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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world 夏>, 별지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6월 21일
  • 5분 분량


※ 약한 사망소재 주의 바랍니다.

※ <봄> 항목에서 'Dreamworld, 春'편을 먼저 읽어주세요.



김홍중은 일기장을 펼쳤다.


날짜를 적고 시간을 적는다. 해 모양까지 그리고 나면 그 아래로 내용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을 지독히도 괴롭히던 기말고사가 끝이 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하늘은 더욱 푸르게 빛이 났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의 하늘은 아름답다. 방학이라고 해도 보충학습이라는 명목으로 당장 내일부터 다시 학교에 가야 하는 입장이었으나 그리 싫진 않았다. 자율이라며 텅 빈 보충학습 참여 희망 명단 돌리던 교실의 풍경이 흐릿하다. 더워 죽겠는데 보충학습 누가 하냐며 투덜거리던 박성화가 김홍중이 먼저 이름 적어넣자 조용히 제 이름도 적은 모습은 뚜렷했다. 일기장에 글씨를 단정히 써내려가던 김홍중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을 모르는 척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끔 입맛 없을 때 들고 등교하던 딸기우유도, 제가 문제 푸는 속도에 맞춰 까 넣어주는 간식이 어떤 것인지도, 우리는 봄이 끝나기 전까지 짧은 아침인사를 네가 먼저 했다는 것도.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책이 피터 팬이라는 것도.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김홍중은 모르는 척 했다. 자습 시간에 열심히 문제집 풀다가 잠든 박성화 얼굴을 빤히 보면서 떠올렸다. 내가 다시 돌아온 이유를. 그 고삼 생활 지겹다고 지독히도 싫어했으면서 내가 다시 여기 온 이유를.


운명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못하고 제 입에 다시 간식을 까서 넣어주던 박성화의 모습을 떠올린다. 원래 이 때 말하고 한 대 맞아야 하는데. 무언가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에 김홍중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4월 28일, 봄의 꽃은 이미 다 지고 여름 공기가 조금씩 다가오는 시기에, 김홍중은 작은 단서를 주기로 했다.


- 좋은 아침, 박성화. 좋은 꿈 꿨어?


네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태연하게 박성화가 들고 온 딸기 우유 하나를 손에서 가져가고는 빨대를 꽂아 입에 물었다. 문제집에서 눈을 뗀 것도 잠시 멈추어 있는 박성화를 다시 시선에서 거두고 책상 위로 옮겼다. 한참을 가방도 안 내려두고 눈만 깜빡이는 모습에 여전히 시선 문제집에 둔 채로 가방도 안 내려두고 뭐 하냐, 라며 성음 내뱉으면 그제서야 박성화가 가방을 내려둔다. 그래도 여전히 김홍중에게 간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 홍중아.

- 어.

- 나 이상한 꿈 꿨어.


무슨 꿈? 덤덤한 척 물으면 말하기를 주저하다가 꿈에 네가 나왔다는 단 한 마디를 뱉는다. 내가 나왔는데 이상한 꿈이야? 하자 그제서야 그런 뜻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는 박성화에게 다시 시선을 옮겼다. 잘 됐네. 김홍중은 짧게 생각한다. 책상 서랍에서 미니 초코바 하나 꺼내 박성화에게 내밀고 짧게 턱짓했다.


- 별 거 아닌 꿈이면 그만 생각하고 이거 먹어.

- 어? 어…… 고마워.


박성화는 초코바를 받아들고 제 우유에도 빨대를 꽂는다. 여전히 찝찝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으나 김홍중이 나왔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점이 없었으니…… 김홍중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준 초코바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솔직히 이게 좀 더 기뻤거든. 표정에서 다 티가 나는지라 시선만 흘끔 돌려 표정 살핀 김홍중 입꼬리 또 슬금 올라간 것을 박성화는 영영 모를 테다.



여름방학과 동시에 보충학습이 시작된 날부터 박성화와 김홍중은 같이 등교했다. 집이 그리 가까운 것은 아니었으나 박성화가 아침 일찍부터 딸기 우유 하나씩 들고 김홍중이 사는 아파트 동 입구에서 김홍중을 기다렸다. 김홍중은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리 놀라지는 않았으나, 잠시간 왜 이러냐는 듯이 쳐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김홍중이 쳐다볼 때는 덩치에 안 맞게 입술 내밀고 우는 척 굴던 박성화가 김홍중이 해탈한 듯이 굴면 금방 오늘 보충 끝나고 떡볶이 먹자며 웃었다. 나는 이 시간이 그리웠다. 아무도 특별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지만, 우리에게만은 특별했던, 너와 보내던 이 여름이.


박성화는 그 봄 이후로 꿈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도 당연했다. 김홍중이 작은 단서(라고 이야기하는 약간의 투정)를 던진 후 박성화의 꿈에 찾아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봄에 사용할 수 있는 꿈의 개수는 이미 끝이 났다. 여름에도 똑같이 주어진 두 번의 기회를 적절한 때에 사용해야 했다. 우리에게 열아홉의 여름은 너무나도 특별했던 시기였으니까.


학기 중의 일과보다는 짧은 보충학습을 마치고 나면, 박성화와 김홍중은 매번 김홍중이 사는 아파트 동 입구에서 헤어졌다. 엘리베이터가 닫힐 때까지 김홍중에게 손을 흔들던 박성화는 문이 닫히면 김홍중이 준 미니 초코바 하나를 입에 물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비 예보는 없었다. 분명히. 원래 장마가 시작되던 시기보다도 이른 시기였다. 보충학습을 마치고 여느 때와 같이 박성화와 김홍중은 김홍중이 사는 아파트 입구에서 헤어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김홍중이 그 안으로 올라타고, 문이 닫히면서 손을 흔드는 박성화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박성화가 어리둥절해하며 손을 내밀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 볼 때, 김홍중은 급하게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눌렀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아직 비를 맞고 있는 박성화의 손을 잡아 이끌어 아파트 입구 안으로 함께 들어왔다. 그 잠깐 뛰었다고 얕은 숨을 몰아쉬는 김홍중을 바라보며 박성화는 웃음을 터뜨렸다.


- 홍중아. 지금 나 너네 아파트 처음 들어왔다.

- …… 들어왔다 가.



이른 시기였다. 확실히 이전과 달랐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다른 게 맞는 건가? 그저 신난 듯이 김홍중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박성화와 달리 김홍중의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실패하면 안 되는데. 그럼 내가 돌아온 이유가, 내가 다시 열아홉의 너를 만난 이유가…… …… 홍중아. 홍중아.


- 김홍중!

- 어?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내리자.


11층에 도착하여 이미 열리고도 남은 엘리베이터의 문을 잡아둔 박성화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아니라며 대강 대답한 후 김홍중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조금 떨리는 손으로 도어락을 해제하고 문을 열면 장마에 밀려 사라진 햇빛 덕에 묘하게 어두운 집안이 보였다. 박성화는 그것도 신기하다는 듯이 두리번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때 이른 장마, 비를 맞던 박성화, 충동적으로 네 손을 잡아 이끈 나까지. 이전과 모두 변한 상황에서도 너는 여전했다.


수건을 건네주고 박성화를 욕실로 들여보내고 나면 김홍중은 교복 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벌써 여름인데, 너와의 일상이 이전과는 명확하게 뒤엉키고 있었다. 어긋나는 것이 많아질수록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것도 줄어든다. 이게 내가 두려워하는 점이었다. 다시 우리의 시간이 열아홉에서 멈추고 움직이지 않을까봐. 내가 이렇게까지 불안해한다는 걸 너는 모르겠지. 몰라야 하는 것이 맞지만 마음 어딘가가 뒤엉킨다. 우리는 서로를 전부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나만 네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것이 아리도록 쓰렸다.


위태로운 감정을 헤집고 네가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터는 박성화를 멍하니 보고 있자 동그란 눈을 하고 시선을 마주한다. 김홍중이 기억하는 박성화와의 첫 여름, 그리고……


마지막 여름.



*



김홍중의 방에 들어선 박성화는 이르게 시작된 첫 장마에게 고마워했다. 조금씩 좁혀지는 자신과 김홍중의 간격이 마음에 들었다. 언제부터였냐 묻는다면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전학 온 첫날부터? 피터 팬을 함께 골랐을 때부터? 우리가 짝꿍이 되었을 때부터? 네가 먼저 아침 인사를 건넸을 때부터? 따지고 보면 박성화가 김홍중에게 마음이 가기 시작한 시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낭만 챙기고 싶은 열아홉의 박성화는 그 시기를 오늘로 정하기로 했다. 때 이른 장마가 시작된 열아홉의 여름날, 내가 홍중이를 좋아하게 된 시간. 문 닫히기 직전의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뛰어와 내 손을 잡은 빗속의 네가 좋아서. 그래서 좋아하게 된 것이라 이름을 붙였다. 열아홉 첫사랑의 시작이었다.



박성화는 그렇게 장마를 핑계로 내내 김홍중의 집에 함께 들어섰다. 아파트 동 앞에서 기다리던 등교 시간은 뻔뻔하게 김홍중 집 거실 식탁에 앉아 어머님이 주신 토스트 입에 물고 기다리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방금 깨서 비몽사몽하게 거실로 나온 김홍중은 거실에 앉아 있는 박성화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도 금방 적응해 박성화가 내미는 우유나 들이켰다. 아파트 동 앞의 박성화가 엘리베이터 안의 김홍중에게 손을 흔들며 헤어지던 하교 시간도 함께 집으로 들어가 비 내리는 밖을 보면서 보충학습 숙제나 같이 하는 시간이 되었다.


작은 변화에 기뻐하다가도 큰 변화에는 불안감을 느끼던 김홍중은, 이르게 시작된 장마에 대한 걱정은 시간이 지나며 무던해졌는지 박성화와 함께 지내는 장마 기간에 익숙해졌다. 애초부터 이른 시작만 제외하면 원래도 보충수업 기간에는 늘 붙어 있었으니까. 피터팬과 웬디. 3학년 8반 안에서만 불리던 별명은 이제 3학년 선생님들에게도 퍼졌다. 홍중아. 거기 자는 웬디 좀 깨워라. 성화야. 너 피터팬은 어디다 두고 오늘은 혼자냐. 일어나라며 툭툭 치는 김홍중의 손길부터 홍중이 교무실 갔어요. 웃으며 답하는 박성화까지. 둘은 점차 시간이 갈수록 가까워졌다. 열아홉 비 오는 날의 교실에서 박성화와 김홍중은 여름을 보냈다. 열아홉 비 오는 날 김홍중의 방에서 여름을 보냈다. 함께하는 첫 여름을.



그래서 당연히 그 날도 같아야 했다. 함께 토스트 물고 등교하고, 나른한 교실 안에서 짧은 수업을 듣고, 함께 하교하고 김홍중의 방에서 숙제를 하고, 같이 고양이 영상 보며 실실거리며 웃기도 하고……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지고. 분명히 그랬어야 했다.


더 이상 날씨 어플 속의 예보에는 다음 날부터 비구름이 그려지지 않았다. 김홍중의 일기장에서 비 모양이 그려지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그렇기에 박성화는 조금 아쉬웠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 김홍중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서지 못할까 싶어서. 김홍중은 장마 끝났다고 박성화를 내칠 생각은 없었으나 어쩌겠나. 첫사랑이라는 건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에도 쩔쩔매고 걱정되는 감정인 걸.


헤어질 때 김홍중이 매번 박성화에게 건네던 미니 초코바가 바닥을 보였다. 거실 식탁에 좀 더 뒀다고 가져오겠다며 김홍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쉬운 감정을 (표정에 다 드러났지만 애써) 뒤로 숨기고 박성화는 가방을 챙겼다. 가방을 메고 일어나 (박성화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김홍중의 방을 둘러볼 때, 책상 한 구석에 놓인 김홍중의 가족 사진 액자가 보였다. 웃고 있는 김홍중의 얼굴. 이 때도 귀여웠네, 생각하며 액자를 들어올림과 동시에 무언가 책상 위로 툭, 하고 떨어진다.


- 성화야. 초코바 가져왔는데……

- 홍중아.


이거 뭐야?


박성화의 손에 들린 것은 낡은 박성화의 명찰이었다.


왜?


김홍중은 생각했다.


왜 시작과 끝이 이렇게 틀어진 거지.


장마는 끝이 났다. 우리가 함께 한 그 첫 여름과 마지막 여름도.








-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이번에도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벌써 여름까지 왔네요!


가을에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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