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eamworld 冬>, 별지
- 계간 성홍
- 2022년 12월 22일
- 6분 분량
* 약한 사망 소재 주의 바랍니다.
* 春, 夏, 秋 편에서 이어집니다.
생각해 보면 첫만남은 꽤 평범했다. 고등학교 3학년, 김홍중이 박성화를 알던 시간은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사랑과 낭만의 감정을 모두 얻은 듯이 굴었다. 여느 첫사랑은 다 그렇지 않나. 같은 반에 전학생이 온다는 사실은 3학년에 올라와도 매번 교무실에 들락날락거리던 김홍중이 가장 먼저 들었다. 전임 학생회장이라는 이유로 자잘한 심부름부터 반장 일까지 맡아서 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한 일이긴 했다. 딸기우유 하나 손에 쥐고 교무실에 들어와 제 반이 어딘지 묻는 것을 눈짓으로 흘끔 보며 김홍중은 교무실을 나섰다. 되게 순하게 생겼네. 짧은 첫인상 하나와 같이.
- 박성화야. 잘 부탁해.
교실로 돌아와 박성화를 정면에서 마주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빈 딸기우유 팩을 다 보이게 숨겨두고 인사하는 모습까지. 김홍중도 안다. 이런 작은 생각들이 왜 모이고 있는지, 일관적인 일상 속에서 이런 생각들이 모인다는 게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짧은 아침 인사를 나누기 시작하고 옆 자리에 앉아 봄이 지나가는 것을 함께 바라보고 있으면, 봄이 떠나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첫사랑은 찾아왔다. 김홍중은 생각했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해? 봄 탄다, 가을 탄다도 아니고…… 여름 탄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박성화는 낭만을 지독히도 챙겼다. 작은 단어 하나하나에도 낭만을 담고 꿈을 실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꿈을 기억한 적이 없다고 했다. 신기하네, 짧게 답하며 김홍중은 문제집의 답을 표시했다.
- 나는 꿈 꾸면 다 기억나던데.
- 그래? 어떤 기분이야. 나도 좀 느껴보고 싶다.
- 별 거 있나…… 어떤 꿈은 기억 안 하는 게 나을 때도 있는 것 같아.
악몽 같은 건 생각도 하기 싫고 그렇잖아. 덧붙이는 성음이 이어지더니 이내 입을 벌려 익숙하게 박성화가 주는 간식을 받아먹는다. 환상 같은 꿈에서 낭만을 챙길 수 없으니 현실에서라도 낭만을 챙겨보겠다고, 박성화가 동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거기서 나왔다. 피터 팬을 읽고 있으면 그 환상 속을 떠다니는 웬디가 부러웠다. 웬디의 평범한 일상을 낭만 가득하게 바꾸어 주는 피터 팬이 좋았다. 그러니까, 박성화의 평범한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을 낭만 가득한 첫사랑으로 바꾸어 주는 김홍중이 좋았다.
작은 교실 안에서 처음 만난 봄, 방 안에서 함께 장마를 보내던 여름, 벤치에 앉아 단풍을 올려다보던 가을, 우리는 세 계절을 함께 보내며 첫눈을 함께 맞자는 약속을 했다. 수능이 끝나고, 졸업식 전 첫눈이 오는 날에 맞춰서 바다에 가자고. 고등학교 3학년, 서로가 가득했던 이 사계절의 끝을 낭만으로 가득 채우면 좋겠다고. 박성화다운 생각이었다. 김홍중은 문제집의 마지막 답을 표시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생기부에 가득한 여러 딱딱한 도서 사이에 딱 하나 들어간 동화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낭만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원래 명찰을 바다에서 주려던 건 아니었다. 드라마 안에서 주인공들이 하는 것처럼 졸업식 때 주려고 했다. 하지만 박성화는 생각을 바꾸었다. 낭만에 죽고 낭만에 살지 않는가. 바다에서 첫눈 맞으면서 주는 게 더 낭만적이지 않나? 싶어서. 수능이 끝나고, 우리는 바다에 갈 날짜를 정했다. 뉴스에서는 그 날 첫눈이 온다고 몇 번을 반복했다. 작은 방 안에서 전화기 하나로 아직 미숙한 감정을 나누며 박성화와 김홍중은 그 날만을 기다렸다.
김홍중은 수능이 끝나자마자 머리를 물들이러 갔다. 까맣기만 하던 머리를 빨간 색으로 물들이고 박성화와 만났다. 박성화는 김홍중의 머리가 진짜 동화 속 등장인물 같다며 마음에 들어했다. 겨울 바다랑 참 잘 어울릴 것 같아. 중얼이며 머리칼을 만지는 손길이 부서지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웠다. 매번 사랑을 느끼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서툴고 미숙한 감정일지라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서, 주고받는 단어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서로의 첫사랑이라는 것을.
- 성화야. 바다에서 눈 맞고 뭐 할까.
- 가위바위보 진 사람 바다에 뛰어들기.
- 그거 말한 사람이 걸리는 거 알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바다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박성화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챙겨온 제 명찰을 만지작거렸다. 김홍중은 나눠 낀 이어폰에서 나오는 노래를 골랐다. 사소한 것 하나도 전부 우리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여행. 우리가 함께하는 첫 겨울은 그렇게 다가왔다.
바다를 앞에 두고, 박성화의 예상은 맞은 것도 있고 틀린 것도 있었다. 바다에서 첫눈 맞으면서 명찰을 주는 게 졸업식 때 주는 것보다 더 낭만적일 것이라는 건 맞았다. 하지만 덤덤할 거라고 생각한 김홍중의 반응은 예상에서 벗어났다. 홍중아, 나 너 울 줄은 몰랐어. 나도 몰랐으니까 조용히 해. 웅. 박성화는 그 때 알았다. 나만큼이나 홍중이도 나를 많이 좋아했구나. 첫사랑의 설렘과 불안 속에서 우리는 일 년을 함께 보냈구나.
그러니까 우리는, 서툴더라도 깊은 사랑을 나누며 앞으로의 계절을 보내야 했다.
박성화가 예상하지 못한, 아니…… 김홍중도 예상하지 못한 것에는 하나가 더 있었다.
이 겨울이 우리가 함께할 처음이자 마지막 겨울이었다는 것. 단 한 번씩 같이 보낸 계절이 모두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
유난히 첫눈이 많이 오던 겨울, 바다에서 돌아온 건 박성화와 김홍중이 아닌 김홍중 하나 뿐이었다. 첫눈의 설레임을 이야기하던 뉴스에서는 함께 갔던 바다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김홍중의 손에는 원래 주인을 잃은 명찰만 나돌았다.
몇 번이고 꿈을 꿔도 박성화만 나왔다. 잠에 들기만 하면 열아홉의 우리가 보였으니 김홍중은 잠에 들 수 없었다. 박성화, 세 글자가 새겨진 명찰을 쥐고 버티다가 기절하듯이 잠드는 것을 반복했다. 꿈 속의 너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꿈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네가 부러웠다. 김홍중은 스무 살이 되었는데, 박성화는 여전히 열아홉에 머물러 있었다. 박성화가 좋아하던 빨간 머리가 점차 색이 빠져 주황빛으로 물든다.
얼마나 그렇게 지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활을 반복하다가 김홍중은 여느 때처럼 눈을 떴다. 박성화의 꿈을 꾸지 않은 유일한 날. 오늘은 분명 우리가 함께 맞이해야 할 졸업식 날일 테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김홍중은 고등학교 3학년 개학 전 날로 돌아왔다. 다시 검정색으로 돌아온 머리가, 아직 3월로 넘겨지지 않은 달력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무슨 일인지 설명할 수 없더라도 과거로 돌아온 이상 김홍중이 해야할 일은 단 한 가지였다. 박성화를 살리는 일. 운명처럼 만나고 낭만 속에서 사랑하더라도 너를 잃지 않는 일. 김홍중은 침대에서 일어난다. 펼친 기억이 없는 노트를 내려다본다.
꿈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는 계절당 단 두 번. 낭만 속에서 서로를 잃지 말기를.
원래의 김홍중이라면 분명 의심했을 테다. 누가? 무엇을 위해서? 아니, 애초부터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하고. 하지만 첫사랑을 잃은 김홍중에게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 우리가 함께 지낼 계절을 다시 되찾을 수 있다는 것.
다음 날, 김홍중은 다시 교복을 입었다. 교무실에 가서 딸기 우유를 들고 있는 박성화를 흘끔 보고, 빈 우유곽을 손에 든 채 순한 얼굴로 인사하는 박성화를 만났다. 우리가 함께 지냈던 봄이 다시 돌아왔다.
*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김홍중은 박성화가 자신을 기억할 꿈을 함께 쌓았던 추억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바다를 보고, 단풍을 보고…… 그런 모든 우리의 추억들로. 단 한 번도 꿈을 기억하지 못했던 박성화가 꿈을 기억하기 시작하면서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 운명이 어긋나던 순간은 김홍중이 변화를 느끼는 순간이었으나, 크게 두려워하던 순간이기도 했다. 작은 변화가 큰 어긋남을 가져올 수록 내가 네 삶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으니까.
- 바다 가자.
- 어?
수능 끝나고, 졸업 전에. 눈을 반짝이며 덧붙이는 박성화의 표정이 기대로 가득 찼다. 분명 좋다고 해줄 거라고 믿는 얼굴. 마지막 문제의 답을 표시하지 못하고 김홍중의 손이 멈춘다. 동요하지 말자. 지금 나는 미래를 바꾸러 온 거다. 과거에 잠식되어 흔들린 김홍중을 다시 바로잡기라도 하는 듯 박성화가 기억한 다른 꿈들은 제쳐둔다. 내가 다시 잘 하면 돼. 바다에 가는 날짜를 다른 날짜로 잡자. 아니면, 졸업식 후에 가자고 해야 하나.
- 뉴스 보니까 이 때 첫눈 올 거래.
- 꼭 첫눈 오는 날 가야 해?
응. 틈 없이 대답하는 박성화를 바라보며 김홍중은 숨을 삼킨다. 과거에 변수는 생겼으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네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된다고, 그리 몇 번을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첫사랑은 이길 수 없다. 박성화가 첫사랑이잖아.
*
바다에 가기로 한 날, 박성화는 꿈을 꿨다. 김홍중이 추억을 회상시킨 꿈이 아닌, 모든 진실을 바라볼 수 있었던 꿈.
*
그제서야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네가 가지고 있던 내 명찰, 좋은 꿈 꾸었냐는 아침인사, 바다와 첫눈이라는 낭만의 단어를 듣고 지었던 네 표정의 의미까지.
*
함께 바다에 가기 위해 만난 지금, 네 머리는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머리칼을 매만지며 말한다. 겨울 바다랑 참 잘 어울릴 것 같아. 시선이 왜 그렇게 흔들리는지 이제 알 수 있어. 하지만 아직은 네게 이야기하지 않을 거다. 내가 모든 걸 알고 있다고. 나와 다시 계절 속에서 함께하기 위해 혼자 모든 걸 알고 걸어온 시간을 이해하게 됐다고. 주머니 속 명찰이 손끝에 걸린다.
- 홍중아. 바다에서 눈 맞고 뭐 할까.
- …… 가위바위보 진 사람 바다에 뛰어들기.
- 그거 말한 사람이 걸리는 거 알지?
알지. 덧붙이는 네 목소리가 떨린다. 미안해. 혼자 둬서. 목소리를 이어가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일부러 평소같이 굴며 바다로 향했다.
첫눈은 생각보다 타이밍 좋게 내렸다. 바다 앞 모래사장에 앉아 박성화와 김홍중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눈 생각보다 많이 오네. 그러게. 의미 없는 문장이 몇 번이고 반복된다. 김홍중은 생각한다. 오늘 밤을 넘길 수 있으면, 우리가 바다에서 눈을 맞은 오늘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네 꿈에 찾아가야겠다고.
작은 변화는 어긋남을 만든다. 과거에 얽매이던 김홍중이 과거로 돌아온 것부터 변수였다.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으로 돌아왔으나 혼자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눈이 내리고, 차가운 결정이 코끝에 닿는다. 우리가 함께하는 첫 번째, 아니…… 김홍중만 기억하는 두 번째 겨울. 겨울의 온도가 가까이 다가온 김홍중의 손 위로 같은 온도를 가진 박성화의 손이 겹쳐진다. 손 사이에 있는 것이 명찰이라는 점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짧은 간극 뒤로 이어진 새로운 문장은 알 수 없었던 것이었다.
- 홍중아.
- 응.
- 졸업식 올 거지?
- 응.
네가 먼저 나를 떠나지 않는 한, 나는……
- 곁에 있을게.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앞으로 모두.
- 성화야.
- 달라졌어. 네가 불안해하던 미래.
- …….
- 혼자 짊어지게 해서 미안해…….
나의 현실을 낭만으로 물들여준, 나의 꿈에게.
작가의 말
벌써 일 년이 끝이 났네요. 매번 힘써주신 편집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많이 부족해서 이것저것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도 아직 한가득이고 그렇네요. 봄부터 겨울까지, 부족한 글임에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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