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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world 秋>, 별지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9월 23일
  • 5분 분량



* 약한 사망 소재 주의 바랍니다.

* 春, 夏 편에서 이어집니다.



조금씩 변화하는 것과 온전히 어긋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렇기에 김홍중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변화가 아닌 어긋남이었다. 조금의 변화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 변화가 있더라도 박성화가 자신에게 첫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어긋남은 그렇지 않다. 박성화가 자신의 낡은 명찰을 발견했을 때부터 김홍중은 무언가 단단히 어긋났음을 느꼈다. 꿈보다 행복한 현실은 보통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장마는 김홍중에게 그런 시기였다. 꿈을 신경써야 하는 이가 현실에 휘말리게 되면 이런 일이 생긴다고, 네가 돌아온 이유를 잊지 말라고…… 경고라도 하듯이 마지막 장마가 몰아쳤다.


- 김홍중.


변명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김홍중의 이름을 부르는 박성화의 목소리 속에 의문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답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뭐라고 해. 나는 사실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왔고, 그 명찰은 내가 원래 살던 시간의 네 것이라고? 판타지를 좋아하는 박성화라도 전혀 믿지 않을 사실들이다. 가져온 초코바를 책상에 대강 내려두고 박성화의 손에서 명찰을 가져온다. 눈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목소리를 내뱉는다.


- 돌아가. 내일 학교에서 보자.


여름의 꿈을 사용하지 못한 채 장마는 끝이 났고, 여름도 끝이 났다. 그리고 박성화는 김홍중이 만들어낸 꿈이 아닌 다른 꿈을 기억했다.



*



처음 기억해낸 꿈과 배경은 같았다. 바다와 자몽색 머리. 분명 박성화가 처음 기억한 봄의 꿈에서, 그 자몽색 머리의 주인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꿈에서는 알 수 있었다. 열아홉의 김홍중과 같은 얼굴을 한 사람. 여전히 고등학생 티가 나는 얼굴을 하고 있으나, 자몽색 머리로 그 앳된 티를 벗어나려고 한 것 같아 보였다. 이제는 김홍중의 뒷통수가 아닌 옆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박성화가 김홍중을 불렀다. 그러면 김홍중은 박성화를 보고 웃었다. 네가 웃는 모습은 어떤 계절과도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바다는 첫 꿈보다 어두웠고, 금방이라도 장마가 쏟아질 것처럼 구름이 뒤엉켰다.


- 홍중아.


김홍중. 또 네 이름을 부른다. 혹여 닳을까 두려워하면서도 자주 부르던 이름. 생각해 보니 꿈에서 네가 자신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첫 바다에서는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고, 두 번째 교실에서는 네게 손을 뻗자마자 꿈에서 깨어났다. 이름을 부르고, 눈을 맞추고, 네가 웃는 모습을 바라본다. 어딘가 익숙한 감정이 일렁였다. 파도가 칠 때마다 가슴이 아린다. 이유 모를 감정과 통증의 끝에 손을 뻗는다. 꿈은 깨지 않았고, 천천히 김홍중에게 다가가던 박성화가 김홍중을 끌어안는다. 어두컴컴하던 바다 위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더 이상 김홍중은 박성화의 앞에 존재하지 않았다.



*



웬일로 피터 팬과 웬디가 붙어 있지 않느냐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 마디씩 했다. 여전히 둘은 아침에 김홍중의 집에서 만났고, 함께 등교했고, 함께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매일 나누던 인사조차도 하지 않았다. 쉬는 시간만 되면 김홍중에게 매점에 가자느니, 점심 시간만 되면 함께 산책하자느니…… 늘 그리 관계를 이어오던 것이 끊어졌다. 김홍중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문제집만 바라보고, 박성화는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 항상 교실 밖으로 나갔다. 점심 시간에 나갔다 돌아오면 여전히 김홍중은 자리에 있었다. 박성화의 자리에는 작은 초코바가 놓여 있었다. 밥이라도 좀 제대로 먹지, 알 수 없는 감정 속에서도 김홍중을 내내 생각하는 것은 불변하는 사실이었다.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는 장마가 오고, 가을에는 단풍이 물들고, 겨울에는 눈이 오는 것처럼 당연한 사실.


꿈에서처럼 네가 사라져버릴까 두려웠다. 왜 한참은 낡은 것 같은 자신의 명찰을 가지고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내가 그 명찰을 발견했을 때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왜 그렇게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는지…….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으나 박성화는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여기서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김홍중은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애초부터 네가 힘들어하는 질문을 할 생각도 없었다. 첫사랑이니까, 모든 것을 헌신하려고 할 만큼 사랑은 맹목적이었고, 자신의 궁금증보다 너의 감정을 중요시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점심 시간마다 밥을 먹지 않는다는 듯이 비워지지 않는 자리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박성화는 그 다음 주부터 매점에서 빵을 하나씩 사오기 시작했다. 매번 사오는 빵 종류도 다양했다. 그리고 빵을 든 손 옆에는 항상 딸기 우유가 함께 들려 있었다. 김홍중은 처음에 빵을 받아도 먹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에는 박성화가 자신이 빵을 먹을 때까지 바라보고 있는 탓에 결국 포장을 벗기고 한 입씩 베어물기 시작했다. 한 번 어긋난 상황은 당연히 새로운 상황을 만들었고, 이 시간도 김홍중이 알지 못하는 시간이었다. 두려운 마음을 꾹꾹 누른 채 넘어가지 않는 빵을 먹었다. 내가 시간을 넘어서 다시 네게 온 이유를 잊지 말아야 했다.


너를 살리기 위해.


그 겨울 바다에서 죽은 너를 살리기 위해. 너를 떠올리고 추억하며 시간을 흘리던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 박성화와 김홍중이 함께 하는 새로운 봄을 붙잡기 위해.



*



가을 단풍이 학교에 가득 찼을 때 즈음, 박성화와 김홍중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잘 지내기 시작했다. 침묵으로 이어졌던 등교와 하교, 모든 순간은 다시금 이야기로 가득 찼다. 박성화는 의문을 덮어두기로 했다. 그 의문에만 계속 매달려 있기에는 얼마 남지 않는 고등학교의 시간이 아까웠다. 열아홉 첫사랑의 영향인지 의문점은 생각보다 무리 없이 덮어둘 수 있었다. 그래, 때가 되면 얘기해주겠지. 얘기하지 않는 이유가 분명 있을 거야. 김홍중은 왜 박성화가 다시금 자신에게 다가왔는지 알고 있었다. 내가 네 첫사랑이니까. 졸업 후까지 믿지 못했던 이유였고, 납득할 수 없는 이유였으니까. 하지만 김홍중은 박성화와 함께 첫사랑에 대한 것을 믿기로 했다. 아무리 어긋나도 너와 내가 서로를 좋아하게 된 시점은 열아홉이라고, 그것은 과거든 미래든 변하지 않는 감정이었으니까.


김홍중 역시 불안에 잠식되어 있기보다는 이 순간에 더 충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름의 꿈을 사용하지 못하고 장마가 끝이 났다. 이 어긋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가을의 꿈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했다. 박성화가 자신이 통제하지 않는 꿈을 기억한다는 것은 알지 못한 채. 그 날 박성화는 책 사이에 단풍잎을 끼우는 김홍중의 꿈을 꾸었다. 닿을 수 없는 꿈은 오랜만이었지만, 닿자마자 네가 사라져버리는 꿈보다는 훨씬 나았다. 닿을 수 없는 꿈 속의 김홍중은 항상 환상 같았다. 첫사랑의 감정을 그대로 그려낸다면 네가 그려질 정도로.



- 잘 잤어? 좋은 꿈 꿨고?


김홍중의 질문에 박성화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온 딸기 우유를 김홍중에게 건네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후덥지근했던 날씨가 점점 낮은 기온을 향하고 있었다. 교복 위에 후드티 하나씩 입고 함께 등교하고 있자면,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점이 느껴졌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고 나면 너와 나는 수능을 칠 것이고, 수능이 끝나면 졸업을 할 것이다.


박성화는 그 날 수업시간 내내 생각에 잠겼다. 얼마 남지 않은 고등학교 생활을, 공부하느라 고생하는 것 같은 (우리) 홍중이에게 어떻게 하면 즐겁게 남도록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수능이 끝나면 졸업식 때까지 뭐 하고 놀까. 졸업하고 나면 그 이후의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네가 나를 먼저 떠나지 않는 한 나는 네 곁에 항상 있을 테니까…….


그리고 바다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기억하는 첫 꿈의 너는 바다에 있었으니까. 수능 끝나고 나면 꼭 여행 가자고 해야지. 졸업식 때는 추울 테니까 그 전에 가고…… 바다에서 고백해야겠다, 그리 생각했다. 열아홉에 첫사랑 겪는 고등학생이면 한 번 즈음 생각해볼 수 있는 낭만이니까. 분명 질색하면서도 좋아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


- 그런 꿈을 꿨다고?

- 응. 네가…… 너무 순식간에 사라졌는데, 불안해서.


가을도 끝을 향해 갈 때 즈음, 박성화는 또 한 번 꿈을 기억했다. 이전의 환상과 같은 꿈이 아니라, 또 김홍중이 사라지는 꿈을. 이전에는 이런 악몽 이야기해봤자 뭐 하나, 싶어서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정말 현실과 같이 생생하게 다가와서. 이제는 꽤 쌀쌀해진 새벽 공기를 제쳐두고 새벽 세 시에 김홍중의 집 앞으로 와 전화를 건 이유다. 김홍중은 새벽 세 시에 전화 너머 울음 가득한 박성화 목소리를 듣고 영문도 모른 채 놀라 달려 나온 사람이 됐지만.


- 어떻게 사라졌는데?


하지만 이제 시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김홍중이 통제하는 꿈만을 기억하다가 제가 사라지는 꿈을 기억한다는 박성화의 말이었다. 애써 모른 척 눌러뒀던 불안감이 다시 엄습하기 시작했다. 숨을 내쉬면 하얀 입김이 흩어지는 계절이 온다. 겨울을 앞두고, 내가 다시 너와 함께할 수 있는 미래를 앞두고 모든 걸 실패할 수는 없다.


새벽의 공기 탓이다. 어떻게 사라졌냐는 질문에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처럼 이야기하는 박성화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손목을 잡아 이끈 것은. 모두 새벽의 탓이다. 봄을 핑계로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처럼, 김홍중은 새벽을 핑계로 박성화를 당겨 끌어안았다. 품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생생하고, 터질 것처럼 뛰는 네 심장 소리까지 전부 들려서. 웃음이 나왔다.


- 나 여기 있잖아. 걱정하지 마. 꿈은 꿈일 뿐이야.

- 홍중아…….


이제는 꽤 겨울에 가까워진 가을바람이 불면 단풍잎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을이 끝나간다.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제가 사라지는 꿈을 잊을 수 있도록 오늘 남은 한 번의 기회를 쓰고, 이 온기를 잃지 않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다. 다시 우리가 바다에 간다고 해도 나는 너를 살릴 것이다. 열아홉의 우리가 보낸 계절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닌, 그저 처음의 의미만 갖게 하기 위해서. 김홍중은 박성화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나의 웬디. 나의 낭만. 나의 첫사랑.


올해 첫눈도 장마처럼 조금 빨리 시작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박성화는 그날 춘추복을 입고 학교 벤치에 앉아 함께 단풍을 올려보는 김홍중의 꿈을 꾸었다. 내일은 좋은 꿈을 꿨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작가의 말


가을까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이야기가 될 겨울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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