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잊는 법>, 꽃
- 계간 성홍
- 2022년 12월 22일
- 5분 분량
추위가 진득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날이었다. 이런 날이면 성화는 어김없이 양 손에 달달한 마시멜로가 올라단 코코아를 들고 홍중의 병실을 찾았다. 4인실이었으나 이름표가 걸린 베드는 둘뿐이었기에 홍중은 창가 쪽 베드를 편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문에 가까운 쪽의 베드를 사용하던 지환은 성화가 오는 것을 보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성화 씨, 오늘이 마지막이겠네요. 지환 씨 퇴원하세요? 네? 오늘 홍중 씨 퇴원하잖아요.
겨울을 잊는 법
w. 꽃
성화는 그제야 홍중의 베드로 시선을 옮겼다. 환자복이 아니라 처음 입원할 당시의 옷을 꺼내 입은 홍중은 꽤나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말을 안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말끝을 흐린 홍중은 자신의 짐을 정리한 작은 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일단 이거 들고 기다리고 있어. 나 교수님 외래 진료 보고, 결제하고 할 게 많거든. 성화는 코코아 하나를 홍중에게 건네며 가방을 받아들었다. 여전히 시선은 평범해진 홍중을 향해 있었고, 홍중은 일부러 모르는 척 빠르게 병실을 빠져나갔다. 성화는 텅 빈 홍중의 베드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처음 왔을 때와 다르지 않을 정도로 깔끔했다. 홍중이 물건을 늘어놓으면 빠르게 성화가 정리했기에 정리할 게 몇 개 없었을 것이다. 혹여나 빠뜨린 물건이 있을까 싶어 사물함 하나하나 열어보기 시작했다.
가장 위의 사물함을 열자 떡하니 정리 되지 않은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이것저것 해보겠다며 입원 초기에 가져온 비즈팔찌와 드로잉 도구들이었다. 어쩐지 가방이 가볍더라니. 성화는 천천히 물건들을 정리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영원히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사물함 옆 노란 포스트잇에 적힌 12월 22일 퇴원! 이라는 글을 한참이고 바라봤다. 이것마저 잊어버릴까봐 적어뒀을 텐데. 상념에 사로잡혀 있던 성화를 꺼낸 건 지환의 목소리였다.
근데요 성화 씨. 홍중 씨가 정말 자기 퇴원인 거 말 안 했어요? …아마 잊어버렸을 거예요. 제가 온다는 사실을 안 잊었으니 그나마 다행인 거죠. 지환은 성화의 말에 답할 말을 찾지 못해 눈동자를 굴렸다. 성화는 마저 정리를 끝내 조금은 묵직해진 가방을 들고 지환의 베드 옆에 앉았다. 홍중이 퇴원 소식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지환은 성화가 바빠 오지 못했던 날이 한창이던 때에 들었다 답했다. 시즌이 바뀔 때면 조금씩 바빠지는 성화였으니 겨울이 막 시작되었을 적이라는 말이었다. 약 한달 동안 홍중은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 기억에서 지워버렸을 것이다. 성화는 고맙다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진료실 앞에 가있지 않으면 홍중을 영영 놓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얼른 가봐야 할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4인실에 홀로 남게 된 지환은 병실을 빠져나가려는 성화를 불렀다.
홍중 씨는 나을 수 있는 거죠? 성화는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고개를 가로 저었다. 홍중이는 영원히 저럴 거예요.
홍중이 처음 아프기 시작한 건 지난봄이었다. 벚꽃 구경을 가자며 조르고 졸라 겨우 작업실에서 꺼냈건만 당일에 약속을 잊어버렸고, 작년부터 끊임없는 두통에 시달려서 더 이상 진통제가 안 드는 것 같다는 말에 홍중은 종합 병원으로 향했다. 정확하게는 분명 머리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거라고 입 아프게 말하던 성화가 근처 약국으로 향하려던 홍중을 종합병원으로 밀어 넣었다. 두통이 작년부터 끊이지 않는다는 말에 의사는 작은 한숨과 함께 뇌 CT와 MRI를 찍자 말했고, 홍중은 고개만 끄덕였다. 진료실 밖에서 얌전히—다리는 달달 떨고 있었지만— 기다리던 성화는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이동하는 홍중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별 문제 없을 거니까 일 보러 가라는 홍중의 잔소리에도 성화는 홍중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성화는 그때 홍중의 옆에 함께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그 상황 속에서 홀로 남겨졌을 홍중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뉴런끼리 연결하는 시냅스의 문제가 생겨서 어쩌고. 단순히 기억을 좀 못 하길래 건망증이나 청년 치매를 생각했던 성화는 조금씩 심각해지는 의사의 표정과 점점 늘어가는 전문용어를 마주했을 때, 홍중의 병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얌전히 의사의 말을 듣고만 있는 홍중이 점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꼭 전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성화는 홍중을 가만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홍중아, 너 알고 있었어? 홍중이는 멋쩍게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 들으니까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의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심란한 마음과 걱정이 뒤섞여 있다는 건 이 작은 진료실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의사는 홍중을 향하던 몸을 돌려 성화를 바라봤다. 홍중에게 오백만번 말해도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일찍 깨달은 듯 했다. 병명도 아직 없는 질환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백 명 남짓, 이 병을 앓고 있고요. 앞으로 더 아프실 거고,… 그때도 입원 권해드렸는데 안 하신다고 하셨거든요. 성화는 그대로 홍중의 입원 서류를 작성했다. 너 더 아픈 거 보기 싫어. 성화의 울먹임 섞인 말 하나로 홍중은 쉽게 꺾였다. 꺾였다기 보다는 무너졌다. 나도 이제 힘들어. 더 이상 못 버틸 정도로 아프더라.
마약성 진통제를 달고 있으면 속이 뒤집어져서 뭘 먹지도 못했다. 안 그래도 입이 짧아 제대로 먹는 게 없었던 홍중은 요거트만 겨우 먹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성화만 안쓰럽게 바라봤고, 옆에서 같이 밥 한술 못 뜨는 성화를 데려가는 건 산이의 역할이었다. 홍중은 아픈 사실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주변인들 중 고르고 골라 산이를 불렀다. 성화 좀 데려다 밥 좀 먹여. 여기 E대학 병원 1024호야. 병원이라는 말에 산이는 당장 튀어왔고, 반쯤 죽어가는 성화를 보고 경악했다. 형님 설마 밥을…. 아니 형님은 또 뭔데? 빨리 성화를 데리고 가라는 홍중의 재촉 아닌 재촉에 산이는 성화를 제육백반 집에 데려갔고, 요거트 하나와 커피 두 개를 사들고 홍중의 병실에 발을 들였다.
홍중이 아프다는 사실은 그렇게 셋만 아는 비밀이었다. 하지만 산이가 병실을 찾는 경우는 홍중이 불렀을 때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홍중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성화는 매일 같이 홍중의 병실 옆을 지키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건넸다. 혹시나 홍중이 모든 것을 잊어버릴까봐. 성화는 홍중이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릴까 겁이 났다.
익숙한 이름의 진료실 앞에 선 성화는 이제 다른 방식으로 겁이 났다. 홍중이 스스로를 잊어버릴까봐. 홍중의 병은 최근의 기억부터 잊는 게 아니었다. 아주 랜덤으로. 홍중이 방금 전까지 소중하게 되짚던 기억을 뒤돌면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성화를 기억해도 홍중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성화는 눈물을 훔쳤다. 홍중이는 영원히 모든 것을 잊어가겠구나. 우는 성화를 위로하는 게 홍중인 기묘한 위치에 결국 둘 다 웃음을 터뜨렸다. 아픈 건 나인데 왜 니가 울어. 너무 슬프잖아…. 울먹거리는 성화를 보고 홍중은 단단하게 말했다. 난 안 슬퍼. 네가 있을 거잖아. 영원히 있을 거라는 보장이 하나 없었으나 홍중은 성화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주 어쩌면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성화를 직접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고.
굳게 닫힌 진료실 문을 빤히 바라보던 성화는 복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이 걸릴 모양이었다. 간호사는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성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편의점으로 향했다. 홍중이 나오면 시간이 없을 것 같으니 미리 구매해두기 위해서였다. 다시 진료실 앞에 도착한 성화는 홍중이가 짧은 사이에 자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을까 싶어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걱정은 한 번에 날리듯이 홍중은 빙긋 웃으며 성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집에 가자. 하지만 홍중의 입에서 나온 말은 참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성화는 긴장으로 꽉 쥔 손의 힘이 풀렸다. 그래, 집에 가자. 약 10개월 만에 가는 집이었다. 성화가 종종 들려 청소를 하긴 했으나 사람의 온기가 사라져버렸을 테다. 성화는 넌지시 홍중의 귓가에 속삭였다. 집이 어딘지 기억은 나? …죽을래?
홍중은 당당하게 자신의 집을 찾아갔다. 문제는 집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잊어버렸다는 거였지만. 성화는 그럴 줄 알았다며 네 글자 번호를 눌렀다. 우리 연애 시작한 날이잖아, 홍중아. …아. 잊어버렸어? 성화는 눈망울을 크게 만들고 똘망똘망하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하고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홍중이를 올려다봤다. 홍중보다 한참은 크면서 몸을 작게 구겨 말고서. 매번 이런 식이지. 홍중은 성화의 반짝거리는 시선을 애써 피하며 말했다. 아니, 그날을 잊은 게 아니라 비밀번호가 그날이라는 점을 잊어버린 거지. 그건 엄연히 다르다고오. 성화는 더 홍중을 놀릴 생각이 없었기에 알겠다며 고개만 끄덕였다. 비밀번호는 밖에 적어둘 수 없는데 어떡하지. 중얼거리는 성화의 말을 들은 홍중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뭘 적어둬?
성화는 당당히 포스트잇과 연필을 꺼내보였다. 적어서 집 곳곳에 붙여두려고. 그러면 잊어버려도 다시 보고 기억할 수 있잖아. 홍중은 어이없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너도 참. 이런 거 안 해도 돼. 성화는 홍중의 말을 그대로 포스트잇에 옮겨 적었다. 12월 24일. 김홍중이 이런 거 필요 없다고 했다. (분명 필요하게 될 걸?) 근데, 홍중아. 응? 세탁기에 옷가지를 집어넣고 버튼을 누른 홍중은 다시 성화를 바라봤다. 성화는 홍중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했어? ……. 엄청 오래 걸린 건 알지? ……. 걱정되니까 그래. 성화야, 나중에 말해줄게. 중간에 끊어내지 않으면 홍중이 답을 할 때까지 쉴 틈 없이 질문을 쏟아낼 예정이었던 성화는 입을 다물었다. 홍중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으나 그 심지가 단단했기에 성화는 홍중이 꼭 말해줄 거라 믿었다.
홍중은 다시 밀린 집안일—이라고 해봤자 몇 개 없었고, 그마저도 홍중이 시작하려 하면 성화가 가로챘으나—을 끝내고 늦은 저녁을 시켰다. 오랜만에 자극적인 게 먹고 싶다며 불막창을 주문한 홍중의 뒤에서 성화는 괜찮겠냐고 가만히 있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특집 영화를 함께 보다가 졸고, 다른 영화가 없나 찾는 성화를 가만 보던 홍중은 느린 속도로 말을 꺼냈다. 타이밍이 썩 좋지는 않았으나 지금이 아니면 또 잊어버릴 것 같았다.
성화야, 더 이상 진통제도 듣는 게 몇 개 없어. 뇌는 점점 멍청해져가. 결국에는 숨 쉬는 법도 잊어버려서 죽을 거야. 그게 당장 지금이 될 수도 있겠지. 그리고 나는… 너를 한 순간에 잊어버릴 거야. 방금까지 사랑한다 말하고, 뒤돌아 누구세요? 하는 날이 오겠지. 그러니까…. 박성화, 이제 나를 잊어.
성화는 리모컨을 들고 있던 손을 떨어뜨렸다. 설마 했지만 실제로 듣는 건 달랐다. 내일이면 차라리 이 말을 잊어버렸으면. TV화면에서 시선을 겨우 떼어 홍중을 바라본 성화는 흔들리는 홍중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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