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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개>, 익명 1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12월 22일
  • 24분 분량




들개를 잡는 법. 안전한 포획을 위해 우선 덫을 준비한다. 들개들의 날렵한 행동에 머리통이 날아가고 싶지 않다면 그들을 직접 잡을 생각은 버리고 길목에 덫을 설치해야 한다. 들개 무리에게 접근해 그들의 대열을 흩트리고 한 마리씩 쫓아 미리 설치해 둔 덫으로 개를 몰아넣는다. 하지만 일반적인 덫들은 들개들의 두뇌와 힘을 견디지 못하고 찢어지거나 부러져 파편만을 남기고 사라지고, 그들의 손에서 인간들을 사냥하는 무기로 재회하게 된다. 들개를 쫓아 달리다 보면 언젠가 넘어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당황하지 말고 덫에 잘려 나간 발목을 찾아 복귀할 것. 들개들 덕분에 수지 접합 전문 의료인들이 항상 부상병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렇게 발에서 손, 그리고 수많은 머리까지 잘려지고 나서야 왕은 인정했다. 들개들의 지능을, 그들의 위험성을.

단순히 그들을 사냥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들개들의 우두머리를 찾고 반항의 목적, 타협해야만 했다. 왕이 건넨 수많은 대화의 메시지들은 왕의 앞으로 무참한 고깃덩어리가 되어 복귀했다. 왕과 들개들의 전쟁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덫은 주로 구덩이를 파 놓는다. 아무리 힘이 좋고 눈치가 빠른 들개들이어도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덫 위로 발을 올리면 그대로 깊은 구덩이 속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었다. 도망치던 들개들은 땅이 꺼지고서 자신을 추적하는 것이 아닌 덫에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이 무시하던 왕군에게 속았다는 사실에 분노에 휩싸인다.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깊이에서 흥분한 들개들이 만들어낸 실패들은 그들을 쉽게 패닉 상태로 이끌었다. 그런 상태의 들개들을 잡아 그들의 우두머리, 개대장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 그것이 수많은 놓침 끝에 찾아낸 가장 고전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렇게 덫에 갇힌 들개들을 포획하고, 반항 시 사살. 그러한 과정은 이론적으로는 쉬웠다.

실전에서는 무지막지한 들개들의 체력을 따라가기 위해 거친 숨을 내쉬어야만 한다는 큰 차이가 존재했다.

숨을 쉴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지나간 숨길들을 칼로 베어내듯이 시린 계절이었다. 달빛이 아무리 환하게 들개의 머리 위를 비추어도 쫓아가며 내뱉는 입김에 시야가 흐려졌다. 시야 확보를 위해 숨을 꾹 참고 뛰다가도 다시 깊이 숨을 들이쉬고 터질 듯이 부푼 폐부를 힘껏 꺼트려야 들개들의 달리는 속도를 간신히 따라잡을 수 있었다. 아무리 급한 작전이라도 그렇지, 적어도 옷이라도 갈아입을 시간을 요구했어야만 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에게 맡기거나. 성화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들개의 팔에 둘린 완장을 너무 늦게서야 발견했다. 들개들의 수많은 고문 끝에 알아낸 개대장에 관한 유일한 정보. 왼팔에 둘린 완장과 그 모양. 잡힐듯한 거리 앞에서 긴 모피를 흩날리며 뛰고 있는 저 들개는 분명 개대장이 틀림없었다.

이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는 부담감과 책임감이 성화의 머리를 굳게 만들었다. 이건,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필이면 자신이 뒤쫓는 상대가 개대장이라니. 불편한 구두 굽이 지면을 힘차게 박차도 그와의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개대장이 가는 방향에 미리 설치해 둔 덫이 있다는 것. 조금 더 몰아야만 했다. 시큰한 발목이 부러졌더라도 성화는 뛰어야 했다.

자신의 앞에서 달리던 들개가 사라졌다. 됐다. 성화는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허리를 숙인 채 부족한 숨을 몰아쉬던 성화의 시야에 거세게 피어오르는 하얀 입김 사이로 구덩이에 간신히 걸쳐진 들개의 손가락이 걸렸다. 잔뜩 힘이 들어가 굽혀진 손가락의 관절들이 조금씩 위로 굽혀지고, 손등, 손목이 차례로 구덩이 밖으로 빠져나와 지면을 지으면, 구덩이 위로 내미는 까만 가면. 젠장. 성화는 덜걱이는 발목을 이끌고 구덩이 입구로 다가갔다. 주변 흙바닥을 잔뜩 긁어 손자국이 난 그 위를 붙잡고 간신히 매달린 들개의 왼팔에는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는 문양이 박힌 완장이 채워져 있었다. 들개들의 대장, 통칭 개대장을 잡았다. 드디어. 성화는 망설임 없이 그 손끝을 발로 툭, 찼다. 개대장을 잡았으니 자신도 인정받을 수 있겠지. 생각도 잠시, 화끈한 발목을 잡아채는 손길은 고통을 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렸고 그대로 함께 깊은 구덩이 안으로 빠지고 말았다.


딱딱한 흙바닥 위로 흙먼지가 날리고 자신보다 먼저 떨어진 개대장의 행방은 너무나도 뻔했다. 성화의 아래에 깔려 몸을 버둥거리는 개대장. 성화는 그의 오른손을 붙잡아 수갑을 채우고서 자신의 왼쪽 팔에 나머지 수갑을 채웠다. 드디어 잡았다. 개대장을.


"비켜."

"얌전히 있어. 도망갈 생각 말고."

"... 무거우니까 비키라고."


개대장은 수갑이 채워진 손을 대충 흔들어 보였다. 이래서 어딜 간다고. 아, 비키라니까? 뿌연 숨을 뱉어낸 그는 무릎을 들어 성화의 등을 퍽퍽 찍어내며 자신의 위에서 비킬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그를 잡겠다는 일념하에서 성화는 어떠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목석같이 굴었다. 그의 위에서 양팔을 짓누른 채로 몇 번의 무릎질을 견뎌내며 미동도 없이 그를 제압했다. 몸부림 끝에 힘이 빠진 듯 결국 얌전해진 개대장의 얼굴 위로 손을 올렸다. 얼굴을 덮은 까만 가면 위로 손을 가져다 대도 포기한 듯 그는 움직임이 없었다. 이렇게 쉽게 잡힐 이유가 없는데. 성화는 긴장감을 놓지 않고 조심스럽게 가면을 움켜쥐었다. 머리 위로 넘겨 올린 까만 가면 아래,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얼굴과 처음으로 마주했다.


"드디어 만났네, 개대장."

"그딴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던 거야? 존나 구려."

"명성치고는 볼 것 없네. 쉽게 잡혀서 얼굴도 까이고."

"뭐... 별로 그런 건 신경 안 쓰는데. 어차피 내 얼굴 보고 살아남은 사람 없으니까."


그리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화의 눈앞을 지나가는 짧은 단도. 성화가 몸을 뒤로 젖히는 순간을 타서 개대장은 몸을 일으켰다. 연결된 수갑이 매어진 손목이 부러질 듯 거리를 넓혔지만, 그 거리에는 한계가 있었다. 기껏해야 팔 하나, 둘 정도. 개대장이 손목을 터는 동작 한 번에 전해지는 힘에 성화는 중심을 잃고 휘청이다 거리를 좁힌 개대장을 피해 뒷걸음질 치다 결국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까와의 반전된 자세. 어느새 위치가 뒤집혀 번쩍이는 단도를 눈앞에 두고 흙바닥에 누워있는 성화와 그 위에 올라탄 개대장. 그의 머리 위로 환한 달빛이 쏟아지면 그림자로 뒤덮이는 개대장의 얼굴. 차마 읽을 수 없는 얼굴에 성화는 자신의 끝을 마주하게 된다. 손짓 한 번에 자신을 제압한 개대장의 몸짓은 들개들의 우두머리인 이유가 있었다. 단도를 사이에 둔 둘 사이의 일방적인 긴장감, 길어지는 대치. 성화는 처음 느껴 보는 선명한 살의와 적대심, 그리고 왕에게서도 느낄 수 없었던 위압감을 느끼고 말았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 그리고 그것을 본 개대장은 푸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손에 들린 단도를 뒤로 던졌다.


"농담. 나도 네 얼굴 아는데 너도 내 얼굴 알아야 공평하지. 너 걔잖아. 왕실의 꽃, 여섯 번째 왕자, 박성화."

"날 알아?"

"널 왜 몰라. 매일 아침 지겹게 보는데."

"개대장, 너도 국민이었어?"

"요즘 왕자들을 반란군에게도 국민 타이틀 붙여 주나."

"성벽 안에 사냐는 말이야."


개대장에게서의 대답은 없었다. 음, 음음, 작게 들려 오는 허밍. 박자와 음은 정확하지 않아도 성화는 그 노래를 알아챘다. 개대장이 부르는 저 노래는 국가였다.


"나라고 성벽 밖에서 땅굴 파고 지내진 않는데 말이야."

"국민이라면서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지금 나라에 분란을 일으키는 게 누군데? 왕실은 국민을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존재한다. 지겨워. 내 얼굴이나 잘 봐 둬. 몽타주 뿌려야 될 거 아니야."


뭐, 잊혀지기에 쉬운 얼굴은 아니겠지만. 개대장은 성화에게 몸을 바짝 붙이며 그 눈앞에서 웃었다. 헛웃음이 아니었다. 가짜로 지어낸 웃음 역시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이 상황이 즐거워서 나오는 웃음. 대체 왜.


"미쳤어. 네가 일으킨 쿠데타가 사람을 몇이나 죽였는지 알아?"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자. 네가 사랑하는 그 '왕'이 죽인 사람은 몇이나 될 것 같은데?"

"그건 다르지, 전부 국민들을 위해서..."

"시시하다, 너라면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웃음을 단번에 지워 낸 그에게서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 그리고 다시 만들어낸 얼굴은 정말로 따분해 보였다.


"하긴, 너라고 뭐가 다르겠어."


순순히 성화의 위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개대장은 다시 몸을 굽혀 성화의 땀을 콕콕 눌러 닦아 주더니, 잔뜩 주름이 잡힌 미간을 꾹 눌렀다.


"말끝마다 개대장, 개대장. 이름도 알려 줄게. 김홍중. 그 따위 호칭으로 부르지 말고 수배 제대로 때려."

"무슨 속셈이야."

"무슨 속셈이긴. 이제부터 본격적이게 될 거라는 뜻이지."


홍중은 숙였던 몸을 다시 일으키고서 바닥에 누워있는 성화에게로 손을 뻗었다. 됐어. 성화는 손을 쳐냈다. 그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절대로 그에게서 어떠한 도움도 받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들은 항상 보답을 하니까. 선의도, 악의도 보답으로 돌려주기 마련이었다. 수갑으로 묶인 서로의 손끝이 닿은 순간에 홍중은 인상을 쓰며 수갑을 덜컥였다.


"너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


그제서야 홍중은 성화가 얇은 정장 차림으로 자신을 뒤쫓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괜찮아?"

"묻지 마."

"추워 보이는데."

"말 걸지 말라고. 그냥 얌전히 이대로 잡혀 가."


하지만 성화의 꽉 깨문 턱은 덜덜 떨리기 시작했고, 심상치 않다고 느꼈던 발목의 통증마저 사라질 정도로 모든 감각들이 얼어갔다. 젠장. 옷 갈아입을 시간을 벌었어야 했는데.


"야, 너 구하러 오는 사람 없냐?"

"뭐?"

"아니면 널 죽이려는 사람이 있나?"

"무슨...!"

"너 왕자라면서 왜 아무도 안 오는 건데."

"... 기본적으로 수색은 아침에 해가 뜨면 시작해. 덫을 확인하러 갔다가 빠지면 안 되니까."

"그럼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우리 둘뿐이라는 거네."


홍중은 수갑이 채워지지 않은 반대 손으로 수갑을 흔들어 보다가 온통 얼어 붉어진 성화의 손은 그의 움직임에 따라 힘없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이건, 뭐... 힘으로 부서지지도 않을 것 같고. 중얼거리던 홍중은 손목을 시리게 만드는 금속의 무게감과 견고함을 가만히 만졌다.


"열쇠는."

"안 들고 다녀. 기본적으로 체포가 원칙이니까 수감 후에 일괄적으로..."


으휴, 구닥다리 왕실. 홍중은 수갑이 채워진 자신의 손을 만져 보다가 엄지의 관절 부분을 힘껏 눌렀다. 미친, 뭐 하는데. 보면 모르냐. 왕자님이 이런 거 하진 않을 것 같으니까. 빠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살벌하게 귓가를 울렸다. 아프지도 않은지 눈 하나 깜짝이지 않은 채로 엄지를 부러트린 홍중을 손을 모아 수갑 사이로 손을 빼냈다. 너랑 대화하면 뭐라도 건질 줄 알았는데 왕자 시해로 현상금 더 오를 것 같아서. 수갑이 채워졌던 손목을 빙글 돌린 홍중은 구덩이의 벽 쪽으로 향했다. 떨어진 칼을 주워 벽을 긁어도 날씨가 추워 잔뜩 얼어붙은 흙더미는 흠집이야 났지만, 전혀 무너지지 않았다.


"뭐 하는데?"

"보면 모르냐, 탈출하지."

"야, 개대장, 너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김홍중이라니까.”


그리고 수갑에서도 벗어났는데 이제 해당 사항 없지 않나. 흙에 칼을 내리꽂은 홍중은 성화의 말은 전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저걸 말려야 하는데, 성화는 홍중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손목에는 수갑을 덜렁이고, 한쪽 발을 절뚝이며. 그리고 그 걸음을 본 이상 홍중은 못 본 척 지나칠 순 없었다. 성화는 왕자이기 전에, 국민이니까. 홍중은 성화를 벽에 기대게 한 채로 그 앞에서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의 행동을 제어하는 법은 쉬웠다. 순순히 잡혀 줄게. 구덩이만 탈출하면 좆같은 수갑 백 번이고 손목에 걸어 줄게. 그렇게 홍중은 부러진 성화의 발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린 채 왼쪽 팔에 매인 완장을 풀어 부러진 발목을 단단히 동여맸다. 이딴 구두를 신고 날 쫓아 뛰다니, 이걸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미쳤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언 땅의 냉기를 맨발로 밟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나저나, 진짜 성화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닌가. 새로 조사할 항목을 추가했다.


"해 본 적 있어?"

"없어."

"하긴, 왕자님인데 있는 게 더 이상하겠다."

"할 수 있어."

"그래. 해야지, 여기서 얼어 죽기 전에. 보고 내가 밟은 곳만 잘 따라서 밟아. 아래 보지 말고."


홍중은 흙벽에 칼을 깊게 박았다가 위로 뽑아냈고 그렇게 생긴 틈에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천천히 팔을 하나씩 위로 옮기고, 다시 흙에 칼을 꽂고, 손을 옮기고, 발을 옮겼다. 벽 위를 타고 오르는 홍중을 보며 미친 반란군들, 저런 것도 배우나. 그리고 저걸 내가 해야 한다는 거고. 눈을 감으면 아찔해지는 머릿속이었다. 덧붙여 구덩이를 탈출하는 법을 들개들이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새로운 덫 개발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고. 그동안 잡힌 들개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유가 있었다. 왕국군이 잡은 개들은 조무래기들이었으니까.

어느새 개대장이 구덩이 밖으로 몸을 빼낸 것도 몰랐다. 뭐 해?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면 고개만 구덩이 안으로 내민 개대장. 그들이 원하는 대가가 어떨지 몰라도 성화는 지금은 그의 도움을 받을 때였다. 다행히 홍중이 매 준 발목은 덜걱이지 않았고 벽을 기어오르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구덩이를 거의 다 빠져나올 때 즈음 모습을 감췄던 홍중이 다시 나타났다. 설마 자신이 했던 것처럼 구덩이 안으로 밀어 넣으려는 걸까. 경계를 했던 것도 잠시, 홍중은 성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 올라왔으니까 그냥 내 손잡고 나와."


개대장에 대한 정보 하나 더. 그는 오른손잡이인 것이 분명했다. 무의식적으로 내민 손이 오른손. 아까 수갑에서 손을 빼내느라고 부러트린 손으로 홍중은 벽을 올랐으며 이제는 자신에게 잡으라고 내밀었다.


"됐어. 그거 잡았다가 다시 떨어질 일 있냐."

"다친 쪽인 건 어떻게 알고. 눈치도 빠르네."


구덩이 밖으로 몸을 내민 성화의 위로 덮어지는 무게감은 홍중의 뒤를 쫓을 때 지겹게도 봤던 그 무늬였다. 홍중의 모피. 추운 것 같아서. 난 견딜 만하거든. 홍중의 체온을 품고 있는 모피는 제법 따뜻했다.


"가자."

"어딜."

"성에."

"제 발로 잡히려고?"

"생명의 은인한테 말이 심하네."


그러더니 홍중은 성화가 걸친 모피 안, 그의 품에 파고들어 성화의 팔을 자신의 어깨 위로 둘렀다.


"성벽까지는 데려다줄게."

"너 나한테 왜 그러는 건데."

"넌 다른 왕자들이랑 다르거든."

"어떤 점이?"

"뭐... 국민들이 좋아한다는 것만 알아 둬."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국민들이 좋아한다... 그걸 반군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성화는 입을 열 수 없었고 홍중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귓가에는 거센 바람 부는 소리만이 울렸고 둘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성벽을 밝히는 불이 보이고 더 이상 달빛이 아닌 조명의 아래에 서로의 표정이 읽혀질 때 즈음, 홍중은 성화의 몸에서 다시 모피를 벗겼다.


"이제 알아서 가. 더 갔다가는 잡히겠네."

"아까 수갑 백 번이고 채워진다면서."

”그걸 믿냐. 꼬라지는 너만 잔뜩 구른 것 같은데 말이야.“


그가 돌려 입은 종아리에서 달랑대던 홍중의 모피는 길게 내려와 그의 발목을 덮었다. 모피 한 장, 사람 하나의 온기가 이렇게 컸던 거였나. 평생을 혼자 있던 성화는 자꾸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쉬운 마음? 그 온기가? 반군인 이유가 있었다. 벌써 자신을 이렇게 홀리고... 추위에 굳어진 머리가 받아들이는 일차원적인 감각은 강렬하고 자극적이었다.


"국민으로서 왕실에 하는 마지막 예의라고 하지 뭐."

"그러기엔 말도 놨는데."

"그건 레지스탕스의 자존심이지."

"개대장, 난 널 놓친 거야. 난 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몰라."

"됐거든. 그냥 다 기억해. 상부에 보고해도 좋고."


그래서 성화는 홍중을 보며 자꾸 미소를 지었다.


"나 지금 너희 무시한 건데 웃음이 나? 무슨 왕자가 이래."

"이런 배짱은 있어야 반란군 수장 하는 건가 싶어서."

"진짜 이런 걸 왕실이라고... 다음에 만나면 목숨값으로 따뜻한 뱅쇼나 줘. 나 그거 좋아하거든."

"다음엔 안 봐줄 건데."

"그러든가."


소박한 대가였다. 목숨을 살려 준 대가로 왕실의 전투 기밀 정도를 바랄 줄 알았는데. 어느새 어둠 속으로 사라진 홍중의 뒤를 자꾸만 눈으로 좇았다. 어, 왕자님? 복귀 중인 다른 병사의 손에 잡힌 다른 들개만 아니었다면.

성화와 함께 출동한 부대원들은 둘, 많게는 셋까지 들개들을 포획했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왕자라는 놈이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오히려 돌아왔으니 향하는 눈총이 날카로웠다. 성화는 개대장에게 된통 당하다 겨우 탈출했다는 말로 손목에 메인 수갑을 풀어냈다. 정작 개대장에게는 손끝 하나 대지 못하고 그의 얼굴이나 목소리,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다쳐서 돌아온 왕자. 왕은 그에게 혀를 찼으며 계승권을 가진 다른 왕자들이나 신하들은 성화를 모자란 녀석이라며 비웃었다. 왕실 군대가 보면 기강이 흐트러진다며, 왕실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느니. 그럴 거면 옷이라도 갈아입을 시간을 주든지. 방송 끝나자마자 부른 새끼들이 누군데. 씻고 싶다는 핑계로 그 자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성화는 목을 조이고 있던 불편한 넥타이를 집어 던지고서는 드디어 정장을 벗었다.

그제서야 발견한 발목에 두른 천 조각. 개대장, 홍중의 완장. 이걸 어떻게 들키지 않고 버릴 수 있을까. 지친 몸은 도저히 그런 것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우선 따뜻한 물에 몸을 좀 녹여야 할 필요가 있었고 발목을 치료해야만 했으니까. 대충 성화만의 책상 서랍 안에 넣어 놓고서는 열쇠를 걸어 잠갔다. 홍중의 이름과 얼굴을 말하지 않은 것은 생명의 은인에게 할 수 있는 정도 아닐까.

성화는 시종들이 받아 둔 욕조 안에 몸을 뉘었다. 겨울마다 성화가 항상 달고 사는 시나몬 스틱이 꽂힌 에그노그는 입 안에서 달콤하게 퍼지고는 몸을 따뜻하게 데웠다. 평소에는 잘 넣지 않았던 꼬냑을 넣은 에그노그는 달지만 씁쓸한 맛이 홍중을 닮았다. 걔는 왜 왕실을 거부하고 반군이 된 걸까. 생각은 끊이질 않았다. 기어코 왕실이 국민들에게 무엇을 잘못했지? 고민에 도달할 때 즈음,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와 온몸을 감싸는 훈기에 성화는 생각을 이어가지 않기로 결정한다. 찰나에 홍중의 감정이 옮은 것일까. 성화는 내일 아침도 방송을 해야 했고 치료까지 받으려면 몇 시간도 눈을 붙이기 힘든 현실이 당장 눈앞에 펼쳐졌으니까.


성화는 다음 날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방송을 했다. 가볍게 시작한 오늘의 날씨에 대한 이야기는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행복한 이야기들로 이어졌다. 늘 항상 비슷한 내용. 국민들이 깊은 걱정을 하지 못하게, 현재의 위치에 안주하게끔 만드는 방송. 성화는 카메라 앞에서 미소 지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대본을 친절히 읽어나갔다. 김홍중도 듣고 있겠네. 무심코 든 생각은 이윽고 레지스탕스들에 대한 경고로 넘어갔다. 지금이라도 자수하면 감형이 주어질 것이며 왕실은 언제나 국민들을 위해 존재한다. 마지막 말은 홍중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홍중의 능력이라면 적어도 근위대장까지도 노려볼 만했을 텐데.


성화는 그런 역할이었다. 반란군의 수장인 홍중도 알 정도의 왕실 얼굴마담, 국가의 꽃.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잘생긴 이유도 있었지만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계승권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동시에 형제들은 얼굴 팔리는 일들은 왕실이 해야 하는 일 중에서도 가장 하찮은 웃음을 파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형제들은 성화의 행동들이 곧 왕실의 얼굴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 이야기가 끝난 그 이후에나 알게 되었다. 지금의 성화는 매일 아침 라이브로 국민들의 안부를 묻고 그들의 이야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들어 주며 국민들의 이야기를 직접 입 밖으로 뱉어 주는 유일한 왕자였기 때문이다.

뉴스를 비롯한 다양한 방송에도 나와 국민들에게 친근감을 주었고, 직접 주최한 자선 행사를 통해 번 수익금을 모두 기부한다든지, 성화가 참여한 봉사에는 지원자들이 넘쳐났다는 것들. 왕실에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성화를 잘생기고 다정하고 자비롭지만 계승 교육을 받지 않은 해맑고 멍청한 왕자라고 생각했다. 역시 부모가 달라서. 성화의 뒤에 달라붙은 꼬리표였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도록 성화는 매일같이 방송을 했고 봉사를 갔으며, 그럴 때가 아니면 왕실 군병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다. 왕자가 개 떼를 직접 잡는 모습을 보이면 그들의 나쁜 점을 더욱 강조할 수 있었으니까. 시기상조였다. 며칠만 더 쉬다가 훈련에 참여해야 했는데. 채 붙지 않은 발목으로 무리했다. 시큰한 발목의 통증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성화는 내일의 일정 중 어느 하나 자신의 뜻대로 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피곤해. 저절로 입 밖으로 뱉어지는 말이었다. 진짜 힘들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야 성화는 자신의 본심을 홀로 꺼냈다. 그때 홍중을 만난 이후로 쉬지 않고 다친 몸으로 너무 무리했다. 제대로 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훈련장에서 덮어쓰고 온 먼지들을 깨끗이 씻고 온 성화는 머리도 말리지 않은 상태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평소와 다른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서.


"피곤해...."

"이렇게 따뜻한 곳에서 자면 피로 싹 풀릴 거 같은데."


성화의 말에 대답하는 것은 자신의 침대 옆, 이불 안에서 얼굴만 쏙 내민 홍중이었다. 깜짝 놀러 소리 지를 뻔한 것을 홍중이 그 입을 막아 겨우 막았다.


"아니, 어떻, 어떻게?"

"창문 안 잠겨 있던데. 나 들어오라고 열어 놓은 거 아니었어?"


깜짝 놀라 벌렁이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킨 성화는 자신의 입을 막은 손을 떼어 내려다 자신과 달리 홍중의 손에 아직까지도 붕대가 감겨있는 것을 보고서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덜 나았어?"

"뭔... 뼈가 하루 이틀 만에 붙냐. 너는 발목도 덜 나은 애가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고."


성화는 홍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침대 밖으로 몸을 일으켜 문밖으로 고개만 내밀고서는 급하게 시종을 불렀다. 홍중은 사람을 부르는 것을 보고 금방이라도 방을 벗어날 자세를 취했지만, 성화의 입에서 부탁한 내용을 듣고는 맥이 빠져 다시 침대에 널브러졌다. 연고와 붕대, 따뜻한 에그노그 한 잔과 뱅쇼 한 잔. 두 잔이나요? 시종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늦은 시간에 심부름 두 번 할 바에야 윗사람에게 식은 음료를 마시게 하는 게 나으니까.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린 시종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서 트레이만 챙겨 들어오는 성화였다.

약속한 따뜻한 뱅쇼를 홍중의 손에 쥐여 주고서는 홍중의 손에 대충 감긴 더러운 붕대를 풀었다. 순순히 손을 내어 준 홍중은 잔을 입에 대지도 않은 채로 성화가 하는 행동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부러진 이유로 붕대를 감고 있던 것이 아니었나. 자잘하게 난 생채기들이나 피딱지가 굳은 상처들. 오래된 것부터 이제 겨우 새살이 돋아난,


"구경났냐."


미끄러지듯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움켜쥐었다. 윽, 홍중의 잇새에서 씹혀나오는 짧은 호흡. 둘의 눈이 마주쳤다. 그저 미간이 조금 더 찌푸려진 홍중은 다시 손을 내어 주었다.


"내 발목은 꼼꼼히 감아 주더니, 지 손은 개판을 쳐 놨네."

"그 덕분에 니가 지금 걷고 있는 거야."

"그래서 약속한 뱅쇼 줬잖아."

"난 수배지에 내 이름 없길래 진짜 다 잊은 줄 알았는데."


홍중은 따뜻한 뱅쇼가 담긴 유리잔을 휘 돌려보더니 입에 조금 머금었다. 와, 시장에서 파는 거랑 차원이 다르네. 역시 진짜 과일이 들어가서 그런가. 시장에서는 그냥 향만 나는 색소 설탕물 끓여서 내는 게 전분데. 홍중은 채 정적을 참지 못했다. 성화가 입 꾹 다물고 홍중의 부러진 손가락 위로 약을 바르고 꼼꼼히 붕대를 감기만 하자 홍중도 입을 다물고 그가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안 잊혀지더라고."

"잊기엔 좀 아까운 얼굴이지, 내가."

"너는 왜 왕실을 배신한 거야? 너 정도 실력이면 못해도 대장까지는,"

"그럼 너는 왜 왕실을 믿는데? 매일 잠도 몇 시간 못 자고 몸 갈아가면서 방송하고, 봉사하고, 훈련하고. 그게 할 짓이냐."

"... 나한테 관심 너무 많네. 그걸 다 봤어?"

"뭐래."


홍중은 고개를 돌려 붉어진 얼굴로 잔을 들었다. 비워지던 잔을 보던 성화는 픽, 웃음을 흘렸지만 자신과 홍중이 이렇게 한 자리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자신에 대한 관심이 아닌 반군으로써의 감시에 가깝겠지. 왕실의 얼굴, 국가의 꽃, 체제의 확성기 역할을 하는 것이 성화였으니까. 그리고 그걸 홍중이 딱히 짚어 주지 않은 건, 그것 역시 기밀에 가까운 이유일 것이다. 자신이 봉사와 훈련까지 한다는 것을 알 정도면 꽤나 깊은 곳까지 홍중의 스파이가 붙어 있다는 건데. 둘 사이의 긴장감이 다시금 팽팽해진다. 홍중은 자신이 이런 것을 떠올릴 것까지 감안하고 정보를 흘린 것이다. 그렇다면 왜일까. 개대장이 아닌 김홍중을 더 파 볼 이유가 생겼다.


"왕실을 믿는 건, 그냥 그렇게 배웠으니까."

"웃기네. 나도 마찬가지야. 그냥 그렇게 배웠으니까."


기분이 이상해진다. 자신과 홍중이 동급이라는 사실에. 그렇게 교육받아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성장한,


"그럼 우리가 같은 걸 배웠으면 어땠을 것 같은데?"


그리고 그건 홍중 역시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의도가 너무나도 뻔히 보이는 질문이었다. 오히려 말려들게 생겼네. 조금의 말실수라도 해서는 안 됐다. 꼬투리를 잡아 자신을 반군에 속하게 할지도 모르는, 아무래도 분위기를 환기 시킬 필요가 있었다. 성화는 반쯤 식어버린 에그노그로 타는 목을 축였다. 아무래도 달달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다 마셨으면 그만 가."

"아직 덜 마셨거든. 방이 이렇게 따뜻한데 어떻게 나가."

"지금 안 가면 여기 개대장 왔다고 소리 지르려고."

"치사하네... 조금만 더 누워있다가 갈게. 밖에 개추워."


홍중에게 매몰차게 굴 수 없는 건 그가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인 걸까. 어쩌면 통해 버린 극과 극이라서 그런 걸까. 그래, 마음대로 해라. 결국 성화는 자신의 몫의 에그노그가 담긴 잔을 쥐고서는 홍중의 옆,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아싸. 이불 폭신폭신, 보들보들. 고작 몸을 둘러싼 이불 하나에도 충분한지, 홍중은 이불에 얼굴을 묻기도 하고 그 결을 쓰다듬으며 남은 뱅쇼를 천천히 비워나갔다.

그 고요함은 피곤함에 쩐 성화가 천천히 눈을 감기에 충분했다. 갑자기 잠을 깨우는 홍중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근데 나 궁금한 거 있어."

"질문 주체가 그냥 국민 김홍중이야, 아니면 반란군 수장 개대장이야."

"그냥 국민 김홍중. 네 생각엔 우리가 반란 성공할 확률 얼마나 돼? 너 왕자니까 똑똑할 거 아냐."

"국민이라며 이상한 걸 묻네. 나 그런 거 안 배워서 몰라. 근데 일 퍼센트도 안 되겠지. 국민은 국가편이고... 전쟁을 싫어하니까."

"야, 근데 그거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

"그럼 혁명 접든가."


홍중의 목을 타고 뱅쇼가 넘어가는 소리. 길어진 적막 내내 과일만 씹던 홍중은 결론을 내린 것인지 여태와는 달리 조심스러운 어투로 말을 꺼냈다.


"솔직히 나도 공감. 그리고 난 우리 대장이 혁명 성공해도 좋은 나라가 될 거라고는 자신 안 해."

"니가 대장 아니었어?"

"방금 십 퍼센트로 올랐다. 그것도 몰랐냐? 따로 있어, 우리 대장. 내가 대장이면 그 많은 선전에 굳이 위험하게 얼굴 내밀겠냐."

"근데 너 나 뭐 믿고 말해?"

"날 믿고 하는 말이지. 난 니가 왕이 되는 게 좋은 세상을 만드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보여서."


그리고 홍중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성화에게 있어서 가히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반군도, 지금의 왕세자도 아닌 자신이 왕이 되길 원한다니. 성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니가 며칠 전에 봉사 차 갔던 그 골목, 거기가 레지스탕스들을 호의적으로 생각해 주는 곳이거든. 나라 욕해도 뭐라 안 하는. 근데 그런 사람들도 니가 가면 웃더라. 덧붙이는 홍중의 말에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받는 인정이 왕실의 사람들이 아닌 반군이라니. 이걸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홍중에게로 시선을 돌린 성화는 무슨 말도 덧붙이지 못하고 어, 그, 단발적인 침음만 입 밖으로 샜다. 아무리 부드러운 에그노그라고 해도 성화의 목구멍에서는 삶은 계란을 물 없이 한입에 삼킨 것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정작 폭탄 같은 말 던진 당사자는 나른하게 침대에 누워 다 풀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지만.


"야."

"응."

"나 진심인데. 공부해라, 너. 니가 왕 해."

"날 뭘 믿고, 뭘 보고 그런 말 하는 건데."

"잘생겼잖아. 지금 왕세자 개못생김."


홍중의 중얼거림이 길어졌다.


"너 진짜 잘생겼어."

"고작 그런 이유로 내가 왕이 되길 바라는 거야?"

"같은 편이면 좋았을걸. 너 잘생겼어, 죽이기 아까울 만큼."

"야."

"넌 뭘 믿고 나한테 그렇게 안일해?"


이불 안에 가만히 누워있던 홍중이 몸을 일으켜 성화의 위로 올라타는 순간을 성화는 잡을 수 없었다. 그저 예전과도 같이 턱 밑에 느껴지는 날 선 무언가에 찔리지 않게 행동을 고정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 하나는 예전과는 달리 홍중의 살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그때도 죽이지 않았는데 지금이라고 다를 리가. 홍중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아니, 확신.


"모르겠다, 나도."

"그런 대답 듣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니 손 다 나을 때까지는 그냥 이렇게 굴게."

"뭔... 평생 부러트릴까 보다."


반응은 별로였지만 제법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나 보다. 허벅지에 걸려있던 칼집을 정리한 홍중은 칼날이 닿았던 턱 밑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턱 아래를 천천히 매만지는 손길. 따끔한 기색이 없는 것을 보니 어떤 생채기도 나지 않은 모양이다. 새삼 반군 대장의 솜씨에 감탄하게끔.


"기간 더 늘려 줘. 봄까지만. 겨울은 너무 춥거든."

"지하 감옥은 봄에도 춥던데."

"야... 그게 경험담이면 너 진짜 주변에 널 죽이려는 사람 있는지 찾아봐."

"내 눈앞에 있잖아, 너."

"난 아직 보류 상태지. 이제 가야겠다. 잘 마셨어."

"지금?"

"지금이 제일 어두울 때니까."

"또 올 거야?"


씩 웃기만 하고 대답은 않는 홍중이었다. 성화의 책상 위에 놓인 까만 가면을 얼굴 위로 덮어쓴 홍중은 성화의 창문 너머로 얼굴을 내밀더니 휙, 뛰어서 사라졌다. 굳이 배웅이 필요할까. 걱정이 사치인 사람인데. 홍중이 또 오려나. 한겨울에도 창문을 제대로 닫지 못할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언제 올 지 모를 상대를 기다리는 건 꽤나 가혹한 짓인데. 혼자 남은 적막함에 성화는 눈을 감았다. 아, 아니. 다시 눈을 뜬 성화는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갈 때 문 닫고 나가지. 어느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홍중이 남기고 간 어떤 흔적도 가려줄.

순간 성화는 자신에 눈에 든 책상, 그리고 그 속의 완장을 떠올렸다. 다음에도 올 건가. 그렇다면 완장을 챙겨 놓아야... 아무래도 빨아서 둬야겠네. 언제 또 올지 모르니까. 성화는 내일의 자신 일정에 처음으로 스스로가 만든 계획을 추가했다. 아, 하나 더. 공부를 해 볼까. 누구의 말처럼.


처음으로 성화의 주어진 일과에 태클을 걸었다. 왕실에서 시킨 방송과 홍중이 칭찬했던 봉사는 진행했지만 더 이상의 훈련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공부를 시작했다. 전술학부터 시작하는 사소한 공부. 나아가 국가의 경제와 국민의 근간이 될 학문들을. 핑계는 그럴싸했다. 써 주는 대본을 앵무새처럼 읽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충분했다. 하긴, 지금의 성화는 좀 멍청하고 예쁜 인형 느낌이 있으니까. 아무리 선생을 붙여서 성화가 공부를 시작해도 그의 형제들은 한결같이 성화를 무시했다. 쟤가 설마 무슨 마음을 먹겠어. 평생을 시키는 대로 살았는데.

시키는 대로 살았으니까. 성화는 주어진 대본에 자신의 생각을 조금씩 넣기 시작했다. 주어진 대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하지만 이 방송을 보고 있을 홍중에게는... 모르겠다. 배우다 보면 홍중 역시 확신이 생기겠지. 내가 왕이 될 인재일지, 또는 자신을 따르는 게 인재일지.

하지만 아무리 배우는 것이 많아진다고 해도 변화는 없었다. 성화에게 주어지는 책들을 성화가 아무리 읽고, 수업을 열심히 들어도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결국 성화는 왕실 도서관에서 책을 꺼내다 읽기 시작했다. 죄다 왕실에 대한 칭찬 일색. 어떤 과정으로 왕국이 지어지고 그 과정에서 생긴 일들은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피로 세운 왕실이 아직까지 굳건한 이유 역시도. 홍중을 만나기 전이라면 의심 없이 모두 믿었을 찬양과도 같은 글이었다. 하지만 성화는 승자에 입장에서 쓰인 글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소한 방송 대본마저도. 성화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어쨌든 간에 이 방송을 통해 주어지는 가장 큰 메시지는 국민들의 세뇌였으니까. 왕실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성화에 대본에 항상 적혀있는 엔딩 멘트였다. 하지만 성화는 처음으로 그것을 바꿔 읽었다. 국민은 왕실을 위해 존재한다. 고작 앞뒤를 바꿨을 뿐인데.



그리고 그날 저녁에는 홍중이 창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고 제대로 쳤더라. 안 혼났어?"

"그냥 실수였는데 누가 혼내. 고의로 한 말 아니야."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성화는 고작 한 번에 익숙해진 것처럼 시종에게 따뜻한 뱅쇼와 에그노그를 부탁했다. 그동안 가면을 벗고 읏추읏추, 이불 안으로 들어가는 홍중 역시 익숙해진 것처럼 성화의 침대를 누렸다. 가면 아래 빨간 코와 귀, 뱅쇼를 건네주다 닿은 얼어붙어 붉은 손.


"손은 다 나았어?"

"봄까지는 봐준다면서. 안 나갈 건데."

"나 그 말에 대답 안 했는데."

"더럽게 치사하네. 계급장 떼고 붙자. 왕자면 다냐?"


이불 덮어쓰고 왁왁 소리 지르던 홍중은 넓은 침대에 사지 쭉 뻗고 덩그러니 누웠다가도 열이 뻗치는지 쿵쿵 침대를 내리치는 힘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여튼 더러운 계급주의. 꿍시렁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런 거 싫어서 반군 자처하는 애 앞에서 말이 심했나. 홍중과 놀아 주고 싶었지만 성화는 책상 앞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방 안에는 온풍기 돌아가는 소리, 홍중이 뱅쇼 마시는 소리, 가끔 과일 씹는 소리, 그리고 성화가 책을 넘기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야, 방해해서 미안한데 아까부터 고민하던 게 있거든."

"국민 김홍중이야, 아니면 개대장?"

"둘 다 아닌데. 그럼 물어보면 안 되나?"

"어, 안 돼."


결국 홍중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성화의 곁에 섰다. 책상 위에 쌓인 책들, 성화가 읽던 책마저 뒤집어 제목을 확인하고서.


"뭐 하는 건데?"

"뭐가."

"왕 할 생각 없다며."

"왕실에는 이미 왕세자가 존재해. 나는 형님을 도와서 더 좋은 나라를 만들어 보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네."


홍중은 성화가 읽던 책을 덮었다. 그리곤 책더미에 대충 올려놓더니 책상 위로 그대로 걸터앉아 다시 책으로 뻗는 성화의 손을 제지했다.


"도와줄까? 니가 내 명분이 되어 줘. 그럼 난 네 힘이 되어 줄게. 어때, 거래."

"별로. 너랑 거래는 하고 싶지 않아서."

"예상 밖인 대답이네."

"내가 형님을 돕게 되면 네가 원하던 좋은 세상으로 한 발짝 나아가는 거야."

"너는 왕세자를 되게 잘 아는가 보네."

"잘 알지. 우리 형님인데."

"글쎄. 내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네 아는 것 이상으로."


그리곤 홍중은 성화가 쌓아 놓았던 책을 그대로 바닥으로 밀쳤다. 쿵, 우당탕, 두꺼운 책들이 바닥으로 쏟아지는 소리, 시선의 흔들림 없이 굳게 성화를 바라보던 눈동자.


"오래된 책이야. 허풍으로 가득 찬 쓰레기 같은 책이고. 그런 걸 배우라고 가르친 사람? 퍽이나 믿음직스럽다."

"이게 내 위치야, 김홍중. 네가 아무리 날 왕으로 만든다고 해도 난 못해. 실전에서 쓸 수 없는 이런 것들만 배울 수 있거든."

"내가 가르쳐 준다고 해도?"

"나에 대해서도 잘 아는 거야? 나한테 네 얄팍한 희망 걸지 마. 난 개죽음 당하기 싫거든."


성화는 책상 위에 남아있는 책을 꺼내다 폈다. 홍중의 한숨이 귓가를 울렸지만 성화는 개의치 않고 책을 소리 내 읽었다. 왕국군은 고작 세 개의 보병 부대로 반군이 차지한 성을 회복했다. 이는 왕국군이 이기길 바란 국민들의 염원이 담긴 기도가 만들어낸 기적과도 같은 일, 성화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홍중은 그 손에서 책을 뺏어 들었다. 과거의 왕국군은 성을 회복하기 위해 물에 독을 풀었어. 이로 인해서 반란군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까지 희생당했고. 고작 세 개의 보병 부대로 이런 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해? 변함없어, 왕실은. 여전하잖아. 권위를 의심하지 못하게 세뇌를 걸고, 약간의 의문을 품으면 반란이라 목을 치고. 오히려 이런 살육을 당연하게 생각하잖아. 그게 왕실이고. 그건 너도 그래?

열이 받쳐 뱉어내는 홍중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성화는 차마 그 얼굴을 볼 수 없어 자꾸만 고개를 숙였다. 그저 앵무새처럼 뱉어내는 말, 왕실의 권위에 도전한 사람들이 잘못한 거야. 왕실의 권력은 전부 국민의 평안한, 성화의 대답은 끝을 맺지 못했다.


"그럼 넌 내가 아무리 무슨 말을 해도 얄팍한 희망으로 보이겠네."

"동시에 무모하고 가치 없는 희생에 가깝고."

"글쎄.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홍중은 그대로 가면을 덮어썼다. 또 보자, 처음으로 인사말을 남기고서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진 김홍중. 아직 그의 뱅쇼가 온기를 잃지 않은 채로 반이나 남아 있었는데. 실망했으려나. 애초에 원하지도 않는 기대였는데. 이런 자신을 보고도 왕이니 뭐니, 그딴 소리를 뱉을 수 없겠지. 실망했겠지, 나한테. 하지만 이게 진짜 성화의 모습이었다. 매체에 '보여지는' 것 만으로 판단했다면 실체를 '보여 줘야' 했다.


이후로 변한 것은 없었다. 성화는 공부를 계속했지만 홍중의 말처럼 실제로는 쓸 수 없는 탁상공론으로 가득한 책들이었다. 가치가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었다. 은근슬쩍 더 심화된 내용을 배우고 싶다고 해도 선생들은 거절했다. 성화 수준에는 이게 제일 적합한 책이라는 이유로. 성화는 공부에 대한 흥미를 점점 잃어가기 시작했다. 공부하기 싫어요. 저한텐 너무 어려워요. 다시 멍청하고 예쁜 꽃이 될 시간이었다. 방송을 제외한 모든 일을 그만두었다. 남는 시간에는 성을 돌아다니며 그저 멍청한 웃음을 팔았다.

그렇게 얻게 된 것이 군사 정보였다. 서류를 정리를 돕겠다는 이유로 처음 참석한 군사 회의였다. 성화는 멍청해서 여기에서 들은 일들을 전부 이해하지 못할 거야. 명백히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형제들의 말에도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저 시종들이나 할 일을 성화가 직접 나서서 했다. 왕자들의 입장에서야 나쁠 게 없었다. 시종들이 할 일, 하지만 왕실 내에 퍼져있는 스파이에 골머리를 쓰며 회의가 끝날 때마다 시종의 혀와 눈, 손목을 베어내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잡일을 왕자인 성화가 직접 한다니, 유출의 걱정도 없었고 귀찮은 휘두름이 없어도 될 일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돌아온 방에서 성화는 그렇게 군사 회의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부 기록했다. 형제들은 이렇게, 하지만 나라면. 내가 그들이라면 어떤 방법을 쓸까. 홍중이 기대했던 나라면, 그리고 지금의 나라면 어떤 방법을.


온통 그런 생각으로 가득한 하루들이었다. 성화는 자신의 생각을 흘리지 않도록 다시 입을 다물었다. 형제들의 자리에 끼어 있으려면 성화는 똑똑해서는 안 되었으니까. 방송에서도 성화는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지 않은 채로 주어진 대본에 충실히 임했다. 예전에 했던 고의적인 실수는 절대 없었다. 왕실은 국민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변화는 누구보다 홍중이 잘 알 것이다. 또 보자는 말과는 달리 한 달째 홍중을 기다리며 창문을 밤마다 열어 두었지만 개대장은 커녕,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겨울이 이어졌다.

날씨가 점점 더 추워지는데.

짝을 일은 에그노그 한 잔만이 트레이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성화는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저 홍중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



눈이 내리는 밤이면 홍중이 더욱 오지 않을 것이다. 발자국 하나 남겼다간 추적을 당하기 쉬우니까. 그걸 알면서도 성화는 창문을 걸어 잠그지 못하고서 책 한 장 넘길 때마다 고요히 창문 너머 흩날리는 밤 풍경에 시선을 뺏길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형제들이 개사냥을 나가는 날이었던가. 성화는 잠가 둔 책상 아래 서랍을 열었다. 홍중의 완장, 그리고 여태 군사 회의에 참석한 성화가 적어 놓은 그동안의 기록이 담인 서류 뭉치.

눈이 오니까 들개들의 흔적을 추적하기 쉽다는 이유로 시작된 형제들과 왕국군의 밤사냥. 방송이 늦게 끝나 형제들의 강제적인 개사냥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사냥터에서 홍중을 다시 만났을 경우엔 아직까지 그를 적으로 대할 수 없었으니까. 내가 바라는 건 뭘까.

들끓는 마음과는 다르게 성은 너무나도 고요했다. 왕자들이 성을 비우고, 훈련을 해야 하는 군사들은 그들을 따라 개사냥에 합류했다. 눈이 쌓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그랬던 성이 한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가로등 몇 개 켜둔 어두웠던 밤의 정원을 밝히는 많은 불빛들이 밀려 들어왔다. 벌써 개사냥이 끝났나? 창문 너머로 들리는 왕세자... 개대장... 요란한 가운데 두 단어만이 명확히 성화에게 쏟아졌다. 설마 홍중이 잡힌 걸까.

왕세자가 개대장에게 크게 다쳤다는 소식은 왕성에 빠르게 도착했고 성화는 책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형님이? 아니, 홍중이가?

박차고 나간 것에 비해 얼굴도 보지 못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네가 봐서 뭐 할 건데. 소란스러운 곳에서 방해나 되니까 너는 그냥 방에 있어. 방문을 열어 보지도 못하고. 성화의 윗형제는 형님의 방으로 향하던 성화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멍청한 게 낄 곳이 따로 있지. 혀를 차던 형제는 성화의 등을 밀쳤고 그 말과 행동에 성화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도 형님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무시당해놓고, 그래도 형님의 생명이 위독하다는데, 내가 가도 반기는 사람이 없을 텐데.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간 성화는 방을 떠나기 전과 어딘가 달라진 것을 확인했다.

꼭 닫아 두었던 창문이 활짝 열린 채로 성화를 맞이했다. 방 안에 가득 찬 냉기와 눈은, 바람을 타고 들어와 창문 아래에 물 자국을 남긴다. 반사적으로 돌아간 고개는 침대를 향했지만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없이 깨끗한, 아침에 청소된 모습 그대로였다. 설마 홍중이 다녀간 걸까. 창가로 다가간 성화는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 찾아?'


익숙한 목소리, 그리곤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김홍중.


"사실이야? 네가 우리 형님을 다치게 한 거야?"

"어라, 아직 안 죽었어?"

"똑바로 대답해. 네가 그랬냐고."

"이제 왕세자가 죽었으니까... 니가 왕이 될 수도 있는 거지?"


지끈하게 골머리가 아픈 건 찬 바람을 너무 급하게 쐐서 그런 걸까. 성화는 홍중의 팔을 붙잡았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 성의 벽면 조금 튀어나온 곳을 밟고 선 홍중의 옷자락이 바람이 불 때마다 펄럭였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위치에서도 홍중은 개의치 않았다. 누굴 걱정하는 거야. 성화가 홍중의 팔을 조심스럽게 붙잡아 끌어도 꿈쩍도 없이 창 너머에 서 있는 홍중이었다.


"아직도 얄팍한 희망, 무모하고 가치 없는 희생으로 보여? 왕세자의 목숨 정도면 가치 있는 죽음 아닌가."

"아직도 그 얘기야?"

"난 니가 왕이 됐으면 좋겠어."

"모르겠어, 넌 아직도 날 믿어?"

"겁쟁이. 곧 왕이 바뀔 거야.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전쟁. 회의 때도 형제들이 가장 많이 하던 말. 그리고 그 말이 홍중에게서 나온 이상 그것은 곳 현실이 될 것이었다.


"대체 날 살린 이유가 뭐야?"

"내가 널 좋아해."

"그게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이야기해."

"내가 그랬잖아. 국민들이 널 좋아한다고. 그리고 네가 그랬지. 성벽 안에 살면 국민이라고."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그거야?"

"너는 나에게 가장 이상적인 왕자님이거든.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성화는 홍중의 말에도 자신이 생기질 않았다. 아닌 것 같아. 이상적인 왕자는 내가 아니라, 너. 성에 갇힌 날, 위기에 처한 날 구한 네가, 여태 받은 교육들이 자신의 신념과 이념과 맞지 않다면 망설이지 않고 방향을 틀어 버리는 네가. 왕자라는 출생 아래 출생의 격이 다르다고 자신을 배척한 형제들, 부족한 교육에도 반항할 수 없이 수용했던,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지레 포기한 채 무엇이 틀린 지도 모르고 시키는 것만 하던 자신과 너무나도 비교되는 그 모습이. 하지만 성화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적 속에 성화의 손이 붉게 얼어붙었다. 그 위를 감싸는 더 차갑고 거칠한 손. 그리고 오해와 이해로 가득한 말들.


"유감이야, 네 생각이 변하지 않아서."

"다음 만남은 일방적이겠네."

"내가 실패해서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내 목을 보거나, 그게 아니면 내가 실패해서..."

"됐다, 겁쟁이한테 무슨 말을 하겠어."

"우리 또 만나지 말자. 그때는 내가 정말 널 죽여야 할지도 몰라."


성화가 한 마디도 못 하는 동안 말을 쏟아 놓은 홍중은, 자신을 붙잡은 성화의 손을 떼어 놓고서 떠났다. 항상 저렇게 떠났던 걸까. 벽을 타고 내려가던 홍중의 그림자는 이내 완연히 어둠과 섞여 사라졌다. 오직 홍중이 서 있던 자리에만 쌓이지 않은 눈과 자신의 손에 붉게 묻은 피만이 홍중이 다녀갔음을 암시했다.


결국 성화의 형, 왕세자는 세상을 떠나고야 말았다. 왕자의 국장이 진행되는 동안, 성화의 아침 뉴스를 가장한 세뇌는 진행되지 않았다. 분노와 적개에 찬 국민을 가장한 연기자가 쏟아내는 말들을 교묘하게 편집한 영상이 쏟아지듯 풀렸다. 반란군이 아닌 평범한 국민은 당연히 왕자의 죽음에 화를 내며 슬퍼한다. 눈물이 나지 않고 반군을 향한 화가 생기지 않는다면 티비 속 자신과 같은 평범한 국민이 아니라는 암시. 그것은 형제를 잃은 동생을 연기하는 성화보다 더 효과적인 방송이었다. 국민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울음소리가 가득했고 짧은 생을 마감하고 간 형제의 죽음에 탄식했으며, 왕세자를 잃은 분노를 반군에게 돌렸다.

그리고 그 방송이 틀어지는 동안 성화는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처음 본 날의 홍중이 아닌 개대장의 위압감을 떠올렸다. 몇 번이고 느꼈던 강함, 살의, 적대감을 지운 채 자신에게 왕이 되길 바라며 손을 내밀던 홍중을. 그리고 그와 나누었던 모든 대화들을 되짚은 성화는 병상에 누워있다는 형제의 마지막 소식을 떠올렸다. 자신을 무시하던 더 멍청한 형제들. 전쟁을 앞두고서 희생을 줄일 방법 대신 새로운 왕관의 주인이 누가 될지만 떠드는 형제라는 것들. 가장 똑똑한 사람이 왕이 되어야 한다면 적어도 그들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아닌, 그 누가 왕이 될 수 있을까. 홍중이 원하던 가장 이상적인 왕자에서 끝나선 안 되었다. 가장 이상적인 왕이 될 사람이 될 사람이 그들 중에 있을까? 성화의 마음에서는 이미 결론지어진 질문이었다.


왕세자의 장례식이 끝나고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선 성화였다. 그에게 건네진 까만 대본에는 자신의 형제를 추모하고 슬픔에 빠진 국민들을 위로하는 내용.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왕세자 책봉이 곧 진행될 것이라는 이야기와 더욱더 추워지는 날씨와 눈보라에 주의하라는 이야기까지. 하지만 성화는 방송이 끝나기 전 대본에 쓰여져 있지 않은 말을 꺼냈다. 대본에 적힌 것처럼 자연스러운 시선 처리, 원래 정해진 마지막 대사, 왕실은 국민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고 대사가 끝나고 카메라가 꺼지기 전, 렌즈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성화는 마가 뜨기 전에 입을 열었다.

눈물과 탄식은 우리의 겨울을 더 춥게 만듭니다. 따뜻한 뱅쇼와 에그노그 한 잔으로 속까지 얼어붙은 마음을 따뜻하게 녹일 시간을 가져 보는 건 어떨까요? 박성화였습니다.


방송이 끝난 이후 왕실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탄 성화가 향한 곳은 자신의 방이 아닌 형제들의 앞이었다. 의아함을 느끼기도 전에 자신을 붙잡은 병사들은 성화의 어깨를 누르고 오금을 걷어차고서 두 손을 묶어 그들 앞에 무릎을 꿇렸다.


"뱅쇼와 에그노그. 그게 암호였나?"


형제들의 말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전쟁이 시작됐어."

"그렇다면 사냥을 시작해야지 절 왜...!"

"아주 우리를 가지고 놀았구나. 개사냥은 네 죽음에서 시작될 거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동안 반군에 붙은 스파이가 누구였나 했더니. 너였구나?"


성화의 앞에 홍중의 완장과 군사 회의의 내용을 전부 적어 놓은 회의록들이 던져졌다. 이걸, 어떻게.

평소에 잘 안 마시는 뱅쇼를 주문할 때는 성화가 좋아하는 에그노그까지 꼭 두 잔을. 그리고 쟁반을 건네받은 이후 방에서 들리는 말소리. 왕자의 방을 들여다볼 용기는 시종에게 없었다. 하지만 사소한 의혹에도 방을 수색해야 하는 것은 왕실의 의무였다. 잠긴 성화의 책상 안에서 나온 물건들은 그야말로 성화를 멍청히 여기던 형제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왕자의 반란. 원래 같았으면 희망의 불씨가 될 법한 위치의 사람들은 소리 소문도 없이 제거하는 것이 왕실의 법도였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너무나도 달랐다. 계승권이 없는 성화가 왕실에 앙심을 품고 반군에 붙었다는 뉴스가 긴급 딱지를 붙고 곳곳에 퍼졌다. 처형식은 성대하고 요란하게 진행될 예정이었다. 국민들이 우러러보고 존경하던 왕세자를 죽여 버린, 욕망에 눈이 먼 왕자. 분노가 모이기에 적합했다. 국민들의 감정은 성화에게, 그리고 반군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반군에 가담하면 죽음뿐이라는 간접적인 위협, 동시에 성화가 알고 있는 군사 정보, 국가 기밀, 국민들의 사랑을 그대로 반군에 넘길 수 없다는 것은 대외적 이유였을 뿐이다. 왕자들끼리의 욕심은 성화의 처형에 한몫을 했다.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고 경쟁자를 보낼 수 있는 기회.

식은 다음 날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속보를 접한 국민들이 광장에 모일 시간을 두고서.

성화의 말은 아무도 들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성화 역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성화에게서 반군에 대한 정보를 캐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주장하는 형제들은 없었다. 그저 성화의 목을 베어내고 경쟁자를 줄일 생각에, 왕관을 탐하는 머리들은 눈앞에 놓인 권력에, 맞서 싸울 상대를 잊었을 뿐이다.

하룻밤을 지하감옥에서 보낸 성화는 웃음도 나지 않았다. 겨울의 지하 감옥은 너무 추웠다. 그저 이곳에 홍중이 없어서 다행일 뿐이고.


겨울치고는 햇볕이 따사로운 날이었다.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눈이 왔던 것일까. 눈에 반사되어 들어오는 빛들이 너무나도 밝았다. 홍중이 자신을 보고 있을까. 그렇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러게 진작에 자신과의 거래를 받아들이지, 따위의 말을 했으려나. 그렇다면 진짜 그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으려나. 가치 없는 희생, 그게 딱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 될 줄은 몰랐는데.

밧줄에 매인 성화가 단상 위로 오른다. 위에서 내려다본 국민들은 울고 있었던가, 울분을 토하고 있었던가. 날 사랑한 국민들은 이 자리에 있을까. 내가 사랑한 국민도 이곳에서 날 보고 있을까.

절로 웃음이 나는 순간이었다.


미친놈!

그리고 그 웃음의 끝에 던져지는 쓰레기들.

감히 왕실을 배신해?

네가 감히?!

그러네, 내가 감히 왕실을 배신하다니.


처음 몇 번 던져지던 쓰레기를 막던 군사들은 그저 쓰레기 따위에 인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듯이, 어쩌면 맞아도 당연하다는 듯이 슬그머니 성화를 둘러싸고 있던 대형을 풀었다. 앞으로 밀려오던 사람들은 죄다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성화에게 집어 던졌다. 퍽, 퍼억, 날아오는 쓰레기들. 계란이었다가, 음식물이었다가, 돌과 같은 딱딱한 것들이 성화에게 날아오고, 곁을 스쳐 지나가고, 그리고, 펑.

뿌연 연기가 성화의 주변으로 퍼졌다.


"왕자님, 구하러 왔어. 가자."


연기 속에서 나타난 홍중은 성화의 손을 잡고, 군중들 사이를 빠르게 벗어났다. 요란스럽고, 소란스러운. 그러나 기대할 수 없었던 등장이었다. 뛰어야 했다. 개대장의 뒤를 쫓던 그날처럼. 이제는 그 뒷모습을 믿어야 했다. 그리고 인정해야 했다. 진정한 왕자는 자신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 준, 자신의 삶을 바꿔 준 홍중이 맞다는 것을. 왕이 될 사람은 자신이 아닌 홍중이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을 돌고, 몇 개의 집들을 지나치고, 그렇게 성을 벗어나 자유가 된 성화의 뒤를 쫓는 병사들이 보이지 않을 때 즘에 홍중은 두 발을 멈췄다. 잘 따라오네? 홍중이 숨을 내뱉으며 호흡을 가다듬다가도 꼭 잡은 성화의 손을 놓치지 않았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날 왜 구했냐는 말은 안 하겠지. 홍중의 질문에도 성화는 그저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자꾸만 벅차오르는 건 숨이 아니라 감정이었다.


"이건 너희 대장이 시켜서 한 거야?"

"아니, 그냥 내 마음대로."

"그럼 이대로 반군으로 갈 거야?"

"야... 나도 배신 때렸다고 목 그일 뻔한 거 겨우 살아서 나왔거든."


우리 너무 비슷하다, 그치. 입꼬리를 올려 웃는 홍중은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그럼 우리 이제 어디로 가?"

"다른 나라로 가면 돼."

"다른 나라가 어디 있어?"

"우리가 만들어야지."


우리가... 꽤 마음에 드는 말. 인정해야 했다. 자신과 홍중은 너무나도 닮았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이 손을 다시 잡을 수밖에 없었다. 굳이 수갑 따위가 없어도 놓치지 못할 손이었다.


"하나만 약속해. 난 왕자는 그만하고 싶어. 왕이 되고 싶지도 않아."

"이제부터 왕자는 니가 해. 너는 내 가장 이상적인 왕자님이니까."

"너는 내 명분이 되어 줘.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줄게."


성화의 말에 어이가 없어지는 건 홍중이었다. 왕 만들어 준다고 해도 싫다면 어떡하냐. 어디는 왕이 되고 싶어서 미쳤던데. 웃음이 나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좋아했다. 욕심도 꿈도 많지만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고르는 건, 선택지가 많은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게 성화의 성격인 걸까. 성화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많았지만 알아갈 것들은 더 많았다.


"거래야?"

"아니. 맹세야."


나한테는 네가 내 왕자님인데. 어쩌겠어, 국가 간의 결합은 주로 왕족의 혼약으로 맺어지니까. 홍중은 그대로 성화를 품에 끌어안았다. 고개를 틀어 입을 맞추고, 흐르는 숨마저도 아쉬워 서로의 호흡마저 삼키는 순간. 성화는 그 순간이 자신의 인생을 바꿀 두 번째 찰나임을 깨달았다. 홍중이 나에게 돌려준 보답이 이런 걸까. 그렇다면 개가 되는 건 어쩌면 나쁘지 않을지도.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맛집 가이드 익명입니다

드셔보신 꽃개장은 맛있으셨나요?

겨울철 별미는 역시 매콤한 양념꽃개장이죠

이번에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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