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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ing Deeper>, 태은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9월 23일
  • 13분 분량




운이 좋은 날이었다.

횡단보도 앞에 서자마자 신호등이 켜지고 퇴근길 지하철에서는 우연히 기둥을 잡고 서 있던 자리가 금세 비어서 엉덩이를 붙여 앉을 수 있었다. 호재임을 확실히 인지했다. 어, 뭐야. 심지어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서는 화단 근처에 반짝이는 게 보여서 들여다보니 오백 원이 떨어져 있었다. 동전은 누군가 급히 쓸 일이 있을까 싶어 근처의 벤치 위에 올려 두고 왔다.

그렇게 집에 왔더니 박성화가 소파에 앉아 있다. 그러니까 너는 행운의 극치인지, 아니라면 여태의 모든 운을 대체할 불운인지 헷갈리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이라면 내가 오늘 겪은 자잘한 운들의 크기로는 박성화를 상쇄할 수 없었다. 감히.

망부석처럼 서서 박성화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신발 뒤축을 다른 발로 밟아 벗던 움직임도 잠시간 멈추어서 발목에 멋대로 힘이 들어갔다. 성화는 잠기운이 스쳤던 모양인지 길게 감아 두고 있던 눈을 찬찬히 떠서 몇 번 깜박이더니 일어섰다. 그 걸음으로 현관까지 다다르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별로 안 늦었네."


무심한 듯한 낯이 내 앞에서 허물어지는 순간의 쾌감을 나는 태평하게 잊고 있었다.


"맞다. 왜 여태 이불 안 바꿨어. 요새 계속 쌀쌀하던데."


새벽에 추웠을 것 같아서 여름 이불은 넣어 놨다, 아까. 일주일 전에는 있었던 사람인 모양으로 말하는 게 우스웠다. 끽해야 단기간의 출장을 다녀온 사람처럼 제자리를 찾으려고 애쓰는 노력이 대견할 리 없었다.

어깨에 멘 가방을 거두어 들기 위해 내 앞에 선 성화는 한쪽 어깨의 틈부터 찾아 부드럽게 벗기던 중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자마자 떠나가는 백팩의 끈을 붙들었다.


"너 나가, 박성화."

"가방 줘. 너 옷 갈아입는 동안 내가 갖다 정리하게."


눈을 홉뜨고 쳐다보는 얼굴에도 동요 없이 마주하는 성화가 미웠다. 타고난 성미로는 남을 해할 수가 없어서 온전히 염치를 갖다 버릴 수도 없는 주제에 뻔뻔한 척은 잘도 했다.

화를 겨우 삭이면서 성화의 손아귀에 끈이 쥐인 가방을 도로 뺏어 오려는데 성화가 그걸 놔주지 않아서 결국에는 쥐어 잡고 있던 것을 신경질적으로 내쳤다. 그랬더니 이제 손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나 잃는 쪽은 나인 것처럼 느껴지니 차라리 홀가분한 마음으로 곧장 방으로 향했다.


"홍중아. 저녁은? 시간 보니까 안 먹고 왔을 것 같은데."


등 뒤에서 묻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잠시 걸음을 멈추었지만 돌아보지 않고 목전의 문을 열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엎어졌더니 그새 베개에 성화의 향이 배어 있었다. 쉽게 가시지도 않으면서 빈 곳을 찾아 스미는 일은 기가 막히게도 하는 향기가, 박성화를 닮았다. 서러웠다.



***



"진짜 밥 안 먹어?"


그새 깜빡 잠들었던 모양인지 잠이 깼다는 감각이 찰나에 스쳤다. 이번에도 한동안 시기를 잘못 타고 걸린 여름 감기처럼 앓으면서 그리워하던 목소리이자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들렸다. 평생 모르게 두겠지만 성화가 없으면 꼭 한 번씩 앓아눕곤 해서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고 몸을 웅크리는 기억도 벌써 몇 해째였다. 땀기를 손바닥으로 밀어 훔치면서도 성화의 이름을 부르지 않기 위해 입술을 맞다무는 일이 익숙했다.

성화가 언제부터 곁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귀 뒤로 괜스레 머리칼을 넘겨 주면서 귓바퀴를 어루만지는 온기고 뭐고 그저 이대로 다시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다시는 깨고 싶지 않았다. 눈을 다시 떴을 때 눈앞에 박성화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비참하긴 마찬가지였다.


"너 피곤한데 나가긴 귀찮지. 뭐 시킬까."

"너나 먹어."

"홍중아."


크게 들숨을 삼켰다가 내쉬면서 앉아서 성화가 부르는 소리에도 모르는 척 시선을 돌리지 않고 흐트러진 데가 거의 없는 침대보만 손바닥으로 밀어 정리했다. 이마를 짚어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어지러운 것을 보아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런지 손댈수록 팽팽히 펴져 있던 얇은 천만 우그러졌다.


"보고 싶었어."


속내를 읽힌 것만 같아서, 그 한 마디에 결국 고개를 돌렸다. 성화의 머리가 내려다보이는 위치가 생각한 자리와 다르기에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는 모양으로 일어나 앉아 보았더니 성화가 어떻게 하고 있는 양태인지가 드러났다.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느지막한 주말 오전의 장막을 걷어 주던 때와 별다를 바도 없었다. 변하지 않은 게 더 황당했다.

불거진 성화의 무릎을 발끝으로 밀어서 뒤로 넘어뜨리고 몸을 일으켰다. 분통을 가누지 못한 짓으로 인한 일말의 죄책감으로도 손끝이 알알해서 짜증스러운 손길로 내 머리칼을 헤집었다.


"난 너 안 보고 싶었어."


따지자면 간절히 찾아서 볼 필요는 없었다. 나는 늘 성화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급작스럽게 몸이 밀린 성화가 조금은 얼떨떨하게 엉덩방아를 찧고 앉아서도 나를 올려다보면서 넌지시 웃는 입매였다. 나는 성화의 앞에서 항상 거짓말을 할 수 있었고, 그 이유는 성화가 속아 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까닭은 전연 없었다.


"알아."


짧은 대답을 담담하게 내어 놓는 성화를 빤히 내려다봤다.

역시 죽고 싶다. 언젠가부터 성화의 앞에서 익히 그러하듯 치기 어린 투로 생각했다. 나만 죽어서 박성화가 나를 그리워했으면 좋겠다. 내가 죽지도 않은 박성화를 데리고 그랬듯이.


속이 부대낄 미래가 훤해서 배달 음식을 주문해 먹기는 내키지 않음에도 기력이 없어서 뭐라도 집어넣어야 할 것 같기는 했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위해 잘 돌지도 않는 머리를 굴리다가 달걀 프라이나 부치기로 결론을 내렸다. 인간은 왜 멍청하게 에너지를 바깥으로부터 넣어서 살아야 할까. 자가 발전 그런 거 못 하나. 강여상 같은 이과 놈들은 여태 식사 대용 알약 따위를 만들지 않고 뭐 했나.

실없는 생각을 주워섬기느라 충분히 달구어지지도 않은 프라이팬에 달걀을 깨 넣었다. 익지 않은 흰자가 굴러다니느라 모양만 늘어졌다. 나는 다분히 바보 같고, 되는 일이라고는 아까부터 하나도 없었다.

금방 따라 나온 성화가 나를 채근하지도 않고 옆에 서서 식용유를 부어 주고 소금을 치는 중에도 도저히 말은 붙이기 싫어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성화가 은근슬쩍 허리에 팔을 감길래 내색을 눌러 참으며 발을 지근지근 밟았는데도 손을 거두지 않아서 마음을 내려놓은 체하며 가만 두었다. 아프라고 작정하고 밟지도 못했다.


"내 거는. 나도 해 줘."

"내가 요리가 늘었겠냐. 알아서 해 먹어."

"너가 다 태워도 잘만 먹는 거 알잖아. 비위도 좋아져서 이제 숯검댕이도 잘 먹는다니까."

"너 이……"


사람 속은 다 뒤집어 놓고 장난기가 잔뜩 돋은 말을 읊는 성화를 향해 날을 벼린 말이라도 쏘아붙이려고 고개를 돌리면 나를 전부 들여다보는 듯한 눈이 존재한다. 성화는 원체 시선이 얽히면 눈을 쉽게 피하지 않았는데 그럴 때마다 묻고 싶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고. 뭘 알고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느냐고. 나더러 어쩌라고.

성화를 조용히 짓씹으며 미리 마련해 둔 접시에다 작은 프라이팬에 든 것을 옮겨 담는 과정에서 형태를 설명하기도 어려운 모양으로 흰자가 접히면서 노른자가 다 터져서 접시 바닥이 눅진해졌다. 성화와 함께할 때는 성화가 늘 달걀을 깨 넣었다는 이유 하나가 지금껏 태만한 나를 만들었다. 이마저 제대로 방식을 깨치지 못해서 양면을 모두 익히기 위해 한 차례 뒤집기도 어려웠을뿐더러 처음부터 반숙의 상태로 먹으려고 했는데 끝내 이 모양 이 꼴이다.


"홍중이는 반숙 좋아하는데."


성화가 중얼거리는 말을 애써 밀어 두었다. 이럴 거면 뒤엎어서 스크램블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성화와 나 사이에서는 그러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름은 명분으로서 꽤 유용했다. 마음이 동하지 않아도 어쨌든 무어라도 먹을 필요는 분명해서 달걀 프라이를 받아들였다.


"나도 계란 쓴다."


그러시든가. 그런 무성의한 대답마저 생략하고 식기 건조대 쪽에서 젓가락을 한 쌍만 집어 들고 와서 식탁에 앉았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돌아서 허기는 지는데도 여전히 입맛이 돌질 않아서 젓가락 끄트머리로나 망가진 형태의 노른자를 틱틱 걷었다. 오늘은 분명 운이 좋은 날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나. 주방이 트여 있어서 고개만 들어도 발코니 너머의 창밖을 내다볼 수 있었는데, 설상가상 시야 안의 하늘도 흐렸다. 분명 집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구름 한 점 없었단 말이다.


"홍중이 기도하나. 생전 안 하던 걸."


어느새 옆에 먹구름처럼 그림자가 드리웠는데도 한 입을 못 먹고 있었다. 그늘이 내 머리를 다 덮고 나서야 곁에 성화가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박성화는 처음부터 그랬다. 모르는 새에 손을 잡고 모르는 새에 어깨를 둘러 안았다. 그때에 다다라서는 내가 움직일 공간이 협소해져서 맞붙어 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언제나 성화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넋을 빼 놓고 있는 꼴이 발각된 게 민망해서 재빨리 젓가락을 들던 참에 눈앞에 있던 접시가 없어졌다. 모를 다듬지 않은 눈길을 보이기 위해 고개를 사선으로 비틀어서 쳐들었다.


"뭐 하세요?"


그제야 깨달았는데 답을 찾으려면 얼굴을 보아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내 눈을 보지도 않고 묵묵히 식탁 위를 향한 눈동자를 뒤늦게 쫓고 있으니 본래의 자리에 놓인 그릇에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은 프라이가 얹힌 채였다. 성화가 새로이 부쳐서 노른자가 멀쩡하게 영글어 있는 형태였다.


"네 거가 더 맛있어 보이니까 내가 먹으려고. 넌 이거 먹어."


순식간에 집을 것을 잃어버린 젓가락이 무력하게 식탁을 찍었다. 당황한 표정도 오래 올려 두지 못하고 성화를 노려보았다. 그러는 성화 본인조차 멋쩍어서 눈을 얼핏 내리깔고 웃고 있는 꼴이 가관이었다.

박성화가 나를 정말로 생각한다면 이렇게 구는 건 가당치도 않았다. 명백히 나만을 향한 이 다정에 내가 폭삭 젖어서 무거운 걸음을 한 발짝도 제대로 못 떼게 두어서는 안 됐다. 나는 박성화가 처음으로 나를 저버린 날 이래로 발이 자라 본 적이 없었다. 신발을 바꾸어 신으면 성화가 내 족적을 찾지 못할까 봐.

그런 나를 모를 리 없으면서도 박성화는 그저 자신이 그러고 싶다는 이유로 나를 안으러 돌아왔다. 기어코 그렇게 살갑게 굴고 싶은 만큼 굴었다. 알고서 하는 짓이었다.


"너 진짜 이기적인 거 알지, 박성화."

"응."

"그래, 대답 잘한다."


그러는 박성화를 내치지 못하는 나도 내 생각뿐이면서 누가 누굴 책하는지 모르겠다. 젓가락 말단을 밀어 넣은 채로 일부러 노른자를 휘저어 터뜨려 버리자 성화가 옆에서 작게 웃었다. 나만큼 안 변한다 너도, 홍중아…….


성화가 맞은편 의자를 끌어 빼고 앉았다. 그 탓에 더는 바깥의 어두운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성화뿐이었다. 성화의 등 뒤에 설 때와 마찬가지로.

널찍한 어깨를 쓸어 보다가 머리를 기대면 앞에서 반드시 손이 넘어와서 내 옆구리를 간질이곤 했다. 박성화, 앞에나 봐. 보고 있어. 여기서 이러면 남들이 욕해. 무슨 상관이야. 나는 일련의 모든 순간을 뇌리에 새겨 파인 저주처럼 기억한다.


"핸드크림 자주 발라. 겨울 되면 튼다니까."

"알아서 해."


식탁 위에 올라온 내 손을 어루만지느라 내리깐 눈꺼풀 아래로 속눈썹이 예쁘게 드리운 성화를 쳐다보다가 헛웃음을 쳤는데 자잘하게 부스러져서 끝에는 울음기를 더 닮아 있었다. 터뜨린 노른자를 통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대로 박성화를 망쳤나, 아니라면 그러느라 나 자신을 망쳤나. 이제 확언할 수 없었다.

성화가 손을 빼려고 해서 그쪽을 쳐다보지 않고도 손가락을 얽고 틀어쥐었다. 성화 네가 나를 놓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런 말은 알약처럼 되삼켰다. 약을 미처 넘기지 못했는지 입이 썼다.

성화는 내 식사를 방해하지 않으려 왼손을 쥐었으니 그것은 곧 성화의 오른손이었다. 알았다, 내가 왼손으로 먹어 볼게. 잘 봐라. 그런 소리를 부러 입 밖으로 내뱉은 성화는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하는 시늉을 몇 번 해 보다가 그만두었다. 어쩐지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아서 든 것을 가지런히 내려 두는 손만 훔쳐보았다.

어렵다. 종호처럼 양손 다 쓰는 사람들은 이거 어떻게 할까. 홍중아, 그치. 일부러 봐 달라고 몇 마디씩 혼잣말을 엮어 낸다는 점을 짚었기 때문에 나도 애써 대답을 쑤셔 넣고 꾸역꾸역 흰자를 조각 냈다.



***



성화가 떠났다. 그 순간에는 왜 떠났는지도 몰랐다. 물론 이 말은 어폐인 것이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내 잘못인지를 수천 번 물어봐야 했다. 이미 자리를 비운 성화를 잡고 늘어질 수도 없으니 해소되는 것 없이 얼크러져 꼬이기만 했다.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덜 해서 그랬나. 조금 익숙해졌다고 툭툭거려서 그랬나. 혹은 요 며칠 집에 잘 들어가지 않아서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서운한 티를 내던 박성화가 견디기를 그만두었을까.

처음에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잘못을 하나씩 건져 냈고, 그러다가 모자라서 나중에는 코앞에 둔 적 없는 과실마저 만들어서 나를 납득시켰다. 성화가 그렇게 나에게 질려서 떠나갔을 거라고 이유를 만들어 씹는 행위는 거북하도록 괴로운 일이었지만 그런 것조차 없이 성화가 떠나간 것보다는 나았다. 그건 답이 없었다.


홍중아, 오늘 늦었네.


그러더니 돌아왔다. 몇 달을 꼬박 채우고서 어제 본 사람처럼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내가 너 죽여 버릴 거야. 응. 어깨를 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으면서도 맞은 자리를 한 번 문지르지도 않았다. 기껍게 참아 내겠다는 듯이. 그렇게 성화는 홀연히 떠났다가 같은 정도로 급작스럽게 돌아왔다. 그따위 일을 몇 번을 거듭하면서 나는 떠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마침내 갖게 되었다. 그건 이제 성화가 어딜 다녀왔는지를 묻지 않게 된다는 뜻과도 등가였다.

불시에 떠날 사람을 사랑하기는 못 해먹을 짓이다. 기약 없는 그리움은 익숙해지지도 않았다. 주변에 성화의 물건이 없다고 성화를 떠올리는 주기가 줄어든다거나 성화의 흔적이 사그라든 것일 리 없었다. 성화에게 물성이 맞추어진 내가 그의 흔적 자체였으니까.

차라리 성화가 돌아오지 않기를 빌던 날이 있었다. 나는 성화가 돌아올 자리를 남겨 두어야 해서 항상 한구석이 비어 있었고, 그 공극으로는 에는 듯한 찬 바람이 드나들었다. 언젠가부터 무의식적으로 명치 부근을 자주 더듬었다.



***



"비 오네. 우리 홍중이는 못 말려서 젖으면 안 되는데."


성화가 둥근 뒤통수를 보이는 상태로도 헛소리를 해서 나는 어처구니없는 눈길을 던지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내 것 하나와 성화 것 하나, 도합 두 장의 접시를 개수대로 옮겨 둠으로써 자리를 확보한 식탁에 노트북을 올려 둔 직후였다. 없는 말이 아니라 별안간 날이 흐려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기어코 비가 오느라 발코니 난간에 빗물이 맺혀서 줄줄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비지, 이건. 중얼거리며 빗방울이 선형으로 그이는 창문을 응시하고 있던 성화가 머리를 돌려 나를 슬쩍 돌아보았다가 목적을 달성했음을 확인하고 이내 실없이 웃었다.


"왜 이렇게 사람을 긁냐, 오늘. 내가 나가면 돼? 그러자. 간만에 비도 맞고 좋겠다."


이죽거리는 동안 소파에 모로 누워 있던 성화가 느릿하게 몸을 세워 앉는 중에도 내게서 눈길을 단 한 순간도 거두지 않아서 멀찍이 앉아서도 숨이 밭았다. 괜스레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래야 네가 나 봐 주잖아."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전적으로 내가 참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저 새끼가 근데. 노트북 커버를 소리 나게 닫고 큰 보폭으로 거실로 향했다.

앞에 섰을 시점에는 어느새 허리를 수그리고 양 무르팍에 팔꿈치를 짚어 앉은 성화가 그중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올려다보길래 양쪽 어깨를 두 손으로 밀쳐서 성화를 등받이에 밀었다. 성화는 나에게 속수무책이기를 받아들였다.

성화의 눈을 들여다보는 일은 항상 두려웠다. 거울을 통한 투영에 대한 두려움과 다름없었다. 내 얼굴을 곧이 볼 수 있었으니까. 박성화를 사랑하기도 그만두지 못하는 내가 어김없이 새까만 눈동자 안에서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박성화, 말 똑바로 해. 내가 널 안 봤어? 너는 나 보기나 했어?"


까무룩 잠들었다가 일어난 후부터 지속적으로 욱신거리는 관자놀이 때문에 뻑뻑한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성화는 입안에서 볼을 씹는지 입술이 단단히 다물렸다.


"그래 놓고 매번 아무렇지 않게 돌아와서 사람 돌게 하는 건 너잖아."


앞뒤 가리지도 않고 흥분한 탓에 귀 끝이며 목덜미, 어디 하나 특정할 데 없는 살갗이 화끈했다. 성화는 대꾸 없이 자신의 어깨에 놓인 손목을 천천히 받쳐 잡아서 안쪽의 여린 살에 입을 맞추었으니, 그러느라 나는 몸을 물리지도 못하게 됐다. 잡히지 않고 남은 손으로 성화의 어깨를 쳐서 몸을 밀어도 붙들린 손은 여전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박성화가 나를 부여잡는 게 아니라 내가 박성화에게 잡혀 있다는 진술이 한결 적실했다. 숨을 크게 들였다가 내쉬었다.

성화가 손을 부드럽게 당겨서 자연스럽게 두어 발짝 앞으로 붙고 말았다. 그러더니 내 윗옷 앞섶에 얼굴을 파묻고 허리를 안아 당겼다. 몸으로 익혀서 손에 붙인 것처럼 익숙하게 성화의 뒷덜미에 손이 가더니 느껴지는 살결에 서린 열기가 뜨거워서 눈두덩이 뜨거웠다. 나는 이 온도에 맞추어져서 네가 없으면 자꾸 추운데. 어딘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차가운데. 넣지 않은 얇은 여름 이불 때문이 아닌데.


"너랑 이러고 있으니까 좋다."

"좋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해야 돼, 어? 성화야. 좀 알려 줘라."


잔뜩 헝클어진 마음을 애써 뒤로 밀어 두고 성화의 머리칼을 매만지려다가도 손에 힘이 들어가서 건성으로 건드리기나 하고 말았다. 분은 평생 풀리지 않을 텐데 박성화를 치고 싶은 만큼 쳐 갈기지 못하는 것도 병이었다.


"그냥 예뻐해 주라."

"입 다물어라."


뻔뻔하기도 했다, 내가 예뻐하는 박성화는. 아래턱에 심줄이 서도록 어금니를 맞다물고 있으니 희미하게 웃은 성화가 머리 위의 손까지 끌어서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바로 말하자면 입을 맞추었다기보다 입술을 눌러 대고 있기를 한동안 지속하고 있는 모양새라서 코끝의 훈기 어린 숨이 손가락 사이사이 스미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 다시 칠해야겠다. 해 줄까."


성화가 처음 나를 떠난 날 이래 만성적으로 가지게 된 감정이 있었다. 울컥울컥 치미는 화기를 쓸어내리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는 중에 성화가 말을 건네서 내려다보니 어느새 끄트머리의 네일 폴리시가 다 벗겨진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박성화에게는 이렇게 모자란 것만 보여 주게 되는지 억울했다. 나는 성화가 아니면 결핍을 만들기도 어려운 사람인데. 하지만 성화는 평생 모를 것이다. 성화에게 나는 항상 한쪽 구석이 성화가 가진 모양으로 욱어 있는 사람으로나 남게 될 것이므로.


"가만 둬, 알아서 하게."

"나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잘해 본 적 있냐?"

"없지."


우습게 들릴 만큼 순순히 인정하고도 성화는 몸을 일으켰다. 굳이 잠깐만, 하고 양해를 구하듯 한마디를 손에 들려 준 뒤에 여태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성화가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사이에도 허전했다.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우뚝이 서 있었다. 이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박성화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며 죽을 의지로 노력해 봤더니 내가 하고 있던 건 자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에 그쳤다. 그래도 성화가 헷갈리지 않고 나를 찾아올 수 있다면 내가 몇 걸음 못 걸어도 괜찮은 것 같았다. 굳이 입 밖에 내지 않는 그 각오가 제일 비참했다.


"뭐 해. 앉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따뜻한 손이 불쑥 등을 쓸자마자 어깨를 들썩이며 놀랐다. 전도된 것처럼 따라 놀란 성화가 눈을 크게 떴다. 저렇게 생겨 놓고도 토끼 같다고. 그러는 중에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김홍중 어디 죄 지었어? 아는지 모르는지 능청스레 묻는 소리를 불퉁하게 맞부딪쳤다. 너만 하겠다.

성화는 나를 앉혀 놓고 내 발끝을 곧이 마주한 자리에 양반다리를 틀어 앉았다. 그러고서 손을 비우기 위해 내가 앉았을 때 정강이 높이쯤 오는 낮은 소파 테이블 위에 검은색 네일 폴리시를 내려놓았다. 습기를 머금은 빗소리 가운데서도 자그락거리는 소리가 명징하게 울리는 것은 원리는 몰라도 의심할 일 없이 성화가 본디 가진 면모였다. 성화는 으레 틈새에서도 빛이 났다.


"난 너 이거 발라 줄 때가 좋더라, 홍중아."

"누가 보면 맨날 해 주는 줄 알겠네."


여백 없는 타점이었다. 다만 손잡이가 없는 칼이었다.

입술을 말아 무는 방식으로 미소 지은 성화가 순간적으로 머뭇거린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힘이 멋대로 뻗치는 손으로 나를 잡고 싶지는 않을 때 성화가 간혹가다 보이는 모습임을 알았다.

침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다가도 한 번씩 주먹을 쥐었다 펴서 가누어 본 뒤에 그 손으로 허벅지를 검쥐어 당기면 손끝을 따라 살이 아프게 눌리지 않았다.


넌 누구 숨 넘어가라고 이러는데…….


그 아래서 나는 일이 초 늘어지는 시간에마저 속이 달아서 한숨을 늘어뜨리기가 다반사였다. 그러한 불평이 차라리 한갓진 여유였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 이어지는 성화의 일이었으나.


"그래도 좋아."

"누가 뭐래."

"뭐라고 했잖아."


성화 자신이 얄밉게 보일 줄 알아도 말은 지지 않았다. 성화가 마침내 내 손날 쪽을 조심히 받치고 네 번째 손가락 마디 중간을 엄지로 눌러 고정한 채로 병마개에 붙은 솔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다. 두껍게 바르면 한나절 동안 말려야 할 거라고 잔소리를 할 힘도 없었다.


그래도 성화가 눈앞에 있다고 마음이 놓이긴 하는지 멀거니 딴생각이 들었다. 박성화는 이걸 남겨 주고 또 떠나가겠지. 나는 다 까진 손톱을 마저 지우지도 못하고 놔두겠지. 박성화가 돌아와서 내 손톱을 알아채 줄 때까지. 그렇게 초라한 손톱은 박성화에게만 보이겠지. 내가 박성화를 사랑하고 박성화가 나를 사랑하는 한 이 굴레는 끝없이 반복되겠지.


"김홍중."


손으로부터의 통증과 날카로운 부름은 거의 동시에 도달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 놔 봐. 아파. 손을 빼면서 인상을 찡그린 상태로 쳐다본 성화의 얼굴이 허망해서 쳐다보는 내가 다 혼란스러워졌다. 너는 지금 네 얼굴을 아느냐고 묻고 싶을 만큼 처참한 낯을 보고 있자니 귀 뒤의 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아랫입술을 안으로 말아 깨물려던 성화가 가까스로 목소리를 텄다.


"울지 마. 너 왜 울어."


내가? 돌려 물을 겨를도 없이 불길한 예감에 뺨부터 더듬어 봤더니 정말로 끈덕한 물기가 손끝에 뱄다. 울고 있다는 걸 알고 나니까 걷잡을 수가 없었다.

박성화 때문에 운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매번 홀로 있던 방에서조차 울다가도 주변을 살피곤 했는데 성화를 앞에 두고 있으니까 그걸 성화가 알았으면 했다. 내가 망가졌다는 사실이 성화를 망칠 수 있는 건 진작에 알았다. 우리는 여태 같은 원리로 서로를 구원하곤 했으므로 본능으로써 이해했다.

좋아? 함께 무얼 하든 성화는 잊지 않고 물었다. 그러고서 덧붙는 말은 뻔했다. 그럼 나도 좋다, 홍중아.

어떤 상처를 주면 성화가 죄책감에라도 나를 저버리지 않을지, 그런 음습한 생각이 치졸했다. 넌 나를 또 떠날 거잖아. 몇 번이고 떠날 거잖아.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말하면 성화를 끔찍하게 헤집어 낼 수 있겠지만 그 이야기를 하면 성화가 당장이라도 떠나 버릴 것 같아서 입은 열지도 않았다.

이미 물꼬가 트여서 성화를 정면하고 있자니 울음기가 다시 치미는 탓에 눈동자를 돌리고 콧망울을 거쳐 입술에 닿은 물기를 손등으로 닦아 냈다. 불거진 손마디에조차 예민한 살갗이 걸려서 아픈 것처럼 느껴졌고, 그새 목소리가 눅눅하게 잠겨들어서 헛기침을 작게 했다.


"미안해."


내가 진짜 미안해. 그러니까 울지만 말아 주라, 홍중아……. 성화가 내 무르팍에 이마를 기대고 웅얼거렸으니, 나는 빼곡이 찬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면서 왜 성화에게는 나로 인한 결핍이 보이지 않는지를 궁리한다. 그의 가장 큰 모자람이 나라서 그런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박성화도 어떠한 방식으로 애쓰고 있는지.

할 말이고 못 할 말이고 이 순간 도저히 말을 가리거나 입술을 다물어서 참아 내고자 공들일 수가 없었다. 성화의 앞에서는 자존심을 세우기가 의미를 영영 갖지 못했다. 딸꾹질처럼 멋대로 튀는 호흡을 잡아 오기 위해서 숨을 거듭해서 넘겼던 터라 입술을 떼면 젖은 숨이 버겁게 터져 나왔다.


"야."


성화가 나를 향하기 위해 얼른 고개를 들길래 여태 잡혀 있지 않은 손 하나로 성화의 눈을 가렸다. 손바닥에 빳빳한 속눈썹이 닿나 싶더니 이내 눈을 감았는지 동일한 이물감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사랑해."


여태 몸서리 치게 사랑한다고 덧붙이지 않았다. 그건 박성화도 이미 아는 소리였다. 호흡은 진작에 주기가 흐트러져서 그에 방해받지 않고 말을 이으려면 한참이 걸렸고, 그 간극 속의 숨소리를 성화는 하나하나 새기고 있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한 박성화는 그렇게 사려 깊은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가지 마. 어디 가지 좀 마. 너도 나 좀, 그냥, 사랑해 주면 안 되냐. 성화야……."


그러한 방식으로 성화를 할퀴기로 마음먹었다. 침대 위에서조차 성화의 단단한 살결 위로 손톱 자국을 찍어 낼 때 아프지는 않은지 노심초사하는 나는 이렇게나 쉽게 성화를 상처줄 수 있었다. 다리를 절어서 걸음이 묶인 성화가 나를 떠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렇게 모질게 굴고만 싶었다.

성화가 자신의 눈앞을 가린 내 손을 치우지는 않고도 몸이 자리한 거리를 가늠하려는 듯 한 팔을 더듬길래 모르겠다 싶은 마음으로 등을 수그려 주었다. 결국 누구에게도 편치 않은 자세로 등을 쓸어 주게 되었다. 어깨가 들썩이는 걸 느끼게 하지 않으려고 숨을 참았더니 외려 더 흐트러졌다.

울며 빌기 전에 이걸 잊고 있었다. 박성화를 내 손으로 당겨 안은 날 이래로 내가 온전하던 순간으로 돌아가 본 적이 없었는데.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거였는데.


"내가 사랑해서 미안해."


근데 나는 너 못 놔 줄 것 같다, 홍중아. 성화가 말없이 등만 쓸어 주다가 들릴 듯 말 듯이 한 마디를 붙였다. 성화가 내게 돌아오기 위해 애써 낯 두껍게 굴겠다고 노력하는 앞에서 나 역시 일부러 성화에게 상처를 그어 낼 때마다 매차 듣는 말인데 이상할 만큼 번번이 아팠다. 독한 진통제조차 내성 없이 든다고 했는데.

사랑해 주면 안 돼? 성화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는 감추어 책하며 묻고, 성화는 그걸 구태여 찾아서 매차 정정했다. 사랑해서 미안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미안할 일을 하고 만다고. 나를 사랑하기를 그칠 생각도 없어서 성화는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그것이 성화의 용기였다.


성화가 내게로 길을 돌아오는 것은 성화가 보일 수 있는 가장 이기적인 형태의 사랑이었다. 성화 자신이 존재 자체로 내게 상흔이 되리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으므로, 천성에도 걸맞지 않는 사랑이었다. 그럼에도 성화는 자신을 영원토록 원망할 나를 꿋꿋이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 이것은 둘 중 누구도 사랑을 그만할 수가 없어서 만들어지는 재앙이었다.

역시 떠나갈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다. 이해해 주고 싶지는 않지만 돌아왔을 때 자신을 내치지 못하는 나를 사랑하는 박성화도 꽤 혼곤하겠다 싶었다. 그렇지만 나 역시 뒤로 걷기를 포기할 의향이 없었다. 걸음을 돌려 오는 성화를 마주 안을 수만 있다면 내 보폭이 흐트러지는 것쯤은 차라리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아갈 길을 전부 성화에게 내어 준 지 오래였다.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내 다리에 머리를 기울이고 앉아서 별일을 하지 않은 것은 성화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우리가 너무 사랑해서 지쳤다. 아직도 비 오네, 따위의 무소용한 한마디나 들은 기억뿐이다.

네일 폴리시가 대강 마른 듯해서 들여다볼 마음이 들었다. 사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손톱이 아니었어도 결국 성화는 내게 흔적을 남기고 말았을 것이고, 나는 성화가 안겨 준 것을 놓칠 수도 없도록 끌어안고 살았을 테니까. 성화와 한바탕 진을 빼는 과정에서 미처 발리지 않은 구석이 생겼는지 손톱 아랫부분에 미세한 틈이 드러났다.

그렇게 나는 성화가 비집는 나의 틈을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성화를 향한 사랑이 가진 모양 중 하나였다.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 정강이를 쓸어 내리고 있는 성화의 머리칼을 슬쩍 쓸어 주자 모가 없이 반들한 눈동자가 굴러 올라왔다. 그 앞에 손을 내보였다.


"네가 보기에 잘했냐?"

"나쁘지 않지…… 않나?"


빤빤한 말씨에 합당할 웃음기를 성화가 실어 넣지 못해서 꽤 어색한 문장이 되었다. 박성화 너는 언제쯤 덜 바보 같을래. 애를 써서라도 웃어 보였더니 성화는 얼결에 따라 웃고도 대꾸가 없었다. 묻기는 했지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성화를 바보라고 부르는 이상 성화는 평생을 바보같이 살아야 할 터였다.


"이리 와 봐."


문득 내게 다가오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성화가 손을 뻗쳐 오길래 고개를 깊숙하지 않은 정도로만 숙여 주였다. 우리의 교점은 늘 한가운데였다.

말라서 드러나지 않는 눈물 자국마저 지워 주려는 듯 눈가를 어루만지면 자연스럽게 눈을 내리감았지만 그 손끝이 무의미하리라는 건 뻔히 알았다. 나는 목숨을 내놓는 순간까지 박성화 때문에 울 것임을 확신한다.


소파로 올라온 성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서도 여전히 죽고 싶었다. 이제는 폭우에 쓸려서 이대로 세상이 무너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왕이면 지금 당장 내가 박성화와 함께할 때 숨을 멎었으면 좋겠다. 멀쩡한 하늘이 붕괴하고 그리하여 우리가 끝을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장 두려운 것은 내가 성화와 끝을 함께하지 못하리라는 가정이기 때문이다. 그게 내 멍청한 사랑이었다.


"나 졸리다, 성화야."

"누워서 자. 베개 갖다 줄게."

"박성화 다리면 돼. 오랜만에 이러고 있게."


성화의 무르팍에 머리를 대고 자리를 잡아 모로 누웠더니 내 것보다 큰 손의 온기가 뺨에 닿았다. 그 온도 아래서 눈을 감고 물크러지면서 느릿하게 코로 호흡해 보았다.

숨이 막히는 것은 쏟아붓는 비로 인해 부푼 공기 탓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성화만이 나를 망가뜨릴 수 있는 동시에 나를 해치는 것이 성화일 수는 없었다. 다 식은 가을 공기 속에서도 눈자위가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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