덕분에."
"내가 더 고맙지. 그럼 우리 내일은 많이 못 놀겠네. 아쉽다."
"아쉬워? 그럼... 겨울엔 내가 뉴욕에 갈게."
"그때까지 나랑 연락해 줄 수 있어?"
"얼마든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운 성화에게서는 자신과 같은 장미 향이 났다. 짙어진 밤이었다.
-
성화의 손길로 일어난 홍중이 조식 먹으러 내려가자는 말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우와, 화려함으로 가득한 뷔페는 들어서자 마자 감탄사가 나왔다. 안내 받은 자리는 테라스 뒤프랭이 보이는 안쪽 자리였다. 음식과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메이플 시럽, 두 장의 팬케이크 옆의 해시브라운, 써니 사이드 업 스타일의 계란 프라이. 한 접시를 비운 홍중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성화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 안 기다리고 먼저 가도 괜찮은데."
"우리 이제 곧 헤어지잖아.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지난 밤 한 침대를 써서 그런가, 이제서야 성화의 낯 뜨거워지는 말에도 면역이 생긴 것 같았다. 그래, 그럼. 성화와 함께 다시 잡은 두 번째 접시에는 소시지, 베이컨, 그리고 오믈렛 조금. 구워낸 바게트에 테이블 위에 올려진 꿀을 조금 붓고, 잼을 조금 발라 베어 물었다. 아침을 많이 먹는 편은 아니지만 역시 잘 먹는 사람 앞에선 입맛이 도는 것 같았다. 아직 조금 부은 듯한 눈의 성화가 마지막으로 가져온 과일 몇 조각들로 입가심을 하고서 부른 배를 통통 두드렸다.
"나 원래 입이 짧은데 너랑 있으면 입맛이 돌아."
"그럼 포도 하나만 더 먹을래?"
성화가 건넨 포도를 받아 먹은 홍중이 이제 진짜 그만. 고개를 젓고서 오렌지 주스를 비워 냈다. 남은 과일들을 마저 먹은 성화가 입을 닦고는 이제 가자며 홍중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 가자. 다시 호텔 방으로 돌아온 홍중이 짐을 싸는 것을 성화가 아쉬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애초에 짐을 별로 풀진 않았지만 챙기며 확인할 짐은 한가득이었다. 몬트리올에서 산 것들, 퀘벡에서 입겠다고 잔뜩 챙긴 예쁜 옷들. 퀘벡에서 산 여러 가지 기념품들.
"너도 이제 친구 만나야지. 같이 온 친구들."
"그건 그렇지만, 진짜 아쉬워. 일정 바꿔서 너랑 같이 오타와 가고 싶을 정도야."
같이 가자는 말은 홍중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기대는 안 했지만. 성화는 잔뜩 아쉬운 티를 내며 짐을 챙기던 홍중의 어깨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너랑 더 있고 싶어. 귓가에서 들리는 낮은 속삭임에 짐을 챙기던 손을 들어 성화의 머리 위에 올렸다. 쓰다듬으려다가... 목을 확 조였다. 아, 아! 홍중아, 나 숨, 숨! 바둥거리는 성화의 목을 풀어 준 홍중이 몸을 돌려 성화를 마주 보고 앉았다.
아쉬움이 남는 만남이어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는 말을 떠올린다. 충분히 만났다면 끝이 아쉽지 않겠지. 홍중은 캐리어에서 천사 오너먼트를 꺼내 성화에게 쥐여 주었다. 어제 부티크 드 노엘에서 샀던. 도자기로 만든 천사를 받아 든 성화에게 자신도 똑같은 오너먼트를 보였다. 성화를 만나기 하루 전에 샀던 오너먼트. 같은 것을 산 이유는 당연했다. 커플 아이템, 퀘벡에서 만난 자신의 인연이 잊히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자신도 똑같은 오너먼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천사 오너먼트를 소중하게 감싸 쥔 성화가 뭉글한 눈빛으로 홍중을 바라보았다.
"방에 걸어 놔. 뉴욕 가서 확인할게."
"그래. 우리 꼭 뉴욕에서 만나, 에디."
"에디가 아니라, 홍중이. 김홍중."
"치사해. 이름 너무 늦게 알려 주는 거 아니야?"
"아쉬우면 뉴욕에서 실컷 불러, 성화야."
호텔에서 나오기 전, 우체통에 엽서 두 장을 집어 넣었다. 작별 인사를 건넸지만 기어코 팔레 역까지 따라온 성화의 손에서 캐리어를 뺏어 들었다. 가지 마, 주고 싶지 않아. 홍중아, 홍중아. 기껏 이름 알려 줬더니 이름에 꿀이라도 발라 놓은 듯 자꾸만 자신의 이름을 불러낸다. 역까지 가는 동안 대체 몇 번이나 자신의 이름을 들었던 건지, 캐나다에 온 이후 듣기 어려워진 이름이었는데. 성화야, 그만 좀 해. 내 이름 그만 불러. 만류해도 자꾸만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보내기 싫다는 애 달래느라 시간 다 쓴 홍중은 커피 하나 투 고 하지 못하고 기차에 오르게 되었다.
"갈게, 안녕."
"잘 가, 홍중아. 우리 또 만나자."
"뉴욕에서."
"응, 뉴욕에서. "
기차는 플랫폼에 선 성화를 뒤로 하고 앞으로 출발했다. 아쉬움 가득한 표정,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성화에게 손을 흔들어 준 홍중은 휴대폰을 켰다. 홍중의 갤러리 속 사진에는 홍중이 절반, 그거보다 조금 더 적은 성화의 사진들, 그리고 아름다운 퀘벡의 풍경들로 채워졌다. 아이클라우드에 단풍잎, 그리고 도깨비로 적어 놓은 폴더에 사진을 백업한다. 다음에는 꼭 내가 성화 사진 더 많이 찍어 줘야지.
혼자 호텔로 돌아가는 길
날씨는 찬란하게 맑은데
난 좀 쓸쓸한 거 있지
때맞춰 온 성화의 회색 메시지에 길게 눌러 하트를 남긴다. 도깨비 보면서 기다려. 내 생각도 하면 시간 더 잘 가겠지. 겨울 금방 올 거야. 우리 다시 만나자. 열심히 액정 두드려 만들어 낸 문장이 홍중의 파란색 화살표로 출발하고, 그 메시지는 오래 걸리지 않아 성화의 휴대폰에 도착할 것이다. 새롭게 생긴 할 일에 기차 안에서 잠을 자려고 했던 계획은 아무래도 조금 미뤄야겠다.
뭐, 성화와 함께한 시간 모두 눈부셨으니까. 모든 순간이 좋았다. 그 핑계로 내가 계속 얘랑 연락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핑계 없이도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날이 적당한 어느 날.
첫사랑이었다, 고백할 수 있기를.
-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가이드 익명입니다
함께하신 캐나다 퀘벡 여행은 즐거우셨나요?
가을 여행은 역시 단풍이 아름다운 캐나다죠
이번 여행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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