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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胡蝶夢 完>, 희재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12월 22일
  • 16분 분량


* 아포칼립스




 동백꽃은 11월 말부터 조금씩 꽃봉오리가 피기 시작해서 12월 둘째 주부터가 제일 예쁘게 핀대. 그럼 곧 동백꽃 피겠다. 근데 여기 나오는 검색 결과들은 다 제주도나 부산 쪽이네. 우리는 차도 없고… 거긴 너무 멀지 않을까? 고속버스 같은 건 위험할 것 같은데…걸어갈 만한 거리도 아니구. 서울이라고 따로 키워드 넣어서 검색해도 괜찮은 검색 결과가 안 나오는 것 같아. 설마 서울에는 동백꽃이 안 피는 거야? 에이, 그래도 그럴 것 같진 않은데….


 박성화의 재잘대는 목소리를 라디오 삼으며 수첩 위에 끄적거리던 펜을 우뚝 멈추었다. 써 내려온 글귀들을 천천히 눈으로 훑으며 읽어 내려간다. 아. 박성화가 하도 옆에서 맨날 동백꽃 동백꽃 노래를 불러대서 나도 모르게 동백이라고 써놨네. 어이없어서 픽 웃으며 펜으로 찍찍 선을 그어 대충 단어를 지운다. 단어를 고치고 문장을 다듬고… 김홍중은 펜을 내려놓으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박성화에게 비밀을 하나 만들게 되었다.







 “박성화.”


 “박성화 아니고 성화.”


 “…그래, 성화야. 겨울에는 밖에 막 나가도 괜찮을 것 같아?”


 “…….”


 “여름은 아직 봄이 지난 지 얼마 안 지난 시기라 안 되고, 가을은 봄이랑 가장 날씨가 유사한 계절이라 안 된다며. 겨울은 이제 봄에서 많이 멀어졌고 날씨도 추워졌잖아. 이제 나가도 되는 거 아니야?”


 “…겨울은 잘 모르겠어.”




 그래도 이번 겨울만 넘기면 차츰 다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이 겨울 조금만 더 버티면… 조금만 더 견디면 다 무사해질 거야. 그게 박성화가 마지막으로 지닌 유일한 확신의 말이었다.


 날씨가 부쩍 추워지는가 싶었더니만 이번에는 금방 또 풀렸다. 이렇게 따뜻해서야 금방 눈은 내릴 수 있는 건지 싶었고 겨울이 오긴 오는 건지 싶었다. 혹시 겨울이라는 애가 뒤져서 겨울이 사라진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말도 되지 않는 존재와 함께 산다는 건 나까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게 해주는 거구나.


 그래도 차라리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 속에 갇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김홍중은 이미 현실의 모든 괴리를 이겨내지 못한 지 오래였다. 김홍중이 버티기에는 이 세상이 이제 너무 차갑고 가혹해졌다. 그럼에도 김홍중은 버팅기고 싶다는 악바리로 어떻게든 견뎌내고 있었다. 박성화가 죽지 말라고 애원해서 버팅기는 게 아니라 그냥 이제는 김홍중이 그러기를 원했다.


 지금까지 어떠한 확신에 찬 듯이 굴던 박성화는 이상하리만큼 겨울에 접어들자 하는 짓이 많이 달라졌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확신을 잃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가끔은 또 겨울을 처음 맞이해보는 어린아이처럼 굴기도 했다. 새로운 박성화의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엽…………아주 내가 단단히 미쳤지.


 김홍중은 몇 달 내리 헤매던 마음을 바로잡았다.




 “겨울에는 나가도 괜찮을 것 같은 거면 여행 갈래? 그깟 거 동백꽃 보러 부산이나 제주 가면 되잖아.”




 이런 제안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수 있을 정도로 김홍중은 박성화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박성화는 잠시 얼 나간 표정을 하다가 수줍게 고개를 연신 끄덕여댔다. 그만 좀 끄덕여도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말 전혀 예상도 못 했다는 얼굴로 벙쪄있는 그 얼굴이 괜히 너무 웃겨서 그리고 또 귀여워서. 김홍중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짝사랑이라는 것은 미친 듯이 비참하고 아플 줄 알았는데 직접 겪어보게 되니 생각보다 할 만도 했다. 종종 마음이 간질간질거리는 게 지겹도록 숨 막히는 느낌이 들 때 빼고는. 사실 이마저도 짝사랑을 시원하게 스스로 인정하고 나니 더 이상 힘들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냥 오히려 웃음이 더 늘고 행복한 일이 더 많아졌다. 김홍중에게는 가장 큰 삶의 이유를 만들어주는 원동력을 만난 것만 같았다.




 “그래서 겨울엔 나가도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박성화.”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지금.”




 그 말에 김홍중은 또 한참을 웃었다. 되는 거면 되는 거고 안 되는 거면 안 되는 거지 될 것 같은 생각은 또 뭐야. 박성화는 고개를 작게 저으며 눈을 피했다. 항상 뭘 하자고 하면 그냥 곧바로 고개 끄덕이며 그닥 크게 감흥 없는 듯이 다정하게만 웃으면서 반응하길래 이번에도 그냥 그럴까 대답하며 웃어줄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깜짝 놀라서는 예상외의 반응을 보인다고 거기에 또 괜히 설레는 게… 아니 원래 사랑하면 지는 건 맞대 근데 이렇게 갑자기 쟤 반응에 그대로 나까지 심장에 타격이나 받고 설레서 두근 콩닥 이러는 건 내가 너무 지는 것 같지 않니… 싶기도 하고.








 물론 그런 평화롭고 날들의 연속만은 아니었다. 오늘은 유명 연예인 중 한 명이 또 세상을 떠났다는 인터넷 기사가 올라왔다. 사인은 웨르눔 바이러스가 아닌 다른 질병이었다. 옛날처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곳에서는 평안하세요…그런 흔히 볼 수 있는 댓글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오히려 댓글 창을 장악하고 있는 것들은 질 안 좋은 내용들이었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내용은 죽어서 부럽다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 하면 이 사회가 너무 징그러워서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는데 이제는 김홍중도 그 기사에 어렴풋이 그래도 웨르눔 때문은 아니어서 다행이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함부로 머리에 담을 수 있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큰 자괴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생각에 김홍중은 하루에 몇 번씩 헛구역질을 했다. 박성화는 언제나 그 옆에서 말없이 김홍중의 등을 도닥여줄 뿐이었다.


 그렇게 잔인한 하루를 끝마치고 밤을 맞이하고 나면. 그런 날만큼은 등을 지고 누웠다. 박성화가 제 얼굴을 볼 수 없었으면 해서. 김홍중은 단 한 번도 제가 했던 징그러운 생각들을 입 밖으로 꺼내 본 적이 없는데 박성화는 도대체 어떻게 그 복잡한 김홍중의 속마음을 용케도 눈치챈 것인지 김홍중이 잠에 들려 할 때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평범한 죽음은 마음 아프지만 축복이 맞아 홍중아


 지금으로서는 그게 맞는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등 뒤편으로 들려오는 말에 입술을 까득 깨물어 씹었다. 그런데 너는 그 죽음이라는 축복도 맞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말에 결국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쳤다. 얼굴을 가로로 횡단하는 눈물이 뜨거웠다. 그대로 잠시 숨을 죽였다.




 다음 날이 되면 김홍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굴었다. 박성화도 군말 없이 그 연기에 따라주었다. 웨르눔 바이러스라는 전염병은 애초부터 알지도 않았던 사람들처럼 다가온 겨울에 대해서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성화가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동백꽃은 슬슬 꽃봉오리를 틔울 시기가 되었고 일기예보에서는 곧 올해의 첫눈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매일매일 뉴스가 끝나갈 때는 화면 하단에 작은 자막으로 실시간 생존자 수를 띄워주었다. 연초에 발발한 전염병의 끝을 결국 보지 못한 채로 한 해가 끝나갈 때가 되니 이제는 사망자 수를 집계하는 것보다 오히려 생존자 수를 집계하는 것이 빠르다는 판단이 선 모양이었다. 대한민국의 전일 대비 생존자 수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 숫자 안에는 김홍중의 존재가 속해있을 것이며, 박성화의 존재는 속해있지 않을 것이다.


 채널을 마구잡이로 돌려도 모든 방송은 더 이상 실시간 중계 방송이 아니었다. 실시간 방송의 개념은 사라지다시피 된 지 오래였다. 방송업계에서도, 시청자들도, 그 누구도 실시간 방송을 더 이상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종종 한 번씩은 실시간으로 송출하고 있는 방송들이 보이긴 했다. 물론 대다수가 이런저런 다양한 이유로 방송사고를 맞이하는 결말을 보았지만. 문득 멈춰 선 채널에서는 인류학자를 모셔 실시간으로 인터뷰를 하고 있단다. 간만에 보는 실시간 라이브 마크가 반가워 괜히 돌리던 채널을 멈추고 잠깐 방송을 바라보았다.


 발병 기준이요? 글쎄요. 감염자의 공통점…예, 큰 공통점이 한 가지 있죠. 이들의 공통점은 이 지구상에서 숨을 쉬는 생물이라는 것 그뿐입니다. 다른 공통점은 없어요. 무조건 이 조건 하나뿐이죠.


 그러니까결국여러분도언젠간죽을것이고이지구는멸망을맞이할것이고




 “홍중아. 우리 티비 그만 보고 이제 여행 계획 짜자.”


 “어, 어…. 그래.”




 박성화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김홍중은 급히 텔레비전의 전원을 꺼버렸다. 순식간에 텅 빈 시커먼 화면에는 넋 나간 얼굴의 김홍중이 옅게 비쳤다. 저것도 방송사고겠지. 확신 그리고 광기에 가득 차 번들거리던 인류학자라는 노파의 눈은 카메라를 넘어 김홍중이 있는 그곳까지 주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세상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이 다시 한번 실감이 났다.


 넋이 나간 김홍중을 대신해서 박성화는 인터넷으로 야무지게 이것저것 찾아보았다. 김홍중의 시선은 분명 그 작은 휴대전화 화면에 꽂혀는 있는데 정신머리는 다른 데로 튀어 나가 가출이라도 한 것만 같았다. 그 옆에서 박성화는 꽃이 가장 예쁘게 피어나고 눈이 낭만적이게도 펑펑 내릴 날에 여행을 가고 싶다며 중얼거렸다. 분명 작은 목소리였는데 그게 김홍중의 머릿속에서는 웅웅 울릴 정도로 정신없이 귓가로 박혀왔다. 어어… 그러자… 김홍중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야 창밖 너머로 보는 것이나 가장 좋아하지 폭설 사이에서 미친 듯이 내리는 눈을 직접 맞으며 걷는 건 딱히 김홍중의 취미 중엔 없었는데도 박성화가 그러자 하면 당장이라도 좋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일 가능성이 엄청 높대.”


 “아직 12월 초인데 그걸 어떻게 알아. 첫눈도 안 내렸는데.”


 “그래도 믿으면 뭐라도 이루어질 것 같고 그렇잖아.”




 탁상 달력을 눕혀 놓은 채로 둘이서 한참 동안 뻔한 숫자들을 들여다보았다. 성탄절 세 글자가 쓰여 있는 칸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크리스마스에 눈 올까 안 올까 괜히 기대하는 마음 품고서 같이 꽃이나 보러 여행 다녀오는 그런 거… 무슨 멜로 드라마 주인공들이나 할 것 같은 데이트 코스 같아서 괜히 심장 떨리는 그런 느낌이기도 하고. 박성화 너는 진짜 사람 마음 흔드는 데에 뭐가 있다…그래도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무조건 지는 기분이 또 들 것 같아서 그냥 입 꼭 다문 채로 잠깐 탁상 위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신나게 밑밥 작업 다 해놓고 있던 박성화만 눈치 없이 또 김홍중 심장 콕 건드리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맞춰서 일박이일로 여행 다녀오는 걸로 하면…어떨 것 같아, 너무 늦을 것 같아?”




 네 마음대로 해라…… 그렇게 말하며 김홍중은 눈을 감아버렸다.












 겨울의 행방을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한파가 순식간에 김홍중의 두 뺨을 얼얼하리만치 내리쳤다. 따뜻하게 다니겠답시고 털 달린 옷을 주섬주섬 죄다 꺼냈다. 올해 산 옷이 얼마 없는 것을 보니 한 해를 송두리째 어디론가 내던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찜찜했다. 살아는 있는데 제대로 살고 있는 게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드는 것은 이런 순간 덜컥덜컥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옷장에 있던 오버사이즈는 죄다 박성화의 몫이 된 지 오래였다. 반강제로 입는 옷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눈치였다. 전에는 한 번 인터넷으로 이런저런 옷을 보여주면서 쇼핑하러 가보지 않겠냐고 묻길래 화면을 들여다보니 웬 모델들이 하나 같이 봄 느낌 물씬 내고 앉아있길래…그때 바로 딱 박성화는 그냥 지 같은 스타일링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내가 주는 옷 곧이곧대로 입으면 표정이 딱히 안 사는 거구나 깨달음을 얻었다.


 어젯밤에도 옷 쇼핑하러 가자고 은근하게 떼쓰는 게 집에다가 봄을 내다 둔 건지 짝남을 데리고 있는 건지 아니면 뭐 떼쟁이 코찔찔이 어린아이를 키우기라도 하고 있는 건지 싶어 결국 김홍중이 두 손 두 발 다 들고 외출 의사를 밝힌 참이었다. 그래 내일 나가. 그 말에 내일 일찍 일어날 수 있게 얼른 자자며 김홍중을 억지로 이부자리에 눕히는 꼴이 참 웃겼다. 생긴 건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게 이럴 때 보면 힘은 또 센 게…평소에 그렇게 잘 먹으니까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어차피 박성화 지는 자지도 않으면서 잘 자라고 꼬박꼬박 밤마다 말해주는 게 참 다정하고 좋았다. 김홍중도 그 다정함을 돌려주고 싶어서. 잘 자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그냥 작은 목소리로 늘 이렇게 대답했다. 일어나서 보자.




 김홍중이 자고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건 옆자리를 살펴보는 일이었다. 잠들었을 때와는 다르게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이제는 익숙했다. 그 대신 좁아터진 집 전체에 폴폴 음식 냄새가 풍기는 게 당연한 일이었는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이상함을 느끼자마자 김홍중은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미 한 번 예고도 없이 박성화를 멀리 떠나보낸 적이 있는 김홍중이기에.


 몸을 일으킨 순간 일어오는 강한 어지럼증과 눈앞에 보이는 신발장에는 가지런히 남아 있는 박성화의 신발. 그리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김홍중의 불안을 잠재우는 들뜬 목소리.




 “일어났어? 빨리 와 봐, 지금 첫눈 내리고 있어.”




 반사적으로 돌아본 시야에는 박성화의 모습이 가득 차 있었다. 김홍중이 봄을 경외해왔던 것처럼 겨울을 경외하던 박성화의 밝은 미소.


 박성화의 옆으로 다가가 바라본 바깥 풍경은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눈이 내린 지 꽤나 시간이 지난 듯싶었다. 박성화는 새벽부터 잠도 안 자고 창문 너머로 내리는 눈만 이렇게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을 생각을 하니… 그 상상되는 모습이 또 웃기고 귀엽기도 했다. 사랑이 참 무섭고 신기하고.


 첫사랑은 원래 안 이루어지는 거라던데


 나는 네가 첫사랑인데 그럼에도 널 보고 있으면 뭐라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아지고




 “홍중아, 우리 오늘 옷 사러 가기로 한 거… 내일 가면 안 돼? 아니면 오후에 가자.”


 “왜?”


 “눈 내릴 때 나가서 놀아보고 싶었어.”


 “……너 혹시 눈 처음 봐?”


 “응…….”




 김홍중은 잠시 동안 얼빠져있다가도 바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게 말이 되는 건가…싶기도 한데 방금 막 자다 일어난 직후인지라 머리가 잘 돌아가지도 않고. 그냥 박성화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거겠지 뭐. 김홍중은 창문 앞에서 자리를 떴다. 밥은 먹고 나가는 거지? 그 질문에 박성화는 웃는 얼굴로 응응, 대답했다. 나갈 준비나 해 그럼. 김홍중도 웃음기 도는 목소리로 받아쳤다.


 하루아침에 잔뜩 추워진 날씨에 손은 꽁꽁 언 것만 같고 코끝이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시렸다. 서서히 몸이 얼어오는 것 같으면서도 숨 한 번 크게 들이마시면 그대로 폐부가 순식간에 얼음으로 가득 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맑게 뛰어다니고 있는 박성화 모습을 보자니 괜히 마음 한구석은 따뜻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냥 미소만 나왔다. 넌 춥지도 않냐, 묻기엔 분명 박성화의 입에서도 입김이 폴폴 나오는데.


 박성화는 아무도 밟지 않고 소복하게 쌓인 흰 눈 위를 이리저리 걸어도 보고, 도화지 같은 눈 위에 이것저것 글씨를 써보기도 하고, 내친김에 그림까지 그려보겠답시고 열심히 팔을 움직이다가 이게 아니라며 발로 슥슥 눈을 어질러 보기도 했다. 눈을 동그랗게 뭉쳐서 단단하게 굳혀도 보고, 종국에는 깨끗한 눈밭에 그대로 드러누워 팔다리를 열심히 휘젓기도 했다. 김홍중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어린이 하나 어르고 달래는 보호자처럼.




 “홍중아.”


 “응.”


 “있잖아…”


 “불안하게 말 늘이지 말고 빨리 말해.”


 “이거 눈 먹어봐도 되는 거야?”


 “……안 돼.”




 단호한 대답에 힝… 소리나 내고 있는 박성화를 보자 하니 지금 제 신세가 어린이 하나 어르고 달래는 보호자가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계절 하나에 사람이 이렇게나 바뀌었다 싶은 건 일생에 해야 할 일을 다 이루고 심심해졌던 참인 김홍중에게 참 기막힌 연구 소재였다. 애초에 사람이 아닌 건 조금 흠이긴 하지만…….








 다가온 여행 날에는 각자 본인의 스타일대로 옷을 입을 수 있는 게 참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기분 좋게 가는 여행에 입고 싶은 옷도 못 입고 입술 댓발 나와서 시무룩해진 박성화의 모습을 볼 뻔했으니. 그런 와중에 또 그런 모습조차도 제법 웃기고 귀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게 참 사랑을 하면 사람이 미치는구나 콩깍지가 장난이 없구나 싶었다.


 기차표 두 장을 나란히 들고서 가는 길이 설렘으로 가득 찼다. 박성화가 했던 말과 어제저녁 뉴스 일기예보에서 들은 말이 자꾸만 생경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일 가능성이 엄청 높대. 기상청에서는 이번 성탄절이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가능성을 무려 95% 이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기대와는 달리 출발하는 길의 하늘은 구름마저 한 점 없이 너무나 맑았지만 아직 크리스마스까지는 그래도 하루 남은 거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무조건 볼 수 있겠지, 눈….


 박성화는 은근슬쩍 김홍중의 손을 잡아 왔다. 김홍중도 그게 싫지는 않아서 그대로 손을 감싸 맞잡았다. 마주쳐오는 시선도 굳이 피하지 않았다. 박성화는 늘 김홍중만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한결같이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그 얼굴이 너무 눈에 익어버려서 이제는 박성화의 다른 표정은 기억도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 봄날의 어느 하루 박성화를 처음 만났던 날. 그때 짓고 있던 박성화의 눈물 맺힌 듯한 그 표정도 이제는 김홍중의 머릿속에서는 가물가물해진 지 오래였다.


 기차에 몸을 싣고서 김홍중은 거의 바로 곯아떨어졌다. 빨리 도착해서 이른 시간부터 여행을 즐기고 싶다는 박성화의 말에 김홍중은 무리해서 새벽 시간에 깨어났었으니 당연한 일일만도 했다. 그래도 기차에서도 최대한이면 안 자보려고 하기는 했는데. 출발하고서 첫 몇 분이나 첫 기차 탑승이라는 설렘에 부풀어서 신기하고 그러지, 조금 지나니까 어차피 빠르게 지나는 풍경과 반복되는 차체의 덜컹임에 질려 졸음이 솔솔 밀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깨우는 목소리에 서서히 눈을 떴을 땐. 바로 앞에는 박성화가 김홍중을 바라보고 있었고.


 김홍중은 눈이 마주쳐오자 순간 박성화의 다정한 미소가 낯빛에서 잠시 사라지는 것을 목도했다.




 “왜 그래?”


 “우리 이제 곧 내려야 해, 홍중아.”


 “아니, 너……”




 얼굴이 왜 그러냐고 물으려다가. 김홍중은 그냥 시선을 피했다. 어어, 일어나야지. 주섬주섬 주위를 둘러보며 짐을 다 챙겨 들고 내릴 채비를 마쳤다. 박성화의 표정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분명 처음엔 웃고 있었는데. 그 짧은 순간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아서. 하지만 박성화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척 굴고 있었다. 마치 김홍중이 그 표정을 본 것이 착각이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김홍중은 제 작은 가방 속에 손을 집어넣고 작게 뒤적거리다가. 작은 수첩이 손에 잡히는 감각에 그대로 가방에서 손만 빼냈다.


 김홍중은 기차 내에 울려 퍼지는 안내방송에 따르고. 박성화는 가자 성화야, 하는 김홍중의 목소리에 따랐다. 가뜩이나 한산한 아침 시간대인지라 역전으로 나온 후에는 대충 전광판과 휴대전화 속 지도에만 열중하여 열심히 걸어나갔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올려 주위를 살필 때마다. 드문드문 이곳이 타지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동백섬으로 바로 가는 거야 홍중아? 아니면 해운대?”


 “일단 숙소 가서 짐 좀 놓고……아. 알려줄 거 있는데.”


 “뭔데?”


 “부산에는 눈 안 와.”




 박성화는 입을 떡 벌리고 믿기 싫다는 얼굴을 했다. 근데 일기예보에는 눈 올 확률 95%라고 그랬잖아. 그건 서울 얘기고 부산은 원래 눈 잘 안 와. 서울이라는 말 따로 명시 안 했으니까 전국 기준 아니야? 아니 원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그래. 그럼 진짜로 우리 여행하는 동안 눈 안 와…? 적어도 부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그럴 확률이 무려 95% 이상이라고 장담할게. 이렇게 얼 나간 박성화의 얼굴을 보는 건 또 처음이라 새로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김홍중은 금방 정면으로 고개를 홱 돌려 눈을 피해버렸다.


 그럴 만도 하지, 눈 오는 거 그렇게 기대하고 있던 앤데…그냥 출발하기 전에 알려줄 걸 그랬나. 그래도 얘라면 진짜로 눈이랑 동백꽃 동시에 보러 배 타고 제주도까지 가자고 할 기세라서 그냥 도착하고나서 말한 건데. 아예 발걸음까지 멈춰 세우고 망연자실한 상태로 서 있는 박성화를 억지로 질질 끌고 오며 멋쩍게 웃었다. 야, 미안하다. 근데 짐부터 두러 가자, 무겁다. 질질 끌려오면서도 박성화는 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바다 잘 보이는 풍경으로 에어비앤비에서 그나마 싸게 잡은 숙소에 짐을 풀고서야 김홍중은 다시 편하게 거실 소파에 드러눕듯이 앉았다. 내내 삐치기라도 한 듯 말 한 마디 없이 조용하던 박성화도 이제서야 드디어 입을 열었다. 왜 안 알려줬어. 그 한 마디까지에도 정말로 서러움이 팍팍 묻어 있어서 차마 김홍중도 그 면전에 대고 곧이 곧대로 사실을 일러바칠 수가 없었다. 그 얼굴을 빤히 보다가.




 “……나도 부산 처음 와 보는 거라 깜빡했어.”


 “거짓말…….”


 “진짠데. 부산 처음 와 봐. 그래도 눈 때문에 여행 제대로 못 즐기는 것보단 낫잖아, 눈은 집 돌아가서도 또 볼 수 있는 거니까.”




 또다시 한참 동안을 말없이 있던 박성화가 작게 꿍얼거렸다. 홍중아 너 포장 진짜 잘 한다…. 그 말에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이 터져버렸다. 박성화는 지금 입술 댓발 내밀고 있는데. 그 오리처럼 쭉 내민 입술 살짝 꼬집었다가 놓아주며 김홍중도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미안. 대신 오늘 저녁에 선물 줄게.








 박성화와 김홍중은 보통 친구들처럼 여행을 즐겼고, 보통 연인들처럼 데이트를 즐겼다. 그냥 친구 사이의 여행이라기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간질거리고 애틋한 느낌인데 그렇다고 또 연인 사이 같다고 하기에는 너무 모호했다. 김홍중은 이 관계가 너무 헷갈렸다. 물론 확실하게 바로잡고 싶다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지금 이대로도 만족스러운데. 좋긴 한데. 그래도 박성화의 알 수 없는 마음이 괜스레 궁금해지고 열어보고 싶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새로 산 필름을 어렵사리 꽂아 넣은 카메라에 박성화의 모습을 열심히 담았다. 더 깊은 애정이 담긴 피사체는 자꾸만 지난 여름보다도 더 화사하고 예뻐진 것만 같다는 착각에 빠져들게 했다. 바다를 배경으로 한 박성화는 또 새로워서. 파도 소리와 카메라 셔터음이 뒤엉키는 동안 내비치는 박성화의 웃음이 너무 예뻐서.


 꽃을 보러 가는 길은 손을 꼭 맞잡고 걸었다. 늘 차갑다고 느꼈던 손이었지만 오늘은 마냥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바깥 공기가 이미 차가워서 그런 건지 이제서야라도 박성화가 봄의 포근함을 되찾은 건지. 꽃 앞에 서 있는 박성화를 볼 때는 하다못해 박성화가 꽃 그 자체인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누가 꽃인지 모르겠네 그런 개쌉소리는 염병 떠는 커플충들이나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런 생각을 내가 하게 될 줄이야.


 박성화는 다행히 그래도 이 여행이 마음에 든 듯했다. 눈에 대한 아쉬움이 사라진 건지 아니면 김홍중이 볼세라 숨기는 건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박성화는 잔뜩 피어 있는 동백꽃 더미에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김홍중도 처음에는 동백꽃을 감상하는 데에 실컷 젖어 있었지만. 그래도 그 감상에서 박성화보다는 분명 빨리 벗어났다.


 처음 동백꽃 얘기를 꺼냈을 때는 김홍중도 잘 몰랐지만 나중에 알아보니 동백꽃은 늦으면 사월 봄까지도 충분히 꽃을 피우고 있는 꽃이라고 그랬다. 그런데 왜 박성화는 동백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을까. 그렇게 오래오래 살아왔다고 말했으면서.


 사계는 연쇄적인데 뚝 끊긴 듯한 기분이 들어. 겨울 다음은 다시 돌아 봄인데 그런데도 봄과 겨울은 멀어 보여.


 박성화가 언젠가 했던 말을 대강 곱씹어본다. 박성화에게 겨울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 그냥 손이나 뻗어 박성화를 붙잡았다. 김홍중의 머릿속에 한가득 들어찬 물음표 더미들을 유일하게 해결해줄 수 있는 박성화. 박성화는 눈이 마주치자 또 잠깐 슬픈 표정을 지었다. 김홍중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하나 더 늘어났다.




 겨울의 흠은 해가 빨리 지는 것이었다. 빠르게 찾아온 어둠을 나란히 걸으며 양손에는 음식이 가득 담긴 비닐봉지들을 들고 있었다. 야 성화야, 이거 진짜로 다 먹을 수 있는 거냐. 당연하지 홍중아 나 오늘 하루 종일 계속 걸어 다녔더니 지금 배가 너무 고파 그냥 앞에 있는 모든 것들 다 집어삼킬 수도 있을 것 같아 지금…. 그렇다고 나까지 먹진 말고. 아니 그것도 당연하지 홍중아……. 벽돌로 잘 발라져 있는 길을 놔두고 굳이 굳이 바다 앞 모래사장 위를 천천히 걸어 나가며 그런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숙소 앞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창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른 저녁 식사를 했다. 저녁 다 먹고 소화되고 나면 자기 전에 겨울 밤바다에 한 번 나가보자고 했다. 박성화는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바다 앞에 나가서 박성화에게 고백을 할 것도 아닌데 자꾸만 심장이 쿵쿵거렸다. 살면서 긴장 같은 거 쉽게 해 본 적도 없는데 음식이 손에 잡히지도 않을 정도길래 그냥 한두 입 먹고서 젓가락도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홍중아 너 어디 아파…? 걱정스럽게 묻는 박성화를 보며 그냥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저녁 식사 흔적을 다 치워내고 박성화는 소파 위에, 김홍중은 소파 다리를 등받이 삼아 거실 바닥에 앉고서 넷플릭스를 보았다. 그냥 요새 유명하다는 딱히 길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짧지도 않은 영화 한 편을 틀어놓고 있었는데. 김홍중의 머릿속에는 그 내용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정신 차리고 보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제서야 박성화의 눈치를 살피니 박성화도 그다지 영화를 재미있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전에 보니 스타워즈 같은 거에 눈 반짝이던데 그런 거나 하나 틀어줄 걸 그랬나 후회하며 텔레비전 전원을 꺼버렸다.




 “바다 앞에 나가보자.”


 “나가는 김에 편의점 들러도 돼?”


 “…그래라.”




 김홍중은 일부러 조금 박성화보다 앞장서서 걸었다. 홍중아 같이 가…그런 말이 들릴 때마다 슬쩍슬쩍 뒤 돌아보며 조금씩 발을 맞추기는 했지만. 그러다 보니 딱 박성화가 왜 혼자 가냐고 삐쳐서 투덜거리지 않을 정도로만 앞장섰다. 차가운 바다내음을 힘껏 들이마시는데 갑자기 숨이 턱 막혀오는 듯한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에 김홍중은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가. 침착하게 심호흡과 함께 길고 더운 숨을 뱉었다.


 바다 바로 앞 모래사장에 나란히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다가 힐끔 박성화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바다를 보던 박성화의 시선도 그대로 김홍중을 따라왔다. 김홍중은 몇 날 며칠을 혼자서 속으로 열심히 준비해오던 말을 천천히 꺼냈다.




 “나 가사 다 썼어. 처음에 약속했던 거.”




 아무래도 동그란 박성화의 눈이 더 동그랗게 떠졌다가. 박성화의 두 뺨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추워서인지 김홍중이 꺼낸 말 때문인지 알지도 못한 채로. 박성화는 말없이 김홍중을 바라보기만 했다. 박성화 입에서 나올 대답을 기다리다가는 지독한 낭만주의자답게 준비한 이벤트 타이밍도 놓치고 다 말아먹을 것 같아서 김홍중은 그냥 말을 계속 이어갔다.




 “사실 완성된 지 한 달 정도 됐는데 너 떠날까 봐 일부러 비밀로 숨기고 있었어. …그러니까 안 떠난다고 약속하면 지금 불러줄게. 네가 먼저 듣고 싶어 했었잖아.”


 “지금 들려줄 수 있어? 듣고 싶어.”




 박성화의 얼굴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 주변 눈치를 주욱 살피고는 알겠다는 대답 대신 괜히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주변에 사람이 적은 이유는 다들 크리스마스를 즐기겠다고 바다가 아닌 트리 앞으로 사라져서일지 아니면 이곳에 나올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없어서인지… 일단 사람이 없는 건 다행이었으나 그 이유는 전자라고 믿고 싶었다.


 누굴 위한 곡을 쓴 것도 누군가를 위한 노래를 부르는 것도 김홍중에게는 죄다 처음이었다. 물론 박성화도 본인을 위해 쓰여진 가사를 듣는 게 처음일 테지만. 아마도. 그냥 그랬으면 하며 홀로 믿어보는 바람이다. 혼자 처음을 내어주는 건 싫으니까.


 휴대전화에 남겨둔 음악에 박성화만을 위해 쓰여진 가사를 덧붙여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위에 파도 소리가 덧입혀졌다. 김홍중의 마음만큼은 너무도 뜨거운 게 겨울이 아닌 시린 여름에 갇힌 것 같기도 했다.


 나름 담백하게 써본다고 노력은 했는데. 이제 박성화를 떠올리면 이루는 단어들이 다 사랑스러운 것들뿐이라서. 흡사 사랑 고백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노래를 끝마치고 나니 하루가 지나 있었다. 김홍중은 괜히 박성화의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메리 크리스마스, 읊조렸다. 시린 여름의 성탄절은 춥고 뜨거웠다.




 “홍중아.”


 “…왜. 노래 어떤데.”


 “좋아. 좋아해.”




 일순 박성화의 목소리와 파도 소리가 김홍중의 귓전에 크게 울려 퍼졌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마주친 박성화의 얼굴에는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고백을 받은 건 난데 왜 네가 고백하면서 울고 있어 미친…당황한 김홍중은 무슨 말도 못 꺼내고 박성화를 달래느라 바빴다. 좋아한다는 말에 심장이 미친 듯이 저려왔다. 감히 박성화에게 그런 말을 들어도 괜찮은지 싶은 마음과 정말 못 들을 것만 같았던, 그러면서도 한 번 정도는 듣고 싶었던 그 말을 박성화의 목소리로 듣는다는 그 기쁨. 김홍중의 혼란이 뒤엉키는 와중 박성화가 서러운 목소리로 말을 더 이어갔다. 그리고 그 말에 김홍중은 가만히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네 눈에서 자꾸만 벚꽃이 보여 홍중아 나 어떡해야 해






















 숙소로는 어떻게 돌아왔고 잠에는 또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냥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땐 이미 폭신한 침대 위였다. 김홍중의 집보다는 아주 조금 더 작은 크기의 방 안에서 홀로 눈을 떴다. 성화야. 눈을 뜨자마자 잔뜩 잠긴 목소리로 박성화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급한 발걸음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방 밖으로 나왔고 거실에는




 “홍중아, 눈 와.”




 커다란 유리창 앞에서 위태롭게 아침의 겨울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박성화가 서 있었다.


 부산에는 눈이 안 내릴 거라고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는데. 기대만큼 눈이 잔뜩 내려서 하얗게 쌓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눈 사이에서 걷기 좋을 정도로 적당히 내리고 있었다. 느리게 추락해서는 소복이 자리 잡기도 전에 녹아 사라지는 눈꽃송이들. 창 너머로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이면 좋았겠지만 그 세상이 김홍중의 눈에는 너무도 분홍빛으로 보였다.


 ……나갈래? 그 제안에 박성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마스 아침의 겨울 바다에는 사람이 없었다. 파도 소리만이 박성화와 김홍중을 반겨주었다. 어느 한 구석 빈 벤치에 나란히 앉아 맞이하는 찬 바람. 김홍중은 은근슬쩍 박성화 쪽으로 몸을 눕혀 기댔다.


 박성화의 말대로 이번 겨울만 넘기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물론 이 겨울이 끝나면 다시 봄이 오겠지만. 차라리 죽더라도 그편이 더 좋았다. 이렇게나 차갑고 시린 황무지에서 눈을 감는 것보다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포근한 곳에서 눈을 감는 것이 덜 괴로울 것만 같았다. 이름 모를 누군가에 의해 치워지는 길거리의 시체 한 구가 되기엔. 그 영혼 빈 몸뚱아리 위에 쌓이는 것이 눈꽃보다는 봄꽃인 편이 더 따뜻할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봄의 지옥이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만큼 김홍중은 그리도 경외하던 봄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박성화 하나 때문에. 김홍중의 봄 하나 때문에. 늘 그래왔듯 분홍색 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신비로운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어쩐지 평소보다 탁해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드는 것은 아마 말 그대로 기분 탓이겠거니 넘겼다.


 김홍중은 따가운 목에 괜히 헛기침만 몇 번 했다. 그 얼굴을 마주 보는 박성화는 흐느껴 울었다. 세상 가장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처음 만났던 날 박성화가 지었던 표정이 다시 생각났다. 금방이라도 툭 치면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던 가녀리고 연약한 낯빛. 그 얼굴이 울음을 터뜨렸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서럽게도 울고 있었겠지 싶다.


 처음으로 무너져 내렸던 김홍중을 붙잡아 끌어올려 주었던 봄의 손이 다시 맞닿는다. 박성화는 김홍중의 손을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기세로 붙잡았다.


 성화야 네가 정말로 그 봄이라면


 내가 경외했고 내가 사랑해버린 그 봄이라면


 짐작하건대 첫사랑에 가슴 아픈 분홍빛이 전염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박성화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


 “엄청 오래전부터.”


 “너는 왜 맨날 추상적으로만 말하는 것 같지.”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안 나니까…….”




 겨울날의 날카로운 벚꽃잎이 숨을 옥죄어 오는 것은 너무도 한순간이었다. 폐부가 마치 벚꽃잎으로 가득 차버리는 듯한 답답하고 숨 막히는 통증. 그 고통이 뭔지도 모를 거면서 박성화는 몇 번이고 그렇게 아파본 적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첫사랑은 원래 안 이루어지는 거라던데


 나는 네가 첫사랑이라 그래서 마음은 통해도 결국 닿을 수만은 없게 되는 건가 봐




 “나도 너 오래전부터 좋아했어. 인정한 지는 아직 얼마 안 되긴 했는데.”


 “언제 인정했는데?”


 “네가 나 보고 친구라고 했을 때쯤부터.”




 그럼에도 네가 내 삶의 이유가 되어버린 만큼 끝까지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늘 봄이 가장 싫었었는데 이제는 봄이 가장 좋은 것 같아. 이제야 봄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증오해버리게 된 그 봄을 나는 사랑하게 되고 말았는데. 이 시린 겨울 얼른 넘기고 너랑 처음 만났던 봄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힘겹게 짜내고.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마지막 말 한 마디는 미처 말하지 못한 채로 김홍중의 팔이 허공으로 떨어져 내렸다. 봄을, 박성화를 많이 사랑하게 되어버렸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감긴 눈앞에는 분홍빛 암흑만이 보였지만 어렴풋이 박성화의 울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울지 말란 말도 전해줘야 했는데. 네가 행복하게 웃는 얼굴이 가장 예쁘다고.


 시린 겨울날의 눈꽃 위여도 이렇게 따스하게 안아주는 게 봄이라면 이 죽음도 달게 안고 가겠다고


 그런 마지막의 마지막 미친 생각을 끝마치며 김홍중의 숨이 멎었다.






















niagarevollauoyfodlohekatlliwisyawlasa


 때를 놓친 사랑은 재앙이라는 말이 있잖아. 다만 우리는 재앙이 아닌 작은 난관에 부딪힌 것뿐이야. 단지 타이밍이 맞지 않았을 뿐이고. 아직 기회가 오지 않았을 뿐이며. 같은 시간 아래 각자의 속도가 달랐을 뿐이란 것을. 나는 알고 있어.


 그러니 다시는 내가 너를 놓치지 않게 네 속도에 발맞춰 걸을게.




 언젠가 한 적 있는 말을 했던 말을 다시 읊조린다. 그런 말을 처음으로 꺼냈던 것이 언제였는지는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아주 먼 과거이자 아주 먼 실패의 언젠가였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한다. 박성화는 숨을 잃은 김홍중의 몸뚱아리를 끌어안고도 한참을 또 눈물로 적셔댔다. 그래도 너와 겨울을 보낸 건 처음이야. 너와 함께 눈을 맞아보고 동백꽃을 눈에 담을 수 있어서 행복했어. 전해지지 않는 수많은 말들을 속으로 삼켜낸다.


 나는 너랑 같이 살아가고 싶어 그거면 돼 그거 아니면 의미 없어. 김홍중의 시리도록 검은 눈을 보며 몇 번이고 했던 말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속삭이며 박성화도 눈을 감았다.








 세상이 무너지고 다시 지어질 때. 시간이 흘러내리고 다시 굳어질 때. 모든 것이 흩어졌다가 처음으로 제자리를 찾아올 때. 멈추었던 시계가 다시 작동할 때.


 또다시, 그러나 새로운 만남을 써 내려간다.




 안녕


 홍중아












 그해 봄은 떨어지는 벚꽃잎 하나까지도 이상한 기시감에 찌들어 있는 그런 묘한 봄이었다.









작가의 말


일 년 간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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