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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t of Cliché Ⅱ: Mercury>, 리셰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6월 21일
  • 8분 분량


대도시의 문명 안에서 태어나 오래 전부터 깔려 있던 기반 시설들을 누리며 살아온 박성화에게 회색 빛이 아닌 숲의 여름은 퍽 낯설었다. 눅눅하게 고인 빗물을 밟는 바퀴도 없고, 우비도 입지 않은 채 뛰어놀다 감기에 걸려 코 훌쩍이는 아이들도 없고, 굳이 행차를 나서겠다고 여러 사람 비 맞게 만드는 왕도 없는 숲의 장마철은 그저 고요한 빗소리 뿐이었다. 어쩌면 박성화는 이제서야 빗소리를 제대로 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시기상 여름이 훌쩍 지났을 것도 같은데 봄부터 내리던 비는 약 일주일 정도 멈추었다가 다시금 쏟아졌다. 다만 더 이상 푸른 빛이 아니어서 그렇지. 아, 숲은 봄이 끝나지 않는다고 김홍중이 그랬는데. 그래서 그런 건가. 저 비는 언제쯤 그치려나. 창밖을 내다보며 이부자리를 정리하던 박성화가 찌뿌둥한 숨을 내쉬었다. 나가서 몸을 좀 움직이고 싶은데. 이제는 벽난로에 불을 피우지 않아도 실내의 온도가 적당했다. 숲 바깥은 여름이 맞긴 맞는가 보다. 아침 맞이 스트레칭을 하는 박성화의 시선에 들어온 김홍중은 이불 속에 파묻혀 잘 자고 있었다. 새삼 잠 많아. 지난 몇 달 간의 생활 속에서 깨달은 점이 있다면, 김홍중은 생각보다 잠이 많고, 특히 아침에 못 일어나고, 일어나서도 뭔가 하나 싶더니 눈 돌리면 그 사이 자고 있고…. 내가 아는 마법사들은 다 부지런하고 잠 줄이며 일하던데. 소속이 없으니까 시키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말끔하게 이불 주름을 펴 접어두고는 박성화가 김홍중 침대 앞으로 향했다. 지금 몇 시지. 시계도 달력도 없는 오두막에서 감각을 잃지 않는 방법은 하늘을 쳐다보는 것뿐인데 박성화는 아직 비구름에 뿌연 하늘을 읽어내는 일에 익숙지 않았다. 숲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홍중의 증언이 필요했다. 그런데 꼭 시간대가 궁금하면 자고 있더라. 한숨을 푹 내쉰 박성화는 주방으로 가서 그릇에 러스크와 과일 잼을 넣었다. 우유를 적당히 부어준 다음 숟가락을 꼽아 두고 의자에 앉는 모습까지 처음보다는 많이 자연스러웠다. 전에 먹던 것에 비하면 많이 건강하고 (고기 좋아하는 거 치고 집주인이 고기를 잘 안 들여온다.) 양이 조금 적지만 (그래도 김홍중보다는 많이 먹는다.) 숲에서 나는 것들 중에 맛없는 건 없으니까 괜찮았다. 우유에 뭉근하게 풀어져 색이 희석된 잼을 러스크에 묻혀 숟가락으로 떠먹으면서도 박성화는 김홍중을 빤히 쳐다봤다. 다 먹고 나서도 안 일어나면 깨워야겠다. 그리고 망토 빌려서 나가야지. 김홍중은 물어보지 않고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했지만 얹혀사는 입장에서는 영 걸려서 말도 없이 쓰고 나갔던 적은 없다.


혼자서는 아직 숲을 돌아다니기 힘든 박성화가 그나마 발에 익은 장소를 꼽으라면 근처의 작은 호수였다. 박성화는 오늘도 호수에 갈 생각이었다. 어금니에 짓눌려 톡톡 터지는 과일 알갱이와 버석하게 흩어지는 러스크를 혓바닥으로 감각하며 박성화가 시선을 돌렸다. 빗줄기가 조금 얇아진 것 같은데. 오늘 그치려나. 김홍중은 비가 그친 직후에 가장 바쁘다고 했다. 지난 봄에 몰래 따먹었던 카시스베리가 (김홍중이 가끔 놀려대서 사과를 무려 한 달이나 했다.) 비 그치는 날에 다 익어서 수확하지 않으면 효과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비의 영향을 받는 건 다른 과일도 마찬가지였다. 바구니 두어 개 가득 채워가며 숲을 활보해야 하는 일이 김홍중에게 있어서는 거의 중노동이란다. 덕분에 비가 그치는 날마다 김홍중을 따라 바구니를 들고 같이 과일을 따는 게 박성화의 소소한 일과에 추가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호수에 가는 식이었다. 김홍중의 말에 따르면 수성의 그림자가 담기는 호수라고 하는데, 거기에도 무슨 힘이 있는지 박성화가 호수를 다녀온 날이면 김홍중은 항상 너한테 물냄새 나, 따위의 말을 하고는 했다. 단순한 물비린내와는 조금 다른, 어딘가 더 화하면서도 상쾌한 향. 어디서 맡아본 것 같기는 한데 잘 모르겠단 말이지. 우유를 잔뜩 먹고 눅눅해진 러스크를 혀끝으로 뭉개는 사이에 김홍중이 드디어 깨어났다. 잘 잤어? 웅……


지금 몇 시야?

나 아직 볼 줄 모르는데.

대충 짐작이라도 해 봐….

… 한창 내가 배고플 시간.

좀 있으면 점심 되겠네…….


읏차, 김홍중이 눈 뜨자마자 하는 일은 앉아서 약 10초 정도 멍때리기. 그 다음에는 박성화 숟가락 뺏어다가 한 입 먹, 어라. 야 너가 해다 먹어. 귀찮아….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입은 어떻게 찾는지 김홍중은 숟가락 입에 물고 이미 눅눅한 러스크를 한참 우물거렸다. 몇 달 사이에 있던 변화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을 꼽으라면 역시 둘 사이의 호칭 아닐까. 딱딱하게 홍중씨, 성화씨, 하고 부르던 둘은 자연스레 말을 놓게 되었다. 사실 버릇 고치기 힘들어하던 박성화를 밖으로 끌고 나가 숲에 방치해두고 홍중이라고 부를 때까지 데리러 안 온다며 협박한 김홍중 덕택이 제법 크기는 하다. 졸지에 비오는 날 미아 신세가 되어버린 박성화는 그제야 말을 놓았더란다. 아무튼 숟가락을 놓지 않는 김홍중에게 아예 그릇을 쥐어주고 박성화가 몸을 일으켰다. 홍중아. 웅…. 오늘 비 그칠까? … 잠깐은 그칠 것 같은데, 새벽에 다시 올 걸. 어느덧 눈을 뜨고 제대로 우유에 말아둔 러스크를 떠먹던 김홍중이 박성화 따라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조금 흐리긴 해도 구름 사이에 햇빛이 언뜻언뜻 보였다. 다 먹으면 씻고 바로 나갈까? 저번에 바구니 어디에 뒀더라. 그거 내가 안에 넣어뒀어. 오옹. 너가 저번에 라즈베리 저장 안해두고 그냥 뒀잖아. 아 맞다. 김홍중이 조금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집주인이 상상 이상으로 정리를 안하는 사람이라 덕분에 박성화가 집안일을 죄다 하는게 아닌가 싶기까지 했다. 힘 쓰는 일, 뭐 좀 어디에 넣어둘 일, 빨랫감 정리하는 일 등등… 얹혀사는 김에 집안일을 맡은 느낌이랄까. 그래도 이 정도면 썩 괜찮은 거래 아닌가 싶어서 말은 않지만, 그래도 서로의 기준치가 워낙 달라 골머리 앓는 쪽은 늘 박성화였다. 호로로롭. 김홍중은 이제 그릇에다 입을 붙이고 고개 젖혀 우유를 마시는 중이었다. 아, 저게 맛있는 건데. 저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는 박성화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김홍중이 그릇을 내리고 박성화를 마주보았다. 야, 성화야. 어, 어 왜? … 줄까? 아냐 너 먹어. 너 먹으려고 한 거잖아 이거. 나 괜찮아. 줄 때 먹어라. 응…. 아무래도 김홍중 이겨먹으려면 한참 멀었지 싶다. 끝내 김홍중이 적당히 남겨준 우유를 박성화가 쭉 들이켰다. 잘만 먹을 거면서. 작게 툴툴대던 김홍중이 그제서야 침대에서 벗어났다. 씻고 나오면 비 그치겠네. 하품과 함께 기지개 한 번 쭈욱 하더니 김홍중은 바로 욕실로 향했다. 바깥의 빗소리와 김홍중 씻는 소리, 그리고 먹은 그릇 씻는 박성화까지 더해서 세 종류의 물소리가 오두막에 울렸다. 부산스럽지는 않고 적당히 도란도란한 정적이었다. 박성화는 아직 이 여유를 마음껏 누리지 못했다. 틈없이 몰아치던 박성화의 인생을 무언가가 단박에 멈춰버린 느낌. 갑작스러워서 그렇지 막상 적응하고 나서는 잘 살 것 같기도 했다. 그릇의 물기를 잘 닦아둔 박성화는 손을 씻으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러다 숲을 벗어난 뒤에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면 어쩌나, 같은 거. 금방 고개를 가로젓기는 했지만 한 번 자리잡은 생각은 쉽사리 쓸려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 호수를 다녀오는 게 맞겠지. 머리도 비울 겸. 손을 탈탈 털어내고 김홍중에게 내어줬던 만큼의 러스크를 하나씩 입에 넣는 사이에 김홍중이 밖으로 나왔다.


야, 성화야.

응?

너 오늘 호수 갈 거야?

그럴 생각이긴 했는데, 왜?

오늘은 너무 오래 있지 마.

뭐 할 일 있어?

그건 아니고, 그 호수 마력이 짙어지는 시기가 있거든.


비 오는 거 보니까 오늘일 것 같아서. 김홍중은 가끔 앞뒤를 붙이지 않고 말할 때가 있다. 지금처럼. 박성화는 고개를 기울이다가도 금방 알았다며 가볍게 끄덕였다. 호수에 마력이라니 이게 무슨 환상 속 이야기, 라고 하기에는 쟤 마법사지. 여기서 평생 살았지. 아주 근거 없는 말은 아닐 것 같아 박성화 생각이 깊어졌다. 차라리 달이라면 그럴싸해서 금방 넘어가겠는데, 그 호수는 달 말고 수성 아니었나. 일단 박성화는 씻기로 했다. 수용성 잡념이면 씻다가 사라지겠지 뭐. 옷가지를 얼추 챙겨들고 박성화가 욕실로 들어갔다.


씻는 거 오래 걸리는 박성화 기다리는 사이에 비가 그쳤다. 맑은 햇살 보는 게 얼마만이더라. 김홍중은 박성화가 깔끔하게 정리한 침대에 누워 빈둥대며 박성화 걱정이나 하기로 했다. 호수에 가는 거 자체는 막을 이유가 없었다. 원래 박성화는 늘상 몸을 움직이며 사는 사람이었고, 맨날 비가 내리는 곳에 숨어 지내려니 하루가 다르게 몸이 굳는 게 느껴진다고 푸념하던 것도 옆에서 들었다. 매일 자라는 풀 덕택에 길을 잃기 쉬운 것도 맞다. 그런 식으로 꾸준히 다니며 숲을 눈에 익혀두는 건 좋은 일이니까 오케이. 문제는 시기다. 본디 수성 자체는 별다른 마력이 없다. 하지만 이 숲에서는 많은 것들이 변하고 부딪친다. 지난 번에 라즈베리를 수확했으니 숲 바깥은 아마 여름일 거다. 날이 갠 여름날 그 호수에 물향기가 짙어지면 수선화가 필 텐데. 봄에 한 번 만개했으니 피어날 일이 없어야 하는데도 호수 주변은 꼭 그랬다. 저주 내린 뒤로 숲이 뒤죽박죽이라 이해는 못하지만 어쨌든 사실이었다. 수선화에 대한 옛 구전신화는 시골 애들도 알 거다. 지 얼굴 잘난 맛에 살던 콧대 높은 남자가 물 위에 비친 자기 얼굴에 취해서 그 자리에 눌러앉더니 결국 꽃이 되었다더라, 하는 그거. 김홍중도 옛날에 책에서 읽었던 적 있다. 여기서 그 얘기가 갑자기 나온 이유는… 뻔하지 뭐, 그 호수 여름 되면 사람 잡아먹는다. 분명 저주가 내린 이래로 겨울이 온 적은 없었는데 무슨 재주인지 그것만 시기가 딱딱 맞더라. 박성화 몸에서 물냄새가 진하게 날 때마다 김홍중은 불안해 죽을 맛이라는 소리다. 애초에 숲 한가운데 있는 호수에서 민트 섞인 바닷바람 향기가 불어오면 수상하지 않겠냐고. 물론 김홍중은 바다에 가본 적 없어서 그게 진짜 바다 내음인지 잘 모르지만 아무튼 누가 바다라고 했으니까 맞겠지. 사람 죽는 건 안 보고 싶은데. 그게 숲이라면 더더욱. 그나저나 얘 왜 이렇게 안 나와. 야 박성화. 성화야?


비 다 그쳤어.

어어, 금방 나갈게.


쟤는 뭘 하길래 항상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김홍중이 부르고 나서도 약간을 더 기다린 뒤에야 촉촉하고 뽀송뽀송한 박성화가 밖으로 나왔다. … 와, 몸 진짜 좋다. 너는 꼭 나 씻고 나올 때마다 그 소리 하더라. 맨날 몸이 좋으니까 하는 소리지. 나 요새 근육 빠진 건데. 어딜 봐서. 얼빠진 낯으로 박성화를 쳐다보던 김홍중은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나 너무 빤히 쳐다본 거 아닌가. 아니 그치만. 물기 덜 말라서 수분감에 반짝거리는 가슴팍이랑 눈이 마주쳤는데 어떡해. 너 빨리 가서 옷이나 입어, 나가게. 알았어. 김홍중은 가끔 부끄러움을 툴툴거림으로 표출하는 경우가 있었다. 지가 쳐다봐 놓고. 아 얼른 입으라고. 네에. 처음 왔을 때 보다는 박성화 옷이 가벼워졌다. 그걸 입고 어떻게 뛰어다녀, 쪄죽겠다. 전에 입고 왔던 옷은 담요에 말아두었던 그대로 서랍 어딘가에 넣어두었다. 아무래도 이제는 입을 일 없을 테니까. 김홍중은 자연스럽게 박성화에게 고갯짓했다. 가서 바구니 챙겨와. 이걸 또 나를 시킨다고? 너가 저번에 어디 뒀다며, 그럼 난 모르지. 이 놈의 집구석…. 그래도 다 해줄 거면서. 창고로 들어가는 박성화 뒷통수를 보다가 김홍중은 망토를 뒤집어썼다. 비가 언제 다시 올 지 모르니까 챙기긴 해야지. 박성화 몫의 망토를 손에 들고 창고 앞에서 기다리던 김홍중이 박성화 나오자마자 머리에다 망토를 얹듯이 씌워주었다.



아 깜짝이야….

오늘은 조금만 따고 일찍 오자.

오늘 뭐 따러 가는데?

카시스베리. 너 호수 간다며.

가도 돼?

너무 안 오면 내가 너 데리러 갈게.


박성화 표정이 미약하게 밝아졌다. 하도 습해서 찌뿌둥하기는 했을 거다. 아무리 비가 가끔 그치기는 해도 숲에서 습기가 빠지는 일은 워낙 드무니까. 망토를 제대로 두르고 다시 바구니를 고쳐 쥔 박성화를 한 번 확인하고는 김홍중 앞장서서 문을 열었다. 축축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좀 상쾌한 향이 났다고 해야 하나. 그 사이에 나고 자란 풀들이 숲을 바꿔가고 있다는 사실이 확 와닿았다. 풀내음을 양껏 들이마시며 김홍중은 익숙하게 수풀 사이를 가로질렀다. 뒤따르는 박성화도 이제는 걸음이 제법 익었는지 다섯 걸음에 한 번씩 멈추어 김홍중을 찾지는 않았다. 이대로 쭉 가면 아마 처음 만났던 곳일텐데. 카시스베리는 모여있으니까. 주변을 몇 번 둘러보더니 김홍중은 뒤로 돌아 박성화를 쳐다보았다. 야, 성화야. 갑자기 왜 그래? 너 여기 알아보겠어? 여기? 너 여기서 비 맞다가 카시스베리 훔쳐 먹었잖아. … 무슨 말 하나 했네, 그건 미안했다니까. 아니 그거 여기라고. 아, 그게 여기라고? 그제야 박성화는 조금 얼빵한 낯짝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때 어느 풀이 발목에 닿고 어느 나무가 눈앞을 가렸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녹음이 짙었다. 김홍중 아니었으면 절대 못알아봤겠다 싶을 정도로. 박성화가 가만히 서서 숲을 구경하는 동안 김홍중은 손바닥에 카시스베리를 한 주먹씩 담아 바구니로 쏟아 넣었다. 그만 구경하고 일 해. 아, 어어. 김홍중의 한 줌과 박성화의 한 줌은 꽤나 차이가 있는 편이었다. 김홍중이 세 번 담으면 박성화가 두 번 담는 정도? 물론 가끔 힘조절을 못하는 박성화가 몇 개 정도 으스러뜨리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차이는 있었다. 김홍중은 찐득하게 물든 제 손바닥을 말끄러미 응시했다. … 내가 작게 태어난 거겠지? 손가락을 쥐었다 펴는 사이 박성화가 또 한 주먹 바구니에 넣었다.


홍중아, 뭐 해?

… 야 성화야.

응?

너 손 봐봐.


박성화는 주변을 한 번 살피다가 빗물 묻은 이파리에 손을 닦고, 남은 것을 바지춤에 문지르고 나서야 깨끗해진 손을 김홍중에게 내밀었다. 쓸데없이 배려는 세심해가지고. 김홍중 입꼬리가 장난스레 올라갔다. 과일즙을 묻히는 척 박성화의 손을 잡고 나면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야, 야이씨, 방금 닦았는데…. 그러게 누가 닦으랬냐. 박성화는 사소한 장난을 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아무튼 김홍중은 목표를 달성한 셈이었다. 맞대고 보니 손이 크기는 크더라고, 확실히. 근데 이게 갑자기 왜 궁금했더라. … 몰라 나도.


바구니 하나 채우면 바로 들어가자.

그것만 따도 돼?

카시스베리는 아직 많아서 괜찮아.

알았어, 그럼 거의 다 했네.


두 사람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얼른 가서 쉬어야지, 언제 또 비가 내릴 지 모르니까. 손에 카시스베리 즙을 몇 번 덧대어 묻히고 나서야 바구니가 소복해졌다. 호기롭게 번쩍 들어보려던 김홍중은 손만 빨개져서 뒤로 물러나고 결국 집까지 들고 가는 건 또 박성화 몫이었다. 홍중아. 어엉, 왜. 오늘은 호수 가지 말까? 갑자기? 너가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너 근데 그 호수 엄청 좋아하잖아. 무슨 마력인가 있다며. 처음 데려갔을 때 여기 이런 곳도 있냐면서 엄청 들떴던 게 누군데. 그래도. 됐어 너 알아서 ㅎ, …. 김홍중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뒤통수를 간지럽히는 바람에 물냄새가 섞여있었다. 이상하다. 호수는 분명 이쪽이 아닐텐데. 뒤를 돌아도 저를 빤히 쳐다보는 박성화밖에 없었다. 화하게 시원한 바다내음. 이게 왜 박성화한테.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김홍중이 뒤이어 한숨을 내쉬었다.


… 그래,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쉬어.

…… 갑자기?

이따 비 올 것 같으니까 들어가자.


다시 앞장서서 걷는 김홍중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도 같았다.








- 작가의 말


안녕, 리셰입니다!


지난 봄 호 이후로 너무 바빠서 글을 하나도 못쓰고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름 호는 지나칠 수 없을 것 같아서 어김없이 참여를 했습니다. 이번에도 또 지각을 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제가 하겠다고 신청한 일이니까 꼭 끝내고는 싶었어요.


두 번째 클리셰는 수성으로, 세르주루텐의 로 플로이드를 모티브로 작업했습니다. 원래 이 소재로 구상했던 다른 글이 있었는데 봄을 연재로 끊어버리는 바람에 쓸 수 없게 되었어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 글은 포스타입으로 올릴 예정입니다. 사실 수성과 호수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했어야 했는데 그게 너무 길어지면 과하게 설명하는 느낌이 될 것도 같고, 또 분량 조절이 어려울 것 같아서 덜어내다 보니 이런 글이 나왔습니다… 정확히 여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슬슬 여름이겠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의 나날 속에서 조금 더 가까워진 둘입니다. 자연스럽게 가을이 되면 사이가 더 가까워지겠죠? 모든 질문이나 문의는 제 계정 디엠 멘션 푸슝 페잉 등으로 보내주세요! 기온이 계속 올라가고 있으니 다들 더위 조심하시고! 네!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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