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villain>, 에임
- 계간 성홍
- 2022년 6월 21일
- 5분 분량
저거 박성화 맞지. 길쭉한 손가락이 향한 곳은 난잡한 비명소리와 함께 자동차 추돌사고로 피어오르는 연기 속 우두커니 서있는 인간 형체였다. 시원하게 앞머리를 올리고 줄곧 무표정이던 얼굴을 활짝 피며 이 쪽을 향해 손을 붕방붕방 흔드는. 반정부군 소속 빌런.
홍중아! 보고 싶었어!
하 저 망할놈. 김홍중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박성화의 아래는 아비규환이었다. 자동차끼리 꼬라박아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중심 속에 박성화가 서 있었다. 형 얼른 다녀와요… 정우영이 입꼬리만 올리며 김홍중의 등을 떠밀었다. 한 달전, 또 출몰한 박성화에 김홍중 대신 다른 히어로를 보냈다가 반 박살이 나서 실려왔던 기억이 정우영의 머릿속에선 아직 선명했기 때문에. 부르잖아요 그냥 빨리 가는게 좋을거 같은데. 10분 내로 안 돌아오면 백업 붙여라. 넵.
난간에서 널찍히 뛰어 날았다. 순식간에 사고현장 중심으로 들어온 김홍중은 짙은 연기 속에서 박성화를 찾기 시작했다. 이 난리를 해놓고 또 어디로 숨은거야. 짜증섞인 말을 내뱉으며 눈썹을 세우는 순간 어딘가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박성화가 나타났다. 한 손으로 가볍게 망가진 차 본체를 비스듬히 든 채로. 꼭 거기서 얘기를 해야 겠어? 다른 사람이 우리 데이트 보면 부끄러워서 날려버릴거 같단 말야. …그래 알겠다. 김홍중은 정말 어딘가에 끌려가는 포로마냥 터벅 걸음으로 박성화에게 걸어갔다. 그 사이에 어디서 구해왔는지 배달 떡볶이와 치킨이 간이용 테이블에 놓여져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치킨으로 가져왔어 잘했지? 칭찬을 바라는 얼굴을 무시하고 건너편에 의자를 끌어 앉았다.
“10분 후에 갈거야.”
“너무 짧은데?”
“오늘은 또 무슨 용건으로 불렀는데.”
“홍중이 얼굴 보러 왔지.”
“질리지도 않냐.”
“어떻게 홍중이 얼굴이 질려.”
활짝 웃으며 말하는데 어이없어 침도 못 뱉었다. 야 박성화. 왜 정없게 성 붙이고 불러. 그래 성화야. 응 홍중아. 너 얼굴도 충분히 잘생기고 키도 크고 멀쩡한데 왜 그래. 박성화가 예쁜 입술을 말아올리며 대답한다. 잘생긴 건 알아 근데 그냥 나는 너가 좋은거라니까. 꼬박꼬박 대답은 또 잘해서
마냥 미워할 수가 없었다. 히죽대며 음식 포장을 뜯는 모습이 정말 순수하게 데이트나온 커플의 모습 같아서 김홍중은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나랑 언제 호텔 가줄거야. 꼴깍대며 생수를 마시는데 느자구없는 소리가 들려와 김홍중은 그대로 입안에 든걸 뿜어냈다. 다행스럽게도 왼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개소리를 꺼낸 장본인이 맞는 일은 없었지만. 손등으로 축축한 입술을 닦아내며 고개를 드는데 개소리의 장본인은 여전히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히죽대고 있었다. 내가 너랑 거길 왜 가? 일단 호텔 도착하고 방 들어가면 생각 달라질거야. 간다고 말 안 했는데? 그니까 한 번 가보자는 거지. 신종 괴롭힘이야? 내가 홍중이를 왜 괴롭혀… 알았어 그럼 조건 걸게. 박성화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 하나를 치켜세웠다. 나랑 한 번 갈때마다 사고치는 거 줄일게. 무슨 대단한 딜을 꺼내는 것 마냥 분위기를 잡더니 예쁜 입술을 타고 나온 건 터무늬 없었다. 김홍중은 아파오는 머리를 한 손으로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성화야 너가 그럴때마다 화나서 눈물날 거 같아. 헉 홍중이 우는거 진짜 위험하겠다. …말을 말자.
도저히 통하지 않는 대화에 진저리가 났다. 제 앞에 앉아 떡볶이를 씹으며 똘망한 눈으로 쳐다보는 빌런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안 잡혔다. 이 상태로 헤어지면 또 얼마 안가 사고 현장을 만들고 김홍중 나오라고 소리칠게 뻔해서. …너 그 조건 꼭 지킬 수 있어? 홍중아 나 한 입 갖고 두 말 안해. 호텔 같이 가기만 하면 되는거잖아 뭐 이상한
거 한다거나 그런건 없잖아. 응응 홍중이가 싫다하면 절대 안해. 콜라를 먹던 얼굴이 반짝 빛을 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하나 더 붙여 일주일에 한 번씩만 갈게.”
“일주일에 한 번 이면 너무 쌓일거 같은데.”
“야 너 방금 이상한 건 안 한다매.”
“그냥 순수하게 욕구 쌓이는거 말한 거야.”
“…쌓이면 다른 사람하고 해결할게.”
“그건 안돼.”
“이젠 사생활까지 간섭하려고 하네.”
“나도 조건 하나 더. 나랑 만난 일주일은 아무도 안 만나기.”
“그럼 매주 너만 만나라는 얘기잖아.”
형형한 두 눈의 동공이 붉은색으로 점점 바뀌는게 곧 터질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뭔 다른 사람이랑도 못만나게 해. 김홍중의 불만에도 박성화의 입꼬리가 더이상의 타협은 없다는 듯이 점점 아래로 그려져갔다. 빨리 대답하라는 눈빛은 덤으로. 박성화가 한 쪽 손에 들고있던 빈 콜라병이 으직 소리를 내며 구겨지는게 꼭 김홍중의 목숨 같아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찌푸려졌던 얼굴이 순식간에 꽃처럼 만개한다. 그럼 협상된거지?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 홍중아 나 기분 너무 좋아 지금 어디로 갈까 우리? 나 지금도 가능해. 일단 나 퇴근부터 생각해. 몇시인데? 아홉시. 엄청 늦네 그럼 협회 건물 1층에서 기다릴게. 그러든가. 대답을 끝으로 일어선 김홍중이 박성화를 지나쳐 걸어나갔다. 편히 앉아
서 빈 속 좀 채웠다고 나른해졌다. 사고 현장을 수습할 귀찮음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호텔 한번 갈때마다 안 그래도 되니까. 몸 팔아 귀찮음을 재끼는, 어딘가 찝찝한 기분을 애써 모른척하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형 10분 지나서 백업 요원들 몇명 보냄요. 확인과 동시에 고개를 들자 자욱한 연기 사이로 뛰어오는 검은 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이고 잘됐다 혼자 정리하기 귀찮았는데. 순도 백퍼센트의 미소가 김홍중의 입가에 그려졌다.
이렇니까 몸에 살이 안 붙지. 제 앞 부분에만 쌓여져 있는 닭 시체들과 깨끗한 건너편. 협상을 하면서도 작은 치킨 조각 하나 들어 그마저도 한 입 조금 먹더니 결국 다 먹은건 작은 생수 한 통뿐이었다. 은근 귀엽다니까. 다람쥐처럼 볼에 쌓아둘 것 같은 귀여운 얼굴로 열심히 먹은건 고작 물 하나 여서. 난잡한 테이블을 그대로 놔두고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저녁에 있을 거사를 기대하고 있기에 몸이 가벼웠다. 벌써부터 김홍중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아줄 제 모습이 그려져서… 아 나 진짜 사랑에 미친사람 다됐네.
아홉시가 살짝 넘었다.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본래 여섯시에 칼같이 퇴근 하던 김홍중의 드문 늦은 퇴근이었다. 박성화가 정말 기다리고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저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어서 대충 넘겼던 대답이
었다. 김홍중은 차라리 박성화가 참을성 없기를 바라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로비로 향했다. 평소 퇴근 시간보다 훨씬은 지난 시각이라 휑한 바람만 불어왔다. 어깨에 걸쳐두었던 셔츠를 입으며 김홍중은 입구로 향했다. 여름치곤 제법 선선해진 날씨에 시원한 바람이 훅 불었다.
“좀 늦었네.”
“아씨, 깜짝이야.”
“생각해보니 1층 못 들어가서 밖에서 기다렸어.”
“놀랬잖아… 여튼 기다리게 해서 미안.”
“홍중이면 나 열시간은 더 기다릴 수 있어.”
“그러진 마.”
야외 주차장에 주차 되어있던 차 옆으로 기척 없이 장정이 나타났다. 두근 거리고 있던 심장이 강하게 놀라 펄떡뛰었다. 밖에서 기다렸다는 말이 사실인듯 반듯한 코 끝에 땀이 맺혀 반짝거렸다. 얇은 셔츠 하나 입은 김홍중과는 달리 박성화는 두꺼운 자켓을 걸친 상태였다. 뭘 저렇게 꾸미고 왔대… 차 문을 열자 망설임없이 조수석에 올라타며 에어컨 버튼을 매만진다. 빌런도 더위 타냐? 응응 홍중이도 히어로면서 맞으면 아프잖아. 금새 시원한 바람이 차내에 몰아쳤다.
운전석의 작은 불빛에 박성화의 얼굴이 확 비쳐졌다. 오전과는 달리 차분히 내린 머리에 느낌이 산뜻 달라보였다. 이마를 덮으니 훈훈한 대학생의 느낌이 강했다. 아까는 날선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말랑한 느낌. 머리 내린게 훨 보기 좋네… 김홍중의 시선이 박성화의 얼굴로 못박혔다. 박성화가 죽고 못사는 그 예쁜 두 눈이 뚫어지게 쳐다보자 곧바로 귀 끝에 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홍중아 출발 안해? 괜시리 기어잡은 김홍중의 손을 툭 치며 그런다. 너 앞머리 내리니까 되게 느낌 다르다. 잘 보일려고 신경 썼어. 나한테? 내가 홍중이 말고 누구한테 잘 보여. …말을 말자.
김홍중의 차는 자연스레 김홍중의 오피스텔 앞으로 도착했다. 호텔에 가자던 약속과는 다르게 흥분해서 호텔 기둥 뽑으면 어떡하냐는 박성화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안 그래도 박성화가 부신 고가 도로만 몇 억은 해서 예산이 만만치 않았다. 우리집은 기둥 뽑혀도 돼? 김홍중이 밉지않게 눈을 흘기며 쳐다보자 박성화는 신경도 안쓰고 안전벨트를 풀며 곧바로 뛰어내렸다. 와 홍중이 좋은 곳에 산다. 협회 복지가 좀 좋아. 김홍중이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중에도 박성화는 뭐가 그리 신기한지 고개를 연신 돌려가며 구경하기 바빴다. 복도 끝부분에 위치한 1101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시원한 향이 확 끼쳐왔다. 김홍중 한테서 나는 향. 현관을 들어서자 눈 바로 앞엔 가지런히 놓인 구두와 한 짝은 엎어져 뒷축이 구겨진 운동화가 놓여있었다. 홍중아 신발 구겨신으면 척추에 안 좋아. 박성화가 미간을 구기며 장난스레 말한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다리 숙여 구겨진 운동화 뒷 축을 예쁘게 복구 시켰다. 김홍중은 박성화 정수리 한 번 슬쩍 봐주곤 대충 신발을 벗어 거실로 향했다. 어두웠던 사방이 금새 환하
게 빛으로 들어찼다.
“화장실 어디야?”
“저기 주방 옆에. 벌써 씻게?”
“그냥 물어본 거였는데 홍중이 급하구나.”
“…그런 것 치곤 너무 웃고있는데.”
“잘못 봤겠지.”
씰룩대는 입꼬리가 마냥 밉지는 않았다. 김홍중은 그냥 한숨 한번 푹 쉬고 말았다. 안에 있는거 아무거나 써. 그런거 신경 안써? 어차피 이따가 맞댈건데 뭔 상관. 작은 몸이 망설임 없이 휙 뒤돈다. 박성화는 그제서야 간질거리는 심장께를 만질 수 있었다. 예고도 없이 저런 쿨한 말을 내던지는 점이 미치도록 좋았다. 김홍중은 자기객관화가 절대 안돼야 하는 인물이었다. 적대적이고, 싫어하고 귀찮아 하면서 저것도 결국엔 맘에도 없는 생각없이 내뱉은 말이었겠지만 그 끝이 날카롭게 박성화 심장을 관통해서. 손 끝으로 가슴께를 긁으며 히죽댔다. 끝이 말랑한 것으로 심장을 간지르는 기분에 박성화는 발로 바닥을 한 번 쿵 밟은 후 화장실로 쏙 쳐들어갔다.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허겁지겁 달려온 김홍중만 아리송할 뿐 이었다.
-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이번에 성홍에 빠지게 되어 얼레벌레 계간성홍도 참여하게 된 에임입니다. 제가 제일 지각자 일 것 같아 관계자분들께 죄송합니다ㅜㅜ 앞으로 열심히 성홍 하겠습니다. 마지막 성홍으로 이행시 하겠습니다.
성: 성홍 사랑해!
홍: 홍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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