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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티>, 려

  • 작성자 사진: 계간 성홍
    계간 성홍
  • 2022년 3월 21일
  • 9분 분량




 진정 그리 가시렵니까. 나의 마음이 여즉 이곳에 남아 임을 간절히 기다리고만 있사온데, 임은 어찌 그리 가시어요. 조금도 미련 따위의 것이 남지도 않더이까? 일말의 그림도 임의 발걸음을 붙잡지 아니 한 것이어요? 허면 가십시오. 멀리멀리,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곳으로 떠나시어요. 그래야, 내가 흙으로 돌아가고 혼이 되어 구천을 떠돌게 되더라도 임을 찾아가지 못할 테니 말입니다.

 속이 후련하십니까? 나를 이리도 체념케 하시니 이제야 마음이 놓이시냐 말입니다. 예, 그러시겠지요. 임은 그런 분이시니까요. 참으로 밉습니다. 미움에도 겨우 이런 말을 전하고픈 것은 이내 연정이라 그런 것이겠지요.

 몸 아픈 곳은 없는 게지요?

 나쁜 꿈과 싸우고 계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기다리겠다는 말을 지켜낼 자신이 없어 이 막연한 염원엔 싣지 않겠습니다. 허니 안심하고 떠나시어요. 임이 열망하던 그곳에 달했을 때, 생각이나 한번 해주십시오. 그거면 될성싶으니.

 나는 이리 노래나 흥얼거리다 임이 잊혀질 쯤에나 따르겠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



 “어, 거, 비켜 서! 아이, 비키라니까!”

 “거기 서지 못해!”

 “아이고, 그만 좀 쫓아오라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계절이 찾아온 화성花城은 다채로워진 색채만큼이나 소란스러워졌다. 저잣거리엔 추운 겨울 동안 말려두었던 각종 특산품을 팔러 나온 이들부터, 따스한 날에 길일을 받아 혼인을 올리려는 이들에게 비단을 팔려는 이, 사람을 모아 소리나 해대는 이야기꾼, 그 수많은 사람 사이 단연 눈에 띄는 이는 화려한 것들로 치장한 채 제 덩치의 두 배만 한 이들에게 쫓기는 이였다.

 귀퉁이를 돌다 넘어져 남의 좌판을 뒤엎고, 얌전히 길을 걷던 이들의 어깨와 부딪혀 가며 도망가던 이는 점점 차오르는 숨에 폐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만 같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쫓아 올 건데! 한 번 더 귀퉁이를 돌려던 찰나, 그는 뒤돌아보고 있느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이와 정통으로 부딪혀 엉덩방아를 찧고야 말았다.


 “아이씨, 거 눈을 어디다 두고 사는 거야!”

 “또 도적질을 했습니까?”

 “또?”


 마치 저를 알고 있다는 듯한 말과 익숙한 목소리, 그는 목소리의 주인이 있을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 하필이면. 그는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어린 도령에 골치 아파졌다는 얼굴을 하며 한숨이나 뱉었다.


 “도련님, 미안한데 내가 지금 보시다시피 너랑 사이좋게 노닥거릴 시간이 없걸랑? 나중에 다시 보,”


 다시 보자라는 말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그는 저보다 한 뼘은 족히 더 큰 도령에게 붙잡히고야 말았다.


 “얼마입니까?”

 “뭐?”

 “훔친 것의 값이 얼마냐 묻는 것입니다.”

 “어이, 도련님, 이건 내 일이야. 상관 마.”


 도령은 제 소매를 뒤지더니 저들에게 다가오는 무리에게 주머니 하나를 던져주었다.


 “이 자가 훔친 것이 무어인지는 모르겠다만, 그 안에 든 것이면 값이 충분히 될 거요. 허니 이제 돌아가시오.”

 “너 미쳤어?”

 “보다시피 멀쩡합니다.”

 “네가 그 돈을 왜 내. 아니, 애초에 뭔 줄 알고 덜컥 돈을 줘!”

 “당신이 훔치는 물건이야 늘 같은 것이겠지요. 당신이 훔치기 이전에 이미 한 번 훔쳐진 것들. 다시 되돌려 받을 힘이 없어, 그저 처음부터 없던 것이라 체념하게 된 것들.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들. 그런 것들 아닙니까?”

 “세상천지에 도적질하는 거 도와주는 양반이 어딨냐? 그리고 돈으로 다 해결될 문제였으면, 나라고 못 했겠어?”

 “해서 이리 몸을 상하게 하십니까?”


 도령은 사내의 뺨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매만졌다. 그 손을 거칠게 내친 이는 곧 돈을 돌려줄 테니 썩 꺼지라더니 오히려 스스로 거리를 벗어났다. 도령은 씩씩대며 사라지는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저도 가던 길을 그대로 걸었다.

 화성의 가장 성대한 양반집이 어디냐 묻는다면 모두가 입을 모아 두 집안을 꼽았다. 지방 관료도 아닌 본성本城의 관료로서 각 무와 문에서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는 무신 박가朴家와 문신 김가金家였다. 박가 성화, 화성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으리만치 유명인이었다. 물론 잘난 얼굴도 한몫했지만, 어림에도 출중한 무예와 총명함이 뒤따름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김가의 자제는 조금 달랐다. 아비의 명성에 먹칠한 천륜을 등진 방탕아, 김가 홍중의 다른 이름이었다.

홍중은 도적이 되었다. 그러나 반항 혹은 방탕으로 명명할 수 없을 만큼 명확한 계기를 가진 결심이었다. 그러나 세간은 그걸 인정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를 손가락질하고 질타했다. 허나 그는 자신의 결정에 있어서 늘 굳건했다. 그 굳건함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박 성화.

 그는 홍중을 동경했다. 태도 같은 것도, 그의 결심과 그 결심 속에 녹아있는 수많은 고뇌, 그래 무엇보다도 그의 가슴 속에 뜨겁게 불타고 있는 낭만, 그것을 으뜸으로 동경하고 있었다.


 “성화 도련님, 어쩌자고 자꾸 놈을 도우십니까! 대감마님께서 아시면…….”

 “놈? 그가 비록 지금은 도적질을 하기는 하나 분명 한 가문의 양반인데, 놈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하느냐? 그 덕에 도움을 얻은 자들이 화성에 얼마나 많은 줄이나 알고 하는 말인 게냐 말이야.”


 성화는 조곤조곤 따져 물었다. 틀린 말은 단 한 구석도 존재하지 않았다. 구구절절 맞는 말. 그의 장기이기도 했다. 그러니 제 아비가 아무리 꾸짖어도 매 하나 맞지 않고 조목조목 따져 항복하게 만드는 것이겠지.

 아정한 도련님에게도 말 못 할 고심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었다. 홍중을 향한 동경도 결국 그 고심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니 말이다. 제아무리 총명한 도련님이라도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제약이 많았다. 숨만 쉬어도 소문은 삽시간으로 퍼지니 말을 아껴야 하고, 제 아비와 가문을 노리는 이들이 많으니 언제나 빈틈을 보여서도 아니 되었다.

 아마 그의 하인이 걱정하는 것도 그런 부분이었을 것이다. 점점 소년의 티를 벗고 사내의 기색을 갖추어 가는 제 어린 주인이 점점 야위어만 가는 것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이였기 때문이었다. 늘 끙끙 앓았다. 바깥에서는 굳건하게 행동하면서 방으로 돌아가면 늘 축 늘어져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잠이 드는 밤이 대부분이었다.


 “저 하늘을 나르는 새들은 드넓은 바다도 보았을까?”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누가 그러더구나. 바다는 참으로 신비로운 곳이라고. 그 어떤 복잡한 마음도 그 앞에서 서면 말끔히 잊혀진다고. 드넓다 못해 웅장하여 내 모든 부정을 다 버리고도 푸른색이라 이내 평안에 이른다고.”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화성에서는 바다를 볼 수 없다. 기껏 해봐야 강줄기. 그런 곳에서 성화는 생각했다. 바다를 보게 된다면 제가 홍중을 바라보는 기분과 무게가 같지 않을까 하고. 푸르게 살아가는 이, 그 마음의 너비가 크다 못해 웅장하여 겨우 세속적인 방법으로밖에 도울 수가 없는 이, 신비로운 이.

 그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닿고 싶었다. 성화는 제가 가는 길목에 고즈넉이 피어난 자목련을 바라보며 그이를 떠올렸다.

 썩 닮아 있구나.


 “이리 곱게 피어나면서 무어가 급해 일찍 지는지, 아쉽구나.”

 “목련 말이어요?”

 “응. 조금만 더 오래 피어있다 가면 좋을 것을.”

 “찰나같이 느껴져서 더 고운 것이지 않을까요?”


 언제나 아쉬울 때 지는 것이 더욱 마음이 아프다고 하질 않습니까. 성화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허니 더욱이 기다려지는 것이겠지. 보고 싶구나. 아직 지지도 않은 꽃이, 벌써부터 그리워.

 종놈은 성화가 부러 누구를 두고 말하는 것인지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도련님, 이제 곧 해가 질 것이어요.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래, 돌아가자꾸나.



*



 생각하면 할수록 분했다. 돈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들에게도 약탈의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픈 마음이 가장 컸다. 성화가 그들에게 금붙이를 던진 그 순간부터 홍중이 한 짓은 더 이상 도적질이 아니게 된 것이었다. 겨우 값을 주고 되찾은 꼴이 되어버렸다. 제 행동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고상한 도련님이 할 수 있는 게 겨우 그것뿐이었다는 걸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때 자신도 그렇게 행동하던 때가 분명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건 개인의 일일 때에나 해당하는 문제였다.

 박 성화가 한 짓은 결코 홍중을 구한 일이 아니었다. 과장을 보태어, 목숨을 걸고 하는 일에 오지랖을 끼얹은 일이다. 그러니 기분이 유쾌할 리가.

 물건을 제 주인에게 돌려주기는 했다. 가난하지는 않으나 입이 많은 집이라 늘 허덕이는 집안에 겨우 한 점 남은 보물이라더라. 어찌나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던지, 원래라면 그 인사가 보람으로 치환되어 홍중을 기쁘게 했겠지만, 이번만은 그러지 못했다. 찜찜하잖아. 해서 홍중은 어른들 뒤에 숨어 인사하던 작은 아이를 향해 말을 얹을 뿐이었다. 얼른 자라서 가족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소녀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가족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다시 목구멍으로 삼켰다.

 역설이었다.

 자신은 가족이라 불리는 이들을 등졌음에도.

 마을과는 동떨어진 허름한 집 한 채, 홍중은 미처 돌려주지 못한 것들을 구석에 두곤 대청에 드러누웠다.

 햇살이 따스했다. 이제 진짜 봄이 오긴 한 모양이네. 홍중은 봄을 싫어했다. 그 이유는 보다 복잡했다.

 화성은 매년 봄이 되면 신분과 성별을 불문하고 모두 공평한 조건에서 급제할 수 있는 시험이 성대하게 열렸다. 합격점에 든 이들 중에서도 성적이 월등히 높은 이들에게는 본성으로 들어갈 기회까지 주어지는지라 글자를 아는 이라면 일단 치르고 보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돈을 들여가며 공부를 하는 양반집과 어렵사리 책을 얻어 공부하는 평민의 성적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해서 양반집 귀한 자식들이 급제하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일이었다.

 홍중도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것 또한 제 아비가 받아드는 수많은 뇌물을 마주하기 전까지의 일이다.

 홍중의 집안은 대대로 문신인지라 제 아비 또한 그 시험의 시험관으로 자리했다. 해서 불합리하다 따져 물었더니 그는 변명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어떠한 첨언 없이 겨우 따귀질이나 할 뿐이었다.

 처음엔 원망이었다. 중대사에 먹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부조리에 제 아비가 일조하고 있으며, 결국엔 정의를 반하는 일이라 나라가 아비를 벌하리라 생각했다. 작은 아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딱 거기까지였다. 이제는 안다. 제 아비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평등이라는 말을 앞세우면서도 이내 양반들의 농간이라는 것을, 희망을 가지고 시험을 치르는 이들을 처참히 짓밟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다 알게 된 홍중은 망설이지 않고 집을 나왔다.

 그런 이유였다. 홍중은 양반이었음에도 양반을 증오했다. 그들은 한 없이 이기적이니까.


 “박 성화도 똑같아, 똑같은 양반 놈일 뿐이야…….”


 헌데 왜 자꾸 다르다고 믿고 싶어질까. 어째서 똑같은 양반 놈이라 말하니 가슴이 메어오는 것일까.


-


 달이 드높게 떴다. 그 무엇도 하지 않고 해가 기우는 것만을 멍하니 바라봤다. 세상이 모두 잠들었는데, 홍중만이 이 밤을 지키고 있었다. 언제까지 도적질만 하고 살 수 있을까. 대의라고 생각하며 몇 년을 도적질하며 살았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만은 없으니, 이젠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두운 밤을 환히 밝히는 저 달은 그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에 대하여 긍정적인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일까? 웃겼다. 이런 생각 하나 나눌 사람이 없어 닿을 수 없이 먼 곳에 있는 것에 의지하다니.


 “혼란하구나. 외롭고, 외로와.”


 홀로 중얼거리는 홍중의 곁으로 개똥벌레 하나가 날아들었다. 반짝반짝 빛을 내며 그의 곁을 맴돌았다.


 “내가 외로운 줄은 어찌 알고 왔어? 하긴, 외로움의 냄새는 보다 빠르게 퍼지니까.”


 곁을 나르는 하나의 빛이 어느 샌가 하나 둘씩 더 날아들었다. 처음엔 아주 작았던 빛이 스멀스멀 몸집을 불렸다. 홍중이 제 집 주변이 환해졌다는 걸 깨달은 건 그 이후였다. 희미한 빛이더라도 모이니 제법 달빛만 하구나.


 “가만, 작고 희미하던 것이, 달빛만 해졌다라…….”


 홍중은 제 얼굴에 난, 성화가 쓰다듬었던 그 흉을 따라 손가락을 놀렸다. 언제 그어진 상처였더라. 당시엔 적폐적 행위를 한 양반집만 턴다는 소문이 돌기도 전이라 약을 얻지도 못했던 때였지. 그래, 평민의 편도 양반의 편도 아니었을 그때였다. 아마 그때 확실히 정했었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민의 편에 서겠다고. 이 더러운 피를 부정하는 한이 있더라도, 제 신분을 모두 버리고 그저 아무개가 되더라도 그 결심을 잊지 않겠다고.

 응집된 시간들이 어쩌면 이미 지금의 고민에 대한 답을 내려주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동안 흔들린 적 없는 신념, 지금이라고 다를까.

 망망대해를 그저 떠 있기만 하던 돛의 방향이 정해졌다.

 닻을 올리고, 돛을 펼친다.


-


 그렇게 마주치고 며칠 동안이나 성화는 홍중을 보지 못했다. 적어도 하루 한 번 꼴은 그가 양반집을 털었다는 소식이 들려와야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성화가 부러 홍중으로 보러 저잣거리에 나왔음에도 그의 모습은 도통 보이질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이 되다가도 슬슬 저를 종용해오는 아비 탓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를 만났을 때엔 자목련이 만개해 있었는데, 이젠 그들은 흙의 거름이 되었다. 또한 성화의 안달남도 그것들을 거름 삼아 점점 자라기 시작했다.

 보고 싶다.

 해가 뜨고 달이 진다. 그 횟수보다도 성화는 홍중을 떠올렸다. 그 불퉁한 얼굴이 지금은 어떤 곳에서 어떤 모양을 한 채일까.

 당장은 아무런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가문을 등지고 마을을 떠난 이후 어디에 자리를 잡았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으니 물어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러게 생각해보니 아는 것이 없다. 성화가 아는 홍중은 김가의 홍중, 저보다 두 해 먼저 태어났고, 틀에 박힌 글자를 익히기보단 글자들을 모아 이야기를 만들어 가락을 붙이는 것에 능한 양반댁 막내 도령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동안 수없이 마주친 것 같은데, 사소한 것 하나 물어보질 못했구나.

 참견만 해온 것이야.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겝니까.”


 나는 당신을 어떤 곳으로부터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냔 말입니다.

그 이후로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단순한 우발적인 사건으로 멎어가고 있었다. 김 홍중의 존재가, 그가 이루고자 했던 이념도. 이후로 그에 대해 말을 얹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계획은 성공도, 실패도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던 혼란, 그뿐이었다.



*



 봄이 깊어졌다. 구름이 적당히 하늘을 유영하고 있었고, 화성의 이름에 걸맞게 길목마다 꽃이 만개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성화는 그런 길을 거닐었다.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이를 기다린 채였다. 언젠간 돌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다림에 대한 결정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우직한 면이 있었다. 결정의 번복 따위는 그에게 있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다. 지독히도 달콤한 봄 바람. 바람 한 번에 나르는 꽃잎들 탓에 그들의 생김새가 모두 생경했다. 저 바람은 어디로 향하는가. 어쩌면 그에게도 닿고 있을까. 성화는 홍중이 돌아오지 않은 지 나흘이 되던 때부터 그가 곧잘 하던 것들을 제 일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얌전한 양반집 도련님이 허공에 넋을 맡긴 채로 가락을 흥얼거린다는 소문은 이제 화성에 파다했다. 그에 양반댁 주인은 제 아들을 꾸짖기도 했으나, 달라짐은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성화의 유일한 숨구멍과도 같은 것일 테니까. 그런 시간을 쌓다 보니 성화는 홍중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원념을, 근심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의 뭉텅이를 당신을 이리 풀어왔습니까. 지금은 만날 수도 없는 이가 과거에 흘렸을 눈물을 닦아주고픈 심정이었다.


 “지금은 홀로 울고 있지 않습니까. 허면 내가 그 눈물을 훔쳐주고만 싶은데.”


 그대 닮은 저 꽃잎들이 이젠 힘을 다해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놓고 저를 태어나게 했던 흙으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당신은 대체 어디서 무얼 하느라 나타나지 않는 겝니까. 성화는 바람을 만들었다. 한숨과 연심으로.

 참으로 한갓지다. 거리도 여전했다. 꽃가루가 난장을 치고, 엿장수의 소리가 야단이었다.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화전의 기름내가 빈 거리를 섭섭지 않게 했고, 창포에 멱을 감는 소리가 그 틈새를 비집었다.


 “성화 도련님, 오늘은 거리로 나서지 않으십니까?”

 “오늘은 왜인지 시끌벅적한 거리로 나갔다가는 외톨이 신세라 놀림을 받을까 두려워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구나.”

 “에이 농도 심하셔요. 누가 도련님을 그리 본다 그러세요.”

 “내가.”

 “예?”

 “내가 그리 본다고, 나를.”


 그게 제일 무서운 법이야.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이 스스로의 외로움을 마주했을 때. 그것만큼이나 마음이 저물어 가는 기분이 또 있을까. 성화의 말은 아리송했다. 두루뭉술하고 추상적이었다. 그러나 분명 이해할 수 있었다.


 “도련님.”

 “어찌 부르느냐.”

 “쇤네, 도련님이 세상에 나실 때부터 쭉 도련님을 모셔오면서 언젠간 올 순간이겠지 하던 그 순간에 이젠 도착한 기분입니다.”

 “어떤 기분이기에?”

 “이젠 도련님께서 진정한 어른으로 향하고 계시는구나, 어쩌면 이제 나의 보살핌에서 떠나 더 큰 세상을 바라보시겠구나, 뭐 그런 기분 말입니다.”

 “섭하느냐?”

 “예, 섭하지요. 감히 말씀드리온데, 도련님은 핏줄 하나 없는 쇤네에겐 손주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영감은 억울하지 않아?”

 “무엇이 말입니까?”

 “이 집안에 묶여 있느라, 혼기도 놓치고 번듯한 가정 하나 만들지 못했잖아.”


 억울하겠지. 성화는 생각했다. 양반의 횡포가 아니었다면 이 사람이 과연 제 옆에 있을 수 있었을까. 경거망동하고 쓸데없이 감성적이기나 한 자상하고 따스한 인간. 신분을 막론하고 이런 좋은 사람이 그저 한 사람의 종으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이 나라가 말하고픈 이치라는 것일까? 자유, 입에 담기에도 무거운 말이었다.

 헌데 어째서 제 입엔 한 없이도 가볍게 씹히는가.

 어째서 이 사람에겐 무거운 말이 제게로 돌아오면 가벼운 말이 되는가.


 “변화라는 건, 수많은 희생이 필요하겠지.”

 “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영감만큼은 내가 지켜줄 테니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차갑기만 했던 어느 도령의 언어에 슬그머니 온기가 퍼져가고 있었다. 본인은 그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겠지만, 그의 옆에 늘 붙어있는 이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부끄러운 듯 눈을 피하는 제 주인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정확히 삼십 일이다. 홍중이 이 거리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

 그 사이에 성화는 모든 걸 정리하고 변화해내고 있었다.

 단 하나의 신념을 위해.

 단 하나의 마음을 위해.


-


 붉은 피가 남은 땅에는 반드시 새로운 피가 자라난다. 새로운 피는 자라 새로운 마음으로 자랄 것이며, 그 마음들이 모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리라. 홍중은 바람의 방향을 바꿀 채비를 하고 있었다. 치렁치렁하게 늘어져 있던 머리칼은 잔뜩 세운 날로 잘라버렸다. 외성에서 들여온 물건들을 허리춤에 매달고, 짧게 잘린 머리는 새카만 천을 이마에 둘러 걸리적거리지 않게 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젠 꽃은 지고 불꽃이 필 때야.



*



 성화는 땅을 가르는 파열음에 놀라 잠에서 뱉어졌다. 귀에는 찢어지는 이명이 비명을 질렀다. 그는 옷가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다급히 방문을 열어젖혔다. 분명 달이 뜬 하늘과 눈을 마주했음에도 주위가 낮만큼이나 환히 빛나고 있었다.


 “도련님!”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째서? 어째서 한 것이 없음에도 구역질이 절로 올라오는 것인가.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았다.


 “도망치세요!”


 영감?

 봄은 끝났다. 그걸 어찌 아느냐고?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지는 조금 전 낮까지만 해도 저를 손자 같다며 이젠 어른이 된 것 같아 섭하다던 그를 보며 성화는 처음으로 상실을 경험했다. 먼 곳에서 또 다른 파열음이 들려왔다.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는 그런 순간에도 제 신분을 앞세워 무고한 이들을 난도질했다.

 비틀대는 걸음으로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한 이에게 다가가, 그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역겨운 꾸짖음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곱고 따스한 말 대신 죽음을 울컥 뱉어내는 이에게만 그의 감각이 집중되었다.


 “영감…….”


 흐느꼈다.


 “영감, 가지 마…….”


 내가 지켜준다 약조했잖아. 내가 당신만은 자유롭게 할 것이라 다짐했는데, 어찌 이리 가. 곧이어 포효였다. 겨우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은 마음은 무참히 짓밟혔다. 하이얀 천은 천박하다 분류된 이의 흔적으로 물들어 간다.

 암전.

 성화의 절망으로 뒤덮혀있던 공간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바로 근처에서 터져버린 폭탄에 모두가 마당에 나뒹굴었다. 그만이 여전히 절망을 끌어안은 채였다. 흐르는 눈물은 분노와 혐오를 가득 품고 있었다. 바닥에서 소리나 질러대는 저 파렴치한을 가만히 둘 수는 없을 것 같아 아무런 검이나 쥐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했다. 민날을 들어 서려는 찰나에 꽃잎이 흩날렸다.

 꽃잎이 날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기와에 앉아 모든 장면을 내려다보는 이와 마주한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성화는 그의 입모양은 선명히 보았다.

 ‘기다려.’

 지독하게 향기로운 꽃잎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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