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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 of Summer>, 청해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6월 21일
  • 9분 분량



봄에 태어난 성화도, 겨울에 태어난 홍중도 딱히 여름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땀이 많은 탓에 오랫동안 예쁠 수 없다는 게 성화의 이유였고 더운 날씨에 녹아서 빨리 지친다는 게 홍중의 이유였다. 그래서 둘은 '이제 100일을 조금 더 넘긴 스무살의 풋풋한 캠퍼스 커플'이라는 온갖 설렘 가득한 타이틀을 다 가진 사람들 답지 않게 사랑의 힘으로 모든 걸 이겨내고 꿋꿋이 여기저기 데이트 명소를 다니기 보다는 에어컨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학교 앞 카페에 앉아 시원한 음료를 쪼록대며 마시는 걸 택했다. 다행히 둘 다 이 쪽을 훨씬 더 선호했고.


"..춥다"

"가디건 줄까?"

"네 꺼 너무 큰데"

"그래도 입고 있어. 추운 것보다 낫지. 아니면 어깨에 걸치고 있을래"


굳이 노력해서 예쁜 곳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이렇게 카페에 가만히 앉아 테이블 위에 녹아 있다가도 아직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연인들은, 아주 찰나에도 간지럽고 설레는 순간순간을 마주하고는 했다. 예를 들어 제겐 딱 예쁜 핏의 가디건에 포옥 잡아 먹힌 애인을 보고 있는 박성화라던지 제 어깨를 감싸고 있는 제법 큰 가디건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애인의 향수 냄새를 맡은 김홍중이 그랬다. 괜히 울렁대고 귀가 뜨거워져서 죄 없는 빨대를 꼭 깨문다거나 테이블 밑 주먹을 꼭 쥐었다 폈다 하는.

익숙하지 않아서 불편하지만 지금만 느낄 수 있는 묘하고도 소중한 기분. 그리고 감정


"몇 시에 갈까?"

"너무 늦게 가면 자리 없겠지.. 그럼 한 4시? 5시?"

"카페에 4시까지 있다가 가는 길에 먹을 거 좀 사서 가자. 어때?"

"그러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응. 나 너랑 돗자리 펴고 치킨 먹는 게 로망이었어"


제 질문에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면서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설렘과 신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성화가 제법 귀엽다고 생각하던 그 때의 김홍중이 몇 년이 지나 '치킨이 그렇게 좋냐 이 먹보야' 하고 괜히 타박하면서도 자연스레 성화가 제일 좋아하는 치킨과, 곁들여 먹을 피자까지 주문하게 될 줄은 이 때의 그 누구도 알지 못 했겠지.


-


"벌써 사람이 꽤 많다, 그치"

"그러게. 너무 서두른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우리 저기 앉자. 저기가 야경이 예뻐"


이제 손쯤은 자연스럽게 잡는 사이가 됐지만 그래도 이렇게 덥썩 잡혀 어디론가 뛰어갈 때면 또 눈치 없이 귀가 빨개졌다. 성화가 눈독 들여놨다던 나름의 명당을 선점하고 야무지게 준비 해 온 돗자리 위에 편의점을 털어 사 온 간식거리를 하나 둘 늘여 놓고 나서야 그 위에 털썩 앉아 아직은 여전히 밝기만한 하늘을 나란히, 가만히 바라보다 동시에 웃음이 픽 하고 새어나왔다. 우리 왜 이러고 있었지? 그러게. 힘들어서 잠깐 멍 때린건가. 그래도 구름 예쁘다, 그치. 하늘 색도 예뻐. 사진 찍어야지. 한 장 찍어줄까? 이런 시덥잖은 얘기를 주고 받으며 눈 앞으로 지나가는 연인들, 가족들, 아이들 그리고 함께 산책 나온 강아지들까지.

아직 정적이 편할만큼 익숙한 사이는 아닌지라 둘 다 괜히 입술을 달짝이다 먼저 용기를 낸 건 성화였다.


"아까 오면서 봤는데 저번에 네가 말했던 작가님 사진 전시회 다음주부터 저기 사거리에 있는 건물에서 열린대. 시간 날 때 보러가자"

"아, 한다는 얘기는 들었었는데.. 그럼 너 편할 때 말해"

"난 언제든지 다 괜찮아. 네가 보고 싶은 거니까 너 가고 싶을 때 가는 게 맞지. 난 너 원할 때 언제든 다 좋아"


이렇게 누가 듣기엔 입에 발린 뻔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 가득 담겨 있는 진심이 느껴질 때, 자기가 더 신나서 이것저것 검색하고 알아보며 '이거 네가 진짜 좋아하겠다', '어, 근처에서 이것도 하는데 여기도 가 보자. 너 좋아할 거 같애' 하는 그런 말들이 너무 달게 마음에 박혀서 홍중은 불안해졌다.

하필 박성화가 제 첫 연애라서, 처음이 이렇게 행복하면 나중에 더 힘들어진다던데. 지금의 이 다정이 조금씩 줄어들고 변해버리면 제가 너무 견디기 힘들까봐, 비참해질까봐 덜컥 겁이 나서. 마음껏 이 행복을 즐기기 두려워지는 순간이 종종 찾아오곤 했다


"다음 주 토요일에 시간 괜찮아?"

"나야 괜찮은데 너 다음 주 내내 바쁘다며. 하루쯤은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보지 말자고?"

"아니, 보고 싶어. 보면 좋지"

"티켓은 내가 살게. 내가 보고 싶은 거니까"

"오, 여기 근처에 맛집 많대. 전시회 보고 밥 먹으면 되겠다"

"너 먹고 싶은 걸로 골라"

"...카페도 갈래?"

"가고 싶은 곳 있어?"

"응..히힛. 여기 어때?"


-


그래도 여름이 하나 좋은 게 있다면, 밤이 길다는 점이었다. 오랫동안 환해서, 오랫동안 함께 있을 수 있고 밤이 데려온 한꺼풀 꺾인 더위와 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나란히 걸어다닐 수 있다는 게. 그래서 둘은 여름이 싫은데 좋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둘에게 조금 더 시간을 벌어다주는 여름밤을 좋아했다. 아직 날이 밝다는 이유로, 선선하다는 핑꼐로 꽤 오래 함께 있을 수 있었으니까.

내리쬐던 햇살과 와글대던 사람들, 그로 인해 만들어진 모든 소리들이 줄어들고 차분히 가라앉은 길거리는 자연스레 서로의 작은 소리에 집중하고 예민해지게 만들었고 특히 이렇게 나란히 붙어 있을 때면 말 그대로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서로에게 닿아 있는 무릎은 벌써 감각이 사라진 것 같기도, 이미 뜨겁고 간지러워서 내 것이 아닌 것 같기도.


"나 이거 진짜 해 보고 싶었어"

"좋네. 짠-"

"짠~"


자고로 돗자리 위 야경 구경에 빠지면 안 되는 게 있다고 배웠다며 편의점으로 달려간 성화가 당당하게 손에 들고 온 건, 보통 남들이 산다던 그 캔이나 병 말고 그 옆에 알록달록 예쁜 색을 자랑하는 아이들이었다. 둘 다 술에는 취미도, 특기도 없는 쪽이었던지라 기분만 내기에 딱 적당한, 지금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선택이었다. 아무리 달다 해도 술은 술이어서 맛있다고 홀짝댄 한 모금, 서로 바꿔서 마신 두 모금이 둘을 사과처럼 빨갛게, 복숭아처럼 발그레하게 만들었고 이내 하늘을 가만 보고 있던 홍중의 눈이 가물가물 감기기 시작했다


"졸려?"

"..응"

"잠깐 눈 붙이고 있어. 깨워줄게"

"나 자면 너 심심하잖아"

"그게 눈 다 감고 할 말이야?"

"웅.. 그래도.."


마음 먹고, 제대로 만든 자리는 아니지만 나름 둘에겐 '첫 술자리'였다. 남이 들으면 어이 없어하고 비웃을만한, 겨우 과일맛 캔 4개가 전부인 돗자리 위였지만 둘에겐 넘치게 가치 있고 낭만 있는 시간이었다는 게 중요하니까. 굳이 자리를 만들만큼 술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취기를 빌려 알아내고픈 게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당장 급하거나 중요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홍중이는 취하면 말랑하고 애교가 많아지는구나. 저도 눈이 반쯤 감긴 채로 따끈해졌단 걸 알긴 하는지 성화는 꼬물꼬물 제 허벅지에 누워 눈을 감은 홍중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볼 한 번만 찔러보고 싶은데, 머리 쓰다듬어주고 싶은데 그래도 되나. 우리 둘 다 나름 취했는데 그게 핑계가 되어 주진 않을까. 어느새 빨갛게 변한 노을빛이 내려앉은 얼굴을 한참 바라보며 내내 고민하다 결국 몰래 톡 하고 만져봤던 코끝의 감촉을 성화는 꽤 오랫동안 기억하게 됐다. 그 때 찌르르 하고 전기가 오르는 것만 같던 제 검지손가락의 느낌도.


곤히 잠든 홍중은 내내 환하기만 하던 여름 밤하늘에 슬슬 어둠이 드리워지고, 선선한 바람이 조금은 차가워져서 하나 둘 챙겨온 가디건을 입고, 성화가 제 허벅지 하나를 내 준 채로 다음주에 함께 갈 전시회 내용이 뭔지, 어디서 어떻게 가는 게 더 편할지, 근처 식당은 어떤 게 있고 어딜 가면 좋을지 그 날 하루 일정을 짜고 2번쯤 다시 확인 할 때까지도 깰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고롱고롱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제 성화는 다리가 저리는 걸 넘어 감각조차 사라졌지만 대신 몰래, 각도별로 야무지게 찍어둔 사진 30장이면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이런 기회가 쉽게 오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잘 잤어?"

"..응. 미안"

"응? 뭐가?"


거의 한 시간이 넘었을 즈음, 살짝 부은 채로 일어난 홍중은 괜히 부끄러운지 대뜸 사과를 해 오더니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얼굴로 주섬주섬 일어나 홀린 듯 양 손에 빈 캔 2개씩을 야무지게 쥐고 뛰어나가더니 또 총총 돌아와 치킨 박스며 쓰레기까지 싹 버리고 왠지 뿌듯해보이는 얼굴로 돌아오는 그 모든 과정을 성화는 남김없이 눈에 담으며 '갑자기? 뭐지? 근데 너무 귀엽다. 미안해서 그러는건가. 나 생각보다 훨씬 더 귀여운 애랑 연애하고 있었구나. 어떡해, 너무 좋다.' 같은, 누군가 지나가다 들었으면 울컥 짜증이 나고 홍중이 들었다면 왜 그러냐며 질색할 생각들을 잔뜩 했다.


"다 했어? 같이 하면 되는데, 네가 너무 갑자기 막 그래서.."

"아냐. 내가 너무 오래 잤잖아. 미안해서 그래, 이 정도는 해야지. 다리는 안 아파?"

"응, 괜찮아. 여기 앉아 봐. 이제 곧 시작한대"

"뭐가? 뭐 해, 오늘?"


제 손목을 잡아 앉히는 성화의 힘에 이끌려 나란히 옆에 앉아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성화를 빤히 바라보면 그런 홍중을 따라 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씨익 웃더니, 작게 말해도 충분히 잘 들릴만큼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사심을 가득 담아 다정하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오늘 저녁에 여기서 불꽃놀이 축제하거든. 너 보여주고 싶어서'


겨우 그 말이 뭐라고. 홍중은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찌릿하고 전기가 흘렀다. 밤이라 그런건지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와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수, 곁눈으로 살짝 보인 옆태의 삼박자가 아직은 꽤 자극적이라서.


"왜 미리 말 안 했어?"

"나름의 서프라이즈?"


어쩐지 잠들기 전보다 사람이 확 늘어났다 싶더라니 그게 이유였구나 싶었다. 생각 해 보면 하늘에서 팡팡 터지는 불꽃놀이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부모님 손을 잡고 가족끼리 갔던 무슨 무슨 축제가 마지막이었으니 적어도 6,7년 전쯤이려나. 딱히 그런 로망이나 낭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상상으로 조금 들뜨고 설레이는 걸 보니 이런 걸 좋아했나 싶기도 하고. 대체 이걸 왜 비밀로 했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단순한 피크닉이 불꽃놀이 구경으로 변해버린 게 나쁘진 않았다. 처음부터 알았으면 조금 더 오래 설렐 수 있긴 했겠다 싶은 아쉬움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


"오, 이제 시작할 건가봐"

"..귀여워"

"응? 뭐라고?"


불꽃놀이 얘기에 큰 반응이 없길래 살짝 시무룩해 있었는데 막상 안내 방송이 들리고 시작하려는 듯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자 꼬물꼬물 일어나서 빼꼼 까치발까지 들면서 통통대는 뒷모습이 누가 봐도 설레어하고 신난 사람의 모습이라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뒷통수며 꼬물대는 발끝까지 몽땅 귀여워서 저도 몰래 뱉은 말이 주변 소음에 묻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만 해도 김홍중이 귀엽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하는건지. 자기 할 일 잘 하고 똑부러지는 모습이 매력적이라서 좋아했는데 알면 알수록 맹하고 귀여운 모습 투성이라서 어쩌면 조금 큰일난 게 아닐까, 근데 그럼 또 뭐 어때. 내 애인인데.


저 멀리 웅성대는 소리로부터 시작된 함성이 귀에 콕 박힐때면 하나 둘씩 터지기 시작하는 불꽃놀이를 한참 바라보다 살짝 시선을 옆으로 옮기면 언제부터 그러고 있던건지 꼭 뭔가에 홀린 것처럼 멍하니 서 있는 홍중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은 시끄럽고 사람들 많은 곳을 싫어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 반, 함께 예쁜 것을 보고 추억하고 싶은 기대 반으로 고민 끝에 덜컥 데려온 곳이었는데 저렇게까지 좋아 해 주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스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저에게도 소중하게 기억될 오늘이 홍중에게도 두고 두고 마음에 남는 하루가 되기를 몰래 바라면서.


"다리 아프니까 앉을까? 앉아서도 충분히 잘 보여"

"아, 응. 생각보다 더 예쁘다. 나 이런 거 진짜 오랜만에 봐. 중학교 때 이후로 처음인 거 같애"

"나도,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더 예쁘더라고. 오늘 같이 오길 잘했다. 사진 많이 찍었어?"


하늘에선 여전히 푱푱 소리와 함께 폭죽은 터지고 있었고 둘은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앉아 성화와 홍중이 찍은 사진과 영상들을 구경하고 있었으며 때마침 밤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둘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너무나 완벽하게 로맨틱한 여름밤이었으며 둘은 지금 이 순간을 쉽게 잊지는 못할 거라고, 어쩌면 한동안 오늘에 빠져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물론 들키기는 부끄러워 몰래 생각만, 괜히 등 뒤로 숨긴 손만 쥐었다 폈지만.


한가득 찍은 사진을 구경하고서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아까와는 조금 달라진 모양의 불꽃이 여전히 까만 밤하늘을 채우고 있었고 알록달록 색을 가진 폭죽이 하나씩 터질 때마다 그 빛이 홍중과 성화의 얼굴에도 내려와 닿았고 한참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던 성화의 시선이 어느 순간 옆으로 옮겨 온 것도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색색이 빛이 닿아 물드는 그 얼굴이, 멍하니 불꽃놀이를 바라보며 저도 몰래 해맑게 웃는 표정이 성화의 눈엔 검은 배경 속 꽃들보다 훨씬 더, 넘치게 예쁜 게 당연한거라 정작 오늘의 불꽃놀이를 손꼽아 기다리고 기대한 건 저였으면서 한 번 돌아온 고개는 돌아올 줄 모르고 처음엔 혹시 눈치라도 챌까 몰래 힐끗 보던 게 어느 순간 아예 몸도 돌려서 한참동안, 홍중이 그 시선을 눈치 챌 때까지 계속 됐다


화려한 색색에 정신이 팔려 있던 홍중이 어느 순간부터 왠지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지는 왼쪽으로 힐끗 시선을 넘기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제 얼굴을 꼭 뚫을 것만 같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 성화가 눈에 보였다. 차마 고개를 돌릴 수도 없게 무섭도록 다정하고 따뜻한 눈빛이라 괜히 모르는 척 다시 시선을 하늘 위로 돌렸지만 한 번 인지하고 나니 온 신경은 박성화, 그리고 제 얼굴이라 입술을 달짝이는 것도 눈을 깜빡이는 것도 하다 못해 침을 삼키는 것도 하나하나 다 신경 쓰여서 이 상황에서 이름을 부르는 게 좋을지, 용기 내서 시선을 맞춰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아까부터 닿아 있는 허벅지를 톡톡 치는 게 맞는건지 작은 머리통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홍중아"

"응?"


많은 경우의 수 중에서 상대가 제 이름을 부르는 건 예상에 없던 수라서 저도 몰래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아주 짧은 그 찰나에 제 시야가 어두워졌다가 환해졌다. 방금 뭐였지. 진짜 뭐였지.


"하고 싶어서. 놀라게 해서 미안"


내내 홍중을 보고 있던 성화라서 어느 순간부터 제 시선을 눈치 챈건지 묘하게 굳어버린 게 너무 잘 보여서, 일정하던 박자를 잃은 눈의 깜빡임도 어색해진 입술의 달짝임도 굳어서 살짝 떨리는 볼도 다 너무 귀엽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한참 전에 마셔서, 이미 다 깨 버린 술기운을 핑계 삼아, 오늘 네가 너무 예뻤고 불꽃놀이 아래서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하는 이상한 용기와 패기, 어쩌면 객기 같은 게 덜컥 차올라서 저를 돌아보는 그 얼굴에, 아까부터 제 눈을 온통 사로잡던 그 입술에 제 입술을 짧게 붙였다 떨어지면 당황하고 놀란 표정이 또, 상상보다 너무 귀여워서 한 번 더.


"야, 박성화"


뭔가 잘못됐다. 분위기는 당연히 나쁘지 않았고 역시 타이밍이 문제였을까. 아무리 내 마음이 그랬다고 해도 홍중이 분위기를 살폈어야 했는데. 지금이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홍중이를 만나기 전까진 질리게 들어온 네 글자였는데. 김홍중 입에서 나온,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의 '야, 박성화'라던지 조금은 굳어버린듯한 홍중의 얼굴은 순식간에 성화의 머리를 헤집어 놓기에 너무 충분해서 정작 뽀뽀를 한 쪽이 더 굳어버리고 얼어버렸다. 대답도 못 하고 손이 덜덜 떨릴만큼. 아니 근데, 이게 그렇게까지 정색할 일인가, 내가 막 그렇게까지 잘못한 건 아니지 않,


성화는 이전까지 겪어본 적 없는 아주 신기한 경험을 했다. 제 머릿속에서 켜진 비상등이 귓가를 잔뜩 울리는 느낌. 학교에 다닐 때 하던 소방훈련 경고음보다 훨씬 더, 지금 이 공간의 모든 소음을 다 이길만큼 크게. 심장을 토할 것 같다는 기분이 뭔지, 너무 달아서 머리가 아픈 느낌이 뭔지. 온몸에 소름이 올라 기절할 것만 같은 감각이 어떤건지. 이 모든 걸 한꺼번에 느끼고도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되는 마음이 뭔지도.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는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고 모두들 일어나 환호하며 소리 지르고 있을 때 어느 구석, 크지 않은 돗자리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두 인영은 꼭 그들만의 세상에 와 있는 듯, 그렇게 한참동안 아무런 소리도, 풍경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서로에게만 집중한 채 둘만의 또다른 불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폭죽 소리가, 눈을 감아도 앞에 펼쳐지는 불꽃놀이가 훨씬 아름답고 황홀했으니까.








- 작가의 말


봄호에 이어 또 돌아온 청해라고 합니다. 우선, 여러분을 또 뵙게 되어, 다시 인사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현생에 치여 사실 썩 마음에 드는 퀄리티의 글은 아니지만 그래도 참여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만 같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제출 해 봅니다.

마지막은 아마도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 장면 맞고요. 시작은 얘가 했지만 진짜 시작은 쟤가 하는 그런.. 성화가 내내 간지럽던 홍중이 마음에 불씨를 당긴거죠. 긴장해서 얼어버린 찰나의 성화의 얼굴은, 아마 평생 홍중이만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 땐 홍중이가 성화를 귀엽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죠?

사실 뭔가 더 여름밤의 향기가 나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원하는만큼은 아닌 것 같아서 속상하네요.. 뻔뻔하게 여러분의 상상력에 기대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저번 작품처럼 이번에도 제목에 의미를 담아봤어요. Some.은 Someday, something, sometime, someone의 뜻을 가지고 있답니다. 여름의 어느 날, 어떤 것, 어느 순간. 그리고 어떤 사람.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두고 두고 기억에 남을 로맨틱하고 완벽한 둘의 첫키스가 됐을테니까요.

그리고 에필로그를 말하자면 한동안 둘이 그 공원은 못 갔대요. 같이는 물론이고 혼자서도. 키스는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기억은 혼자만 가지는 게 아니라 그 근처만 지나가도 그 생각이 나서 괜히 빨개지는 얼굴 때문에 홍중이도, 성화도 몇 주간 그 주위를 빙 둘러다녔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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