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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 the Winter>, 청해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12월 22일
  • 14분 분량


성화는 겨울을 좋아했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그 답이 겨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겨울이 참 좋았다. 그래서 아주 가끔은 가을의 분위기를 즐기면서도 겨울을 기다리기도 했다. 이번 겨울은 또 얼마나 추우려나 걱정하면서도 그 겨울이 가져올,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벌써부터 설레어서. 차가운 날씨를 이기기 위해 손에 꼭 쥔 핫초코의 온기, 따뜻한 침대 위에 노곤하게 녹아 있는 느낌, 눈이 내릴 때의 그 설렘과 간지러움, 크리스마스와 연말로 들뜬 사람들의 분위기나 풍경들. 그런 겨울만의 낭만들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으으.. 추워"


그래도 가장 기다리는 건, 이 말 뒤에 이어질 폭 하는 소리였다. 여름을 나기엔 쥐약인 저의 체질이 이 맘때쯤엔 뿌듯하고 때때로 감사하기까지 한 이유. 제가 좋아하는 그 모든 게 한꺼번에 제게 다가오는 찰나의 순간이 너무도 달콤했다. 제가 사랑하는 김홍중이, 제가 좋아하는 보들보들한 털옷과 모자를 쓰고 제 몸이 따뜻하단 이유로 품에 안겨 오는 순간. 제 몸에 그대로 기대 안겨 있기도 하고 때때론 두꺼운 옷 때문에 감싸지지 않아 등에 어정쩡하게 양 손이 토독 올라가기도 하는 그런 순간들. 이 기분과 촉감, 또 온도와 무게감이 너는 감히 상상할수도 없을만큼의 행복을 건네주는 탓에 나는 겨울을 기다린다고 하면 홍중이는 뭐라고 할까. 변태라고 하려나, 역시 이상한 놈이라고 하려나. 뭐가 됐든 그럼 그런 나를 사랑하는 너도 이상한거네. 하고 반박했다가 혼이 나는 결말이겠지만.

스킨십엔 인색한 홍중이 먼저-나름 적극적으로-해오는몇안되는스킨십이라더좋기도했다. 겨울 한정 박성화 자석 김홍중은 너무 귀엽고 포근하고 사랑스러우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레 제게 안겨 3초간 가만히 품 안에 머무르는 그 행복한 찰나. 물론 지인과 함께 만난다거나 실내에서 만난다거하는 여러가지 제외 요소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래도 매 겨울마다 열에 일곱 번은 당연하고 자연스레 폭닥 안겨오니까. 그걸로 충분히, 박성화의 겨울은 행복투성이었다.


-


"어, 먼저 와 있었네"

"응. 밖에 춥지"

"겨울은 겨울인가봐. 나 손 다 얼었어"

"봐봐"

"됐어, 금방 괜찮아져"


그리고 그 행복이 사라졌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번 겨울엔 그토록 기다렸던 그 소리를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성화의 재킷이 코트로 바뀌고 홍중의 머플러가 다시 모습을 내비친게 1달도 더 된 일인데, 첫눈도 내린지 한참 전인데, 때로는 안녕이란 인사를 대신하던 그 포옹이 꼭 꿈이었던 마냥 홍중은 안겨오기보다 나란히 서기를 택했고 홍중을 감싸 안아주기 위해 가끔 열리던 성화의 코트는 늘 잠겨 있었다. 오늘도 홍중은 작업실에 먼저 도착해 저를 기다리던 성화에게 안기기 보단 건너편에 털썩 앉아 쿠션을 끌어 안았으니까. 걔보단 내가 더 따뜻한데, 너 오면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게 안아주려고 일부러 아직까지 코트도 안 벗었는데. 그 말이 입 안에서만 맴돌다 그냥 삼켜졌다.


사랑을 하면 유치해진다지만 이제 와서 유치해져도 되는걸까. 너무 늦은 거 아닌가, 벌써 너랑 내가 6년인데. 겨울만 되면 춥다고 안기더니 요즘엔 왜 안 해 줘? 안 추워? 확 뱉어버릴까 조금만 더 기다려볼까. 김홍중 한정 기다림엔 꽤 자신이 있는 편이었지만 한편으론 인내심이 가장 낮은 부분도 김홍중이었다. 조금만 달라져도, 아주 살짝 뒤틀려도 잔뜩 불안하고 온갖 생각이 제 머릿속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하니까. 그런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홍중은 멍하니 바닥만 쳐다 보고 있었다.

"홍중아"

"엉?"

"..."

"왜"

"홍아.."

"안 돼"


내가 무슨 말 할 줄 알고 대뜸 안 된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면 지지 않겠다는 듯 째릿하고 쳐다보더니 벌떡 몸을 일으켜서 말을 이어갔다. 굳이 그걸 꼭 해야 돼? 하고 싶어? 어차피 그거 너만 아는 거잖아. 묘하게 맞아 들어가는 대답에 정말 속을 읽힌건가, 진짜 안 하겠다는건가 싶어서 그 말을 하는 입술만 빤히 바라봤다. 진짜 내 마음을 읽었다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면 생각보다 훨씬 더 속상할 것 같아서. 진짜 알면서 일부러 안 해 준거면 서러울 것 같아서. 멀뚱하니 보는 제 시선에 이젠 야무지게 팔짱까지 끼고 제법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었다.


"뭐가 안 돼?"

"지금 네가 하고 싶은 거"

"그게 뭔데"

"눈오리 만들자고... 아니야?"


어? 아니, 그게 무슨. 긴장해서 꼭 깨물고 있던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눈이 펑펑 쏟아지면 눈오리 친구들을 잔뜩 만들거라고 말하긴 했었지만 갑자기, 여기서? 오랜만에 얼굴 보는건데 눈오리 타령할 애인으로 보였나, 내가.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홍중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종류별 눈 집게가 담긴 박스가 있었다. 아, 일주일 전쯤에 홍중이 작업실로 배송시키긴 했었지. 며칠 내내 내린 탓에 바깥엔 눈이 잔뜩 쌓여 있기도 했고. 오해할만 했네.


"아, 귀엽냐. 진짜"

"아무튼 난 추워서 싫어, 안 나갈거야. 너 오늘 장갑도 없잖아"

"안 해도 돼. 그게 뭐라고, 오늘 추워서 너 감기 걸려"

"그럼 뭐 다행이고. 이제 좀 따뜻해졌다. 옷 줘, 같이 걸어두게"


제 딴에는 진심으로 뱉은 말이었던건지 만족스런 표정으로 몇 번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제게 뻗는 손에 고이 코트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불편해도 입고 있었는데. 제 속은 하나도 모르고 통통 걸어가는 뒷모습이 얄미웠고, 털옷에 파묻힌 모습이 제법 귀여웠는데 사라져서 아쉬웠고 저만 그런 사소한 것들을 아까워하고 설레어 했나 싶어서 섭섭했다.

그래도, 다시 털썩 앉아 아까부터 영 마음에 안 드는 그 쿠션을 다시 껴안는 걔 앞에선 울적한 기분을, 영 편하지 않을 표정을 숨기려 최선을 다했다. 별 거 아닌 걸로 섭섭해 하는 제 자신이 오늘따라 영 미워보이기도 했고.


"나 오늘까지 형들한테 넘겨야 할 파일이 있어서, 잠깐만 놀고 있어."

"그래"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시켜 먹고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하고. 알았지?"

"나 애 아니야. 나 신경 쓰지 말고 얼른 해"


박성화가 김홍중 애인 몇 년차인데 새삼스레 별 걱정을 다 하네. 하고 씩씩하게 덧붙인 뒤 앉아 있던 쇼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오랜만에 같이 먹는 메뉴가 배달 음식인 게 마음에 걸리지만 그래도 맛있는 거 먹여야지. 겨울이니까 국물이 좋겠지. 저번에 홍중이가 맛있다던 찌개를 시킬까, 아니면 국밥? 따뜻하게 먹이려면 그래도 직접 가는 게 좋은데. 일단 메뉴 보면서 생각해야겠다.


"어.."


연인 사이 지켜줘야 할 서로의 선과 공간이 존재한다는 점에 있어 서로 동의했고 여전히 그 부분에 있어 존중하고 보호 받고 있었다. 다만, 핸드폰은 그 영역 안에 속하지 않아 서로 지문도 등록되어 있었고 비밀번호도 진작에 서로 공유한 상태였다. 때때로 생각도 못한 이유로 그게 유용할 때가 있었고, 제법 편했으며, 딱히 숨길 것도 없었으니까.

데이트 하자고 만나서 일하는 건 아무래도 김홍중 잘못이 맞으니까, 애인을 쓸쓸히 둔 죄로 오늘 점심은 네가 쏜다. 하는 마음으로 제 머리 맡에 놓인 홍중의 폰을 들어 손가락을 꾹 누르면 겨울이라 그런건지 아니면 오랜만이라 그런건지 일치하지 않는다는 에러메세지만 계속 떠올랐다. 5번이나 거절을 당하고 괜히 시무룩해져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면, 아까 그 메세지가 조금 다르지만 여전히 똑같은 내용을 담은 채 제게 인사했다


열심히 일하는 중인 핸드폰 주인 뒷통수를 한 번, 네가 아는 게 틀렸다 말하는 화면을 한 번. 혹여나 실수로 틀렸을까 다시, 천천히 번호를 눌러보아도 여전히 아까 그 문구가 저를 반겼다. 순서가 바뀌었나 다시. 아, 여기가 틀렸나 다시. 마지막 한 번의 기회를 남겨두고 30초가 지났다는 알림이 떴고 제 지문으로 핸드폰의 잠금이 풀려 늦가을에 같이 갔던 바다 앞 모래사장 어딘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제가 찍어준 홍중의 사진이 그제야 나타났다.


"나 이거 생각보다 금방 끝나겠다"

"..."

"성화야"

"어? 어. 왜"

"작업 일찍 끝날 거 같은데 밥 나가서 먹을까? 아, 아니다. 너 배고플테니까 그냥 밥 시켜먹자"

"어, 안 그래도 지금 막 찾아보던 중이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너 먹고 싶은 거 시켜. 우리 성화가 알아서 잘 주문 해 주겠지"


이유가 있겠지. 아니면 내가 뭘 잘못 알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비밀번호 이거 아니냐고 물어보면 되는건데 그 한 마디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휘적대는 화면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도, 괜히 의미 없이 토독토독대고 있으면서도, 제가 홍중아 하고 한 마디만 하면 바로 돌아볼 걸 알면서도. 일단 밥부터 먹자, 먹으면서 물어보면 되지, 뭐


-


별 거 아닌 하나, 둘이 모이면 별 일이 된다고 했다. 그게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대부분이 그랬다. 사소하게 뒤틀린 것들이 균열을 만들고 조금씩 쌓아온 것들이 큰 형태를 이루는 것처럼.

추운 날씨 탓에 늦어지는 배달에 출출한 배를 채우려 작업실 근처 편의점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지인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며칠 전에 홍중이를 봤다며, 몇 번 사진으로 본 적 있고 스타일도 특이하셔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는 형 가게에서 여러 사람들이랑 같이 있는 걸 봤다고 했다. 그리고 그 때는 홍중이 3일 연속으로 작업실에 살고 있던-본인은갇혀있다고말했었다-시간이었다. 저도 정신 없이 바빠서 거의 일주일 동안 연락도 잘 못 하고 얼굴도 못 봤던 때. 꼼짝없이 갇혀서 햇빛도 못 보고 있다고 투덜대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어디 갔다 와? 음식 왔으니까 얼른 먹어. 이미 좀 식었길래 몇 개는 전자레인지 돌렸어"

"나 편의점. 늦는다길래 뭐 좀 사 왔는데 일찍 왔네. 응.. 너도 먹어. 작업은 다 했어?"

"아니, 아직 조금 남았어. 근데 진짜 조금이라 어.. 1시간 안엔 무조건 끝나, 진짜로"

"알았어. 끝나고 할 거 생각해야겠다. 너 물 마시고 있어, 음식 데운 거 내가 가져올게"


제가 모르는 일이 있을수도 있고, 무난한 하루였다고 연락을 마친 후에 갑자기 생긴 약속일수도 있으니까. 사소한 거에 괜히 혼자 상처 받고 미워하고 흔들리지 말자. 그건 결국 내가 홍중이를 못 믿는다는 뜻인거니까. 근데 오늘 계속 왜 이러는지, 이젠 좀 착잡했다. 컵이랑 음식들을 챙기다 발견한 빈 약봉투에 적힌 이름이 김홍중이라서, 날짜도 꼭 일주일 전이었다. 애인이 언제, 어디가, 어떻게 아픈건지 저는 전혀 들은 얘기가 없었는데. 어떤 이유인지 모를 이 약들은 다 잘 챙겨 먹었는지, 아픈 거 말도 안 해 줬으면서 왜 이렇게 알게 하는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냥 지금은 모든 게 속상해서 차마 입을 뗄 기력이 없었다.


"방금 꺼내서 뜨거워, 조심해서 먹어"

"너 하던 건 다 잘 끝났어?"

"응. 잘 마무리 됐어. 나 그거 끝나고 10시간 잤다?"

"나도. 이거 끝나면 10시간 잘 거야. 진짜로"

"그럼 그냥 오늘 푹 자고 내일 보자고 하지. 피곤한 거 아냐?"


싫어. 내 마음이야. 부루퉁하게 내밀어진 입술 안으로 우동 두 가닥이 호로롭 소리를 내며 사라질 때까지 그냥 그 입을 가만 바라보았다. 별 일이었으면 말 해 줬겠지. 물론 별 일 아닌 걸 공유하는 게 연인 사이라지만. 그래도 뭐.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저도 눈앞에 놓인 돈까스 조각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맛있네. 그래, 이런 사소한 걸로 속상해하고 꿍해있기엔 오늘 우리의 시간은 소중하니까.


-


적당하게 데워진 작업실 온도에, 따뜻한 국물이며 음식들로 든든해진 속까지. 노곤노곤하게 늘어지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먹은 걸 치우고 정리하느라 이리저리 바쁜 성화는 아직 눈이 말똥말똥했지만 며칠 동안 제대로 못 잤던 홍중의 눈은 이미 감겨있었다. 재잘대는 입은 아직 잠들지 않았음을 열심히 주장하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점점 말투가 늘어지는 게 언제 그 목소리가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그렇게 결국, 성화가 분리수거와 설거지까지 마치고 옆으로 돌아왔을 땐 소파 위에 고이 녹아 고롱대고 있는 김홍중 다람쥐 한 마리가 있었다.

조심히 담요를 덮어주고 그 위로 빼꼼 자리한 머리통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김홍중 오늘 나 자꾸 속상하게 하네. 내가 오늘 네 얼굴 볼 생각에 얼마나 설레고 기뻤는데. 그렇게 한참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곤히 잠든 그 눈가의 예쁜 속눈썹을 가만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살짝 성질이 나서 아까 열심히 일하던 냠냠살을 손가락으로 폭 찔렀다. 너 오늘 좀 마음에 안 들어. 그런 말을 살짝 담아서.

그 손길에 혹시 깨진 않을까 살짝 긴장했는데 그 생각이 무사하게 여전히 포근포근한 소리를 내며 곤히 자길래 한 번 더 조금 세게, 조금 더 깊게 꾸욱 찌르고 이번엔 진짜 깰 수도 있겠단 생각에 살짝 옆으로 도망가면 그제야 뭔가 느껴진건지 살짝 찌푸려진 미간하며 볼 주위를 대충 휘젓는 손이 귀여웠다.


"나가자"

"으..응. 응? 어딜?"

"나가야 돼. 빨리"


주변은 고요했고 눈 앞에 보이는 애인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다, 이미 익숙해서 구경할 것도 없는 작업실을 잠깐 둘러보다 저도 그냥 그 앞에서 잠들어버렸나보다. 제 어깨를 톡톡 치는 손길에 눈을 뜨면 벌써 중무장을 하고 저를 내려다 보는 홍중이 있었다. 묘하게 들떠보이는 얼굴이기도 하고.

그 손에 이끌려 저도 같이 옷을 껴입고 앞장 서 척척 걸어가는 걔 손을 꼭 잡고 눈길이라 위험하니 천천히 걸으라는 잔소리를 하며 따라가면 먼저 나와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색색의 친구들과 눈이 마주쳤다.


"이게 다 뭐야?"

"짜잔-"


뿌듯한 얼굴로 가르키는 건 아까 전까지 박스에 갇혀 있던, 제가 사 뒀던 물건이었다. 순서대로 오리 두 마리, 눈사람, 곰돌이까지. 사 둔 것도,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것도 제 쪽이었는데 왜 신난 건 저 쪽 같은지. 어쩐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맸다 했더니 아주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했다.


"나는 오리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게 종류가 되게 많구나"

"응. 이 3개가 제일 유명하고 인기 많은 애들이야. 귀엽지"

"오오. 이거 생각보다 되게 어렵다. 박성화가 잘 만들길래 쉬운 줄 알았더니"

"그럼. 굉장히 집중해야 하는 고도의 작업이야. 엉아가 하는 거 잘 봐"


저도 남들이 하는 거 영상으로 본 적 있다며 길 모퉁이에 한가득 쌓여 있는 눈을 집게로 집어다 꾹 누르고 짠, 하고 집게를 떼면 안타깝게도 오리는 날아오르지 못 했다. 파사삭 하고 쓰러지거나 하나가 되지 못 하거나 어딘가 한 쪽을 잃은 오리 삼 형제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홍중에 자신만만하게 말하면 눈오리 집게를 손에 소중하게 쥐고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는건지. 눈을 꼭꼭 뭉쳐 채워 넣은 다음, 둘이 잘 붙도록 그리고 틀에서 잘 떨어지도록 통통.


"오오- 짱이다. 나도 알려줘"

"아, 이거 아무나 잘 안 알려주는 비법인데"

"나는 아무나 아니잖아. 그러니까 알려줘"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면 안 돼. 알았지?"

"어, 알았어. 나도, 나도. 어, 곰돌이도 있네. 귀엽다, 나 이거 할래"


홍중이의 특별한 오리들 옆에 성화의 씩씩한 오리 세 마리가 뿅뿅뿅. 한 번 방법을 알려주니 곧잘 배운 홍중의 곰돌이가 그 옆에 나란히 섰다. 오리보다 좀 더 복잡하고 어렵게 생겼는데 한 번에 잘 만들었다고 칭찬 해 주니 자기가 원래 배움이 빠르다며 뿌듯해 하는 게, 털옷 속에 파묻힌 채 한껏 올라 가 있을 어깨가 보이는 것 같았다.

오리 군단을 지키는 곰돌이 기사단과, 그 옆에 평화로운 눈사람 형제들까지. 이 근방의 작은 수호신들이 되기를 바라며 아주 잔뜩, 차고 넘치게 만들고 나서야 스물 다섯 아니 25개월 어린이 둘의 눈놀이가 끝이 났다. 이 아이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자신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두고 두고, 제법 오래 머무르기를 기도하면서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사진들을 잔뜩 찍으며 덕분에 우리 겨울은 행복했다고 작게 속삭여주기도 했다.


"박성화 코 빨개진 거 봐"

"네 코도 만만치 않거든요? 루돌프인줄"

"내 코가 보여? 난 지금 앞도 잘 안 보여. 하도 꽁꽁 싸매서"

"그래도 너 그렇게 안 하면 감기 걸려"

"이렇게 입었는데도 춥네. 아, 밥 먹고 들어갈까? 아니다. 이거 가져다 놓고"


양손에 집게 하나씩 들고 다시 작업실로 가는 길. 눈이 소복히 쌓인 곳도 있었지만 중간 중간 눈이 녹아 빙판길로 변해버린 곳도 있어서 결국 각자 한 손에 두 개씩 쥐고 서로의 손을 꼭 쥐며 조심조심 걸어가고 있었다. 이러다 누구 하나 휘청하면 잡아줘야지 자기도 넘어지기 싫다고 손 놓는 순간 바로 끝이라고 장난도 쳐 가면서. 다행히 의 상할 일도, 몸 상할 일도 없이 무사히 작업실 앞까지 도착했다.


"조심조심. 원래 방심하다가 다치는거야. 집게 줘, 내가 들게"

"내가 무슨 애기냐? 됐어. 대신 나 이거 목도리 좀 내려줘봐"

"목도리? 응. 나 봐봐. 됐다. 아, 예쁘네"

"나 저번 주에 목도리 때문에 계단 하나 못 봐서, 아."


고요한 지하 계단에 콩콩 하고 계단 내려가는 둘의 발소리가 첫 번째, 순간 조용해지고 헙 하고 입술 닫히는 소리가 울려퍼진 게 두 번째, 마지막이 또로롱 하고 도어락 풀리는 소리였다. 그 뒤로 눈에 젖어 챱챱 소리를 내는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는 동안 이어지는 소리는 없었다. 아주 가까이 귀를 대고 들으면 도르륵 하고 홍중의 눈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을지도


"저번 주에 뭐. 목도리 때문에 계단 못 봐서 넘어졌어? 어디서? 다쳤어?"

"아닝.. 별 거 아니야. 그냥 요 앞에서"


김홍중도, 박성화도 상대의 가라앉은 목소리를 제일 무서워했다. 높낮이 없이 차분하고 고요해서 더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그 목소리. 보통 화난 게 있거나 상대가 속상할 일을 만들면 나오는. 둘 다 화가 나면 뜨거워지기보다 차갑게 식어 그 어떤 순간보다 차분해지곤 했다. 꼭 지금의 성화처럼.


"작업실 계단?"

"응. 내내 작업실에 있다가 잠깐 편의점 들렸다 오는 길에.. 얘가 두껍고 크니까 마지막 하나가 안 보여서.."

"안 다쳤어?"

"그냥 발목 살짝 삔 정도? 병원에서도 그냥 간단한 약이랑 파스만 처방 해 줬어"

"어느 쪽인데. 붓진 않았어? 지금은 괜찮아?"

"왼쪽. 응. 그냥 하루 이틀 아프고 만 정도? 간 김에 두통약도 같이 처방 받고 뭐.."

"왜 다친 거 말 안 했어"

"웃기잖아. 나 목도리 때문에 안 보여서 발목 삐고 엉덩방아도 찍었다고 하면. 별 거 아니기도 하고"


그래도 말 해 줬어야지. 응, 미안. 밥 먹으러 가자, 우리 성화 뭐 먹고 싶어? 닭한마리. 삐쳐도 입맛은 있구나? 뭘 잘했다고 놀려, 응? 아니, 근데 그 때 작업실에서 10시간만에 나간거라 그래. 눈도 반쯤 감겨 있어서. 진짜 이젠 안 아픈 거 맞아? 너 겨울엔 특히 그런 거 더 조심해야 해. 알지

제 옆에 딱 붙어서 안 그래도 큰 눈을 부라리며 잔소리를 하는 성화를 괜히 안 들리는 척 무시하며 앞서서 가게로 걸어가면, 저보다 다리 긴 걸 자랑이라도 하는지 금세 따라 잡더니 어깨를 감아 오는 손이 낯설지 않았다. 제 옆에 딱 붙어 전해주는 온기라던지 자연스레 제 팔을 쓰다듬어주는 손길은 반가웠지만 여전히 그러다간 다친다며 따라 붙는 잔소리는 달갑지 않았다. 내가 앤가, 진짜


"이모~ 여기 닭한마리랑 만두도 한 판만 주세용~"

"어쭈, 끼 부리냐? 어디서 감히 날 앞에 두고 말투에 ㅇ을 가득 가득 붙여?"

"이래야 이모가 부추라도 한 주먹 더 넣어주고 국물이라도 한 국자 더 주시는거야"


이내 음식이 식탁을 가득 채웠고 딱 30분 뒤에 성화로부터 전멸 당했다. 저정도면 어머님 설거지거리 하나 덜어드렸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칼국수 사리 추가한 냄비에 공기밥까지 야무지게 싹싹 비워진 그릇을 보며 홍중은 제 애인의 위대함에 새삼스레 또 놀랐다. 제 앞에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배를 통통 두드리고 있는 얼굴을 보며 그냥 저도 같이 웃어줬다. 그래, 행복해보이네. 그거면 됐지.

양껏 먹은 건 성화였지만 배부르다고 산책을 하자 제안한 건 홍중이었다. 추운 날에 밖에 오래 있는 거 싫어하는 애가, 그것도 깜깜해진지 오래라 더 추운 겨울 밤에 선뜻 먼저 산책을 제안한 게 의외라 살짝 놀라면서도 군말 없이 따라걸었다. 이렇게 걷는 것도 오랜만이니까.


"어, 나 핸드폰"

"너 가게에서 내내 핸드폰 보고 있더니. 거기에 두고 온 거 아니야?"


식당에선 얼굴 좀 보고 밥 먹나 했더니 앞에 음식을 두고, 또 그 앞엔 저를 두고도 핸드폰에 코를 박고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바쁜 일 다 끝났다고 했으면서, 이제 연락 올 일 없다고 했으면서 오늘 아주 미운 짓만 하네, 김홍중. 아까 점심 때도 힐끗 힐끗 핸드폰 자꾸 보더니 지금도. 투정은 못 부리고 그 마음 담아 부추를 아그작아그작 씹고 괜히 닭고기를 꼭꼭 씹으며 화를 풀었던 저를 알기는 하는지, 밥 한 번 핸드폰 두 번, 또 한참을 토독토독거리며 화면을 보던 홍중은 공기밥 한 공기를 겨우 다 먹었었다.


"아니야. 우리 성화가 챙겼을거야"

"내가?"

"응. 너는 모르겠지만 내 남자친구가 제법 꼼꼼해. 애가 괜찮아"

"괜찮은 애야?"

"그럼 그럼. 성실하고 착하고 꼼꼼해. 좋은 애야"


박성화랑 연애란 걸 계속, 오래 하면서 김홍중은 자꾸 이런 끼부림이 늘었다. 예전엔 듣는 것만으로도 간지러워하고 못 참아 하더니 면역이 생겼는지 성화의 플러팅에도 별 반응이 없더니 가끔 필요에 따라 저도 그런 말을 툭툭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제 이렇게 뻔뻔하게,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오히려 성화를 당황시킬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다 안다는 듯이 양손을 코앞에 들이미는 홍중에 식당에서의 모습이 떠올라 심술이 난 성화가 애써 몇 번 더 모른 체 하자 응? 응? 하고 애교를 부리니 자꾸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힘들었다. 그 얼굴을 본 홍중은 필살기인 윙크를 날렸다. 그리고, 그건 단 한 번도 실망스러운 결과를 가져 온 적이 없었다


"아, 맞다. 나 장갑. 지문 안 돼. 얼굴도, 목도리 때문에 안 돼. 박성화 손"

"내 손가락? 이거 줘?"

"아니야. 손 시리니까 주머니에 넣고 핫팩 쥐고 있어. 비밀번호..가 뭐였지?"

"...그거, 그 410137 아니야?"

"아, 형들이 내 비밀번호 알아가지고 자꾸 장난치는 바람에 바꿨어. 아, 뭐였지"

"추운데 들어가서 생각하자. 돌아가는 동안 생각나겠지"

"안 돼. 아, 생각났다. 4030 더하기 1107... 5137... 051370. 나 혹시 또 잊으면 네가 기억하고 있어. 051370"


안 물어보길 잘했다 싶다가도 그냥 이렇게, 허무하게 풀릴거면 아까 물어볼 걸 후회도 됐다. 별 거 아닌 거 맞는데, 진짜 별 일 아닌 걸 제 속에서 별 일로 만들었다. 제 속이 커피 스틱보다 좁고 그 구멍만큼 소심해서. 장갑 낀 손으로 번호를 하나씩 꾹꾹 누르던 홍중은 하늘을 한 번, 제가 서 있는 위치 한 번. 아래 위로 고개를 휙휙 움직이더니 가만 서 있던 성화의 팔을 이리 저리 끌어당겨 어떤 위치에 툭 멈춰 세웠다.


"거기서 딱 고개 들어서 하늘 봐봐. 보여?"

"어떤 거? 우와, 보름달이네"

"아니, 그거 말고. 옆에 저거. 저거 너래"

"옆에 어떤 거? 어, 저거 뭐야? 저게 달이야?"

"박성화. 화성. MARS"


오늘이 보름달이랑 화성이 같이 보이는 날이래. 이게 해랑 지구랑 화성이 일직선 어쩌구 뭐라고 하면서 아무튼 엄청 귀한 거라던데 백 년에 한 번이랬나? 그래서 오늘 꼭 봐야 한다던데. 명색이 박마쓰인데 네가 안 보면 화성도 섭섭할 거 아니야, 너도 아쉽고. 나도 이거 오늘 새벽에 알아서, 사실 지금도 많이 졸리긴 한데 나 아니면 또 누가 너한테 이런 거 보여주겠냐, 안 그래? 여기가 달 잘 보이는 곳이래. 와, 근데 신기하긴 하다. 카메라로 찍으면 잘 안 담기겠지?

저러다 뒤로 넘어가진 않을까 걱정될만큼 한껏 목을 꺾어 하늘을 바라 보며 재잘대는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포털사이트마다 기사마다 얘기하는 시간이 조금씩 달라서 혹시 그 찰나를 놓칠까봐 걱정했다고. 제가 한 건 아니라지만 나름 서프라이즈 이벤트처럼 해 보고 싶었는데 표정 보니 이정도면 만족한다는 말까지. 원래 제 애인이 이렇게 말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조그마한 입이 쉬지도 않고 재잘댔다. 저 멀리 보이는 달도, 화성도 신기하고 예뻤지만 역시 제 눈에 제일 예쁜 건 따로 있었다.


"저거 보여주려고 산책하자고 한 거야? 지금 이렇게 눈도 못 뜨면서?"

"내가 널 이렇게 생각한다, 성화야. 진짜.. 넌 고마운 줄 알아야 돼"

"그래도, 사람 앞에 두고 핸드폰만 보고 있으면 내가 섭섭해 안 섭섭해"

"미안. 저거 보여주겠단 사명감 때문에 그 생각을 못 했네"


그렇게 한참동안 하늘의 반짝이는 동그라미를 바라보다가 뒷목이 짜르르 하고 아파 올 때쯤, 아마 눈으로 담는 것보단 못 하겠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카메라로 몇 번 찍은 뒤 돌아오는 길. 제가 할 일을 다 했다 싶은건지, 긴장이라도 풀린건지 아까까진 초롱하던 홍중의 눈이 순식간에 반으로 감겼다. 어디 앉혀두면 금방 잠들겠다 싶을 정도로


"작업실 가서 자자. 홍중아"

"아, 박성화가 나 업어줬으면 좋겠다"

"여기 사람 많은데, 업어줘?"

"그냥 하는 소리지. 저리 가, 오지 마"


졸려서 감긴 눈이 한 번에 확 떠지는 소리였다. 여기서 업긴 뭘 업어, 미쳤나봐. 제게 팔을 뻗으며 다가오는 성화를 피하기 위해 홍중은 속도를 내 몇 발치 앞서 걸어갔다. 그 걸음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저는 도망치고 있었고 성화는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다. 어차피 같이 작업실로 들어갈 건데 저렇게 죽어라 뛸 필요가 있나 싶어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멈춰 서면 이내 성화의 얼굴이 가까워지더니 그 품에 덥썩 안긴 상태가 되었다.

"아, 우리 홍중이 보들보들하네~"

"너 내가 막 만지지 말라고 했지"

"끝장 내 보던가. 어차피 내가 더 빠르지요"

"아우, 진짜. 안 떨어져? 길 한복판에서 뭐 하는 거야. 다 우리만 쳐다보잖아"

"치, 너무해. 예전엔 덥썩 덥썩 잘만 안겼으면서"

"내가 언제!"


언제긴 언제야. 매년 겨울마다 추워어 이러면서 나한테 폭 안겼잖아, 근데 왜 요즘은 안 해 줘. 결국 장난인듯 투정인듯 진심 가득한 말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내가 그걸 얼마나 기다렸는데, 내가 기다린 겨울은 그건데. 지금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고 네 코 끝이 빨개질만큼 추운 겨울이 온 지가 언젠데 왜 내 겨울은 아직 안 나타나냐고. 물론 이런 말들은 당연히 속으로 삼켰지만.


"집에 데려다 줄테니까 가서 자. 피곤하다고 작업실에서 자지 말고"

"야, 형들이 이것 저것 가져다 둬서 여기도 잘만 해. 침대도 있고 보일러도 있고,"

"쓰읍- 가방 챙겨서 나올테니까 너 그냥 여기 있어. 아예 들어오지 마"


들어오면 또 쫄래쫄래 쇼파나 침대로 가서 누울까 싶어 아예 문 앞에 세워 두고 저 혼자만 들어와 제 짐과 홍중의 가방을 챙겼다. 아, 저 눈집게들은.. 형들도 쓰시라고 하지, 뭐. 놓고 가는 건 없는지 한 번 더 작업실을 꼼꼼히 눈으로 훑고 있으면 삑삑 하고 도어락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홍중 말 안 듣지, 진짜


"내가 들어오지 말랬지,"

"으으, 추워. 밖에 춥다, 성화야"


그리고 제가 그렇게 듣고 싶었던 소리가, 온기가, 촉감이 다가왔다. 양 손이 가득 찬 탓에 마주 안아 주지 못 하고 멍하게 있으면 가만 안겨 있던 머리통이 빼꼼 들리며 눈을 마주치더니 킥킥 웃기 시작했다. 왜인지 모르게 잔뜩 얄미운, 그 와중에 휘어지는 눈꼬리는 짜증나게 예쁜 그 얼굴로.


"성화야, 너 되게 티 나"

"엉? 뭐가?"

"맨날 나 만날 때마다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거. 얼굴에 다 보여"

"내가?"

"응. 멀리서 나 보일 때부터 눈 초롱초롱하게 빛내다가 내가 옆에 서면 실망하는 거"


다 알고 그랬다는 말이었다. 박성화가, 김홍중만이 줄 수 있는 그 겨울을 잔뜩 기다리고 기대하는 거 알면서도 초롱초롱하게 빛나던 눈이 잔뜩 시무룩해지고 저도 몰래 빼꼼 튀어나온 입술이 차마 들어가지 못 하고 자기 주장하는 걸 지켜 보는 게 생각보다 너무 재밌고 웃겨서. 제 딴에는 그 마음을 숨기려고 노력하는 거 같지만 하나도 안 숨겨지는 그 섭섭함을 몰래 즐기는 게 소소한 행복이었다며 꺄르르 웃길래 결국 이마를 콩하고 부딪혀 제 언짢음을 표현했다. 김홍중 나빠. 진짜 나빠. 못 됐어.


"조금만 더 장난칠까 했는데 아까 네가 진짜 섭섭해 보이길래 내가 봐 줬다"

"고맙다. 김홍중. 어?"

"코보다 입술이 더 튀어나올까봐 봐 준 거야, 내가. 오늘만 해 준다"

"아, 왜! 해 줘! 계속 해 달라고!"

"싫어. 너도 추운 건 마찬가지인데 뭐. 너 하는 거 봐서 생각 해 볼게"


그러더니 성화가 들고 있는 제 가방을 잽싸게 챙겨 작업실 밖으로 뛰쳐 나가버렸다. 뛰지 말라고! 다친다고!를 고래고래 외치며 홍중의 뒤를 따르는 성화의 겨울이 시작과 동시에 끝을 맞이할 뻔했지만 네가 안 오면 내가 가면 되지. 내가 먼저 안으면 되지.로생각을바꿨다는걸아마홍중도알고있을터였다. 유난히 추울 거라는 올해 겨울을 이겨내기에 서로의 온기만큼 확실하고 필요한 건 없으니까. 주인 몰래 자리하고 있던 성화 코트 주머니 속 핫팩들도, 홍중의 가방 속 몰래 넣어 둔 뜯지 않은 감기약과 비타민도. 서로가 서로에게, 서로만이 줄 수 있는 이번 겨울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이니까.









작가의 말


드디어 겨울이네요. 벌써 마지막이라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딱히 한 거 없이 흘려보낸 것만 같은 올해지만 그래도 계간 덕분에 아주 무의미하진 않아졌어요. 서툰 것도 많고 그리 좋은 글은 아니지만 사계절 내내, 꼬박꼬박 철저히 참여에 의미를 둔 것만으로 저는 뿌듯합니다. 이 계간을 읽어주시는 많은 분들과 제 사계절 속에서 공존 해 주신 다른 작가님들, 그리고 무엇보다 계간 수립부터 진행 그리고 마지막 호 발간까지 고생하고 노력 해 주신 계간 편집팀께 너무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저의 2022년은 조금 더 다정하고 다채롭고 따뜻하게 마무리 될 수 있었답니다. 훌쩍 지나가버린 한 해의 기억이 어떤 색이었든 모두 다 추억이 될테니 고이 간직하고 2023년에도 어딘가에서 함께 할 모두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응원할게요.

그동안 정말 많이 감사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의 모든 게 다 덕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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