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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eling of Fall>, 청해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9월 23일
  • 9분 분량



"왔어?"

"응, 이젠 가을이라더니 아직 더워.."

"그래도 저녁엔 제법 가을 같아. 바람도 불고 쌀쌀해"

"어쩌라고. 지금 내가 덥다니까? 이 땀 안 보여?"

"보여. 그래서 내가 다 준비 해 뒀지"

"잘 했어. 제법 마음에 드네"


벌써 햇수로 6년이나 된 박성화와 김홍중의 사랑은 제법 안정적인 모습을 띄고 있었다. 봄처럼 풋풋하거나 여름처럼 뜨겁진 않아도 적당히 선선하고 시원해서 기분 좋게 만드는 가을 바람처럼 서로가 원하는 온도로, 그런 모습으로 무르익어 가는 중이었다.


"나 잘 해써? 떵화 예쁜 짓 했으니까 아 예뻐, 앜!"

"너 내가 선 넘지 말랬지"


사랑과 함께 무르익은 또다른 하나가 있다면 그건 성화의 장난기였다.

그동안 꼭꼭 숨겨뒀던건지 아니면 연애라는 게 사람을 유치하게 만든건지 어느새부터 박성화는 장난기가 그득그득해져, 홍중의 입을 빌리자면 '깝치는' 순간이 꽤 늘었다. 꼭 지금처럼, 고운 반응이 절대 안 나올 걸 알면서도 한 발 더 나아갔다가 꼭 한 대를 맞고 만다던가 하는. 그리고 그 주먹질마저 예상하고선 쏙 피한 다음 홍중을 움직이지 못하게 꼭 끌어 안아버리는 것까지가 마무리였다.

하지만 습하고 더운 날씨에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한 채 들어올 저를 알고서 도착할 시간에 맞춰 창고에 넣어뒀던 선풍기를 다시 꺼내 깨끗이 닦은 뒤 미리 틀어놔 집안을 시원하게 만들어 두는, 여전한 다정함은 주먹으로 콩 쥐어박고 싶다가도 그냥 모르는 척,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그렇게 덥지는 않으니까 하는 핑계로 가만히 안겨 있게 만들기도 했다.


"이거 놔. 이제 가야 돼. 빨리 옷 입어"

"알았어. 얼른 올테니까 나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

".."

"아, 미안. 진짜 미안"

"조심하자?"

"옙"


왜 1절만 하는 법이 없을까. 왜, 어째서 점점 나이 먹을수록 정신 연령은 어려지는걸까. 벤자민 버튼이야 뭐야. 옷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홍중은 시야에서 성화가 사라지자 너무도 자연스레, 스르륵하고 쇼파에 녹아내렸다. 내내 더워서 조금 짜증이 났는데 선선히 불어오는 선풍기 바람이 시원하고 쇼파에 배여있는 포근한 향기도 익숙하고, 편하니까 스르륵 눈이 감기기도 하고, 지금 이게 제일 좋은 거 같은데. 너무 마음에 드는데


"나가 봤자 더운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박성화가 갈수록 유치해졌다면 김홍중은 갈수록 애가 되어갔다. 의젓하고 씩씩하고 때론 시니컬하던 걔는 어디 가고 어느새 제법 투정도, 애교도 많이 늘었달까. 그런 김홍중을 향한 애인 박성화의 한 마디는 '오히려 좋아'였다. 주변인들은 물론 학을 뗐지만. 혼자서도 척척 다 잘 해 내던 애가 가끔은 당연하게 의지하고 자연스레 손을 벌리는 게 뿌듯하다는 팔불출 멘트에 결국 모든 걸 포기했다는 후문이 들리기도 했다.


"가자. 일어나세요, 김홍중 어린이"

"야, 지금 딱 좋아. 완벽해"

"응, 아니야. 읏챠"

"네가 뭔데 내 평화를 방해해"

"박성화입니다."

"그래? 그럼 봐 주지"

"예, 감사합니다. 김홍중 선생님"


한창 여름이 떠나갈듯 말듯 애태우며 기승을 부릴 때, 에어컨을 틀어 놓고서 바닥에 나란히 누워 뒹굴거리다 우연히 발견한 전시회 일정에 한 번쯤 꼭 보고 싶었던 작가였다고 그렇게 반가워했으면서, 예매를 한 이후로 몇 주 동안 설레어하고 들떴으면서, 막상 가면 누구보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하나 하나 열심히도 머리에, 마음에 담을 거면서 꼭 저렇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곤 했다.

사실 얼른 들어가라고 손을 휘휘 저으며 저를 안으로 들여 보내던 그 순간부터 이미 예상 가능한 그림에 혹시나 하고 거실로 나오면 역시나 그 찰나에 쇼파와 하나가 되어있는 애인에, 다 알고 있지만 귀여운 건 또 별개라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고집 피우는 떼쟁이 애인을 안아서 일으키면 영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 와중에 전 또 그 얼굴이 귀여웠고. 물론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귀여운 게 일상이면서 귀엽다는 소리를 듣는 걸 싫어하는 애라서



-



홍중의 말대로 가을이라 하기엔 제법 더운 날씨는 이내 성화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게 하고, 고르고 골라 입고 나왔던 가디건을 벗게 만들었지만 한 손으론 열심히 부채질을 하는 와중에도 깍지까지 야무지게 끼고 있는 탓에 아까부터 따뜻하다 못해 제법 뜨끈뜨끈해진 반대쪽의 손을 놓지는 않았다. 더운데 뭐 하는 거냐며 성질을 낼 것만 같은 홍중도 조용히 걷다 손바닥 사이에 땀이 차오를때면 잠깐 손을 떼어내긴 했지만 이내 제 바지에 스윽 닦고선 자연스레 다시 그 손을 잡곤 했다. 이런 게 둘의 조용하지만, 뜨끈하고 어찌 보면-말그대로-끈적한애정표현법이랄까


"우리 다음 주에 거기 갈래?"

"응? 어디?"

"너 좋아하는 그 공원. 네가 거긴 가을에 제일 예쁜 거 같다며"

"아, 거기? 거긴 다음 달에 가자. 아직 거긴 좀 더울거야. 작년 이맘때쯤 갔다가 너 녹았잖아"

"그랬나? 그래도 그 때 네가 거기서 찍어준 사진 진짜 잘 나왔는데. 그거 꽤 오랫동안 내 프사였을걸"

"그러니까. 그 뒤로 내가 다른 예쁜 사진들을 얼마나 많이 찍어줬는데 절대 안 바꾸더라. 섭섭행"

"그러는 너도 그, 여름 바다 사진 거의 1년 내내 안 바꿨잖아"

"그렇긴 해. 아, 좀 더 시원해지면 우리 거기도 가자. 드라이브하고 새우 먹으러 가던 곳, 이모님 이제 우리 얼굴 외우시지 않았을까"


여전히 덥긴 해도 가을이라는 걸 알리겠다는 듯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맺힌 땀을 말리고 하나 둘 피기 시작하는 꽃봉오리들을 반가워하며 여전히 손을 꼭 맞잡은 채 걸어가며 나누는 대화에는 둘이 함께 만들고 기억하는 시간들이 가득 녹아 있었다.

그 때 거기, 너 좋아하는 곳, 이맘때쯤 항상 가던 장소. 멍하니 앉아서 하늘만 세 시간 봤던 데. 길 잘못 들어서 같은 골목 5번 돌았던 그 곳. 모호하고 애매한 표현과 두루뭉술한 대명사만 가득한 문장과 표현뿐이지만 둘은 아, 거기 좋지. 맞아, 거기 또 갈까? 하고 자연스레 알아 들을 수 있다는 게. 그런 사람이 있고 공유한 시간과 기억이 있다는 게 문득 새삼스레 울컥하다가 서로가 애틋해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조금은 아련해진 예전을 추억하고, 자연스레 멀지 않은 미래를 계획하며 다정스레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정적이 찾아 올 때도 있었지만 함께 한 수많은 시간들이 만들어준 안정감은 그 고요마저 어색하기보단 포근하게 만들어주었기에 제법 오랫동안 가만히 걷기만 하다가도 누군가 툭 말문을 트면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지는, 그런 사이가 되어 있었다.


"아, 나 며칠 전에 진우 형 만났다?"

"어디서?"

"친구 만나고 집 가던 길에. 나 고등학교 친구들 만났다던 날"

"아, 그래? 그러고보니 너 만났단 얘기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진우 형이 나 보자마자 뭐라고 했는 줄 알아?"

"뭐랬는데"

"네가 고생이 많다. 내가 보기엔 네가 아까워"

"...진짜로?"

"아니. 그냥 오랜만이네, 반갑다. 작업실 놀러 와. 이러고 가셨어"

"...아, 진짜 왜 저래?"


오늘 작정하고 날이라도 잡은건지 성화의 깐족거림이 멈출줄을 몰랐다. 요 근래 서로 바쁜 일이 많아서 꼭 열흘만에 얼굴을 마주한건데, 그동안 못 친 장난들을 쌓아뒀다가 한 번에 다 풀기라도 하려는건지 원.

덕분에 방금 전까지의 차분하고 포근한 커플의 모습은 금세 사라지고 야무지게 다듬어 올린 머리에 슬랙스를 입고 최선을 다해 우다다 도망가는 (스물)다섯살토끼반박성화어린이와비슷한듯다른착장을하고서는잡히면가만두지않겠다며도도도달리는역시 (스물)다섯살 다람쥐반 김홍중 어린이가 되어 조금 전까지 고요하던 도보 위를 둘의 발소리로 가득 채워버렸다


"아, 미안 미안. 근데 고생이 많단 말은 진짜 했어. 너 예민해질 때도 많은데 그거 다 받아주는 거 보면 가끔 존경스럽다고"

"어쭈. 근데 뭐 어쩌라고. 그래서, 싫어?"

"어, 못된 눈빛. 폭중이다!"

"싫냐고. 대답 해 봐. 허, 전시회는 나 혼자라도 볼 수 있어"

"아니, 사랑하지. 같이 보러가자~"

"이럴 거면서 왜 까불어. 엉?"



-



어쩌면 별 거 없고, 누군가의 눈엔 뻔하디 뻔하게 보일 데이트 코스들.

이 근처에 오면 매번 가는 그 식당에 들려 늘 먹던 메뉴를 먹고 밖으로 나와 꼭 400 발자국을 걸으면 나오는 카페에 들려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주문을 마친 뒤 항상 앉던 그 자리에서 멍하니 풍경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른 이야깃거리로 한참을 얘기 나누고, 이따금 찾아 오는 정적을 즐기다가 어느새 해가 저물면 조용해진 거리에 가만히 들려오는 물소리를 따라 나란히 걷던, 저 멀리 보이는 아름드리 나무가 예쁜 강가 산책길로 향하는 것.

저번 달에도, 작년 이맘때에도, 나란히 손목에 끼고 있는 팔찌를 샀던 그 날에도 갔었던, 그 날의 하루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장소, 행동, 그리고 일련의 코스들.


"오늘 전시회 어땠어? 생각보다 열심히 보던데. 막 오오~ 이러면서"

"예술의 세계는 역시 심오하구나.. 근데 설명 들으면 뭔가 알 거 같기도 하고.. 나 이제 좀 보는 눈이 생겼나봐"

"칫, 아이구, 그러세요? 여기저기 데리고 다닌 보람이 있네"

"이제 어디 가서 아는 체 하고 다닐 정도는 됩니다, 제가"


다만, 오늘 둘이 함께 갔던 전시회를 홍중이 애타게 기다렸던 이유가 스스로조차 기억이 희미할 그 언젠가 성화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우와, 멋지다. 뭔가 내 스타일이야'라고말했던작품의작가였기때문이라는게.

작품과 작가에 대해 설명하고 재잘대는 홍중의 설렘과 행복을 더 잘 이해하고 공감 해 주기 위해 어제 저녁 인터넷으로 그 작가는 물론, 오늘 전시회의 컨셉 그리고 의미, 작품에 대해 찾아본 성화의 정성이 똑같은 하루를 특별한 오늘로 만들었을 것이다.

설사 서로가 서로의 이런 마음을 모를지라도, 몰라도 아는 게 있고 알아도 모르는 게 있는 그런 사이니까.


"..배불러"

"그만 먹어, 그럼. 이제 이거 다 내 꺼~"

"이정도로 자주, 많이 먹었으면 레시피 따라할 수 있을 거 같지 않아?"

"그래도 괜히 전문가가 아니라고.. 내가 아무리 해도 안 될 걸"

"그렇겠지? 그나저나 이렇게 공격적으로 열심히 먹는 건 넌데 왜 날은 내가 쪄?"

"내가 너 몰래 다 계획 세운거야. 김홍중 다람쥐 만들기 작전"

"어쩐지! 이 나쁜 놈! 당장 멈추지 못해?"

"절대 그럴 수 없어! 나는 다스베이더니까"

"...그래라.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여기 오면 늘 들리는 단골 식당의 세트 B, 그리고 디저트로 나오는 레인보우 샤베트를 닮은 아이스크림은 둘이 함께 다닌 400개의 맛집, 같이 먹은 3000개의 메뉴 중 성화의 취향과 홍중의 입맛을 완벽히 저격한 구성이었고 덕분에 그 가게 메뉴판 디자인이 2번 바뀔 때까지, 이젠 입장과 동시에 주문이 가능한, 안 가면 사장님도 둘도 섭섭한 곳이 되어 버렸으며

400걸음 옆 카페는, 그 날 아침 사장님의 기분에 따라, 그 가게에서만 파는 대왕 스콘과 반반 타르트의 종류가 달라진다는 사실과, 꽤 다양한 메뉴들이 하나같이 다 맛있다는 걸 (전부 다 먹어 본 끝에) 알게 된 이후로 어린 시절 10종 랜덤 캡슐을 뽑던 그 마음으로 '오늘의 메뉴 맞추기'가 둘만의 소소한 게임이 되었다. 아무래도 낮은 확률 탓에 정답률이 높진 않았지만 가끔 누군가 맞출 때면 그 날 카페 값은 상대방의 몫인, 그런 게임.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 너 이렇게 먹고 저기 가서 스콘이랑 타르트도 다 먹을거지"

"홍중아.. 실망이야"

"왜, 당연한 소리해서?"

"응. 말 나온 김에 나는 오늘 사과에 걸게"

"아, 내가 하려고 했는데. 그럼 나는.. 유자 타르트"

"오.. 맛있겠다"

"그거나 먼저 다 먹고.. 물론 넌 다 먹겠지, 응.."


가끔 손님이 뜸할 애매한 시간대에 찾아가면 '조용할 때 메뉴 개발하려던 참인데 왜 방해해!' 하는 잔소리를 하셨지만 또 아주 가끔은 언짢은듯 찌푸린 미간과 앙 다문 입술과 반대로 홍중과 성화가 제일 좋아하는 TOP4로만 구성된 쿼터 타르트를 턱 하고 만들어주시기도 하셨다. 몇 달에 한 번정도 겨우 만날 수 있는 그 한정판은, 식욕 없는 김홍중이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하나를 다 먹어버리는 유일한 메뉴이자 박성화에게 쉽게 양보 해 주지 않는 메뉴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오늘은 여기 저기 구경하고 여유롭게 돌아다닌 탓에 특제 타르트는 물론, 늘 앉던 자리도 뺏길 뻔한 위험한 날이었다. 꼭 그 자리가 아니어도 괜찮지만 왠지 지켜내고 싶은 그런 괜한 고집 같은 거. 유난히 햇빛이 잘 들어오는 창가도,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조용한 구석도 아니지만 적당히 시끄럽고 적당히 풍경 구경, 사람 구경하기 좋은 그런 애매한데 둘은 맘에 들어하는 동그란 의자가 있는 자리.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꽉 찬 손님들에 시무룩해 하기도 잠시, 그 자리가 빈 걸 확인하자마자 호다닥 달려가 앉더니 뿌듯한 표정으로 손짓하는 성화를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었지만 저도 몰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방금 왜 귀여워보였지. 좀 짜증나네"


주문한 메뉴들이 하나 둘씩 테이블을 채우기 시작하면 둘은 별 대화 없이 음식에 시선을 고정한 채 먹기 시작했다. 둘 다 입에 뭘 넣고 말하는 걸 딱히 달가워 하지 않는 편인지라 먹을 땐 먹는 거에 집중하자 라는 마음으로,

오늘의 타르트는 사과도 유자도 아닌 복숭아와 블루베리가 반반씩 올라 가 있었다. 홍중이 타르트 위에 올라 가 있는 블루베리 한 알을 콕 집어 대여섯번 씹어 먹을 동안 성화는 타르트 한 조각을 세 입 컷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 뒤로 타르트 한 판이 사라지고, 성화의 홍차와 홍중의 아메리카노가 바닥을 보일 동안 둘 사이에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적을 낯설어 한다거나 불편해 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 카페를 들어오는 순간까지도 나누었던 게 대화인데다 이 고요가 어색할만큼 풋풋한 사이도, 무서울만큼 위태로운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그냥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바닥난 체력을 채우는 일종의 충전 시간이었다. 창밖 너머 보이는 풍경에 시선을 뺏겨 한참동안, 처음 봤을 땐 시계탑에 걸려 있던 구름의 끝이 그 옆 건물 꼭대기를 지나가고 있다고 느낄 때까지.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실려온 나뭇잎 하나가 한참을 공중에 머무르다 카페 앞 창틀에 조용히 내려 앉을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도 아무렇지 않았다.


"홍아, 손"

"응?"

"손에 크림 묻을 뻔했어. 봐봐, 닦아줄게"

"근데 너 그거 사려면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되는거야? 새벽이었나"

"응. 새벽, 현지 시간이라서. 다행히 안 묻었다. 입도 봐봐. 아, 예쁘다. 이제 그만 일어날까?"

"나도 도전은 해 볼까? 알다시피 나 올빼미잖아. 그래도 하나 보단 둘이 승산 있지 않냐?"


양손으로 핸드폰을 꼭 쥐고서 눈으로는 한정판 피규어 판매 페이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가도 아주 살짝, 본인조차 느끼지 못한 그 찰나를 발견하고 조심스레 손을 닦아주는 성화라서,

애인을 앞에 두고도 얼굴에 내려 앉는 따뜻한 가을 햇빛과 솔솔 부는 바람에 녹아 깜빡 잠들었지만 깨자마자 스치듯 말한 걔의 말을 기억하고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하는 홍중이라서.



-



"추워.."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김홍중씨"

"땀이 바람에 말라서 더 추운 거야. 너 강바람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지"

"으이구- 기다려봐"


박성화의 말썽과 김홍중의 말썽은 그 결이랄까 분야가 제법 달랐다. 성화가 깐족대고 하지 말라는 걸 하는 타입이라면 홍중은 고집을 부린다거나 하라는 걸 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홍중의 말썽이 더 큰 문제가 되곤 했다.

오늘만 해도, 박성화의 말썽은 기껏해야 제 애인 속 긁기, 성질 건드리기가 전부였지만 분명 밤에는 추울테니 얇은 겉옷이라도 챙기란 성화의 말을 끝끝내 듣지 않은 결과는 감기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박성화의 말썽을 해결하는 건 김홍중의 가끔의 인내, 그리고 꽤 자주의 성질머리였고 김홍중의 말썽을 해결하는 건 잔소리를 덧붙인 박성화의 다정함이었다. 내내 매고 다니던 가방에서 홍중의 가디건을 꺼내는 그런 다정함


"오, 역시 박성화"

"내 말 좀 들어주면 안 돼?"

"그러니까. 이쯤되면 들을만도 한데"

"환절기마다 감기도 잘 걸리는 애가, 응? 이래놓고 목 아프면 속상해 할 거면서"

"너 있잖아. 오, 근데 이거 핏 예쁘다. 괜찮지"

"...네 옷이니까. 홍중아, 이거 네 거야. 우리 집에 네 옷 되게 많아"

"아, 그래? 네 냄새 나는데? 난 그래서 네 옷인줄 알았지"

"며칠 전에 빨래해서 그래. 네 옷만 잔뜩 나오더라. 너 일부러 그러는거지"


같이 한 시간만큼 서로의 공간에 서로의 흔적이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성화 방 옷장 한 켠을 차지한 홍중의 옷가지들이나 홍중의 집 거실에 있는 온통 성화 물건뿐인 서랍장.

서로가 곁에 없을 때에도, 오롯이 혼자인 공간에서 문득 홍중의 옷이, 성화의 서랍장이 시야에 들어오면 기분이 이상해지곤 했다. 또다른 걔인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어느새 이런 사이가 되었구나 싶기도 하고.


"아, 맞다. 엄마가 다음 주쯤에 너네 집에 감 보내준대"

"하.. 매번 진짜. 도착하면 어무니한테 감사하다고 잔뜩 애교 부려드려야겠다"

"야, 박성화"

"엉?"

"선 넘지 마. 우리 엄마 막내 아들은 나야. 가뜩이나 나보다 너 먼저 챙겨서 맘에 안 드니까"

"나한테 보내주시면서 어련히 너 챙겨 먹이라는 뜻이신 거잖아. 너한테 주면 냉장고에 넣어두고 안 먹으니까"

"흥, 그래.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나도 다 생각이 있어"

"우리 엄만 이미 네 꺼야. 전화 하면 첫 마디가 '홍중이는? 아가는?'이라니까. 난 궁금해 하지도 않아"


안녕하세요. 어머님.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정중하게 첫 인사를 드리던 남의 집 아들들이 진짜 내 아들보다 더 사랑스럽고 보고 싶은 내 새끼가 될만큼, 서로 엄마를 뺏고 뺏기며 너희 어머니가 우리 어무니가 되고 엄마~하고 부를만큼. 시간이 가져다 준 선물은 생각보다 주변에 가득했다. 가을이 주는 색색의 다양한 선물처럼, 따뜻하고 알맞게 무르익은 연인이란 가을을 많이 닯아 있었다. 봄을 지나 여름을 건너 가을에 오기까지 모든 생명들이 태어나고 자라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시간들이 쌓여 완성되는 가을처럼

김홍중과 박성화가 함께 맞이할 둘의 6번째 가을도, 함께한 5번의 1년과 6번째 봄과 여름을 지나오며 함께 자라고 서로를 배우며 만들어간 연인이라는 열매를더 예쁘게, 달게 만들어 가기 위한 따사롭고 선선한 계절이 될 테니까. 되고야 말 거니까.


"나 배고파"

"..진짜?"

"응. 그래서 말인데,"

"뭐, 또 왜"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

"...난 불닭볶음면"

"어제 사 놨어. 종류별로 다 있어. 그러니까 먹고 가"

"오.. 뭐지. 일단 이 팔짱은 풀어 봐. 나 생각 좀 하게"

"일단 걸어가면서 생각해.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알았지?"














- 작가의 말


가을에도 다시 돌아온 청해입니다.

봄의 첫 시작을 함께 하면서 설레어하고 계간의 시작을 열게 되었을 때의 설렘이 아직도 생생하고 심장을 간지럽게 하는데 벌써 계절의 반을 넘어 가을이 왔네요.

이번 글은 여전히 서투르고 만족스럽진 못 하지만 최대한 가을의 계절감을 담아보려 노력했어요. 제가 생각하는 가을은 투명하고 푸른 하늘이, 살랑대며 기분을 산뜻하게 만들어주는 바람이, 내내 붕 떠 있던 공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는 공기가 있는 계절이라 그걸 담아 보고 싶은데 여전히, 아직도 서툰 것 같네요.

글에서 묘사하려 노력했던 것처럼 열매의 계절, 수확의 계절, 물드는 계절 가을을 성홍의 관계에 담아 보고 싶었어요. 함께 한 시간만큼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하게 된 사소하고 다양한 것들이 시간이 만들어 준 선물이자 둘의 수확이라고 생각했어요.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물들어 있는 것도 나타내고 싶었는데 표현이 되었으려나 모르겠네요.

환절기엔 무엇보다 감기 조심하시고, 한 풀 꺾인 더위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추위 사이 지금의 계절을 오롯이 즐기며 여전히, 항상 여러분의 행복을 기도하겠습니다.

짧지 않은 글 읽어주시고 사랑 해 주셔서 늘 넘치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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