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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world 春>, 익명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3월 21일
  • 5분 분량



박성화는 꿈을 기억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19년 인생 내내 꿈을 기억하지 못했다. 악몽을 꾸면 식은땀에 잔뜩 젖어 새벽 고요한 시간에 깨고는 했으나 어떤 악몽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했고, 즐거운 꿈을 꾸면 종일 들떠 급식 두 번씩 리필해 먹으면서도 어떤 꿈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에게 것에 답답함과 같은 불만이 있느냐 묻는다면? 급식에 나온 핫도그 세 개 쌓아두고 케첩에 머스터드까지 야무지게 뿌려 한 입에 욱여넣으면서,


- 웅?


하고 눈 동그랗게 뜬 채 되묻기나 할 놈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무섭다는 고등학교 3학년, 즉 고삼 생활 시작하자마자 전학을 오게 된 박성화는 당연하게도 새학기 시작 전날까지 꿈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일에는 믿고 있던 모든 사실이 뒤집혔다. 3월 2일 새학기의 첫 날, 고삼들의 본격적인 입시생 시절이 시작되는 날이 박성화에게는 19년 인생 동안 꿈을 기억한 채로 잠에서 깬 첫날이 되겠다 이거다.


분명 자정 되기 전에 잠들어 평소처럼 눈을 떴음에도 피곤해서 입맛이 없었다. 아침 마다하더니 냉장고 한구석에 소소하게 자리 잡고 있던 딸기우유 하나 빨대 꽂아서 입에 물고 집을 나섰다. 머릿속에는 인생 최초로 기억에 자리 잡아 버린 꿈 생각만 가득했다. 그런데…… 전부 다 기억하는 거였다면 이리 억울하지도 않았을 테다. 기억에 남은 단편이라고는 누구 것인지 모를 자몽색 머리 하나와 바다 풍경 하나가 전부였다. 박성화가 등교하다 멈추고 피곤 가득 쩔은 눈을 손등으로 벅벅 비벼댔다. 처음 기억한 꿈이 악몽도 아니고 즐거운 것도 아니고 전부 기억하는 것도 아니다? 이건 핫도그 물고 되묻던 박성화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학교는 가야 했다. 전학 첫날부터 무단지각에 더 가면 무단결석까지 찍을 순 없지 않은가. 이미 진작에 다 비운 딸기우유 빨대 잘근잘근 씹으며 교문을 통과했다. 전학 첫날이라 어디로 가야 할지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충 중앙 현관 통해서 5층까지 올라가고 나면 3학년 교무실이 보였다. 우유팩 손에 쥔 채로 교무실 문 열고 들어가니 누가 담임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선생님 한 분 붙잡고 먼저 들었던 것 꿈 뒤섞인 기억에서 끄집어내 8반 전학생인데요, 하고 나면 안쪽 자리에서 키보드 두드리시는 선생님 가리키는 손가락 따라 시선 움직인다. 박성화 고개 꾸벅 숙여 인사한 후 종소리와 함께 선생님 뒤따른다. 문틀과 문 엇갈려 드륵, 하는 소리 귓가에 울리고 나면 교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박성화야. 잘 부탁해.


박성화가 손을 들어 두어 번 흔든다. 딸기우유 팩 여전히 손에 들고 있는 채였기에 왼손은 뒤로 숨기고 오른손만 흔들었다. 그래서 반 친구들이 박성화에게 뜨거운 관심을 보였느냐, 그건 또 아니다. 솔직히 고삼 첫날에 전학 온 애는 그리 큰 이슈가 되지 못했다. 누가 고삼 되자마자 전학을 가냐고 박성화 집에서나 좀 화제가 됐었지…… 3학년 8반에서는 그냥 수능까지 같이 지낼 반 친구 하나 더 생겼구나,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건 박성화가 손 흔들고 있든 말든 교탁 앞자리에서 매3비 1일차 지문 위로 필기나 하던 김홍중도 마찬가지였다. 딸기우유 숨긴 손 다 보이는데 쟤는 안 보인다고 생각하나? 실없는 생각 잠깐 띄우는 건 옵션.


여전히 왼손 뒤로 숨겨둔(게 맞나?) 채로 선생님이 가리킨 빈자리에 박성화가 앉는다. 책상 왼쪽 구석에 우유팩 내려두고 짝꿍이랑 가볍게 인사만 나눈 박성화가 고개를 선생님 쪽으로 돌렸다. 교탁 앞자리의 김홍중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박성화는 김홍중이라는 이름 석 자는 모르고 그냥 동글동글한 뒤통수 가진 애라고 생각했지만……. 선생님이 장황한 조회 멘트 늘어놓는 와중에도 박성화는 그 뒤통수에 시선 뺏긴지 오래였다. 생전 초면인 뒤통수 위로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잠시 받았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제 또래 애들 뒤통수 다 똑같지 뭐,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뺏겼던 시선은 금방 자리를 찾았다.




금방 3학년 8반에 적응하여 나름 밥도 같이 먹는 친구들까지 만든 박성화와, 여전히 교탁 앞자리에서 문제집 쌓아두고 샤프만 까딱거리는 김홍중이 얽힐 일은 전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봄 내음 약하게 나던 3월 2일에서 2주라는 시간이 지날 동안 박성화가 김홍중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딱 하나였다. 아, 뒤통수 귀엽다는 것까지 포함하면 두 개인가? 아무튼…… 김홍중은 작년 이 학교의 학생회장이었다는 것. 그것도 같이 급식 먹는 친구들이,


- 쟤는 홍중이. 김홍중. 작년에 우리 학교 학생회장이었어.


라고 말하는 문장 하나로만 얻은 정보였다. 박성화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다. 별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쟤는 쟤대로 공부하고,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저도 저대로 잘 지내고 있었으니까. 근데 아마 사람들은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단정했을 때 일은 터지고, 관심 생길 일 없다고 단정했을 때 관심이 생기며, 절대 얽히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사람과 지독하게 얽힌다는 것을.




고삼들에게 수행평가는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좋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3학년 8반을 담당하는 문학 선생님은 간단하게 끝낼 겸, 학생들 생기부도 미리 채울 겸 관심 있는 도서와 이유를 적어오라고 했다. 다들 제 희망 전공에 맞추어 책을 적어 낼 때 피터 팬 적어 낸 학생 두 명이 있었다. 3학년 8반 7번 김홍중, 3학년 8반 17번 박성화. (새 학기 첫날 전학 온 박성화는 똑같이 가나다순으로 출석번호 한자리를 차지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관심 있는 도서 적어오라고 했으니까. 물론 김홍중은 생기부에 이미 빼곡히 들어찬 도서들 중 조금 흐름 다른 한 권에 불과했고, 박성화는 비슷한 류의 도서만 가득 차 있는 생기부 속의 한 권이었다. 색다른 도서 동시에 적어 낸 두 사람이 신기했는지 문학 선생님이 지나가는 질문으로 좋아하는 인물은 무엇이냐 물으면, 박성화는 웬디라 답했고 김홍중은 피터팬이라 답했다. 박성화는 답하는 김홍중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조금은 흐릿해진 기억을 끄집어냈다. 김홍중 쟤 뒤통수…… 꿈에서 만난 애랑 비슷한가?




봄 내음이 짙어지는 4월이 다가왔다.

박성화는 3월 2일의 흐릿한 경험을 끝으로 다시금 꿈을 기억하지 못했다.




운명이 장난이라도 하는 듯 피터 팬을 관심 도서로 꼽은 이후로 딱 2주째 되는 날 4월 기념 자리 교체가 이루어졌다. 사실 신학기 때 대충 출석번호대로 자리 배정해두고 바꾼다 바꾼다 말만 하던 담임 선생님의 게으름이 가장 큰 원인이기는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봄을 핑계로 붙이듯 자리 교체도 봄을 핑계로 내세우고 이루어졌다. 박성화와 김홍중은 창가 쪽의 1분단 두 번째 자리로 사이좋게 짐을 옮겼다. 반 애들은 이 둘을 두고 피터팬과 웬디라고 불렀다. 물론 박성화가 웬디다.


짝꿍이 되고 둘은 조금씩 말을 트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친화력이 꽤 있는 박성화가 자신과 같은 관심사(책 한 권뿐이지만)를 가진 김홍중에게 쉬는 시간마다 말을 붙인 결과물에 가까웠다. 홍중아 무슨 과목 공부해? 홍중아 너 피터팬 말고 좋아하는 책 있어? 홍중아 무슨 노래 들어? 질문 하나하나 귓가에 그대로 때려 박히는 것 귀찮다고 여기던 김홍중은 결국 박성화에게 두손 두발 다 들었다. 대충 대답하고 어떤 때는 무시하기까지 했으나 포기를 모르는 걔 때문에.



보통 짝꿍 됐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붙어 다니나? 3학년 8반의 몇몇 애들은 의문을 가지고 이야기하고는 했다. 박성화도 김홍중도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있었으나 자연스레 둘로 좁혀졌다. 어차피 둘 다 가볍게 붙어 다니던 친구들이었으니 자연스레 사이가 흐트러지고 응어리 없이 끝이 났다. 거창하게 늘어놨으나 그냥 박성화랑 김홍중이 짝꿍 되고 말 튼 이후로부터 붙어 다녔다는 얘기다.


박성화는 공부하는 김홍중 입에 간식 하나씩 까서 넣어주고 처음에 질색하던 김홍중은 일주일 정도 후에 여전히 시선 문제집에 고정한 채로 자연스럽게 받아먹었다. 한 번에 간식 세 개씩 까먹어야 성에 차는 박성화가 김홍중 더 먹이겠다고 자기도 속도 맞춰서 하나씩 까먹는 일은 박성화가 전학 오기 전의 친구들이 보면 기겁할 일에 가까웠다.


- 홍중아. 너 학생회장이었다며.

- 엉.


김홍중 공부하는 데 방해될까 (아주 잠시간) 입을 다물고 있던 박성화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문제집에 시선 고정한 채 가볍게 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김홍중 자리로 맞닿아 있는 창문이 조금 열려 봄바람이 흩어지며 들어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딘가 익숙하단 말이야. 속으로만 중얼거리던 단어들이 김홍중에게 닿지 못하고 흐트러진다. 학생회장이었어서 익숙했나? 싶다가도 박성화와 김홍중은 작년에 같은 학교가 아니었다. 그럼 그냥 꿈속의 걔랑 뒤통수가 닮은 것 같아서? 차라리 쟤랑 나랑 운명이라고 하지. 어라. 그럴 수도 있지 않나? 물론 이 말은 입 밖으로 내뱉자마자 김홍중에게 한 대 맞을 걸 알기에 내뱉지 않았다.


박성화는 그냥 생각을 접었다. 그걸 고민하며 멈추어 있기엔 김홍중이 입안에 있는 간식을 다 먹었기 때문에.





꿈은 생각보다 예상치 못한 소재로 찾아온다. 꿈을 기억하지 못했던 박성화는 당연히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잠들기 직전까지 좀비 영화를 봐서 좀비에게 쫓기는 꿈을 꾸거나, 그날 먹었던 딸기 케이크가 너무 맛있었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커다란 케이크를 잔뜩 먹는 꿈을 꾼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결국 김홍중 생각은 하루 내내 하니 걔가 꿈에 나올 가능성은 이론적으로는 없는 것이다. 근데 그 스쳐 지나간 운명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김홍중이 꿈에 나올 줄은 몰랐지. 박성화는.


검은 머리를 내리고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박성화와 김홍중만이 빈 교실에 앉아 있었다. 열어둔 창문 너머로 매화 잎이 흔들린다. 박성화는 여기서 꿈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우리 학교에 있던 매화는 이미 끝을 맺은지 오래니까. 그리고 직감했다. 이게 내가 기억하는 두 번째 꿈이겠구나, 하고. 김홍중은 창밖의 매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창 너머의 노을이 익숙한 색을 띠고 있었다. 박성화가 김홍중에게 손을 뻗자 박성화는 식은땀에 잔뜩 젖은 채 눈을 떴다. 4월 28일 새벽 2시 37분, 박성화가 기억하는 두 번째 꿈.




그날도 마찬가지로 박성화는 딸기 우유를 들고 학교로 향했다.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왼손에 자기 것, 오른손에 김홍중 것을 하나 더 들고 집을 나섰다는 점이다. 여전히 머릿속에서는 두 번째 꿈에 대한 기억이 뒤섞였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서 김홍중 옆자리에 앉으면, 김홍중은 답지 않게 고개를 들어 박성화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 좋은 아침, 박성화. 좋은 꿈 꿨어?



김홍중이 문제집에서 눈을 떼고 박성화에게 시선을 두기 시작할 때, 봄은 끝이 났다.






-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름에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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