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ring like spring>, 청해
- 계간 성홍
- 2022년 3월 21일
- 17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2년 3월 22일
"홍중아"
"내가 너한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너, 되게 밉다. 지금"
6년이었다. 너무도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던, 얼굴이며 행동 하나 하나에 어린 티 가득 달고서 멋모르던 스무살 김홍중과 박성화가 스물 다섯이 될 때까지. 너의 세상에 나를, 나의 세상에 너를 초대해서 우린 참 다른 게 많구나 순간순간 깨닫고 배우고 이해하며 연인이란 이름을 유지한 시간이. 그 시간 속에 쌓인 추억과 이야기들은 하나 하나 기억하기도 벅찰만큼 한가득 쌓여 있었다. 내 옆에 네가, 네 옆에 내가 있는 것도 새삼스럽고 설레던 사이가 아무 말 없이도 편하고, 내 곁에 곤히 잠든 네가 익숙해질때까지 흐른 시간들이 모여서 박성화의 20대는 온통 김홍중이었다. 아마, 그건 상대도 비슷하겠지.
"너만 내가 미울 거 같아?"
"..됐다. 얘기해서 뭐 하냐. 결국 또 나쁜 건 나겠지"
그래서 지금, 성화는 어쩌면 몽땅 사라질지도 모를 그 시간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둘이 함께 하는 6년의 시간동안 작고 큰 다툼들은 당연히도 존재 해 왔지만 오늘 같은 적은 처음이었다. 이건, 누가 봐도 명백한 싸움이었고 균열이었으니까. 함께 한 오랜 시간은 서로를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만들었고 그건 누구보다 정확하게 아픈 곳을 찌르고 다치게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서로 잔뜩 상처 주고 상처 받고 돌아와 누운 침대 위에서 성화는 생각했다. 오늘의 시간이 불러올지도 모를 '우리'의 균열을. 어쩌면 멀지 않은 어느 날에 '우리'는 '너와 나'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박성화와 김홍중은 박성화 그리고 김홍중이 될 수도 있겠다고.
하지만 추억이 아쉬운 것과 별개로 아닌 건 아니었다. 양보와 배려는 호의이지 권리가 아니라는 걸 홍중이 잊은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연애에 있어 을을 자처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갑이 되고자 한 적은 더더욱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너와 하는 사랑이 행복했고 함께 하는 시간이 소중했을뿐. 네가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참은 거고 네가 힘든 게 싫어 버틴건데 내 노력을 몰라주는 네가 섭섭했고 억울해서, 그 끝에는 내가 널 소중히 여기는만큼 너에게 내가 중요하지 않은 건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진 말자. 근데 애초에 네가 날 딱 그만큼만 소중히 여겼던 거면 어떡할까.
-
'똑똑'
너무 오랜만에 맞이하는, 김홍중이 없는 주말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난 머리를 하고 이부자리를 정리하며 또 한 번 생각했다. 뭐가 맞을까. 굽히고 들어가는 것쯤은 자존심이 상할 축에 끼지도 않았지만 저는 의미 없는 사과를 하고 싶지 않았다. 가득 쏟아낸 모진 말들 속에 진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허울뿐인 화해보다는 우리를 위한 제대로 된 해결을 하고 싶었다. 그래야 우리는 더 오래 우리일 수 있을테니까.
젖은 머리를 말리며 혹시나 연락이 오지는 않았을까, 내가 먼저 연락을 해 볼까 하고 들었던 핸드폰이 꺼져 있어 충전을 하고 화면을 켤 때쯤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누가 이 아침부터 찾아온건지. 아직 늦은 아침을 주문하지도, 기다리는 택배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혹시 제가 잊어버린 약속이 있나 싶어 핸드폰을 켜면 뒤늦게 알람 하나가 도착했다
홍이장군
[908호 맞지?] 오전 9:37
소름 끼칠만큼 새삼스러운 문장이었다. 혹시 잘못 본 건가 싶어 눈도 비벼 보았다. 지금, 김홍중이, 우리 집 주소를 물은건가. 제가 지금 꿈을 꾸는 것도, 어쩌면 홍중이 말도 안 되는 장난을 치는 것도 다 아니라면 다른 사람도 아닌 홍중이 집 주소를 물어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진짜 김홍중이 직접 보낸 거라면, 그래서 정말 저 노크 소리의 주인공이 김홍중이라면 더 이상한 일이었다. 몇 백번은 누른 탓에 손에 익어 이젠 3초만에 여는 저 문 앞에 3분째 서 있는다는 게. 벨을 누르지도 않고 조심스레 콩콩 두드리고만 있다는 게.
"누구세.."
"아, 혹시 아니면 어떡하나 해서 전화했는데 계속 안 받더라고"
"..."
"네가 내 전화 안 받은 적은 없어서 혹시 아픈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김홍중이었다.
하지만 제가 어제 만난 걔 말고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제 인생 가장 충격 그 자체였던 사람. 스무살 박성화가 보자마자 한 눈에 반해 몇 달을 맴돌았던, 자존심 다 버려가며 잔뜩 사랑할 수밖에 없을만큼 반짝반짝 빛나던 그 김홍중이 그 때의 얼굴, 그 모습 그대로 제 눈 앞에 서 있었다. 도저히 믿기지도, 믿을 수도 없는 상황에 멍하니 서서 바라보자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했다고 생각한건지 해명하며 통화목록을 보여주는 핸드폰이 제가 손을 덜덜 떨며 번호를 찍어주던 그 기종과 똑같아서 더 머리가 아파왔다.
"초대도 안 했는데 불쑥 찾아와서 미안"
"...아니야"
"아.. 그, 혹시나 해서 약도 이것저것 사 왔어"
"어, 고마워.. 우선 들어와"
연기가 아니란 것쯤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제가 아는 김홍중은 이런 발칙한 행동을 뻔뻔하게 할 사람이 아니었고 그걸 뒷받침할만한 연기력도 없었다. 게다가 동글동글한 눈빛과 말투, 아직 다 빠지지 못한 젖살 그리고 제가 인생 처음으로 리폼 한 거라며 닳고 닳을 때까지 쓰다 2년 전에 같이 버렸던 저 검은색 크로스백까지. 모든 게 그대로였고 그래서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지금 김홍중이 세상에서 제일 미운 박성화 앞에, 박성화 눈에 세상에서 제일 예뻤던 김홍중이 나타나면 대체 어쩌라는건지.
혼자 맞이하게 될 지도 모를 스물 다섯의 봄 앞에 스무살의 봄이 찾아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무살 박성화의 봄이었던 김홍중이
-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 잠깐 앉아 있어. 마실 거라도 줄게"
"그나저나 너 되게 깔끔하게 해 놓고 산다. 내 방은 완전 엉망인데"
머리가 하얘지고 온몸이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이런 기분이라는 걸 오랜만에 다시 느꼈다.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은 지금, 사실 제일 피하고 싶은 상대였는데 쇼파 구석에 앉아 모든 게 신기한듯 이리저리 둘러보는 저 얼굴은 그 때의 제 하루를 온통 지배하던 사람이라 그저 멍하니, 홀린듯 가만히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불가항력이랄까.
제 집보다, 작업실보다 더 익숙하고 편하다며 이젠 여기 제 지분도 반쯤은 있다고 당당히 말하며 쇼파 위로 늘어지던 걔가, 오늘은 그 쇼파에 바르게 앉아 온 몸과 얼굴로 긴장을 티내면서 모든 게 신기하고 처음 본다는 표정으로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다는 것도 너무 자극적이었고 가끔 잠이 오지 않을 때면 꺼내보던, 어느새 몇 권이나 되어버린 앨범 안 사진 속 그 주인공이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와 제 눈 앞에서 움직인다는 게 너무 말도 안 될만큼 이상한 기분이라 성화는 저도 몰래 홍중을 위해 준비했던 음료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이와중에 설레고 심장이 뛰는 제 자신이 진짜 답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밥은 먹었어?"
"..아니"
"배 안 고파? 뭐 먹으러 갈까? 아니면 배달 시켜도 되고"
"..."
정정해야겠다. 답이 없는 게 아니라 이건 아주 당연한 반응이라고. 아무래도 제가 한 눈에 반해버렸던 바로 그 사람이 눈 앞에 있는데 어쩌겠어. 문제는 제 기억보다 실제 스무살 김홍중은 훨씬 더 귀엽고 말랑하고 그냥 저를 미치게 하기에 너무 완벽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뭔가 분명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괜히 죄 없는 입술만 꼭꼭 물었다 놓으면서 입을 뗄까 말까 하는 저 얼굴은 어쩌자고 저렇게, 조금 짜증날정도라서 괜히 손에 전기가 찌릿찌릿 올랐다. 이제 제게 김홍중은 너무 익숙하고 조금은 당연한 존재인데 겨우 시간을 좀 거슬렀다고 이렇게 모든 게 새삼스럽고 낯설고 간지러워질 일인가 싶긴 하지만. 어쩌겠어. 김홍중인데.
"응?"
"..그래서, 아픈 건 아니지?"
"...어"
"다행이네"
"걱정시켜서 미안. 분명 어제 충전 해 두고 잤는데 일어나니까 꺼져있더라고"
안 그래도 제 맘대로 뛰는 심장에 저 스무살이, 물론 본인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겠지만, 기름을 확 하고 부어버렸다. 아, 진짜 어떡하지. 망설이다 꺼낸 말이 제 걱정이라 성화는 하마터면 눈물이 핑하고 돌 뻔했다. 맘 같아서는 뛰어나가 폭 안아주고 싶었지만 우린 아직 그런 사이는 아니니까. 스무살 김홍중 앞에선 저도 다시 스무살 박성화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모든 행동 하나 하나 신경 쓰이고 조심스럽고 괜히 뚝딱거리는 그런, 긴장하고 예민해지는 느낌이라.
쇼파 앞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홍중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어제 왜 그렇게 모질게 상처를 줬고 오늘 너는 왜, 이런 모습으로 내 눈 앞에 나타났을까. 어쩌면 너희는 아직 헤어질 때가 아니라고 알려주는 신의 호의 같은 건 아닐까. 네가 잠깐 잊고 있었던, 네 곁에 얼마나 소중하고 예쁜 존재가 있었는지 다시 기억 해 보라고. 그럼 이건 김홍중의 간절함일까 박성화의 간절함일까. 그게 어느 쪽이든 핸드폰을 몇 번 톡톡 만지다 제 앞에 놓인 물컵을 양손으로 꼭 쥐고 꼴깍꼴깍 마시다 저랑 딱 눈이 마주친 김홍중은 일단, 너무 사랑스러웠다
"왜?"
"아냐, 그냥"
예뻐서. 라고 말할 뻔한 걸 겨우 참아냈다. 지금 김홍중한테는 그냥 들입다 말하고 등을 한 대 맞거나 경멸의 눈빛을 받고 넘어가면 될 일이지만 저 때의 박성화는 감히 저런 말을 할 깡도 없었을뿐더러 그렇게 말했다간 질색하고 도망갈 거란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조급해도 한 걸음씩 천천히, 스며들 수 있고 익숙해질 수 있도록. 그렇게 천천히 만들어 온 오늘이었기에 그냥이라는 말과 미소로 넘긴 뒤에 부엌으로 가 요구르트 하나를 꺼내 테이블 앞에 놓아줬다. 홍중이 좋다고 말한 뒤 언제나 저희 집 냉장고 한 칸을 항상 가득 차지하고 있는
"이거 뭐야?"
"나 얼른 옷 갈아 입고 올게. 방금 꺼낸거라 차가우니까 2분 있다 먹어. 차가운 거 바로 먹으면 배탈나. 알았지?"
"...내가 요구르트 좋아한다고 말했었어?"
"응. 그럼"
사실 딱히 제 말을 들을거라 기대하진 않았는데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인 요구르트와 빨대를 뚫어져라 바라 보고 있는 게 제법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났다. 진짜 제 기억보다 훨씬 귀여웠구나, 김홍중은. 아니면 어쩌다보니 다섯살 어린 연하를 만나는 기분이라 괜히 더 그런건가. 또 가만히 서서 멍하니 구경할뻔한 제 자신을 겨우 끌고 와 옷장 문을 열면 꼭 첫데이트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이 몇번째 데이트인지, 어떤 하루를 보내게 될지, 애초에 대체 무슨 일인지 제가 알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즐겨야지.
"..나랑 맞춰 입은거야?"
"응! 나 이거 한 번 해 보고 싶었어"
"그래. 괜찮네"
그래도 이건 해 봐야지. 대놓고 티나는 커플룩 같은 건 저도 홍중도 싫어하는 타입이었지만 이정도의 시밀러룩은 괜찮지 않나 싶기도 하고. 또 자고로 스무살 첫연애는 누가 봐도 알아챌만큼 티 내 주는 게 예의라고 배웠다고 스스로 합리화를 했다. 똑같이 검은색 가방을 들고, 저는 청바지 대신 청자켓. 거울에 비친 모습이 퍽 마음에 들어 설레는 기분으로 나가면 그 사이 깨끗히 비운 요구르트통을 버리고 돌아오던 홍중이 저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여주는데에 더 신이 났다. 홍중이가 나 예쁘다고 칭찬 해 줬어
"나가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아직은. 오는 데 보니까 벚꽃 예쁘게 폈더라"
"그럼 벚꽃 구경 갈까? 나 너랑 같이 가고 싶은 곳 있어"
"그래, 그러자"
"신발 뭐 신지.. 어, 이거 신어야겠다. 이거 네가..ㅅ"
"응?"
사 준 거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 상황에선 틀리다 못해 틀려 먹은 말이었다. 박성화의 스물 한 살 생일에 '너는 이제 만으로도 꼼짝없이 20대네, 난 아직 7개월이나 더 남았는데-' 하고 놀려대던 김홍중이 준 선물이었으니까. 벌써 이 신발이 5년이나 됐구나 하고 감상에 젖기엔 하마터면 오늘이 마지막 데이트가 될 뻔 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스무살의 김홍중은 스물 하나의 박성화도, 김홍중도 모르니까. 저는 그저 엄청난 말실수를 한 사람이 되고 홍중이는 '걘 누군데' 하고 저 문을 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르니까. 물론 제가 뛰어가 무릎이라도 꿇고 잡았겠지만. 두고 두고 혼날 일이 되었겠지만.
"..신고 온 거랑 비슷하다고. 이왕 맞출 거면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제대로 맞춰야지"
잘 둘러댔다. 박성화. 잘했어. 훌륭하다.
-
"어디로 가면 돼?"
"일단 여기서 직진. 걸어서 한 15분 정도 걸릴거야"
당연하던 것들이 낯설어진다는 건 여러모로 묘한 경험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스무살이 옆에 있는 탓인지 저도 같이, 자꾸 스무살의 그 때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해마다 함께 벚꽃을 보러가고 가끔은 고요한 밤공기를 느끼며 자주 걸었던, 우리의 추억이 가득한 그 장소를 새삼스레 하나하나, 처음부터 설명하고 있는 자신이 신기했고 낯설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낯선 건 아까부터 찌릿찌릿 전기가 오르는 것만 같은, 꼭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이 저릿한 오른손이었다.
겨우 손을 잡은 것뿐인데, 얘랑은 더 한 것도 몇 번이나 한 사이인데 온 신경이 손으로 쏠리는 것도, 제 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간질간질한 게 낯설고 또 설레어서 큰일이었다. 오히려 손을 잡힌 스무살은 덤덤해보이는데 왜 스물다섯 저 혼자서 이렇게도 난리인지.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어도 워낙 익숙한 곳이라 다행히 발이 잘 이끌어 강변 근처 작은 공원에 도착했다. 저는 눈을 돌릴 때마다 여기저기 가득히 묻어 있는 추억이 자연스레 생각나는데 옆에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 홍중에겐 모든 게 다 미래에 일어날 일이 될 거라는 게. 기분이 이상해서 괜히 더 생각에 빠져들었다. 스무살 여름 밤에, 우린 여기서 불꽃놀이 축제를 같이 보게 될 거야. 스물 하나 가을엔 저기 저 벤치 앞에서 롤링페이퍼 주고 받으면서 울 거고 스물 둘 겨울에는 저기 저 공터에 잔뜩 쌓인 눈으로 눈사람을 열심히 만들거야. 그 눈사람 두 개는 우리집 냉장고에 3달동안 머물게 될 거고. 모두 너의 미래가 될 거고 나의 과거가 된 소중한 추억들이야.
조금 더 어렸을 때엔 실수에 속상해하며 후회했던 적이 많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돌아가 바꾸고 싶다거나 돌이키고 싶은 순간 같은 건 없었다. 설사 서툴어서 후회했던 순간이 있었을지언정 그건 그 때 저의 최선이었고 진심이었으니까
그래서, 그 생각들의 끝은 지금을 그리고 오늘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에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너의 미래와 나의 과거 그 이전에 이 순간은 우리 둘의 현재니까. 설사 이게 너에겐 첫 데이트고 나에겐 마지막 데이트가 될 지라도 아름다운 기억이어야 하는 것 하나만은 확실하니까.
"성화야"
"와, 씨.. 이건 반칙인데"
너무 당황하고 놀라서 저도 몰래 험한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저 입으로 불리는 제 이름을 수 백번, 아니 수 천번은 더 들었지만 스무살 김홍중이 부르는 저 세 글자는 하나의 치명타 같은 거였다. 평생 '야', '박성화' 하고 툭툭대는 말투만 들어오던 애한테 다정하고 말랑한 말투의 '성화야' 하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충격 그 자체라 듣자마자 맥을 못 추리게 되는 일종의 병이 있었다. 딱히 고치고 싶지 않은. 그래도 이젠 꽤 자주, 많이 들어서 면역 정도는 생긴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건지, 아니면 역시 사랑에 빠지게 했던 그 순간 그리고 그 찰나는 평생 가도 약해지지 않는 마력 같은 게 있는건지 이정도면 쟤도 들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한 손은 제게 잡혀 감싸진채로, 살짝 올려다보며, 내 이름을 저렇게 다정하고 예쁘게 부르는데 제가 당해낼 도리 같은 건 애초에 없었으니까.
"뭐라고?"
"아니야. 왜?"
"여기 진짜 예쁘다"
"그치. 네가 좋아할 거 같았어. 저 쪽으로 가면 더 예쁜 곳 있어. 우리 거기 가서 사진 찍자"
-
"우와, 야, 너 사진 진짜 잘 찍는다"
"당연하지. 경력이 몇 년인데"
"응? 경력?"
"어? 아니, 내가 사진 찍는 거 좋아해서 어릴때도 막 부모님이랑 형이랑 친구들 다 찍어주고 막.."
"아, 그래? 나도 찍어줄게. 저기 가서 서 봐. 저기가 사진 예쁘게 나오더라"
그렇게 한참을 서로 찍어주다가, 또 한참을 손 잡고 걷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풍경이 넘치게 예뻐서 풍경 사진도 한가득 찍으며 열심히 돌아다니다 보니 따뜻해진 날씨에 홍중의 볼도 살짝 붉게 물들어있었다. 분홍빛 풍경 아래 붉은 볼 하며 쨍알대느라 열심히 움직이는 입술이 꽤 자극적이라서 저도 몰래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참아야겠지
“우리 사진 한 장만 더 찍고 가자. 저기서 찍으면 예쁘겠다”
어느새 신나서 저를 끌고 가는 그 손을 따라가면 늘, 여기서 꼭 한 장은 찍었던 둘만의 포토스팟에 도착했다. 그러고보니 역사가 꽤 깊은 곳이었구나, 남들 눈에는 특별할 것도 딱히 예쁠 것도 없는 돌계단 옆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우리는 여길 참 좋아했고 올 때마다 꼭 사진을 찍었었다.
“응, 거기 서면 되겠다”
“아니, 너도 같이 찍어. 우리 같이 찍은 사진이 없잖아”
“잠깐만. 저기 죄송한데 저희 사진 한 장만, 아, 네. 감사합니다”
그 옆으로 다가가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냥 곁에 서서 브이를 할까, 다정히 어깨 동무를 할까, 어정쩡하게 찍으면 후회할 거 같은데, 앨범 속 우리는 어떤 포즈로 찍었더라. 한 걸음에 생각 하나씩을 해 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우선은 저도 따라 브이를 하고 찰칵 하는 소리에 맞춰 고개를 살짝 홍중의 쪽으로 기울였다.
그냥, 요새 가끔 하던 장난이 불쑥 떠올라서. 콩하고 머리를 부딪히면 아르릉 하고 돌아오는 홍중의 반응이 귀여워 자주 하던 거였는데 오늘은 그냥 가볍게 톡, 닿을 듯 말 듯 할 정도만.
“이거 예쁘다. 나 배경화면 해야지. 이건 프로필 사진”
“오늘 사진 찍은 거 집에 가서 정리한 다음에 보내줄게”
“어, 아니. 다 보내줘. 정리는 내가 할게. 내 눈엔 예쁜데 너 막 맘에 안 든다고 다 지워버리면 어떡해”
“아, 싫어. 내 얼굴 내가 예쁜 거 고르겠다는데 왜”
“난 다 예쁘다는데 왜”
“너 폴라로이드 찍은 것도 다 보여줘봐. 내가 확인을 좀 해야겠어”
“싫어. 내 꺼야. 김홍중 벚꽃 에디션”
“아, 뭐래”
오늘은 좀 차분하고 듬직한, 비록 저 혼자만 알지라도, 다섯살이나 많은 연상의 매력을 뽐내고 싶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오히려 스무살보다 더 유치한 박성화만 남아있었다. 어차피 나란히 손 잡고 걸어갈거면서 안 잡히겠다고 죽어라 뛰어가고, 그 와중에 잡느라 헥헥대는 홍중이 걱정돼 다시 다가가면서도 사진은 가방 가장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 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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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중아, 나 방금 반한 거 같아”
“그럼 방금 전까진 아니었고?”
“방금 또, 아니 한 오백번째 반한 거 같아”
벚꽃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길,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다며 저를 이끄는 손을 따라 도착한 곳은 있는 줄도 몰랐던 골목 구석의 게임랜드였다. 우리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 얜 또 여길 어떻게 알았나 궁금하기도 하고.
그 곳에서 추억의 게임들을 하나씩 하다 보니 점점 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DDR도, 총게임도, 핑퐁도, 오토바이 게임도. 이게 뭐라고 어느새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눈으로 홍중을 찾으면 가게 한구석 농구게임 앞에 야무지게 가방까지 내려놓고 집중하는 뒷통수가 보였다.
조심히 다가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앳된 얼굴에서 지금의 김홍중이 보이기도 하고, 쟤가 저렇게 집중할 때 참 멋있긴 했지. 하고 상념에 젖어 한참 구경하다 화려한 효과음과 박수소리에 정신을 차리면 제일 윗칸의 빨간 숫자 세 개가 뿅하고 새롭게 바뀌었다.
“우와, 홍중아, 대박 멋있어”
“됐어. 오버 좀 하지 마. 너 배 안 고파?”
“배고파. 배고픈지 좀 오래 됐어”
아, 마지막 말은 하지 말 걸 싶었다. 아무리 본능이라지만 그래도 좀 참을 걸. 다행히 홍중이 그냥 웃어버려서 저도 자연스레 넘길 수 있었다. 공원에서 산책을 마치고 나면 종종 가고는 했던 식당에 들려 아주 오랜만에, 사장님 몰래 벽 구석에 낙서도 하고, 늘 그렇듯 홍중의 몫까지 제가 깨끗이 비운 그릇을 뒤로 하고 바로 다음 블록에 있는 단골 카페에 들려 딸기라떼 한 잔, 플레인 요거트 한 잔 그리고 당근 케익 하나.
마주 앉아 오늘 한가득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벚꽃나무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사진부터 꼭 왕관처럼 벚꽃을 머리 위에 살포시 얹은 사진, 우연히 머리 위에 앉은 꽃잎 하나에 호들갑 떨며 얼른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까지.
한 장씩 넘길수록 푼수처럼 웃음이 새어나왔다. 걸어다니다 지쳤는지 나무 옆에 쭈그려 앉아 있다가 찰칵 소리에 고개를 들어 저와 눈이 마주친 사진을 마지막으로 핸드폰에서 눈을 떼면 그 얼굴이 꽤 심각한 표정으로 제 핸드폰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사진을 아주 열심히도 정리하시는 중이겠지
“벌써 어두워졌네”
“어, 그러게. 너 이 사진 잘 나왔다”
“어떤 거? 나 보여줘”
카페 창 너머 바깥은 점점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그 말을 곧, 익숙했던 모든 게 낯설어진 오늘 하루가 곧 끝이 난다는 뜻이기도 했다. 별 일 아니었던 모든 게 별 게 되어버린 그런 날이.
홍중이 내민 화면 속에는 벚꽃 아래에서 꽃받침을 하고 있는 제가 있었다. 난 브이가 얼굴도 덜 가리고 더 예쁜 거 같은데. 하고 살짝 의견을 피력했더니 뻔뻔한 자세가 마음에 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저도 몰래 불만의 입술이 삐쭉하고 튀어나왔지만 예쁘단 말에 또 쉽게 녹아버렸다
“다 먹었으면 가자. 아, 사진 지금 보내줘?”
“엉. 나도 보내줄게. 근데 나 진짜 사진 잘 찍은 거 같애”
“응, 그렇구나”
-
“밤에 보는 벚꽃도 되게 예쁘다”
“그러게. 아까 볼 때랑 다른 느낌이기도 하고”
홍중의 자취방이 6년째 그대로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고 티 안 나게 데려다 줄 수 있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도 벚꽃나무가 하나 둘 자리 잡고 있어서, 늘 이맘때쯤엔 일부러 밤산책을 하기도 했었다. 조용하게 또다른 분위기의 벚꽃을 느낄 수 있어서 좋기도 하고, 북적대는 인파 없이 단둘이 마음껏 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어서
“우리 이거 잠깐만 더 보다 가자”
“그래. 여기서도 사진 찍어줄까? 가로등 불 있어서 괜찮을 거 같은데”
“아니. 이건 그냥 볼래”
소음이 차분히 가라앉은 거리에, 은은하게 비추는 가로등 불빛 아래, 가만히 벚꽃을 보고 있는 그 얼굴은 도저히 예쁘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눈에만 담아두기엔 도저히 너무 아까워서 찰칵 하고 사진을 찍으면 그 소리에 돌아보는 얼굴은 더 예뻐서, 게다가 그렇게 웃어버리기까지 하면,
“...”
아까는 꾹 참았으니까. 사실 오늘 한 열 번 정도는 참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지금은, 해도 되는 거 아닐까. 내 첫사랑이 이렇게 예쁜데. 그 순간에 벚꽃잎 하나가 포로롱 머리 위로 떨어지는데 이건 안 하는 게 실례가 아닐까. 그렇게 합리화를 했다. 김홍중이 꼬시는데 넘어가야지.
쪽 하고 입술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감았던 눈을 뜨면 놀란건지 멍한건지 묘한 표정을 하고 있는 홍중과 눈이 마주쳤다. 네가 너무 예뻤던 탓이라고 변명하면 안 들어줄테니까, 근데 잘못한 건 하나도 없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야,”
분명 한 번만 더, 짧게 쪽 하고 떨어지려고 했는데 저를 부르더니 덥썩 목을 감아오는 손에 저도 순순히 응해주기로 했다. 오히려 좋으면 좋았지 나쁠 건 하나도 없으니까.
그 김에 김홍중이 이번엔 첫키스 장소를 제대로 기억 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예전에, 진실게임 이구동성 때 첫키스 장소를 자기가 틀려 놓고 나를 나쁜 놈 만드는 바람에 굉장히 억울했던 기억이 있는데 숨도 못 쉬고 화내며 쏘아대서 차마 하지 못 한 말이 있었다. 너네 집에서 한 건 네가 나 몰래 한 도둑뽀뽀고 진짜 첫 키스는 아까 그 공원이었다고.
이젠 이 벚꽃나무 아래로 바뀌겠지만, 평생 네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때 난 곤히 자고 있었던 걸로 해 줄테니까, 그래서 모르는 척 해 줄테니까 이번엔 제대로 기억하자. 나중에 또 그러면 확 말해버려야지. 김홍중이 자는 박성화 덮쳤다고. 난 진짜 그 때를 첫키스로 만들고 싶었는데 네가 부끄러워할까봐 참은거라고 확 귀에 속삭여 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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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먼저 도발 해 놓고선 얼굴이 빨개지더니 또 대뜸 쪽하고 뽀뽀를 하고선 저 멀리 뛰어 가 버리는 게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당황할 틈조차 없었다. 방금까지 꼭 붙어 있었던 온기도, 찰나에 닿았다 떨어진 감촉도 어안이 벙벙해서 입술만 만지작대다가 얼른 뒤따라 달려가면 저만치서 숨을 고르며 기다리고 있는 홍중이 보였다.
“..뭐야?”
“뭐가”
“와, 너, 진짜”
“네가 먼저 뽀뽀했잖아”
“근데 네가 먼저,”
심장이 뛰어서인지, 실제로 뛰어서인지 둘 다 발그레한 볼을 하고서 나란히 걸어갔다. 이제 이 골목을 지나고 나면, 문 앞에서 인사하고 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 지 아무도, 아무것도 몰라서 떨리기도, 설레기도 했지만 그게 누가 됐더라도 내일 꼭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스무살의 홍중이어도, 제가 아는 스물다섯의 홍중이라도 다 좋으니까 꼭 보자고.
“들어가”
“너 먼저 가. 네가 15분 거리를 30분 걸려서 오는 바람에 벌써 깜깜해”
“벚꽃 구경하느라 그런거야. 그리고 그게 뭐 어때서”
“그럼 혼자 거기 서 있던가. 난 들어갈래”
“아, 가기 전에 잠깐만”
혹시 모르니까. 어쩌면 이 얼굴은 다시 못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현관문 앞에 서 있는 홍중에게 다가가 아주 조금의 틈도 없이 꼭 안아주었다. 애틋하고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스러운 그런 복잡한 마음을 담아서. 나는 너 때문에 정말 많이 행복했던 사람이었구나. 내 행복에 네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새 보이지 않을만큼 너무 커져서 내가 몰랐나봐. 소중히 여기고 있다고, 중요하게 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착각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오늘 덕분에 너무 행복했어”
“응, 그래. 봄이라도 밤엔 아직 추워. 얼른 들어가. 진짜 아프지 말고”
“너 들어가는 거 보고”
“..너 고집 센 거 너도 알지”
“응. 나 어릴 때 별명이 띵깡요였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홍중의 집에 불이 켜지는 걸 보고나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아까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방향이라 어쩔 수 없이 아까 그 나무 앞에 다다랐을 땐 피식 웃음이 났다. 우리 진짜 첫키스는 어땠더라. 여름에 불꽃놀이가 끝나고서 순식간에 조용해진 그 공원 벤치에 앉아 내내 서 있느라 아팠던 다리를 두드리다가 문득 마주친 두 눈이, 더운 날씨 때문에 살짝 젖은 머리가 그냥 다 너무 예뻐서 다가가 그렇게.
“으으, 간지러워”
마음은 간질하고 밤공기는 제법 차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간지러운 마음을 달래려면 괜히 죄없는 쿠션이라도 끌어안아야 하니까, 혹시나 진짜 감기라도 걸려서 걱정시키면 안 되니까. 물론 누가 한 봉지 가득 바리바리 사 들고 온 약들 때문에 당장 걱정은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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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꿈인가 싶었다. 꼭 어제 같아서. 누군가 오기엔 살짝 이른 시간부터 들려오는,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 너무 똑같아서 알고 보면 어제의 모든 기억이 꿈이었던 건 아닐까 싶었다. 그 하루가 몽땅 꿈이었고 저는 이제야 제대로 아침을 맞이한 건 아닐까 하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생각. 그리고 더 신기한 건 제가 저 작은 노크 소리에 깼다는 사실이었다. 귀를 기울여야 들릴듯한 저 소리에.
노크 소리가 잠깐 멎더니 짧게 벨이 울렸다가 이내 끊겼다. 어제와 달리 핸드폰은 꺼져 있지 않았고 발신자는 어제 아침 제게 톡을 보낸 주인공과 동일인물이었다. 그럼 지금 문밖에 서 있는 건 누구일까. 어떤 얼굴일까. 떨리는 마음으로 여전히 붕붕 떠 있는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면서 현관 앞으로 갔다.
“누구세,”
“전화해도 안 받길래.. 나 들어가도 돼?”
“뭐야, 너 머리..”
“괜찮아?”
어쩌면 어제가 아니라 오늘, 지금 제 눈 앞의 상황이 진짜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손을 들어 제 볼을 살짝 꼬집어 보았다. 볼에 닿는 느낌도, 찌릿하고 느껴지는 고통들이 현실이 맞다는 걸 알려주었지만 저는 여전히 멍한 상태로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어제 본 벚꽃이 너무 인상 깊어서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건가
"너 두피 아프다며. 그래서 한동안 쉴 거라고 나랑 같이 미용실 가서 덮었잖아"
"아, 예쁘냐고"
"덮었다가 빼면 더 힘들텐데. 안 아파? 안 따가워? 케어는 받았어?"
"나 갈래"
"어딜 가. 이리 와"
제가 아는 그, 스물 다섯의 김홍중이 눈 앞에 서 있었다. 그것도 창문 너머 길가에 한가득 피어 있는 벚꽃을 제 머리에 가득 담아온 채로. 이 얼굴은 진짜 제가 안 보고 싶던 그 사람이 맞는데, 잔뜩 미워하고 섭섭해 한 그 사람이 맞는데, 속도 없는건지 머리보단 마음이 더 빨라서 토라진 채 뒤돌아가려는 걔 손목을 덥썩 붙잡는 게 먼저였다.
“내가 조금 더 미안해. 잘못한 거 알면서 괜히 자존심 부리고 화낸 거 미안”
“알긴 해?”
“응. 근데 너도 사과해”
“미안해, 나도. 내가 속상했어,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네가 잘못했어. 이렇게 말해서”
“알면 됐어”
새침하게 대답하는 게 얄미워 괜히 흘겨보다가도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며칠동안 맘 졸이고 머리 아파했던 일에 대한 결론치고는 너무도 가볍고 간단하게 끝나버렸지만 그래서 다행이었다. 진심이 담긴 사과를 들었고 이렇게 얼렁뚱땅 지나가진 않을거니까. 조금 더 오래, 진지하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씨익 웃어보이는 홍중의 머리를 괜히 손으로 꾹 한 번 누르고 말았다. 그래도 아직 조금 밉긴 하니까.
“얼른 들어와. 옷은 또 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 봄이라도 아직 추운데”
“너는 나 보면 할 말이 잔소리밖에 없어?”
“잔소리라고 하면 속상하지. 다 너 걱정되서 하는 말인데. 사과해”
“그래, 미안하다. 챙겨주는건데 귀찮아하고 잔소리라고 해서 미안”
자연스럽게 소파로 걸어가 제 자리인듯 스르륵 누워버리는 모습이 어제의 김홍중과 겹쳐보였다. 진짜 걔랑 얘랑 같은 사람이 맞긴 한 건가. 대체 시간은 뭘 어떻게, 얼만큼 바꾼건가 싶어서 가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갑자기 몸을 일으키길래 냉큼 옆에 나란히 앉았더니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내가 잘못한 거라서 문 안 열고 너 기다렸어. 선택권 주려고”
“그래, 잘 했어. 생각 해 줘서 고마워”
“사실 혹시 비밀번호 바뀌었으면 어떡하나 무서워서”
“403117? 그거 한 번도 바뀐 적 없는데. 바꿀까? 어..410137? 141073?”
“410137. 내 작업실 비밀번호야. 그걸로 해”
“그럼 너 갈 때 바꿔 놓고 가”
“나 그거 할 줄 몰라”
“못 하겠네, 그럼”
내심 불안했는지 꼬물대고 있는 손 하나를 끌고 와 꼬옥 잡았다. 어제처럼 미친듯이 심장이 뛰진 않아도 은은하게 전해지는 온기가 좋아서. 온 신경을 쥐고 흔들진 않지만 이건 이대로 다른 느낌의 설렘이라 괜히 툭툭 손장난을 쳤다. 어떻게 손 크기가 그대로지. 귀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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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언제 했어?”
“어제. 근데 나 두피가 생각보다 튼튼하대”
“그래도, 예쁘긴 한데, 아프잖아”
“괜찮다니까. 나 생각보다 체질인가봐”
이틀 동안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을만큼,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몰아쳤다. 혹시 이마저도 여전히 꿈은 아닐까. 정말, 진짜 김홍중은 지금 제 작업실에 있다거나 하는. 어제는 스무살이었고, 오늘은 벚꽃인지 딸기인지가 되어버린 김홍중 때문에 머리가 아파와서 다시 풀썩 침대 위로 누워 버리면 제 집인냥 요구르트를 꺼내 마시며, 두통의 원인이 제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차가운 거 바로 먹지 말라니까. 꺼내두고 2분쯤 지나서 먹으랬잖아”
“쓰읍, 또 잔소리. 괜찮다니까”
“너도 진짜 말 안 듣고 고집 센 거 알지”
“그럼. 당연하지”
어느새 쪼륵 소리를 내며 바닥을 보이는 요구르트병을 야무지게 분리수거통에 턴져두고 제 옆에 풀썩 앉는 홍중을 눈으로 쫓다가 옆자리를 손으로 팡팡 치면서 팔을 뻗으면 질색하면서도 어느새 꼬물꼬물 다가와 그 위에 머리를 챡하고 얹었다. 다 해 줄 거면서 괜히. 그게 뭐 매력이지
“근데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거야?”
“봄이잖아”
“진짜로? 그거 때문에 머리를 했다고?”
“며칠 뒤부터 쭉 장마일거래”
“아, 그래? 어디 나가긴 힘들겠다”
“그래서 아마 벚꽃 보기 힘들거래”
“아, 그렇겠네. 어떡하지, 오늘 갈까? 좀 덜 피긴 했는데 그래도,”
“그러니까 벚꽃 대신 나 보라고. 그리고 너 기분 풀라고 끼 부린거야”
그 말을 하며 머리카락을 삐쭉 들어보이는 홍중을 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제가 김홍중을 이기는 날은 예전에도,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고. 애초에 저런 눈망울을 하고 저를 빼꼼 올려다 보는 얼굴에는 면역 같은 게 도무지 생기지가 않아서 이번에도 그저 실없이 올라가는 광대를 주체하지 못 하고 웃어버렸다. 예쁜 짓을 자꾸 하는데 어떡하겠어.
“박성화”
“응?”
“내가, 다른 사람들이 날 미워하든 싫어하든 관심도 없고 상관도 없는데,”
“응”
“너는, 네가 날 미워하는 건 면역도 없고 하루종일 신경 쓰이고 너무 힘드니까,”
“...”
“내가 미운 짓 해도 그냥 그 자리에서 화 내고 조금만 미워해”
“너도 나 밉다며”
“그건 그냥 지기 싫어서 그랬어. 안 미워. 소중해”
아침부터 무슨 긴장을 그렇게 했는지 몇 번 토닥이니 조금씩 감기던 눈이 금세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하더니 고롱고롱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할 때쯤 파르르 하고 잠깐 깨서는 잠꼬대인듯 진심인듯 듣는 사람 찡해지는 얘기를 중얼대며 뱉더니 또 스르륵 잠들어버렸다. 진짜 아직도 종잡을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사람이라서, 이제 조금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면 제 생각을 비웃듯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게 김홍중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끼부린답시고 절 위해 덜컥, 몇 시간을 견디고 참아야 하는 머리를 하고 온다거나 갑자기 툭 내뱉는 진심으로 울렁대게 만드는 건 감히 제 머릿 속엔 없던거라.
“홍중아, 자?”
“장마 끝나면 우리 딸기 먹으러 가자”
“..딸기?”
“벚꽃 지면 네 생일이고, 그 땐 딸기가 맛있으니까. 내 머리도 딸기”
품에 안겨 색색대는 숨소리를 들으며 분홍빛으로 변한 머리를 만지작대고 있으면 갑자기 입술이 톡하고 열리더니 잠꼬대인지 모를 딸기 타령을 했다. 오늘은 이만 귀여워도 되는데 자꾸 끼를 부리니까. 이정도 꼬셔줬으면 한 번쯤은 넘어 가 주는 게 예의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알았어. 비 오기 전에 벚꽃도 얼른 보고 비 그치고 나면 딸기도 먹으러 가자”
이젠 진짜 곤히 잠든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조심스레 이마 위에 입술을 내렸다. 짧게 입술에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단잠을 깨우기도, 혼나기도 싫어서. 그건 나중에 일어나면 해도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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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화,”
“응?”
“..아니야”
“응, 나도 사랑해”
“그거 아니거든”
“난 사랑해”
“..응”
-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청해입니다.
언젠가 꼭 써 보고 싶던 소재였는데 어쩌다보니 계간성홍에 제 누추한 작품을 내게 되었네요. 하핫.
내 눈에 네가 제일 미워 보일 때, 내 눈에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뻤던 때로 돌아가는 것.
나의 봄이었던 너.
이 두 줄의 주제를 가지고 시작했던 글이라 중간 중간 써 내려 가는데에 어려움이 많았어요. 늘 그렇듯 보고 싶은 장면, 장면 그 사이가 매끄럽게 이어지는 흐름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사실 이게 맞나, 잘 쓴 건가 영 불안하지만 참가에 의의를, 누군가에게 제 글이 선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에잇 하고 제출 해 버렸어요.
제목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사실 읽는 분들의 상상을 가두는 것이 아닐까. 제 의도와 제목이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독이 되지 않을까 해서 이 부분은 쓸까말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Spring like Spring.
첫번째 뜻은 ‘봄은 봄을 좋아한다.’ 봄에 태어난 성화는 자신의 봄인 홍중이를 좋아한다. 물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고요. 홍중이의 봄도 성화일테니까요. 둘은 서로의 봄이기 때문에 계절의 시작인 봄이 좋을 수도, 봄인 네가 좋을 수도. 봄,에는 계절과 상대 모두가 담겨있어요.
두번째 뜻은 ‘스프링 같은 봄’봄은 매년 돌아오는 계절이니까요. 글 속 성화와 홍중이의 6년이란 시간동안 둘의 스프링은 늘어나기도, 어떤 이유로 줄어들기도 했었겠지만 다시 돌아와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듯 결국 둘의 봄도 여전할 거란 뜻이랍니다.
미흡한 부분이 많은, 그런 글이겠지만 이 글을 읽고서 여러분이 저 둘의 봄을 조금이라도 함께 느낄 수 있길 하고 바래봅니다. 최대한 봄바람이 느껴지게, 벚꽃 풍경이 눈에 보이게 하고 싶었는데 제 바람이 이루어졌을지 모르겠네요.
아직은 쌀쌀해도 맑은 하늘과 붕 뜨는 기분, 가끔 실려오는 바람 냄새에 봄이 조금씩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모두에게 다정하고 포근한 봄이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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