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cky Treat>, 랙커
- 계간 성홍
- 2022년 9월 23일
- 6분 분량
해가 져 어두컴컴한 동네 곳곳에서 아이들이 저마다 좋아하는 캐릭터나 전설 속 상상의 인물로 분장을 하고 거리를 돌아다닌다. 호박 모양의 바구니를 들고 대문 앞에서 노크를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고 나와 초대한 적 없는 방문객을 맞이한다.
트릭 오어 트릿!
분장이나 가면 뒤에 가려진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위해 준비해둔 사탕과 초콜릿 따위를 호박 모양 바구니 안에 한 움큼 넣어준다. 잔뜩 신이 나서 손을 흔들어보이고 다른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 속에 잭오랜턴 모양의 머리통을 뒤집어 쓴 채로 걸어다니는 것은 성화에겐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첫째로, 제가 머리에 뒤집어 쓰고 있는 잭오랜턴은 집집마다 호박을 준비해 열심히 파서 만든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퀄리티가 좋았으며(호박 이목구비 안쪽에서는 LED 조명과는 차원이 다른 불빛까지 뿜어내었다), 둘째로, 대부분 어린 아이들인 틈바구니에서 혼자서만 머리통 두 세개 정도는 쑥 올라와 있기 때문에 눈에 띌 수밖에 없었고, 마지막으로 아이들은 그런 제가 신기한 모양인지 꼭 옆으로 다가와 한 번씩 말을 걸곤 했다. 그게 그렇게 난처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저라고 애들 좋으라고 이런 호박대가리를, 아니, 잭오랜턴을 머리에 끼우고 돌아다니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성화는 매년 할로윈이 오면 잭오랜턴을 머리에 쓰고, 머리 아래로는 새카만 옷으로 무장을 한 채, 온 동네 집을 돌아다니며 사탕을 얻어내기 바쁜 아이들보다도 더욱 바쁘게 돌아다녀야 했다. 찾아야할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 때 그 호박을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제 와 후회해봤자 딱히 소용은 없어서, 성화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동네 곳곳을 살폈다.
본디 저주라는 것이 그렇듯, 원한 적도 없는데 걸려버리고는 정작 간절히 원할 때엔 사라져주질 않는다. 낸들 그 호박이 저주걸린 호박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았겠느냐고, 성화는 제 저주에 대해 털어놓을 수 있는 타이밍만 생겼다 하면 늘어지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저는 그저 선량한 시민이었을 뿐인데요. '저주'라는 거창한 단어에 비해, 할로윈을 맞이해 집 화단에 장식해둘 호박을 고르다가 저주에 걸린 호박을 고른, 아주 허망하기 짝이 없는 배경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성화의 저주가 어떤 것이냐- 하면, 10월 31일이 되면 제가 냉큼 골랐던 그 호박이 잭오랜턴으로 변해 제 머리통에 저절로 씌워지는 저주였다. 그러니까 10월 31일 하루 종일. 24시간 동안 말이다. 당연히 아무리 벗겨내려고 노력해도 벗겨지지 않았다. 해가 졌을 때부터 자정이 되기 전까지, 빨간 망토를 두른 이와 키스를 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저주였다. 아주 고전적이고 또 동화같기도 한 이 저주는 성화에게 상당히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는데, 첫째로 처음본 사람과 키스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오픈된 마인드를 갖지 못했다는 점, 둘째로 할로윈에는 보통 그 해에 가장 인기가 많았던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들의 코스튬을 입기 때문에 빨간 망토를 두르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찾기조차 힘들거니와, 마지막으로 차림새를 꽤나 중요시 여기는 그에게 벗어던지지도 못하는 호박대가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다녀야한다는 점은 끔찍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이 저주를 갖게된 지도 벌써 3년째였다. 역시나 올해도 빨간 망토를 뒤집어 쓴 사람은 동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빨간 망토 이야기도 나름 유명한 편 아니었나? 어떻게 아무도 빨간 망토 코스튬을 입을 생각을 안 하는 거지? 슬슬 다리가 아파오는 느낌에 성화는 한 쪽에 있는 벤치에 걸터앉았다. 주먹을 쥐고 허벅지를 통통 두드리고 있으려니 갑자기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듣기로는 오늘 베니의 집에서 열린다는 할로윈 파티에는 리나도 참석할 예정이랬다. 대단한 걸 기대한 적도 없지만, 파티에서 마주친 핑계로 말 몇 마디 섞어보면 그걸로도 충분한데. 성화는 3년째 친구들이 여는 할로윈 파티에 가지 못했다. 호박을 머리에 뒤집어 쓴 몰골로 어디를 가겠는가. 10월 31일이 되면 잭오랜턴 얼굴로 변해버리는 성화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해가 진 후에 열심히 동네를 돌아다니며 빨간 망토를 두른 사람이 어디 없나, 샅샅이 살펴보는 것 뿐이었다.
"빨간 망토 두른 사람을 찾으면 뭐해. 처음 만난 사람이랑 키스는 또 어떻게 하냐고. 못 찾아도 문제고 찾아도 문제잖아."
입 밖으로 뱉기까지 하니 서러움이 극에 달했고, 성화는 결국 우스꽝스럽기도, 으스스해보이기도 하는 잭오랜턴 가면 아래에서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성화 본인은 제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잘 몰랐겠지만, 성화의 표정에 따라 함께 표정이 변하는 잭오랜턴 역시 울상이 된 채로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가끔 한 번씩 코나 훌쩍거리면서 눈물만 뚝뚝. 양쪽 눈가에서 흐르기 시작해 턱 밑에서 만나고야 마는 눈물을 옷 소매로 한 번씩 벅벅 닦아대고 있는데, 옆에서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호박대가리. 왜 울어."
"... 예?"
"왜 우냐고. 할로윈인데 사탕 못 받았어?"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것은 제가 앉아있는 벤치의 빈 자리에 꽤나 불량한 포즈로 앉아서는 입에 막대사탕을 물고 등받이에 팔까지 걸친 남자였다. 그것도 빨간 망토를 두른. 빨간 망토. 성화는 눈물이 싹 달아나는 느낌에 바보같은 얼굴을 하고선 코를 훌쩍였다.
"사탕 못 받았다고 울면 어떡해. 그렇게 어려보이지도 않는데. 늙은 호박한테 실례인가. 암튼. 자, 사탕."
"... 히끅. 감사, 감사합니다."
"목소리는 예쁘네. 근데 그 호박 직접 만든 거야? 표정이 되게 리얼하네."
빨간 망토를 두른 남자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성화에게 막대사탕과 초콜릿, 태피 따위를 한움큼 건네주었다. 양 손을 뻗어 달큰한 것들을 받은 성화는 제 무릎 위에 양 손을 올려둔 채로 잠시 망설이다가, 어차피 제가 누군지 알 리도 없는데 뭐 어떠냐는 생각에 저주에 대해 털어놓기로 결심한다.
"... 제가 만든 거 아니에요. 저주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예요."
"저주? 뭔... 머리가 호박대가리로 변하는 저주가 다 있냐. 그것 때문에 운 거야?"
"네... 할로윈만 되면 이 꼴로 24시간 동안 변해요. 나는... 나는 그냥... 펌킨 패치* 갔다가... 잭오랜턴 만들면 딱이겠다 싶은 호박을 집었는데 그게 저주받은 호박이었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요... 벌써 3년째란 말이에요... 흡, 3년 동안 친구들이 여는 할로윈 파티는 꿈도 못 꾸고오... 올해는 리나도 할로윈 파티 갔다는데에... 말도 못 걸어보고오... 흡끅, 너무 억, 억울해요... 흐엉..."
(*농장에 방문하여 할로윈 장식을 위한 호박을 고르는 것)
빨간 망토를 두르고 있는 남자를 처음 봤을 때 놀라서 뚝 그쳤던 울음은, 저주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자 다시 터져서, 거의 오열 수준으로 변했다. 남자는 그런 성화를 딱히 달래주려고 하지도 않았거니와, 제가 말한 저주를 믿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성화는 할로윈에 '빨간 망토'를 입은 사람을 3년 중 처음 발견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그에게 제 저주를 털어놓고는 엉엉 울었다. 자꾸 턱에 고이는 눈물을 하도 소매로 여러 번 닦아댔더니, 왼쪽이고 오른쪽이고 양 소매가 모두 축축해져버릴 정도로 울어댔다. 어렸을 때 친형이 제가 제일 아끼던 다스베이더 피규어를 부숴버린 이후로 가장 크게, 어린 애처럼 엉엉 울었다.
"야."
"으엉... 에? 히끅,"
"근데 저주들은 보통 풀 수 있는 방법도 있는 거 아니야? 네 저주는 어떻게 풀 수 있는지 몰라?"
"아, 아는데..."
"아는데?"
"... 그 쪽한테 말 못해요."
지금 당신처럼 빨간 망토를 두르고 있는 사람과 자정이 되기 전에 키스를 해야 풀리는 저주라는 말을 어떻게 해... 물론 저주를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도 맞았지만, 성화는 차마 남자에게 '당신과 키스해야 저주가 풀려요'라는 누가 봐도 개수작으로밖엔 들리지 않는 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하도 울어댄 탓에 쉬이 진정되지 않는 호흡을 꾹꾹 누르는 와중에도, 성화는 입을 일자로 꾹 닫고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뭔데. 저주는 다 얘기 해놓고 푸는 방법은 알면서 왜 얘기를 못 해. 뭐, 할로윈에 처음 보는 사람이랑 섹스라도 해야 풀리는 그런 건가?"
"예?! 히끅, 아니, 거든요?!"
"아, 그럼 뭔데.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왜 얘기를 하다 말아. 어? 원래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최고의 방법은 말을 하다가 마는 거라고, 임마!"
남자는 가뜩이나 동그란 성화의 눈을 더 동그래지게 만들어놓고선(물론 남자에겐 호박대가리로나 보였겠지만) 왜 말을 하다 마는 것이냐며 역정을 내었다. 우다다 쏘아붙이는 남자의 말을 듣던 성화는 이러다간 남자의 얼굴까지 망토의 색처럼 새빨개질 것 같다는 생각에 다급하게 대답했다.
"빨, 빨간 망토 입은 사람이랑 키스해야 풀려요! 제가 진짜 개수작 부리는 거 아니구요, 갑자기 아무거나 막 지어내는 거 아니고요, 하필이면 그 쪽이 빨간 망토를 입고 있어서 제가 말 안 하려고 했는데요, 계속 그렇게 물어보셔서 어쩔 수 없이 대답하는 거거든요?!"
"빨간 망토...?"
남자는 고개를 숙여 제가 두르고 있는 망토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제야 성화가 왜 말하지 않으려 애를 썼는지 알게 된 남자는 말없이 목덜미를 쓸었다. 순식간에 어색해진 분위기에 성화는 도망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러기로 마음을 먹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나, 제 소매를 붙잡은 남자의 손을 발견하곤 이도저도 못하다 결국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 저, 집에 갈게요.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 사탕도요."
"... 3년 째라며."
"네...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 또 빨간 망토 입은 사람이 나타나겠죠. 막, 몇 년 후 아니고 내년에 나타날 수도 있잖아요."
"내년에도 안 나타나면?"
"... 내후년...?"
"내후년에도 안 나타나면."
"... 언젠간... 한 명쯤은 나타나겠죠..."
빙 돌아가지말고 그냥 지금 해. 남자의 말에 성화는 정면만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팍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금요? 안 그러면 또 몇 년을 더 기다릴지도 모르잖아. 빨간 망토가 할로윈에 인기 많은 캐릭터도 아니고. 그치만... 그치만 저희 서로 통성명도 안 했는데... 통성명 하면 되지. 난 김홍중이야. 나이는 열아홉. 얼마 전에 이사 왔어. 어... 동갑이네... 나는... 박성화... 아니 근데 이름이랑 나이밖에 모르는데 키스를 어떻게, 나 얼마 전에 이사온 것도 방금 들어서 알잖아. 나에 대해서 세 가지나 아네. 그럼 됐지. 그리고 어차피 호박머리에 하는 건데 뭐 어때. 그냥 좀 해. 왜 이렇게 말이 많아.
그러더니 홍중은 성화의 호박 머리통을 붙잡고는, 호박 머리의 입 부분에 찐하게 입을 맞대었다. 만화였다면 쪼오오오오오오옥- 따위의 의태어가 머리 위에 띄워졌을 것같은 입맞춤이었다. 성화는 놀라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입에 닿는 홍중의 입술이 제 상상보다 말캉해서 그럴 수밖엔 없었다. 어, 잠시만. 내 입술에 닿았다고? 잭오랜턴이 아니고? 성화는 다시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왼쪽 손목을 들어 시간이 아직 자정이 넘어가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제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앞에 보이는 홍중은 여전히 눈을 내리감은 채로 입을 떼지 않고 있었고, 손에 만져지는 것은 호박머리통의 질감이 아닌, 제 피부였다.
"... 이쯤이면 됐겠... 됐....네?"
"헐. 헐... 헐!"
성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방 뛰었다. 저주가 풀린 게 틀림없었다. 아직 열한 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제 본모습으로 돌아오다니! 되려 먼저 나서서 입을 맞댄 홍중은 벙찐 채로 신난 토끼마냥 제자리에서 방방 뛰어대는 성화를 바라보기만 했다. 성화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앉아있는 홍중을 일으켜 품에 가득 끌어안았다.
"야, 홍중아! 진짜진짜 너무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나 또 몇 년 더 기다려야 됐을지도 몰라!!"
"어, 어어... 너, 어... 그래... 원래 얼굴이 훨씬 낫네... 어..."
"나도 이제 할로윈에 파티도 갈 수 있고!"
"... 리나인가 뭔가 걔랑 얘기도 하고?"
"어?"
어쩐지 뚱해보이는 홍중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성화는 제 허리에 둘러져서 풀 생각을 않는 홍중의 팔을 한 번, 그리고 빨간 망토의 후드가 벗겨져 푸슬푸슬한 걔의 앞머리칼을 한 번, 마지막으로 제 것과 닿았던 말캉한 입술을 쳐다보았다. 질투하나?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굳이 그러진 않았다. 대신 성화는 팔에 힘을 주어 홍중을 더 바짝 끌어안고선 얼굴을 가까이 했다.
"... 리나가 누군데?"
"... 모르겠는데."
"그치, 나도 진짜 모르겠다."
그리곤 유난히 밝아보이는 달빛 아래에서 두 입술은 다시 맞닿았다. 그 짧은 새에 덜 말캉해졌을리가 없는 걔의 입술은 한참이나 물고 있던 막대사탕 탓인지 달착지근하기 짝이 없다. 손을 들어 벗겨졌던 홍중의 후드를 다시 씌워주곤 후드를 붙잡은 채로 달큰함을 조금 더 깊게 맛본다. 어쩌면 제게 나타나 3년동안 괴롭혔던 그 저주는, 홍중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눈이 마주치면, 홍중은 눈이 접히도록 웃어보인다. 그리곤 한 마디.
성화야,
Trick or Tr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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