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equal PRESENT>, 리비
- 계간 성홍
- 2022년 3월 21일
- 9분 분량
김홍중은 여느 때와 같이 아침부터 바빴다. 미련 쌓느라 바빴다. 단풍 지던 날, 작업실에 틀어박혀 나흘 전 잡은 (구) 남자 친구와의 영화 약속 따위 잊은 채로 인터페이스 만지작거리다가 홍중아, 우리 그만 만나는 게 낫겠다 듣고 345만 원짜리 큰맘 먹고 산 파이오니어 믹서에 마시던 사이다 쏟은 날. 그날로부터 딱 일주일 지난 후가 씨발始發이었다. 딱 6.8일 지난 10월 30일 1:23AM이 기점이었다. 김홍중은 작업 효율이고 뭐고 싸그리 잃은 채 무지 바빴다. 이틀에 한 번 번호 변경해서 본인을 아주 단호하게, 낫겠지?도 아니고 낫겠다 피어리오드(period) 찍어 걷어찬 놈한테 *23# 찍고 전화 걸었다가 아무 말 없이 끊고 찔찔 짜기만 반복하느라 바빴다. 꼭두새벽에 일어나서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새출발 하겠다며 주소록 '걔' 연락처 삭제 버튼에 손가락 가져다 댔다가 떼어내느라 바빴다. 단풍은 무슨 곧 혹독한 벚꽃잎이 휘몰아칠 봄이 오는 중인 지금까지도. 김홍중이 하루 루틴을 시작했다. 자다 깨다 자다 깨다 자다 깨다 자다 때다 ••• 깨다 반복한 탓에 시뻘건 토끼눈 아래 거뭇한 그림자가 짙었다. 그거 붙잡고서 줄넘기까지 가능할지도. 침대 한 켠 쪼그려 앉더니 수없이 외운 번호 찬찬히 눌러 통화 연결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딱 세 번 울렸다. 김홍중이 누군가에게 추격 당하는 꼴로 급히 도로 끊어버렸다. 다시 세 번 울렸다. 또 끊었다. 다시금 울려 본다. 여보세요. 끊을 타이밍 놓친 김홍중 손가락이 쇳덩어리 위 배회하는 와중 스피커 타고 흘러나는 소리에 김홍중 볼 위는 또다시 장마. 나는 니 땜에 너와 적시던 이불, 이제 나 혼자 적시네 따위 개저질 존나게 천박한 가사밖에 못 쓰고 있는데 니 목소리는 여전히 꿀 처바른 듯 반질거려.
-여보세요.
…….
-홍중아.
그래, 너한테는 번호를 바꾸든 티 존나게 나는 지랄을 하든 하나도 안 통하는 거지. 너는 원래 그랬지. 내가 어떻게든 요령 피우려 하면 피식 웃으며 당해 주면서도 그게 정공법이 아니라는 것은 말없이 간파하고 있었잖아. 항상 그랬어. 다 안다는 듯이 웃고, 괜찮다는 듯이 안아 주고. 그래서 내 버릇이 나빠졌거든. 또 봐. 내 번호인 것 알면 받지 말고 발신자 차단이라도 해 버렸어야지. 그게 귀찮으면 전원이라도 꺼놨어야지. 다 니 탓이야. 중얼중얼. 수신인은 듣지도 못할 문장들 손톱 자근자근 깨물어대며 웅얼웅얼. 근데 왜 나만 아파? 김홍중의 꽉 쥔 주먹, 앙다문 입술 사이로 울음 섞인 신음성 새어났다. 홍중아. 곧이어 재차 제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음성. 과도하게 익숙한 톤의 무엇. 그렇기에 더욱 잔인한 소리에 겨우 정신 붙들어 잡고선 김홍중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야.”
- 이야기해. 아, 대표님. 저 전화 한 통화만 하고 들어가겠습니다.
“내가 더 좋아하고,”
니가 덜 좋아한 것 같아. 그게 아니면 이게 이렇게 아플 리 없잖아. 나만 혼자 맨날 침대에 처박혀서 이러고 있을리 없잖아. 얼굴은 장마철 논밭인데 입안은 사하라였다. 버쩍버쩍 말라가는 김홍중의 입안에서 흩어지는 말들 위에 눈물 방울 얹어진다. 박성화는 뭉개지는 발음 속 정확한 단어를 들었을까. 한참을 대표인지 뭔지에게 열심히 떠들어대던 박성화도, 방바닥에 둑 터뜨린 김홍중도 아무 말 없었다. 이어지는 정적. 길고도 짧은 간극을 박성화가 깼다.
- 나 며칠 출장 가기로 했어. 미국. 다음 주 화요일에 출국하는데 거기 있는 동안 혹시라도 전화했다가…. "알아들었으니까 그만 말해."
정신 나간 새끼. 전 남친 전화 요금 걱정해 주는 미친놈이 세상 어디 있다고. 구 남친이 국제 전화 걸다가 고지서로 폭탄 맞든 어쩌든 니가 뭔 상관인데. 진짜 대가리 어디에 나사 하나 빠진 새끼. 김홍중이 울분에 차 혀끝 맴도는 구구절절 긴 문장들 꾹꾹 압축해 만든 한 문장을 들은 박성화가 전화기 너머 픽 웃었다. 평생을 싫어하는 척했으나 실은 너무 좋아하던 얼굴. 그 위 만연한 미소. 그 선명한 안면이 절로 뇌내를 채워서 김홍중이 아랫입술만 앙다물었다가 도로 풀기를 반복했다.
- 좋은 하루 보내.
그러고선 사족 없이 짧막한 문장으로 통화를 마무리당했다. 전화를 먼저 끊지는 않으나 더 이상의 대화를 이어나갈 수는 없게 여지의 싹부터 잘라버리는 박성화. 남이 보기에는 헤어지고 레벨 248짜리 진상짓하는 구 남친이 먼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다정함이 제법 새삼스럽겠으나 김홍중에게는, 다음날 출근하는 것을 잊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김홍중이 원할 때면 언제든 밤새워 전화기 붙들고 있다가 '나 출근해야 해서 씻고 올게. 사랑해. 푹 자.'하던 남자와 헤어진 김홍중에게는.
전화기 소리는 뚝.
발치에 물방울은 뚝뚝.
"나쁜 새끼."
사형 선고나 다름 없었다.
PRESENT equal PRESENT (今 同 金) written by. olive 벌벌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끊고서 침대 아래 방구석 한켠에 기어들어가 쪼그린 자세 그대로 잠들었다. 고로 방바닥에 혹사당해 쪼개질 듯한 허리가 느껴져야 마땅하다는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만치 편안했다. 더듬더듬. 손끝에 느껴지는 딱딱한데 익숙한 감촉은.... 김홍중의 눈이 번쩍 뜨였다. 코앞에 놓인 가슴팍. 박성화가 건축학과, 김홍중이 실용음악과 일개 학부생일 적 질리도록 보아 왔던 그 후드티. 김홍중이 마련한 박성화의 스무 살 생일 선물. 구찌도, 버버리도, 하다못해 폴로도 아닌데. 고작 토미 힐피거, 당시 배곯는 힙합 꿈나무였던 김홍중이 큰맘 먹고 (세일해서) 58000원 주고 장만한 회색 후드티를 박성화는 지 유니폼이라도 되는 양 하루 걸러 하루 입었었다. 그랬었다. 그때부터 걔는 김홍중과 관련한 일에는 나사 하나 뺀 채로 접근했다. 야, 너 옷이 그거밖에 없어? 질문 커브로 들어오면 대충 비슷해 따위 헛소리로 홈런 날리는. 하여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현재... 라고 하기에도 꺼림칙한 헤어지기 직전의 박성화는 시원한 향이 났다. 화한 첫 향 아래 꽃과 새벽 공기가 섞여든 어른 냄새. 그게 또 되게 재수 없었다. 자신이 알던 박성화, 주구장창 선(LINE) 면(PLANE) 긋고 칼질하다가 겨우 마감 친 후 눈 반쯤 감은 채로 비척비척 바삐 걷던 박성화, 망설임 없이 김홍중 작업실 문부터 따고 들어와선 신디사이저 앞 후드 뒤집어쓰고 앉은 제 등판에 얼굴 비비적대던 박성화는 어른 냄새가 아닌 지 살 냄새가 났으니까. '니 안 씻었잖아 냄새 나 비비적거리지 마라 쫌' 싫은 척 밀어냈지만은 사실 좋아했었으니까, 그 냄새. 꾀죄죄 매캐한 악취가 아니라 미미한 말보로 끝향과 섞인 걔 냄새. 그 풋풋한 동시에 지긋한 냄새는 박성화가 대기업이라는 신新 정글에 입문했을 때부터 작별이라 생각했는데. 익숙하고도 어색한 향내에 잠시 손끝을 떤 김홍중이 눈앞 줄 세 개 그인 로고만 미친 듯이 노려보았다. 뭐지? 드디어 돌았나?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이 씨발 나 드디어 사랑 땜에 돈 거야? (*HONGJOONG 정규 3집 타이틀 '설마 돌겠어') 일단 슬그머니 코 박고 있던 가슴팍에서 멀어지려 꾸물댔다. 잠귀 밝은 박성화(로 추정되는 형체)가 혹여 깰까 봐 0.000001 밀리미터씩 후진했다. 팔은 새우마냥 접어 제 가슴팍에 찰싹 붙인 채 꾸무적꾸무적. 벽면에 등 닿기 직전, 조각상인 양 죽은 듯 멈춰 있던 기다란 팔이 훅 뻗어져와 박성화가 열심히 찌워뒀으나 김홍중이 그새 앙상하게 만들어낸 팔뚝을 붙잡을 때까지는. 덥석 붙잡힌 팔이 부드럽게 당겨졌다. 겨우 벽까지 도달한 게 무화된 상황. 김홍중의 모든 노력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박성화... 인 것 같은 누군가 김홍중을 끌어안았다. 그 행위로 인해 김홍중에게 더해지는 건 혼란뿐. 왜? 뭐야? 뭔데? 박성화야? 살은 왜 이렇게 빠졌대? (와중에 걱정했다.) 뭐지? 왜 여기 있는데? 저 머리 꼬라지는 또 뭐고. 왜 갑자기 핑크? 출장 간다더니 싹둑 당했니? 그 충격으로 문 따고 들어온 거야?
"좀만 더 자자…."
그런 혼돈의 도가니 속 김홍중 머리통을 품에 끌어안고서 비비적거리던 박성화가 졸음에 파묻혀서는 웅얼거렸다. 나 어제 마감이라 50시간 깨어 있었단 말야…. 교수님이……. 교수님? 김홍중 눈이 번뜩 뜨였다. 어정쩡하게 안겨 있던 몸을 확 밀치니 도통 떠지질 않던 눈이 반쯤 뜨였다가 감긴다. 왜 그래…. 옹알옹알. 그리고 또 걔 시야는 암전. 김홍중만 눈 동그랗게 뜬 채로 벽에 철썩 붙었다. 데구르르 굴리며 상황 파악을 위한 노력 비슷한 것부터 시작했다. 사실 노력조차 불필요했다.
하나, 목전에 있는 이 익숙한 후드티의 박성화는 박성화가 맞다.
둘, 이... 연한 분홍빛 머리는 박성화가 입대 전 마지막 학기 일탈이라며 김홍중에게 직접 색 입혀 주기를 부탁했던 그 머리다.
셋, 이목구비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으나 솜털과 젖살이 덜 빠진, 조금 앳되어 보이는 이 얼굴은.
"이게 말이 돼?"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이 제 앞 수마에 사로잡혀 있는 놈이 스물하나의 박성화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김홍중이 준 후드를 지 피부인 양 달고 다니던 그 박성화.
김홍중은 말도 안 되는 상황 속 머리 쥐뜯으면서도 제 앞에 놓인 장관, 절경...... 은 너무 아저씨 같고, 하여튼 간에 박성화 걔의 예쁘게 감긴 눈꺼풀부터 살짝 벌어진 입술 틈새까지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뜯어봤다. 물론 숨소리 조금도 안 새나게. 아까 교수님 어쩌구한 것 봐서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박성화는 며칠 내도록 못 잔 게 확실하니까. 드디어 돌았나 싶어 쾅쾅 뛰던 심장도 한참을 익숙하고도 어색한 차분한 이목구비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 점차 제 박자 되찾아갔다. 그래,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 아예 불가능한 일이면 어바웃타임부터 벤자민피트씨의어쩌구까지 그런 괴상한 영화가 나왔겠냐고. 잘 가 베일리도 그거잖아. 침대 아래 무릎 끌어안고 앉아 있던 김홍중이 정신 빠진 합리화로 애써 진정시킨 제 심박수를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목전에 둔 남자 앞에 턱 괴고 엎드렸다. 색색거리는 숨소리 비트 삼아 손가락으로 바닥 두드렸다. 툭 툭 툭. 안 어울리게 헬쓱해져서는 눈두덩이 검게 물든 걸로 봐서 사흘은 눈 못 붙인 것 같은데. 망할 교수탱이 내가 졸업 전에 한 번은 패봤어야 하는 건데. 볼 거라고는 얼굴밖에 없는 놈 이 꼬라지로 만들면 되나. 중얼중얼 속삭이듯 읊조리던 김홍중이 뻗은 검지가 진한 눈썹 위 살짝이 내려앉았다가 콧대 타고 유영했다. 진한 선들이 자그마한 손가락 끝에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내내 박성화는 미동 없었다. 혹여 깰까 닿은 듯 만 듯한 거리로 스쳐가는 손가락이 가엾지도 않은지. 그러다가 김홍중이 손을 슬쩍 펼쳤다. 채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볼 위 손을 얹으려 그 위를 배회하다가 결국 거두려 후진하려던 순간 손등 위 타인의 손이 덮였다. 화드득 뒤로 넘어가려던 몸을 박성화가 붙든 손에 힘주어 잡아냈다.
"왜 안 만져 줘."
"일단 놔 봐."
"목 쉬었네. 또 밤새 가이드 녹음 했어?"
"놓으라고."
"보고 싶었단 말이야…."
칭얼칭얼. 스물하나의 박성화는 눈 반쯤 감고도 정확하게 김홍중 손 잡아끌어 제 볼 위로 결국 안착시켰다. 박성화는 여전히 어리광이 많았다. 그러다가 김홍중이 대답 없이 입술만 꽉 깨물고 있으니 닫혀 있던 눈꺼품이 점차 열렸다. 한 번 껌뻑. 두 번 껌뻑. 그러다가 동그래지는 눈. 김홍중이 제 눈 앞 어린 양의 혼란스러운 동공 무브먼트에 책임감을 느끼고 버쩍 마른 입을 열려 한 순간 박성화가 하나 남은 지 손을 뻗었다. 김홍중의 볼 위를 슬쩍 검지로 쓸었다. 그리고선 중얼중얼 혼잣말. 중학생도 아니고 꿈에서까지 이게 무슨 짓인지. 김홍중이 여러 원인 요소로 인해 쉰 목소리 안고서 입 열자마자 축 처지는 눈썹이 김홍중 가슴에 콱 박혔다. 어디 아파? 괜찮아? 꿈인 줄 알면서도 온몸으로 저를 걱정하는 꼴이 쿡 찔렀다.
"꿈 아니야."
"응? 홍중아, 근데 너 목소리가."
"꿈 아니라고. 이마에 피도 안 마른 게 홍중이는 무슨 홍중이."
"가끔 혼자 상상하던 원숙 섹시 예민미 절정의 홍중이 맞는데…."
"아니라고."
김홍중이 여전히 눈 비비며 상황 파악 못 하는 어린애 볼 한 번 콱 꼬집어 줬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꿈 아니고, 나 너랑 대충 네 달 전에 헤어졌거든. 나이는 올해 서른하나. 너랑 딱 열 살 차이지."
"홍중아, 잠깐만."
"이게 계속 말을."
눈 치켜뜨며 볼 꼬집었던 손에 도로 힘 넣으려자마자 손가락 사이사이 파고들어 깍지 껴 버리는 수작질 시전한 박성화가 한껏 눈꼬리 내리며 눈만 돌돌 굴렸다. 상황 파악 중이겠지. 한참을 돌돌돌돌. 그러다가 꺼낸 한 마디.
"그러면 우리가 지금 남이라는 건가?"
"야."
"요? 그게 말이 돼요?"
박성화는 새끼 오리마냥 김홍중 뒤만 졸졸 쫓아다녔다. 라면 끓이는 뒤에도 딱 붙어 이제 라면 끓일 수 있어?(애저녁에 요는 내다 팔았다) 계란 내가 깰까? 물 그거 맞아? 두 개 끓이게? 지겹게 잔소리하다 냄비로 맞을 뻔하기도 하고, 멍하니 티브이 앞 소파에 앉아 있는 김홍중 앞 바닥에 앉아 가만히 얼굴만 올려다보기도 하고. 화장실까지 따라오려다 결국은 한 대 맞고. 그렇게 졸졸 쫓아다니면서도 박성화는 김홍중이 입술 박아 버린다 으름장 놓으면 슬쩍 손 올려 지 입술 막았다. 뭔가 바람피우는 느낌이라 안 된다 주장하면서도 눈은 흘끔흘끔 김홍중 이목구비 뜯어보기 바빴다. 그러는 내내 손으로는 종이 한 장 김홍중에게 빌려다가 연신 줄 그어대고 이어댔다. 박성화가 선 몇 개 그으니 나타나는 건물의 형상들. 아, 얘 재수 없게 재능충(忠) 그 자체였지. 그 꼴 가만히 지켜보던 김홍중이 툭 뱉었다. 야.
"너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뭐 그렇게 열심히야."
한참 멍한 얼굴로 김홍중 한 번, 지 아래 종이 한 번 바라보던 박성화가 아…,바람 빠지는 소리 내며 목덜미나 긁적였다. 과제라서. 대충 간추린 말로 넘기려다가 김홍중 부리부리한 눈 보고서 혀 내어 입술 한 회 축였다. 특별할 건 없어. 입으로는 말하면서 손으로는 종잇장이나 만지작만지작.
막말로 의사, 변호사, 검사는 한 인간의 밑바닥을 보는 직업이잖아. 가장 불행할 때를 봐, 걔네는. 그런데 건축가는 아니야. 건축가는 그 사람이 가장 행복하고 충만할 때를 함께 만끽해. 생각해 보면 그렇잖아. 방 한 칸 월세 살면서 집 지어 달라고 설계도 맡기는 사람이 어디 있어. 건축가가 마주하는 사람은 가장 충만하고 행복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 사람이야. 그 행운과 행복을 그대로 감전받아. 그래서 나는 내가 행복하고도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뭐…, 사실 이러나 저러나 니가 있어서 행복한 게 제일 크지만. 너 없으면 안 되잖아, 나. 그러니까 걔가 무슨 잘못을 했든 니가 이번만 봐줘. 그 새끼가 어떤 멍청한 짓을 했길래 헤어지기까지 했는지는 몰라도…….”
박성화가 만지작대던 종잇장을 옆에 두고 앉아 있는 김홍중 앞에 와 쪼그렸다. 소파에 앉은 김홍중을 눈 동그랗게 뜨고 예쁘게 올려다봤다. 별거 아니지? 박성화는 그런 사람이었다. 항상 이런 사람이었다. 자기 일에 전력을 다하고, 또 내게도 그 이상의 무언가를 주는. 이런 애 입에서 그만 만나는 게 낫겠지나 추출해내는 나란 새끼는. 또 김홍중 발치에만 때이른 장마. 후두둑 떨어지는 물줄기에 당황한 박성화가 팔 뻗어 제 앞 동그란 머리통을 끌어안으려 발을 뻗는 동시에 김홍중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웅덩이 하나 건립할 기세로 뚝뚝. 미안해. 중얼중얼. 내가 잘못했어. 웅얼웅얼. 쉴새없이 속삭에던 김홍중 등 뒤에 손 하나 올라앉았다.툭, 또 툭. 눈물 떨어지는 속도에 맞추어 토닥였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김홍중이 숨 들이키다가 하나 깨달은 사실. 눈 번쩍 뜨고서는 고개 벌떡 들게 된 건.
"너 향수 냄새."
"아, 하나 받아서."
제 앞 차분히 내려앉은 검은 머리칼. 조금 더 날렵해졌으나 오히려 여유로워 보이는 이목구비. 재미없는 니트 아래 청바지, 또 그 아래....
"이거 신고 다니네."
"그럼 신고 다니지."
누가 준 건데. 박성화가 피식 웃으며 읊조렸다. 발렌시아가 2020 F/W 스니커즈. 하나 뽑아 줬더니 지도 살 수 있으면서 괜히 무지하게 좋아하던 꼬라지. 지 깔끔한 성정대로 검은 구석 하나 없는 앞코 보다가 괜시리 민망해진 김홍중이 그거 한 번 툭 찼다. 그리고 또 핑 도는 눈물. 겨우 눈가에 힘주어 참아냈다. 박성화는 변한 게 없었다. 일 년 내내 후드 입고 다녔던 스물하나 때나, 일 년 넘게 신발 하나 주구장창 신고 다니는 지금이나. 얘는 변한 게 없었다. 도로 그렁그렁. 둑 터지기 직전인 김홍중 이마에 박성화가 지 이마 붙였다. 톡 닿는 콧잔등. 비비적대는 꼴도 머리 샛분홍이었던 걔랑 똑같아서 김홍중 잇새로 픽 하니 절로 새나는 웃음. 그 웃음을 기점 삼아 박성화가 도로 새까만 머리통을 지 품에다 파묻었다. 꽉 끌어안고 초 셌다. 십, 구, 팔, 칠.
"뭐 하냐?"
"너 십 초면 밀치니까 그거 기다리는 중."
"또라이."
입과 다르게 만연해지는 웃음. 육, 오, 사. 미쳤냐고. 삼, 이, 일. 땡 맞춰 손에 힘주어 떨어뜨리는 김홍중 보며 박성화가 예쁘게 입꼬리 말아올렸다. 봐. 밀친다고 했잖아. 웃으며 민 김홍중이나 그저 몸에 힘 빼고 밀린 박성화나 서로 눈이나 맞추고 가만히 있었다.
"홍중아."
"야."
또 터진 웃음. 코 빨개서는 웃는 꼬라지 웃기지도 않은지 박성화는 눈깔에 꿀 바르고서 잔잔하게 웃기만을 반복했다. 미안. 속삭이듯 읊조리는 김홍중의 언어에 박성화가 또 눈 반절 접어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딱딱하게 굳는 안면. 품 속 김홍중 아주 살짝 떨어뜨려내더니 묘한 어조 그려냈다.
"홍중아, 혹시 걔랑……,"
박성화가 동그란 눈을 도르륵 굴렸다. 뭔가 말하고 싶은 양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계속해서 집요한 선이 찔찔거리느라 코끝에 딸기 매단 김홍중 뒤를 배회했다. 그 뭐 마려운 강아지 꼬라지를 촉발시킨 게 무엇인지 알아챈 김홍중. 들썩이려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겨우 근엄한 얼굴로다가, 그래봤자 코끝에는 딸기, 눈에는 붕어 매달고 있지만은, 툭 던졌다.
"걔랑 뭐." "아니야."
박성화가 침대 구석구석을 한참 훑어대던 시선을 겨우 두어냈다. 아닌 게 아닌 얼굴로 김홍중 볼따구 위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괜히 중얼중얼. 김홍중이 까치발 들어 딴소리나 해대는 놈 이마에 도로 제 이마 툭 붙였다. 큰 놈이나 작은 놈이나 똑같다. 하나는 바람피우는 것 같다며 시선이며 입술 간수하려 그러더니 하나는 지한테 질투하고 앉았고.
“안 했어."
"어?"
"걔랑 안 했다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랑 뭘 하냐."
"실은 나는 스무 살에 너랑 손등만 스쳐도 흥분했거든."
그래서 좀 걱정했어. 경멸 어린 김홍중의 시선에 박성화가 픽 웃었다. 때마침 박성화 주머니께에 진동이 울렸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꺼내들었다. 박성화가 누구야? 묻는 김홍중의 앞머리에 손을 가져다댔다. 처연한 얼굴로 애처롭게 만지작대기에 그냥 뒀더니 만들어낸 완벽한 깻잎 모양. 금세 일그러져 사나워진 눈매에 박성화가 입술을 붙였다. 홍중아.
"화요일에 뭐 해." "작업." "미국 가서 할래?" "성화야." 니는 무슨 미국 가자는 말을 내일 아침에 드라이브 스루 들러서 맥모닝 먹자는 것마냥 하니…….
"캐리어 빌려줘."
그래서 그렇게 됐다.
"사랑해." "나도. 햄버거 시키자.”
"그래.”
하여튼 그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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