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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胡蝶夢 下>, 희재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9월 23일
  • 14분 분량



* 아포칼립스




 구월의 마지막 날

 박성화가 사라졌다.




 그것도 하루아침에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쩐지 오늘따라 눈이 일찍 떠졌나 싶었는데. 집 안 여기저기에 있는 박성화의 흔적은 그대로인데 그냥 박성화라는 존재만이 사라졌다. 당장 어제 필름 현상하고서 제일 마음에 들게 찍힌 것 같이 고르고 골라 인화한 사진 한 장도 좌식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올려져 있는데… 김홍중의 옆자리 이부자리 속에는 잠들기 전 박성화가 입고 있었던 잠옷이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그 반듯하게 접힌 옷이 김홍중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꽉 닫힌 창밖에서는 소나기가 추적추적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분명 어젯밤에 날씨 좋다고 창문을 열어두고 잤던 것도 같은데. 어쩌면 잠도 안 자는 박성화가 비가 오자마자 창문을 닫아줬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이 정도 생각까진 쉽게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박성화의 도움을 받은 것은 거의 확실했다. 그 덕분에 밤새 집 안으로 들어온 빗물은 없었다.


 그나저나 그러면 이 빗속을 박성화는 스스로 걸어 나간 걸까…아니면 봄이라는 존재답게 뭐 때가 되어 홀연히 연기나 먼지가 되어 사라지기라도 한 걸까. 그동안 박성화와 보낸 시간과 함께 나눈 정을 생각하면 전자는 진짜 너무하지 않았나 싶어서 싫기도 하고, 그래도 박성화가 다시는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는 가정을 세우려니 후자는 섭섭하면서도 이상한 감정들이 차올라서 싫고. 어쨌든 둘 다 싫었다. 박성화가 더 이상 김홍중의 옆에 없다는 사실이.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울컥하는 건 김홍중도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을 때쯤 박성화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사라지면 이 바이러스도 언젠가 끝이 보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박성화 너는 왜 사람 불안하게 그런 말을 중얼거려가지고서는. 그때 겨우 급하게 둘러댔던 핑계가 장마 끝나고 필름 현상하러 같이 가자, 뭐 이딴 말이었는데. 어떻게 붙잡아둔 기간이 끝나자마자 뭐 얼마나 지났다고 말도 없이 갑자기 이렇게 떠날 수가 있어. 개새끼…존나 이기적이네. 온갖 생각이 다 들어 오르며 아침부터 머리가 복잡해졌다. 김홍중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휴대전화 화면에 눈이 부셔와서 인상을 확 찌푸렸다. 시간은 아직 오전 다섯 시 딱 그쯤이었다. 정확히는 다섯 시가 되기까지 사 분을 앞둔 시간. 이번에 현상한 사진 중 하나로 간만에 배경 화면을 바꿨다. 평범하고 감성적이기만 한 배경 사진 같은 담벼락과 몇 송이 붉은 장미꽃이었지만 화면 왼쪽으로 살짝 비치는 흔들리는 분홍 머리칼은 어찌 다 가리지 못했다. 박성화는 김홍중의 허상 속 인물 따위가 아니었는데, 정말로 실재하는 그런 존재였는데… 그걸 훤히 알면서도 그럼 차라리 망상이었던 거라면 그게 더 낫겠다고 그런 생각도 들고. 그래도 이상하게 그 배경 화면을 다시 이전으로 돌려놓고 바꾸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김홍중은 비가 내리는 불투명한 창밖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냥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심란한 때에도 잠에는 잘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인 건지. 김홍중이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고도 남은 시간이었다. 다시 또 얼마나 잔 건지 거울은 보지도 않고 눈 뜨자마자 바로 보이는 천장만 마주했는데도 눈이 띵띵 부었겠구나 하는 게 대강 다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면 뭐 자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 찍 흘려서 붓기라도 한 건가…아마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뒤숭숭한 상태에서 꿈이라도 꿔서 심란함이 가중되면 어쩌나 했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물론 오후를 바로 앞두고 열한 시 끝나갈 때 되어서야 겨우겨우 일어난 것 치고 몸이 그렇게 개운한 것도 아니었다. 김홍중은 끙 앓는 소리를 길게 내며 기지개를 켰다. 찌뿌둥한 몸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도 기분은 영 나아지지를 않았다.


 어쩌면 눈을 다시 떴을 때에는 박성화가 옆자리에 아무렇지도 않게 누워있거나 저기 부엌 싱크대 앞에서 뭐라도 하고 있었으면 좋았을 걸…그런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외로움이 사무쳤다. 진정한 가을의 시작을 이따위로 알리는 박성화가 죽을 만치 미웠는데도 이제는 정말로 죽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들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햇빛 아래 서 있으면 땀이 줄줄 흐르니 가을이 오긴 하는 건가 싶었는데 하루아침 만에 또 날씨가 휙휙 변하더니 선선한 가을 날씨가 되었다. 날씨가 어떻게 이렇게 휙휙 변할 수가 있지. 조금만 더 하면 춥다고 느끼겠는데. 이젠 이런 것마저도 인간의 피부로 직접 와닿는 지구 멸망의 징조 같았다. 아니, 이제서야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고 이런 건 원래도 충분히 지구온난화의 징조였고 신호였지, 참….


 맑고 푸른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흰 구름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아무튼 선선하고 하니 날씨 참 좋네. 아직 자취방 안으로까지 은행나무 똥내가 진동해 들어오지는 않는 걸 보니 그냥 은행나무 열매도 슬슬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시기겠거니 대충 어림짐작했다. 밖으로 나가자고 하면 대놓고 꺼리는 낯빛을 하던 박성화도 이젠 없는데 이상하게도 날씨 좋다는 생각에서 밖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일이 없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어젯밤의 뉴스가 재방송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원래는 오전의 실시간 뉴스가 편성된 시간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뉴스를 재방송한다는 말도 어이가 없고 애당초 재방송으로 다시 나오는 하루 지난 뉴스를 보는 게 의미가 있나 싶었을 텐데, 이제는 꽤 아무렇지도 않고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애초에 이제는 본방송으로 방영되는 뉴스도 실시간이 아니었다. 방송 도중 아나운서가 호흡곤란과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져버리는 불미스러운 일이 몇 차례씩이나 발생한 후부터는 실시간 중계가 핵심이었던 뉴스는 더 이상 그 어떤 채널에서도 생방송으로 중계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세상에 흐름에 따르는 어쩔 수 없는 변화들이었다.


 박성화가 사라졌는데도 웨르눔 바이러스는 오늘도 여전히 세상을 망치고 있었다.


 그래서 김홍중은 박성화가 사라지지 않았다고 믿을까, 아니면 애초에 박성화와 웨르눔 바이러스는 관련도 없었던 것이라고 믿을까, 둘 중 어느 쪽을 믿어버릴지 고민하다가 그냥 텔레비전 채널을 돌려버렸다. 그렇게 고민을 한 주제에 내리는 결론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김홍중은 박성화 없는 하루를 며칠씩이고 반복하며 지냈다. 분명 박성화와 함께 보낸 시간은 반년 남짓한 시간밖에 안 됐는데 박성화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다. 늘 익숙하다 못해 편안했던 혼자만의 공간이 텅 빈 것처럼 공허하게만 느껴졌고, 혼자 있어도 아늑했던 것들이 다 외롭고 심심하게만 느껴졌다. 옆자리의 부재가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굳이 보고 싶다고 생각해버리고 입 밖으로 혼잣말로라도 내보내 버리면 괜히 김홍중이 지는 것 같아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일부러 눈 딱 감고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 망해버린 세상에서는 생각할 수 있는 주제의 폭이 적었기에 종국에는 다시 돌고 돌아 박성화였다. 김홍중이 머릿속에 깊이 담고 있는 존재라는 것은. 노력한다고 해서 정말 뭐든 다 이루어지고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김홍중은 박성화로 인해 처음 알게 되었다.


 어느 날은 꿈에서 박성화를 만났다.


 김홍중은 간만의 재회를 하는 사람처럼 제대로 굴었지만 박성화는 원래부터 김홍중과 떨어진 적 없이 늘 함께였던 사람처럼 굴었다. 김홍중은 둘 중 누구의 반응이 맞는 건지도 모른 채로 그저 박성화의 팔목을 꽉 붙잡을 뿐이었다. 박성화를 다시 놓치고 싶지 않다는 그런 간절한 생각에. 박성화와 다시는 헤어지면 안 될 것 같다는 그런 애틋한 마음에. 아 존나 박성화가 뭐라고…그런 마음이 들면서도 한켠으로는 이제 참 소중한 존재구나 싶기도 했다.


 너 가지 마, 안 가기로 약속했잖아, 내가 가사 다 써주면 그때 가겠다며, 그때 가기로 약속한 거였잖아, 그런 말을 하고 싶은데 입술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각박한 환경은 사람을 함부로 애틋하면서도 초라하게 만들었고, 특히나 이런 재난과 재난이 겹친 상황 속에서 김홍중은 세상 가장 초라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 꿈에서 박성화는 김홍중을 보며 미소 지었다. 차라리 그 뿐에서 그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박성화는 웃는 얼굴로 김홍중을 힘껏 밀쳤다. 소름 돋을 정도로 예쁘게 미소 짓는 그 얼굴로.


 저항 없이 뒤로 밀쳐지면 이 모든 것이 꿈이며 허상이었음을 알리기라도 하듯 김홍중의 등 뒤로 닿아오는 장판 마룻바닥 같은 건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낭떠러지였다. 김홍중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그저 점점 멀어져만 가는 박성화의 잔상.


 허무함을 느낄 때쯤 돌연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김홍중은 어떤 불길 안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뒤지는 건가 생각하니 절로 눈이 떠졌다. 당연한 소리지만 불길은 온데간데없고 캄캄한 자취방 천장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후로 김홍중은 닷새에 한 번꼴로는, 많으면 사흘에 한 번꼴로는 꿈에서 그렇게 박성화를 만났다. 늘상 똑같은 전개와 똑같은 얼굴, 그리고 고통스럽게도 똑같은 결론이었다.






 무슨 연락이라도 온 날은 괜히 발신자를 확인하기도 전에 아닌 척 심호흡을 작게 한 번 하고는 했다. 물론 박성화에게 휴대전화 같은 건 있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그냥. 혹시 모른다는 어떤 간절한 희망 하나 때문에. 그렇지만 역시나 스스로를 희망 고문한 것밖에 안 되는 짓이었다.




 홍중씨월세넣어야하는기간이삼일이나지났는데돈이안들어와서연락드려요~^^ 무슨일있는건아니죠??




 어휴 콱 이놈의 집 주인은 다른 사람들 다 웨르눔인지 나발인지로 죽어 나갈 때 끝까지 꿋꿋하게 아무 일도 없이 잘 살아가고 있어서 날 곤란하게 만드는 건지 하는 과격한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겨우 진정했다. 그래도 집 주인 휴대전화는 갤럭시여서 다행이었다. 읽음 표시는 떴는데 답장은 한참 동안 안 오는 싸가지 없는 짓은 일단은 모면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제는 정말 월세가 문제였다. 지금까지는 김홍중이 이전에 어느 정도 모아두었던 돈에 출처는 모르지만 일단은 박성화가 제 돈이라며 들고 오는 의문의 돈을 보태어서 잘 생활해오고 있었다. 심지어 칠월부터는 박성화가 다 내주고 있었는데…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구해온 건지도 모를 출처 없는 돈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게 찜찜한 마음이 크기는 했지만 당장 급한 문제였으니 어쩔 수 없기도 했다. 그리고 박성화가 없어진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내려면 뭐 있는 돈 다 끌어모아 월세를 낼 수는 있었지만 식비나 이런 쪽 지출로 빠듯해지는 게 걸렸다.


 김홍중의 고민 방안. 1. 진짜로 뒤진 척이라도 해 보기. 그런데 이쪽은 양심에 찔리는 것도 찔리는 것이지만 어차피 전기세니 수도세니 하는 것들 보고 하다 보면 다 들통나게 되어 있으니 당연히 패스. 2. 앞으로도 월세 감당하며 지낼 여유는 없으니 그냥 쿨하게 방 뺄게요 하고 나가버리기. 근데 이렇게 되면 당장은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가 너무 막막해지니 이것도 어쩔 수 없이 패스. 가오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정말로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어서다. 그리고 3. 어떻게든 사정 설명하고 일단은 조금만 더 유예 기간 받아서 급하게 돈이나 끌어모아 보기…. 현실적으로는 역시 이것밖에 방법이 없겠지? 이러면 안 되는 거 알긴 하는데…김홍중 쪽 역시 사정이 사정이니 싶어 당장에도 답장할 힘이 나질 않았다.


 근데 이 사정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원래 그나마 음악 해서 조금씩 돈 벌어다 빠듯하게 먹고 살고 그 돈으로 월세도 내고 그러면서 전전긍긍 살고 있었는데 작업실이 다 불타는 바람에 작업하던 것도 다 날리고 남은 것도 얼마 없고 의욕도 다 잃었고 어차피 웨르눔이니 나발이니 때문에 뭘 해도 돈벌이가 쉽지 않아서 벌이 뚝 끊겼고 그냥 그 작업실 빌려 쓰던 돈으로나 보태어서 지금 집 월세 꾸준히 내고 있었는데 몇 달 좀 지났다고 이제 그것도 점점 거덜 나고 내 생활고도 빈곤해지고 사실 두어 달 전에 이미 거덜은 났는데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던 그 처음 보는데 누구인지 모르겠는 잘생긴 분홍 머리 청년이 지금까지 출처 모를 돈으로 대신 월세도 내주고 있었고요 근데 걔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집 나가서 영영 사라져버린 탓에 이제 이 돈을 대신 내줄 사람도 없네요 그러니까 일단 제가 단기 알바를 찾아 뛰든 뭘 하든 해서 바짝 돈을 벌어와야 할 것 같은데 넓은 아량으로 조금만 더 기다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주머니. 뭔 문장 하나가 구구절절 이렇게 길어? 뭐라도 정리해보려고 메모장에 먼저 답장 아닌 답장을 써 보다가 한숨만 더 늘어서는 다시 토독토독 글자를 다 지워버렸다. 결국 답장은 보내지도 못하고 휴대전화 화면을 꺼버렸다. 오늘 저녁에 어떻게든 답장하자, 오늘 저녁에.




 근데 그래 놓고 김홍중은 그날 밤 따라 꿈속의 가짜 박성화가 아닌 진짜 박성화가 너무나도 보고 싶고 그리워서 혼자서 안주도 없이 캔맥주를 들이켰다. 요리를 하기엔 옛날부터 이미 주변에서는 알아주는 똥손이었으니 뭘 직접 해 먹기는 싫고, 안주용으로 먹을 만한 거리를 사러 편의점에 잠깐 나갔다 오는 것도 귀찮고…애초에 입이 심심해서 먹고 마시고자 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정말로 순전히 술 까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 그러는 거니 안주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었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술을 마셨던 게, 아마…… 아, 포장마차에서. 웨르눔 바이러스가 막 발발할 때, 김홍중의 친한 형이 그 피해자로 첫 시작 라인업에 들어섰을 때, 뭐 아무튼 그날 밤…. 그래서 그런가. 아무리 김홍중이 술찌에 알쓰에 그런 수식어 잘만 붙는 사람이라지만 캔맥주 하나에 취할 사람은 아닐 텐데 자꾸 취기가 훅훅 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겨낼 수 없는 열감에 손등으로 제 양 볼을 꾹꾹 눌러대다가는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그대로 꼴아 잠든 건 아니었고 그냥 새벽 감성이니 뭐니 하는 많은 것들에 취해 사색에 잠겼다. 차가운 테이블 위에 뜨거운 볼을 착 맞대고 박성화 생각을 했다.


 나 버리고 떠난 박성화,


 나 몰래 나간 박성화,


 사라진 박성화……


 박성화는 김홍중을 버렸는데 왜 김홍중은 박성화에게 선물해준 그 이름 석 자를 다시 빼앗아 오지 못해서 박성화 박성화 이름을 부르게 되는 건지.


 버림 받은 주제에 무슨 미련이 그렇게 남는다고 박성화의 부탁을 못 버려서 선물해주고픈 가사를 매일 다듬고 또 다듬게 되는 건지.


 원래 내가 이렇게 관계에 쩔쩔 목매고 그러는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가, 잠깐의 고민 후에 맞다 나 원래 충분히 그런 사람 맞긴 했지 생각 들어서 한숨도 푸욱 내쉬고 그러기를 반복했다. 그냥 적당히 같이 지내는 사이로만 지냈어도 되었을 것을 그렇게 제 바운더리 안에 넣고서 마음의 문을 저도 모르게 활짝 열어준 건 다 김홍중이 자처한 일이었다. 이름도 뭣도 없었고 인간도 아니라 하는 그 이상한 봄이란 놈 뭐가 그리도 좋다고 가사들은 하나 같이 낯간지럽게 달콤한 사랑 따위를 속삭이려고 드는 것만 같은 건지…


 그리고 사실 처음부터 어느 정도 노린 게 맞기는 했는데. 그렇게 제 감정 못 참고 술을 마신 날이 딱 박성화가 사라진 지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시 월 삼십 일.


 박성화가 사라진 지 한 달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김홍중이 혼자가 된 지 한 달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전자는 너무 남은 인생을 송두리째 박성화한테 걸었다가 실연당한 사람 같아서 묘하게 자존심 상하고, 후자는 그냥 너무 외롭고 슬프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김홍중은 저도 모르게 눈꺼풀을 내려버리고 그대로 잠에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이 밝은 후였다. 캔맥주 하나로 뭐 다음 날 숙취니 뭐니 할 정도는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잠들어버린 자세가 자세인 만큼 온몸이 찌뿌둥하고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추워서 입 돌아가진 않았나 보네. 끄응 앓는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앞으로 쭉 켜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스르륵. 지금 뭐가 떨어진 거지…그제서야 김홍중은 제 몸을 감싸 덮고 있었던 담요의 존재를 깨달았다.


 뭐 간밤에 추워서 깨가지고 담요만 꺼내와서 다시 누웠나…근데 그럴 거면 보통 그냥 바닥에 똑바로 누워서 잘 생각을 하지 않나…그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확인하려 휴대전화 화면을 톡 건드리자. 집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하나 더 와있다는 알림에 순간 김홍중의 등골이 조금 서늘해진다. 아, 맞다. 어제 저녁쯤에 연락드린다는 걸 술 마신다고 새까맣게 잊고 있었네……좆 된 건가……. 일단은 급히 메시지 화면을 띄워보았다. 뭐가 되었든 읽어야 하는 거니까 이번엔 진짜 미루지 말고……




 홍중씨가연락무시하고그럴총각이아닌데답장없는게신경쓰여서오늘홍중씨집에가보던중에분홍머리친구만났어요~^^ 친구한테대신현금으로전달받았고홍중씨는아파서그랬다며아프지말고~~ 그래도다음번에는제때제때돈넣거나미리말해주는거잊지않을꺼죵~~*^^*? 푹쉬고~~~~




 ……어?


 분홍 머리 친구?


 머리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오늘 아침에 온 연락도 맞고, 분홍 머리 친구라고 쓰여 있는 것도 확실했다. 분홍 머리 친구라는 여섯 글자가 가리키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아도 단 한 명뿐이었다. 혼란에 또 혼란이 더해져 생각이라는 게 잘 안될 때쯤 현관문 도어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삑삑삑 삑삑……현관문으로 시선을 돌리자 곧 문이 열리고 익숙하고도 그리웠던 얼굴이 드러났다.




 “홍중아 깼어?”




 익숙하고도 그리웠던 목소리. 김홍중은 그 목소리에 제대로 된 반응은 하지도 못하고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제는 눈에 익은 저 분홍 머리를, 별을 빼어다 박은 것 같은 저 시커먼 눈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젯밤까지 같이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구는 박성화의 모습은 김홍중이 한 달 내내 꿈에서나 보았던 박성화의 모습과 너무나도 겹쳐 보여서 김홍중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김홍중이 대놓고 좋지 않은 낯빛을 드러내자 그제서야 박성화는 한 달 사이의 공백을 천천히 설명해주었다. 참으로 다정하면서도 불친절한 설명이었다. 박성화 말로는 생활비로 쓸 만한 돈을 구하고 벌기 위해 한 달 동안 빡세게 여기저기서 일도 좀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는데, 도무지 그 말을 마음 편하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쩌면 그 말이 거짓은 아닌 건지 박성화는 뭔 보부상 가방 같은 커다란 가방에 돈을 꽤 많이 담아 가지고 있는 채였다.


 박성화 이제 어디 가지 마. 집착이라도 하듯 그렇게 말을 해도 박성화는 또 뭐가 좋다고 그 말에 웃음이나 터뜨렸다. 홍중아 나 보고 싶었어? 홍중아 나 없으니까 심심했어? 홍중아 나 없으면 싫어? 이딴 거나 물어보고 앉아있고. 그 와중에 다 맞는 말이라 대답도 못 하고 그냥 한숨이나 푹 내쉬면 박성화는 그 앞에서 허허실실 계속 얼굴에 미소나 띠우고 있었다.




 “홍중아, 나 이제 진짜로 어디 안 갈 테니까 걱정 안 해도 괜찮아. 나 너 친구잖아, 그러니까 이제 말없이 어디 안 갈게.”


 “멋대로 말도 없이 사라질 때는 언제고 지금은 또 누구 마음대로 친구래?”


 “월세 대신 내주는 꼬붕 같은 거 하면 너무 슬프니까 친구 할래.”


 “꼬…뭐? 박성화 그런 말은 또 어디 가서 배워왔냐 너.”




 박성화는 뭔 수줍은 웃음소리나 내며 대답을 피했다. 지금이 그렇게 바보 같이 처웃을 타이밍이냐고. 그래도 뭐 그 얼굴에 단호하게 침 뱉고 욕 박는 짓은 할 생각도 못 하게 되었으니 박성화가 일부러 노리고 여우짓 하는 것마냥 웃음 지어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김홍중은 그 처음을 빼고는 정말로 박성화가 사라졌던 한 달이라는 시간이 아예 있지도 않은 것처럼 굴었다. 물론 박성화도 마찬가지였다. 둘 사이에 그 한 달이라는 혼자의 시간은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둘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김홍중은 그날 이후로 더 이상 박성화에게 밀쳐져 불구덩이로 떨어지며 깨어나는 그런 악몽을 꾸지 않았다.












 홍중아 너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서 뭘 하고 싶어?




 박성화는 추상적인 질문을 곧잘 던지곤 했다. 언젠가 한 번 정도는 가볍게 생각해봤을 법도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는 않고 별 의미 없이 넘겨던 전제의 이야기들. 그런 것을 박성화는 늘 주제로 잘 잡아와 떠들어댔다. 김홍중도 어느 정도 한 상상력 하고 한 감수성 하니 그런 대화에 잘만 어울릴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그럴 만도 하다 싶으면 또 박성화는 왜인지 은근하게 심오한 주제를 고르고 또 골랐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상상하려다가도 우뚝 멈춰 서서 앞길을 나아가기에만 급급했던 지난날들. 김홍중은 입술만 달싹이다가 결국 곧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내뱉어야 할 답을 정하지 못했다.


 웨르눔 바이러스가 발발하기 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아니 그 전 아주 오래전 그냥 깊은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어


 아주 어릴 적 아무것도 모르던 코찔찔이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


 그런 진지한 고민과 대답을 꼽아 머릿속을 열심히 굴려보다가도 문득 그냥 시간을 되돌릴 수 있더라도 과거로 돌아가는 것 역시 두렵고 무섭다며 정신을 차리게 되는 까닭은 전부 눈앞의 박성화였다.


 그냥 안 돌아갈래. 그 대답에 박성화는 싱겁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였다. 웃기는 자식.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그런 가상의 동아줄 같은 기회도 걷어차겠다는 발언을 한 건데. 애초에 네가 그런 표정 지어서 뭐 어쩔 건데…. 어차피 그 질문은 박성화에게 있어 그냥 에피타이저로 떠보는 질문이기라도 했는지 박성화는 곧바로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목소리부터가 아까와는 달리 가벼운 느낌이라고는 전혀 없는, 제법 더 본격적으로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 아직도 해 홍중아?”


 “안 해.”




 다행이다. 박성화는 맑게 웃으며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얘가 지금 열두 시 정각 앞두고 새벽 감성이라도 타기 시작했나,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그러면 박성화는 또 이번에는 똘망똘망 애원하는 눈빛으로 똑바로 김홍중을 응시하며 다시 물었다. 홍중아 나 잠깐만 이 앞에만 나갔다가 와도 돼? 이렇게까지 허락을 구하는 걸 보니 뭐 안 된다고 할 이유는 없지 않나 싶으면서도 굳이 갑자기 이 시간에 나가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고. 하지만 박성화는 그거 물어봐봤자 어차피 대답 똑바로 안 해줄 게 뻔했다. 그냥 대충 얼버무리고 누가 봐도 거짓말하는 중인 거 티 나게 웅얼웅얼거리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하기도 하고. 같이 나가자고 하면 그건 또 곤란할 티 팍팍 내고 앉아있을 게 분명해서 김홍중은 그냥 조금 고민해보는 척만 하다가 고개 한 번 흔쾌히 끄덕였다.


 대신 일찍 들어와야 해. 알았어, 금방 올게. 뒤도 안 돌아보고 급하게 일어나 대충 나갈 차림새만 갖추어 나가버리는 박성화가 조금 괘씸하기도 했다. 나가라고 허락해준 게 맞기는 한데 그래도 나가기 직전에 뒤돌아서 얼굴 보고 인사 한 번만이라도 하고 나가면 어디 덧나나. 애도 아니고 유치하게 왜 이런 걸 가지고 이렇게 기분 꿀꿀해하고 재고 있는 건지 스스로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싶기도 하고….


 박성화가 돌아와 다시 이전처럼 함께 지내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되었는데도 김홍중은 아직도 박성화의 존재를 실감했다가 실감하지 못했다가를 반복했다. 이렇게 불시에 자리를 비워버리는 예전 같지 않은 박성화를 보면 은근히 불안함이 몰려왔다. 한 번 학습된 외로움과 홀로 남겨진 공포가 은은히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박성화의 빈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시간은 잘만 흘러갔다. 약속대로 정말 금방 돌아온 박성화는 천천히 현관문을 열며 김홍중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집 안 한가운데를 바라보더니, 이내 웃는 얼굴로 어떤 커다란 상자를 한 손에 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봐도 케이크 상자라고밖에 할 수 없는 모양새였다.




 “생일 축하해 홍중아.”




 신발을 벗고 가까이로 다가오며 하는 그 말이 정말 기분 좋아 보였다. 정작 김홍중은 박성화만 신경 쓰느라 제 생일을 살짝 잊고 있었는데 말이다. 완전히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기엔 거짓말이고, 근데 아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냐, 이런 감상 느끼며 당일로 생일이 다가왔다는 것까지는 자각하지 못한 정도로 살짝만 잊고. 박성화 손에 들려 있는 케이크 상자 보자마자 아 나 벌써 생일인가, 하고 바로 깨달은 딱 그 정도.


 그런 귀여운 생일 축하 깜짝 이벤트에 기분 나빠할 리가 만무하니 김홍중도 박성화를 따라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박성화의 기분 좋은 미소가 김홍중에게까지 전염되어 온 것만 같이 자꾸만 웃지 않으려 해도 실실 행복한 웃음이 나왔다.


 이런 김홍중의 변화는 기필코 박성화가 불러왔을 것이 확실했다. 이전까지의 김홍중은 생일을 아무런 날도 아닌, 대수롭지도 않은 날 정도로만 그냥 넘겨버리곤 했었는데. 축하를 해줄 사람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그냥 정말 김홍중 자체가 스스로의 생일에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었던 탓이다.


 언젠가 생일이라는 주제에 관해 박성화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생일 같은 게 없어 나는.


 생일이 뭔지는 아나 보네?


 태어난 날이잖아.


 응. 생일이 뭔 대수라고….


 그래도 있으면 좋잖아. 말 나온 김에 홍중이 네가 정해주라, 내 생일.


 ……아마 딱 한여름 중이었을 것이다. 그런 대화를 나누었던 때가. 구멍이라도 뚫린 듯이 비가 미친 듯이 쏟아져 내리던 우중충한 하늘, 그리고 그 어두운 하늘의 빛을 받아 그저 칙칙한 색감의 방. 아마 어쩌면 그런 날씨 탓에 기분이 더 꽁기해져 있기도 했었을 텐데. 생일을 정해달라는 기상천외하고 상상도 못 한 부탁을 들었을 때 그 주변을 이루던 모든 것들을 김홍중은 생생하게 기억했다. 눈앞에서 정말로 기대하고 있는 듯이 반짝거리는 눈을 담고 있는 박성화의 얼굴이, 당황하고 황당했던 제 얼굴의 근육이 무슨 표정을 지어내고 있었을 것인지 그 느낌이, 그 둘 사이를 유영하고 있던 장마철의 축축하면서도 눅눅한 공기까지도.


 네 생일은…봄 해.


 봄 언제?


 나랑 처음 만난 날.


 4월 3일?


 그걸 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네.


 근데 홍중이 너도 정확한 날짜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날을 생일로 하라고 지금 이렇게 말한 거 아니야?


 …맞아.


 그날 이후로 그 대화를 종종 상기시킬 때마다 김홍중은 박성화에게 이름도 주고 생일도 줬으니 이 정도면 그냥 뭐 박성화는 김홍중이 마음으로 낳아 거느리는 반려 봄 그 정도 되는 존재인 건가 싶었다가도 그 발상이 어이없어서 종종 혼자서 알게 모르게 웃기도 했다. 그러나 반려동물 닮은 반려 봄이라는 시답잖은 명칭은 고이 혼자만의 생각 딱 그뿐으로 접어 넣은 이유는. 지금의 박성화만 봐도 답이 나왔다.


 상자 속에서 조심조심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꺼내 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박성화는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는 듯 제 후드티 주머니를 뒤적이며 주섬거렸다. 딸기 생크림 케이크…제일 무난하게 잘 팔리니 아마 웬만해서 케이크 종류들 중 가장 빠르게 품절되는 케이크가 아닐까 감히 추측이 되기도 하고, 애초에 이렇게 열두 시 자정을 딱 맞추어 축하해주려고 한 것이었으면…지금 이 시간이면 제과점들은 당연히 죄다 영업을 끝내고 문을 닫았을 시간일 터였다. 아마 미리 사 두고 밖에서 어딘가에 맡겨두거나 대충 시원하고 은밀한 어딘가에 몰래 숨겨두거나 그런 짓이라도 무모하게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만 봐도 김홍중은 또 그런 박성화의 행동과 생각 머리가 웃기고 귀여워서 웃음이 스멀스멀 나왔다.


 바로 앞에서 김홍중이 저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알고 있는지. 계속 느릿하게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박성화는 어느새 손을 멈추고 김홍중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잠시 고민하는 듯 싶더니만 박성화는 이내 수줍게 미소 지으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박성화의 손바닥 위에는 작은 반지 케이스가 꼭 맞게 올려져 있었다.


 생일 선물로 이렇게 본격적인 반지를 맞춰주는 웃긴 사람이 어디에 있냐고, 내가 이런 반지 취향인 건 어떻게 알았고 손가락 사이즈는 또 어떻게 알고서 이렇게 준비를 했냐고 웃고도 싶고 묻고도 싶은 게 많았지만 박성화의 그 긴장한 표정을 봐서라도 김홍중은 덩달아 웃음 최대한 꾹 참고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다고 해서 입가에 마구잡이로 드러난 미소가 완전히 지워지는 건 역시 아니었다. 박성화는 누가 봐도 정말 긴장으로만 가득 찬 게 티가 났다. 무슨 프러포즈라도 하는 사람처럼.


 박성화는 무슨 심호흡 한 번에 행동 한 번인 느릿느릿 숙맥처럼 굴었다. 당장 하는 폼만 봐서는 나름 혼자서 시뮬레이션도 돌리고 연습이라도 좀 해본 것도 같은데 실전은 처음이다 이건지. 느릿느릿 반지 케이스에서 반지가 꺼내지고 그 반지가 김홍중의 손에 살짝 닿고. 김홍중의 약지에 알맞게 반지가 들어가고. 김홍중은 박성화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묘한 감정 속에서는 기쁨과 행복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것도 같다.


 열두 시 땡 치자마자 이렇게 축하해줄 정도로 생일이라는 게 뭐가 그리도 특별하다고. 생일 축하해 다섯 글자가 뭐가 그리도 각별하다고. 근데 기분은 왜 이리도 두근거리고 행복한 건지.


 고마워. 짧게 답하는 김홍중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격양되어 있었다.




 케이크 위에 초를 꽂아 간단한 생일 축하 노래와 함께 촛불을 끄고. 그 잠깐 사이에 빌었던 소원은 웨르눔 바이러스의 종식보다는 박성화와의 미래라는 점이 참 간사하고 이기적인가 싶으면서도 내 생일인데 뭐 어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케이크를 한 입 맛 보고 싶지만 다시 양치를 하기는 또 귀찮아서 그냥 대충 다시 케이크 상자 속에 조심스럽게 넣어 닫은 후 냉장고로 직행했다. 먹는 건 내일 먹어 보자. 그 말에 박성화도 당연히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별달리 토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 해 가던 잘 준비를 마무리 짓고 장판 위에 두꺼운 이불을 깔았다. 그 위에 눕고 또 적당히 부드러운 이불을 위에 까니 제 생일의 가을이라는 계절은 참 선선하고 따뜻한 것 같다는 새로운 감상이 들었다. 잠이 오지는 않았지만 얌전히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옆자리에서 색색 나는 숨소리는 이제는 낯익고도 어색했다. 박성화가 이 집에 처음 들어와 아직 이름도 안 생긴 채로 옆에 누워 같이 잤을 때 그때는 내가 어떤 기분이 들었더라. 반년 남짓 하는 시간 동안 여러 면에서 새로워진 것이 너무 많았다.


 나 너 친구잖아,


 아직 눈을 감지도 않았는데 박성화가 다시 돌아오자마자 했던 그 말이 자꾸만 귓가에 생생하게 맴돌았다.


 네가 뭐 친구가 없었으니 잘 모르는 거일 수도 있는 건 알겠는데, 아무튼 지금 너랑 나 사이는 확실히 그냥 평범하기만 한 친구 사이 정도는 아니라고. 그 이상이면 이상인 거고 친구가 아닌 거면 아닌 거지 아무튼 그냥 친구 그 자체는 아니라고…어느 타이밍에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김홍중은 미소나 지으며 입 꾹 다물었다.


 박성화의 행동도 그렇지만 김홍중의 마음도.


 아마 이게 평범한 친구는 아닐 텐데. 그래도 서로의 옆에 이렇게 있을 수만 있으면 사실 그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한 것 같아서 김홍중을 굳이 이 친구라는 이상하고 묘한 사이를 정정해줄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다.


 박성화가 끼워준 반지 그대로 딱 알맞게 들어가 있는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톡톡 더듬어보기도 하고 살살 건드려보기도 하며 기분 좋게 웃다가.


 박성화의 잘 자, 라는 말에 김홍중은 간만에 응. 대답하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 작가의 말


공개 날짜 기준으로 시기상 아직 이른 감이지만 11월도 계절상으로는 가을이니 가을에는 꼭 생일 이야기를 그려보고 싶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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