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胡蝶夢 中>, 희재
- 계간 성홍
- 2022년 6월 21일
- 17분 분량
* 아포칼립스
만일 지구가 미쳐버리기라도 해서 우리가 영원한 봄에 갇혀 버리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벚꽃이 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여름 무더위가 온 거리를 덮쳐왔다.
김홍중은 가사가 적힌 종이를 몇 번이고 찢었고 몇 번이고 구겼으며 몇 번이고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박성화가 집 안 구석구석 다 청소하더라도 유일하게 건드리지 못하는 게 그 쓰레기통이었다. 어차피 종이밖에 안 쌓인 쓰레기더미 제가 알아서 깨끗하게 치우고 다 할 테니 건드리지 말라는 집주인 김홍중의 유일한 명령이었다. 오늘도 김홍중은 어김없이 종이를 찢어 구겼고 박성화는 그 옆에서 잘 마른 옷가지들을 깔끔하게 접어 개었다.
아직 얼굴이 낯익지 않은 텔레비전 속 기상 캐스터는 차분하면서도 맑은 목소리로 일주일간의 기상예보를 알려주었다. 분명 시작할 때는 새카만 눈동자였는데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눈동자에 분홍빛이 은은하게 돌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저 사람에게서 날씨 정보를 듣는 것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내일부터는 새로운 사람을 저 자리에서 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예정된 끝을 본의 아니게 봐버리고 난 후면 괜한 찝찝한 마음이 들어 오르는 것이다.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묘한 기분이었다. 저 사람은 나와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상관없는 사람인데. 왜 이런 찝찝한 마음인 걸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김홍중은 괜히 책상 옆에 둔 거울에 시선을 둔다. 거울에 비치는 여전히 새카만 눈동자. 이 암흑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제는 조금 헷갈릴 지경이었다.
“홍중아.”
“왜.”
“배 안 고파?”
“우리 밥 먹은 지 아직 한 시간도 안 지났어.”
자연스럽게 얹혀서 같이 사는 대신 온갖 집안일은 물론이고 김홍중 시다바리까지 군말 없이 능숙하게 들어주는 박성화에게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먹는 걸 좋아해도 너무 좋아한다는 것 정도였다. 지금도 은근슬쩍 또 뭘 입에 집어넣으려고 시동 거는 저 목소리…얼굴은 굳이 안 봐도 뻔했다. 이미 집요한 시선은 느껴지고 있고, 그 시선은 보나 마나 아주 반짝반짝 간절함으로 빛이 나고 있겠지.
정곡을 찌르니 잠시간 정적이 찾아온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도 않아 이 정적이 깨져버릴 것이란 사실을 김홍중은 이미 알고 있다. 오늘은 또 어떤 말로 둘러대며 뱃속에 음식을 쟁여두려는지. 아닌 척하면서도 매일 새로운 그 변명이 기대될 정도였다 이제는.
“그렇긴 한데에. 생각해 보니까 오늘 후식을 깜빡했잖아 우리.”
“어. 알아서 먹고 싶은 걸로 시켜. 배달 오다가 나 잠들면 너 혼자 다 먹어라.”
후식 같은 소리. 박성화 네가 한 번 후식으로 먹는 양이면 나한테는 평소에 먹는 끼니 일 인분 하고도 반은 될 것 같은 양이거든. 그래도 김홍중은 반발 같은 거 일으키진 않았다. 픽 나오는 웃음도 굳이 참지는 않았다. 대답 한마디 던지며 힐끔 바라본 박성화의 얼굴에는 역시나 미소가 활짝 번져 있었다. 그 반짝거리는 웃음이 좋아서 또 아닌 척하면서 한참을 그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들여다보았다.
어떤 냄새와 어떤 어렴풋한 목소리에 눈을 떴던 적이 몇 번 있었던 것도 같다.
오늘은 치킨 냄새네. 언제 감긴 건지도 가늠이 안 가는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생각한다. 홍중아…다정하게 제 이름 부르는 목소리에 잠겨 있던 생각을 깨운다. 뭐 후식 먹는다더니 가벼운 간식도 아니고 치킨은 웬 말이냐 대체. 직접 나가서 사 오는 참인 건지 박성화는 홈웨어가 아닌 외출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배달 속도는 믿을 게 못 된다나 뭐라나. 그 말마따나 더 이상 배달은 수요가 없었다.
언제 어디서 누가 갑자기 쓰러져 죽을지 모르는 마당에 운전은 도로 위 모두의 목숨을 건 복불복 살인 게임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어차피 웨르눔 바이러스 감염으로 죽을 본인 목숨은 모르겠으나 다른 사람에게까지 크게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정부 기관을 제외한 일반인의 차량 운전은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웨르눔 바이러스의 종식 선언이 있을 그 날까지. 처음에는 반발을 일으키는 자도 많았으나 교통사고의 사례가 나날이 늘어나자 반발도 점차 잠잠해지던 참이었다. 덕분에 도로 위는 깨끗해졌다. 퀴퀴한 가스 냄새도 사라졌다. 그것만으로도 공기가 꽤 많이 좋아진 것도 같았다. 그것 하나는 참 마음에 든다는 말을 종종 하고는 했다.
속도가 생명인 배달도 오토바이 사용 금지 앞에서는 그 생명의 불씨를 점점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강제로 뚜벅이 신세가 된 배달원들은 걸음걸이 수고는 수고대로 하고 음식이 다 식었다며 욕은 욕대로 처먹어야 했다. 음식을 들고 배달 가던 도중 길거리에서 호흡곤란을 일으키며 그대로 죽어버린 배달원도 있었고. 이제는 차라리 배달보다 직접 포장이 더 마음 편할 세대가 된 것이었다.
아무튼간에. 박성화도 딱 그런 타입이었다. 물론 배달원에게 화를 낸 적은 없지만… 아니 생각해보면 애초에 박성화가 배달을 시키는 적을 본 적부터가 없었다. 아직 차량 운전이 법적으로 제재되기도 전부터도. 귀찮게 뭐 하러 직접 가냐고 하면 배달비가 아깝다는 이유를 댈 줄 알았는데 혹시 오다가 배달원이 사고라도 날까 불안해서 그렇다는 말만이 돌아왔던 것도 기억이 생생했다. 그때는 웃기는 놈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큰 그림인 것 같기도 하고.
“닭다리만이라도 먹을래?”
“됐어. 너 먹다가 남는 거 있으면 나중에 먹지 뭐. 안 남으면 말고.”
“안 남길 것 같아서 그러는 건데….”
“다 먹어라 그럼.”
정신은 깼어도 몸은 일으키지도 않은 채로 박성화를 바라보았다. 넓지도 않은 탁자 위에 한쪽 볼을 딱 붙이고서 계속 엎드려 있으려니 뒷목이 조금 뻐근하게 아파오는 듯했지만 그래도 김홍중은 그냥 꼼짝도 않고 있었다. 시계방향으로 딱 구십 도 정도 돌아간 시야에 박성화가 가득 들이찼다. 쟨 음식 앞에선 항상 행복하게 웃는 것 같아. 그래도 뭐 행복해서 웃는다는데 그 점이 나쁘지는 않았다.
입 안 가득하게 통째로 치킨 한 조각 밀어 넣고서 현란하고 깔끔하게 뼈를 발굴해내는 박성화가 신기해서 한참을 구경했다. 얜 진짜 강철 위장인가. 밥도 먹었는데 어떻게 저게 저렇게 다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김홍중도 괜히 위장 한 켠이 꾸물꾸물 비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박성화 때문에 없던 식탐 생겼어…속으로 괜히 남 탓하는 생각 한번 짧게 하고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야 나도 조금만 줘 봐. 툴툴거리는 말투로 그리 말하면 박성화는 혼자 먹을 때보다도 더 행복하게 웃어댔다. 김홍중 주려고 닭다리는 안 먹고 남겨두고 있었단다. 내가 뺏어 먹으면 지가 먹을 양만 줄어드는 건데. 하여간 웃기는 자식이었고 알 수 없는 자식이었다.
단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박성화가 정말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뿐이었다. 박성화는 인간을 흉내 내고 있다. 평소에는 티가 안 나는데 아주 때때로, 가끔가다 한 번씩 그게 덜컥 느껴지는 때가 있었다. 박성화가 인간 흉내에 미숙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마 박성화를 처음부터 평범한 인간으로 여기고 대해온 사람이라면 느끼지 못했을 기이한 감정들. 박성화의 존재를 의심하려 들지 않았다면 인지하지도 못했을 증거들. 그런 것들이 김홍중에게 들이닥치는 일이, 그런 감정이 김홍중의 안을 가득 채우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평범한 인간처럼 행동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살아 숨 쉬고 있는데 저 존재가 인간이 아닐 수가 있어. 그 말을 어떻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어버릴 수가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분명했다. 어쩌면 끝까지 믿기 어려웠을지도 모르나 박성화를 믿을 수밖에 없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세 가지였다.
첫 번째로 일단 박성화의 머리색은 변하는 법이 없었다. 이 긴 시간이 지나도록 머리카락에 물들어 있는 색이 빠지지도, 뿌리 부분에 새로운 색이 올라오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그 말인즉슨 저 찬란한 봄을 담은 분홍색이 염색모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루는 무료한 기분에 박성화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꼬아대던 김홍중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넌 날 때부터 머리색이 이랬던 거냐고. 박성화는 응, 이라며 짧게 대답했다. 손으로 이리저리 헝클어놓았던 머리를 멀끔하게 정리해줄 때쯤 뒤늦은 답이 더 들려왔다.
날 때부터라기보다는 기억이 있던 순간부터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고, 그렇긴 하지만 아무튼 항상 머리색이 이런 색이었던 건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왜인지 점점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그게 졸음이 몰려와서 잠겨가는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말을 가만히 듣던 김홍중은 괜히 박성화의 머리카락을 한 가닥 뽑았다. 그래도 이런 고통에는 따끔함을 느끼기는 하는 건지 순간 악 소리를 내며 반응하는 박성화가 웃겼다. 김홍중은 그 얇고 짧은 머리카락으로 괜히 박성화의 팔을 살살 간지럽히며 웃었다.
그때 따끔하게 뽑았던 머리카락 한 가닥이 아마 저 청소기 안에 먼지들과 함께 뒤엉켜 있을 텐데. 이상하게도 김홍중은 단 한 번도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분홍색 머리카락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김홍중의 시커먼 머리카락은 몇 가닥 바닥에 흘려 있는 걸 본 적이 있는데도 박성화의 머리카락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청소는 박성화의 몫이었지만, 집안 살림 정리정돈까지도 전부 박성화의 몫이긴 했지만…어쩌다 한 번 정도는 김홍중이 손수 나서서 청소를 하는 때가 있는데 그때도 역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청소를 하면서 그렇게까지 바닥에 떨어진 작은 먼지나 머리카락에까지 신경을 기울이진 않아서 못 본 것일지도 모르는 법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밝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바닥에 한 가닥씩 떨어져 있으면 한 번 정도는 눈에 들어올 법도 한데 그런 적조차 단 한 번도 없었다. 의심스러울 정도로.
생각해 보면 애초에 박성화의 머리는 지금 저 상태 그대로 변한 적이 없었기도 했다. 이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창궐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이 색 저 색으로 머리 물들이며 꾸며보기 좋아했던 김홍중에게는 조금 부러운 특징이기도 했다. 누구는 탈색에 염색까지 야무지게 해도 머리 몇 번 감으면 기껏 물들인 색 다 빠지는 건 둘째 치고 얼마 지나면 시커멓게 뿌리 부분 자라는 게 그렇게 탈이었는데.
마지막으로 박성화가 정말로 인간은 아니겠거니 확신하게 된 것은 어느 날 밤이었다. 침대도 없는 좁아터진 원룸 방에서는 널찍하게 이불 펴서 같이 잠을 자는 것밖엔 방법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김홍중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박성화가 잠을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박성화를 집으로 들인 첫날 밤에도 김홍중은 긴장이 풀린 탓에 기절하듯 먼저 잠에 들었었고 그 후로도 박성화보다 늦게 잠든 적이 없었다. 그냥 불면증이 있는 놈이다, 하고 쉽게 생각하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기라도 하겠지만. 김홍중이 잠드는 순간까지도 박성화는 항상 아직 잠에 들지 않은 상태였고 김홍중이 눈을 뜨는 순간에도 박성화보다 일찍 일어나게 되는 법이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어쩌다 한 번씩 김홍중이 자다가 뒤척이며 깨도 박성화는 그때마다 잠을 안 자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무서우리만큼.
무엇보다도.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웨르눔 바이러스를 박성화는 종종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는 듯이 굴고는 했다. 웨르눔과 꽃가루가 연관이 있다고 추정하여 정부에서 마스크 착용 방침을 내렸을 때도 박성화는 그 뉴스를 보자마자 별로 효과가 없을 것이라 말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 확신에 차 있어서 단순히 정부 방침에 대한 힐난이라고 여기기도 어려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시간 같은 뉴스 같은 배경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 교체된 앵커는 해당 바이러스와 꽃가루는 크게 연관이 없다는 연구 결과를 떠들어댔다.
김홍중은 확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순 있었다. 박성화가 보통내기 인간일 수가 없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확신했고, 그걸 넘어서 박성화가 그냥 봄의 존재를 타고난 것뿐만 아니라 이 웨르눔 바이러스에 대해서도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더 있을 수도 있다는, 또는 웨르눔 바이러스와 연관된 존재일 지도 모른다는 사실까지.
“…중아. 홍중아!”
“어. 어? 왜.”
“갑자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그래. 치킨 먹다가 멍까지 때리면서….”
“아. 그냥 잠깐 딴생각 좀 하느라.”
그쯤 눈치챘을 땐 웨르눔 바이러스의 감염자 수도 초창기에 비해서는 확실히 차츰 들어가는 추세였다. 이미 돌연사라는 것은 우리 주변에 흔히 일어나는 죽음의 한 종류가 되어버렸고 돌이킬 수 없는 일상이 되어버렸지만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희소식이었다. 사망자 수가 조금씩 줄어들며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땡볕 아래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방울이 조금씩 맺는 여름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원래도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그냥 실내 어디 한 구석에 진득하니 앉아있는 것을 좋아하는 김홍중은 박성화의 말마따나 최대한 주의하기 위해 외출 빈도를 거의 없애다시피 줄인 것에 금방 적응했다. 지금도. 원룸 건물 옥상에 올라가 바깥바람 좀 쐬며 적적하게 좁은 공간을 빙글빙글 걸어대는 산책을 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집 밖으로 멀리 나갔던 게 벌써 얼마나 되었더라. 어림잡아 이주일 남짓은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이 주 동안 한 번도 집 밖을 안 나가나 싶으면서도 의외로 쉽게 되는 게 또 어이없으면서도 신기하고 웃겼다.
일단 봄은 지났으니까 한고비는 넘겼다고 봐도 괜찮을 거야, 근데 그렇다고 해서 절대로 방심하면 안 돼. 알겠지, 홍중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박성화는 그 특유의 다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었다. 그 다정한 목소리가 마냥 잔잔한 목소리인 건 아니었는데, 또. 그렇다고 방정맞은 건 더더욱 아니고. 아무튼간에 박성화가 그렇게 말하면 김홍중은 또 이상하게 그 언제보다도 마음이 놓였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그 어떤 속보보다도,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그 어떤 기사보다도. 언론이 아무리 연구 결과를 들고서 논리적으로 떠들어대고 있어도 이상하게 김홍중에게는 증거 하나 없으면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박성화가 더 믿음직스러웠다.
그 말을 떠올리다 보니 문득 김홍중은 궁금해지는 것이다. 눈앞에 있는 봄이라는 자가
“그러고 보니까 봄은 다 지났는데 왜 너는 안 사라져? 너 봄이잖아.”
봄이라는 계절이 지나도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유에 관해서.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의문을 던지고는 김홍중은 후회되는 마음에 눈을 도륵 굴렸다. 한참 동안 박성화의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야 내가 괜한 말을 했다 미안하다 그냥 무시해라…뒤늦게라도 그런 말을 덧붙이려던 찰나에서야 박성화는 작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반응을 보였다. 그러겡. 오히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애교 섞인 말투로 짧게 답하며 손에 들고 있던 치킨을 이어서 먹기 시작했다. 박성화는, 그러니까 이 봄은…참 알다가도 모르겠는 어려운 존재인 듯싶었다.
“홍중아. 치킨 사 오는 길에 봤는데 이제 길에 벚꽃은 하나도 없고 장미 피고 있는 거 알아? 내일 해 뜨면 오랜만에 같이 산책 나갈래?”
봄이 전하는 여름 소식에 김홍중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먹는 내내 창문을 살짝 열어두고 있었는데도 치킨 냄새가 아직 덜 빠져서 그런지 누워 있는 방 안에 치킨 냄새가 아직도 은은하게 퍼져 있었다. 향기를 육안으로 볼 수 있었더라면 지금 천장 위에는 치킨 닭다리가 서너 개 정도 둥둥 떠다니고 있을 게 분명했다.
박성화는 옆에서 숨만 색색 내쉬며 얌전히 누워 있었다. 슬쩍 보니 눈은 감고 있기는 했으나 누가 봐도 안 자고 있는 꼬락서니였다. 이미 눈치챈 사실이기는 해도 아예 잠을 자지 않는 생명체라니. 분명 가만 보면 숨도 제대로 쉬고 있고 음식도 잘만 먹고 그러는데. 보통 인간과 다를 것 하나 없어 보이는데도 이상하게 잠은 안 잔다는 게 참 신기했다. 그러면서도 잠자는 척 흉내는 내보려고 하는 게 조금 웃기기도 하고. 어쩌면 음식을 먹는 것도 단순히 인간을 흉내 내려는 박성화의 노력은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살짝 들었다. 근데 그렇게 잘 먹는 걸 보면 단순히 흉내 내겠답시고 억지로 먹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어려운 자식.
야 박성화 너 안 자지. 응 아직 안 자. 늘 그래왔듯 김홍중이 대뜸 말을 걸면 박성화는 곧바로 답했다. 아직이 아니라 아예 안 자는 거면서…. 그래도 이런 모습을 보면 또 김홍중 보란 듯이 자는 척을 하려는 것 같지는 않기도 했다. 정말 김홍중 앞에서 자는 척을 하고 싶었더라면 끝까지 입 꾹 다물고 못 들은 척 대답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박성화는 김홍중의 부름을 무시하는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너 막 보통 인간 아니라서 귀신이랍시고 카메라로 찍으면 안 나오고 그런 거 아니지.”
“응. 사진 찍으면 잘 나와….”
“옛날에 자주 들고 다니던 필름 카메라 있는데 내일 나가는 김에 오랜만에 꺼내 볼까 하고.”
“나 찍어주게?”
“그래. 장미 배경으로 찍어줄게.”
문득 박성화가 한 적 있는 말이 떠올라서 홧김에 그런 일방적인 약속을 내질렀다. 네가 여름으로 같이 가달라고 그랬었잖아. 쓸데없이 애틋함 한껏 장착하고서 거절도 못 하게……딱히 거절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긴 하지만. 괜히 헛기침하며 자세를 고쳐 누웠다. 박성화에게 얼굴 조금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완전히 등져 누웠다. 박성화는 좋다며 말을 웅얼거려댔다.
“보통 그 계절 하면 많이들 떠올리는 대표적인 꽃이 있잖아. 봄 하면 벚꽃, 여름 하면 장미……. 그리고 가을은,”
“코스모스?”
“국화…”
“아…국화가 가을 꽃이야? 사시사철 익숙해서 몰랐네.”
“코스모스도 유명하기는 하지. 근데 겨울은 무슨 꽃이 대표적인지 잘 모르겠어.”
“겨울은 뭐…동백꽃 아닌가?”
그 후로 박성화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한순간에 정적이 일고 좁아터진 방 안에서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미세하게 달달 들려왔다. 아직 그 정도로 더운 한여름은 되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왜인지 창밖에서는 새벽의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속삭이듯 박성화가 말했다. 나 살면서 동백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사계는 연쇄적인데 뚝 끊긴 듯한 기분이 들어. 필름이 아무리 동그랗게 잘 말려 있어도 그 끝과 끝은 존재하듯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말하잖아 사람들은. 겨울 다음은 다시 돌아 봄인데 그런데도 봄과 겨울은 멀어 보여.
뒤만 돌아보면 바로 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안 보이고
겨울의 끝에 닿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안 잡히고
나한테도 겨울이 그런 존재야…….
박성화는 그렇게 말하며 말을 줄였다. 마지막 한 마디는 동백꽃이 보고 싶어, 여덟 글자로 마무리 지어졌다. 내일은 동백이 아닌 장미를 보러 가기로 약속했으면서.
분명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외출을 했던 이 주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거리가 푸른 녹색으로 물들진 않았던 것 같은데. 짧은 시간 사이에 길거리 곳곳은 계절의 변화를 몸소 보이며 탈바꿈을 했고 날씨 역시도 이제 진정한 여름임을 알리기 시작하는 참이었다. 길거리를 걷는 내내 박성화는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다정하게 김홍중과 발을 맞추어 걸었다.
발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걷고 있으면서도 골목길마다 가시덩굴을 길게 늘어뜨리고 새빨갛게 피어있는 장미꽃을 반쯤 넋 놓고 바라보았다. 어젯밤 잠들기 직전 박성화가 해주었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저만치서 박성화의 시선이 느껴지던 때에 박성화가 서 있었던 자리. 박성화에게 신고 안 하고 그냥 넘어가는 걸 감사히 여기라며 짜증을 퍼부었던 골목. 그때는 봄날의 밤이었고, 지금은 초여름의 낮. 사뭇 다른 분위기의 길을 걸으며 생각한다. 처음 만났던 그 날에는 늘 박성화가 김홍중의 뒤꽁무니를 천천히 따라왔었는데. 이제는 같은 속도로 함께 걷는 것이 익숙하단 사실이 조금은 신기하게 와닿았다.
그렇게 계속 걷고 또 걷다 보면 김홍중의 작업실이었던 건물이 나왔다. 박성화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만 같은 얼굴로 김홍중을 바라보던 그 건물 앞 골목길. 건물에 큰 불길이 일고 나서는 다시 올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오랜만에 찾은 공간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분위기였다.
일 층에는 새로운 식당이 들어섰는데, 김홍중이 작업실로 사용하던 이 층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는 불 꺼진 실내가 보였고 허허벌판인 내부가 살짝 비쳐 보였다. 건물 계단 입구에는 임대 문의 네 글자와 함께 낯선 연락처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절차야 어떻게 밟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새로운 건물주의 전화번호인 모양이었다.
더 이상 죽은 형의 건물도 김홍중의 공간도 아니게 되어버린 곳. 그곳에서 김홍중은 발걸음을 멈추어 세웠다. 박성화 역시 당연하다는 듯 그 옆에서 동시에 발을 멈추었다.
그런데 있잖아. 성화야, 너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물어야 할 것 같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구체화 되지를 않아 말을 섣불리 못 했다. 웨르눔 바이러스가 창궐한 이후로 김홍중은 묘하게 늘 어디 한 군데가 망가진 사람처럼 또는 어디 한 군데 나사가 빠진 사람처럼 삐거덕거리기 마련이었는데 그 한 군데가 오늘은 목청이었나 보다. 그냥 이유도 없이 그대로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물끄러미 박성화를 바라보고 있자 박성화는 고개까지 갸웃거리며 눈을 깜박거렸다. 무슨 할 말이 있냐는 듯이. 그 시선을 피하고 다시 건물을 바라보면 그때는 또 박성화도 바로 옆에서 고개를 돌리며 건물에 시선을 두었다. 그냥 서로 아무 말도 없이 그러고 있는 게 몇 분 동안은 계속 반복되고 또 반복됐다. 쨍한 햇빛 받고 은근하게 땀 송골송골 맺히는 와중에도 그런 건 신경 쓸 겨를도 신경 쓸 생각도 없다는 사람들처럼.
박성화에게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걸 포기하니 갑자기 마법이 풀리기라도 한 양 말문이 탁 풀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입 밖으로 무슨 말이든 뭐든 내뱉을 수 있을 것 같아지자 김홍중은 그냥 건물 바라보며 한숨이나 한번 쉬었다. 다 불타서 사라졌는데 저 작은 공간 하나에 두고 온 추억은 불타지도 않고 계속 남아 있어서.
“홍중아.”
“…뭐. 여기 들어가서 뭐 먹고 들어가자고 하면 지금부터 집 갈 때까지 너 없는 사람 취급할 거다. 우리 방금 집에서 점심 먹고서 바로 나왔…”
“가자.”
“…….”
“여기 오래 있어봤자 좋을 거 없잖아…, 그러니까 이제 가던 길 계속 가자. 나 장미꽃 예쁘게 피어 있는 데 알아. 거기서 사진 찍어주라.”
박성화는 인간도 아닌 주제에 인간보다도 마음이 깊었다. 다른 추억 다 이 건물에 묶어둬서 못 안고 나왔어도 유일하게 안고 나올 수 있었던 추억이 박성화 하나였다. 박성화를 만난 날이 곧바로 이 건물과 인사 한번 없이 작별해야 했던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은 조금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손을 붙잡고서 질질 끌고 가는 와중에도 잡는 손길부터 걷는 발길까지 전부 다정했다. 그게 막 두근두근 떨린다거나 심장 간지럽다 그렇게 다가오는 다정함은 아니고. 그냥 어떤 이의 선천적인 다정함에 그냥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안하게 놓이는 것 같기도 한 그런 느낌이었다.
맞다 홍중아 근데 집에 선풍기 있어? 에어컨 틀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이제 좀 덥기는 해서 선풍기 틀어야 할 것 같은데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박성화는 쉴 새도 없이 주절주절 말을 해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오늘 정말 말 한마디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말수가 많아지는 걸 보니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싶기라도 하나 보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박성화가 좀 귀엽고 웃기기도 해서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그냥 잡다한 생각은 다 접어두고 박성화와 보내는 지금 이 시간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박성화가 데리고 온 골목은 김홍중에게도 낯설지는 않은 곳이었다. 작업실로 쓸 방을 얻고서 초창기엔 신이 난다고 여기저기 그냥 정처 없이 걸어보았던 기억이 남아 있어서. 그때는 아직 필름 카메라로 사진 찍기 같은 취미는 없어서 그랬나 풍경을 유심히 살펴보진 않았던 모양이다. 또는 그때가 여름이 아니었어서 이 풍경을 볼 수 없었던 것이거나.
박성화의 말마따나 가지런하게 쌓인 적갈색 벽돌 담장에 과하지 않게 피어 내려온 장미꽃이 정말 예뻤다. 그 낮은 담장 뒤로 보이는 하늘도 푸르고, 그 하늘 위에 둥실 떠 있는 구름도 그림처럼 예쁘고….
그 배경으로 서 있는 박성화도. 문득 이 모든 배경에 분홍빛은 단 하나도 없는데 유일하게 분홍빛인 박성화가 눈에 너무 띄었다. 세상의 모든 분홍을 박성화가 다 집어삼킨 듯이 홀로 가운데서 두드러졌다. 붉은 장미보다도 더.
눈이 마주치자 예쁘지, 하고 묻는 목소리가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응. 짧게 대답했다. 예쁘다는 질문과 그렇다는 대답에 주어가 없었다. 하늘이 예쁜 건지 장미가 예쁜 건지 이곳 풍경이 예쁜 건지 아니면 박성화가 예쁜 건지. 김홍중은 작게 담장 앞을 향해 턱짓하며 목에 걸고 있던 카메라를 손에 들었다.
“야. 가서 서 봐. 찍어줄게.”
“너는 안 찍어도 돼?”
“너 먼저 찍고. 다음에 찍어줘 그럼.”
이내 알았다는 듯 담장 앞으로 가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는 박성화를 김홍중은 렌즈 너머로 바라보았다. 딱히 사진 찍혀본 경험이 없을 것 같아서 포즈에 대해 물으면 어떻게 하나 조금 고민했는데 그런 것 치고는 오히려 박성화는 익숙하게 포즈를 취했다.
김홍중은 필름을 아끼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계속 박성화를 사진 속에 담았다. 처음 몇 장은 잘 찍었는지 바로 확인할 수가 없고 이 순간은 오늘뿐이니까 혹시 몰라 보험용으로 여러 장 찍어두는 것이라는 핑계로, 얼마 지나고 나서는 어차피 언제 또 나와서 이렇게 거리를 걸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나온 김에 남은 몇 장 남았는지도 기억 안 나는 필름 한 통 다 쓰고 들어가겠다는 말로.
그래 놓고 박성화가 찍은 김홍중 사진은 고작 세 장이었다. 김홍중이 계속 잔소리나 해댔다. 자기 사진은 별로 필요 없으니까 그냥 조금만 찍고 끝내라고 계속 종용이나 하고. 박성화 입술이 살짝 튀어나오는 걸 보니 조금 삐치려고도 한 것 같긴 했는데 그냥 못 본 척 모르는 척하고 넘겼다.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박성화가 세 번째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을 때는 요란하게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화들짝 놀라는 박성화를 보며 김홍중은 열심히 웃어댔다. 바보야. 어차피 이제 필름 다 써서 사진 더 찍지도 못해. 그 말에 박성화는 보란 듯이 울상을 지었는데 그 얼굴이 좀 귀엽기도 했다.
해 긴 거 보니 여름이 맞긴 한가 보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제야 슬슬 해가 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박성화는 따라서 하늘을 바라보더니 그만 집에 가자고 했다. 이상하게도 오늘 하루는 평화로워도 너무 평화로운 듯싶었다. 박성화와 김홍중 둘뿐만 아니라 그냥 쉬지 않고 돌아가는 이 세상 자체가 하루 동안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이렇게 날씨가 좋으면 사람이 좀 나와서 걸을 만도 한데 딱히 길거리에 사람도 많이 없었고. 그중에서도 정말로 갑자기 쓰러져 죽거나 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그냥 정말 웨르눔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의 세상으로 돌아가 단순히 사람 별로 없고 한적한 동네를 거닐었던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좀 많이 걸었더니 피곤하네.”
“그러게. 집 가서 푹 쉬자.”
“그러게는 뭔 그러게야. 넌 자주 나가잖아 그래도. 어제도 나갔다 들어왔으면서 무슨….”
그런 사소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걷고 또 걸었다. 아까 걸어왔던 풍경이 역순으로 시야 앞을 지나갔다. 또다시, 박성화와 김홍중이 처음 만났던 건물 앞, 쓰러졌던 김홍중이 눈을 떴던 응급실로 가는 방향의 골목, 박성화가 김홍중을 졸졸 따라왔던 그 골목길…
김홍중이 멈추어 서서 박성화에게 화를 냈던 골목 그 자리.
그곳에서 박성화는 대뜸 발걸음을 멈추더니 김홍중을 불러 세웠다.
“홍중아. 네가 나 보고 안 나갈 거냐고 했을 때 못 나가겠다고 하면서 말했던 이유 기억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김홍중은 눈만 끔뻑였다. 그때 박성화가 했던 그 말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홍중아. 나 너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느낀 건데. 너 진짜 금방이라도 쓰러져서 죽을 사람 같아서 네 옆에서 못 벗어나겠어. 정확하게, 정말 정확하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이렇게 말했었다. 그때 말한 쓰러져 죽는다는 의미가 스스로 숨을 끊어내리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뜻이었다는 것도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아직도 그때 그 목소리가 귀에서 맴도는 것 같단 착각에 빠지고는 한다. 지금도. 당장 눈앞의 박성화와 봄날의 박성화의 목소리가 교차하여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 때쯤 김홍중은 겨우 목구멍 너머로 제 목소리 끌어내며 정신을 차렸다.
“어. 그걸 어떻게 기억 못 하겠냐.”
“네가 금방이라도 쓰러져 죽을 사람처럼 굴어서 못 떠나겠다고 그랬었잖아 내가.”
“응.”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았냐면. ……나도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어. 그래서 알았어. 너한테서 그런 게 느껴졌어, 그냥 뭔가가. 가끔은 증거가 없어도 직감을 믿으라 할 때가 있잖아.”
박성화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김홍중을 혼란에 빠트렸다. 푸른 하늘과 완전히 덥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후덥지근한 공기, 그리고 몇 밤만 더 지나면 들려올 새벽의 풀벌레 소리와 나무 사이사이의 시끄러운 매미 소리… 뻔한 한여름의 시작에 박성화는 자꾸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도 잘 안 잡히는 그런 말을 해댔다.
분명 각자의 자리에서 그리고 다른 이유에서 든 충동적인 생각이었을 테지만. 김홍중은 김홍중의 고유한 삶만을 살아왔기에, 박성화의 아픔을 모르기 때문에. 네가 무슨 이유가 있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건지 모르겠어….
언제 한 번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자살을 하는 것은 인간뿐만이 아니라고. 동물도 자살을 하고 식물도 자살을 하고. 그 생명체를 구성하는 세포도 자살을 한다고. 밤하늘에 수 놓여 밤을 밝히는 별도 자살을 한다고. 그것도 제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을 뿜어내고 자살한다고.
봄도 자살을 꿈꾼 적이 있구나.
봄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구나.
네가 말하는 그 다 지나간 것 같은 아팠던 과거 이야기가 왜 나는 지금에서야 아프게 다가오는 걸까. 김홍중의 눈썹이 잘게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는 일부러 내지 않았다. 담담하게 제 흉터를 드러내는 이 앞에서 그 흉터에 다시 칼 들고 후벼파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아서.
“네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언제.”
“응…아주 먼 옛날이었을 거야. 그게 언제인지도 그때가 몇 번째 봄이었는지도 잘 기억 안 나.”
“왜 죽고 싶었는지는 기억나고?”
박성화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괜한 걸 물어봤다는 후회가 들 때쯤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한숨을 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은 심호흡을 하는 듯한. 제 마음을 가라앉히는 듯한 작은 숨이었다. 이내 박성화는 웃으며 잔잔한 말을 내던졌다.
“글쎄. 그냥…좀 지치고 힘들어서?”
김홍중은 박성화가 어떤 세상을 지내왔는지 모른다. 박성화가 김홍중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모르는 것처럼. 그 봄날에 우리가 마주치기 전까지는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사이에 불과했을 것이고, 그렇기에 서로의 과거는 알 턱이 없으니까.
그래서 더 궁금했었다. 너는 왜 나랑 살아가고 싶어 해? 너는 어떻게 나를 알았고 나를 구해준 거고 나랑 함께하고 싶어 해? 왜 나야? 너는 정확히 누구인 거고 네게 있어서의 나는 정확히 뭐인 거야? 차마 목구멍 너머로 내뱉어 묻지 못했던 수많은 질문들이 김홍중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 해답을 어쩌면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나는 그냥 봄이 연민한 존재였구나.
조금은 헛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뭔 기대라도 품고 있었던 사람처럼, 특별한 의미라도 바라고 있었던 사람처럼…박성화는 이 악독한 삶에서도 살아갈 것이라고 수차례 말했었다. 김홍중과 함께. 이제 박성화에게 있어 김홍중은 반드시 옆에 있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고 김홍중에게도 어느 정도 그런 듯했다.
너는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고 그 옆에는 내가 필요하다는 듯이 말했었잖아. 그 필요에 잠깐 동안만이라도 기분만 맞춰주듯 응해주려고 한 건데 어쩌다 보니 나도 네가 필요해진 것뿐이야. 그래서 나는 네가 조금 특별한 것 같아.
그런데 박성화 너는 아무 의미 없이 혹시라도 단순한 연민 그 뿐에서 나를 구제해주고 싶었던 거라면
“죽고 싶다는 생각 아직도 해 홍중아?”
“…아니.”
누군가의 연민으로 이 좆같은 세상에서 어떻게든 몸부림치며 더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 연민은 초라한 것일까 아름다운 것일까. 어쩌면 초라하다는 형용사와 아름답다는 형용사가 함께 쓰일 수도 있는 것일까.
그거면 충분하다고 말하며 웃는 박성화의 얼굴이 예쁘니 이는 아름다운 연민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잠이 오질 않아 한참을 뜬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았다. 이럴 때마다 은근슬쩍 박성화에게 말을 걸면 박성화는 늘 조금의 틈도 없이 대답해주는데. 아마 오늘도 말을 걸면 똑같을 것이다. 그래도 왜인지 오늘은 더 이상 말을 걸고 싶지가 않았다. 박성화와 대화를 섞는 것이 싫은 게 아니라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는 천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마음속으로 정리나 하고 있는 찰나. 홍중아… 하는 작은 부름이 들려왔다. 틀림없는 박성화의 목소리. 순간 헛것을 듣기라도 한 줄 알았다. 이렇게 둘이서 자기 위해 모든 불을 끄고 누워 있을 때면 박성화가 여태까지 먼저 김홍중을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괜히 바보 같은 투로 어…? 그런 소리나 냈다. 그 소리에 박성화는 작게 웃음소리나 흘리더니 나긋하게 말을 꺼냈다.
“어제 그런 거 물어봤었잖아. 봄은 지났는데 나는 왜 계속 네 옆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거냐고.”
“어…어. 그랬었지. 민감한 질문이었으면 굳이 대답 안 해도 괜찮…”
“지금 당장은 지났어도 봄은 다시 돌아서 찾아오잖아. 그런 거라고 생각해 줘, 그냥. 봄이 지난다고 그 봄의 존재가 사라지지는 않는 거니까.”
“뭐야…그럼 너는 그냥 영원히 사는 존재 뭐 그런 거 아니야?”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러니까 만약에 내가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사라지면…봄이라는 계절도 사라졌다고 생각해 줘. 뭐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점점 잠에 취해가는 사람처럼 음절 하나하나가 몽롱해졌다. 몽롱해지는 것이 정확하게 박성화의 목소리인지 김홍중의 정신인지는 조금 헷갈렸다. 전자일 리가 없는데. 후자라고 하기엔 김홍중의 정신은 여전히 너무도 또렷해서. 묘한 기분으로 그 목소리를 잠자코 들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는 게 왜 갑자기 이리도 두려울까. 성화야. 그러고 보니 내가 너 이름 기껏 지어주고 입 밖으로 제대로 불러준 적이 몇 번 없지. 지금도 이렇게 비겁하게 마음속으로만 네 이름을 부르고.
사라지지 말라는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고 또 고르는 와중 박성화의 몽롱한 목소리가 한 번 더 귓가를 스쳤다.
그래도 사람들 말처럼 봄 때문에 이 웨르눔 바이러스가 시작된 거라면, 진짜로 그런 거면…
내가 사라지면 이 바이러스도 언젠가 끝이 보이지 않을까…….
그런 중얼거림을.
사람은 저마다의 슬픔을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박성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이 아닌 자의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의 무게를 짊어지고 걷는 자 같았다. 자꾸만 여리면서도 단단하고 단단하지만 연약한 인간으로 박성화를 대하고만 싶어졌다. 천장을 바라보던 몸을 박성화 쪽으로 돌렸다. 박성화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긴 밤을 그 눈물로 어떻게 지새우려고 혼자서.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봄이 가진 우울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찾아오겠지. 우리가 가진 무게는 단위부터가 달랐고 그것마저 맞춰가는 데에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러니 그때까지는 박성화를 옆에 묶어두고 싶었다. 더 깊게 너를 이해해줘야 하니까. 팔을 뻗어 박성화의 가슴께를 작게 토닥였다.
그래, 너는 나를 끝까지 연민해 줘. 나도 그런 너를 연민하고도 미안하지 않을 수 있게. 네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너를 붙잡고 이 다음을 꿈꿀 수 있게.
아직 한여름의 비가 쏟아진 적도 없는데 김홍중은 장마철을 핑계 삼아 말을 꺼냈다.
여름 날씨가 다 지나가면 오늘 찍은 사진 필름을 현상하러 갈 거야.
거의 다 네 사진이잖아. 네가 찍은 내 사진도 있고.
그러니까 같이 가자.
…성화야.
잘 자.
- 작가의 말
But you never let me down that's why when the sun's up, I'm stay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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