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t of Cliché Ⅰ: Forest>, 리셰
- 계간 성홍
- 2022년 3월 21일
- 9분 분량
숨이 턱턱 차오를 지경을 넘어 들어가려던 호흡마저 역류하기에 이르렀다. 분명 처음 빠져나올 때에는 말을 타고 있었던 것도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두 다리로 뛰고 있었는지조차 박성화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생존 욕구에 의한 절박함만이 박성화를 움직이게 했다. 걸음이 느려지기 시작한 것은 내리는 비에 아득히 뭉개져가는 빗소리와, 땀과 뒤섞인 푸른 빗물에 앞머리가 젖, 잠깐. 푸른 빗물? 그제서야 박성화는 저를 쫓던 기사들이 지쳐서 포기한 것이 아니라 더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놔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곤란해졌네. 봄이 되면 새파란 비가 내리는 숲. 먼 옛날 추방당한 마녀가 저주를 내렸다며 출입 금지령이 내려진 구역이었다. 그러니 왕의 기사들이 추적을 관두는 게 당연하다. 박성화가 숱하게 읽고 들어온 징계 사유였으므로, 누명을 뒤집어쓰고 도망쳐 나온 지금의 박성화에게는 가중 처벌의 여지가 충분히 있을 법했다. 물론 이건 잡혔을 때의 이야기이지만 아무튼 여러모로 박성화가 곤란해진 것은 사실이다. 잡히면 평생 세상 구경 못하는 채로 감옥에서 살거나, 아니면 그냥 죽거나. 차라리 기사단에 복귀하지 못하더라도 평생 도망 다니는 게 훨씬 낫겠다. 그렇잖아도 비를 맞고 있는 탓에 상당히 처량한 느낌이 들어 박성화는 습한 숨을 길게 내뱉었다.
박성화가 쫓기는 이유는 단순한 거였다. 정권의 흐름에 탑승하지 못하고 신념을 지키다 휩쓸린 죄. 갓 잡은 권력을 휘두르는 이에게 박성화는 아주 알맞은 희생양이었다. 정당함이니 당위성이니 여튼 박성화 입장에서는 좋을 게 없지만. 시야가 온통 푸르렀다. 비가 그칠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직 해가 떠있는지 이미 저물었는지도 분간이 가지 않는 폭우였다. 이러다 감기 걸리겠는데. 잔병 앓느라 움직임이 둔해지는 것은 결코 사절이었다. 이 숲에 머무를 수 있을 지도 미지수인데 아프기까지 하면 좀. 그나마 정돈된 호흡을 위안 삼으며 박성화는 점점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뒷꿈치에 짓이겨지는 이끼 냄새가 눅눅했다. 사실 그렇게 되면 박성화의 코끝에는 여즉 푸른 물비린내와 눅눅한 풀내음만 지나가야 했는데 무언가 조금 다른 향이 섞여들었다. 비가 워낙 강하게 내리는 탓인지 또렷하게 분간하기는 조금 힘들지만, 그래도…, 꽃향기라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성화의 걸음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마녀가 어쩌고 하더니 진짜 숲에 무슨 힘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봄이 되면 내린다는 이 파란 비 때문인가. 축축한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송곳니로 오른쪽 하순 끄트머리를 짓씹으며 박성화는 애써 눈을 부릅떴다. 빠르게 몸이 식어가는 감각이 썩 달갑지 않았다. 언제쯤 그치려나. 내뱉는 한숨 사이마다 빗물이 스며드는 것 같아 박성화는 갈수록 스스로를 안쓰럽게 여기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와중에 배가 고픈 걸 보니 아직 죽을 때는 멀었나 보다. 어이없네. 아직도 발걸음은 착실했다.
세상을 적시는 물비린내와는 다른 푸른색 향기가 짙어졌다. 파란 거 말고 푸른 거. 썩 청량하지는 않고 조금 더 진한, 이를테면 저 앞에 맺힌 작은 열매 같은. 어라. 과일이다. 과일. 먹을 거. 꾸역꾸역 발걸음을 몇 번 재촉하고 나서야 박성화의 손에 작고 까만 열매가 닿았다. 이거 먹어도 되는 건가. 지금 내리는 비를 잔뜩 맞았을 텐데 독은 없겠지. … 먹고 죽은 놈이 때깔도 곱다고, 일단 하나만 먹고 생각하자. 박성화가 조심스럽게 열매를 톡톡 따서 손에 쥐었다. 힘조절을 잘못했는지 두어 개 정도가 짓이겨져 손에 묻어 있었다. 눅눅하게 손바닥 위를 굴러다니는 카시스베리. … 이게 원래 봄에 열리던가? 아무렴 어때. 소중하게 딴 카시스베리 한 주먹을 입에 털어 넣은 박성화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맛있네…. 생으로는 처음 먹어보는데. 싱그러운 활기가 몸에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박성화는 손바닥을 앞으로 뻗어 빗물로 흔적을 얼추 씻어냈다. 깨끗하지는 않고 파랗게 물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과일즙이 찐득하게 남는 것 보다는. 축축하게 젖은 앞머리를 손으로 한 차례 쓸어올려도 시야가 완전히 확보되지는 않았다. 이제 어쩐다. 고작 이거 한 주먹 먹는다고 배가 찰 리도 없고. 입안을 감도는 산미 덕택인지 자꾸만 입맛을 다시고 있는 게, 차라리 먹지 말 걸 그랬나. 우선은 빗물이 가득 찬 신발을 벗기로 했다. 걸음이 무겁기도 하고, 발이 너무 시려서 조만간 감각이 사라질 것 같기도 하고. 숲을 맨발로 딛는 감각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발밑에서부터 풀과 이끼가 꾹 눌리는 듯이 녹빛 향취가 올라왔다.
어느 순간부터 빗물의 푸른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같았다. … 아직 오고 있는 게 맞는데, 이상하다. 박성화가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분명 뺨과 이마 등등에 빗줄기를 맞아야 하는데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진짜 감기 걸렸나.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온몸을 휘감는 축축함은 그대로였으나 뒤늦게 우비를 입은 듯 감각이 더해지는 느낌은 없었다. 기이함이 머리카락 끝에 맺혀 뒷목으로 흐르는 것 같다고 박성화는 문득 생각했다. 이게 무슨. 눈을 찬찬히 깜박이며 다시 고개를 내리자 박성화 앞에 망토를 두른 인영이 서있었다. 까 깜짝이야. 어쩌면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을 지도 모르겠다. 청각이 조금 먹먹하기는 해도 바로 앞의 사람이 덩달아 놀랐으니 소리를 지른 게 맞긴 한가보다.
… 누구십니까?
그거 제가 할 소리 같은데요.
아. 아까 그 카시스베리 키우는 거였나. 박성화 몸이 습관처럼 앞으로 기울었다. 죄송합니다. 쫓기는 중이라 경황이 없어 결례를 범했습니다. 어어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요…. 당황했는지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내뱉으며 그가 망토를 뒤로 젖혀 얼굴을 드러냈다. 어두운 숲에서도 명확하게 보일 정도로 머리칼이 파랬다. 이 정도의 폭우에도 망토가 젖지 않았는지 머리칼이 상당히 뽀송뽀송했다. 모든 걸 적시는 푸른 폭우 속에서 소년만 멀쩡했다. 망토를 젖혔는데도 소년의 파란 머리칼은 여전히 뽀송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 쫓기고 계신다고요.
예, … 그렇습니다만.
…… 누구한테요?
그건 지금 말씀드리기에 좀 길어서.
범죄자는 아니죠?
… 입장 따라 다릅니다.
사람 죽였어요?
아니요.
그럼 오셔서 비만 피하고 가세요. 소년이 다시 망토를 쓰고 앞머리를 정돈하더니 박성화에게 손짓했다. 비를 피하고 가라니, 여기 사는 사람인가? … 출입 금지 구역에 거주자? 박성화의 눈초리가 잠시 가늘어졌다. 소년은 들고 온 작은 바구니에 카시스베리 몇 개를 따서 고이 담았다. 박성화와는 달리 한 주먹에 그닥 많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손이 작네. 사소한 관찰은 박성화의 오랜 고질병과도 같았다. 젖어서 축축하고 뿌리 탓에 울퉁불퉁한 숲의 흙바닥을 소년은 잘도 거닐었다. 이곳에서 오래 지낸 것은 맞는 모양이었다. 그에 반하여 빗물을 머금은 탓에 무거워진 박성화의 걸음은 하나하나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앞장서서 통통 튀듯 걸어가던 소년의 발이 느려졌다. 괜찮으세요? … 괜찮습니다. 이거 좀 드세요. 소년이 바구니에 조막만한 손을 집어넣더니 산딸기를 몇 개 꺼내어 내밀었다. 평소라면 체면이 있으니 괜찮다 하고 나중에 홀로 후회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감사합니다. 공손히 내밀어 둔 박성화의 손바닥에 산딸기가 떨어졌다. 드시면 기운은 좀 나실 테니까… 조금만 더 걸으시면 돼요. 빨간 과실이 박성화의 치아 사이에서 짓이겨졌다. 새콤하게 고인 즙을 단번에 삼켜낸 박성화의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말마따나 기운이 도는 것도 같았다. 역시 마녀의 숲이 맞는 것일까.
실례지만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저는 김홍중이에요. 그쪽은요?
습관처럼 소속을 먼저 밝히려던 박성화의 혀끝이 잠시 멈추었다. 이미 쫓겨난 몸이니 지난 소속은 의미가 없지 않나. 뒤돌아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김홍중의 눈을 마주하고 나서야 박성화의 혀끝이 마저 움직였다. 박성화라고 합니다. 왜 쫓기는 건지는 아직도 말 못해주세요? … 먼저 몸을 조금만 녹여도 되겠습니까. 여기서 조금만 더 움직이면 바로 보여서 여쭤보는 건데요. 소년은 경계심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주변은 아직도 푸른 비에 어둑어둑한 나무들 뿐인데. 숨어서 사는 중인 건가. 내뱉는 한숨에 아직도 습기가 묻은 것만 같아 박성화는 미간을 잠시 찌푸렸다. 이 상황에서 손해나 이득을 보는 사람은 박성화 하나밖에 없었다. 저 소년은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을 것이다. 아쉬운 사람이 움직여야지. 박성화가 서있던 자세 그대로 김홍중과 눈을 맞추었다. 왕궁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최측근이 척살당했고, 저 역시 선대를 모시고 있었던 탓에 목숨이 노려지는 중입니다. 이만하면 되었습니까. 소년은 생각에 빠진 듯 고개를 기울이고 눈동자를 골똘히 굴렸다. 그래서 입장 따라 다르다고 하셨구나…, 그래요, 가요. 김홍중이 커다란 나무를 모퉁이 삼아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따라서 걸음을 옮긴 박성화의 눈앞에 아담한 공터 한가운데 자리잡은 오두막이 나타났다. 진짜 바로 보이네. 김홍중은 문을 열고 박성화를 향해 눈짓했다.
먼저 들어가세요.
아, 예. 실례하겠습니다.
오두막은 천장이 조금 낮고 널브러진 책들 탓에 꽤 어수선했다. 젖어서 체온이 떨어지고 어쨌고 일단 저걸 먼저 치워버리고 싶은데 남의 집이라 박성화는 뜻없이 주먹만 쥐었다 폈다. 뒤따라 들어오며 망토를 벗어 둔 김홍중은 벽난로에 장작 몇 개를 집어넣더니 작은 유리병을 장작 위로 툭 던졌다. 가볍게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피어났다.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보던 박성화에게 김홍중이 다가가 손짓했다. 옷 주세요. 예? 옷이요, 젖었잖아요. 아, 감사합니다. 푸른 빗물을 한껏 머금은 겉옷이 무거웠다. 옷자락 끝에서 떨어진 물이 바닥에 파란 자국을 남겼다. 김홍중은 바닥을 한 번, 손에 쥔 박성화의 겉옷을 한 번,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박성화를 쳐다보았다.
그거 벗어보세요.
… 여기서 말입니까?
안 쳐다볼 테니까 이거 두르고 있어봐요.
김홍중이 내민 것은 조금 전까지 자신이 두르고 있던 망토와 같은 거였다. 박성화가 망토를 건네받자마자 김홍중은 몸을 돌려 박성화를 등진 채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래도 불을 피워둔 덕인지 옷을 하나씩 벗어도 썩 춥지는 않았다. 끝으로 망토를 둘러 몸을 꽁꽁 싸매고 나서야 박성화가 김홍중에게 다가가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저기…. 아, 깜짝이야. 잘 놀라는 건 조금 닮았으려나. 박성화는 어깨를 건드리던 손가락 그대로 바닥에 가지런히 펼쳐져 누워있는 옷더미를 가리켰다. 저쪽에 두었습니다. 그 말에 냉큼 일어난 김홍중이 커다란 담요를 질질 끌고 갔다. 가지런한 옷 위에 담요를 덮어두고 다시 박성화를 쳐다보던 김홍중의 손에는 언제부터 있었을 지 모를 사기 잔이 쥐어져 있었다. 과일 차인데 드실래요? 대답 삼아 고개를 끄덕이는 박성화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김홍중이 잔을 내밀었다. 따듯한 카시스베리 향이 수증기 따라 퐁퐁 올라왔다. 약간의 풀내음이 거슬리지 않을 정도. 조심스레 두어 번 불어 머금은 박성화는 몸이 금방 풀리는 듯한 느낌에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묘하게 몸이 정화되는 것 같은 감각이 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성화 입맛에 딱 들어맞도록 달았다. 호롭. 맛있네. 박성화의 낯짝을 뚫어져라 살피던 김홍중의 얼굴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벽난로 옆의 소파에 앉아 늘어지면서도 김홍중의 시선은 박성화에게 고정된 채였다.
그럼 그쪽은 원래 기사였어요?
선대 폐하의 직속 기사 단장이었습니다.
대단하신 분이었네….
지금은 박탈당했으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그쪽 얘기는 잘 몰라서. 조금만 더 얘기해주시면 안돼요?
무엇을 말입니까.
그냥요, 어쩌다 반란이 일어났다, … 이런 거 물어보면 좀 그런 가?
별로 재미없으실 텐데요.
제가 사람을 오랜만에 봐서 그래요. 내뱉는 김홍중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김홍중과 마주보는 자리에 놓인 의자에 앉으면서도 망토자락을 꼭꼭 두르며 박성화는 따듯해진 호흡을 흘렸다. 사실 어느 나라에서든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혈연 관계에 놓인 이를 부추겨 대신 권력을 잡으려는 귀족의 이야기라면 어린 애들이 읽는 동화책에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소재였다. 단지 그게 실제로 일어났을 뿐이지. 누가 봐도 자신의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 여러 누명을 덮어씌워 처단하고 자신의 행위가 정당했음을 입증하려는 짓거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애석하게도 거기에 포함된 이들 중에 박성화가 있었던 거 말고는 특별할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김홍중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고개 까딱이며 오옹,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광장에서 큰 소리로 읽어주는 소설을 처음 들어본 사람의 얼굴이었다. 사람을 오랜만에 본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듯이. 박성화의 이야기는 단순하고, 또 건조했다. 바깥의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조였다. 김홍중과 만나게 된 경위까지 밝히고 나서야 김홍중이 한 김 날아간 차를 호로롭 마셨다.
화 안 나요?
화가 나야 합니까?
그래도 당신이 모시던 사람이 죽은 건데.
검은 감정이 없어야 합니다.
누가 그러는데요?
대대로 이어진 기사단의 가르침입니다.
지금은 기사단 아니시잖아요.
…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아직 검이에요?
박성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검은 아무런 뜻을 비치지 않아야 했다. 주인의 뜻이 곧 검의 뜻이 되는 것이라 지겹도록 들어왔다. 근데 지금은, …. 애초에 그 뜻을 지키고자 했다면 박성화는 겸허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옳았다. 허나 지금 박성화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지? 살아서 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도망쳤을 텐데. 반쯤 남은 잔을 비우지도 못한 채로 박성화는 생각에 잠겼다. 뇌에 빗물이 찼는지 사고의 흐름은 나아가지 못하고 침잠할 뿐이었다. 미간까지 점점 찌푸려졌다. 김홍중은 가만히 박성화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턱을 괴고 주름 잡힌 미간을 쳐다보고 있었다.
… 지금은 아니라고 해야겠지요.
사람 되신 거네요.
… 예?
검 아니면 이제 사람 되신 거잖아요.
사람으로 사세요, 그것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성화씨는. 김홍중의 웃음이 환했다. 모종의 울컥함을 차와 함께 삼켜내고 박성화가 따라 웃었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조금만 머무르다 가도 되겠습니까. 얼마나요? 봄이 지나갈 동안 사람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싶어서 말입니다. 와, 고백 받은 기분인데. … 예? 여긴 봄이 안 끝나요, 저주받아서. 그럼 저 비는, …. 바깥 사람들이 그래요? 봄에 비 온다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소문이 났구나. 잘게 눈을 깜박이며 박성화가 다음 말을 재촉했다. 김홍중의 말에 의하면, 이 숲은 어느 순간 이후부터 내도록 봄 뿐이라고 한다. 마지막 겨울이 지나간 이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며, 추방당했다는 마녀는 애초부터 이 숲에 살고 있었고, 봄이 시작될 때에 맺히는 열매를 왕궁에 납품하기 시작했더니 아예 독점하려고 했다는 거다. 다량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외부인들 때문에 이래저래 다쳐버린 숲이 열매를 맺지 못하자 마녀는 왕궁의 인간들을 위한 저주를 걸어 비를 내리게 하고…, 이런 동화가 있었다면 아마 작가가 잡혀가지 않았을까. 하지만 말을 이어가는 김홍중의 눈빛에 진실만이 가득해서 박성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 비를 맞은 사람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겁니까?
아주 그렇지는 않아요. 비를 맞지 않으면 한 달 안에 죽거든요.
… 그렇다면 저는,
아. 성화씨는 괜찮아요. 그거 드셨잖아요.
김홍중이 턱짓하며 박성화가 쥐고 있는 사기 잔을 가리켰다. 카시스베리. 그래서 아까부터 비를 맞아도 감각이 없었던 건가? 향취가 짙게 남아 여즉 새콤한 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원래 비가 그치고 나서 딴 열매만 효과가 있어서, 아마 아까 몰래 훔쳐먹은 건 다를 걸요? … 아까는 실례했습니다. 괜찮아요, 덜 익은 거 몇 개 먹는다고 큰 일은 안 나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기는 합니까? 덜 익은 건… 마음이 아파요. 예? 숲이 마음 아파하거든요. 아…. 이게 순박하다고 봐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숨기는 건가 싶어 섣불리 불안해해야 하는 건지. 박성화의 한숨이 가벼웠다. 여튼 죽을 일은 없다는 거네. 그나마 좀 낫다.
그래서요, 성화씨.
예, 부르셨습니까.
진짜 봄 동안 여기 계실 거예요?
… 제가 사람이 되었다 싶을 때 까지만,
역시 고백은 아니었구나….
시무룩한 척 내려가는 눈꼬리가 천진했다. 박성화는 그만 실소를 내뱉으며 김홍중을 바라보았다. 처음 본 이에게 고백을 받고 싶으십니까. 그건 아니죠, 저 옷은 내일이면 마를 거니까 오늘은 그거 입고 주무세요. … 담요를 덮어두셨는데. 저렇게 놔두면 다 마르거든요. 저 담요 좀 탐나네… 라고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박성화는 고개를 돌려 담요만 빤히 응시했다. 홍중씨. 와, 이름 처음 들었다. … 그랬습니까? 네, 방금 처음 들었는데요. 아무튼 왜요? 혹시 마법을 배우셨는지 궁금해서. 이만큼 봤으면 그냥 눈치채고 말았을 줄 알았는데. 확실히 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렇구낭. 김홍중은 눈을 잠시 굴리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죠,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배웠거든요.
그럼 여기서….
태어났죠.
어쩐지…….
그렇게 신기하세요?
왕궁의 마법사들은 전부 사관학교 출신이니까요.
진짜 재미없겠다….
작게 몸서리치는 김홍중을 보며 박성화가 미소지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 진짜요? 공부 열심히 하셨을 것처럼 생겼는데. 성적은 별로였습니다. 되게 의외다…. 말을 하고 나니 민망해서 작게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박성화가 잔을 옆에 내려놓았다. 아무튼 간에… 당분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홍중씨. 저도 잘 부탁해요, 성화씨. 아득한 빗소리가 따듯하게 푸르렀다. 전주곡처럼 비가 내리는 봄이었다.
- 작가의 말
리셰입니다 :)
우선 여러분이 이 글을 보고 계신다면 제가 무사히 마감을 이겨내고 제출에 성공했다는 뜻이겠죠? 좀 더 시간을 두고 작업했어야 했는데 여러모로 촉박한 때를 보내는 바람에 레전더리로 지각을 하고야 말았어요… 이 자리를 빌어 총괄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 전합니다.
제가 준비한 첫 번째 향기가 마음에 드셨을 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글을 너무 오랜만에 쓰는 지라 필력도 죽고 문체도 틀어져서 꽤 염려스럽네요… 실은 지금 얘기를 이번에 다 끝내고 싶었는데 분량 조절에 실패해서 계획을 바꾸었어요. 일단은 향수 컬랙션처럼 계절마다 다른 클리셰를 향으로 담아볼까 생각중입니다. 겸사겸사 모티브로 삼을 향수는 이미 다 정해두기는 했습니다. (?) 제목 역시 컬랙션이라는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별칭 없이 넘버링과 키워드만 적었는데, 약칭은 그냥 포레스트라고 불러주셔도 됩니다 ㅎㅎ
첫 번째 클리셰는 숲이에요. 전체적인 분위기는 메종 마르지엘라의 소울 오브 더 포레스트를 염두에 두고 작업했는데 글에 그 향이 많이 담겼을 지… 아무튼 봄이고, 처음이고, 그런 것들에 어울리는 클리셰를 고심하다가 몽환적인 숲과 카시스베리에 꽂힌 나머지 세계관을 냅다 뚫어버렸는데, 또 하나의 업보가 생겨난 것 같아서 후기를 쓰는 와중에도 이게 맞나 싶네요. 쫓겨난 기사단장과 숲의 마법사가 함께 보낼 1년은 과연 어떻게 될지! 다음 계절이 없는 숲에 겨울이 오긴 할지! 당장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래도 좋은 기회로 버킷리스트에 있던 소재를 하나 써먹게 되어서 행복합니다. 글에 대해 궁금하신 건 제 계정 (@Cliché_of_SH) 디엠 푸슝 페잉 등등으로 오셔서 편하게 물어봐주세요 :) 그럼 다음 계절에 또 다른 클리셰의 향을 들고 돌아오도록 할게요. 다들 여름까지 건강하시고, 다른 분들 작품을 함께 보면서 봄을 만끽해봐요.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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