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uble in Summer>, 라부
- 계간 성홍
- 2022년 6월 21일
- 10분 분량
끼이익-.
해가 쨍쨍히 비추는 한낮의 도로에 급정거하는 소리가 울렸다.
초록불이 깜빡이며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신호등과 횡단보도 중간 즈음까지 머리를 들이민 차량 한 대, 그리고 그 앞에 방금 차에 치일 뻔 하고도 눈 하나 깜빡 안 하는 새빨간 머리의 홍중이 있었다.
똑똑.
홍중이 차 가까이 가더니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저기요-.
"좀 내려보세요. 지금 사람 치실 뻔 하셨잖아요."
지이잉-. 하고 창문이 내려갔다. 그렇다고 해도 차가 정면으로 달려오는데 가만히 서있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눈도 못 마주치며 얘기했다.
"그럼 제가 잘못했다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쪽이 먼저 초록불인데 차 들이미셨잖아요. 이거 CCTV에 찍혔으면 벌금 내야 되는 거 아닌가? 뭐가 그렇게 당당하지?"
아니 사람이 말을 할 시간이라도 주든가...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무어라 중얼 거렸지만 더워서 빡친 홍중의 귀에는 들어올 리 만무했다.
빵빵-. 거 참 길 한복판에 서서 뭐하는 거야? 아 맞다, 여기 횡단보도 한복판이었지. 횡단보도 신호등은 이미 빨간불로 바뀐 지 오래였다.
"저기요, 잠깐 갓길에 차 좀 대보ㅅ,"
"저기 진짜 죄송한데, 제가 지금 빨리 가야 되는 일이 있거든요? 이 쪽으로 연락 주세요. 죄송해요."
언제 쓴 건지 이름과 번호를 휘갈겨 쓴 포스트잇만 홍중의 손에 쥐어준 남자는 다짜고짜 차를 출발시켜 가버렸다. 허? 그때 다른 차들도 속력을 내며 달리기 시작하고 홍중의 손에 어정쩡하게 들려있던 포스트잇은 그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 미친놈인가?
홍중은 이미 차가 쌩쌩 달리고 있는 횡단보도를 마저 건너며 중얼거렸다. 번호는 당연히 기억도 안 나고, 슬쩍 본 이름은 박... 뭐? 박상훈? 박성훈?
"아 진짜 덥다. 진짜 존나 덥다."
홍중의 자취방에 놀러온 동기 하나가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이제 학교 안 가잖아. 엉. 그나마 다행이지. 대학교의 유일한 장점은 너무 더워지기 전에 종강하고 더위가 가실 때 쯤 개강하는 것이라고, 홍중은 그렇게 생각했다. 홍중은 천성이 예민한 것은 아니나, 더위에 약했다. 날씨가 조금만 더워져도 신경이 곤두섰다. 살 타는 거 싫다고 더운 여름에도 꼬박꼬박 긴팔 긴바지를 입고 다니면서, 더우면 그렇게 짜증을 냈다.
"야 홍중아, 너 이번 방학 때 본가 안 내려간다고 했나?"
"응. 왜?"
"그럼 나랑 수영장 가자. 우리 형이 지 여친이랑 지 친구 커플이랑 같이 놀러 가려고 숙소까지 예약했다는데 얘 여친이랑 헤어짐."
"...그걸 우리가 가도 돼?"
엉. 예약 잡기 빡센 거라 취소하기 아깝다고 그냥 나보고 가라네? 아, 너 그런 데 싫어하나? 홍중은 확실히 그런 것을 좋아하진 않았다. 더운 것도 싫고, 그런 더운 날에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그런데도 고민이 됐다. 개강하면 막학기니까 졸업하고 취업하면 이렇게 친구들이랑 놀러가기도 힘들겠지. 그게 이유였다.
"아냐, 가자. 얼마 보내주면 돼?"
"야! 됐어. 내가 네 자취방에 늘러붙은 게 며칠인데. 너는 그냥 몸만 와, 수영복 챙겨서. 다른 애들 두 명은 이미 구해놨어. 누구냐면-"
그렇게 갑작스레 여름방학 중 일박이일 일정이 잡혔다.
하... 괜히 온다고 했나? 홍중이 워터파크에 도착하자마자 한 생각이었다. 분명히 도착해서 숙소에 짐 내려두고, 탈의실 들어가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막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은 우유에 탄 시리얼 마냥 수영장 마다 사람이 꽉 꽉 들어차 있었다. 한여름이라 햇빛도 당연히 너무나 뜨거웠다. 홍중은 담배가 말렸다.
결국 동기들에게 이끌려 파도풀도 갔다가, 유수풀도 갔다가, 슬라이드도 탔다가. 타의로 즐길 건 다 즐긴 홍중은 저녁이 되어서야 숙소에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새끼들 지치지도 않나봐...
"고기 묵자, 고기 묵자."
진짜로 홍중의 동기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냉장고에 챙겨뒀던 고기를 챙겨 테라스로 나갔다. 그래도 바베큐장이 숙소에 붙어있어서 다행이다... 홍중은 그걸로 안심했다.
"미안한데 나 담배 한 대만 피고 올게."
"엉-. 다녀와."
홍중은 가방을 뒤적거려 담배를 챙겨 나왔다. 공동 흡연구역을 찾아서 담배에 막 불을 붙이려는데 누군가가 부스 안으로 들어왔다.
"어,"
그 사람이었다. 한 달 전 쯤 종강 직전에 횡단보도에서 싸움 붙었던 사람. 그 사람도 막 씻고 나온 건지 그때 처럼 세팅이 돼있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 그때..."
상대방도 홍중을 알아본 건지 담배를 입에 물려다 말고 어정쩡한 자세로 멈췄다. 어떻게 여기서 만나지? 여기서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는데?
"...왜 연락 안 주셨어요?"
이 새끼가 장난하나. 지가 차를 다짜고짜 출발시켜버린 덕분에 쪽지도 제대로 확인 못하고 바람에 날려버렸는데. 이름이 뭐랬더라? 박상훈? 박성훈?
"그때 박ㅅ...훈씨가 차를 출발 시켜버린 덕분에요, 날아가서 그 쪽지가 제 손에 없네요."
네? 상훈인지 성훈인지 티 안 나게 기껏 얼버무려 말하려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 상대가 되물어왔다. 그냥 대충 좀 알아 듣지.
"박상훈... 씨가 차 출발시켜서 쪽지 날아갔다구요."
"아, 박상, 아... 그러셨구나... 근데 이런 데에서 다 뵙네요. 신기하게."
홍중은 신기하긴 개뿔이나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나저나 박상훈이 맞나보다. 홍중은 자신의 과감한 선택에 감탄했다.
"네에... 참 신기하네요."
"그... 제가 그때 사과를 제대로 못 드린 것 같아서 죄송해요. 제가 그때 진짜 급한 일이 있었어서."
그제서야 홍중은 담배에 붙을 붙이며 대답했다. 네. 다음부턴 조심하세요. 뭐 저도 다친 건 아니니까 그냥 넘어갈게요.
"근데... 원래 그렇게 좀 재수가 없으세요?"
네? 담배 첫 모금을 빨아들이던 홍중이 켁켁 거리며 기침했다. 뭐라고?
"아니 그때도 제가 설명할 시간도 안 주시고 혼자 와다다 뱉어내시더니, 사실 쪽지 잃어버린 것도 본인이신데 제 탓을 하시고... 바람에 날아가기 전에 민첩하게 잡았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홍중은 황당했다. 내 귀가 잘못 됐나... 요새 애들은 원래 이렇게 다 당돌한가? 아니 싸가지가 없나? 싶었다.
"박상훈 씨, 그쪽도 재수없는 건 매 한가지예요. 사과를 할 거면 사과만 하든가, 왜 갑자기 시비를 걸지? 아, 됐고. 그냥 이 얘기는 여기서 끝내는 걸로 합시다. 서로 얼굴 붉힐 일 만들지 말자구요, 네? 어차피 앞으로는 이렇게 우연으로라도 마주칠 일 없을 것 같으니까."
홍중은 짜증을 잔뜩 부리며 반도 안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짓이겨 끄고는 흡연구역을 나왔다. 별 꼴이야 진짜…
숙소로 돌아간 홍중은 열이 뻗쳐 고기도 잘 먹지 못했고 (원래도 입이 짧은 편이긴 했지만), 사실 밤에도 잠을 못 이뤘다. 몇 번이나 베개를 팡팡 내리치며 열분을 토해냈다.
그렇게 작지만 홍중에게는 꽤 컸을 에피소드가 있었던 여름방학이 지나고 개강 주가 되었다. 개강 첫 날 오전 강의부터 교양이었다. 오티 주니까 금방 끝내주시겠지, 생각하며 홍중은 강의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지만 홍중은 잊고 있었다. 이 강의, 에타에서 아주 악명 높은, 한 학기 내내 팀플만 한다는 지옥의 교양이었다.
"다들 소문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제 강의는 한 학기 동안 팀프로젝트로만 수업이 진행 됩니다. 그렇다고 제가 놀고 먹겠다는 소리는 당연히 아니고요. 한 시간은 제가 강의를 하고, 나머지 두 시간은 팀원들과 함께 제가 제시한 내용에 대해서 토론을 하고 결론을 도출해서 매주 보고서를 제출하는 방식의 수업을 할 거예요."
듣기만 해도 피곤했다. 4학년, 그것도 막학기에 재학 중인 홍중이 들을 만한 수업은 아닌 것 같았다. ...드랍할까? 홍중은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홍중은 인원이 덜 찬 강의 중 이게 그나마 평점이 높았던 강의라는 것을 떠올렸다. 졸업해야지... 졸업해야지 홍중아. 홍중은 자기합리화를 했다. 팀은 제가 미리 짜왔으니까, 앞에 화면 보시고 팀 별로 모여 앉아주세요. 교수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홍중의 조는 홍중의 자리 근처에서 모이라는 교수의 말에 홍중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었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교수가 화면에 띄운 같은 조에 배정된 사람들의 이름과 학번을 훑어보았다. 21학번 송진우, 김다연. 22학번 전용현... 마지막으로 17학번 박성화. 자신보다 한참 낮은 학번들을 달고 있는 이름들 속에 유일하게 자신과 같은 17학번을 발견한 홍중은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안녕하세요-, 여기 2조 맞죠?"
홍중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렇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
박상훈이었다. 미친... 같은 학교? 왜 한번도 못 봤지? 아니 저번에 마주친 것도 말이 안 됐는데 같은 학교에 같은 교양 수업을 듣고 같은 조가 될 확률은 또 얼마나 되는 거냐고. 홍중은 그다지 좋지 않았던 저번 만남을 기억해냈다. 그냥 주저 앉아 울고 싶었다.
"한국대... 셨나보네요?"
"네... 보시다시피요..."
팀원들이 다 모였다. 교수는 자기 그렇게 빡빡한 교수는 아니라며, 이번 주는 서로 모여서 팀원들끼리 간단히 자기소개 정도 하고 끝내준다고 했다. 교수들은 꼭 저렇게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 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국문과 22학번 전용현입니다!"
넉살 좋아보이는 친구였다. 팀원들 다같이 박수 짝짝짝. 그 후로 법학과 송진우와 문창과 김다연이 차례대로 자기소개를 하고, 홍중의 차례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실음과 17학번 김홍중입니다. 한 학기 동안 잘 부탁 드립니다."
이제 박상훈만 남았다. 아? 그러고 보니까 박상훈? 우리 조에 있어야 될 사람은 박성화인데?
"안녕하세요, 경영학과 17학번 박.성.화입니다."
상훈, 아니 성화는 홍중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또박 또박 입 밖으로 꺼냈다. 아니 이름이 틀렸으면 말을 해주든가, 나 놀린 거 맞지 지금? 홍중의 얼굴이 여전히 빨갛게 물들어 있는 홍중의 머리카락 만큼이나 빨개졌다.
교수가 다들 인사 나눴으면 자유롭게 가도 된다며 강의실을 먼저 나섰다. 홍중의 팀원들도 다들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홍중도 도망치 듯 강의실을 빠져나와 바로 자취방으로 직행했다. 막학기라 학점만 대충 채우면 된다는 생각에 여유롭게 수강신청 했다가 꼴박은 스스로가 홍중은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음 근데 아까 다들 다음주에 보자는 말을 했던가?
개강 첫 주는 정말 정신 없이 지났다. 사실 강의는 몇 개 듣지도 않는 홍중이었지만, 인싸 친구들을 둔 덕분에 개강 총회니 뭐니 이런 저런 행사에 억지로 끌려다니기 바빴다. 그리고 졸작 준비도 해야했다. 작곡이라는 게 쉬운 게 아니니까, 시간이 정말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다. 어쨌든 문제는 개강일로부터 한 주가 지나 그 교양 강의가 있는 요일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홍중은 최대한 미적거리며 자취방을 나와 강의실에 도착했다. 저번에 앉았던 자리에 성화가 앉아있었다. 홍중은 성화가 있는 자리로 가는 길이 죽으러 가는 저승길 같았다. 그때 너무 짜증내지 말걸. 아니 근데 저 새끼가 먼저,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수업시작이 2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는데, 다른 팀원들이 보이지가 않았다. 홍중은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저기, 박성화... 씨? 다른 분들은 안 오셨나요?"
"이제 제 이름 제대로 불러 주시네요? 일단 저는 못 봤어요."
이 새끼가. 홍중은 이를 바득 갈았다. 제가 이름 잘못 부르고 있었으면 말 좀 해주시지. 홍중은 이를 악 문 웃음을 얼굴에 띠우며 말했다.
"뭐, 홍준씨가 상훈이라면 상훈인 거겠죠. 이제라도 아셨으니까 성화라고 불러주세요."
...지금 홍준이라고 그러지 않았나? 홍중은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앞을 바라봤다. 마침 교수가 강의실로 들어온 참이었다.
"여러분, 한 주 잘 지내셨나요? 역시나 저번 주에 비해 빈자리가 많이 보이네요."
얘네 튀었구나. 그제서야 홍중은 자신들의 팀에 성화와 자신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급하게 다른 조를 스캔해 보니 군데 군데 인원이 빈 것 같은 팀들이 보였다. 다시 짜주시겠지? 홍중이 생각하려던 찰나,
"사실 이 강의의 팀 활동이 두 명 이상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활동이라 굳이 지금 조를 새로 짜거나 하진 않겠습니다. 인원이 빈 팀들은 빈 대로 진행 할 거예요."
오, 이런. 홍중은 절망했다. 박성화랑 둘이서 한 학기 동안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씩, 무려 두 시간 동안 얼굴을 맞대고 토론을 해야한댄다. 당장 졸업이고 뭐고 때려치고 강의실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러려면 진작 탈주했어야 했다. 좆됐다...
한 시간 강의가 끝나고 불편한 토론 시간이 시작되었다. 성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홍준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홍준이라고 하는 거 맞는 것 같은데... 홍중은 묘한 기시감을 애써 무시하고 토론을 이어갔다. 다행히 토론은 정상적으로 진행 되었다. 근데 얘는 뭔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
"보고서 다 쓰셨으면 제출하시고 오늘 수업은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다들 수고 하셨어요."
홍중만 불편해 하는 것 같던 강의시간이 끝났다. 홍중이 오늘도 역시 급하게 가방을 챙겨 나가려는데 성화가 그런 홍중을 붙잡았다.
"홍준 씨, 저 불편하시죠."
"아니 근데 왜 자꾸 홍준이라고 부르세요? 제 이름 김홍중이거든요?"
"아, 티 났어요? 눈치 못 챌 줄 알았는데."
장난하나? 성격 더럽네 진짜. 홍중은 말 그대로 개 빡쳤다. 맘 같아서는 그냥 성화를 한 대 치고 싶었다.
"그냥 저만 몇 달 동안 상훈으로 불린 게 억울해서 장난 좀 쳐봤어요. 어쨌든 저 불편하죠, 홍중 씨?"
"그걸 말이라고 해요? 불편해 죽겠으니까 수업시간 외에 말 걸지 말아주세요."
홍중이 다시 몸을 돌려 강의실을 나가려는 찰나 성화가 홍중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홍중 씨, 잠깐만.
"저희 그래도 한 학기 동안 계속 봐야 되는데 불편한 건 좀 풀어야 되지 않겠어요?"
아뇨, 안 풀어도 될 것 같아요, 진짜. 홍중은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사실 성화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뭐 어떻게 풀겠다는 건데.
"오늘 수업 끝나고 술 한 잔 할까요? 남자들끼리 우정 다지기에는 술이 짱인데."
그래. 맞는 말이었다. 술 마시고 개가 돼서 주먹다짐을 하든 아니면 술기운에 우정을 다지든 그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요. 저 오후 수업 없는데 오후 수업 있으세요?"
"딱 좋네요, 저도 오후 수업 없어요. 바로 가죠."
강의 끝나자마자 자취방 가서 작업할 예정이었던 홍중은 그렇게 오후 일정을 바꿨다.
"홍준 씨... 홍준 씨는 성격이 왜 그러세요?"
아 홍중이라고요. 홍중은 황당했다. 뭐? 남자들끼리 우정 다지기에는 술이 짱이야? 그렇게 말했던 박성화는 지금 소주 반 병에 꼴아버렸다. 강의실을 나와 곧바로 향한 후문 식당에서 성화는 진상을 부리고 있었다. 홍중도 술을 잘 마시는 편이 아니었는데, 그래서 본인이 자제하지 않는 이상 술자리에서 자신보다 누군가가 먼저 취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성화가 그걸 해냈다.
"아, 홍중, 홍중. 그래, 홍중 씨는 예쁘장하게 생겨서... 성격이 너무 더러워요..."
진짜 미친놈 아니야 이거? 홍중은 열이 머리 끝까지 뻗쳤다. 이거 우정 다지자는 거 맞아? 시비 거는 거 아니고? 친목을 가장한 취중진담 기회 노린 거 아니고? 홍중은 빡쳐서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카메라를 켰다.
띠링-
"홍중 씨 진짜 생긴 거 괜찮거든요? 빨간 머리도 잘 어울리고... 얼굴 예쁘장하고... 근데 성격이 너무 더러워..."
홍중의 카메라에 성화의 주정이 담겼다. 홍중은 이만하면 됐다 하고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성화의 휴대폰을 가져갔다. 잠금도 걸려있지 않은 성화의 휴대폰 최근 통화 목록을 뒤져 '경영 17 도정한' 이라고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금방 받는 전화에 지금 그쪽의 친구가 후문에 있는 닭갈비 집에 뻗어 있으니 빨리 와서 데려가라고 하고, 마찬가지로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성화의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술값을 계산하고 다시 넣어두었다. 그러고 성화를 내버려두고 가게를 나왔다. 아직 해가 쨍쨍했다. 시간이 오후 2시였다.
그렇게 또 일주일이 지나 교양 수업 있는 요일이 되었다. 홍중은 이제 더이상 성화가 불편하지 않았다. 홍중의 휴대폰에는 성화의 술주정 영상이 있었다. 오늘 성화를 만나면 그걸로 골려줄 생각이었다. 20분 먼저 도착한 홍중은 자리를 잡고 자신이 작업 중인 노래를 흥얼 거렸다.
"안녕하세요."
"오셨어요?"
"네. 일찍 오셨네요. 저번 주엔 잘 들어가셨어요? 친구가 전화 받고 왔더니 가게에 저 혼자 있었다던데..."
네, 성화 씨 너무 취하셔서요. 저는 작업할 거 있어서 먼저 갔어요. 홍중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근데 그거 기억나세요?
"뭐가요?"
"성화 씨가 저보고 예쁘게 생겼다고 그랬는데."
...네? 성화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아싸, 먹혔고. 홍중은 책상 아래로 몰래 주먹을 쥐었다.
"성화 씨가 저 예쁘장 하게 생겨서 성격 개 더럽다고 그랬는데."
"제가 그랬다고요?"
"네. 그랬다고요. 영상도 있는데. 보여 드려요?"
아뇨, 아뇨... 그건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성화의 얼굴이 당황으로 가득찼다. 홍중은 너무나 통쾌했다. 맨날 본인만 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았는데 드디어 한 방 먹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사실이잖아요."
아, 박성화 이 자식은 정말 한 마디를 안 졌다. 금쪽상담소라도 내보내고 싶었다. 네에, 맞죠... 저 성격 진짜 더럽죠.
"그럼 진짜 성격 더러운 거 한번 보여 드려요? 저번에 성화 씨가 먼저 취해서 못 봤나 본데 저도 술 마시면 한 꼬장 하거든요."
그렇게 일주일 만에 성화와 홍중의 술약속이 다시 잡혔다. 이 날 수업의 토론은 정말 치열하게 오고 갔다.
이번엔 홍중의 자취방으로 갔다. 사실 홍중은 자신의 술 취한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걸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의 자취방에 성화를 초대했다.
"뭐 시키실래요?"
"곱창 드실래요?"
저 곱창 못 먹는데. 그럼 닭발? 닭발도 못 먹어요. ...그럼 홍중 씨가 고르세요. 곱창이랑 닭발 빼면 다 괜찮아요. 성화 씨 드시고 싶으신 거 시키세요. 그럼 치킨? 엑, 치킨에 소주?
"아 뭐 어쩌라는...?"
"...삼겹살 시켜요."
겨우 겨우 메뉴를 정하고 둘은 테이블에 술을 늘어놓았다. 배달 한 시간 걸린대요. 성화의 말에 홍중은 술을 사면서 같이 사온 과자를 먼저 뜯었다. 오늘은 제가 먼저 취할 거니까 성화 씨 취하시면 안 돼요. 홍중은 성화의 잔에 이슬 톡톡을 따라줬다.
그렇게 홍중은 삼겹살이 도착하기도 전에 술에 취했다. 배달원에게 삼겹살을 받은 성화가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을 때 홍중은 테이블에 엎드려 무언가를 계속 웅얼 거리고 있었다.
"홍중아, 삼겹살 왔는데."
술 한 두 잔씩 부딪히며, 서로 동갑이라는 걸 알고 말까지 놓은 상태였다. 홍중아, 삼겹살 안 먹어? 네가 다 싫다해서 겨우 시킨 거잖아. 성화는 테이블 위의 과자를 한 쪽으로 치워놓고 삼겹살이 담긴 봉투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너 혼자 처 먹어..."
"홍중이 돈으로 시킨 건데 나 혼자 다 먹어?"
다 처 먹어... 돼지새끼야... 그건 좀 상천데... 성화는 홍중의 웅얼거림에 대답하며 테이블 위에 음식들을 하나 둘 꺼냈다. 이슬톡톡 한 세 잔 마셨나. 성화는 너무 멀쩡했다.
"야, 박성화. 너 왜 그렇게 사람을 열받게 하냐? 나 원래 이렇게 화 많은 사람 아닌데..."
"그래 보인다. 술 취하면 성격 개 더러워진다더니 아닌 것 같은데?"
성화는 홍중의 주정이 그냥 귀여웠다. 어? 귀여워?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무언가 좀 이상함을 느낌 성화였지만 일단 눈 앞에 놓인 삼겹살부터 먹기로 했다. 홍중아 돼지새끼가 진짜 삼겹살 먹는다?
"아 먹으라고..."
박성화 존나 짜증나 진짜... 사람을 맨날 우습게 만들고... 홍중은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은지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끝없이 꿍얼거렸다. 성화는 삼겹살을 먹으며 그런 홍중을 TV 보 듯 구경했다.
사실 성화는 홍중이 딱히 미운 게 아니었다. 성격이 더럽다고 생각은 했으나. 횡단보도에서의 첫 만남 때 자신이 잘못했던 것도 맞았고, 그 날까지 제출해야 했던 과제가 있어서 제대로 대처를 못하고 도망가 듯 자리를 뜬 것도 맞았다. 워터파크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도 자기 이름을 박상훈이라고 부르는 탓에 괜히 심술 한 번 부려본 것이었다. 학교 강의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신기했다. 자신의 이름이 박상훈이 아니라 박성화였다는 것을 알게 된 홍중의 반응이 너무 웃겨서 툭툭 건드렸다. 건드리면 건드리는 대로 반응하는 홍중이 웃겼다. 그래서 성화는 말썽쟁이 처럼 홍중의 신경을 긁었다.
"근데 어떻게 이렇게 우연이 겹칠 수가 있지?"
한 번은 우연이라고 하더라도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 아닌가, 이거. 자신이 꼬장 부리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본인 자취방에까지 초대하더니 막상 취하니까 꼬장이라고 부르기에도 앙증 맞은 앙탈을 부리고 있는 홍중이 귀엽고 웃겼다. 저번주 술자리에서 자신이 술에 취해 홍중에게 예쁘장하다고 말한 건 진짜 실수였다. 그렇게 느꼈던 건 맞는데... 아무튼 홍중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아이고... 이게 귀여워 보이면 어떡하지? 우스워진 건 네가 아니라 나인 것 같은데."
홍중은 자신을 싫어하나? 음... 그런 것 같았다. 그런데 박성화는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동안 짓궂은 장난을 치며 밀어냈으니 이제 당길 때가 됐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먹다보니 어느새 텅 비어버린 일회용 용기들을 성화는 봉투에 넣고 묶었다.
"홍중아 일어나봐. 방에 들어가서 자. 나 갈게."
우으... 홍중이 비척대며 대답도 없이 본인의 방으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성화는 피식 웃으며 테이블에 늘어져있는 쓰레기들을 한 데 모아 묶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챙겨 홍중의 자취방을 나섰다.
팀원들이 빠져줘서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다음주 수업은 어떠려나. 홍중을 또 어떻게 골려먹을지 고민하는 성화는 싱글벙글 분리수거함에 봉투를 휙 던져넣고 길을 걸어갔다.
Trouble In Summer? Yes, I'm A Trouble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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