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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약속을 지키러>, 두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12월 22일
  • 14분 분량


“홍중아.”

“응?”

“귤 먹을래?”

"넌 질리지도 않냐?"

"안 먹을 거면 말고."

"아냐. 줘. 먹을게"


SNS에서 화제가 된 영상이었다.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수상할 정도로 귤에 집착하는 연습생으로 유명해지고, 아이돌 팬, 정확히 말하면 어떤 렌즈 끼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선 '귤웋' 이라는 것으로 유명했다. 아이돌 데뷔 프로그램에서 이미지 메이킹은 필수다. 대중들 눈에 어떤 방식으로든 띄지 않으면 뭣도 못 보여주고 잊힐 뿐이므로 각인은 중요했다. 근데 박성화는 이미지 메이킹, 컨셉충 그런 거 아니다. 진심으로 박성화는 김홍중한테 귤 맨날 챙겨준다. 촬영을 하든 안 하든. 연습을 하고 있든 쉬고 있든. 제주도에선 이런 괴담이 있댄다. 겨울만 되면 냉장고에 귤이 증식한다. 그건 서울 사는 김홍중한테도 적용된다. 박성화 옆에만 있으면 김홍중 주머니에 귤이 쌓인다. 하다하다 다른 연습생들도 이젠 출출하면 김홍중한테 찾아와서 형, 귤 있어요? 너 귤 있어? 한다. 그럼 김홍중은 내가 무슨 냉장고냐? 하면서도 주머니에서 작은 귤 하나 꺼내서 몰래 쥐어 주는 거다. 연습생들 숙소에 나폴리탄 괴담 하나 퍼졌다. 김홍중 연습생의 주머니에 귤이 없으면 당장 박성화 연습생을 찾아가십시오. 김홍중 연습생의 주머니에 귤이 없는 날은 없습니다. 장난처럼 올라간 글이 퍼지고 퍼져서 연습생들한테도 들어왔고 이제는 그 둘을 대표하는 개그가 됐다. 김홍중은 이때 사람들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의미 없는 것에도 박수를 칠 줄 안다는 것을 알았다. 대중들은 뜨거운 우정, 불타는 라이벌 따위의 거창한 것에 열광하지 않는가. 이런 냉장고에서 갓 나온 시원한 귤 따위 말고. 김홍중은 귤 껍질 까느라 조금 노래진 손가락 끝을 매만졌다.


김홍중은 아이돌 연습생이었다. 이름을 말해도 들어본 적 없어서 고개를 갸웃할 중소 소속사에 입사한 이래로 연습만 했다. 그동안에도 데뷔는 몇 번이고 무산되었고,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다짐했던 동료들도 많이 떠나보냈다. 그렇게 떠난 동료들이 먼저 데뷔하는 것도 보고, 음악 방송에서 1위 상을 받는 것도 봤을 때 김홍중은 눈물을 조금 흘렸다. 그래도 소중한 동료였던 사람의 1위를 순수하게 축하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자책이었다. 김홍중은 그럴 때일수록 더 열심히 했다. 제 소중한 사람을 깨끗하게만, 질투 같은 더러운 감정 없이 볼 수 있도록. 김홍중은 그 지옥 같은 나무 바닥 위에서 운동화 마찰 소리 내면서 매일 연습했다.


그런 김홍중이 어느 날 굴러온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는 큰, 그것도 엄청 큰 기회를 뻥 차버릴 리는 없었다. 은밀하게 불려가 출연을 제안받았을 때 김홍중은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요. 저 제발 데뷔하게 해주세요. 김홍중은 애원했다. 이 이야기는 첫방송 때 김홍중 인터뷰에서 싹싹 털어서 나갔고, 서바이벌 프로그램 연습생의 데뷔에 대한 간절함을 어필했다. 김홍중 인터뷰로 사람들은 그 소속사의 존재를 알았고, 김홍중의 이름을 알았다. 이것은 꽤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으므로, 대중들은 그 외에도 김홍중에 대한 많은 것을 탐색했다. 난 얘 잘됐으면 좋겠어. 같은 동네 살았었는데 동네에서도 좋은 애라고 소문났었거든 따위의 미담은 덤이었다.


그에 반해 박성화는 아무 정보도 없었다. 무소속. 개인 연습생. 방송 전부터 이름 날리던 모 연습생들과는 달리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갑자기 나타난 별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박성화구요. 별 성에 될 화입니다. 이게 박성화 인터뷰의 첫 말이었다. 아이돌이라는 꿈을 접고 살았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달려온 길에서 갑자기 멈춰 버리는 바람에 앞으로 못 나가는 느낌이었어요. 그때 내가 아직도 아이돌이란 꿈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그때부터 진짜 연습만 한 것 같아요. 부족하지만 꼭 성장한 모습 보여 드리고 데뷔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성화는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그렇게 말했다. 김홍중과 함께 나란히 첫 방송에서 좋은 인상 따고 시작했다.


박성화에 대한 김홍중의 첫인상은 그랬다. 대단하고 무모한 놈. 이미 대중들에게 각인된 연습생들 사이로 이름 없고 소속사도 없이 깡으로 부딪친다는 점에서 박성화는 무모했고, 그걸 알면서도 저가 맞아야 할 시련을 굳세게 견디려 든다는 점에서는 대단했다. 유명한 놈들은 유명한 놈들끼리 놀았기에, 무명에 빽도 없는 놈들은 그런 놈들끼리 놀아야지. 아역 배우 출신 연습생과 광고 모델 출신 연습생들이 인사 나누고, 카메라가 그쪽으로 포커스 잡힐 동안 김홍중은 박성화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 너 박성화 맞지? 바닥 타일이나 뚫어져라 보던 박성화가 고개 들어서 김홍중 봤다. 김홍중은 인삿말보다 먼저 든 생각을 홀린 듯 말했다.


"너 눈... 되게 예쁘네."

"응?"

"아.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아니야. 고마워."


너도 눈 되게 예뻐. 박성화는 배시시 웃었다. 예쁘게 접힌 눈이 고왔다. 이런 애들이 아이돌 하는구나. 무소속인데도 들어온 이유가 있었네. 김홍중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나 알아?"

"당연히 알지. 여기서 너 유명해. 처음 보는 애 나온다고."

"안 유명해서 유명한 거야?"

"그렇지?"

"웃기다. 그런 걸로 유명해지고."

"나도 어디 가서 무명인 걸로는 안 지는데. 아, 맞다. 내 이름은,"

"알지. 김홍중이잖아."

"어떻게 알아?"

"글쎄."

"뭔데."

"나 네 팬이었거든."

"무슨 소리야 그건 또."

"무슨 소릴까."


그때 스피커에서 또렷한 음성이 들렸다. 김한성 연습생이 입장합니다. 김홍중은 짧게 허, 하고 웃었다. 이걸로 알았구만? 김홍중이 스피커 가리키면서 박성화를 보니 박성화는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했다. 김홍중은 박성화 손등에 약하게 딱밤 놓았다. 아야. 아프지도 않으면서 박성화는 그런 소리 냈다. 사람 속인 값이야 그거. 김홍중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카메라의 포커스는 어느새 김홍중과 박성화에게로 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박성화와 김홍중이 각인될 만한 관계를 가졌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방송에 김홍중과 박성화의 대화가 나가긴 했지만 주로 포커스는 아역 배우와 광고 모델에게 잡혀 있었으므로 사람들도 그 장면만 봤다. 듣도 보도 못한 소속사 연습생과 개인 연습생의 대화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배정된 반도 달랐다. 김홍중은 뭐든 중간이라도 했으므로 중급반에 들었고, 박성화는 트레이너의 혹평 받고 하급반에 들었다. 그 상황 다 지켜보고 있던 김홍중은 박성화 눈을 봤다. 대체로 하급반 배정된 연습생들은 눈에 빛이 없어서, 쟤네 조금만 떨어지면 바로 포기할 애들이구나 싶은데 박성화는 아니었다. 쟤는 저기 있을 애가 아닌데. 김홍중은 불안한 듯 다리를 떨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짧은 대화에서 무슨 정이 든 건지 김홍중은 박성화가 하급반에 들어간 것을 속상해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같은 연습생으로서 속으로 응원하는 관계.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둘의 인연의 진정한 시작은 어디인가. 반이 정해지고 각 반끼리 그룹 무대를 치루는 시점으로 가야 했다. 방송으로는 한 회만에 후딱 지나갈 분량이었지만 연습 기간은 일주일이었으므로 김홍중이 박성화를 잠시 잊고 사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김홍중은 데뷔에 미치느라 사회성 바닥난 연습생들 기싸움 말리는 것만으로도 벅찬 시간을 보냈다. 여태 여러 번의 데뷔 무산을 경험하면서도 후회라는 것을 느껴본 적 없던 김홍중이 그 순간만큼은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얘들아, 우리끼리 싸울 때니. 연습할 시간도 없는데 싸울 때니. 그래도 김홍중은 참았다. 몇 년을 불안정한 생활을 하면서 배운 건 참을성 하나였다. 그런데도 중간 점검 때 트레이너가 와서는 너네 연습은 한 거니? 데뷔하고 싶긴 해? 따위의 독설을 뱉는 걸 들을 때만큼은 정말 못 참겠어서 구석에서 혼자 눈물 한두 방울이나 흘리고 다시 연습실 들어가서 연습생들을 모았다. 얘들아 우리 데뷔해야지. 꼭 웃어야지. 김홍중의 쓴웃음을 보고서야 다른 연습생들도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무렵 박성화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박성화네 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중급반보다 심하다면 심했다. 얘네 다 이런 멘탈로 어떻게 연습생 합격했지. 하급반에 있는 동안 박성화가 줄곧 한 생각은 그랬다. 소속사들은 다 연습생 빡세게 굴리는 거 아니었나? 까지 생각하고 박성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같은 팀인데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박성화는 애써 의지를 다졌다. 꼭 데뷔하자. 박성화는 건조한 눈을 비비고는 안무 영상을 다시 재생했다. 박성화는 일주일 동안의 계획을 천천히 생각했다. 아무래도 촉박할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고 박성화는 잡생각 집어치우고 안무 따는 것에만 집중해야 했다. 오리무중이었던 하급반이 중간 점검 때 좋은 소리 못 들은 건 당연했으므로 박성화는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고 넘겼다. 따지자면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박성화는 트레이너의 말을 들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연습을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이 장면은 카메라에 담겨 그대로 방송에 나갔다. 이 짧은 장면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시스템을 봐야 했다. 트레이너 점수가 좋지 않아도 시청자 투표 상위권은 데뷔조로 올라올 수 있는 시스템. 트레이너 점수는 상급반이 다 따가고, 중하급반의 신분 상승 수단은 시청자 투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중상 순으로 무대가 진행됐고, 웬만치 변수가 아니고서야 트레이너 점수 상위권은 다 상급반, 그중에서 떨어지는 몇몇 놈들 대신 눈길 좀 끈 중하급반 연습생들이 들어갈 것이었다. 점수는 개인별이었지만, 그룹 무대였으므로 화합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엉망진창인 하급반의 박성화는 반쯤 체념을 한 상황이었고 김홍중은 그래도 놓지 못한 희망을 갖다가 마지막 순위까지 공개되고서야 포기를 했다. 다음은 시청자 투표 점수 상위 두 명을 발표하겠습니다. 그때 박성화는 땀이 흐르는 찬 손을 약하게 쓸고 있었고, 김홍중은 찬 공기를 느끼면서 숨을 들이마쉬고 있었다. 차마 화면을 보지는 못할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진행자의 높낮이 없는 차가운 말투가 귀에 꽂히듯이 들어왔다. 김홍중 연습생, 박성화 연습생. 축하드립니다. 뭐? 김홍중이 고개 번쩍 들어 전광판 봤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김홍중 자신과, 금방이라도 눈물 뚝 떨어질 것 같이 울망거리는 박성화가 잡혔다. 주위에 앉은 연습생들은 박수를 치고 있었다. 중급반 연습생들은 김홍중을 안아줬고, 하급반 연습생들은 박성화의 등을 토닥였다. 고마워. 고마워 얘들아... 귀에 닿을 듯 말 듯하던 박성화의 흐느낌이 커졌다. 김홍중은 중급반 연습생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박성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안았다. 축하해. 축하해 성화야. 김홍중의 귀 가까이에서 히끅대는 소리만 들렸다.


이 장면이 나왔을 때, 박성화는 인터뷰도 함께 삽입되었다. 사실 괜찮은 줄 알았거든요. 이미 예상했던 일들이었고. 이 정도 힘든 건 힘든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서 알았어요. 진짜 힘들었구나. 내가 힘들었구나. 그걸 알고 나니까 눈물이 막 나오는 거예요. 울진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다 부질없죠. 저 엄청 울었잖아요. 못생기게 막. 얼굴 구기고. 애들한테도 고맙고. 미안하고. 그래서 더 열심히 하려구요.


그리고 김홍중 연습생한테도 너무 고마웠어요. 그냥. 누가 안아준다는 게 그렇게 따뜻한 거라는 걸 처음 알았거든요.


*


상급반에 들어오면 마냥 기쁠 줄 알았지만 그건 또 아니었다. 연습생 간의 기싸움이 상급반이라고 없을 수는 없었고, 오히려 심했다면 심했다. 평생을 사람들의 호의만 받으며 살아 온 기고만장한 녀석들은 이름도 모르던 놈들이 상급반에 오자 자존심이라도 상하는지 견제를 해댔다. 티가 나지 않도록 비열하고 은근한 견제였다. 기존 상급반 놈들의 눈치에 못 이겨서 나란히 제일 적은 파트를 담당해야 했고, 연습 때에도 의견을 피력하긴 어려웠다. 박성화가 조심스럽게 이것보단 아까 버전이 더 나은 것 같은데. 했던 말은 여기 애들은 이 버전이 더 잘 맞아. 네가 몰라서 그래. 하는 말로 묵살당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김홍중은 남들 안 들리게 혀를 쯧 찼고, 박성화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래? 알았어. 그게 박성화의 대답이었다. 그때 김홍중은 속으로 지들이 뭐 잘났다고... 하고 투덜댔다.


다른 녀석들과 친해질 틈이 없었기에 김홍중은 박성화와 주로 함께 있었다. 숙소에만 갇혀 지내야 하는 일개 연습생들이 할 수 있는 대화는 기껏해야 아이돌에 대한 꿈, 연습생 때 있었던 일 따위였다. 김홍중이 혼자 연습을 마치고 나오면 박성화는 이미 샤워도 마치고 휴식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지금 이거 방송엔 어떻게 나갈까? 글쎄. 소외되는 중하급반 출신... 이런 식으로 나가지 않을까. 좋은 거야? 모르겠어.


"성화야."

"응?"

"넌 어쩌다가 아이돌을 꿈꾸게 됐어?"

"약속했어. 꼭 데뷔하기로."

"누구랑?"

"글쎄."

"뭐야."

"너는?"

"난... 존경하는 아이돌 그룹이 있었거든. 그 분들이 무대에 서는 모습이 너무 멋져 보여서."


그냥 별거 없어. 다 그렇게 생각하고 오는 거지. 김홍중은 벽에 머리를 기댔다. 성화야. 응? 너 안무 다 외웠어? 어느 정도. 그래? 난 아직 다 외우지도 못했어. 아... 큰일났네. 나 진짜 떨어지는 거 아니야? 얘들은 또 왜 이렇게 각박하냐... 그래도 같은 팀인데. 홍중아. 응? 너 울어? 박성화 손이 살살 김홍중 눈가를 쓸었다.


"그러네. 나 우네..."

"휴지 가지고 올까?"

"어, 부탁해."


박성화는 휴지를 가지러 나가고, 혼자 남은 김홍중은 헛웃음을 지었다. 앞으로는 이것보다 더 심할 텐데. 이거 하나도 못 버텨서는. 김홍중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두루마리 휴지 몇 장 뜯어 온 박성화가 김홍중의 시선 위에서 눈을 맞췄다. 닦아 줘? 뭘. 됐어. 내놔. 응. 박성화가 휴지를 건넸고, 김홍중은 눈물을 닦았다. 큰일났네. 내일 눈 붓겠다. 김홍중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괜찮아. 넌 부어도 예뻐. 뭐래... 김홍중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코를 훌쩍이는 김홍중에게 박성화가 방금 막 씻은 귤 두 개를 내밀었다.


"뭔데 이게."

"귤."

"내가 몰라서 묻겠어?"

"나도 힘들 때마다 귤 먹었거든."

"넌... 그냥 다 먹지 않나?"

"그것도 맞긴 한데... 난 연습하다가 힘들 때마다 귤 먹었어."

"맛있어서?"

"들켰네..."

"뭐야 그게."


그냥 먹어. 내가 까 줘? 아니. 내가 애냐? 김홍중이 박성화 손에서 귤을 가로챘다. 귤 알맹이 한 알을 씹자 과육에서 즙이 터졌다. 신 맛이 올라오고 그 끝에 단 맛이 감돌았다. 맛있다. 살 것 같네. 김홍중은 한 알 한 알 천천히 아껴 씹었다.


그 뒤로도 종종 박성화는 몰래 김홍중에게 귤 몇 개씩 쥐어 주었다. 대놓고 주면 상급반 놈들이 눈치를 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많이 먹으면 살찔 텐데 같은 말은 차라리 나았고 홍중이랑 성화는 먹으러 왔나 보다 같은 말도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김홍중은 인간 본연의 공격성을 생각했다. 내가 지금 저 놈들의 턱주가리에 한 방 날리고 싶은 건 인간 본성의 악함인가 정당방위인가. 생각으로만 멈췄다. 저런 놈들과 같은 사람이 되는 건 사절이었다. 저 놈들 나중에 후회하는 날이 올 거다... 김홍중은 이만 빠득빠득 갈았다. 대신 김홍중은 스트레스를 연습으로 풀었고, 박성화는 늘 곁에 있었다. 그렇게 지켜보다가 부족한 부분은 잡아주고. 대신 김홍중은 박성화 보컬 들어 줬다. 그렇게 연습했다.


중간 점검에서 깨지는 건 당연했다. 합을 맞춰 본 적도 없거니와, 억지로 수정한 안무는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정색하는 트레이너의 얼굴이 풀릴 기색이 없었다.


"얘들아 너네 가수가 되고 싶긴 하니? 그리고 너네 합 안 맞춰본 거 티 엄청 나 지금. 김홍중, 박성화. 너네 다 같이 연습한 적 있어?"

"..."

"없습니다."

"그래. 그거 티 엄청 난다니까? 이게 그룹이니? 너희한테 데뷔할 기회 줄 바엔 중하급 반 애들한테 줘. 그 정도로 심각하다. 실망스럽고."


트레이너의 꾸중을 듣는 그 순간에도 김홍중은 상급반 연습생들의 묘한 무시가 담긴 시선을 봤다. 얘네 진짜 고칠 생각 없네. 이번 건 그룹 점수 비중도 높은데. 김홍중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아야 했다. 김홍중이 작게 한숨을 쉬자 박성화가 김홍중의 손가락을 툭 쳤다. 그걸로도 왜인지 위로를 느꼈다. 김홍중은 박성화의 손바닥을 툭 건드리는 것으로 대답했다.


트레이너가 떠나고, 다른 연습생들까지도 나가고 남은 자리에서 박성화가 그랬다. 귤 먹을래? 김홍중은 대답했다. 좋지.


*


실전 무대에 오를 때까지도 상급반과 중하급반의 간극은 좁힐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상급반의 추락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합을 맞추지 않았기에 동선 이동 중 실수부터, 멤버들끼리 충돌하는 것도 그렇고. 김홍중은 속으로 계산했다. 그룹 점수가 없을 때 탈락조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경우의 수를. 개인 점수가 높아야 된다. 방법은 이거 하나였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김홍중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런데도 사람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그룹 점수 보컬 댄스 랩 트레이너한테 차례로 말로 두들겨맞고, 개인 점수 공개했을 때, 김홍중이 아슬하게 아래에서 두 번째였다. 그룹 점수가 바닥난 걸 생각하면 기적적인 순위였다. 처음 봤을 때보다 엄청 성장한 게 기특하기도 하고. 성장할 가능성이 보여서 이 점수를 줬습니다. 트레이너가 말했고 김홍중은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숨 크게 들이쉬고 다시 집중했다. 한 사람의 발표가 남아 있었다. 탈락을 면할 수 있는 마지막 순위였다. 박성화 이름이 아직 전광판에 뜨지 않았기에 김홍중은 찬 땀이 흐르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성화도 데뷔해야 하는데. 그러다 전광판 끝자락 마지막 순위에 박성화 이름이 적힐 때 김홍중은 주저앉을 뻔했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어느새 다가온 박성화가 김홍중의 손을 잡았다. 탈락한 상급반 연습생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김홍중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무 말 없이 안고, 등을 토닥였다. 귓가에 가득 울음 소리가 차올랐다. 차갑다. 너무 차가운 현실이었다. 누군가의 꿈이 좌절된다는 것은.


탈락자들을 배웅하고 돌아온 숙소는 정말이지 추웠다. 아무리 미운 사람들이었어도, 살 부비면서 생긴 정은 있어서 씁쓸하기만 했다. 이곳에 들어올 다른 누군가에게 적응되어 점차 사라질 한기도 씁쓸하기만 했다. 김홍중이 의자에 앉자 박성화가 따라 앉았다.


"괜찮아?"

"안 괜찮은 것 같아."

"나도. 그렇게 미웠는데 떠나니까... 마음이 불편해."

"왜 이렇게 잔인하지."

"그러게."

"다 같은 꿈인데."

"..."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잘 지내 보려고 했을 텐데."


후회된다. 박성화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렇게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지? 그냥 열심히 하자. 그게 예의인 거겠지. 그러자. 우리 꼭 데뷔하자.


확실한 지각변동이었다. 데뷔할 거라고 말 나오던 유명한 연습생은 대거 탈락하고, 빛을 보지 못했던 연습생이 올라왔다. 이젠 정말 경쟁이었다. 삐끗해서 떨어지면 탈락인 거였다. 협동은 장식품이었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가리고 제 빛을 낼 수 있는가의 경쟁이었다. 김홍중은 비중 있는 랩 파트를 받았고, 박성화는 댄스 브레이크를 맡았다. 중하급반이었던 연습생들은 은연 중에 박성화와 김홍중을 우두머리, 혹은 리더로 추앙했다. 그 관심이 퍽 부담스러웠다. 추켜올릴수록 추락이 더 아플 테니까. 김홍중은 연습을 하는 동안 몇 번이고 제가 느꼈던 데뷔와의 괴리를 느꼈는데, 박성화는 그럴 때마다 귤을 건넸다. 너... 안 질리냐? 힘없는 말투로 장난스럽게 물으면 먹고 힘내야지. 하고 대답했다.


"귤 다네."

"그러게. 설탕이다 설탕."

"진짜 겨울인가 보다."

"밖에 나가질 않아서 겨울인지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나가고 싶다. 곧 크리스마스잖아."

"그렇네. 선물도 사고. 그냥 마음 놓고 놀고 싶어."

"꼭 데뷔해서 나가자."

"그러자."


*


금방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이도 탈락하고, 울고, 이별했다. 모두가 노력했지만 누군가는 떠나야만 했다. 떠나고 남은 발자국 위에 서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잡았다. 정말 마지막만을 남겨뒀을 때 인터뷰를 진행하는 PD는 이상한 질문을 했다. 하루동안 밖에서 신나게 놀 수 있으면 어떨 것 같아요? 김홍중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꽤 오랫동안 고민했다. 말을 고르고 골랐다. 부모님 뵈러 가고 싶고요, 맛있는 거 먹으러 가고... 그러다 문득 박성화를 생각했다. 김홍중이 울적할 때마다, 기쁠 때마다, 혼자 있을 때마다 다가와서는 뜬금없이 귤을 주던 박성화를 생각했다. 춤을 알려주고, 저에게 랩을 배우고, 노래를 들려주고는 괜찮냐고 기대에 찬 눈으로 묻던 박성화를 생각했다. 김홍중이 입을 다물고 있자 대답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PD는 다음 질문을 준비했다. 김홍중은 서둘러 다시 입을 열었다.


"박성화 연습생이랑 놀고 싶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내일도 없는 것처럼. 진짜 친구랑 노는 것처럼 놀고 싶어요."


항상 같이 있었으니까 없으면 허전할 것 같아서. 다 뱉고 나서야 김홍중은 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어우 이거 부끄럽네요... 김홍중은 옹알거리듯 덧붙였다. 열이 쉽게 꺼지지 않아 손부채질을 했다.


그 질문이 어떤 복선일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김홍중은 하나만 예상했다. 김홍중은 카메라를 들고 있었고, 그 옆에 박성화는 떡볶이 코트를 입고 신발끈을 묶고 있었다. 이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고,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특별 촬영 날이었다. 원래는 연습실과 숙소 곳곳에 카메라는 놓는 것으로 끝냈는데, 그 날은 촬영진이 모여 연습생들에게 카메라를 건넸다. 크리스마스 이브잖아요. 오늘 하루 동안은 다른 연습생이랑 놀고 휴식할 시간을 드릴 거예요. 카메라는 계속 켜 놓으시고요. 재밌게 놀고 오세요. 네 알았습니다. 김홍중은 카메라 렌즈를 돌렸다. 신발끈 묶는 데 집중하는 검은 정수리가 화면으로 보였다. 신발끈을 단단하게 다 묶은 박성화가 굽힌 몸을 폈다. 가자, 홍중아. 김홍중은 화면 속 박성화와 눈을 맞추면서 대답했다. 그래. 가자.


*


"너는 질문 어떻게 대답했어?"

"질문?"

"PD님이 물어보셨잖아. 나갈 수 있으면 뭐하고 놀 거냐고."

"아. 그거."


가족 보러 가고 싶고, 맛있는 거 먹고 싶다고 했지. 김홍중은 인터뷰 당시 자신이 끝에 덧붙인 말을 생각했지만, 그것은 차마 낯부끄러워서 말할 수 없었다. 어차피 방송 나가면 알게 될 말이었다. 김홍중은 괜히 제 귓볼을 긁다가 박성화에게 되물었다. 너는? 나? 나는...


"나도 똑같이 말했어. 가족 만나고 싶고 맛집 가고 싶고."

"뭐야."

"다 똑같이 말할걸. 사람 생각하는 거 다 똑같아."

"재미없다."

"음... 하나 더 말하긴 했어."

"뭔데?"

"너랑 놀고 싶다구."

"뭐?"


김홍중이 발을 멈추자 살짝 뒤에서 걷던 박성화가 김홍중 옆에 나란히 똑바로 서 멈췄다. 김홍중과 박성화의 시선이 닿았다.


"왜?"

"넌 뭔 그런 말을 해."

"할 수도 있지. 우리 친구잖아."

"우리가 친구야?"

"그럼 아니야?"

"동료지."

"친구는 못해?"

"아직 아니야."

"되게 오래 걸리네."

"나랑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나 정도면 오래 만난 거 아니야?"

"넌 멀었어. 당당 멀었지."

"같이 데뷔하면 그땐 친구 해 줄 거야?"


그땐... 뭐 생각해 볼게. 데뷔나 하고 말해. 김홍중이 작게 웃었다. 박성화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꼭 데뷔해야겠네. 너만 한다고 되냐? 나도 해야지. 넌 당연히 하지. 네가 여기서 제일 아이돌 같아. 그거 다른 애들이 들으면 화낸다. 여기서만 해. 당연하지. 어디 갈래? 벌써 여기 온 지 10분이 지났어. 다리 아파 죽겠다. 밥 먹을래? 김치찌개 어때? 네가 먹고 싶은 거 아니야? 들켰다. 그래. 까짓것 그거 먹으러 가자. 그래! 여기 맛집 내가 알아. 거기로 가자. 그러자.


*


"진짜 맛있다."

"그치? 내 최애 식당이야."

"나중에도 와야겠다."

"나랑도 와."

"글쎄. 그건 데뷔하고 생각해 볼게."


박성화의 얼굴이 뚱해졌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바보 같아. 박성화가 김홍중을 밉지 않게 째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 놀리는 애 버리고 혼자 화장실 다녀올게. 친구 아니고 동료. 친구. 동료. ...알았어 동료. 옳지.


"너 화장실 다녀올 동안 난 계산하고 도망가야지."

"이런 것도 동료라고..."


박성화는 김홍중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려 손을 뻗었다. 김홍중은 민첩하게 피하고 잽싸게 카운터로 갔다. 멀뚱히 서 있는 박성화에게 화장실이나 가라고 손 흔들었다. 박성화는 허공에 멈춘 제 손을 빤히 보다가 몸 돌려 화장실로 갔다. 김홍중은 제작진에게 받은 지폐 몇 장을 건넸다.


"여기요."

"고마워요. 맛있게 먹었어요 학생?"

"네. 엄청 맛있네요 여기. 앞으로 자주 올까봐요."

"다행이네. 아, 학생 기다려 봐요."

"네? 네."


카운터 보던 아주머니가 주방으로 달려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잘 익은 주황빛 귤 세 개를 들고 있었다.


"학생들이 내 아들 같아서 주는 거예요. 훤칠하니 말끔하고. 착하고."

"아, 감사합니다."

"이거 진짜 좋은 귤이니까 먹어요. 크고 달고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친구랑 맛있게 먹을게요."


마침 박성화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김홍중이 먼저 허리 숙여 인사하고 나오면 박성화도 따라 인사하고 나왔다. 뭐야? 뭔 얘기 했어? 박성화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귤. 아주머니가 주셨어."

"진짜? 맛있겠다."

"너 하나 먹어."

"응."


박성화는 바로 귤을 깠다. 귤을 네 덩이로 나누고 한 덩이씩 입에 넣어 오물오물 씹었다. 달달한 과즙에 박성화의 표정이 한껏 녹았다. 이거 진짜 달다. 너도 먹어 봐. 그래? 그 말에 김홍중도 옆에서 껍질을 깠다. 그리고는 껍질 말끔하게 깐 귤을 박성화에게 내밀었다.


"달다며. 먹어."

"나 주는 거야?"

"보면 몰라?"

"너 먹지."

"됐어. 너 먹는 거만 봐도 배불러."

"..."

"그리고 항상 나만 받아먹었으니까. 한 번쯤은 내가 주고 싶었어."

"고마워."

"어우. 부끄럽네 이거. 너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먹어."

"알았어."


박성화가 과육을 나눠 한 알 한 알 입에 넣었다. 반쯤 먹었을 때 박성화가 말했다.


"근데 난 이미 너한테 많이 받았는데. 또 주면 어떻게 갚아."

"응?"

"아니야. 가자."


겨울이라 그런가. 금방 어두워진다. 돌아가기 전에 선물 가게라도 갈래? 박성화가 묻자 김홍중은 가만히 박성화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성화가 방금 한 말의 의미를 속으로 되풀이했다.


선물 가게는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크리스마스 전날이었으니 당연했다. 따뜻한 옷을 입은 인형과 각종 액세서리, 스노우볼과 장식품들이 예쁘게 진열되어 있었다. 가격표를 힐끔 보고 김홍중은 좀 비싸네, 하고 중얼거렸다. 박성화도 옆에서 응, 다른 애들 건 못 사겠다. 하고 거들었다.


"우리 것만 살래?"

"그건 너무 양심 찔리지 않나?"

"애들은 애들 나름대로 살 거야."

"그건 그래. 어디 가서 자기 거 안 챙길 애들은 아니니까."

"서로 골라줄까? 기분이라도 내게."

"좋지. 이상한 것도 돼?"

"자기 마음이지."

"생전 처음 보는 걸로 골라 줄게."


박성화는 말없이 웃으면서 뒤쪽으로 걸어갔고, 김홍중은 반대 방향으로 갔다. 간식 코너를 가로질러 장갑과 스웨터 진열장 앞에 섰다. 마지막 하나 남은 귀여운 벙어리 장갑을 하나 들었다. 벙어리 장갑을 낀 박성화를 생각하고 김홍중은 작게 웃었다. 귀엽겠네. 그리고는 깜짝 놀라서 생각을 지웠다. 내가 무슨 생각을. 미쳤지 내가. 김홍중은 제 볼을 한 번 꼬집고는 장갑을 꼭 쥔 채 카운터로 갔다. 박성화가 골랐을 선물을 기대하면서.


김홍중이 계산을 마치자마자 박성화도 카운터로 와 계산을 했다. 언뜻 보니 작은 나무 상자처럼 보였다. 그게 뭐냐 묻기도 전에 박성화가 먼저 물었다.


"장갑이네?"

"응. 너 전에 손 보니까 차더라. 이거 쓰라고."

"고마워. 잘 쓸게. 겨울만 되면 손이 엄청 차가워지더라. 벙어리 장갑이구나. 오랜만에 본다 이런 거."

"응. 그거 쓰는 게 귀여우니까."

"귀여워?"

"... 아니. 안 귀엽지."

"고마워, 홍중아."

"안 귀엽다니까?"

"네 마음 잘 알았어."


김홍중이 박성화를 째려보자 박성화는 김홍중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한 박성화가 나무 상자를 꺼냈다.


"난 이거."

"상자?"

"아니. 오르골이야. 뚜껑 열어 봐."


뚜껑을 여니 따뜻한 색감의 전구가 켜지고, 상자 안에 눈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태엽을 돌리자 맑고 고운 소리가 울렸다. 예쁘네. 김홍중이 중얼거렸다.


"좀 실용적인 걸 고를까 하다가 이거 골랐어. 가끔은 예쁜데 쓸데없고 낭만적인 것도 좋잖아."

"그렇지. 난 마음에 들어."

"그래? 다행이다."

"센스 좀 있네 너."


태엽이 돌아가다 멈추면 김홍중은 다시 태엽을 돌렸다. 내리던 눈이 다 떨어지면 김홍중은 뚜껑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아름답고 황홀한 모습이었다. 김홍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올해 크리스마스엔 눈이 안 오려나 보네."

"응.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건너갔지."

"막상 눈 오면 귀찮기만 할 거야. 차라리 낫지."

"그런가? 그때는 눈 많이 왔었는데."

"그때?"


김홍중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옆을 돌아봤다. 박성화는 여전히 얼굴에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나 지금은 무소속이지만 옛날에는 소속사에서 연습했었어. 맨날 혼나고 뒤처지고 열등감만 쌓여서. 원하는 거 마음대로 먹지도 못하고. 스트레스만 쌓다가 하루는 어디 구석에서 몰래 울었거든. 아무도 없어서 소리내면서. 근데 누가 있더라고. 모른 척해줬으면 했어. 부끄러웠거든. 날 안 좋게 볼 것도 같았고. 근데 걔가 말없이 나가더니 몇 분 뒤에 다시 와서는 귤 두 개를 주더라? 껍질까지 다 까서. 이거 좀 먹는다고 살 안 찌니까 이거 먹고 힘내라고. 그 뒤에도 가끔 깨지면 뒤에서 몰래 귤 주고 가고 그랬어. 이르게 나온 귤이라 딱딱하고 엄청 셨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더라. 그걸로 버틴 것 같아. 나한테. 그냥 날 위해 뭘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근데... 그래도 난 너무 약했나 봐. 결국 못 견디고 그만두기로 했어. 그 달까지만 나가고 안 나가기로 했는데. 크리스마스에 내가 좀 울었거든. 다 의미가 없어진 것 같아서. 근데 걔가 날 안아 주면서 그러더라고. 꼭 같이 데뷔하자고. 그러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 그게 그렇게 따뜻하더라. 창밖에는 눈이 오고 있었어. 펑펑 내렸지. 이상하게 그게 지금도 눈에 훤해. 걘 내가 회사 나가는 것도 몰랐을 거야. 예정대로 난 회사 나갔고. 그 뒤로 그쪽 일은 다 끊고 살았어. 그냥 평범하게 살다가 갑자기 또 갈피를 잃은 느낌이었어. 멈춰 있기만 한 거지. 돌아가지도 못하고 나아가지도 못하고. 근데 걔 말이 생각났어. 같이 데뷔하자고 했던 말. 그 약속 지키려고 왔어. 결국 난 돌아올 수밖에 없구나 싶어. 걘 나 기억도 못할 거야. 나도 걔도 너무 어렸고. 너무 많이 변했어."

"..."

"근데 홍중아."


아직도 기억 안 나? 박성화가 김홍중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김홍중은 코만 훌쩍였다. 추워서 그런 건지 눈물이 나려고 그러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김홍중이 겨우 입을 열었다. 먹먹한 목소리가 밀려나왔다.


"몰랐어."

"그런 것 같더라."

"미안."

"괜찮아. 말했잖아. 나도 너도 많이 변했다고. 당연한 거야."

"핑계로 들리겠지만, 다들 떠나는 게 힘들어서 의식적으로라도 떠난 애들은 다 잊으려고 했거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살았어."

"응. 그래도 네 잘못이 아니야."

"..."

"어떻게 사람이 모든 걸 영원히 가지고 살아. 그럴 수는 없잖아. 왜 망각이 인간의 축복이겠어."

"..."

"그렇다고 나랑 있었던 기억이 쓸모없는 기억으로 남아도 괜찮다는 건 아니야. 그건 좀 상처 받는다."

"..."

"그래도 넌 기억했잖아. 날 완전히 버린 건 아니니까. 그거면 됐어."


시간이 너무 빠르네. 슬슬 들어가야겠다. 홍중아, 가자. 박성화가 김홍중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김홍중은 박성화가 당기는 대로 이끌렸다. 조용히 박성화의 뒷머리만 응시하던 김홍중이 문득 멈춰섰다. 박성화도 따라 멈췄다. 박성화가 뒤를 돌자 김홍중은 박성화를 안았다. 홍중아? 박성화가 당황스러운 듯 묻자 김홍중이 말했다.


"성화야, 우리 꼭 데뷔하자."

"응?"

"같이, 같이 데뷔하자."

"..."

"그때는 너한테 답을 못 들었으니까. 지금이라도 들어야겠다."

"..."

"약속하자. 꼭 같이 데뷔하기로."


김홍중이 박성화의 뒷머리를 살살 쓸었다. 응. 약속할게. 박성화는 울지 않았다. 그저 팔을 뻗어 덩달아 김홍중을 끌어안을 뿐이었다. 눈은 내리지 않았다. 여전히 박성화를, 그리고 김홍중을 힘들게 할 것은 많았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그럼에도 박성화와 김홍중은 이겨낼 것이므로.


홍중아. 응? 있잖아. 말해. 꼭 데뷔하자. 당연하지. 몇 번을 말해. 그리고 데뷔하고 나서 꼭 너한테-


그 말을 끝으로 카메라의 전원이 꺼졌다. 그 뒤의 말은 둘만의 이야기. 공기 중으로 흩어졌지만 둘에겐 영원히 남을 말. 둘만의 세계 속 비밀의 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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